그녀는대공이 스포츠와 경마에 정통하므로 그 속임수를 곧 알아챌테고, 루 게임에서 속이는 행위는 더없이 가증스러운 범죄이고 그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인간사회에서 열대의 원숭이사회로 영원히 추방되었으므로, 그가 남자답게 그녀와 더 이상 상종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다정한 귀족의 단순함을 잘못 판단했다. 그는 파리들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죽은 파리나 살아 있는 파리나 똑같아 보였다. 그녀는 그 속임수를 스무 번 정도썼고, 그는 1만 7,250파운드(현재 화폐로는 대략 4만 885 파운드 6실링 8페니)가 넘는 돈을 그녀에게 지불했다. 그러다결국 올랜도가 너무나 지독히 속이는 바람에 그도 더 이상은속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가 사실을 깨달았을 때, 보기 괴로운 장면이 펼쳐졌다. 대공은 몸을 쭉 펴고 일어섰다. 얼굴은시뻘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물이 방울방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가 자기에게서 큰돈을 가로챘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마음대로 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속였다는 사실은 중요했고,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P189

이런 견해를 가진 일부 철학자들과 현자들이 있지만, 대개우리는 다른 관점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양성 간의 차이란 다행히도 매우 심원한 것이다. 의상은 그 아래 깊이 숨어
것의 상징에 불과하다. 올랜도로 하여금 여자의 옷과여자의 성을 선택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은 그녀의 내면에서일어난 변화였다. 어쩌면 여기서 그녀는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지만 명백히 표현되지 않는 것을 유난히 솔직하게 --솔직함은 실로 그녀의 천성이었다ㅡ 표현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또다시 우리는 진퇴양난에빠지게 된다. 양성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뒤섞여 있다. 어느 인간에게서나 한 성에서 다른 성으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남성이나 여성의 모습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오로지의상밖에 없으며, 성의 밑바닥에는 위에 있는 것의 정반대가존재한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일어나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문제는 누구나 경험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일반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올랜도라는 특정 인물의 경우에 그것이 미친 특이한 영향만 주목하겠다. - P195

강아지들은 꼬리를 흔들고 앞다리를 숙이고 뒷다리를 들어 올리며 구르고 뛰어오르고 발로 긁고 낑낑거리고 짖어 대고 침을 흘린다. 또 자기들 나름대로정중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재주를 부리지만,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전부 다 소용이 없다. 자신이 알링턴 하우스훌륭한 사람들과 벌인 말다툼도 그랬다고, 그녀는 강아지를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그들 역시 꼬리를 흔들고 숙이고 구르고 뛰어오르고 발로 긁고 침을 흘리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사교계에 나간 이 몇 달 동안……」올랜도는 스타킹 한 짝을 방구석에 내던지며 말했다. 내가들은 말이라곤 그저 피핀이 했을 법한 말이었어. 난 추워요.
난 행복해요. 난 배가 고파요. 난 쥐를 잡았어요. 난 뼈를 묻었어요. 내 코에 키스해 줘요.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않았다. - P202

한시간도채 지나지 않은 바로 얼마 전에 몰아친 것과 같은 지독한 환멸을 맛보게 되면 마음은 좌우로 흔들린다. 모든 것이 전보다 열 배는 더 황량하고 삭막하게 보인다. 인간의 영혼에 가장 큰 위험이 적재되는 순간이다. 그런 순간에 여자들은 수녀가 되고, 남자들은 성직자가 된다. 그런 순간에 부자들은자기 전 재산을 양도하는 증서에 서명하고, 행복한 남자들은조각칼로 자기 목을 긋는다. 올랜도는 기꺼이 이런 일들을했겠지만 그보다 더 경솔한 일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녀가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기 집으로 포프 씨를 초대한 것이다.
무장하지 않은 채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이 경솔한 일이라면, 노 젓는 배로 대서양을 항해하는 것이 경솔한 일이라면,
세인트폴 성당 꼭대기에 한 발로 서 있는 것이 경솔한 일이라면, 시인과 단둘이 집에 가는 것은 더더욱 경솔한 일이다.
시인은 대서양인 동시에 사자이다. 대서양은 우리를 익사시키고, 사자는 우리를 물어뜯는다. 설령 우리가 사자의 이빨을 견디고 살아난다 해도 파도엔 굴복할 수밖에 없다. 환상을 부숴 버릴 수 있는 남자는 짐승이자 밀물이다. 영혼에 환상이란 지구를 둘러싼 대기와 같다.  - P209

다시 어둠 속에 들어서자 시인의 무릎밖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분노는 당장 사그라졌다.
<하지만 가여운 사람은 바로 나야.> 다시 완전히 깜깜한 곳에 들어서자 그녀는 생각했다. <당신이 아무리 비천한 인간일지라도 나야말로 더 비천하지 않을까? 나를 감싸고 보호하는 것은 당신이고, 야수를 겁주고 야만인들을 위협하고 내게누에 실로 만든 옷과 양털로 만든 카펫을 만들어 준 것도 당신이지. 내가 숭배할 대상을 원하면, 당신은 자신의 이미지를 내게 제공하고 그것을 하늘 높이 박아 놓지 않았던가? 당신이 보살펴 주고 있다는 증거가 도처에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나는 아주 겸손하게 고마워하며 고분고분해야 하지 않을까? 당신에게 봉사하고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내 모든기쁨이 되게 하라.> - P212

하지만 앞 문단을 근거로 판단해서 천재성이(그러나 천재병이라는 이 질병은 이제 영국 제도에서 뿌리 뽑히고 말았다.
세평에 의하면, 작고한 테니슨 경이 그 질병을 앓은 마지막인물이다) 한결같이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매 순간 만물을 명료하게 봐야 하고, 어쩌면 그 과정에서 불에 타 죽을지 모른다. 오히려 천재성이란 광선을 한 번 내쏜 다음 한동안 빛을 발하지 않는 등대와 비슷하다. 다만 천재성은 등대처럼 규칙적이지 않아서,
(포프 씨가 그날 밤에 그랬듯이) 예닐곱 번의 광선을 재빨리연속적으로 쏘아 대고는 1년간 혹은 영원토록 암흑 속에 묻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광선을 믿고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천재들은 암흑기에 빠져 있을 때 보통 사람들과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 P214

우리는 그 신사의 삼각모와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 다시 한번 수정을 들여다보자. 그가 신은 양말의 주름까지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가? 그의 기지가 일으킨 온갖 파문과 굴곡, 그의 온화함과 소심함, 그의 세련미, 그가 어느 백작 부인과 결혼할 것이며 결국은 아주 품위 있게 죽으리라는사실이 우리 앞에 훤히 드러나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명료하다. 애디슨 씨가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때맹렬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제멋대로 행동하곤했던 스위프트 씨가 예고도 없이 들어왔다. 잠깐만, ‘걸리버여행기』가 어디 있더라? 여기 있다! 휴이넘의 땅으로 항해하는 문단을 읽어 보자.
<나는 완벽하게 건강한 신체와 평화로운 마음을 누렸다.
친구의 배신이나 변덕을 보지 못했고, 은밀한 적이나 공공연한 적의 침해 행위도 보지 못했다. 나는 어떤 위대한 인간이나 그의 충신에게 호감을 사려고 뇌물을 주거나 아부하거나매춘을 알선할 필요가 없었다.  - P217

4월 초의 맑은 밤이었다. 초승달과 어우러진 수많은 별빛에 가로등 불빛이 더해져, 사람들의 얼굴과 렌 씨의 건축물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물의 형체가한없이 부드럽게 보였는데, 만물이 막 용해되려는 듯한 순간에 은방울 같은 것이 떨어지자 선명해지고 활기를 띠었다.
대화도 그래야 한다고 올랜도는 엉뚱한 공상에 빠지면서)생각했다. 사회는 이래야 하고, 우정은 이래야 하고, 사랑은이래야 한다.  - P222

그녀는 품위 있는 바지와 유혹적인 속치마를 번갈아 입었고, 양성의 사랑을똑같이 누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을 구별하기 어려운 중국식 가운을 걸치고 쌓인 책들 사이에서 오전 시간을 보내는 그녀의 모습을그려 볼 수 있다. 그 차림새로 그녀는 의뢰인 한두 명을 맞이했고(그녀에게는 수십 명의 탄원자가 있었으므로), 그러고는 정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 개암나무 가지를 잘랐는데, 그런 일에는 반바지가 편했다. 그런 다음에 그녀는 마차를 타고 리치먼드로 달렸고 신분 높은 귀족에게서 청혼을 받는 데가장 적합한 꽃무늬 견직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다시런던 시내로 가서는 변호사의 옷 같은 황갈색 가운을 입고법원에 가서 자신의 소송 사건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를알아보았다. 그녀의 재산은 매 시간 줄어들고 있었는데, 그사건은 1백 년 전보다 조금도 마무리 단계에 가까워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다음 마침내 밤이 되면 그녀는 종종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귀족 청년 차림으로 모험을 찾아 거리를 헤맸다. - P228

그 순간 올랜도는 세인트 폴 성당의 둥근 지붕 뒤에 모인 작은 구름을 처음 보았다. 종소리가 울리면서 그 구름은 점점 커졌고, 놀랍게도 재빨리 시커메지면서 퍼져 나갔다. 동시에 산들바람이 일었고, 여섯 번째 종소리가 울렸을 때는 동쪽하늘 전체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어두운 구름에 뒤덮였다. 하지만 서쪽과 북쪽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그러더니 구름이 북쪽으로 퍼져 나갔다. 도시너머의 언덕과 산들이 구름에 완전히 에워싸였다. 불빛이 빛나고 있던 메이페어만 대조적으로 더욱 휘황찬란하게 타올랐다. 여덟 번째 종소리가 울렸을 때는 찢어진 구름 조각들이 급히 피커딜리 너머로뻗어 나갔다. 그 구름들은 모여들면서 급속히 서쪽 끝자락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았다. 아홉번째와 열 번째, 열한번째 종소리가 울렸을 때, 어마어마한어둠이 런던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열두 번째 종소리가 울리자 어둠이 완벽하게 내려앉았다 사납게 요동치는 어마어마한 구름이 런던을 덮어 버렸다. 사방이 깜깜했다. 사방이의혹이었다. 사방이 혼란이었다. 18세기가 끝나고, 19세기가시작된 것이다. - P232

영국의 기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듯했다. 비가 자주 내렸는데, 변덕스럽게 몰아치는 바람에 실려 온 까닭에 비가 그쳤다 싶으면 다시 시작했다. 물론 태양이 빛날 때도 있지만 구름에 둘러싸여 있었고, 공기는 물기를 흠뻑 머금고 있어서 광선이 퇴색했다. 칙칙한 자주색과오렌지색, 붉은색이 18세기의 보다 선명한 풍경을 대신했다.
멍들고 음침한 하늘 아래서 양배추의 초록색은 예전처럼 선명하지 않았고, 눈의 흰색은 희끄무레했다. 하지만 그보다더 고약한 일은, 이제 어느 집에나 습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햇빛은 블라인드로 차단할 수 있고 서리는뜨거운 난롯불로 말릴 수 있지만, 습기는 우리가 자는 동안에도 몰래 스며들기 때문에 가장 음험한 적이다. - P233

이처럼, 어느 누구도 변화가 일어난 날이나 시간을 꼭 집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은밀히 눈에 보이지 않게 영국의체제가 변했고,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도처에서 그 영향이 느껴졌다. 고전적 품위를 갖추도록 애덤 형제‘가 설계했을 방에서 맥주와 쇠고기를 먹으려고 즐거운 마음으로 식탁에 앉은 강인한 시골 신사는 이제 방 안에 스며드는 냉기를 느꼈다. 그래서 양탄자가 등장했고, 턱수염을 길렀고, 바지를 발등 밑으로 단단히 조였다. 그 시골 신사는 자기 다리에 도는 한기를 이내 자기 집에도 이입했다. 그래서 모든 가구에 덮개를 씌우고 벽과 탁자를 덮어서, 덮이지 않은 것이없었다. 그다음에 음식의 변화는 필수적이었다. 따뜻하게 먹는 머핀이 나오고 크럼펫이 나왔다. 정찬 후의 포트와인은커피로 대체되었다.  - P234

아이들이 태어난 침실에 스며들어간 빛은 당연히 혼탁한 녹색이었고, 어른 남녀가 지내는응접실에 스며든 빛은 갈색과 자주색 벨벳 커튼을 통해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외적인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습기는 내부를 공격했다. 사람들은 가슴속에서 냉기를 느꼈고마음속의 습기를 느꼈다. 자신들의 감정을 어떤 따뜻한 것에감싸 보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그들은 잔꾀를 하나씩 부리기 시작했다. 사랑과 탄생, 죽음은 온갖 멋진 문구에 감싸였다. 남성과 여성은 점점 더 멀리 떨어져 나갔다. 솔직한 대화는 절대로 용인되지 않았다. 양성 모두 얼버무리고 은폐하는데 공을 들였다. 바깥의 축축한 땅에서 담쟁이덩굴과 상록수가 무성하게 자라듯이 안에서도 생식력이 왕성해졌다. 평범한 여자의 일생은 출산의 연속이었다. 열아홉 살에 결혼해서서른살쯤이면 열다섯이나 열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 쌍둥이가 많이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국 제국이 탄생하게되었다. 그리하여 ㅡ 습기를 막을 길이 없었다.  - P235

그는 지상의 어떤 불도 방대하게 뻗어 나간 저 거추장스러운초목을 태워 버릴 요량을 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디를 돌아보아도 걷잡을 수 없이 자란 식물들뿐이었다. 오이줄기들이 <풀밭을 가로질러 뒹굴며 그의 발치까지 뻗어 왔다. 거대한 꽃양배추가 층층이 솟아올라, 그의 혼란스러운상상력에는, 느릅나무와 경쟁하는 듯했다. 암탉들이 쉴 새없이 뚜렷한 색깔이 없는 달걀을 낳았다. 그는 자신의 생식력과 지금 실내에서 열다섯 번째 출산의 진통을 겪고 있는가여운 아내 제인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고, 자신이 어떻게가금을 탓할 수 있겠느냐고 자문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국 그 자체도 아니 천국의 방대한 현관인 하늘도, 실로 천사들의 동의를, 부추김을 보여 주지 않았던가?  - P236

영국 전역에서 이런 상황이 전개되는 동안, 올랜도는 아무문제 없이 블랙프라이어스의 자기 집에 파묻혀 지냈다. 그녀는 기후가 달라지지 않은 척하면서, 사람들이 아직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기분 내키는대로 반바지를 입거나 스커트를 입을 수 있다는 듯이 행동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도 시대가 달라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세기 초의 어느 날 오후에 그녀가 장식 판자로 꾸민 자신의 구식 마차를 타고 세인트제임스 파크를 드라이브하고 있을 때, 종종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쩌다 간신히 땅에 도달한빛줄기가 내려오면서 몸부림치다가 기묘하게도 무지갯빛 색깔구름에 무늬를 넣었다. 18세기의 한결같이 맑은 하늘을보다가 그런 광경을 보게 되자 너무나 신기해서 그녀는 창문을 내리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 P237

그녀는 우울한 소년이었고, 소년들이 대개 그렇듯 죽음을 사랑했다. 그러고 나서는 혈기 왕성하고 호색적인 청년이었다. 그다음에는 활기차고 풍자적이었다. 그녀는 때로 산문을 시도해 보았고, 때로는 희곡을 써보았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겪으면서도 자신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예전과 똑같이 우울한 사색에 잠기는 기질을 갖고 있었고,똑같이 동물과 자연을 사랑했고, 똑같이 시골과 계절을 열정적으로 찬미했다.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집과 정원은 예전에 있던 그대로야. 의자 하나 옮기지 않았고, 장신구 하나도 팔지 않았어.
똑같은 산책로와 똑같은 잔디밭, 똑같은 나무들, 똑같은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는 똑같은 잉어가 살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지. 물론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니라 빅토리아 여왕이 왕좌에 있지만, 그렇다고 무슨 차이가…….〉 - P243

다음 날 아침에 펜을들어 글을 쓰려 했을 때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펜이 눈물을 글썽이듯 커다란 얼룩을 하나씩 만들어 냈다. 그러지않으면 펜은 더욱 놀랍게도 때 이른 죽음과 타락에 관한 감미롭고 유창한 글을 느긋하게 써내려 갔는데, 그것은 생각을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더 고약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그녀의 경우가 입증했듯이 ㅡ 쓰는 듯하기 때문이다. 펜을 조절하는 신경은우리 몸의 모든 조직을 휘감고, 심장을 누비고, 간을 헤치고나아간다. 통증이 일어난 부위는 왼손 같았지만, 그녀는 온몸이 구석구석 감염되었음을 느꼈다. 결국 그녀는 필사적으로 치유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시대정신에완전히 고분고분하게 순종하여 남편을 얻는 것이었다. - P249

