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 지금, 길을 걷다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여자아이들을 보면 놀라운 마음이 들어. 어떻게 저렇게 어린 아이들을 이용할 수 있지? 그저 지켜줘야 할 아이들일 뿐이잖아. 하지만 어렸을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대체 얼마나 까졌으면 자기선생이랑 놀아? 미쳤어? 더러워 난 그게 다 여자애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지. 얼빠지고 정신이 나가고 멍청해서 그런 짓을 하고다닌다고 믿었어. 언니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됐어. 아닐 거야 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닐 거야. 나 자신을 열심히 설득하려 했지만 언니는 자신을 숨기는 일에 서툴렀고 나는 그런 언니에게 분노를 느꼈어. 이럴 거면 제대로 숨기기라도 해. 마음속으로 소리쳤지. - P135

나는 웬만한 일에는 감정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잘 참고 견디며 살아왔었어. 참는 건 내 생존 방식이었지. 맞서 싸웠다가 결국 곤란해지는 사람은 내가 될 거라는 걸 알아서이기도 했고, 나를 어떻게 건드리든 반응하지 않고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무시하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아. 그건 내가 언니를 보고 배운 것이기도 했지. 그저 참는 것. - P139

교도소에서 노트에 써내려간 글은 남겨두는 글과 찢어버리는 글로 나뉘었어.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때, 내가 나를 수습할 수 없을 때 나는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노트에 적은 후에 바로 찢어서없애버렸어. 글은 글일 뿐이라고, 예전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하지만 어떤 글을 남기기로 선택하는 것은 결국 그 마음을 전달하고 싶은 바람을 담는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마음은 실제로 전해지지. 상대가 그 글을 읽는 읽지 않든 말이야.
내가 교도소에서 쓴 자주색 커버의 유선 노트는 그래서 군데군데 찢겨 있어. 나는 페이지가 찢긴 흔적을 보면서 그때 내가 어떤마음이었는지를 떠올려봐. 그때의 내 마음은 찢긴 자국으로 거기에 기록되어 있어.
그렇다고 해서 노트에 남겨둔 글이 내 마음을 속이거나 정직하지 않은 글이라는 건 아니야.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듯 노트에 내이야기를 채워넣었지. 스물둘의 내가 기억하는 너의 모든 것을 적어내려가기도 했어. - P172

내가 지내던 감방의 창으로는 운동장이 보였어. 정해진 시간이되면 수감자들이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걷는 곳이었지. 나는 쇠창살이 달린 창가에 서서 운동장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아주 가끔교도관 몇이 오갈 뿐인, 높은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아무도없는 운동장에 햇빛이 내리고 구름의 그림자가 지고 비가 내리는모습을 말이야.
스물세 살 생일이었어. 그날은 기상시간보다 한참 일찍 잠에서깼지, 눈을 뜨니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앞에 섰어. 아직 어두운 하늘에서 떨어진 가느다란 눈발이 조명등의 흰빛을 받아서 반짝이며 땅으로 내려오고있었지. 조명등의 빛이 닿은 눈발이 내 눈에는 꼭 하늘로 이어지는 길처럼 보였고, 어쩐지 그 빛나는 눈이 내리는 그곳에 나는 영원히 가닿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어. - P178

내가 너를 더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건 그 순간이었어. 내가 영원히 너에게 다다를 수 없는 타인이 되었다는 사실받아들인 건. 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울었지. 그 순간에도 너의 세계에서 나는 빠른 속도로 지워지고 있다는 걸 알아서 그래도 그래도.……나는 영원히 널 사랑할 거야.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결국 찢어버릴 편지를 쓰는 마음이라는 것도 세상에는 존재하는구나.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는 이 편지를 없애려 해.
나는 너를 보며 나를, 언니를 바라봤었지. 그리고 사랑했어. 네가 내 언니의 자식이기 때문에, 내가 마음껏 좋아할 수 없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토록 사랑했던 언니의 아이이기 때문에 나는 네가 항상 안전하기를, 너에게 맞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랐어.
비록 우리가 서로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로 스쳐지나갈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와 함께했던 시간을, 그리고 함께할 수 없었던 시간조차도 마음 아프지만 고마워할 수 있었어.
오늘은 5월의 따뜻하고 맑은 날, 너의 생일이야. 너의 스물세번째 생일을 축하해.

너의 이모가 - P179

소리는 파상풍 주사를 맞을 때도 벌어진 상처를 꿰맬 때도 눈을 꼭 감고 통증을 참았다. 처치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간 그녀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를 투명 인간 보듯 대했다. 그가 질문하면 짧게 답하고 침묵했다. 한동안 그녀는 그에게 냉정하게 대했고, 소리의 흉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그에게 잔인하게 말했다.
그가 언제나 자신에게 져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자신이 아무리 잔인하게 대해도 참고 견뎌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를 그토록 애틋하게 여겼으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대했다. 이제와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도 지난 일을만회할 수 없으니까. - P195

