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 지금, 길을 걷다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여자아이들을 보면 놀라운 마음이 들어. 어떻게 저렇게 어린 아이들을 이용할 수 있지? 그저 지켜줘야 할 아이들일 뿐이잖아. 하지만 어렸을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대체 얼마나 까졌으면 자기선생이랑 놀아? 미쳤어? 더러워 난 그게 다 여자애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지. 얼빠지고 정신이 나가고 멍청해서 그런 짓을 하고다닌다고 믿었어. 언니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됐어. 아닐 거야 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닐 거야. 나 자신을 열심히 설득하려 했지만 언니는 자신을 숨기는 일에 서툴렀고 나는 그런 언니에게 분노를 느꼈어. 이럴 거면 제대로 숨기기라도 해. 마음속으로 소리쳤지. - P135

나는 웬만한 일에는 감정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잘 참고 견디며 살아왔었어. 참는 건 내 생존 방식이었지. 맞서 싸웠다가 결국 곤란해지는 사람은 내가 될 거라는 걸 알아서이기도 했고, 나를 어떻게 건드리든 반응하지 않고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무시하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아. 그건 내가 언니를 보고 배운 것이기도 했지. 그저 참는 것. - P139

교도소에서 노트에 써내려간 글은 남겨두는 글과 찢어버리는 글로 나뉘었어.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때, 내가 나를 수습할 수 없을 때 나는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노트에 적은 후에 바로 찢어서없애버렸어. 글은 글일 뿐이라고, 예전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하지만 어떤 글을 남기기로 선택하는 것은 결국 그 마음을 전달하고 싶은 바람을 담는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마음은 실제로 전해지지. 상대가 그 글을 읽는 읽지 않든 말이야.
내가 교도소에서 쓴 자주색 커버의 유선 노트는 그래서 군데군데 찢겨 있어. 나는 페이지가 찢긴 흔적을 보면서 그때 내가 어떤마음이었는지를 떠올려봐. 그때의 내 마음은 찢긴 자국으로 거기에 기록되어 있어.
그렇다고 해서 노트에 남겨둔 글이 내 마음을 속이거나 정직하지 않은 글이라는 건 아니야.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듯 노트에 내이야기를 채워넣었지. 스물둘의 내가 기억하는 너의 모든 것을 적어내려가기도 했어. - P172

내가 지내던 감방의 창으로는 운동장이 보였어. 정해진 시간이되면 수감자들이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걷는 곳이었지. 나는 쇠창살이 달린 창가에 서서 운동장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아주 가끔교도관 몇이 오갈 뿐인, 높은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아무도없는 운동장에 햇빛이 내리고 구름의 그림자가 지고 비가 내리는모습을 말이야.
스물세 살 생일이었어. 그날은 기상시간보다 한참 일찍 잠에서깼지, 눈을 뜨니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앞에 섰어. 아직 어두운 하늘에서 떨어진 가느다란 눈발이 조명등의 흰빛을 받아서 반짝이며 땅으로 내려오고있었지. 조명등의 빛이 닿은 눈발이 내 눈에는 꼭 하늘로 이어지는 길처럼 보였고, 어쩐지 그 빛나는 눈이 내리는 그곳에 나는 영원히 가닿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어. - P178

내가 너를 더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건 그 순간이었어. 내가 영원히 너에게 다다를 수 없는 타인이 되었다는 사실받아들인 건. 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울었지. 그 순간에도 너의 세계에서 나는 빠른 속도로 지워지고 있다는 걸 알아서 그래도 그래도.……나는 영원히 널 사랑할 거야.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결국 찢어버릴 편지를 쓰는 마음이라는 것도 세상에는 존재하는구나.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는 이 편지를 없애려 해.
나는 너를 보며 나를, 언니를 바라봤었지. 그리고 사랑했어. 네가 내 언니의 자식이기 때문에, 내가 마음껏 좋아할 수 없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토록 사랑했던 언니의 아이이기 때문에 나는 네가 항상 안전하기를, 너에게 맞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랐어.
비록 우리가 서로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로 스쳐지나갈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와 함께했던 시간을, 그리고 함께할 수 없었던 시간조차도 마음 아프지만 고마워할 수 있었어.
오늘은 5월의 따뜻하고 맑은 날, 너의 생일이야. 너의 스물세번째 생일을 축하해.

너의 이모가 - P179

소리는 파상풍 주사를 맞을 때도 벌어진 상처를 꿰맬 때도 눈을 꼭 감고 통증을 참았다. 처치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간 그녀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를 투명 인간 보듯 대했다. 그가 질문하면 짧게 답하고 침묵했다. 한동안 그녀는 그에게 냉정하게 대했고, 소리의 흉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그에게 잔인하게 말했다.
그가 언제나 자신에게 져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자신이 아무리 잔인하게 대해도 참고 견뎌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를 그토록 애틋하게 여겼으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대했다. 이제와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도 지난 일을만회할 수 없으니까. - P195

그때는 그런 균형이 있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가 소리의 역성을 들어주고, 그녀가 훈육하는 식의 균형. 올바른 육아는 아니있겠지만 그래도 그녀와 그는 소리에게 최선을 다했다. 적어도 그들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애썼다.
부모가 함부로 뱉는 말이 어린 자식에게 얼마나 파괴적으로 다가왔는지 아버지는 알았을까. 폭언으로 물들던 유년의 밤을 그녀는 떠올렸다. 나가 죽으라고 너 같은 게 살아서 뭐하느냐고 그냥죽어서 없어져버리라고. 아버지의 말은 내면의 목소리가 되어서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녀를 따라다녔다. 아버지는 그녀를 물리적으로 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가혹한 구타를 당하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차라리 맞는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일었다. - P197