이렇게 저렇게 그녀의 옛친구들은 모두 떠나 버렸고, 드루리 레인의 넬과 키트 같은여자들이 더 좋기는 했지만 기대기에는 적합지 않았다.
그녀는 창틀 위에 무릎 꿇고 앉아서 두 손을 움켜쥐고 실제로 그렇듯 호소하는 여인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빙빙 돌아가는 구름에 눈길을 던지며 물었다. 내가 누구에게 기댈 수있을까?」 그녀의 펜이 스스로 글을 썼듯이 이런 말이 저절로흘러나왔고, 양손이 저절로 쥐어졌다. 그 말을 한 것은 올랜도가 아니라 시대정신이었다. 그러나 누가 물었든 간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떼까마귀들이 보랏빛 가을 구름 사이에서 허둥지둥 공중제비를 넘었다. 마침내 비가 그쳤고, 하늘에 무지갯빛이 떠올라 그녀는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끈 달린 작은 신발을 신은 뒤 저녁 식사 전에 산책을 해야겠다고생각했다. - P253

다시 말해서 그녀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파도 위에 서린 푸른 인광을 보았고, 돛대 밧줄에 매달려 쨍그랑거리는 고드름을 보았다. 그가 돌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돛대꼭대기에 올라가서 인간의 운명에 대해 숙고하고, 다시 내려오고, 소다수 넣은 위스키를 마시고, 뭍으로 올라가고, 어떤흑인 여자의 함정에 빠지고, 후회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파스칼을 읽고, 철학서를 쓰기로 결심하고, 원숭이 한 마리를 사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 토론하고, 혼곶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 등등을 보았다. 그가 들려준 이 모든 것과 수천 가지 다른 것도 이해했다.  - P265

그녀는 몸을 굽혀 어떤 사람에게는 바로 그 단어를 뜻하는 가을 크로커스 한 송이를꺾어, 너도밤나무 숲 사이로 푸른빛을 내며 굴러떨어진 어치깃털과 함께 가슴에 꽂았다. 그러고 나선 소리쳤다. 다인 그 소리는 숲속에서 이리저리 튀어나가, 풀밭에서 달팽이 껍데기로 모형을 만들며 앉아 있던 그에게 가서 부딪혔다.
그는 그녀를 보았고, 크로커스와 어치 깃털을 가슴에 달고다가오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었고, <올랜도!>라고 외쳤다.
그 말은(파란색과 노란색처럼 밝은 색깔들이 우리의 눈에서혼합될 때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우리의 생각을 물들인다는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선 무언가 뚫고 나가는 듯 휘어지고 흔들리는 고사리를 뜻했는데, 그것은 돛을 활짝 펼치고약간 꿈꾸듯이 들썩거리며 흔들리는 배라는 것이 드러났다. - P267

채색된 창문을 통해 빛과 그림자가 허겁지겁 날아 들어와 그들의 얼굴은 환히 빛났다가 어두워졌다. 수많은 문들이 탕탕거리고 놋쇠 냄비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오르간이울렸고, 우르르 울리는 오르간 소리는 번갈아가며 커졌다가작아졌다. 몹시 늙은 더퍼 씨가 그 요란한 소음보다 더 큰 소리를 내려고 애썼지만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한순간 사방이 고요해졌고, 한 구절이 - 아마 <죽음의 손아귀였을 것이다 ㅡ 또렷이 울려 퍼졌다. 그동안 장원의 모든하인들은 갈퀴와 채찍을 손에 든 채 몰려들어 귀를 기울였고,
누군가는 노래를 불렀고 다른 이들은 기도했다. 새 한 마리가 판유리에 부딪히기도 하고 천둥소리가 울리기도 해서, 그누구도 순종하라는 말은 듣지 못했고, 손에서 손으로 건네진반지를 금빛 광채 말고는 보지 못했다. 오르간이 우렁차게울리고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그들은 일어섰다. - P270

이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것은 창밖을 내다보는 일뿐이다. 제비들이 있고, 찌르레기가 있고, 많은 비둘기와 까마귀한두 마리가 있다. 모두들 제 나름대로 무언가에 몰두하고있다. 어떤 것은 벌레를 찾고, 다른 것은 달팽이를 찾는다. 어떤 것은 퍼덕거리며 나뭇가지로 날아가고, 다른 것은 잔디밭에서 조금씩 뛰어다닌다. 그때 어떤 하인이 녹색 베이즈 앞치마를 두른 채 안뜰을 가로지른다. 아마 그는 식품 저장실의 어떤 하녀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지 모르지만, 눈에보이는 증거가 없으므로 우리는 그저 최선을 바라며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얇거나 두터운 구름이 지나가면서 그 아래잔디밭 색깔이 약간 탁해졌다. 해시계는 평소처럼 아리송하게 시간을 가리킨다. 우리의 마음은 인생에 대한 한두 가지질문을 한가하게, 헛되이 던지기 시작한다. 인생, 그것은 노래한다. 아니, 인생은 벽난로 시렁에 올려놓은 주전자처럼흥얼거린다. 인생아, 인생아, 그대는 무엇인가? 빛인가 어둠인가, 하급 하인의 베이즈 앞치마인가 아니면 풀밭에 드리워진 찌르레기의 그림자인가? - P278

인생이 무엇이냐고 우리는 농장 대문에 기대서서묻는다. 인생, 인생, 인생! 찌르레기가 외친다. 마치 우리의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다음에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는작가들이 늘 그러듯, 안팎에서 질문을 해대고 살짝 엿보고데이지 꽃을 따면서 성가시게 캐묻는 이 습관이 무슨 의미가있는지를 정확히 안다는 듯이. 그럴 때면 저들이 여기 와서인생이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 거야, 라고 새가 말한다. 인생,인생, 인생!
그러면 우리는 야생화가 만발한 황야를 터벅터벅 걸어 검붉고 푸르고 짙은 자줏빛이 어우러진 언덕의 높은 등성이에올라 털썩 몸을 던지고는 거기 누워 몽상에 빠지고, 작은 구멍 속의 자기 집으로 지푸라기를 운반하는 메뚜기 한 마리를본다. 메뚜기는 (메뚜기의 쓱싹쓱싹 소리에 그토록 성스럽고다정한 이름을 붙여 줄 수 있다면) 말한다. 인생은 노동이야. - P279

혹은 먼지에 막힌 식도에서 나오는 붕붕 소리를 우리는 그렇게 해석한다. 개미가 동의하고, 꿀벌도 동의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오래 누워 있다가, 저녁이 되어야 나타나 색깔이 흐릿해진 야생화 벨 헤더 사이에서 살금살금 움직이는 나방에게 묻는다면, 나방은 몰아치는 눈 폭풍 속에서 떨리는전신선의 거칠고 무의미한 소리를 우리의 귀에 대고 속삭일것이다. 히히, 하하. 웃어라, 웃어라! 나방이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과 새와 벌레에게 물어보았고, 수년간 녹색동굴에 홀로 살면서 물고기의 말을 들어 보려 했던 사람들의얘기로는 물고기는 결코, 절대로 말을 하지 않으므로 - P279

이 순간, 이 책을 소멸의 위기에서 구해 줄 시간에 딱 맞춰,
올랜도가 의자를 뒤로 밀었고 팔을 쭉 뻗어 펜을 내려놓고는창가에 가서 소리쳤다. 「끝났어!」그녀는 이제 눈에 와닿은 특이한 광경 때문에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정원이 있고, 새들이 있었다. 세상은 평소와 다름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그녀가 글을 쓰고 있던 동안에도 세상은 내내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죽어도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겠지!」 그녀가 소리쳤다.
이 감정이 너무도 강렬하게 밀려와서, 그녀는 해체되는 자기 몸도 상상할 수 있었다. 실제로 쓰러질 듯 현기증이 났을것이다. 그녀는 아름답고 무심한 풍경을 멍하니 응시하며 잠시 서 있었다.  - P280

그런데 어쩐지 예전의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하던 활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실로 재치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 허물없고 편안하게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내 가까운 친구 포프>나 <내 너그러운 친구 애디슨>을 2초마다 한번씩 언급한 것은 사실이지만, 점잖은 분위기가 그를 감싸서 짓눌렀다. 그는 예전처럼시인들에 관한 스캔들을 들려주기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친척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그녀에게 알려주는 것이 더 좋은 모양이었다.
왠지 모르게 올랜도는 실망했다. 그녀는 이 오랜 세월 동안(그녀의 은둔 생활과 신분, 그녀의 성이 그 핑곗거리가 되겠지만) 문학이란 바람처럼 거칠고, 불처럼 뜨겁고, 번개처럼 신속한 것이라고, 정도에서 벗어나 예측할 수 없고 돌연히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보라, 문학은 공작 부인에 대한 이야기나 늘어놓는 회색 정장 차림의 노신사였던 것이다.  - P288

「원고로군요!」 니컬러스 경이 금테 코안경을 쓰며 말했다.
「매우 흥미롭군요. 대단히 흥미로워요! 한번 읽어 보게 해주세요! 그래서 약 3백 년의 시차를 두고 니컬러스 그린은 다시 올랜도의 원고를 집어 커피 잔과 술잔들 사이에 내려놓고는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내린 판단은 과거와 판이하게 달랐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는 이 시가 애디슨의「카토」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톰슨의 사계절」과 비교해볼 때 양호했다. 현대 정신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말하면서 다행스러워했다. 진실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가슴이 명하는 바를 심사숙고함으로써 태어난 시이고, 그것은 실로 무원칙한 기벽이 넘쳐나는 시절에 매우 찾아보기 어려운자질이다. 이 시는, 물론, 당장 출판되어야 한다.
사실 올랜도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드레스의 가슴 부분에 늘 그 원고를 품고 다녔다고 말했다. 그러자니컬러스 경은 상당히 재미있어 했다. - P289

올랜도는 거리를 따라 올라갔다. 이제 그 시가 사라지고나니 - 원고를 품고 다니던 가슴이 텅 빈 듯했다ㅡ그녀는마음 내키는 대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인간 운명의 예사롭지 않은 우연에 대해 생각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지금 세인트제임스 스트리트에 있었다. 기혼 여성으로서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과거에 커피하우스가있던 곳에 지금은 레스토랑이 있었다. 햇살이 빛나고 비둘기세 마리와 잡종 테리어 한 마리, 이륜마차 두 대와 4인승 랜도 마차가 있었다. 그렇다면 인생이란 무엇일까? 이 생각이맹렬하게, 느닷없이 늙은 그린이 왠지 그 생각을 불러일으킨게 아니라면) 떠올랐다. - P290

긴 생애를 살아오면서 그녀는 주로 원고를 보아 왔다. 스펜서가 작고 읽기 힘든 필체로 쓴 거친 갈색 종이 원고도 직접 들고 보았었다. 셰익스피어와 밀턴의 원고도 본 적이 있었다. 사실 그녀는 4절판과 2절판 원고를 꽤 많이 소장하고있었는데, 그녀를 칭송하는 소네트도 종종 끼여 있었고 때로머리칼 한 타래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선명한 글씨에, 모양이 동일하고, 판지로 제본되고 얇은 종이에 인쇄되었기에 단명할 수밖에 없는 이 무수한 작은 책들은 그녀를 한없이 놀라게 했다. 반 크라운에 살 수 있고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는셰익스피어 전집이 있었다. 활자가 너무 작아서 거의 읽을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놀라운 책이었다. 작품들 - 그녀가 직접 보았거나 들어 본 적이 있던 작가들의작품과 그 밖의 더 많은 책들이 긴 선반들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늘어서 있었다. 탁자들과 의자마다 더 많은 <작품들>이 쌓여 뒹굴었다. 그녀는 한두 장 넘기다가 이것들이 종종 다른 작품에 대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 P29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젤소민아 2023-01-08 0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에서 이룬 트렌스젠더...아니 젠더트랜스라고 해야 할까요. 놀라운 소설..덕분에 다시 읽고 싶습니다!

2023-01-08 14:27   좋아요 0 | URL
놀라운 소설이예요. ㅎ~그죠. 저는 해리포터의 시작이 올랜도였구나, 싶었어요. 습한 영국의 기운이 환상성을 만드나 싶어졌다지요.
여튼 대단한 작가의 대단한 소설임은 분명해요.
 



˝타오르는 질문들˝
부끄럽게도. 마거릿 애트우드를 처음 만났다. 당연하게도 이 책에서 거론되는 많은 책들도 거의 읽지 못했고 심지어 이름조차도 ‘듣보잡‘인 작가들과 책도 넘쳐났다.
부끄러움은 나름 50년 독서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다. 마침 2023년을 맞아 생각은 많아졌고 근무 중 짬 내서 읽느라 집중은 강 건너에 있었다.
찰나에 가까운 짧은 여유들 사이에 훅~ 들어오는 물음표들, 생소하고 신선했다.
날카로운 지성의 화살 같은 질문들 덕분에 얼굴도, 머리도, 심장도 창상으로 타오를 지경이다. 특히 환경과 젠더 문제는 지금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암담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뒤로 가고 있다. 얼마쯤 가게 될지, 언제까지 가게 될지도 알지 못해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지구는 더욱 불행해질 것이다.

작가의 ˝시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는데, 레이첼 카슨의 ˝바다˝ 삼부작을 알라딘 장바구니에 넣는 걸로 책을 덮는다.



마거릿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소설가, 시인, 에세이스트, 문학비평가. 1939년 11월 18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태어났다. 시집 서클 게임(The Circle Game)」(1964)과 소설 먹을 수 있는 여자」(1969)로 이름을 알린 이래, 장르를 뛰어넘는 빼어난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대표작으로 소설 시녀 이야기 고양이 눈」 「도둑 신부」 『그레이스」와 ‘미친 아담‘ 3부작 등이 있으며, 눈먼 암살자」(2000)와『증언들」(2019)로 두 차례 부커상을 받았다. 
이 .외에도 아서 C. 클라크상, 프란츠 카프카상, 독일도서전 평화상, 미국PEN협회 평생공로상, 데이턴문학평화상 등을 수상했고,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화가, 일러스트 작가, 오페라 작사가, 극작가, 인형극 공연자로도 활동한 애트우드는 현존하는 가장 치열한 작가이자 독자로서 ‘타오르는 질문들‘을 세계에 던지고 또 답하며, 현재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다.


카슨의 바다 3부작 중 마지막 책인 『바다의 가장자리』는 1955년에나왔다. 당시 열다섯이었던 내게 이 책은 마치 내 이야기를 읽는 느낌을주었다. 이 책은 비치코밍‘에 대한 것이었고, 비치코밍은 내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 여름에 노바스코샤의 친척을 방문할 때마다펀디만의 해안을 누비며 많이 했던 일이었다. 조수웅덩이와 해안 동굴, 식물군과 불가사리와 복족류는 내가 있던 해안이나 만 건너편이나같았다. 따라서 ‘바다의 가장자리의 처음 3분의 1은 내가 본 생명체들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썰물이 바위 사이에 남기고 간 작은 웅덩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늘 그 안에 뭐가 있을지 들여다본다. - P682

이 세 권의 책에는 하나의 공통된 후렴이 있다. 찾으라. 보라. 관찰하라. 배우라. 궁금해하라. 의문을 가져라 판단하라. 레이철 카슨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바다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녀는 바다를 대할 때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새들의 생태를 관찰 - P682

했고, 새들의 삶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 발견이 『침묵의봄』을 낳았다. 대양에 대한 연구가 선행하지 않았다면 카슨이 살충제의영향을 추적할 방법들을 개발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바다 3부작이 가져다준 명성과 발판이 없었다면 아무도 그녀가 전하는 우려의메시지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고,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면 현재 독수리도, 송골매도, 결국에는 삼림 울새도 남아 있지 않았을지 모른다.
레이첼 카슨은 오늘날 환경운동의 어머니다. 인류는 그녀에게 막대한 빚을 졌다. 만약 우리 인간이 무사히 22세기를 맞게 된다면 그것은일정 부분 카슨의 덕분이다. 바다 3부작의 신판을 맞이하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다. 성자가 된 레이철 카슨이여, 그대가 지금 어디에 있든, 고맙습니다. - P683

가장 먼저 이 세월 동안 내 에세이와 조각글을 읽어주신 많은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내게 도달한 독자의 반응들에 감사한다.
내 동생이자 첫 번째 편집자인 루스 애트우드에게 감사한다. 루스는1차, 2차 잡초 제거를 맡았다. 장황함의 밭을 불굴의 정신으로 갈았고,
주체하지 못할 만큼 많은 글들을 가지치기해서 적당한 분량으로 줄였다. 그리고 루시아 시노에게 감사한다. 루시아는 원본을 찾아내고 출간 버전들을 추적하느라 고생했다. 솔직히 그 과정에서 내가 써놓고도까먹은 글들이 다수 출토됐다. 도서관들이 폐쇄된 코로나19 시국에서이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원고의 상당수를 보관하고 있는 토론토대학교 토머스 피셔 레어 도서관(Thomas Fisher Rare Book Library)도예외가 아니었다. 직무의 범위를 넘어선 도움을 아끼지 않은 사서 여러분에게도 감사한다. - P684

이 세월 동안 내가 기고했던 많은 잡지와 신문의 편집자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대서양 양편의 내 책 편집자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의 배려와 열정이 엄청난 격려가 되었다. 이 그룹에는 펭귄랜덤하우스 UK의 베키 하디, 펭귄랜덤하우스 캐나다의 루이즈 데니스와 마사카포스트너, 펭귄랜덤하우스 US의 리 부드로와 루앤 월서가 포함된다. 헤더 생스터가 이번에도 교열 담당으로 활약했다. 헤더는 미처 부화하지않은 것들을 포함해 좀벌레들을 있는 족족 잡아냈다. 제스 애트우드깁슨은 나를 나로부터 구하려 애썼다. 하지만 늘 성공하지는 못했다. - P6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없이


이제는 퇴색해가는 낡은 단어입니다.
한없이 원했습니다.
한없이 갈망했습니다.
나는 그를 한없이 사랑했습니다.