그때는 그런 균형이 있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가 소리의 역성을 들어주고, 그녀가 훈육하는 식의 균형. 올바른 육아는 아니있겠지만 그래도 그녀와 그는 소리에게 최선을 다했다. 적어도 그들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애썼다.
부모가 함부로 뱉는 말이 어린 자식에게 얼마나 파괴적으로 다가왔는지 아버지는 알았을까. 폭언으로 물들던 유년의 밤을 그녀는 떠올렸다. 나가 죽으라고 너 같은 게 살아서 뭐하느냐고 그냥죽어서 없어져버리라고. 아버지의 말은 내면의 목소리가 되어서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녀를 따라다녔다. 아버지는 그녀를 물리적으로 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가혹한 구타를 당하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차라리 맞는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일었다. - P197

"희진이 네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이 아니었으면좋겠는데, 넌 여자애야.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널두려워하게 하는 편이 훨씬 좋은 거야."
그게 무슨 뜻인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그 말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이모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바람을 나에게 흘리듯 말하곤 했다. 나는 이모가 나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월말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오면 이모는내 손을 잡고 시장에 데리고 가서 괜히 내 이야기를 했다.
"희진이가 반에서 혼자 백 점을 맞아서요. 네, 얘혼자요. 얘가보통 애가 아니거든요."
그런 날이면 이모는 내게 먹고 싶은 주전부리를 고르게 했다.
평소에 이모는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달콤한 주전부리를 철저하게 금지했다. 그런 싸구려를 먹으면 건강이 상한다면서. 하지만좋은 일이 있으면 이모는 내게 그 ‘싸구려‘를 허락했다. - P219

그즈음 아빠와 함께 상가 앞을 지나가다 계단 청소를 하는 사람을 봤다. 이모 또래의 여성이었는데 허리를 구부린 채 솔로 계단을 하나하나 문질러 닦고 있었다.
"저건 건물주 문제야. 계단이 뭐라고 어르신이 일일이 닦게 하나."
아빠는 혀를 차며 말했다. 집안에서는 숟가락 하나도 자기 손으로 챙기지 않으면서, 엄마나 이모가 집에 없으면 밥통에 밥이 있어도 상을 차리지 않으면서, 늘 누군가 닦아놓은 변기를 사용하면서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쪼그리고 앉아 바닥을 걸레질하는 이모를 멀뚱히 바라보던 아빠의 얼굴이 떠올라서 나는 마음이 차가워졌다. - P239

그즈음 엄마는 내게 핸드폰을 사줬다. 엄마는 야근하는 날이면아빠 밥상을 차리라고 문자를 보냈다. 나는 엉성한 솜씨로나마 계란말이를 하고 엄마가 끓여놓은 국을 데우고 반찬을 꺼내서 밥상을 차렸다. 아빠는 밥을 먹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다 먹고나서는 아무것도 치우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일들에 나는점점 지쳐갔다.
나는 더는 돌봄을 받아야 할 존재도 아니었지만, 온전히 자기힘으로 설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아무도, 나를 포함한 누구도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지금과는 달라져야 한다고, 달라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무엇을 하든 어설프고 우스꽝스러울 거라는 확신만 들었다.
나는 일평생 이모의 짐이자 장애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나도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이모는 어려서부터 내가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다고 말 - P244

하곤 했다. 이모는 그 말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것처럼 얘기했다. 그 말이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는지 이모는 끝까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모가 내게서 봤던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것이 내게는 무엇보다도 큰 공포였다는 사실을. 이모는 종종 ‘내가 너라면……‘ 이라고 말을 꺼내고는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 목소리에는 옅은 분노와 함께 어떤 질투가 담겨 있었다.
이모가 떠나고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십삼 평짜리 아파트로 이사했다. 삼십이 평짜리 아파트를 팔아서 메워야 할 구멍이 생긴 것이다. 이모 방에 있던 커다란 장롱은 우리의 새집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내 침대도 김치냉장고도, 거실 소파도, 마호가니식탁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나는 현관 앞 작은방을 썼고, 엄마와 아빠는 거실과 현관 복도 사이의 미닫이문을 닫아 거실을 방처럼 사용했다. 엄마의 인내심이 무너져내린 시점도 그때였던 것 같다.
엄마와 아빠는 그 무렵부터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았고 아빠는자주 집을 비웠다. 나는 엄마와 아빠가 차라리 헤어지기를 바랐지만 두 사람은 이혼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가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P245

돌아보면 그 시절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건 나의공포와 분노를마주하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기 위해 나는 쉽게 겁내지 않고, 사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모와 만나지 않고 지냈던 그 시절에 나는 자주 이모를 떠올렸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조종한 날, 높은 고도의 비행에 성공한 날,
근무지 부대로 이사를 간 날, 깊은 잠에서 문득 깨어나는 순간들마다 나는 이모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모, 이 정도면 만족해?‘ 세수한 뒤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고 거울을 보면 그곳에 이모와 닮은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P248

