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라니. 내가 아무리 작은 소리로 음악을 틀어놓았다고는 해도, 늦게까지 집에도 못 들어가고 모니터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즐기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나 그가 건넨 인사는 아주 적절했다. 그는 이 연구원에서 오래 일해온 게 틀림없다. 적어도 신입 직원은 아닐 것이다. 내가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걸보면,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이직했지만 내 생활 패턴에는별다른 변화가 없다. 전부터 공동연구하던 팀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연구실의 경위도 좌표가 바뀌었을 뿐, 같은 사람들과 같은 목표를 좇고 있다. 그러고 보니 대학원생 시절에도 이런 종류의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교내 천문대 입구좁은 공간에 앉아 계시던 경비원께서는 출입하는 이들에게 늘상 인사를 해주셨고, 천문대로 올라오는 비탈길에 쌓이는봄의 벚꽃잎과 가을의 낙엽과 겨울의 눈을 쓸어주셨다. 경비원을 보안 시스템으로 대체하는 바람이 분 뒤로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런 인사를 이직 후 다시 하게 되었다. - P74

또다른 중요한 일은 교육이다. 내가 가르치는 게 아니라내가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연구 윤리니 직장 내 성희롱이니 보안이니 실험실 안전이니 하는 다양한 주제의 교육이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 직장 다니고 월급 받는 것은얼마나 큰 축복인가 생각하며 묵묵히 교육에 참석한다.
나의 고용 상태는 내가 참여할 연구 과제가 있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여러 연구자가 공동참여하는 큰 과제일 때도있고, 내가 연구 책임자이자 유일한 참여 연구원인 1인 과제일 때도 있다. 과제 기간은 몇 개월짜리에서 십여 년까지다양하지만 대개 3~5년 정도다. 과제가 끝나면 계약직 연구원인 나의 고용 기간도 끝난다는 뜻이므로, 과제가 끝나 - P75

기 전에 미리미리 다음 과제 혹은 다음 직장을 알아봐야 한다. 과제 제안서나 자기소개서, 연구 계획서를 쓰고, 그간의연구 실적을 모아서 양식에 맞게 입력하고 증빙 자료를 만드는 일, 졸업 증명서와 성적 증명서를 새로 발급받는 일은아주 지겹지만 ‘먹고사니즘‘과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좌우할 수 있는 신성한 작업이므로 소홀히 할 수 없다.
과학 공부는 아니지만 과학자라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해야 하는 부수적인 일들, 중요도는 낮지만 마감을 넘겨서는 안 되는 종류의 일들을 좀 해치웠나 싶으면 이번에는 손님이 찾아온다. 우연히 근처에 볼일이 있어 온 김에 들렀다며 선후배들이 깜짝 방문하기도 하고, 행성과학을 전공하고싶다는 학부생이 진로 고민을 들고 찾아오기도 한다. 같은팀에 있는 대학원생이 하소연을 하러 오면 열심히 들어주고맞장구쳐준다. 내가 괴로울 때 그들이 그렇게 해주었듯이, 곪아 터지기 전에 미리미리, 약해지려는 마음을 서로 달래주는 품앗이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 상담도 잦다. 또래 중에 일찍 결혼한 편이기도 하고, 대학원에 다니면서 아이를낳고 키우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서다. 평소 왕래가 잦지 않던 동료가 어느 날 멋쩍은 표정으로 나를 조심스레 불러 세운다면, 기혼자 혹은 부모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물으려는 참이다. 이 또한 누군가의 인생에 관한 신성한 논의다. - P76

그 모든 일은 일과 시간 중에 일어난다. 중요도는 낮지만마감 시간 내에 마쳐야 했던 일이 다 끝나고 방문객들도 돌아가고 나면, 그제야 연구 주제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시작된다. 전화도 오지 않고,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의발길도 조용해진다. 공부에 빠져들기 딱 좋은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대학원생들은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머물러 있는경우가 많다. 나도 부모가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연구실에서 밤을 새다 버스가 끊긴 길을 걷고 또 걸어 집에 들어간적도, 아예 조금 더 기다렸다 새벽 첫차를 탄 적도 많다. 그러나 이제는 돌봐야 할 자식들이 있으니 정해진 시간이 되면 퇴근해야만 한다. 이제 막 집중을 좀 해보려는데 집에 갈시간이라는 알람이 울리면 선뜻 손놓고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정말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시각이 되기 직전에야 닥치는 대로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들고 뛰쳐나간다. 생각해보면 뛰쳐나가지 않은 날이 드물다. 왜 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에야 일어서는지, 엄마는 늘 뛰어다닌다. - P77