나는 인도를 따라 걸어갑니다.
고장난 무릎 때문에 조심하면서하지만 당신이 상상하는 것과 달리
나는 개뿔도 신경 쓰지 않아요.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요.
기다려요, 알게 될 거예요.

커피 반 컵을
한없이 유감스럽게도
플라스틱 뚜껑을 덮은
종이컵을 들고
단어들이 한때 의미했던 것을 기억하려 애쓰면서.

한없이.
이 말은 어떻게 사용됐나요?
한없이 사랑하는 이여.
한없이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모였습니다.
한없이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여기 모였습니다.
내가 최근에 우연히 발견한
이 잊혔던 사진첩 안에

이제는 퇴색해가는
세피아 사진들, 흑백사진들, 컬러사진들
모두가 훨씬 젊어요.
폴라로이드 사진들.
폴라로이드가 뭐죠? 갓난아이가 물어요.
10년 전 갓난아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사진을 찍으면 위에서 사진이 나온단다.

무엇의 위요?
내가 많이 접하는 어리둥절한 표정,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모였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일일이 세세히
설명하기는 너무 어려워요.
우리는 쓰레기를
신문지에 싸서 줄로 묶었단다.
신문지는 뭔데요?
이렇다니까요.

하지만 줄은 줄은 아직 있어요.
줄은 사물을 연결해요.
진주 목걸이 한 줄.
그들은 이렇게 말하겠죠.

날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제각기 빛나고, 제각기 혼자고,
제각기 가버리는 날들.
그중 일부를 종이에 적어서 서랍에 넣었어요.
이제는 퇴색한 그날들.
구슬은 수를 셀 때 사용하기 좋아요.
묵주처럼.

하지만 나는 목에 돌들을 두르고 싶지 않아요

이 거리에는 꽃이 많군요.
8월이기 때문에 이제는 시들고
먼지 않고, 낙하로 향하는 꽃들.
머지않아 국화꽃이 피겠죠.
프랑스에서는 망자의 꽃이죠.
소름 끼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저 현실일 뿐이니까.

꽃을 세세히 설명하기는 너무 어려워요.
이건 수술(stamen)인데, 남자와는 하등 관계없고요,
이건 암술(pistil)인데, 총과는 하등 관계없지요.
번역가에게 좌절을 안기는 세세한 것들일 뿐이죠.
나도 설명하느라 진땀 나고요.
이렇다니까요.
그러다 마음을 딴 데 팔아도 할 말 없어요.
말이란 게 때로 사람을 놓쳐요.

한없이 사랑하는 것들이 여기 모여 있어요.
이 닫힌 서랍 안에,
이제는 퇴색해가요. 당신이 그리워요.
여기 없는사람들, 먼저 떠난 이들이 그리워요

아직 여기 있는 이들조차 그리워요.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없이 그리워요.
나는 여러분 때문에 한없이 슬퍼요

슬픔, 그건 또 다른 단어죠.
이제는 많이 들리지 않는 말.
나는 한없이 슬퍼요.

마거릿 애트우드 ˝타오르는 질문들˝ 중에서. p 664~ 668


설사 안전하고 합법적이라 해도 낙태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어떤 여자가 불타는 토요일 밤을 보내자고 낙태를 무릅쓰겠는가. 여자들이 불법 시술을 받다가 욕실 바닥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좋아할 사람도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꾸기 위해 질문을 바꿔보자. 당신은 어떤 나라에 살고 싶은가? 개개인이 자신의 건강과 신체에 대해 자유로운 결정권을 가지는 나라? 아니면 인구의 절반만 자유롭고 다른 절반은 노예인 나라?
아기를 낳을지 말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여성은 노예나 다름없다. 국가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여성 신체의 용도를 지시할 권한을 행사하면 그렇게 된다. 남성이 처할 수 있는 유일하게 비슷한 상황은 군대에 징집되는 경우다.  - P550

그리고 국가가 아기들은 그렇게 중히 여기면서 어째서 아기를 많이낳은 여성들은 공경하지 않는 걸까? 마땅히 그들을 존중하고, 가난에서 구제해야 하지 않나? 여성들이 자기의지에 반하면서까지 국가에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면, 그들은 마땅히 노고에 대한 보상을받아야 한다. 국가가 원하는 것이 더 많은 아기인가? 그렇다면 적절한보상이 따를 경우 거기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여성들도 많을 것으로 믿는다. 출산의 보상이 보장되지 않을 때 여성은 자연법을 따르는 쪽으로 기운다. 즉, 태반이 있는 포유동물은 자원 결핍에 직면하면 유산하는 경향이 있다. - P551

하지만 국가는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면서까지 노력할 의사는 없어보인다. 대신 항상 쓰던 비열한 수법을 강화할 생각만 한다. 그 수법은여자들에게 아기 낳기를 강요하고 그 비용까지 여자들에게 떠넘기는것이다. 여자들은 지불하고, 지불하고, 또 지불한다. 아까 말했듯 노예처럼 착취당한다.
아기를 낳기로 선택하는 경우는 당연히 별개의 문제다. 아기는 생명자체가 주는 선물이다. 하지만 선물은 자유롭게 주고 자유롭게 받는것이어야 한다. 또한 선물은 거부할 수 있어야 선물이다. 거부할 수 없는 선물은 억압의 징후일 뿐이다. - P551

그렇다면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는? 우리 좋은 자신을 발생시켰고자신을 부양해온 생물학적 시스템을 계속 파괴할까? 그래서 흔적도없이 사라지는 절멸을 향한 고속 행진을 지속할까? 아니면 여기서 멈추고, 그간의 무모한 행태를 반성하고, 잘못을 되돌릴 수 있을까? 인간은 자신의 발명들이 파놓은 궁지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발명할 수 있을까? 이미 인간은 인공 슈퍼바이러스 같은 생명공학적 자멸 수단을 개발했고, 인간 게놈을 조작하는 방법도 알아냈다. 이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더 착하고, 덜 탐욕스러운 버전으로 대체해버릴 작심을 한다면? 만약 세계 개선에 열중한 박애주의자 또는 어느 정신착란자가 다른 버전의 인류를 설계한다면? 우리 중에 재설정 버튼을 누를 채비를하는 선지자 및/또는 미친 과학자가 숨어 있다면? - P555

소설은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답을 제공하는 것은 지침서들의 몫이다. 대신 소설은 질문을 던진다.
오릭스와 크레이크』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아마도 이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를 맡길 수 있을까?" 기술 수준이 몰라보게 높아졌다 해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는 본질적으로 수만 년 동안 변하지않았다. 같은 감정, 같은 집착, 같은 선악미추 개념이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 인간은 영원한 오합지중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악함과 추함을 삭제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럼우리는 무엇을 삭제하게 될까? 그 결과물은 여전히 인간일까? 만약 그결과물이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덕성스러운 말 휴이넘(Houyhnhnm)처럼 공격성과 승부근성이 없는 생물이라면그들은 빠르게 멸종해버리지 않을까?  - P560

북미 원주민 부족들이 16세기와17세기에 유럽인과 조우한 후 줄줄이 사라져간 것처럼? 우리 중 일부는 걸리버 자신처럼, 그리고 오릭스와 크레이크』의 지미처럼 꽤 착하고 상당히 점잖은 사람들이다. 그걸로 충분할까? 지미에게는 ‘착한 마음‘이 있다. 우리를 구하는 데 우리의 착한 마음이면 충분할까, 아니면또 다른 무언가가 요구될까?
우리가 현재의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더 윤리적인 새로운 버전의 우리를 창조할 역량을 갖출 날이 머지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우리가 그 버전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급속히 파 - P560

괴 중인 생물권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인간 모델을 폐기해버려야 하지 않을까?
크레이크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 P561

세계인권선언은 "인류의 모든 구성원에 내재하는 존엄성이 자유, 정의, 그리고 세계 평화의 토대"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본 선언은 인권은 보편적인 것임을, 즉 어디 사는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향유해야 할 권리임을 선포한다.
세계인권선언은 생명, 자유, 표현의 자유, 사생활에 대한 권리 같은 시민적·정치적 권리들을 포함한다. 또한 사회보장, 건강, 교육에 대한권리 같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들을 포함한다. - P573

하지만 지구인 여러분, 경고할 말이 있습니다. 첫째, 지금까지의 선언과 협약은 모두 이상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서명한 국가들에서조차 평등은 온전히 구현된 적이 없습니다. 이 약속들이 단지 말에 그치지 않으려면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명심하세요. 불평등이 많은 곳에 학대도 많습니다.
둘째, 권리는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권리는 신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권리를 위해 수 세기 동안 싸웠고, 또 반격당했습니다. 줄다리기는 계속됩니다. 끝난 적이 없습니다. 카인은계속 돌을 집어 들고, 아벨은 계속 살해당합니다. 탐욕, 질시, 권력 싸 - P574

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이것 없이 살았던 때가 있던가요? 안정된 사회란 적어도 이런 성향에 대처할 수단을 가진 사회입니다. 불안정한 사회는 내면의 악마들을 마개 없이 풀어놓는 사회입니다.
셋째, 오늘날 조직력과 재원을 갖춘 여러 세력이 이런 취약한 인권마저 잡아먹으려 공세를 펼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준(準)민주주의 정부들의 밋밋함을 따분해하며 20세기 전체주의의 부활을 바라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조심하세요. 처음에는 호쾌한 발상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행진과 코스튬플레이에 눈이 즐겁고, 이전 지도자들과 달리 화끈한 입담을자랑하는 무적의 리더를 섬긴다는 느낌이 짜릿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의 끝이 좋았던 적은 없습니다. 특히 시민 입장에서 좋게끝난 적이 없어요. - P575

전체주의 정권들은 어떤 이름을 달고 있는 같은 행동을 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전면적이며 도전받지 않는 힘입니다. 그들의 수단은 거짓말을 포함합니다. 그 거짓말은 클수록 좋습니다. 그들은 독립 언론의입을 틀어막습니다. 그러기 위해 예컨대 언론인의 목을 죄고 손발을자릅니다. 또한 그들은 체제에 동조하지 않는 예술가와 작가를 투옥하거나 살해하고, 독립 사법부를 없애고 법 집행 기관을 그저 정권의 산하기관으로 만들어 전체주의 정부가 고안한 부당한 법들을 행사합니다. 그들은 암살 같은 초법적 억압 수단을 사용합니다. 폭도를 선동해특정 집단들에게 폭력적 공격을 가하고, 경쟁 세력 파괴와 자기 세력결집과 대국민 공포 분위기 조성을 위한 규탄과 적발의 판을 깝니다.
이 성토 기계는 일단 전속력으로 올라가면 가공할 추진력을 발합니다. - P575

왜 이런 정권들이 나오는 걸까요? 그들은 어떻게 권력을 잡을까요?
전체주의 정권은 주로 혼란의 시기에, 대개는 경제위기에, 국민 전체나 상당수가 느끼는 부당한 현실에 대한 반감을 딛고 떠오릅니다.
이런 시기에는 무정부주의가 득세하기 좋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집단+폭력 · 린치 ·인민재판이 판치다가 사람들이 더는 그런 혼돈을 참아내지 못할 지경이 됐을 때 전형적으로 군벌과 독재자가 부상합니다. 그들은 대중의 분노를 특정 표적 집단에게 돌리는 방법으로 추종자를 규합합니다. 표적 집단은 나환자, 마녀, 투트시족, 에이즈 환자, 멕시코인,
난민 등 다양합니다. - P576

여러분은 적어도 지금은, 또는 아직은 전체주의 독재 체제하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제발 피하세요.
지구인이여, 여러분은 구태여 의심과 혐오의 분리주의 경로를 따를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서로가 같은 인간임을 인식하고, 인류에게 닥친 공동의 문제들을 함께 이해하고 마주하기를 바랍니다.
사실 해결할 대형 문제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우선, 지구의 온도와화학적 구성을 조절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여러분 모두 플라스틱 똥이되고 말 겁니다. 바다가 죽고 여러분은 숨을 쉴 수 없게 되겠죠. 그러면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와는 영원한 안녕입니다. 우리도 여러분의 멸종이 마음 아파요. 여러분에게도 좋은 점이 있거든요. 모차르트는 정말우리 취향이었어요. 물론 우리야 악보를 저장해서 직접 연주하면 그만이지만요.
꼭 망할 필요는 없잖아요.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 P578

이곳은 토론 클럽입니다. 말이 이어지는 곳입니다. 말 다음에 말 다음에 말이 오면 힘이 됩니다. 발언이 힘입니다. 그렇게 희망합니다. 복잡한 문법을 가진 언어들,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먼 과거들과 우리가 죽은 후에 존재할 미래들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들이야말로아마도 최초의 진정한 휴먼 테크놀로지입니다. 우리는 인간 조상들로 - P594

부터 언어를 받았습니다. 언어의 기원은 우리가 알지 못할 먼먼 과거로 뻗어 올라갑니다. 이 언어를 진실하게 사용하세요. 공정하게 사용하세요. 그렇게 하면 말이 권력이 됩니다. 물론 가장 좋은 의미의 권력이요.
우리의 말은 이제 여러분 손에 달려 있습니다 - P595

악몽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악몽은 반복적으로 꾸는 흉몽이다.
몹시 익숙하면서도 불길한 장소에 와 있는 나를 발견한다. 으스스한지하실, 살기 어린 호텔, 컴컴한 숲속. 하지만 전에도 겪어본 악몽이기에 생각의 초점은 놀라울 만큼 예리하다. 지난번에 저 뾰족한 막대기가 괴물에게 주효했으니 이번에도 시도해보자.
두 번째 종류의 악몽에서는 익숙해야 할 모든 것들이 낯설다. 나는길을 잃었고, 방향을 알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아득하다.
지금 우리는 이 두 가지 악몽을 한꺼번에 겪고 있는 듯하다. 다만 어느 것을 더 우세하게 겪는지는 악몽을 꾸는 사람의 연령대에 달려 있다. 이런 팬데믹 상황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두 번째 악몽에 가깝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 P598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전염병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는 요소였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전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치사율은 50퍼센트로 추정된다. 대항해시대에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이 유럽인에게 묻어 온 병원균에 감염됐고, 거기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었던 원주민의 사망률은 80~90퍼센트에 육박했다. 20세기 초에는 수천만 명이 스페인독감으로 죽었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의 눈에 우리는 소중한 인생사를 가진 애틋한 개인들이 아니다. 그저 미생물이 더 많은 미생물을 만드는 배양접시에불과하다.
팬데믹과 팬데믹 사이에 우리는 모든 것을 극복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전염병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다음번팬데믹을 기다린다. - P603

군에 둘러싸였다. 적들은 사방에 도사리고 있다. 다만 이번 적들은 뿔난 꼬마 도깨비처럼 그려놓은 세균이 아니라, 색색의 털 방울 모양의바이러스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SF 영화에서 처음에는 귀엽다가 나중에는 인체를 장악하는 미지의 존재들처럼, 이 털 방울도 사람을 죽인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2008년에 출간한 『돈을 다시 생각한다』에서 과거 흑사병이 퍼질 때 사람들이 보인 여섯 가지 반응을 언급했다.

1. 자기 보호.
2. 자포자기 난동. 여기에는 취태와 도둑질도 포함된다.
3. 남들을 돕기.
4. 남 탓. (주로 나환자, 집시, 마녀, 유대인이 전염병 전파자로 매도당했다.)5. 증인이 되어 기록하기.
6. 일상 유지.