이모도 조종해볼래? 내가 물으면 이모는 망설임 없이 조종간을잡고 높은 곳으로 끊임없이 올라간다. 성층권을 통과하고 중간권과 열권을 지나 마침내 대기권을 벗어난 우리는 그곳에서 지구의 궤도를 빙빙 돌며 별들을 구경한다. 그리고 이모는 내게 손을 흔든다. 구경 한번 잘했네. 이제 갈게. 너는 다시 내려가 가서 나보란듯이 잘 살아.
옛날 사람들은 하늘 위에 하늘나라가 있다고 생각했다. 밤하늘의 별빛들을 보고 하늘에 구멍을 뚫어 지상의 인간들을 바라보는저 너머 누군가의 눈빛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들에게 별빛은 신의눈빛이거나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존재들의 시선이었다.
밤 비행을 할 때면, 검은 하늘을 날아가고 있을 때면 나는 종종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이모를 느낀다. 이모의 시선은 조종실 너머에, 비행기 너머에, 밤하늘과 대기 너머에 있다. 희박한 공기와 낮은 온도, 여러 층을 올라가면 결국 사라지는 대기와 우주공간의시작. 내가 아는 하늘은 그런 것이지만, 그런 순간에 나는 문득 옛날 사람들의 믿음을 떠올린다. 환한 낮이 아니라 어두운 밤에만지상에 닿는 저 너머의 눈빛이 있다는 믿음을 말이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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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라는 말이 거짓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대로라고 말하는것은 그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예전의 당신이 존재한다고, 그사실이 내 눈에 보인다고 서로에게 일러주는 일에 가까웠다. 정윤은 또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새치를 염색하지 않은데다얼굴에 화장기가 없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얼물에 밴 피로가 그런 인상을 강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당신의 눈에는 그때의 정윤이 보였다. 당신이 학생회관 쪽으로 걸어가고 있으면 편집실 창문에서 ‘이해진이!‘ 부르며 유난스럽게 손을 흔들던 스물하나 정윤의 모습이 술을 마시고 나면 막대 아이스크림을 꼭 두 개씩 사다가 크게 베어 물고는 맛있게 씹어 삼키던 모습이 언닌 이도 안 시리나 눈도 안 시리나, 보는 내가 눈이시리네, 그렇게 매번 잔소리하던 그때의 자기 모습도 기억났다. - P51

당신의 학교 학생들이 정확히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떤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런 집단 폭력히 비해 반복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윤은 건조한 문장으로 진술했다. 그들의 행동이 왜 치기 어린 ‘놀이‘나 ‘장난‘이 아닌지에 대해서 정윤의 논리에는 막힘이 없었고 차근차근한 설명은 집요했다.
그 글을 읽고 당신은 과거의 자신을 바라봤다. 남자 선배들이 사건을 영웅담으로 농담으로 이야기할 때 그저 미친놈들의 헛소리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그저 듣기 싫고, 피하고만 싶어서 못 들은 척했던 그때의 자신을. 정윤의 글을 읽은 당신은 그글을 읽기 전의 당신이 아니었다.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 P52

셋은 세미나를 끝내고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당신은 부모와 함께 살았고, 정윤은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고,
희영은 고향인 J시에서 지원하는 기숙사에 살았다. 늦은 밤이면당신은 막차를 타기 위해 일어섰지만, 희영은 외박계를 쓰고 정윤과 시간을 더 보내다 정윤의 집에서 자곤 했다.
정윤은 자기감정을 철저하게 숨기지 못했다. 희영에 대한 호감,
그녀가 쓴 글에 대한 애정, 희영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희영과함께할 때의 기쁨 같은 것들을 제대로 감추지 못해서 당신을 외롭게 했다. 정윤은 공평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기에 그런 감정을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당신 눈에 보였으므로,
당신은 언제나 그런 공기를 읽는 사람이었으므로, 당신은 느낄 수있었다. - P55

그렇게 말한 건 용욱이었다. 용욱은 예비역 복학생으로 사회학과 2학년이었다. 그는 세계가 급변하고 있는데 개인의 윤리 문제를 다툴 지면은 없다고 했다. 타락한 개인의 윤리는 개인의 문제일 뿐, 그것을 정치와 사회의 흐름을 읽어야 하는 지면에서 굳이다를 필요는 없다는 요지의 말이었다.
이건 일개 여성 문제가 아니라 대학원 사회의 기형적인 권력구조에 관한 문제입니다.
"정윤은 용욱의 말에 그렇게 답했다.
지금의 당신은 생각한다. 그런 말에는 언제나 힘이 있었다고.
이건 여성 문제가 아니다, 더 큰 억압의 문제다, 라는 식의 논리는언제나 강했고 다수를 설복할 수 있었다. 정윤이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않으면 논의조차 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정윤은 수면으로 올려놓고자 노력했다. 정윤이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희영의 주제는 회의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 P57

당신은 아직도 그날 밤을 기억한다. 희영이 써온 긴 글을 처음읽고 받았던 충격을,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차갑게 언 발의 감각을 느끼며 그녀의 글을 읽던 스물에서 스물하나가 되어가던 당신의 모습을 기억한다.
희영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편집실은 고요했다. 낭독이 끝났는데도 편집실을 채운 팽팽한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마 다른 사람 모두 알고 있었으리라고 지금의 당신은 생각한다. 희영에게는 타고난 관찰력과 자기 생각을 끝까지 끌어가는 용기,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지력이 있었다.
희영이 가진 장점들의 상당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몇 가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해 깊이공감했고, 상처의 조건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 P59

