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회도로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들 



  채 여물지 못한 달빛이 모슬포 골목마다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오늘은 칠월 칠석

  길의 끝에서 혹은 시작되는 곳에서
  덩굴손이 깍지 끼어 부여잡은 푯말 하나
  백조일손묘역 3.3km
  양민학살터 3.8km
  동서남북 불어온 바람이 달빛에 부서지다 다시 돌아와
  그 언저리를 서성거린다

  빛이 보이는 부분을 오늘이라, 하면
  희미한 윤곽만으로 모양새를 갖춘 삭은, 어제였나
  사람의 나이로 치자면 육십갑자의 끄트머리
  어둠 속 내버려진 영혼들이 웅크려 있다
   남루한 형색의 눈이 퀭한 사내들
  우회도로도 없는 흙먼짓길을
  겉옷 하나 달랑 걸쳐 입은 몸으로 
  맨발 끌며 또 끌었으리 

  오작교도 없었던 반백년의 시간 동안
  내버려진 채 웅크린 그들의 그림자는 어디,   
  오늘 같은 날 달이 만든 내 그림자를 보며
  달의 뒤편을 생각하는 것은 서늘한 일이다

정군칠 시집[물집]중에서


4.3의 아침, 오랜만에 [물집]을 읽는다.
모슬포의 거친 바람이 바다를 거쳐 섯알오름을 휘돌 듯 가슴에도 지나간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격벽들이 세상과 제주 사이에 있다. 세상의 모든 ‘갈라치기‘에 있다. 분노의 표적이 필요한 이들에게 먹잇감을 던져주는 우리안에 갇히고 오래 굶은 사자떼와 함성으로 즐기는 무리를 보고 있는 세상, [갈라치기]가 존재하는 한 4.3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은 허방이다.
연두, 연두. 이 아름다운 봄날, 진달래꽃빛도 설운 핏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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뜯어지지 않는 과자 봉지를 흔들어 대며 "이거 너무 안 잘라져요!" 하고 화를 내는 어린이들 중 그 누구도 내가 가위로 잘라 준다고 할 때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 할 수 있다고
끝끝내 씨름을 한다. 유자청이 든 유리병 뚜껑이 열리지 않아서 내가 공공대면 너도나도 나서서 자기들이 열겠다고 한다. "옛날에 엄마가 딸기잼 못 열 때도 제가 해 줬어요" 같은전적도 꼭 자랑한다.
새로 배운 어려운 말을 꼭 써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전형적인 허세 중 하나다. 아홉 살 다은이는 할머니 생신 잔치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성수신찬이었어요"라고 해서나를 당황하게 했다. 진수성찬이라고 하고 싶었겠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삐삐 롱스타킹‘ 시리즈에 푹 빠졌을 때는 삐삐가 말걀광이"라고 하기도 했다. 다은이에게는 말괄량이 삐삐가 ‘미치광이‘ 같은 느낌이었을까?
어려운 말 쓰기 좋아하는 건 예지도 마찬가지다. 예지가피규어를 사느라 "용돈을 탈진했어요"라고 했을 때는 말투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바로잡아 주지 못했다. - P25

나도 그간 어린이들에게 배운 바가 있으니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고마워. 아무튼 나도 이제 아람이처럼 농구인이야."
그러자 아람이는 조심스럽게 선을 그있다.
"삼일 차 농구인이시죠."
이날 아람이와 헤어질 때, 나는 장난스럽게 경례를 붙였다. 농구 선배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도 아람이는 웃지 않고 내 경례를 경례로 받았다. 나는 아람이의 뒷모습이 충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다음, 삼 일 차 농구인"
이라는 말을 되뇌고는 혼자 소리 내어 웃었다. 도무지 나는어린이를 당해 낼 수가 없다.
- P29