이것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2번이나 4번은 추천하지 않는다. 포기와 남 탓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자신을 보호하고,
그다음에 남을 돕거나, 일기를 쓰며 시대의 증인이 되거나, 온라인 시 - P605

스템을 활용해 일상을 최대한 회복하는 것은 가능하다. 14세기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일들이 지금은 상당 부분 가능하다.
그러니 문에 가상의 격리 표시를 붙이고, 낯선 이들을 안에 들이지말고, 자신을 잠재적 전염병 매개체로 여기고, 영화 <외계의 침입자>나<제7의 봉인>을 (다시) 보자. 그리고 아날로그는 디지털이든 가위와 풀이나 펜과 종이를 꺼내자 감염은 됐지만 발병하지 않았다면 팬데믹이여러분에게 선물을 준 셈이다! 그 선물은 시간이다. 한 번쯤 소설을 써보거나 나막신 춤을 배우고 싶었는가? 지금이 바로 기회다.
그리고 용기를 내자! 인류가 전에도 겪었던 일이다. 결국에는 터널끝에 이르게 돼 있다. 우리는 그저 이번 터널을, 전과 후 사이를 잘 통과하면 된다. 소설가들은 이미 알겠지만 중간부분이 가장 생각해내기어렵다. 하지만 해낼 수 있다. - P606

제2세대 페미니즘의 대모 시몬 드 보부아르의 미출간 소설이 있었다니! 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이 소설의 프랑스어 제목은 『갈라놓을 수 없는(Les Inséparables)』이며, 『레 리브레르(Les Libraires)』지에 따르면 "반항적인 두 젊은 여성의 열정적 우정을 감동적이고 명료하게 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당연히 읽고 싶던 차에 영역판의 서문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의 최초 반응은 패닉이었다. 과거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젊은시절의 내게 시몬 드 보부아르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 P614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은 거의 신으로 숭배됐다. 카뮈,얼마나 추앙받았던가! 우리는 그의 암울한 소설들을 열광적으로 읽었다! 베케트는 또 얼마나 각광받았나! 그의 희곡들, 특히 ‘고도를 기다리며』는 대학 연극반의 단골 공연작이었다.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은또 얼마나 난해했던가! 하지만 그의 희곡들 역시 우리의 무대에 빈번히 올랐다. (그중 파시즘의 득세를 은유한 『코뿔소」 같은 작품은 오늘날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상징성을 발한다.)사르트르 역시, 비록 귀엽지는 않았지만, 당황스럽게 똑똑했다. 당시에 타인은 지옥이다"를 인용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그럼 그때의 우리는 ‘타인은 지옥‘의 필연적 귀결이 ‘고독은 천국‘이라는 것도 깨달았나? 아니, 그건 아니었다. 우리는 그가 오랫동안 스탈린주의에 아첨한 것을 용서했는가? 용서했다. 다는 아니어도 대략 용서했다.  - P615

그가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비난했고, 알제리독립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손에 잔혹하게 고문당한 언론인 앙리 알레그(Henri Alleg)의 수기인『고문(La Question)』(1958)에 격렬한 서문을 썼기 때문이다. 고문』은프랑스 내에서는 금서로 지정됐지만 우리 같은 촌구석 사람들은 구할수 있었고, 나도 1961년에 읽었다.
그런데 이렇게 위협적인 실존주의 명사들 가운데 여성은 딱 한 명이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 나는 생각했다. 강철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초특급 지성들이 모인 파리의 올림포스산에서 한자리를 차지한 여성. 그녀는 얼마나 겁나게 억센 사람일까! 사회가 할당한 성역할(gender role)이상을 열망하는 여자라면 스스로 마초맨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여기던 시대였다. 뭐라도 되려면 냉철해야 했다. - P615

시몬 드 보부아르가 왜 그렇게 두려웠나요? 여러분은 쉽게 물을 수있다. 여러분에게는 거리감이 주는 이점이 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보다 본질적으로 덜 무섭다. 특히 후대의 전기 작가들이 애초에 미화됐던 면들을 깎아 원래 크기로 줄여놓고 심지어 결함까지 꺼내놓았다면 별로 무섭지 않다. 하지만 내게 보부아르는 거대한 동시대인이었다. 한편에는 토론토라는 변방에 살면서 언젠가 파리로 달아나 낮에는웨이트리스로 일하고 밤에는 다락방에서 걸작을 쓰겠다는 꿈을 꾸던스무 살의 내가 있었고, 다른 먼 한편에는 몽파르나스의 돔 카페(Café leDôme)에서 인문 철학의 궁정을 열고 『레탕 모데른(Les Temps Modernes)』지에 글을 쓰며 나 같은 촌뜨기들을 비웃는 실존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말이 들리는 듯했다. 그들은 지탄 담배의 재를 떨며 이렇게 운을 뗐을 것이다. "부르주아." 더 심한 욕은 캐나다인이었다.  - P616

그러다 나이가 좀 들었을 때 나는 드디어 파리에 갔다. 나는 실존주의자들에게 거부당하지 않았다. 사실 실존주의자들을 보지도 못했다.
파리의 카페에서 음식을 사 먹을 여유도 없었다. 파리행 직후에 밴쿠버에 갔고, 거기서 마침내 ‘제2의 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남들의 눈에 띌까봐 화장실에서 읽었다. (그때는 1964년이었고, 제2세대 페미니즘이 아직 북미의 오지까지 도달하기 전이었다.)이 시점에서 내 두려움의 일부는 연민으로 대체됐다. 어린 시몬은극도로 엄격한 훈육을 감내해야 했다. 일거수일투족 감시를 받는 몸과프릴이 가득한 원피스와 단호히 규정된 규범 속에서 얼마나 갑갑한 기분이었을까? 캐나다 벽촌의 여자애였던 것이 결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내게는 사사건건 비판적인 수녀들도, 고압적인 상류계급 친척도없었다. 나는 바지 차림으로 사방팔방 뛰어다닐 수 있었다. 모기를 막는 데는 치마보다 바지가 유리했다. - P617

그러던 차에 우리에게 원전(原典)이라 할 책이 주어졌다. 그것은 지금껏 출간된 적 없었던 보부아르의 자전적 소설 갈라놓을 수 없는이다. 이 책은 그녀에게 아마도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경험을 담고 있다.
그 경험은 평생의 친구였던 자자(Zaza)와의 관계다. (소설에서 자자는 앙드레라는 소녀로 등장한다. 두 소녀의 우정은 자자가 비극적이고 이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다층적이고 강렬하게 이어진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을 출간한 지 5년 후인 1954년에 이 책을 썼고, 이것을 사르트르에게 보여주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대부분의작품을 정치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이었고, 이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가 유물론자이자 마르크주의자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아이러니한 일이긴 하다. 어쨌거나 이 책은 두 젊은 여성이 처한 물리적·사회적 여건을 치열하게 묘사한 책이 아니던가. 당시 진지하게 여겨지던 생산수단은 공장 노동과 농업이 유일했다. 여성의 저평가된 무보수 노동은 거기 해당되지 않았다.  - P620

흠, 독자여, 사르트르 씨가 틀렸다. 적어도 이 독자의 시각에서는 그렇다. 인류의 완성이나 정의와 평등 같은 추상적 관념에 몰두하는 사람은 원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소설은 개인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사람은 자기 연인이 쓴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자기가 연인의 삶에 등장하기 전의 일을다루고, 자기가 아닌 남이 중요하고 재능 있고 사랑받는 인물로 등장하고, 더욱이 그 인물이 여성인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유산계급 소녀들의 내적 삶? 너무 사소해. 이런 소소한 감정 유희는 여기까지만해, 시몬, 너의 그 명석한 두뇌를 보다 진지한 문제들에 쓰는 게 어때? - P621

그런데 사르트르 씨, 21세기에서 답변드리자면, 이것이야말로 진지한 문제거든요. 만약 자자가 없었다면, 자자와 보부아르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관계가 없었다면, 보부아르의 지적 야망에 대한 자자의응원과 시대의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보부아르의 욕망이 없었다면, 가족과 사회가 자자에게 그녀가 여성이란 이유로 가했던 치명적인 기대-보부아르가 보기에는 자자의 총명과 기운, 기지와 의지에도 불구하고 자자의 생명력을 그야말로 고갈시켜버린 기대에 대한 보부아르의 견해가 없었다면, 『제2의 성』이 있을 수 있었을까? 또한 이 중추적인 책이 없었다면, 이후에 일어난 일이 과연 일어난 만큼 일어날 수있었을까? - P621

더욱이 지금의 세계에도 얼마나 많은 버전의 자자들이 살고 있는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 명석하고, 재능 있고, 유능한 여성들이 일부는국법에 의해, 다른 일부는 나름대로 젠더 평등을 이뤘다는 나라에 살면서도 내부의 빈곤과 차별로 인해 억압받고 있는가? 물론 갈라놓을수 없는 모든 소설이 그렇듯 특정한 시간적·공간적 배경을 가진다.
하지만 동시에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다.
친애하는 독자여, 이 책을 읽고 울기를 바란다. 작가 자신도 처음에는 눈물을 흘린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눈물로 시작한다. 살벌한 외관과 달리 보부아르는 자자의 죽음을 두고 평생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우리가 아는 보부아르가 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노력한 것은어쩌면 일종의 추모였는지도 모른다. 보부아르는 전력을 다해 세상에자신을 개진해야 했다. 자자가 하지 못했던 몫까지 최대한. - P622

1921년의 에세이 나는 두렵다(I Am Afraid)」에서 자마틴은 이렇게말했다. "진정한 문학이란, 문학이 착실하고 듬직한 공무원들이 아니라 광인·은둔자·이단자·몽상가·저항자 · 회의론자에 의해 창작될 때에만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낭만주의 운동의 산물이었다. 그건혁명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레닌-스탈린주의의 바람이 어느방향으로 부는지 확인한 "착실하고 듬직한 공무원들이 이미 검열에착수했다. 그들은 바람직한 주제와 작품에 대한 포고령을 내리고, 변칙과 비정통의 잡초를 뽑느라 바빴다. 전체주의체제에서는 이 일에도늘 위험이 따른다. 독재자의 눈짓 한 번에 잡초와 꽃이 뒤바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들을 얼마간 유토피아로 볼 수도 있다. 작중 ‘단일제국‘은 보편적 행복을 목표하면서, 사람은 행복과 자유를 동시에 누릴 수 없기때문에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러면서 19세기에떠들썩하게 논쟁의 대상이 됐으며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인
‘민권‘은 얼토당토않은 것으로 무시한다. 즉 ‘단일제국‘이 모든 것을 잘통제하고 있고, 모두의 최대 행복을 위해 움직이는데 민권이 왜 필요하냐는 것이다. - P625

모든 것은 일명 율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섹스 기회는 모두에게 할당되지만 자녀를 낳는 것은 특정 신체 조건을 충족하는 여성들에게만허용된다. 당시는 우생학이 ‘진보‘로 간주되던 시기였다.
잭 런던(Jack London)의 1908년 소설 『강철군화와 오웰의 『1984럼, 『우리들』에서도 반체제 인사들은 여성이다. 남자 주인공 D-503은처음에는 ‘단일제국‘의 헌신적 일원으로 등장한다. 그는 ‘단일제국‘이완벽한 행복의 비법을 미지의 세계와 공유하겠다는 구실로 건설하는우주선에서 기술자로 일한다. 디스토피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기를 쓰는 경향이 있는데, D-503이 쓰는 일기는 우주에 전하기 위한 단일제국 찬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플롯이 빡빡해지며 D-503의 글도걸쭉해진다. 그는 끔찍한 순간들에 에드거 앨런 포에 빙의한 걸까? 아니면 독일 고딕 낭만주의에? 아니면 보들레르에? 가능성 있다. 빙의한것은 D-503 인가, 아니면 저자인가? - P627

『우리들』이 쓰인 시기는 역사의 특정한 순간, 즉 공산주의가 약속했던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로 퇴색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당시는 모두의 행복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이교도들이 사상범이 되고, 독재 반대자가 혁명 반동분자로 몰리고, 여론 조작용 공개재판이확산되고, 숙청이 일상이 되기 전이었다. 자마틴은 어떻게 미래를 이리도 분명히 내다봤을까? 하지만 그가 본 것은 미래가 아니었다. 그는현재를 보았다. 그리고 현재의 그림자 속에 이미 도사리고 있던 것을보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가 말했다. "사람의 행로는 특정한 결말을 예고한다. 그 행로에 계속 붙어 가면 그 결말에 이르고 말지만, 행로에서 벗어나면 결말도 바뀐다." 우리들』은 당시의 장소와 시대에 던지는 경고였다. 하지만 이 경고는 들리지 못했기에 주의를 끌지도 못했다. "착실하고 듬직한 공무원들이 자마틴에 대한 검열에 착수했기때문이다. 사람들은 행로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그 결과 수백만 명이죽었다.
『우리들』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일 수도 있을까? 만약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경고인가? 우리는 듣고 있는가? - P630

벨 판 주일렌은 프랑스 귀족은 프랑스혁명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평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스위스에서 만난 귀족 망명자들은적어도 한 가지는 배웠습니다. 만약 귀족의 목이 날아가는 시국이고,
만약 당신이 귀족이라면, 도망쳐라! 최대한 빨리! 설사 내세울 만한 공적이 있다 해도 당신의 선의나 선행이 당신을 구해주지 못할 테니까.
그런 때에 내게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내 개인적 정체나 내가 했다고 믿는 선행이 아닙니다. 남들이, 연출과단두대 밧줄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내 운명을 좌우합니다. 더구나 이때는 "선고 먼저, 판결 나중입니다. 『이상한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피에 굶주린 독재자 하트 여왕이 한 말입니다. 종류를 불문하고 도덕적 공황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고발당하면 바로 유죄이고, 유죄면 바로 처형입니다. 사실관계는 더 이상 중요하지않고, 설사 존속한다 해도 사법절차는 요식행위로 전락합니다. 이는역사를 통해 수없이 반복돼온 패턴입니다. 진짜든 상상이든 위기의 시기에는 누군가는 범인이 되어 색출당하고 제거당해야 합니다. - P634

미래의 어느 시점에 우리 시대가 학술 심포지엄의 주제가 될 수도있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최악의 결과는 아니겠네요. 어쨌든 미래에도여전히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여전히 역사 재해석에 기울일 관심이남아 있으며, 표현의 자유와 지적 활동의 자유가 어떤 형태로든 여전히 존재한다는 뜻이니까요. 이는 하찮은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로봇이나 지구 과열이나 치사율 100퍼센트의 통제불능 바이러스로 인해 멸망당하지 않을 거란 희망은 결코 작은 희망이 아니에요.
저는 일어날 가능성이 다분한 불쾌한 미래에 대한 책들을 씁니다.
우리가 그런 미래를 현실에 허용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요.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는, 또는 우리 중 일부는, 그런대로 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격하는 권위주의 정치의 물결이 물러가고, 우리의 공동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공포와 희망이 공존합니다. 두 가지는 분리돼 있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살고 싶은가? 아마 이것이 우리가 자문해야 할 진짜질문일 겁니다. 네, 늑대의 배 속은 어둡습니다. 하지만 늑대 밖은 밝습니다. 그럼,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요? - P644

그레임은 삶의 마지막까지 새를 보는 즐거움을 놓지 않았다. 생애마지막 해까지도, 비록 혈관성 치매가 진행되어 더는 읽지도 쓰지도못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새들의 활기찬 삶을 지켜보았다. 우리 뒤뜰의 모이통과 물통에 날아드는 새라고는 참새와 울새, 찌르레기뿐이었고 간간이 비둘기가 찾아올 따름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모든새가 주목받을 가치가 있었다. "이제는 저 새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어느 날 그가 우리의 친구에게 말했다. "하지만 뭐, 새들도 내 이름을모르니까." - P648

필사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보호하는 방책이 된다. 과거에서는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든 적어도 우리 자신은 늘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반면 현재에 산다는 것은 불가피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살지 않고 삶을 온전히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이라는 신사는 우리 모두를 기다린다. 우리 밖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그는 우리의 비밀공유자이자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친구다. 우리가영원히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드디어보는구나, 말로만 듣던 저 유명한 것을." 헨리 제임스가 임종 시에 한말이라고 한다. 그레임도 익히 알던 인용구다. 물론 로버트 프레이저가 완전히 그레임은 아니다. 다만 내가 그레임을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의 창의적 삶과 그의 실제 삶은 하나였다. - P657

시가 해야 할 일(신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이의 매력을 찬미하고, 전쟁 영웅을 기리고, 공작과 공작 부인을 칭송하고, 파워엘리트를 비방하고, 자연과 동식물을 묵상하고, 민중의 봉기를 촉구하고, 대약진운동을 선전하고, 전남편 및/또는가부장제를 욕하는 일)에 대한 믿음은 매우 다양하다. 임무 수행을 위해시가 취할 방식(한껏 고무된 언어, 기악을 곁들인 노래, 운을 맞춘 2행연구시,
자유시, 소네트 워드호드에서 뽑아낸 비유, 적절히 선택된 방언, 속어와 욕설, 시경연 대회의 즉흥시 등)도 못지않게 다양하며, 유행에도 좌우된다.
시가 목표하는 청중도 여러 부류다. 같은 여신을 섬기는 사제들부터 - P662