간 당신의 초라함이 더 분명해지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돌이켜보면, 희영은 언제나 당신의 인정을 바랐는지도모른다. 함께 글쓰기를 시작한 친구의 인정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던 희영의 재능에 대해서 희영 자신은 한 번도 확신한 적이 없었다. 분명한 논리로 자기 의견을 관철시켜가던 희영의 강한 얼굴뒤로 자신은 글을 쓸 자격도 재주도 없다는 괴로움이 자리하고 있는 줄 그때의 당신은 알지 못했다. 나는 말했어야했어. 당신은 그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자기 확신으로 가득찬 인터뷰이들을 만날 때마다 당신은 희영을 생각했다. - P64

당신은 정원대해 무슨더 가까운이년 가까이 편집부 일을 하면서 당신은 예전처럼 더디게 글을 쓰지 않았다. 덩어리 같은 막연한 생각을 언어로 풀어낼 때, 어렴풋하게 떠오른 문장들을 당신의 목소리로 종이위에 적어나갈때, 당신은 더이상 사람들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골똘히 한 생각을 써내려간 글 속에서 당신은 당신 나름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은 그런 순간들이 당신에게 준 경이와 행복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싶었다. 그토록 나약해 보이는 당신 안에도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고 흔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글로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보이는 당신도,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라도증명하고 싶었다.
글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 P75

정윤은 마치 그 자리가 보이는 것처럼 앞을 가리켰다.
너. 졸업하고 활동한다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말하면서 나를보는데 편안해 보였어. 내가 희영이를 봤던 어떤 때보다도, 그 얼굳이 잊히질 않아. 희영이를 생각하면 그때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라5월의 정오가 지나가고 있었다. 당신은 정윤의 흔들리는 어깨를한 손으로 잡고 그녀 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무엇이 지나가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당신의품에 기댈 수 있도록, 당신은 정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 P83

사람들은 그녀가 곧 나으리라고, 회복되리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괜찮아질 거라고, 다 지나갈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조금만 참아 의사 말대로 해. 다끝날 거야.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아프냐고 물어보지 않아서였을까.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도 아프냐고 묻지 못한 것이었을까.
많이 아팠나요. 다희가 다시 물었다.
그녀는 다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팔에 가만히 자기 손을 올려놓았다. 그런 다희를 보며, 그녀는 왜 자신이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 - P123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신경썼던 것 같네.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 다른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애썼지.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나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느끼며 자라서인지 나에게는내가 결코 타인에게 호감을 살 수 없는 사람, 멸시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거든. 그럴수록 나는 남들에게 더 맞춰줬고 남들이 나를 좋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번 고민했어. 그렇게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남들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고 남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느라 나의 욕구를 무시했지. 그때 내가 느꼈던 가장 큰 두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내게 실망하는 거였어. 나는 절대로, 절대로, 누군가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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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수업은 금요일 오후 세시 삼십분에 시작했다.
짧은 커트 머리에 갈색 뿔테안경을 쓴 그녀의 얼굴은 얼핏 보면강사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려 보였다.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한 편이었다. 영문과 전공수업은 전부 영어 강의여서 그녀는 영어로 수업을 소개했다.
"이 수업의 목표는 영어로 에세이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한국어 억양이 강하게 드러나는 영어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원어민처럼 영어로 말할 수 있는 학생들이 섞인 강의실에서한국어 억양이 강한 영어로 수업하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일지 어림하면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분명하게 말하려고 노력했고,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조금 크게 말했다. - P9

수업은 매시간 그녀가 선정한 영문 에세이를 읽고, A4 용지한장 분량의 에세이를 제출하는 식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읽어야 할책의 양이 많은 탓에 수강신청 정정 기간 동안 많은 학생들이 빠져나갔고, 결국 수강생은 열댓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첫번째 수업시간에 우리는 조지 오웰이 버마에서 경찰관으로 일했을 때 쓴 에세이를 읽었다. 그녀는 에세이를 한 줄 한 줄 따라읽어내려가며 강독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그 수업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시멘트에 밴 습기가 오래도록 머물던 지하 강의실의 서늘한 냄새, 천원짜리 무선 스프링 노트 위에 까만 플러스펜으로 글자를 쓸때의 느낌,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작은 강의실에 퍼져나가던 울림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고른 에세이들도 좋았고, 혼자 읽 - P10

을 때는 별 뜻 없이 지나갔던 문장들을 그녀가 그녀만의 관점으로해석할 때,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도 좋았다. 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 언어화될 때 행복했고, 그 행복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던 종류의 감정이라는 걸 가만히 그곳에 앉아 깨닫곤 했다. 가끔은 뜻도 없이눈물이 나기도 했다. 너무 오래 헤매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009년 2학기, 구 년 전 그때 나는 스물일곱의 대학교 3학년 학사 편입생이었다. - P11