"희진이 네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이 아니었으면좋겠는데, 넌 여자애야.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널두려워하게 하는 편이 훨씬 좋은 거야."
그게 무슨 뜻인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그 말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이모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바람을 나에게 흘리듯 말하곤 했다. 나는 이모가 나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월말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오면 이모는내 손을 잡고 시장에 데리고 가서 괜히 내 이야기를 했다.
"희진이가 반에서 혼자 백 점을 맞아서요. 네, 얘혼자요. 얘가보통 애가 아니거든요."
그런 날이면 이모는 내게 먹고 싶은 주전부리를 고르게 했다.
평소에 이모는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달콤한 주전부리를 철저하게 금지했다. 그런 싸구려를 먹으면 건강이 상한다면서. 하지만좋은 일이 있으면 이모는 내게 그 ‘싸구려‘를 허락했다. - P219

그즈음 아빠와 함께 상가 앞을 지나가다 계단 청소를 하는 사람을 봤다. 이모 또래의 여성이었는데 허리를 구부린 채 솔로 계단을 하나하나 문질러 닦고 있었다.
"저건 건물주 문제야. 계단이 뭐라고 어르신이 일일이 닦게 하나."
아빠는 혀를 차며 말했다. 집안에서는 숟가락 하나도 자기 손으로 챙기지 않으면서, 엄마나 이모가 집에 없으면 밥통에 밥이 있어도 상을 차리지 않으면서, 늘 누군가 닦아놓은 변기를 사용하면서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쪼그리고 앉아 바닥을 걸레질하는 이모를 멀뚱히 바라보던 아빠의 얼굴이 떠올라서 나는 마음이 차가워졌다. - P239

그즈음 엄마는 내게 핸드폰을 사줬다. 엄마는 야근하는 날이면아빠 밥상을 차리라고 문자를 보냈다. 나는 엉성한 솜씨로나마 계란말이를 하고 엄마가 끓여놓은 국을 데우고 반찬을 꺼내서 밥상을 차렸다. 아빠는 밥을 먹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다 먹고나서는 아무것도 치우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일들에 나는점점 지쳐갔다.
나는 더는 돌봄을 받아야 할 존재도 아니었지만, 온전히 자기힘으로 설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아무도, 나를 포함한 누구도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지금과는 달라져야 한다고, 달라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무엇을 하든 어설프고 우스꽝스러울 거라는 확신만 들었다.
나는 일평생 이모의 짐이자 장애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나도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이모는 어려서부터 내가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다고 말 - P244

하곤 했다. 이모는 그 말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것처럼 얘기했다. 그 말이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는지 이모는 끝까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모가 내게서 봤던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것이 내게는 무엇보다도 큰 공포였다는 사실을. 이모는 종종 ‘내가 너라면……‘ 이라고 말을 꺼내고는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 목소리에는 옅은 분노와 함께 어떤 질투가 담겨 있었다.
이모가 떠나고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십삼 평짜리 아파트로 이사했다. 삼십이 평짜리 아파트를 팔아서 메워야 할 구멍이 생긴 것이다. 이모 방에 있던 커다란 장롱은 우리의 새집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내 침대도 김치냉장고도, 거실 소파도, 마호가니식탁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나는 현관 앞 작은방을 썼고, 엄마와 아빠는 거실과 현관 복도 사이의 미닫이문을 닫아 거실을 방처럼 사용했다. 엄마의 인내심이 무너져내린 시점도 그때였던 것 같다.
엄마와 아빠는 그 무렵부터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았고 아빠는자주 집을 비웠다. 나는 엄마와 아빠가 차라리 헤어지기를 바랐지만 두 사람은 이혼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가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P245

돌아보면 그 시절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건 나의공포와 분노를마주하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기 위해 나는 쉽게 겁내지 않고, 사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모와 만나지 않고 지냈던 그 시절에 나는 자주 이모를 떠올렸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조종한 날, 높은 고도의 비행에 성공한 날,
근무지 부대로 이사를 간 날, 깊은 잠에서 문득 깨어나는 순간들마다 나는 이모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모, 이 정도면 만족해?‘ 세수한 뒤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고 거울을 보면 그곳에 이모와 닮은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P248

이모도 조종해볼래? 내가 물으면 이모는 망설임 없이 조종간을잡고 높은 곳으로 끊임없이 올라간다. 성층권을 통과하고 중간권과 열권을 지나 마침내 대기권을 벗어난 우리는 그곳에서 지구의 궤도를 빙빙 돌며 별들을 구경한다. 그리고 이모는 내게 손을 흔든다. 구경 한번 잘했네. 이제 갈게. 너는 다시 내려가 가서 나보란듯이 잘 살아.
옛날 사람들은 하늘 위에 하늘나라가 있다고 생각했다. 밤하늘의 별빛들을 보고 하늘에 구멍을 뚫어 지상의 인간들을 바라보는저 너머 누군가의 눈빛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들에게 별빛은 신의눈빛이거나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존재들의 시선이었다.
밤 비행을 할 때면, 검은 하늘을 날아가고 있을 때면 나는 종종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이모를 느낀다. 이모의 시선은 조종실 너머에, 비행기 너머에, 밤하늘과 대기 너머에 있다. 희박한 공기와 낮은 온도, 여러 층을 올라가면 결국 사라지는 대기와 우주공간의시작. 내가 아는 하늘은 그런 것이지만, 그런 순간에 나는 문득 옛날 사람들의 믿음을 떠올린다. 환한 낮이 아니라 어두운 밤에만지상에 닿는 저 너머의 눈빛이 있다는 믿음을 말이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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