당대의 왕과 궁정, 지식노동자들의 자기비판 그룹, 동료 음유시인들,
상류사회, 비트족, 문예창작 입문교실, 온라인 팬, 또는 에밀리 디킨슨이 말한 동료 무명인(無名人)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때로 시인은 때와 장소에서 격하게 벗어난 말 때문에 추방되고 총에 맞고 검열당한다. 특히 독재 체제에서 찌푸린 얼굴의 시인이 편히 쉴 자리란 없다.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말을 하면 곤욕을 치를수 있다.
모든 시가 다 그렇다. 시는 때와 장소에 내장돼 있다. 시는 그 뿌리와절연할 수 없다. 다만 운이 좋으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훗날의 독자들이 그 시를 읽을 수는 있어도 그 시가 애초에의도된 대로 읽히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위대하고 무시무시한 여신 이난나에게 바치는 찬가는 적어도 내게는 여전히 매혹적이다. 하지만 고대 청중에게 일으켰을 골수가 녹아내리는 경외심을지금은 일으키지 못한다. 나도 이난나 여신이 느닷없이 현신해 산을납작하게 밀어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내 생각은 언제든지 빗나갈 수 있다. - P663

낭만파가 불후의 명성과 저작에 대해 부단히 부르짖었지만, 사실 그런 문제들에 있어서 ‘영원한 것은 없다. 명성과 작품은 흥망을 거듭하고, 책은 배척당하고, 불타고, 나중에 출토되고, 재활용된다. 오늘날의불멸의 시가 내일모레는 불쏘시개로 전락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일모레의 불쏘시개가 불길에서 구출돼 격찬을 받고 주추에 새겨질 수도있다. 타로카드 중 ‘운명의 수레바퀴‘가 바퀴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세상사는 돌고 돈다. 적어도 때로는 그렇다. 운명 카드는 ‘운명의 필연적 직선 도로‘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런 건 없다. - P663

사전 경고는 이쯤 하고, 이제 영화 <일포스티노(Il Postino)>에서 우편배달부가 한 말을 인용하려 한다. 영화 속 우편배달부는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시인 네루다의 시들을 훔친다.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는 말한다. "시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다."시가 작자의 손을 떠난 후에는, 그리고 작자가 시공을 떠나 원자로떠다니게 되면, 과연 그 시는 누구에게 속할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그대를 위해서다. 친애하는 독자여.
이 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역시 그대를 위한 것이다. - P664

살다 보면 내가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들은 사람마다 다르다. 내 경우 그런 순간들 중 일부는 역사적 비극이 일어나던 순간이다. 케네디가 암살됐을 때 나는 토론토 시내의 어느 시장조사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는 토론토 공항에서 뉴욕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른 일부는 날씨와 상관있다. 허리케인을 목격했을 때, 빙설 폭풍에 잡혔을 때 등. 또 다른 일부는 음악과 관계있다. 라디오로 처음 <메어지도츠>를 들었을 때 나는 네 살이었고, 수세인트마리에 있었고, 안락의자에 앉아 곰 인형을 인형 옷에 서툴게 꿰매고 있었다.  - P670

내가 자연주의 작가 배리 로페즈(Barry Lopez)를 처음 만난 것은 수십 년전 알래스카 여행에서였다. 사람들이 말했다. "여자가 남자이고, 남자가 동물인 땅, 알래스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농담이었지만 뼈 있는 농담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다소 익숙한 뼈였다. 나는 북부에서 자랐고, 알래스카는 북부다. 강인한 여자들이 있는 곳.
하지만 동물이 될 거라면 어떤 동물인지가 중요하다. 족제비가 되는것과 늑대가 되는 것은 다르다. 사람들이 늑대를 고른다면 그건 배리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무리에 충실하고, 똑똑하고, 지략 있고, 생존지향적이고, 잘생기기까지 한 동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 늑대들이 헬리콥터를 탄 수렵꾼들에게 살육당하고 있다. 족제비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 P675

배리와의 만남은 자연 세계와 우리를 불가분하게 이어주던 언어, 그러나 지금은 사라져버린 언어가 아직 사용되는영역으로 들어서는 기분을 안겨주었다. 그곳에 그 언어를 재개하는 화자가 있었다. 배리는 황야의 예언자였다. 하지만 배리는 그곳을 황야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고독한 화자라고 해두자. 그는 수없이궁금했을 테니까. 진정으로 듣고 있는 사람이 있긴 있을까? 그는 이제지극히 중요한 화자가 됐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그의 동시대인들 대다수가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긴급성을 대체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 멸종저항(Extinction Rebellion, XR) 같은 세계적 운동에 참여하는 젊은 활동가들은 그 메시지를 절감한다. 우리가 들이마시는 숨은 자연에서 온다. 자연을 죽이는 것은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대양은 지구의 허파다. 특히 북방 대양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지구를 골디락스 행성으로 유지해온 거대 시스템의 열쇠다. - P676

기후변화로 북극이 녹아내리고 있다. 인간이 야기하는 대멸종, 이른바 여섯 번째 대멸종이 임박했다. 이런 때 배리의 저작이 가지는 의미는 자명하다. 우리는 우리를 지탱하는 기반과의 연을 놓치고 파멸의위기를 야기했다. 그 위기는 우리의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배리 로페즈가 우리가 사랑했지만 잃어버린 것들을 미리 노래한 것이아니기를 희망하자. 사랑하는 푸른 지구, 사랑하는 야생이 돌이킬 수 - P676

없게 상실되면 우리도 상실된다. 배리의 작품을 읽는 것, 또는 다시 읽는 것은 그 상실이 얼마나 엄청나고 얼마나 끝없이 어리석은 것이 될지 스스로 상기하는 일이다.
고마워요, 배리 - P677

바다는 우리 행성의 살아 있는 심장이자 허파다. 바다는 대기 중 산소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해류 순환을 통해 기후를 통제한다. 건강한 해양이 없다면 우리처럼 육지에 살면서 공기로 호흡하는 중형 영장류는죽을 수밖에 없다.
해양생물학자 레이철 카슨의 최초 저작 세 권, 『바닷바람을 맞으며』『우리를 둘러싼 바다』 『바다의 가장자리가 재출간됐다. 이는 위의 사실에 대한 대중의 각성과 인식 확산을 시사한다. 레이철 카슨이 이 책들을 집필하던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와 1950년대는 지금은 우리 세계의 현실이 된 많은 일들이 아직 일어나기 전이었다. 경고 신호는 있었지만 아직 희미하게 깜박일 때였다. 그때는 우리가 여섯 번째대멸종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이 별로 없었다. 기후위기의 초기 징후들이 있었지만 대중의 의식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 P678

대규모 산업형 어업은 막 시작 단계였다. 뉴펀들랜드 그랜드뱅크스 해역의 대구 어장이 남획으로 황폐해지기 전이었고, 다른 어종들도 무분별한 혼획으로 개체가 급감하기 전이었다. 저인망어선들이 대륙붕 생물계의 회생력을 파괴하기 전이었고, 산호초에 심각한 백화현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아직은 비닐 끈이 만든 ‘유령 그물들‘이 해양을 떠다니며 물고기와 돌고래와 고래들을 얽어매 죽이고 있지 않았다. 해양보호구역을 설정한 국가도 없었다. 그런 게 왜 필요한지도 모르던 때였다. 바다는 원래 끝없이 샘솟는 밑천이잖아? 인류가 마음껏 퍼가도마르지 않는 화수분 아닌가? 해양생태계에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신경을 왜 써? 그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바다는 언제나 자신을 알아서 챙겼다. 바다는 약해지기에는 너무 거대했다.  - P679

레이철 카슨은 20세기를 변화시킨 인물중 하나다. 카슨이 없었다면, 지구가 인간을 포함한 지구 생명체의 생존이 가능한 곳으로 남을수 있는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위정자들이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의 통찰에 따랐다면 현재 환경오염과 기후 위기, 그에 따른 기근, 화재, 홍수, 자원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것이다.
카슨이 ‘20세기를 변화시켰다‘고 말한 것은 카슨의 1962년 역작 『침묵의 봄』을 계기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카슨은자신의 입장을 고수했고, 자신의 증거 기반 결론을 견지했다. 현재 우리는 과학을 부정하고 사실 직시를 거부하는 신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살충제와 제초제가 온난화와 생물권 파괴에 미치는 영향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백신 접종과 선거 개표처럼 우리 생활에보다 밀접한 것들조차 부정하려 든다. 이런 상황이니 카슨의 발견에대한 적대적인 모르쇠 반응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 P680

『침묵의 봄』은 카슨의 네 번째 책이었다. 첫번째 책 『바닷바람을 맞으며』는 1941년에 출판됐다.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이고 미국이 직접 참전하기 직전이었다. 당시의 정치상황 외에 다른 주제의 책을 내기에좋은 해는 아니었다. 이 책은 『시튼동물기』의 어니스트 톰프슨 시튼과「수달타카의 일생』과 『연어 살라의 이야기 (Salar the Salmon)』의 헨리 월리엄슨(Henry Williamson)이 개척한 동물 중심 자연주의 저술의 계보를잇는 서정적이고 매력적인 책이다. 지금 같았으면 아동문학이나 청소년문학으로 분류됐겠지만, 카슨이 애초에 의도한 독자층은 이보다 훨씬 넓었다. - P680

카슨의 두 번째 책인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전후 시대 긴축정책이드디어 끝난 1951년에 나왔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번 책은 허구화한 설명이 아니라 사실을 담은 설명이었다. 역사와 선사, 지질학과 생물학을 결합한 해양에 바치는 현세적이자 기념적인 찬가였다. 많 - P681

은 이들이 저자를 따라 파도 아래로, 짙푸른 바닷속으로 들어가기를열망했다. 쥘 베른의 고전 사이언스 픽션 『해저2만리』의 네모 선장을기억하는가? 지금은 몰라도 1951년에는 많은 독자들이 네모 선장을기억했다. 바닷속은 모험과 불가사의의 영역이었다. 그토록 박식하고열정적인 가이드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얼마나 짜릿했던가! 인어는 없었지만 반면에 경이로움은 훨씬 컸다. 이 책은 레이철 카슨을 국제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렸다. - P6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1949년에 출판되고 1953년에 번역됐지만, 제2세대 페미니즘은 아직 어디에도 보이지 않던 때였다. 적어도 나 같은 고등학생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보부아르의 책은1963년 베티 프리던 여성성의 신화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 세대에게 흡인력을 갖지 못했다. 더구나 우리는 이 책들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의 이야기로 느꼈다.)우리 또래의 남자애들도 고통받는 재향군인 세대가 아니었다. 군복을 벗고 회색 양복의 월급쟁이가 된 윗세대 남자들은 전쟁의 아드레날린이 끊어진 후유증에 시달렸다. 이미 그들은 역시 참전 용사였던 휴헤프너의 유인작전에 넘어가 교외의 집과 아내를 떠나 플레이보이 버니랜드로 유입되고 있었다. - P418

한편 더 넓은 세상에서는 원자폭탄에 의한 절멸의 공포가 우리 머리위를 음산하게 맴돌았고, 매카시즘이 사회복지나 노동자 권리를 입에올리는 것을 반역적 공산주의 선동으로 만들었다. 헝가리혁명이 소련의 탱크에 의해 진압되는 것을 보며 우리 모두 공산주의가 얼마나 흉포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1930~1940년대에 대유행했던 구호들은 이때쯤 싹 들어갔다. ‘노동계급이나 심지어 ‘세계 평화‘를 언급만해도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붙었다. B급 영화의 세계에서는 화성인이지구를 침공하고 우리 뇌를 장악해서 동료 시민에게 해코지하게 하는내용이 인기였다. 바깥은 이처럼 공산주의자가 들끓고, 내부라고 다르지 않다는 암시였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 P419

루아의 인기 중 일부는 신데렐라 스토리 같은 그녀의 인생 때문이었다. 루아는 무일푼에서 거부로 일어섰다. 하지만 루아에겐 요정 대모가 없었다. 그녀는 고초를 딛고 성공했고, 캐나다인들은 그 점에 공감했다. 그들도 고초를 겪으며 일어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학적으로도고초가 유행이었다. 포효하는 1920년대는 우리에게 위대한 개츠비』같은 부와 방탕의 이야기들을 주었지만, 더러운 1930년대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처럼 비참한 빈곤을 생생히 담은 책들을 낳았다. 로맨스 소설을 제외하면 소설에서 부자들이 종적을 감추고 대신 ‘민중‘
이 들어섰다. 가브리엘 루아는 작품뿐 아니라 인생마저 시대와 맞아떨어졌다. - P423

그래서 루아는 박물관 구경과 연극 관람과 시골 여행 등 젊은 관광객이 으레 하는 일들을 하는 틈틈이 차선책에 매달렸다. 그것은 저작활동이었다. 인생을 모방하는 재능은 무대에 설 때만큼이나 소설을 쓸때도 유용하다. 거기다 그녀에겐 이미 글을 출판해본 경험이 있었다.
그녀는 파리의 한 유력 잡지에 세 편의 글을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역설적이게도 루아가 자신의 천직이 작가라는 것을 깨닫고 성공 가능성을 확신한 곳은 영국이었다.
1939년이 됐다. 많은 사람들의 예견대로 제2차 세계대전이 임박했다. 루아는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번에는 파리가 아니라지방을 여행했다. 그리고 그해 4월 대서양을 건너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더욱 거세진 가족의 압박에도 불구하고-실컷 놀았으니 이제는연로한 어머니를 봉양해야 하지 않겠어? -그녀는 생보니파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몬트리올에 정착해 길고 고된 무명작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생은 5년 뒤 ‘싸구려 행복의 대성공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 P427

싸구려 행복』을 통해 루아가 이룬 업적 중 하나는 진부한 경건함을배격한 것이다. 루아는 정직하고 심성 고운 농부에 대한 환상이 없다.
로즈안나의 모친은 시골 사람이지만 인정머리 없고 남을 헐뜯지 못해안달인 괴물이다. 그저 음식에만 후할 뿐이다. 도덕적인 빈민도 루아의 타입이 아니다. 빈민은 미덕을 가지기에는 너무 쪼들린다. (로즈안나가 기도하는 장면이 있다. 다른 소설이었다면, 또는 더 옛날 소설이었다면 이 대목에서 로즈안나에게 성인의 환영이 임했겠지만, 대신 그녀는 묵직한 달러 뭉치의환영을 본다.) 로즈안나의 끈덕진 인내만큼은 정말 놀랍지만, 사실 그녀도 처량한 골칫거리다. - P438

이 소설에서 도덕적으로 고결하다고 할 만한 유일한 인물은 중산층이면서도 겸손한 에마뉘엘이다. 하지만 그도 자신만의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특히 플로랑틴을 이상화한다. 에마뉘엘은 일종의 부자의빈민가 탐방에 나섰다가 플로랑틴을 알게 됐다. 다시 말해 이 불쌍한얼간이는 사회적 양심에 고통받았고, 그 때문에 생탕리의 막다른 인생들과 어울리게 됐고, 결과적으로 신분에 처지는 결혼을 한다. 당연히그의 가족은 이 결혼을 기뻐하지 않는다.
루아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거부하는 동시에 그들이 사회로부터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함을 시사했다. 이 점이 소설의 성공 요인 중 하나였다. 또한 출판 시점도 시의적절했다. 전쟁이 끝나가고 있었고,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보다 공정한 부의 분배를논할 준비가 돼 있었다. - P438

작가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시대마다 요구하는 것이 다르고, 작가마다 염두에 두는 바가 다르다. 루아가 싸구려 행복에서 보여준 작가의 역할은 현재에게 내리는 미래의 수태고지였다. 루아가 절망의 바닥에 떨어진 로즈안나 앞에 나타나 "앞으로는 형편이 필 것이다"라고 말하는 상상을 해보라. 기분이 좋아진다.
1847루아의 다른 책들에도 제각기 미션이 있다. 루아는 커튼을 열어 사람들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창문들을 보여준다. 매니토바의 외딴 오지,
평범한 남자의 평범한 삶, 자기 고향 땅의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치열했던 거리들, 예술가의 다양한 여정 등. 그리고 그녀는 독자에게 창밖을 내다볼 것을 요청한다. 그 풍경의 빈약함, 가혹함, 생경함을 있는그대로 이해하고 나아가 공감할 것을 요청한다. 가브리엘 천사는 모든소통의 천사들 위에 있고, 소통은 루아가중히 여겼던 소양이었다. - P449

캐나다가 2004년에 발행한 20달러 지폐의 뒷면에는 가브리엘 루아의말이 프랑스어와 영어로 쓰여 있다. "예술이 없다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까?"
아니, 알 수 없다. 정치적으로 갈가리 분열된 우리 사회를 생각하면더욱 그렇다. 데이터 수집과 과학의 분화와 특화가 한계에 달하면서그 반동으로 마침내 우리가 인간에 대한 보다 전일적 관점으로 돌아서고 있는 지금, 루아의 비전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유의미하다. - P449

이런 작가를 어떤 말로 요약할 수 있을까?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 정도의 다작과 다양성과 창의성과 강도는 퀘벡 문학에서, 아니 캐나다 문학에서, 아니 사실상 어느 문학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마리클레르 블레는 고유하다.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고, 예술을 제외한 어떤종교에도 가입돼 있지 않다. 그녀는 다만 부단한 탐험가다. "바람이 제멋대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못하나니, 성령에서 난 이가 모두 그러하니라(요한복음3장 8절)." 마리클레르 블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영을 따랐고, 그녀의 작품이 그 결과였다. 블레 없는 우리 문학을 상상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하다. - P476