자신이 번역한 책과 작가에 대한 감상으로 시작한 에세이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녀는 별다른 과장없이 자신의 어린 시절과 그때 겪었던 일들을 서술했다.
감정을 최대한 누르며 쓴 글이었지만 자신이 살았던 장소를 이야기할 때만은 목소리에서 나름의 애정이 묻어나왔다. 자신이 나고 자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주 이사 다녔던 용산에대해 쓸 때 그랬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내게 이촌에 언제부터 살았는지 물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용산의 어디에선가서로 스쳐지나갔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의 글이 더 가깝게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책의 사분의 일을 차지하는 긴 에세이에서 그녀는 그녀가 용산에서 머물렀던 장소들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했다. 그 글은 그녀가 지나온 장소의 세부가 낱낱이 묘사목탄으로 그린 큰 그림 같았다. - P17

오락실 주인이 돈을 쥐어주면서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그녀는 ‘죽지 않고‘  게임을 이어나갔다. ‘나는 홀로 몰두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잘했다. 몰두하면 시간이 가고, 시간이 가면 그곳으로더 빨리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라고 그녀는 썼다. 도서대여점과 상가 건물 삼층에 있던 교회, 용산역사와 철길, 기차와 전철이 오갈 때의 소리와 한강, 밤에 보던 한강철교, 남자 여럿이 자동차를 타고 ‘어린애들은 가면 안 된다‘던 골목으로 들어가던 모습, 웃으며 지나가던 그 남자들을 골목 입구에 서서 쏘아보던 일, 장마가 지나가고 난 뒤에 거리에서 나던 냄새, 극장 앞에서 암표를 팔던 상인의 모습, 그녀는 장소에 대해 한참이나 묘사하고 나서 ‘나는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라고 썼다. 그 문장은 같은 에세이 안에서 여러 번 반복되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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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린 게 몇살 때부터일까.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가 아닐까.
나는 차라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절대로 자신의 손으로 어머니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은 뒤로는 아버지는 금치산자처럼 어머니 없이는 하루도제대로 살지 못했다. 의식주를 온전히 어머니에게 의지했

어머니의 임종을 지킨 사람이 아버지였다는 생각을 하면나는 고통스러웠다. 어머니가 대구에 있는 대학 병원 응급실에서 숨을 거둘 때, 형과 나는 경부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나는 시속 백삼십 킬로로 차를 몰며 어머니가 제발 살아 있기를 기도했다. 그것은 내 처음이자 마지막 기도였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어머니의 숨은 끊어져 있었다. 여섯 살이나 나 - P141

이 차이 나는 형을 만날 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폭력이 장남인 그에게도 공평하게 대물림되었는지.

나는 어깨를 앞으로 쑥 내밀고 그의 얼굴 가까이 내 얼굴을 들이댔다. 종업원이 볼 때 우리가 마치 키스를 나누는 것처럼 보일 만큼,
"폭력도 대물림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 P142

첫 폭력은 그녀가 자취를 하던 집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미끄럼틀 옆에서였다. 연애를 시작한 지구 개월쯤 되었을때였다. 마산이 본가인 그녀는 서울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있었다.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 빛나는 교실 유리창들이 내가그녀에게 하는 짓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않아 운동장 둘레에 심어진 플라타너스들은 굳은 유화 물감덩어리 같았다.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회식이 있었고, 회식 장소인 고깃집이 시장통처럼 시끄러워 전화가 걸려온 것을 몰랐다는 그녀의 항변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경비원이 플래시를 흔들며 다가왔다.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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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의 바늘, 우물집을 떠날 때 그녀가 버리고 간 바늘은 녹슬지도, 달아나지도 않았다. 자신에게서는 자꾸만 달아나려 하는 바늘이, 화순에게는 끈질기게 매달려 있었다. 화순의 손에서 바늘이 달아나는 것을 금택은 목격한 적이 없었다. 아무렇게나 잡고 있어도 바늘은 그녀의 손에 속한 뼈처럼 매달려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과 화순둘 다에게 바늘을 나누어 주었다. 하나씩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래전 그날 어머니가 자신들에게 건넨 바늘이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자신들은 둘이지만 바늘은 하나라서, 종국에는 둘 중 한 명만 그것을 갖게 될 거라는 바늘은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바늘 하나에 손이 두 개 매달려있는 경우를, 한복 거리 그 어디서도 금택은 본 기억이 없었다. - P323

자신이 도망치는 것이라면 정말로 도망치고 싶은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화순의 말은, 화두처럼 금택을 괴롭혔다. 어머니인지, 바늘인지 아니면……… 화순의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이상하게 외팔 여자가 함께 떠올랐다. 자수 놓는 여자는 자신의 시어머니보다 매섭던 자수장이 아니라, 외팔 여자의 손으로부터 도망쳤다고 고백했다. 자수바늘을 잡은 외팔 여자의 손으로부터 외팔 여자가 떠오를 때마다 금택은 기시감처럼 그 여자의 손을 본 것 같은기분이 들었다. 수틀에 팽팽하게 고정한 바탕감에 자수바늘을 수직으로 내리꽂는 외팔 여자의 손을.
외팔 여자에 대해서 듣기 전까지, 그녀는 화순이 자기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대상이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385