착하다‘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어린이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어린이를 상대로 한 범죄는 어린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시작될 때가 많다. 잃어버린 강아지 찾는 걸 도와 달라거나 짐 옮기는 걸 도와 달라는 식으로, 어린이의 착한 마음을이용해서 어린이를 유인하는 범죄 이야기를 들으면 머리에불이 붙는 것 같다. 슬프고 두려운 일이지만, 가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착한 어린이가 되려고 애쓰다 멍드는 어린이가 어딘가에 늘 있다.
- P33

"나눠줘요"는 ‘곱고 바른 말이고, "같이 놀자" "반겨 주자"는 ‘상냥한 마음씨‘다. 사전 뜻 그대로다. 어린이는 착하다. 착한 마음에는아무런 잘못이 없다. 어른인 내가 할 일은 ‘착한 어린이 가마음 놓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나쁜 어른을 응징하는 착한 어른이 되겠다. 머리에 불이 붙고 속이 시커메질지라도 포기하지 않겠다. 이상한 일이다. 책은 내가 어린이보다 많이 읽었을 텐데, 어떻게 된 게 매번 어린이한테 배운다.
- P37

어딘가 좀 할머니 같은 말이지만,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안하무인으로 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물론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외투 입는 계절에만 제공하는 서비스 하나 가지고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린이들은 그저 좀 독특한 순간으로만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이를 대하는 내 마음을 다잡는 데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의식이다.  - P41

"아유, 귀여워 몇 살이야? 아빠 드려야지." 사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돈을 내는 것은 아빠니까아빠 편을 드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어린이도 자기를 어르는 말에 넘어갔을지 모르고, 아마 그런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점의 정중한 손님 대접이 어린이에게 얼마나 기억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이라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그렇게 하는 사장님의 모습에도 품위가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서점에서 받은 좋은 인상이 더 확실해졌고, 입구의 어린이 코너조차 친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싶다. 어린이 앞에서만 그러면 연기가 들통나기 쉬우니까평소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감사를 자주 표현하고, 사려 깊은 말을 하고, 사회 예절을 지키는 사람, 세상이 혼란하고 떠들썩할 때일수록 더 많이,  - P45

아무리 어린 사람이라도 악몽은 자기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모든 어린이가 안쓰럽기도하고, 새삼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무서운 것들이 어린이의 어떤 면을 자라게 한다는것을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하고, 무서운 것을 마주하면서 용기를 키우고, 무서운 것을 이겨 내면서 새로운 자신이 된다는 것을. 그런 식의 성장은 우리가 어른이된 뒤에도 계속된다. 그러니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해 줄 일은 무서운 대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할 힘을키워 주는 것 아닐까.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을 응원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다독이면서.
하지만 모든 무서운 일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청소년이, 어른이 ‘여성‘ 이기 때문에 무서워하게 되는 그 많은 일들이 모두 그렇다. 그런 무서움은 아무런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세상을 좀먹고 무너뜨린다. 우리는어린이가, 여성이 안전을 위협받는 세상에서 살게 할 수 없다. 수수를, 보리를, 검은콩이를 불안하고 신뢰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할 수 없다. 피해자가 고발하고 여성들이 파헤 - P53

쳐야 겨우 끔찍한 범죄가 드러나는 세상에서, 죄 지은 자들이 처벌 받으리라 확신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래서 매번
‘청원‘을 넣어야 하는 세상에서 살게 할 수 없다. 둥글레가강낭콩이가 이것을 반복하게 할 수 없다.
이 무가치한 두려움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성범죄에 대한관용 없는 판결과 완전한 법 집행뿐이다. 단 한 명의 성범죄자도 빠짐없이 죗값을 치러야 한다. 가해자는 어떤 요행도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곳곳에서 날마다 확인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어린이를 피해자로도 가해자로도 키우지 않을 수 있다. 지금껏 해결하지 못한 많은 성범죄 사건들의 연장선 위에 n번방 사건‘이 있다. 마지막 기회인데도 해결이 지지부진해서 나는 두렵다. 지금 우리는 굴다리를 지나는 걸까, 동굴에 갇힌 걸까.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들고 출구를 내야 할 때다.
- P54