이 일은 현재 우리 대부분이 당연시하는 하지만 오래지 않은 과거에 여성과 소녀들이 어렵게 쟁취해낸 권리가 언제든 박탈당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웁니다. 이 권리는 문화적으로 매우 얕게 심겨 있습니다. 이 권리는 역사적으로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고, 해당 문화권의모두가 열렬히 신봉하지도 않습니다. 다가오는 미국 대선의 남성 후보만 해도 그것을 믿지 않는 듯합니다. 그는 남성과 소년들에게 꽤나 흥미로운 롤모델로 작용합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성폭행 통계도 우리 시대를 잘 말해줍니다. 현재 #NotOkay 해시태그 아래 분노의 봇물을 이루는 여성들과 소녀들의 트윗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들이 물어보거나 궁금해합니다. "당신도 그런 경험이 있나요?" 저도 지칠 때까지 대답합니다. 물론이죠. 상상하기 힘드시겠지만저도 한때는 10대 소녀였고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저도 한때는 기차역 같은 곳에 많이 출몰하는 더듬이들과 노출 아티스트들의잠재적 표적이었습니다.  - P482

예술이 무슨 소용인가? 돈이 주요 가치척도인 사회가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예술과 예술가들을 싫어하는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예술가 본인들이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미국의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확연히 싸늘해진 공기를 느낀다.
독재자는 무릇 억압하는 만큼이나 아부와 공물을 요구한다. ‘든지 닥치든지‘가 그들의 통치 원칙이다. 냉전 기간 중 수많은 작가, 영화제작자,
극작가들이 ‘반(反) 미국적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FBI의 방문을 받았다.
이제 그때의 역사가 되풀이될 것인가? 자기 검열이 시작될까? 미국에지하 출판의 시대가 열릴까? 출판에 따를 보복을 피해 원고가 비밀리에유통되는 시대로 극단적으로 들리지만, 미국의 과거 전적과 오늘날 권위주의 정권들의 세계적 발호를 생각할 때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 P494

당연히 항의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고, 예술가와 작가들은 거기 동참하라는 요구를 받을 것이다. 대의에 목소리를 보태는 것, 이것이 그대들의 도덕적 의무가 아닌가? (유독 예술가들이 도덕적 의무에 대한 훈계를듣는다. 다른 직업인들, 가령 치과 의사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운명이다.) 하지만 창작자에게 무엇을 창조할지 지시하거나 남들이 세운 고매한 취지에 봉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 권고사항에순응하는 창작자들은 한낱 선전물이나 이차원적 비유만을 만들어낼공산이 크고, 그것은 뭐가 됐든 예술이 아니라 지루한 설교일 뿐이다.
무릇 범작들의 화랑은 선의로 도배된 곳이다. - P498

단기적으로 봤을 때, 아마도 우리가 예술가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늘 기대해왔던 것뿐이다. 한때 굳건했던것들이 무너져 내려도 그들은 그들만의 예술 정원을 가꾸는 것.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하는 것. 그리하여 일시적 도피와 통찰의 순간을 동시에 제공하는 대안적 세계를 창조하는일, 우리가 처한 세계의 바깥을 내다볼 수 있도록 창문을 내주는 일,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트럼프 시대가 왔다. 위기나 공포의 시기에 우리 각자가 투표수나통계치 이상의 존재임을 일깨우는 것은 예술가와 작가들이다. 삶은 정치에 의해 어그러질 수 있고, 또 많은 삶들이 실제로 그렇게 됐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시대 정치인들의 총합이 아니다. 역사를 통틀어 예술에 거는 기대는 주어진 시간과 장소에서 최대한 강력하고 웅변적으로인간됨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 P501

내가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한다. 1972년 이래 내게 붙은 죄목 명단에하나가 더 추가됐다. 참수된 남자들의 머리로 쌓은 피라미드를 올라가서 유명해진 여자(좌익 성향 잡지). 남성 예속에 환장한 도미니트릭스 (우익 성향 잡지, 내가 가죽 부츠를 신고 채찍을 휘두르는 그림까지 실었다). 토론토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본인에게 비판적인 사람이면 그게 누구든 백색 마녀 마법으로 소멸시킬 수 있는 고약한 인간. 내가 이렇게 무서운사람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급기야 여성들과도 전쟁을 벌이는 모양이다. 나는 졸지에 강간을 옹호하고 여성을 혐오하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됐다.
고발자들의 눈에 착한 페미니스트란 어떤 페미니스트일까? - P513

나의 근본적인 입장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도 범죄행위를 비롯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 즉 성자 같은 행동부터악마적 행동까지 온갖 행동을 다 할 수 있다. 여성은 범법 행위가 불가능한 천사가 아니다. 만약 여성이 천사라면 여성은 범죄 혐의로 재판정에 설 필요가 없다. 여성은 언제나 옳으니까.
이미또한 나는 여성을 자기 주도나 도덕적 결정 능력이 없는 아이로 보지도 않는다. 만약 여성이 아이라면 우리는 19세기로 후퇴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재산을 소유해서도, 신용카드를 가져서도, 고등교육을 받아서도, 출산 주도권을 가져서도, 투표를 해서도 안 된다. 북미에는 실제로 이 상태로의 회귀를 추진하는 유력 단체들이 있다. 하지만아무도 그런 단체들을 페미니스트로 보지 않는다. - P514

무엇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여성의 시민권과 인권이 존재하려면 우선 (법적 절차에 입각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포함한) 시민권과 인권부터 있어야 한다. 여성의 투표권이 있으려면 우선 투표권이 있어야 하듯이말이다. 오직 여성만 그런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어야 착한 페미니스트일까? 당연히 아니다. 그것은 남성만 그런 권리를 가졌던 과거 상황의 동전 뒤집기에 불과하다.
나를 고발한 착한 페미니스트도, 나 같은 나쁜 페미니스트도 위의전제에는 동의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우리가 서로 갈라지는 지점은어디일까? 그리고 나는 어쩌다 이 지경으로 착한 페미니스트들과 척을 지게 됐을까?
나는 지금껏 도의상 많은 청원서에 서명해왔다. 2016년 11월에도UBC 어카운더블(UBC Accountable)‘이라는 공개 항의서에 서명했다. - P514

사례의 목록은 길고 좌우익 모두에서 일어났다. ‘덕과 공포‘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저격당한다.
이때 반역자가 없었다거나 모든 목표 집단이 억울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런 시대에는 증거 우선 원칙이 무시된다는 뜻이다.
이런 일들은 늘 더 나은 세상을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진다. 때로는 일시적이나마 정말로 더 나은 세상을 실현하기도 한다. 하지만때로는 이런 일들이 새로운 새로운 탄압 형태들의 구실로 쓰인다. 역설적이게도 자경단 정의 - 재판 없는 선고는 정의의 부재에 대한 항거로 시작된다. 혁명 전 프랑스처럼 사법 시스템이 부패했거나 미국서부 시대처럼 무법천지일 때 사람들은 자력 해결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처음에는 양해 가능한 임시 자구책이었던 자경단 정의가 문화적으로 굳어져 집단 린치 관행으로 변질된다. - P517

이런 문화에서는 버젓이있는 사법제도가 팽개쳐지고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권력 구조가 가동되고 유지된다. 예컨대 코사 노스트라도 원래는 폭정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됐다.
지금의 미투 현상은 망가진 사법제도의 징후이다. 여성들, 특히 성적 학대의 고발인들은 기업 조직을 포함한 제도권에서 공평한 발언권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그들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도구를 들었다. 그 결과 별들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 P517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해 사법제도를 무시한다면 무엇이 그 자리를차지하게 될까? 누가 새로운 실세가 될 것인가? 확실한 건 그게 나 같은 나쁜 페미니스트들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우파에게도 좌파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양극화 시대에는 극단주의자들이 승리한다.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종교가 되고, 그들의 견해를 추종하지 않는 사람은변절자 · 이단 · 반역자로 몰린다. 온건 중도파는 전멸한다. 소설가들이우선적으로 용의선상에 오른다. 그들은 인간에 대해 쓰는 사람들인데,
인간은 도덕적으로 애매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목적은애매성을 쓸어내는 것이다. - P518

이 사건을 둘러싸고 작가들이 분열해서 서로 맞서고 있다. 공격자들이 항의서를 여성에 대한 선전포고로 왜곡시켜 비방한 영향이 컸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나는 우리 모두ㅡ착한 페미니스트들과 나 같은 나쁜페미니스트들 모두가 비생산적인 논쟁을 멈추고 힘을 합쳐서 스포트라이트를 애초에 향했어야 했을 곳으로 돌리기를 촉구한다. 그곳은 다름 아닌 UBC다. 심지어 보조 고소인 중에서도 두 명이 UBC의 조치를비난하는 입장을 냈다. 그들의 용기는 감사를 받아야 마땅하다.
최근 윌프레드로리에대학교의 경우처럼 UBC도 지난 조치에 대해중립 기관의 조사를 받고, 조사 과정과 결과를 공개할 것을 약속해주기 바란다. 그렇게 되면 UBC 어카운터블‘ 사이트는 목적한 바를 달성하게 된다. 그 목적은 결코 여성을 억압하는 데 있지 않았다. 책임의식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일이 어쩌다가 여성의 권리에 반(反)하는 일이라는 누명을 쓰게 됐단 말인가. - P519

학대받는 이들로 유지되는 부유한 도시,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떠나는 사람들(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의 오멜라스는 그런 곳이다. 따라서 내 질문은 이런 뜻이었다. 다수의 행복이 일부의 고통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를 세상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고통받는아이 없이 어떻게 오멜라스를 건설할 수 있을까요?
어슐러 K. 르 귄도 나도 답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르 귄이 평생답하고자 노력했던 질문이었고, 그 노력의 과정에서 그녀는 많고 다양하고 매혹적인 세상들을 너무나 능란하게 창조했다. 무정부주의자로서 그녀는 젠더 평등과 인종 평등을 이룬 자치 사회를 원했을 것이다.
인간뿐 아니라 비(非)인간 생명체도 존중받는 사회를 원했을 것이고,
출산은 강요하면서 정작 엄마들과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는 사회와 반대되는 아동 친화적인 사회를 원했을 것이다. 그녀의 글에서 나는 그렇게 짐작한다. - P521

학사 일정에 여학생들이 어느 정도 참여할 수 있었지만 전면적 접근은허용되지 않았다. 식당을 지나갈 수는 있었지만, 감히 식당에 얼굴을들이미는 여학생은 남학생들이 돌처럼 던지는 빵에 맞을 각오를 해야했다. 르 귄이 작가, 그것도 사이언스 픽션 작가가 되자 해당 보루를 사수하려던남자들은 배타적인 빵 던지기를 재개했다. 르 귄도 알아챘고, 즐겁지 않았다.)르 귄은 래드클리프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프랑스 문학과 이탈리아 문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당시에 흔히 하던 말로 남자처럼 생각하도록 배웠다. 폭넓게 별나게, 엄중하게. 하지만 결혼과 함께 학계를 떠난 뒤 자신이 어떤 사회에 있는지 실감했다. 그곳은 법적 견지에서 여자들을 무책임한 열세 살짜리로 취급하는 사회였다. 자신이 성인임을 이미 깨우친 사람에게 이는 깡통 안에 화산을 봉하려는 것과 다름없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의 제2세대 페미니즘에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이 세대의 미국 여성들이었다. 이때 그 깡통이 폭발했다.
그리고 이 시기가 작가로서 르 귄의 에너지가 폭발하던 시기였다. - P522

하지만 정치적 생각과 활동은 이 놀랍도록 재능 넘치는 여성이 이룩한 다차원적 삶과 작품 가운데 단지 한 가지 차원일 뿐이었다. 예를 들어 어스시(Earthsea)‘ 3부작은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인상적인 탐구다. 어둠이 없으면 빛도 없다. 그리고 죽을 운명이야말로 모든 살아 있는 것에 실존을 허락한다. 어둠은 공포, 오만, 질투 등 우리 내면에 숨겨진 덜 유쾌한 면들을 아우른다. 주인공 게드는 자신의 그림자 자아에 맞서야 한다. 그림자에 먹히지 않기 위해서. 이 투쟁을 통해서만 그는 온전해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용들의 지혜와 다툰다. 우리의지혜와 다르고 애매모호하지만 그럼에도 지혜인 건 분명하다. - P522

최근 나는 친구를 잃고 슬픔에 잠긴 어느 여성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 나보다 훨씬 젊은 여성이었다. "어스시 3부작을 읽어요." 내가 권했다. "도움이 될 거예요." 그녀는 읽었고,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이제 어슐러 K. 르 귄이 죽었다.
부음을 듣고 이상한 환영을 보았다.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마법사게드가 한 아이의 영혼을 죽은 자의 땅에서 다시 불러오는 장면과 비슷한 환영이었다. 거기 불변의 별들 아래, 속삭이는 모래의 언덕을 고요히 내려가는 어슐러가 있었고, 멀어지는 그녀를 뒤쫓아 달려가며 울부짖는 내가 있었다. "안 돼! 돌아와요! 지금 이곳에 당신이 필요해요!"
특히 지금 이곳, 여성 비하‘가 일상화되고, 여권이 수많은 전선에서 -특히 보건과 피임 영역에서 후퇴하고, 기량과 지적 우월성으로겨루는 데 실패한 이들이 대신 제 음경을 무기 삼아 여성들을 일터에서 몰아내려는 땅에서 르 귄의 부재는 너무 뼈아프다. - P523

르 귄은 1970년대 초반에 이미 여성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목격했다. 때는 제2세대 페미니즘의 시대였다. 르 귄은 격분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있었다. 억압된 분노는 터질 수밖에 없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그런 분노가 여러 방향에서 불거졌다. 하지만 대개는 작업량과기여도가 컸거나 더 컸는데도 받는 대우는 훨씬 더 적었던 데서 오는분노였다. 당시의 유명 구호 중 하나가 "집안일도 일이다"였다. 여성들을 가장 분노하게 한 망언 중 하나는 놀랍게도 흑인민권운동계에서 나 - P523

왔다. "민권운동에서 여성의 유일한 위치는 누워 있는 것이다."
분노는 르 귄이 오래 씨름했던 숙제였다. 그녀는 2014년 「분노에 관하여 (About Anger)」라는 에세이에 이렇게 썼다. - P524

장기적 목표, 부단한 정의 추구. 르 귄은 여기에 생각과 시간을 많이들였다.
우리는 어슐러 K. 르 귄을 변치 않는 별들의 땅에서 도로 불러올 수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르 귄은 우리에게 다차원적 작품, 힘들여 얻은지혜, 본질적 낙천주의를 남기고 갔다. 그녀의 분별 있고, 명석하고, 교묘하고, 서정적인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더 요긴하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 그리고 그녀에게 감사해야 한다. - P524

소설 역시 투영과 환상입니다. 작가로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환상을그럴싸하게 만드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소설 쓰기를 폄하하는말이 아닙니다. 진실이 투영과 환상을 통해 드러날 수 있고, 또 실제로자주 그렇게 드러나거든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이 시인들에게 명했다시피, 소설은 진실을 말하지만 비스듬히 말합니다. 디킨슨은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실은 점진적으로 빛을 발해야 한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비추는 눈부신 만월이 아닌, 에둘러 보여주는 달빛. 이는소설 작가들을 위한 좋은 조언입니다.
저의 다음 타로카드 역시 달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번 카드의 명칭은 운명의 수레바퀴입니다. 저는 이를 소설의 중반을 대변할 카드로골랐습니다. - P537

소설가는 시간을 어떻게 구상할까요? 시간은 서사 안에서 어떻게배열될까요? 소설을 담는 책은 선형이지만, 다시 말해 페이지에 차례로 번호가 매겨지지만, 이선형 배치 안에서 시간이 처리되는 방식까지 항상 선형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시간 요소가 원을 닮을 수 있습니다. 서사 끝에서 중심인물이 다시 시작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되는 거죠. 초자연적이거나 부자연스러운 이야기가 아닌 한, 끝에 같은 나이로 돌아오진 않겠지만요. 또는 동시에 일어나는 이야기들이 평행하게 진행되다가 나중에 교차하는 구성도 있고, 시간이 역행하는 회상 장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구성도 있습니다. - P538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의 진입점은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가 비참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는 장면입니다. 그의 앞에 예전에죽은 동업자의 유령이 나타나고 이어서 세 개의 분리된 시간 보따리들-스크루지의 과거, 현재, 잠재적 미래-이 펼쳐지는데, 각각은 독자에게 스크루지의 인생을 보여주고 동시에 스크루지에게는 그가 어떤인간인지 보여줍니다. 이후 시간이 멈추고 되돌아갑니다. 스크루지는크리스마스이브를 처음부터 다시 살게 되고, 이번에는 훨씬 즐겁게 보냅니다.
A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의 경우는 소설의 진입점이 줄거리의 시작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진입점에서 여주인공캐서린은 이미 죽은 지 오래고, 그녀에게 집착한 나머지 각종 만행을저질러온 남주인공 히스클리프는 이미 중년입니다. 독자는 둘의 이야기를 다른 두 사람의 목소리로 듣게 됩니다. 한 사람은 히스클리프 소유의 집을 임대하려는 신사이고, 다른 사람은 주인공들의 집에서 하녀로 일했기 때문에 내막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을 아는 넬리입니다.
이상은 소설에서 시간이 배열되는 수많은 방식 중 몇 가지입니다.
이제 시험 삼아서, 누구나 아는 ‘빨간 망토』 이야기의 몇 가지 변형을 만들어봅시다. - P539