의심하는 것이 직업이라고 해도 과언이아니다. 하나의 문제에도 다양한 각도에서 의심하고, 그 답을 구하려 애쓰며, 답을 찾은 뒤에도 과연 답이 하나뿐인지또다른 측면에서의 답은 없는지 계속해서 의심하는 것, 그것이 과학자가 하는 일이며 해야 하는 일이다. 그걸 머리로는 안다. 연구실 책상에 앉아 있던 시간의 대부분은 내가 방금 한 일과 조금 전에 한 일과 한참 전에 한 일을 의심하는데 썼으니 몸으로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가 내게 ‘과학자‘라는 이름표를 달아 연구실 밖으로 나오게하자마자 어설픈 확신의 말을 의심도 없이 내뱉다니.
방송을 보니 다행히 내 인터뷰는 정말 짧게 나왔다. 유성에 대해서 나름대로 설명한 부분도, 백 퍼센트 운운한 부분도 모두 편집되었다. 눈 깜짝할 새에 내 분량이 끝나는 걸보고 나니 갑자기 소화가 잘되는 것 같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밥을 잔뜩 먹었다. 그러고는 속으로 쿡 웃으며 자조했다. ‘백 퍼센트라고? 웃기시네. 멀쩡한 과학자가 되려면 난아직 멀었구나."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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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속에는 두려워하는 내가 있다. 졸업할 수는 있는 걸까 두려웠고, 졸업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웠다. 어쩌면 졸업 후의 더 큰 두려움을 유예하기 위해 수료생의 고뇌에 천착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도중에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나를 노련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다시 새로움을 향해 떠나야 할 때,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느낄 때, 나는 과거의 나를 찾아간다. - P31

오늘날 대학이 수행하고있는 기능이란 어리둥절한 채 성인이 되어버렸으나 실상은유예된 청소년에 지나지 않는 이들의 귀중한 스무 살 생명표를 꼭 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해 태어난 국민 중 팔 할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사회, 학생들은 대학에 학문을 배우러 오지 않는다. 초등학교 다음 중학교에 갔고, 중학교 다음 고등학교에 간 것과 같이 고등학교를 마쳤으니 대학에 진학할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학비보다 열 배는 비싼 등록금이요, 모두가 입어야 하는 교복 대신모두가 가져야 하는 스펙을 등에 업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젊음은 싸구려 술과 술값보다 비싼 커피와 크고 작은 성추행과 미필자조차 향유하는 선배들의 군대식 갑질, 전공과목들을 시간을 뺏는 교양 강의와 대학생다운 교양을 쌓을틈을 주지 않는 전공 강의, 토익 시험과 한국사 시험과 각종컴퓨터 자격증과 크고 작은 기업의 공모전과 인턴 경력에소모된다. 과제로 수많은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제대로 된글쓰기를 연습할 기회는 별로 없다. 대신 비문으로 A4 용지다섯 장을 채워내는 끈기, 남의 것을 베끼되 표절 여부를 자동으로 검사하는 프로그램에 걸리지 않게 몇몇 표현을 바꿔치기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 비용과 시간과 어처구니없는 문화와 그 젊음은 대체 무엇을 위한 제물인가.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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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채경

천문학자, 행성과학자.
현재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과학탐사본부 행성탐사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달, 화성, 소행성 등 태양계 천체로 향하는 국내외 우주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탐사를 기획하는 일에도 함께하고 있다.
함께 쓴 책으로 『과학산문」 등이 있고, 우아한 우주, 우주생물학』(공역)을 우리말로 옮겼다. - P-1