손바느질로 옷을 짓는 여자들은 더러 있었지만, 누비로 옷을 짓는여자는 드물었다. 복래한복 여자도, 서울한복 여자도, 아씨한복 여차도, 정인한복 여자도 누비 바느질을 할 줄은 알았지만, 누비로 제대로 된 저고리나 두루마기는 지을 줄 몰랐다. 바느질이라면 눈을감고도 웬만큼 하는 그녀들이었지만, 누비 바느질은 익숙하지 않았다. 누비 바느질은 특별한 리듬과 강약을 요구하는 기법이었다. 숙달을 필요로 하는 기법이었다. 누비저고리를 한 벌 지을 시간에 민저고리나 회장저고리를 수 벌 지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은 애써누비 바느질을 하려 하지 않았다. 누비 바느질은 금 같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두 달이고 석 달이고 누비대 앞에 앉아 바늘땀을 떠 넣기에 그녀들은 돈이 궁했다. 그녀들은 바느질로 먹고살았다. 바느질로자식들을 키워 시집장가 보냈다. 어머니는 수십 년 누비 바느질로옷을 지었다. 어머니처럼 수십 년 누비 바느질로 옷을 지은 여자는 드물었다. - P400

재숙은 충동을 다스릴 줄알았다. 감정과 욕망을 화순은 숨기지 않았지만, 재숙은 숨기고 포장할 줄 알았다. 금택은 화순과 자신, 둘중 꼭 한 명을 지목해야 한다면 오히려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순보다는 자신의 기질이재숙의 기질과 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충동을 다스릴 줄 알고, 욕망을 숨길 줄 안다는 점에서 그랬다.
누비대 위에서 절도 있는 리듬을 타면서 동일한 바늘땀을 연속해서 떠나가는 어머니의 손놀림을 보고도 경탄하지 않는 그녀에게,
금택을 누비 바느질을 배우려는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비 바느질의 세계는 심오해. 단순한 바느질이 아니라 삼라만상을 짓는 거지."
그녀의 대답이 신선했지만 금택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명을 할 수는 없었지만 금택은 그녀의 대답이 교묘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누비 바느질을 배우려는 진짜 이유를 그럴듯한 말 뒤에 교활하게 숨기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금택은 그녀가 누비 바느질을 배우려는 진짜 이유를듣고 싶었다.
"삼라만상이요?"
"하나의 우주를 짓는 것하고 똑같다는 뜻이지." - P407

"옛 사람들은 옷을 지을 때 한 땀 한 땀마다 입을 사람의 복을 기원했다지. 건강과 장수를 빌면서 정성을 다했다지."
재숙은 조금 길게 여운을 두었다가 이어서 말했다.
"내 목표는, 끊긴 전통 누비 기법을 복원하는 거야. 잔누비, 중누비, 드믄누비, 납작누비, 오목누비……… 출토된 누비 복식들을 원형그대로 복원하는 게 내 목표이지. 누비를 시대에 맞게 발전시키는것은 그다음 목표이고."
금택은 의문했다. 누비저고리를 한 벌 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하는 그녀가 전통 누비 기법을 복원하고 시대에 맞게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품었다는 사실이 모순 같았다.
어머니는 누비저고리를 지을 때, 누비저고리에만 집중했다. 어머니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누비저고리가 완성될 때까지 어머니는 바늘땀 하나에 몰두했다. - P411

금택은 때때로 어머니가 자신들에게 바늘을 하나만 준 것 같다. 자신들은 둘인데, 두 개가 아니라 하나를 바늘은 나누어 가질 수 있는것이 아니었다. 공평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은 더더군다나.
자신들이 어릴 때 어머니는 그것이 무엇이든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다. 친딸인 화순에게 더 크고 붉은 사과를 준 적이 없었다. 사과가한 알일 경우 어머니는 두 쪽으로 갈라 한 쪽은 자신에게, 다른 한 쪽은 화순에게 주었다. 금택은 차라리 그날 어머니가 화순이나 자신둘 중 한 명에게만 바늘을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차라리 화순에게만 바늘을 주었더라면.
금택은 바늘로 인해, 화순과 자신이 친자매보다 더 질기고 복잡한 인연으로 묶인 것 같았다.