아니면 보다 불길한 관점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수사 스릴러에서 맡아놓고 쓰는 관점이죠. 이 방식은 시체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누구의 시체? 『빨간 망토』 이야기에도 여러 버전이 있는데, 어느 버전에서는 할머니와 늑대 모두 죽고, 다른 버전에서는 늑대만 죽습니다. 이야기를 두 가지로 하다가 독자에게 선택하도록 하면 어떨까요? 나만의모험담을 써보자 (Write Your Own Adventure Stories)』의 작가들을 포함해 여러 작가들이 시도했던 방식입니다. 샬럿 브론테도 소설 『빌레트』에서이 방식을 선보였죠. 이 경우는 사건 순서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입니다. - P541

화자가 여럿인 경우에도 사건 순서가 여럿입니다. 이런 구조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이서로 모순되는 설명들이 다중으로 얽혀 있는 구조를 일컫는 용어가 됐을 정도입니다. "아, 라쇼몽 기법" 하면 다들 알아듣고 끄덕거리죠.
어떤 소설 구조는 직소 퍼즐과 비슷합니다. 따로 놀던 조각들이 결국 하나의 그림으로 딱딱 맞아 들어가는 거죠. 또 어떤 구조는 클루(Clue) 게임을 닮았습니다. 작가가 단서를 뿌려놓고 독자는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줄거리와 구조가 어떠하든, 모든 스토리텔링 행위와 소설 쓰기 행위에는 공통적으로 있는 게 있습니다.  - P541

인간사회는 끝없이 변화합니다. 따라서 ‘역사의 잘못된 편(the wrongside of history)‘에서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역사라는 게누가 정권을 잡고 못 잡았는지, 누가 지적 첨단에 있는지 아닌지를 의미하는 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종류의 역사에는 정해진 편이없거든요. 역사는 필연적 선형 진행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시작해「요한계시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신의 도시가 일어나 모두가 영원히 행복해지는 결말은 없습니다. 인간의 권력과 유행의 진행에서 필연성이란 없습니다. 오늘은 역사의 옳은 편으로 보였던 것이 내일 잘못된 편으로 뒤집힐 수 있고, 그랬다가 내일모레 다시 옳은 편이 될 수도있습니다. - P545

소설 쓰기에서 포르투나 여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소설가입니다.
소설가가 시간을 배열하고 바퀴를 돌려서, 어떤 인물은 행복으로 들어올리고, 다른 인물은 밀어내거나 심지어 죽여 없앱니다. 어쩌면 소설의 시간은 바퀴와 도로의 조합입니다. 바퀴가 회전하면서 사랑의 부침과 삶의 흥망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바퀴는 회전하는 동시에 길을 따라 죽 굴러가고, 이에 따라 시간이 선형적으로 진행하잖아요 소설을쓸 때 여러분은 시계와 달력을 잘 봐야 합니다. X가 온실에 몰래 들어가 Y를 살해할 시간이 충분합니까? 여러분은 달도 주시해야 합니다.
알다시피 달은 환상을 의미해요.
사람의 운은 달과 같습니다. 항상 차올랐다 이울었다 하죠. - P545

하지만 우리가 어떤 카드를 택하든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만큼은 늘우리 마음 어딘가에 존재하면서, 소설의 사건들이 당위대로 풀리지 않을 때 우리에게 그럼 무엇이 당위인지 알려줍니다. 우리는 대체로 이렇게 공정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직관적으로 압니다. 우리는세상사가 공정하기를 바라지만, 상황이 늘 그렇지는 못합니다. 슬프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소설로 치면 그것이 현실의 투영입니다.
이제 저는 카드 덱을 도로 거둬들여 제 마법사 재킷의 주머니에 넣겠습니다. 타로 덱의 마법사는 단지 저글러일까요? 때로는 그렇습니다. 소설가들은 나름 재주를 부립니다. 모자에서 토끼를 뚝딱 꺼내놓을 때도 꽤 많아요.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마법사 카드는 긍정적변화에 관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소설도 그렇습니다. "당신의 책이 내인생을 바꿨어요." 사람들이 소설가에게 자주 하는 말입니다. 어떻게바꿨는지는 되묻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건 독자가 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 P5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온난화가 섭씨 4도 상승까지 진행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지구온난화 압박이 (기후와 관련 없는) 사회적·경제적·인구적 압박들과 결합함에 따라 사회 시스템 임계점 초과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 한계 상황에 이르면 대응 조치를 지원할 기존 기관들은 효력을 잃거나 심지어 붕괴할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저지대 국가들의해수면 상승이 통제적·적응적 이주가 어려운 수준으로 진행돼 결과 - P316

적으로 해당 섬이나 지역을 완전히 유기할 수밖에 없는 사태에 이를수 있다. 또한 폭염, 영양실조, 해수 침투에 따른 식수 악화 등의 보건악재들이 의료 시스템에 과중한 부담으로 작용해 결국 더는 대응이불가능해져 사회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
기후 영향의 성격과 규모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하는 이 같은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지구 온도 4도 상승에 대응이 가능하리라는 확신도없다. 4도 세계에서는 지역사회와 도시와 나라들에 극심한 붕괴・손상.혼란이 닥치고, 이런 위험의 대부분이 불평등하게 확산될 것이다.
빈곤층이 최대 피해자가 될 것이며, 지구 공동체의 분열과 불평등이지금보다 더 심화될 것이다. 4도 상승 예측은 결코 실현돼서는 안 되며, 온도를 반드시 낮춰야 한다. 오직 신속한 국제 협력과 선행 조치들만이 이를 달성할 유일한 방법이다. - P317

로마클럽 보고서와 세계은행 보고서 모두 지구온난화가 인류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해수면 상승, 기상이변, 사막화와같은 온난화 결과들에 집중합니다. 이 보고서들에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인류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요인이 두 가지 더 있습니다.
첫 번째는 메탄가스의 대기중 방출입니다. 방출원도 다양합니다.
영구동토층도 그중 하나입니다. 영구동토층 해빙이 진행되면 식생이부패하고, 메탄수화물이 녹아 엄청난 양의 메탄가스가 방출됩니다. 메탄가스의 지구온난화 효과는 이산화탄소의 스물다섯 배에 달합니다.
앤드루 웡(Andrew Wong)이 얼터너티브스 저널(Altermatives Journal)』 1월호에 썼듯 알래스카만 해도 "빙하의 후퇴와 영구동토층 해빙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50~70퍼센트 더 많은 매탄을 방출하고 있습니다." - P317

우리의 물리적 환경은 인간 생활의 기반이자 사회체제의 기반입니다.
이제 이 물리적 환경이 급변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문제들의 관점에서 저는 ‘변화‘, ‘방법‘, ‘세상‘을 극히 원초적인 방식으로 정의하고자 합니다. ‘세상‘이란 총체적 세상을 말합니다. 즉 기체, 액체, 고체로 이루어진 물리적 공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자 우리의 사회적 공간들을 에워싼 공간이죠. ‘변화‘는 물리적 변화입니다. 즉 물과 공기와 땅과 기후에 일어나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방법‘이란 우리의 물리적 공간에 영향을 미칠 긍정적 물리적 개입과 부정적 물리적 행동의 조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물리적 공간을보존해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우리의 오래된 방식 중 일부는 바꿔야합니다. 그리고 현재 하는 일 중 일부는 멈춰야 합니다. - P318

각각의 기술은 양날의 검입니다. 한쪽 날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르지만, 반대쪽 날은 우리의 손가락을 베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과500년 전 사람에게는 마법의 세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법사와는거리가 멉니다. 우리가 병에서 지니를 풀어놓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니를 병에 도로 욱여넣는 것은 현재로서는 우리의 능력 밖입니다.
우리는 통제 불능의 소용돌이를 창조했고, 그 안에 살고 있으며, 만약그것이 멈추면 끔찍한 혼돈과 난장판이 닥칩니다. 전기가 모두 나가고 기차와 차가 운행을 멈추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보세요. 현재 인류의 대부분은 도시에 사는데, 도시에서는 단 며칠 만에 식량이바닥날 겁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우리가 구축한 기묘한 메커니즘 안에 있고,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이 메커니즘에 근본적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종국에는 이것이 우리를 배속에 넣은 채로 스스로를 잡아먹고 말 겁니다. - P324

아마도 인류 최대의 실패는 현대의 실패일 겁니다. 우리는 나머지세계와의 연을 끊어버렸고, 모두는 나머지 모두와 연결돼 있다는 것을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과 별개가 아닙니다. 하지만 막대한 돈이 암 치료법 같은 멀어지는 무지개들로 계속 향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대부분의 암은 우리가 우리 몸에 쏟아붓는 산업 화합물과 부산물 때문에 생긴 것 아니었나요? 또한 불로장생의 꿈과 우리 뇌를 컴퓨터에 업로드해서 우주로 발사하겠다는 야망에도 막대한 돈이 투입됩니다. 반면 생물권의 기능 보존을 위한 필사의 노력에는 우리 부의 티끌만큼, 기부금 전체의 3퍼센트 미만만이 찔끔찔끔떨어질 뿐입니다. - P327

우리가 지구를 생명 전체에 부적당한 곳으로 만드는 게 빠를까요, 인간만살지 못할 곳으로 만드는 게 빠를까요? 당연히후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적어도 일부 곤충, 규조류, 혐기성 미생물, 심해 오징어에는 못 당합니다. 어쩌면 자연은 우리의 멸종을 기다릴 겁니다. 그럼 우리에겐 자연이 필요한가요? 결단코 필요합니다. 인간이 호흡하지 않고 사는 방법을 개발하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화학과 물리학은 흥정이란 게 없습니다. 항상 장부를 착착 맞춤니다. 열이 증가해서 에너지가 발생했다면 거세진 바람과 높아진 파도의 형태로 방출되어야 하고, 증발로 올라가는 게 있으면 폭우와 눈보라로 내려오는 게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지구는 이제 기후변화로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2010년 환경운동가 빌 매키번(BillMcKibben)이 『우주의 오아시스 지구』에서 경고한 덜 친절하고 더 불안정한 새로운 행성이 이미 우리 코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거기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사는 규모를 줄여서, 우리가 촉발한 맹렬한 소모의 과정을 되돌리거나 최소한 중단해야겠죠. 아니면 현대사회의 붕괴에 뒤따를 비참함을 감당하든지요. - P328

해변을 뒤덮고, 먹이를 싹쓸이해 토착 어종의씨를 말리는 등 오대호 환경을 파괴하는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저는그 원주민 어부에게 물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당연히 어부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의 생계와 직결된 문제니까요. 하지만 그는 미소만 지었습니다. "자연이 알아서 할 겁니다."
나는 어부의 말을 자연이 얼룩말홍합을 없애줄 거라는 의미가 아니라 결국 새로운 균형이나 질서가 부상할 거라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부의 말이 맞습니다. 자연은 항상 그랬으니까요. 그 결과가 우리의 바람과 다를 수는 있지만, 어차피 자연은 인간의 바람 따위신경 쓰지 않습니다. 물리학과 화학은 기회를 두 번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어요. 우리는 두 번째기회를 갈망합니다. 우리의 종교적 우화와 설화와 영화는 두 번째 기회들로 넘쳐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그것이 실현된다고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인류의 미래 생존을 간절히 빌어야 할 때가 온 듯합니다. 그것을 정말로 원한다면, 우리가 자찬해 마지않는 인간 지능을 이용해 미래를 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P329

우리에겐 번역가들이 있습니다. 번역가들이 더 나아요. 왜냐하면 기계와 달리 그들은 어감을 인식할 수 있고, 각자의 해석을 창조할 수있으니까요. 지금까지 여러 훌륭한 번역가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들의 눈과 귀를 통해 제 작품을 보는 것은 제 작품에심지어 저에게도 새로운 차원들을 더했습니다. W. G. 제발트가 그의번역가에게 한 말이 제 마음입니다. "이보다 나은 결과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이 일에 쏟았을 긴 시간과 엄청난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번역가 여러분. 작가로서 우리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독자로서 우리는 여러분이 열어주지 않았다면 잠겨 있었을문으로 들어가고,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침묵했을 목소리들을 듣습니다. 창작 자체처럼 여러분의 일도 인간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에기반합니다. 그것은 결코 작지 않은 희망입니다. - P354

여자아이들은 꽤 이른 나이부터 아름다움과 얽힌다. 거기에는 미의 개념(너 정말 예쁘다!"), 탐미와 연계된 사물(거울 속의 너를 봐), 심지어 미적 현혹에 대한 금기("저건 엄마 립스틱이야. 손대면 안 돼")도 포함된다. 아이에게 아름다움은 어딘지 마법적이다. 아름다움은 분홍색이다. 반짝반짝 빛나고 아른아른 빛난다. 아이에게 아름다움은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동화 속 공주의 발레리나 드레스를 입은 다섯 살배기들은 대개 벗기를 거부한다. - P355

약 오르게 사랑스러운 여주인공을 보면서 그들이 느꼈을 자괴감을 언젠가부터 아이들이 바비 인형의 외관을 일부러 망가뜨리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다락방 트렁크에서 머리털이 뽑히고, 보라색 매직펜 문신으로 뒤덮이고,
양팔이 떨어져 나간 바비가 심심찮게 발견된다. 한때 이들의 주인이었던 소녀가 자신이 신데렐라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치공감 주술 의식의 반대 버전처럼, 자기 인형에다 화풀이를 한 건 아닐까? 이렇게 화난 소녀들은 훗날 메이크업 주말강좌, 패션 컨설팅, 일품 손톱 관리로 자존감을 회복했을까? 어쩌면. 하지만 가능성은 낮다. - P357

우리가 어릴 때 책에서 배운 미의 개념의 긍정적 측면은 아름다움이출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좀 더 커서 그리스신화에 본격적으로 빠졌을 때 아름다움에 부정적 측면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나치게 아름다우면, 가학적이고 막돼먹은 신들의 반갑지 않은 관심을 끌게 된다. 미녀에게 주목한 신이 남신이면 미녀는 쫓기는 신세가된다. 결과는 페르세포네처럼 납치당해 지하세계로 끌려가느냐, 레다처럼 백조로 변한 제우스에게 겁탈당해서 알을 낳느냐 중 하나다. 이런 운명을 피하는 방법은 나무나 강으로 변하는 것뿐이다. 이는 우리가 원하던 토요일 밤의 데이트가 아니었다. 
미녀에게 주목한 신이 여신이면, 미녀는 대회의 상품이 되거나 불같은 질투의 대상이 된다.  - P357

신반인의 지위와 맞먹었다. 농염한(glamorous), 매력적(charming), 매혹적(fascinating), 황홀한(entrancing), 고혹적(enchanting). 이 단어들의 어원은모두 초자연적 현상과 닿아 있다. 아름다움이 한 꺼풀이든 아니든, 저주이는 축복이든, 오만하든 매혹적이든, 현실이든 고안된 환상이든, 아름다움에는 마법의 힘이 있다. 적어도 우리의 상상 속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이것이 립글로스 튜브들이 수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팔려 나가는 이유다. 우리가 여전히 요정을 믿는다는 뜻이다. - P360

에세이 제목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세계였지만, 이때의 저는 막상거기서 무엇을 이해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아요.
저는 열아홉의 제가 논리의 갈피를 잃고 해매는 것을 지켜봅니다.
아버지-권위주의 모티프를 들먹였다는 것은, 카프카의 작품과 그의개인사를 다시 붙이겠다는 뜻인가요? 카프카는 평생 강압적인 아버지와 갈등을 겪은 것으로 유명하거든요. 하지만 저는 이 쟁점을 비껴갑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카프카가 살았던 역사적 시기(제1차세계대전 이전, 도중, 이후 시대. 카프카는 히틀러가 뮌헨 폭동을 일으킨 직후인1924년에 사망했습니다), 그를 둘러싼 지리적 위치와 문화적 환경(체코슬로바키아와 중부 유럽), 그리고 (체코어를 쓰는 프라하의 독일계 유대인이었던그의 처지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을) 그의 취약하고 고립된 정체성에 대한쟁점들도 모두 피해 갑니다. - P366