연주시차였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매년 한 바퀴씩 돌면서, 이쪽 끝에 있을 때와 반대쪽 끝에 있을 때 별의 위치가약간 다르게 보인다. 마치 왼쪽 눈만 뜨고 볼 때와 오른쪽눈만 뜨고 볼 때 책상 위 물건의 위치가 달라 보이는 것처럼말이다. 대신 멀리 있는 산이나 건물의 위치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별도 마찬가지다. 멀리 있으면 지구가 6개월에 한 번씩 오른쪽 왼쪽에서 본다고 해도 그 자리에 있는 것같지만, 가까이 있는 별은 위치가 달라 보인다. 반대로 말하자면 시차가 클수록 가까운 별이다. 지구가 일 년 동안 더큰 원을 그리며 돈다면 별의 연주시차는 더 클 것이다. 거리와 각도, 시차를 설명하기 위해 칠판에 옴싹 달라붙어서, 모두가 보고 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게 애쓰며 점 두 개를 칠판에 찍고는 돌아서서 이토록 흥미진진한 것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던 그 순간, 무미건조한 중년아저씨의 눈에서 반짝, 소년이 지나갔다. 술이나 산해진미도 아니고, 복권 당첨도 아닌데. 하다못해 아름다운 ‘연주씨‘를 만난 것도 아니고 그냥 연주시차. 지난 십몇 년 동안 한해에 예닐곱 반에서 똑같은 설명을 했을 텐데 어째서 연주시차 따위가 저 사람을 그리 즐겁게 하는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일 년 뒤, 나는 지구과학 경시대회에 나가서 어쭙잖은 상을 탔다. - P11

대학에 들어갔더니 그런 귀여운 교수님들이 또 있었다. 퇴임을 목전에 둔 할아버지 교수님께 기본천문학 강의를 들였다. 우리나라 천문학자 1세대에 속하는 분인데, 그 연세에도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셔서 천문학자가 아니라 조선시대 최고 무관이라고 해도 어울리는 분이었다. 그런 장수 같은 사람이 칠판에 별을 그릴 때면 어찌나 작고 예쁘고 단정하게 그리는지. 나는 교수님이 별을 그릴 때마다 너무 귀여워서 속으로 쿡쿡 웃었다. 칠판에 별을 그릴 일은 자주 있었다. 중요한 부분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보이는 그대로 별을 논하니까 별. 성단을 논하니까 또 별.
귀엽기로는 내 지도교수님도 만만치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 대학원생 제자들과 회의를 하셨다. 이공계 대학원에서흔히 ‘랩 미팅‘이라고 부르는 이 회의는 그야말로 대학원 생활의 꽃이다. ‘꽃 같다‘는 말이 중의적으로 쓰인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하지 않겠다. 회의 준비로 이틀 전부터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하루 전날은 밤새 컴퓨터 앞에 앉아 수식의 오타나 그래프와 씨름을 하다가, 살벌한 회의 끝에는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져 허덕이다보면 다시 다음 회의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 돌아오는 것이 흔한 대학원 생활이다. 그런데 내가 있던 연구실은 좀 달랐다. 학생들이 일주일 동안각자 얼마나 멍청한 일을 했는지 보고를 마치면 교수님은 - P12

씩 웃으며 당신께서 일주일 동안 한 일을 자랑스럽게 소개하셨다. 목성이나 토성의 관측자료를 얻은 것에서부터, 동료 학자 누구와 어떤 이메일을 주고받았으며, 행성 대기 모델 계산 코드를 어떻게 개선했는지에 대해서, 마치 일주일동안 그 순간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즐거워하며 랩 미팅의마지막 발표를 장식했다. 대학원 시절부터 사용해온 당신의 모델을 육십이 넘도록 끊임없이 바꾸고 고치고 손보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토록 즐겁게.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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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메인주 크로스비에서 삶은 이어졌다. 마거릿은 전에 걸핏하면 잠을 자는 신자였던 에이버리 메이슨이 죽은 뒤로 다시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설교도 여전히 진지하고 좋다는 것을 밥은 알아차렸다. 그리고 해셀벡부인은 밥에게 격주에 한 번씩 가져오던 진을 다시 물로 희석해달라고 부탁했다. 정말로 크게 넘어질 뻔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고, 그래서 밥은 절반보다 더 많이 희석해서 갖다주었다. 헤로인중독이었던 열쇠 가게 주인은 플로리다로 떠났다. 혹은 그렇다는 말이 돌았다. 그리고 6월이 되었다. 비가많이 오고 쌀쌀했지만, 메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이었다. - P435

