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수업은 금요일 오후 세시 삼십분에 시작했다. 짧은 커트 머리에 갈색 뿔테안경을 쓴 그녀의 얼굴은 얼핏 보면강사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려 보였다.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한 편이었다. 영문과 전공수업은 전부 영어 강의여서 그녀는 영어로 수업을 소개했다. "이 수업의 목표는 영어로 에세이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한국어 억양이 강하게 드러나는 영어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원어민처럼 영어로 말할 수 있는 학생들이 섞인 강의실에서한국어 억양이 강한 영어로 수업하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일지 어림하면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분명하게 말하려고 노력했고,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조금 크게 말했다. - P9
수업은 매시간 그녀가 선정한 영문 에세이를 읽고, A4 용지한장 분량의 에세이를 제출하는 식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읽어야 할책의 양이 많은 탓에 수강신청 정정 기간 동안 많은 학생들이 빠져나갔고, 결국 수강생은 열댓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첫번째 수업시간에 우리는 조지 오웰이 버마에서 경찰관으로 일했을 때 쓴 에세이를 읽었다. 그녀는 에세이를 한 줄 한 줄 따라읽어내려가며 강독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그 수업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시멘트에 밴 습기가 오래도록 머물던 지하 강의실의 서늘한 냄새, 천원짜리 무선 스프링 노트 위에 까만 플러스펜으로 글자를 쓸때의 느낌,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작은 강의실에 퍼져나가던 울림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고른 에세이들도 좋았고, 혼자 읽 - P10
을 때는 별 뜻 없이 지나갔던 문장들을 그녀가 그녀만의 관점으로해석할 때,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도 좋았다. 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 언어화될 때 행복했고, 그 행복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던 종류의 감정이라는 걸 가만히 그곳에 앉아 깨닫곤 했다. 가끔은 뜻도 없이눈물이 나기도 했다. 너무 오래 헤매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009년 2학기, 구 년 전 그때 나는 스물일곱의 대학교 3학년 학사 편입생이었다. - P11
자신이 번역한 책과 작가에 대한 감상으로 시작한 에세이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녀는 별다른 과장없이 자신의 어린 시절과 그때 겪었던 일들을 서술했다. 감정을 최대한 누르며 쓴 글이었지만 자신이 살았던 장소를 이야기할 때만은 목소리에서 나름의 애정이 묻어나왔다. 자신이 나고 자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주 이사 다녔던 용산에대해 쓸 때 그랬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내게 이촌에 언제부터 살았는지 물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용산의 어디에선가서로 스쳐지나갔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의 글이 더 가깝게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책의 사분의 일을 차지하는 긴 에세이에서 그녀는 그녀가 용산에서 머물렀던 장소들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했다. 그 글은 그녀가 지나온 장소의 세부가 낱낱이 묘사목탄으로 그린 큰 그림 같았다. - P17
오락실 주인이 돈을 쥐어주면서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그녀는 ‘죽지 않고‘ 게임을 이어나갔다. ‘나는 홀로 몰두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잘했다. 몰두하면 시간이 가고, 시간이 가면 그곳으로더 빨리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라고 그녀는 썼다. 도서대여점과 상가 건물 삼층에 있던 교회, 용산역사와 철길, 기차와 전철이 오갈 때의 소리와 한강, 밤에 보던 한강철교, 남자 여럿이 자동차를 타고 ‘어린애들은 가면 안 된다‘던 골목으로 들어가던 모습, 웃으며 지나가던 그 남자들을 골목 입구에 서서 쏘아보던 일, 장마가 지나가고 난 뒤에 거리에서 나던 냄새, 극장 앞에서 암표를 팔던 상인의 모습, 그녀는 장소에 대해 한참이나 묘사하고 나서 ‘나는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라고 썼다. 그 문장은 같은 에세이 안에서 여러 번 반복되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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