열아홉 살의 제게 진정한 예술이란 플라토닉한 추상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었고, 현실과 아무 접점 없이 지구 위를 떠도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믿으면 제가 그때 쓰고 있던 어두컴컴한 소설들에 제 전 남자친구들을 투입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러다 저는 진정한 예술에 대한 카프카의 견해를 잡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카프카의 유명한 단편들 중 몇 편은 사실상 진정한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저는 그것도 몰랐던 거죠. 예를 들어 가수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Josefine, die Sängerin oder Das Volk der Mäuse)」의 요제피네는 노래 실력이 별로라서 쥐 관중에게 경멸을 받지만 노래를 멈추지 않습니다. 「유형지에서는 유죄 선고 자체가 형 집행입니다. 무수한 바늘이 작동하는 기계장치가 죄수의 몸에 죄목을 새기며 그를 심판합니다. 또한 「단식 광대(Ein Hungerkinstler)」는 처음에는 열광적인 관심을 받지만 대중이 그의 단식에 흥미를 잃자 방치된 상태로 결국 굶어 죽고 맙니다.  - P367

이제 시간을 빨리 감아서 1984년으로 가볼까요. 25년이 지났고 저는 이제 마흔넷이고, 가족과 함께 서베를린에서 살고 있습니다. 기쁘게도 주(駐)체코 캐나다 대사관의 후원으로 카프카의 도시 프라하를방문할 기회가 왔고, 우리는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통제가 삼엄한 소련 위성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건물 안이나 차안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예를 들면 연탄 사용에 따른공기 오염 수준이 살인적이라느니 하는 얘기요. 곳곳이 도청되고 있다고 봐야 했습니다. 공원 한복판 정도만 안전해 보였어요. 우리가 호텔방에 이르자 벨보이가 샹들리에를 가리키더니 손짓을 하며 우리를 한구석으로, 숨겨진 마이크에 소리가 잡히지 않는 우묵한 곳으로 불러 모있습니다. 그러더니 달러 환전을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 P368

도시 위로 프라하성이 어둡고 을씨년스럽게 떠올라 있었습니다. 카프카의 『성』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단지 추상적인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실제의 성이었습니다. 카프카가 죽었을 때 성』은 미완으로 남았고, 이후 지금까지도 평단은 작품의 의미를 궁리중입니다. 성의 답답한 미로 속을 헤매는 주인공 K가 찾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 그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줄 관리? 이 책은 관료주의의 무도함에 대한 비판일까?
아니면 K도, 베케트의 주인공처럼 존재를 드러내는 법이 없지만 그럼에도 거기 존재하는 신을 찾고 있었던 걸까? 1959년 열아홉의 저라면아마 카프카의 성과 관계있거나 아니면 맥락이라도 통하는 여러 문학적 성들을 거론했겠죠. 예를 들어 독일 낭만주의 고딕 양식의 음울한성들, 에드거 앨런 포의 「붉은 죽음의 가면(Masque of the Red Death)」에나오는 성(엄밀해 말해 이 경우는 성이 아니라 대사원이었습니다),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에서 처녀들을 감금하고 유대인들을 고문하는 악명 높은 토퀼스톤성, 죽지 않는 자들이 출몰하는 불길한 드라큘라의 성 등.
19세기 사람들에게 성은 그다지 신나고 유쾌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 P369

카프카라면 이런 경험을 여러 관점에서 향유했겠죠?
카프카와의 세 번째 조우는 먼젓번과 몹시 달랐습니다. 다시 빨리 감기를 해보죠. 이번에는 1990년대 후반으로 갑니다. 베를린장벽은 이미허물어졌고, 소련은 붕괴했고, 냉전도 이미 종식됐고, 바야흐로 쇼핑이제2의 섹스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프라하를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서구스타일의 문학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도시는 관광객으로 붐볐고, 각종 보헤미안들의 핫스폿이 되어 있었고, 나중에 알았지만 세계의 부동산 시장에서 암약하는 러시아 마피아의 격전지이기도 했습니다. 프라하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에서 살아남았고, 히틀러가 도시의 아름다움에 반한 덕분에 대대적 파괴를 면했습니다. 휘황하게 불 밝힌 프라하는 동화 속의 도시 같았습니다. 카를 다리의 조각상들도 제자리로 돌아왔고, 한때 귀신의 집 같았던 프라하성은 관광의 중심이 됐고, 구시가 광장은 수공예박람회로 성황이었습니다.  - P371

자신이 이렇게 기념의 대상이자 돈벌이의 수단이 된 것을 알면 카프카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제 생각에 그는 웃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열아홉에서 예순 살 사이에 카프카에 대해 알게 된 것 중 가장 의외였던 것이 뭔지 아세요? 카프카는 자기 작품 상당수가 엄청나게 웃기다고 생각했어요. 소송이 웃기다고? 「단식 광대」가 웃겨? 유형지에서가 웃겨? 음, 그래요. 어떤 견지에서 보면 웃기죠. 그리고 당시는 훗날 히틀러가 출현해 현실 세계에서 어떤 일들을 벌일지 몰랐던 때였으니까요.
어쨌든 우리는 카프카 기념품 모음에서 다소 기괴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니, 카프카적 인상이라고 해야겠죠. 하지만 이 경우는 음울한카프카가 아니라 보다 익살맞은 카프카, 또는 적어도 보다 쾌활한 카프카였어요. 만약 제 1959년 에세이를 21세기의 두 번째 10년에 접어든 지금 다시 쓴다면 저는 이런 면의 카프카에 더 중점을 두렵니다.  - P372

이런 카프카도 있습니다. 고립되고 박해받는 K가 아닌 카프카, 이름없이 익명의 군중에 섞여 있지만 자유로워서 거의 노래 부를 지경인그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의‘일 뿐입니다. 카프카는 언제나 ‘거의‘만허용해요. 삶에서처럼 문학에서도, 여자들과도 그는 어느 한곳에 머무를 줄 모릅니다. 그를 딱 꼬집어 정의할 방법은 없습니다. - P373

저는 아직 노르웨이의 실제 숲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 뭐라 평할 수 없습니다. 저는 미래 도서관의 장서실에 들어가 다른저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기증한 작품들의 제목을 볼 수도 없습니다.
아흔 번째 저자, 아흔다섯 번째 저자 등 먼 훗날의 저자들은 그들의 봉인된 상자가 열리고 그들의 작품이 출판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책을 읽는 사람들이 동시대인이 될 겁니다. 하지만 제 작품을 읽을 사람들은 100년이나 떨어진 미래에 있습니다. 그들의 부모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그들의 조부모도 아직 세상에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미지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요? 그들은 제가 살았던세상, 제가 미래 도서관에 맡긴 작품의 토대가 되었던 세상에 대해 무엇을 이해하게 될까요? 그리고 그때는 말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언어 자체는 지각의 암석처럼 압력과 변형에 약하니까요. - P375

사이언스 픽션은 공간여행 - 저자가 한 번도 본 적 없고, 어쩌면 인간의 상상에만 존재하는 장소들로의 여행을 재료로 하는 예술입니다.
시간여행도 비슷합니다. 미래 도서관의 경우 저는 제 원고를 시간 속으로 떠나보냅니다. 그곳에 제 책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인류가 남아있을까요? ‘노르웨이‘가 있을까요? ‘숲‘이 있을까요? ‘도서관‘이 있을까요? 기후변화, 해수면 상승, 삼림 해충의 습격, 범지구적 유행병을 포함해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는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의 모든 요소들이 미래에도 계속 존재할 것으로 믿는 것은 분명 희망의 행동입니다. - P375

미래 도서관이란 그런 것입니다. 한때는 있었지만 이제는 과거로 사라진 삶들의 편린을 담은 용기가 될 겁니다. 하지만 종류 불문모든 글쓰기는 사람의 소리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펜, 인쇄기 잉크, 붓, 침, 끌이 만든 글쓰기 자국들은 악보의 음표들처럼 죽어누워 있을 뿐입니다. 독자가 거기 도착해서 목소리를 회생시키기 전까지는 말이죠.
오랜 세월 침묵하던 제 목소리가 100년 후에 갑자기 깨어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참 묘합니다. 아직은 세상에 체현되지 않은 미래의 손이 그것을 봉인된 함에서 꺼내 첫 페이지를 열 때, 그 목소리는 가장 먼저 무슨 말을 하게 될까요?
제 텍스트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독자의 만남이란 언젠가 제가 멕시코의 동굴 벽에서 붉은 손바닥 자국을 보았던 경험과 비슷하지 않을까생각합니다. 그 손도장은 3세기 넘게 봉인돼 있었습니다. 지금의 누가그 흔적의 정확한 의미를 판독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그것의 일반적의미는 범지구적입니다. 어떤 인간이든 그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손자국은 이렇게 말합니다. 안녕. 여기에 내가 있었어. - P376

앞서 말했듯 저는 세상에 일어난 적이 없거나 가용 기술로 실현할수 없는 일은 책에 담지 않았습니다. 저는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 히틀러가 폴란드를 비롯한 점령국에서 벌인 아동 강탈, 나치친위대를 위한 일부다처 정책,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참고했습니다. 미국 노예에게 강요된 문맹, 초기 모르몬교, 중세의 집단 교수형(모두가 줄을 당기면 죄책감도 공유되니까?)에서도영감을 얻었습니다. 제물로 바쳐진 사람을 손으로 찢어 죽였던 고대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숭배 의식도 참고했습니다. 몇 가지 예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시녀‘ 의상은 1940년대 ‘올드 더치 세제(Old Dutch Cleanser)‘의 패키지 삽화를 참고했습니다. 얼굴을 가리는 하얀 모자와 풍성한 치마의 여인이 어릴 적의 제게 충격적인 인상을 남겼거든요.  - P391

작중의 전체주의국가 길리어드의 사회구조를 모든 남자가 모든 여자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지는 절대적 남존여비 구조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길리어드는 젠더 구분에 따른 독재라기보다 전제주의(主義) 또는 전체주의체제입니다. 따라서 고위층 남성의 아내도 남편보다는 낮지만 높은 지위를 누립니다.
또한 하층민 남성은 고위층 여성보다 낮습니다. 이는 역사상 흔하게작동했던 방식입니다. 길리어드에서는 고위층 남성만 가임기 여성을한 명 이상 가질 수 있습니다. 즉 출산을 위한 ‘시녀‘를 따로 둘 수 있습니다. 이 역시 현실에 분명히 있는 일입니다. 본부인이 가정에서 지배권을 행사하고, 다른 젊은 아내들은 그녀의 처분을 따릅니다. 고위층남성은 이들 모두에게서 자식을 얻습니다. 능력이 되면요. 하층민 남성은 ‘경제부 econowifie)‘한 명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경제부‘는 하층민 남성의 아내를 말하는데, 고위층에서 여러 여성이 분담하는 일본부인의 대외적 사교 기능, 정부와 첩의 섹스 기능, 하녀의 가사노동-을 혼자 다 해야 합니다. 제가 시녀 이야기』의 세계관을 이렇게 정한것은 이것이 현실 세계에 종종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P392

두 번째 문학적 영향은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왔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책이 아니라 여러 두루마리 기록의 모음집으로 시작된 매우 복잡한 작품입니다. 코덱스북-책등이 있고 거기에 책장을 엮어서 넘기며볼 수 있게 만든 오늘날의 책 형태요-이 개발되자 비로소 ‘비블리아(biblia, 작은 책들)‘가 하나의 책으로 묶였고, 그때서야 성경이 하나로 통합된 작품의 외양을 갖추게 됐습니다. 각 부분이 각기 다른 시기나 시대에 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성경에는 엇갈리는 메시지들이 수두룩합니다. 과부 · 고아 빈민 · 피지배민 등에게 매우 호의적인메시지들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 분위기의 메시지들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적들을 풀 한포기 남김없이 초토화하고 그들을 자식까지 잡아먹는 처지로 만들겠다는 저주도 등장합니다. 사실 지금껏 많은이들이 이런 메시지들에 더 열광했죠. - P393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변수가 너무 많고 미지의 요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죠. 여럿이 아무리 면밀히 판을 짜도 일은 언제나 빗나갈 수있습니다. 경험에 따른 추측과 그럴듯한 예상은 할 수 있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시녀 이야기』에 대한 많은 것들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혈통과 기원, 과거와 현재를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시녀 이야기』의 미래만큼은 여러분의 손에 독자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책이 됐든 책의 미래는 독자가 결정합니다. 작가는 책을 쓰고 나면 그것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고 기차역에서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할 뿐입니다. 그러면 책은 미지의 땅들과 미지의 마음들을 향해 여행을 떠납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책에나 일어나는 일이죠. 이렇게 오랫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이 책을 좋아했다는 것만이 늘 놀라울 따름입니다. - P398

내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이렇게 어렵게얻어낸 자유를 어째서 여러 서방국가의 시민들은 찍소리 없이 때로는기꺼이 포기했던 걸까? 대개는 공포 때문이다. 그리고 공포는 여러 형태를 취한다. 때로는 그것이 급여를 못 받을지 모른다는 공포로 귀결된다.
기차가 제시간에 다니고 내 일자리가 보장되는 한,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엄지 매달기‘ 고문을 당하고 있다 해서 법석을 떨 이유가 있을까?
그렇게 ‘엄지 매달기‘ 고문이 본격화하면 다른 종류의 공포가 자리잡는다. 엄지손가락을 보전할 유일한 방법은 개구리 연못의 수면 아래에 납죽 엎드려 있는 것이다. 괜히 머리를 들거나 크게 울어대는 건 금물이다. 우리는 아무런 ‘허튼짓‘도 하지 않으면 어떠한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허튼짓‘은 매우 유동적인 범주다.
나쁜 일은 결국 일어난다.
하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자유언론에는 재갈이 물려 있고, 독립적 사법부는 전부 해체돼 있고, 독립적 작가·가수·예술가도 남김없이 진압돼 있을 것이므로 우리를 방어해줄 거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아야 할 한가지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아무 책임감도 견제 장치도, 균형 감각도 없는 전제주의 체제는 가공할 권력 남용을 만들어낸다. 이는 예외 없는 법칙이다. - P405

우리 대부분은 이중으로 부자유하다. 우리의 ‘자유‘는 승인과 감독을 받아야 하는 것들에 한정돼 있고, 우리의 ‘하지 않을 자유‘는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 많은 것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 못한다. 욕조는 시작에 불과하다. 대기와 물에 퍼진 유독성 화학물질에서 벗어날자유? 홍수와 가뭄과 기근을 겪지 않을 자유? 결함 있는 자동차로부터무사할 자유? 매년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잘못된 약물 처방을받지 않을 자유?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모든 기술은 양날의 도구다. 데이터 - P407

가 새는 구멍들로 가득한 인터넷도 말은 일사천리로 전파한다. 덕분에전보다 권력 남용을 밝히기가 쉬워졌고, 청원에 동의하고 항의의 목소리를 내기가 쉬워졌다. 물론 그 자유도 양면적이다. 내가 서명한 탄원이 내 정부가 나를 공격하는 증거로 이용될 수 있다. 모이솝우화 중에 왕을 원했던 개구리 이야기가 있다. 신은 왕을 내려달라고 청하는 개구리들에게 통나무 하나를 던져주었다. 통나무는 물에 둥둥 떠다닐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개구리들은 한동안은 만족했지만 이내 불평을 늘어놓으며 더 활동적인 통치자를 보내달라고 했다. 귀찮아진 신은 그들에게 황새를 보냈고, 황새는 개구리들을 몽땅먹어치웠다. - P408

우리의 문제는 서방세계 정부들이 점점 통나무 왕과 황새 왕을 합친불쾌한 조합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찰하고 통제할 자유를 행사하는 데는 능하고, 시민에게 이전에 누렸던 자유를 허용하는 데는 서툰 정부. 보안법을 고안하는 데는 능하지만 그 부작용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데는 서툰 정부. 그 부작용에는 없는 문제도 있다고 하는 긍정오류도 포함된다. "당신이 첩자가 아니라는 증거를 대봐." 내 정체를 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누구라도 내 데이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을디지털 기술이 삶을 엄청 편하게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다. 일단 클릭하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동안 할양했던영토를 일부라도 탈환해야 할 때가 아닐까? 블라인드를 내리고, 염탐을 차단하고, 사생활 개념을 복구할 때. 오프라인으로 전환할 때.
먼저 나설 사람? 맞다. 그럴 줄 알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 P408

치장은 인간의 아주 오래된 관심사다. 문신에서 가발과 귀걸이, 버슬 엉덩이와 빅토리아시크릿까지 우리는 먼 옛날부터 우리 몸을 장식해왔다. 복장이 그 사람을 말해주진 않아도,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생각하는지에 대한 유용한 힌트는 될 수 있다. 소설에서 이는 지극히중요하다. 우리가 셜록 홈스를 사랑하는 것이 그의 추리력 때문만은아니다. 그의 사냥 모자 때문이기도 하다.
혹시 여러분도 이런 디테일에 집착하는가? 당당해져도 좋다. 그래서 만약 내가 양방향 스트레칭 거들에 대해 실수하면, 모쪼록 내게 힐난의 편지를 보내주기 바란다. - P4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