만물이 바늘 끝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하루살이의 눈 같은 바늘끝에. 하늘도, 땅도, 나무들도, 강도, 바다도, 밤하늘의 별들도, 길들 - P447

도, 풀포기도, 허공을 날아가는 새들마저 바늘을 놓치면 그 끝에 매달려 있던 만물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았다.
환영이 금택을 괴롭혔다. 손에 잡고 있는 바늘이 은빛 피라미가 되어 잽싸게 달아나는 환영이었다. 환영이 한차례 지나가고 나면 바늘을 잡은 그녀의 손가락에 더 힘이 들어갔다. 부러지는 게 아닌가 싶게 힘이 들어갈 때마다 금택은 외팔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강박과 두려움에 시달렸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그 여자의 자수바늘을 잡은 손에 그렇게나 힘이 들어간 것이라고,
병풍 가게 쌍둥이 여자를 도망치게 할 만큼 힘이 들어간 것이라고.
그러므로 자수바늘을 백 개 먹어 치운 것은 신사임당 초충도 ‘양귀비와 도마뱀‘이 아니라, 외곽 여자의 손가락이라고 외팔 여자의 손가락이 자수바늘을 하나씩 오독오독 분질러 먹어 치운 것이라고.
그녀는 어쩐지 소화되지 않은 자수바늘의 조각들이 외곽 여자의손가락에 고스란히 박혀 있을 것 같았다. 녹이 슨 조각들이 하나살갗을 찢고 선인장 가시처럼 그녀의 손가락에 돋아나고 있을 것 같았다. - P448

어머니 역시 그랬지만, 바느질하는 여자들은 대개 자신들의 손을아끼지 않았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손이 얼마든지 바꾸어 낄 수 있는 장갑이나 되는 듯 굴었다. 여러 켤레 장만해 장롱 속에 재두기라도 한 듯, 쓰고 있는 손이 고장 나 못쓰게 되면 새 손으로 바꾸면 되는 듯, 그녀들은 손을 아끼지 않았다. 손을 열 개쯤 가지고 태어난 게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 만큼 한시도 손을 놀리지 않았다. 바느질을하지 않을 때도 그녀들은 손을 무위로 놀리지 않았다.
바느질을 하지 않을 때조차 그녀들은 손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바느질을 하지 않을 때 그녀들은 옷감을 염색하고, 풀을 쑤고,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을 했다. 장을 담그고, 멸치나 황석어로 젓갈을 담그고, 햇볕에 말릴 무나 호박이나 가지를 채 썰었다.
바느질하는 여자들의 손은 그녀들이 잠든 뒤에도 잠들지 않았다. - P470

"바늘은 매번 저를 찔렀어요. 찔러서 피를 흘리게 했어요."
그녀는 밤마다 바늘을 손에 잡고 싶은 욕구와 싸워야 했다. 지독한불면의 밤이 시작된 것은 오히려 바늘을 손에서 내려놓고 나서였다.
바늘을 손에서 놓지 못할 때 금택은 바느질을 하느라 날을 꼬박 새웠다. 바늘을 손에서 놓은 뒤로는, 바늘을 다시 잡고 싶은 욕구와 싸우느라 날을 새워야 했다.

바늘에 집착하는 것만큼이나 바늘을 포기하는 것이 금택은 힘들었다. 바늘을 포기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집착이었다.
금택은 보이는 바늘을 손에서 내려놓고, 보이지 않는 바늘을 집어들었다.
보이지 않는 바늘은, 보이는 바늘보다 깊이 금택을 찔렀다. 그녀는 바늘에 찔린 자국투성이였다. 어머니로부터 바늘을 건네받던 날밤, 그 바늘이 가슴을 찔러왔을 때처럼 피가 흘렀다. 그녀의 눈에만보이는 피였다. 피는 선지보다 검붉고, 비린내를 풍겼다. - P484

어머니를 닮고 싶어 하는 금택의 욕망은 한결같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금택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머니를 닮고 싶은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어머니를 닮는 것이 요원할뿐더러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누비 바느질로 인해 어머니의 어깨가 기우는 것을, 등이 굽는 것을, 척추가 주저앉는 것을,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이고 뒤틀리는 것을, 곁에서 똑똑히 지켜보았으면서도 어머니를 닮고자 하는 욕망은 시들지 않았다. 누비 바느질로 인해 망가지고 무너진 어머니의 육체를 금택은오히려 동경했다. 그것은 어머니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들러붙은 흉터조차 갈망하는 병적이고 맹목적인 욕망과 닿아 있었다.
금택의 나이는 어느덧 마흔한 살이었다.  - P511

잔누비 쓰개 장옷은 재숙이 계획한대로 복원되었다. 3백여 년 땅속에서 잠들어 있던 옷이 넉 달 만에 원형 그대로 부활한 것이었다.
완성된 잔누비 쓰개 장옷을 금택은 구경하지 못했다. 어머니조차도 구경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부분들밖에 보지 못했다. 전체를 보지 못했다. 재숙이 왼쪽 소매를 가져다주면 어머니는 그것을 받아자신의 누비대에 고정시킨 뒤 누비 선을 따라 바늘땀을 떠 넣었다.
실핏줄을 촘촘히 줄 세워놓은 것 같은 누비 선들을 무화과 씨보다 작은 바늘땀으로 채웠다. 어머니가 마침내 바늘땀을 다 떠 넣으면 재숙은 냉큼 그것을 누비대에서 거두어갔다. 오른쪽 소매를 어머니에게 가져다주었다. 어머니는 그러면 그것을 받아 자신의 누비대에 고정시키고 바늘땀을 떠 넣었다. 재숙은 우물집이 아니라 서울 자신의누비 연구실에서 부분들을 연결했다. - P551

