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라는 말이 거짓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대로라고 말하는것은 그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예전의 당신이 존재한다고, 그사실이 내 눈에 보인다고 서로에게 일러주는 일에 가까웠다. 정윤은 또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새치를 염색하지 않은데다얼굴에 화장기가 없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얼물에 밴 피로가 그런 인상을 강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당신의 눈에는 그때의 정윤이 보였다. 당신이 학생회관 쪽으로 걸어가고 있으면 편집실 창문에서 ‘이해진이!‘ 부르며 유난스럽게 손을 흔들던 스물하나 정윤의 모습이 술을 마시고 나면 막대 아이스크림을 꼭 두 개씩 사다가 크게 베어 물고는 맛있게 씹어 삼키던 모습이 언닌 이도 안 시리나 눈도 안 시리나, 보는 내가 눈이시리네, 그렇게 매번 잔소리하던 그때의 자기 모습도 기억났다. - P51

당신의 학교 학생들이 정확히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떤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런 집단 폭력히 비해 반복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윤은 건조한 문장으로 진술했다. 그들의 행동이 왜 치기 어린 ‘놀이‘나 ‘장난‘이 아닌지에 대해서 정윤의 논리에는 막힘이 없었고 차근차근한 설명은 집요했다.
그 글을 읽고 당신은 과거의 자신을 바라봤다. 남자 선배들이 사건을 영웅담으로 농담으로 이야기할 때 그저 미친놈들의 헛소리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그저 듣기 싫고, 피하고만 싶어서 못 들은 척했던 그때의 자신을. 정윤의 글을 읽은 당신은 그글을 읽기 전의 당신이 아니었다.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 P52

셋은 세미나를 끝내고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당신은 부모와 함께 살았고, 정윤은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고,
희영은 고향인 J시에서 지원하는 기숙사에 살았다. 늦은 밤이면당신은 막차를 타기 위해 일어섰지만, 희영은 외박계를 쓰고 정윤과 시간을 더 보내다 정윤의 집에서 자곤 했다.
정윤은 자기감정을 철저하게 숨기지 못했다. 희영에 대한 호감,
그녀가 쓴 글에 대한 애정, 희영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희영과함께할 때의 기쁨 같은 것들을 제대로 감추지 못해서 당신을 외롭게 했다. 정윤은 공평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기에 그런 감정을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당신 눈에 보였으므로,
당신은 언제나 그런 공기를 읽는 사람이었으므로, 당신은 느낄 수있었다. - P55

그렇게 말한 건 용욱이었다. 용욱은 예비역 복학생으로 사회학과 2학년이었다. 그는 세계가 급변하고 있는데 개인의 윤리 문제를 다툴 지면은 없다고 했다. 타락한 개인의 윤리는 개인의 문제일 뿐, 그것을 정치와 사회의 흐름을 읽어야 하는 지면에서 굳이다를 필요는 없다는 요지의 말이었다.
이건 일개 여성 문제가 아니라 대학원 사회의 기형적인 권력구조에 관한 문제입니다.
"정윤은 용욱의 말에 그렇게 답했다.
지금의 당신은 생각한다. 그런 말에는 언제나 힘이 있었다고.
이건 여성 문제가 아니다, 더 큰 억압의 문제다, 라는 식의 논리는언제나 강했고 다수를 설복할 수 있었다. 정윤이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않으면 논의조차 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정윤은 수면으로 올려놓고자 노력했다. 정윤이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희영의 주제는 회의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 P57

당신은 아직도 그날 밤을 기억한다. 희영이 써온 긴 글을 처음읽고 받았던 충격을,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차갑게 언 발의 감각을 느끼며 그녀의 글을 읽던 스물에서 스물하나가 되어가던 당신의 모습을 기억한다.
희영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편집실은 고요했다. 낭독이 끝났는데도 편집실을 채운 팽팽한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마 다른 사람 모두 알고 있었으리라고 지금의 당신은 생각한다. 희영에게는 타고난 관찰력과 자기 생각을 끝까지 끌어가는 용기,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지력이 있었다.
희영이 가진 장점들의 상당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몇 가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해 깊이공감했고, 상처의 조건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 P59

간 당신의 초라함이 더 분명해지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돌이켜보면, 희영은 언제나 당신의 인정을 바랐는지도모른다. 함께 글쓰기를 시작한 친구의 인정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던 희영의 재능에 대해서 희영 자신은 한 번도 확신한 적이 없었다. 분명한 논리로 자기 의견을 관철시켜가던 희영의 강한 얼굴뒤로 자신은 글을 쓸 자격도 재주도 없다는 괴로움이 자리하고 있는 줄 그때의 당신은 알지 못했다. 나는 말했어야했어. 당신은 그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자기 확신으로 가득찬 인터뷰이들을 만날 때마다 당신은 희영을 생각했다. - P64

당신은 정원대해 무슨더 가까운이년 가까이 편집부 일을 하면서 당신은 예전처럼 더디게 글을 쓰지 않았다. 덩어리 같은 막연한 생각을 언어로 풀어낼 때, 어렴풋하게 떠오른 문장들을 당신의 목소리로 종이위에 적어나갈때, 당신은 더이상 사람들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골똘히 한 생각을 써내려간 글 속에서 당신은 당신 나름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은 그런 순간들이 당신에게 준 경이와 행복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싶었다. 그토록 나약해 보이는 당신 안에도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고 흔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글로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보이는 당신도,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라도증명하고 싶었다.
글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 P75

정윤은 마치 그 자리가 보이는 것처럼 앞을 가리켰다.
너. 졸업하고 활동한다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말하면서 나를보는데 편안해 보였어. 내가 희영이를 봤던 어떤 때보다도, 그 얼굳이 잊히질 않아. 희영이를 생각하면 그때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라5월의 정오가 지나가고 있었다. 당신은 정윤의 흔들리는 어깨를한 손으로 잡고 그녀 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무엇이 지나가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당신의품에 기댈 수 있도록, 당신은 정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 P83

사람들은 그녀가 곧 나으리라고, 회복되리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괜찮아질 거라고, 다 지나갈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조금만 참아 의사 말대로 해. 다끝날 거야.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아프냐고 물어보지 않아서였을까.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도 아프냐고 묻지 못한 것이었을까.
많이 아팠나요. 다희가 다시 물었다.
그녀는 다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팔에 가만히 자기 손을 올려놓았다. 그런 다희를 보며, 그녀는 왜 자신이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 - P123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신경썼던 것 같네.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 다른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애썼지.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나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느끼며 자라서인지 나에게는내가 결코 타인에게 호감을 살 수 없는 사람, 멸시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거든. 그럴수록 나는 남들에게 더 맞춰줬고 남들이 나를 좋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번 고민했어. 그렇게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남들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고 남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느라 나의 욕구를 무시했지. 그때 내가 느꼈던 가장 큰 두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내게 실망하는 거였어. 나는 절대로, 절대로, 누군가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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