마음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그것은 사실이고, 밥의 마음은 여전히 루시를 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고려할것이 있는데, 마음은 유기체의 한 부분일 뿐이고, 유기체의일은 살아남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살아남고자 하는 그 욕망이 이미 밥에게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그 욕망은 자라났다. 마음의 욕망ㅡ그것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계속 자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일이 으레 그렇듯 당연하게도 그것에는 불편함이 존재했다. 하지만 밥은 마거릿과 함께하는삶에서 느낀 새 희망을 붙잡았다. 밥은 건망증 증세 때문에 마거릿을 유심히 지켜보았지만 아직 별다른 일은 없었다. - P495

올리브 키터리지는 슬펐다.
그녀는 이제 아흔한 살이었고, 친구 이저벨 굿로는 점점더 잠이 늘었다. 바로 요전날에는 심지어 올리브가 신문을읽어주는 동안에도 잠들어버렸다. 그래서 올리브는 루시가전화를 걸어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올리브"라고 말했을 때 기뻤다.
올리브는 아무때나 오라고 했다.
그래서 ㅡ밥이 사무실을 청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ㅡ루시가 올리브의 아파트로 왔고, 루시는ㅡ올리브가 보기에ㅡ눈부셨다. 녹색 스니커즈와 평범한 노란색 상의에 청바지를입고 있었다. 루시가 카우치에 앉아 말했다. "좋아요, 올리브ㅡ내 이야기는 이거예요. 지금까지 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슬픈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면 잘못된 문장일 거예요. 하지만 이 안에는 슬픔이 담겨 있고, 아름다움이 있어요. 이이야기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말해줘요."  - P505

우선 떠오르는 대로 써보면, 밥에게는 이런 모습들이 있다. 성찰하는 유의 사람이 아닌 밥, 죄를 먹는 사람 밥,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한 큰 사건에 평생 붙잡혀 살아온 밥, 예순다섯 살에 사랑에 빠진 밥, 사랑하는 형수를 잃고 당장 슬픔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에 의아한 밥, 루시와 만나면서 ‘확장된 의식‘을 경험하는 밥. 하지만 그 모든 모습을 아우르면서, 이것이 밥의 이야기가 되는 이유는 이것일 것이다. "이유가 뭔지 알아요? 당신은 여전히 밥 버지스니까요. 누구도그 사실은 뺏어갈 수 없어요." (매슈 비치의 말), "나는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괜찮아요. 당신의 머리가 잘렸다고 해도당신은 여전히 - 여전히 밥일 거예요."(루시의 말) "그리고그게 가능했던 건 당신이 밥 버지스이기 때문이야." (마거릿의 말) 밥과 루시의 사랑도 그 결말은 ‘밥은 밥이다‘로 정리된다. 이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한 이 소설의 핵심 아닐까. 그리고 루시가 던진 이 모든 기록되지 않은 삶의 의미에 대한답이 아닐까.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고, 그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인 한, 그 삶이 우리의 삶인 한, 우리는 우리라는 것. - P521

옮긴이의 말 제목인 ‘걷고 말하고 그저 행복했다‘는 이소설의 본문에서 가져왔다. 이유라면, 그저 그 문장을 만났을 때 ‘이러면 정말로 행복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작 중 하나인 『무엇이든 가능하다』(2019)의 옮긴이의 말 제목으로 썼던, 그리고 역시 그 책의 본문에서 가져왔던 ‘햇볕 속에 (함께) 앉아 있는 것만큼이나 행복해지는문장이었다.
그들이 이제 무르익은 노년기이거나 이제 막 노년기에 접어들었음을 고려하면 ‘걷고 말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또한, 아직 아니라면, 언젠가그런 시기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평범한 것이 어렵고 힘들 - P524