잠든 어머니 옆에서 금택은 명주 올을 튕겼다. 엎질러진 마음처럼어머니 앞에 펼쳐져 있던 명주였다. 그녀는 0.3센티 간격으로 올을 튕겨 누비 선을 표시했다. 한 시간쯤 한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올을 튕기던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 곁에 깨어난 어머니가 일어나 앉아 있었다. 거미줄을 헤치고 나온 듯 흐릿한 모습으로 앉아 금택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머니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올을 튕겼다.
거문고 줄 수만큼 올을 튕기고 금택이 고개를 들었을 때 어머니는여전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불 밑으로 나온 어머니의 손이 명주 끝자락을 잡고 있어서, 그녀는 올이 아니라 어머니의몸속 실핏줄을 잡아당기는 기분이었다. 어머니의 몸속 실핏줄을 죄다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 P557

금택은 바늘을 잡지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바늘을 잡았다. 누비대 앞에 앉으려 하지 않는 어머니를 대신해 누비대 앞으로 가서 앉았다. 어머니를 대신해 누비 선에 바늘땀을 떠 넣었다.
바늘땀 하나에 그녀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온몸의 피가 바늘을 잡은 두 손가락으로 쏠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집중했다.
자정이 넘도록 누비대 앞을 떠나지 않고 누비 선을 따라 반복해서 바늘땀을 떠 넣고 있는 금택을 어머니가 바라보고 있었다. 귀천을 떠도는 영혼이 한 생애 동안 깃들었던 육체를 바라보듯.
마흔 중반의 금택은 우물집으로 흘러들 즈음의 어머니를 빼닮아있었다. 그녀는 흰머리카락이 드문드문 올라오는 머리를 쪽 찌고,
흰 무명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 P562

"누비 바느질이요?"
"누비 바느질이라고 골이 빠지는 바느질이 있지. 누비옷 짓는 거나 배워보지 그래."
부령할매는 생각만 해도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배워야 하는데요?"
"못해도 10년은 배워야 그냥저냥 지을 수 있지. 남보다 잘 지으려면 어디 10년으로 되나. 평생을 해도 끝이 나지 않지."
부령할매는 고개를 내둘렀다.
"평생을 해도요?"
끝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그녀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암튼 끝이 나지 않는 바느질이 누비 바느질이야."
누비 바느질이 낯설었지만, 수덕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미싱 바늘은두려웠지만, 바늘은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더구나 미싱이라는 기계가 자신과 기질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미싱 소리가 그녀의 머리를 갉아먹는 것 같았다. 수십 개의 바늘땀이 순식간에 떠지는 것도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릴 때 할머니로부터 처음 바느질을 배운 그녀는 뚜벅뚜벅 바늘땀을 떠 나가는 기쁨을 알았다. - P587

화순은 가장 오래 우물집을 떠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늘 어머니에게 돌아오려고 했다는 것을, 어머니와 바늘로부터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마흔 살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화순이 우물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 곁에는 금택이 있었다. 화순이 어머니를 떠났다 돌아오고 또다시 떠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금택이 늘 그렇게 말없이 어머니 곁을 지켰다. 어떤 의미에서 화순은 자신의 자리를 금택에게 양보했다. 금택이 절대로 우물집을, 어머니를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떠난 것이었다. 자매의인연으로 엮인 자신들이 운명적으로 빼앗고, 빼앗길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것을 화순은 일찌감치 알았다. 빼앗을 수 있는 권리가 금택에게만 특권처럼 주어졌다는 것을. - P611

우물집 바느질하는 여자의 집에 살고 있는 세 여자의 손 중 온전한손은 금택의 손뿐이었다. 그녀는 바늘을 유일하게 들 수 있었지만들지 않았다. 그녀는 바늘을 드는 대신 바늘처럼 작고 가늘어진 어머니의 육체를 돌보았다. 어머니가 재숙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과동시에 금택은 스스로 바늘을 놓았다. 화순은 그녀가 누비 바늘을들지 않은 지 어느덧 여섯 해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금택은 누비 바늘을 잡지 않기 위해 자신의 손을 혹독하게 대했다.
자신의 손에 눈곱만치의 자비심도 베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은 병들지 않았다. 망가지지 않았다. 금택은 바늘을 들지 않으면서, 바늘이 자신의 손에서 달아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어머니가 그것을 도로 거두어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 P622

자매는 자신들의 포개어 잡은 두 손의 살과 살이, 뼈와 뼈가, 핏줄과 핏줄이 섞이는 것을 느꼈다.
포개어져 하나가 된 자매의 손이 바늘을 잡았다.
바늘을 놓치면 안 된다는 강박적인 불안이 금택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바늘을 놓고 싶은 욕구가 화순의 목구멍에서 욕지기처럼 치밀었다. 불안과 욕구가 충돌하면서 맞대어진 금택의 손바닥과화순의 손등이 들뜨고, 엇갈려 잡은 손가락들 새가 벌어졌다. 불안이 욕구를, 욕구가 불안을 억눌렀다.

두 개이자 하나인 자매의 손이 첫 바늘땀을 뜨는 소리가 떠돌았다. - P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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