게 느껴지는 시기와. 그러니 우리가 평생 걷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아주 행복한 일이 될 테고, 내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내게 너무도 깊은 연결감을 주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 삶이 기록되지 않더라도, 우리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무소음 객차에서 옆에 앉은 남자를 사랑했다는 루시의 그 엉뚱한 사랑 이야기처럼, 일상에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을 일렁이게 한 그런 아주 엉뚱한 이야기라도 모든 것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마지막에 루시가 올리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주었듯이, 그렇게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더없는 행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에게 그런 행운은 없다. 지금자신이 너무나 외롭고 영영 그럴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정말로 어떤 것과도 아무런 연결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더라도, 우리가 우리로서 그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감각을잃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올리브가 올리브이기에, 루시가 루시이기에, 밥이 밥이기에 그렇듯, 우리가 우리이기에. - P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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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한별
글을 읽고 쓰고 옮기면서 산다. 지은 책으로[아무튼, 사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공저),[돌봄과 작업」(공저) 등이 있으며, 클레어 키건,
애나 댄스, 가즈오 이시구로, 데버라 리비, 버지니아 울프, 수전 손택, 시그리드 누네즈, 앨리스 오스월드,
조앤디디온, 리베카 솔닛 등의 책을 옮겼다.
[밀크맨]으로 제14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 P-1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은 무려 135장(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고래 같은 책이다. 줄거리는 어린이용 그림책으로 축약할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에이해브 선장이 자신의 한쪽 다리를 앗아간 거대한 흰 고래에게 복수하기 위해 흰 고래를 추적하다 마침내 최종 한판을 벌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린이 책으로 먼저 「모비 딕을 접한 사람은 원본의 두께에 당황하게 된다. 이렇게까지 길게 할 이야기인가? 그리고 한없이 곁가지를 뻗는 서술 방식에 또다시 당황한다. 이 책은 모비딕을 뺀 다른 모든 것에 대해 광폭으로 이야기하려는 것 같다. 도대체 모비 딕은 언제 나오나? 에이해브는? 에이해브는책의 4분의 1지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래 뼈로 만든 의족을딛고 등장한다. 모비 딕은 135장으로 이루어진 책의 133장까지 가야 마침내 드디어 흰빛을 번뜩인다. "물줄기다! 고래가물을 뿜고 있다! 눈 덮인 산처럼 하얀 혹이다! 모비 딕이다!" 돌아버릴 지경으로 지연된 클라이맥스. - P13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흰 고래 같은 텍스트를 만났을 것이다. 잡히지 않는 공허. 포착할 수 없는 의미. 이쪽을 붙들면 저쪽을 놓치고, 저쪽을 잡으면 이쪽이 사라지는단어를, 의미를 고정하는 순간 무수한 틈이 생겨버리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붓질을 더할수록 더럽혀지기만 하는 순백을?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번역은 얼마나 투명해져야하는가?

번역은 투명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이 말에는 중요한문제가 하나 이상 있다. 첫 번째 문제는, 투명한 번역이라는 말이 두 가지 정반대의 뜻으로 버젓이 쓰인다는 점이다.
대개 번역이 투명하다고 하면 번역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의미다. 특이하거나 거슬리는 단어나 표현 없이 술술 읽히고, 번역문이 아니라 마치 원문인 것처럼 읽힌다는 뜻이다. 그럴듯하고 자연스럽고 가독성이 높은 번역문을 만들어서 독자가 번역 과정을 인식하지 않고 원문을 읽듯이 읽을 수 있게 되면 번역과 번역자는 투명한 유리창처럼 보이지않게 된다. - P15

텍스트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나? 그것을 꿰뚫지 않으면, 그것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번역은 불가능하다. 번역은 텍스트를 투명해질 정도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렇게 벽 너머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고 해도, 그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텍스트 너머의 침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아니, 번역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투명하다는 말조차 사람들이 서로 다른 뜻으로 쓰는데(사실 나도 이 글에서 같은 말을 두 가지 이상 다른 뜻으로 썼다)? 그래서 번역에 관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번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생각이 드는 것이다. 같은 용어와 개념을 가지고 저마다 다른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니 번역이란 무엇이다, 번역은 어떠해야 한다는 논쟁은 특수한 상황과 개별 사례를 아우르지 못한 채 엉뚱한 곳에서 맴돌고 만다.
나는 번역을 명료하게 정의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자 - P20

신은 없으니, 비유를 통해 비스듬하게 다가가려 한다. 내가 이책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흰 고래를 정의하려는 이슈메일의 시도 같은 것이 될지 모른다. 이슈메일이 그랬던 것처럼, 번역의 사례를 들고, 번역을 분석하고, 번역을 해부하고, 번역을 설명하려다가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 쓴 글들은사람들이 저마다 번역을 어떻게 (같은 말로) 다르게 말하고 있느냐는 이야기이자,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말로 설명하려는 기도이자,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이자, 흰 고래를 그리려는 시도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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