읽기는 쓰기와 나란히 간다. 읽기 시작한 어린이가 힘껏글자를 쓰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대견하다. ‘ㄹ‘을 그리다가언제 끝낼지 몰라 본의 아니게 한자 ‘‘을 쓰기도 하고, ‘ㄹ‘
에 익숙해질 무렵 잘 쓰던 ‘ㄷ‘이 갑자기 그이 되는 때도 있지만 결국 해낸다. 나는 어린이가 글을 쓰다가 모르는 글자를 물어보면 되도록 책에서 찾아서 가르쳐 준다. 책에는 뭐가 많이 있다‘ ‘선생님도 책을 보고 알게 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한번은 규민이가 뾰족뾰족‘을 어떻게 쓰냐고 물어봤다. 내가 종이에 쓰려고 하자 규민이는 가만히 내팔을 붙들었다.
"뾰족뾰족은 책에 없어요?"
- P69

자람이가 가고 보니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 책이 선생님한테 있잖아요? 하지만 다 똑같은 책이어도 이 책안 제 마음이 있어요."
이 책앤 자람이의 마음이 담겨 있다. 나도 마음을 담아읽을 것이다. 그러니 똑같아 보여도 다 다른 책이다. 자람이말이 완전히 맞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코로나 사태에 어쩔 수 없이 조금씩마음이 어둡고 무거워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그래서겠지만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말과 글에 소스라칠 때가자꾸 생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책 『핑크트헨과 안톤을펼치면서 나는 읽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글은 똑같은 글인데 읽는 사람에게 그려지는 세계는 모두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좋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다. 얼마 전에 만난 친구는 글이 무거워요. 한 글자 한 글자가 무거운 거예요"라고 했다. 글자를 익히고, 글을 읽어 내 것으로 만들고,
어려운 글자를 써서 연습했던 나는 지금 글을 무겁게 귀하 - P72

게 여기고 있을까? 읽고 쓰기를 배우던 시절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핑크트헨과 안톤』을 다시 읽을 생각이다.
- P73

길어야 3, 4년 전의 일을 두고 힘주어 "예엣날"이라고 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정말 까마득한 옛날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흔 살의 3년 전과 열 살의 3년 전은 똑같은 기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살아온 날들에 대한 비율로 따져 보니 열 살이 회상하는 ‘일곱 살 때‘는 마흔 살에게는 이십 대 후반이된다. 그런 만큼 어린이에게 어른은 엄청나게 오래 산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할 것 같다.
- P77

어린이를 만드는 건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어린이의 것이다. 남과 다른 점뿐 아니라 남과 비슷한 점도, 심지어 남과 똑같은 점도 어린이 고유의 것이다. 개성을 고유성‘으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나는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 순간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간다.
고 할 때, 다양하다‘는 사실상 ‘무한하다‘에 가깝다고도 할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메리 올리버의 문장들이 떠오른다.
"우주가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아름다운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그러면서도 우주는 활기차고 사무적이다."(『완벽한 날들』 중에서) - P91

키우는 강아지가 언니하고만 친해서 강아지를 원망하는 어린이도, 노래는 잘하지만 남들 앞에 서는 게 싫어서 음악 시간에 빠지고 싶은 어린이도 있었겠지. 지금도 어딘가에 비슷한 고민을 하는 전혀 다른 어린이와 어른이 있겠지.
사람들이 각자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주는 활기차다.
서로 달라서 생기는 들쭉날쭉함이야말로 사무적으로 보일만큼 안정적인 질서다. 그런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나는 안심이 된다. 우주가 우리 모두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넓다
는 사실도.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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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이가 새 신발을 신고 왔다. 생긴 건 축구화 같아도
‘풋살화 라고 했다. 내가 잘 못 할아들으니까 또박또박 "풋,
살, 화, 풋살화예요. 축구화 아니고"라고 강조했다. 풋살화는축구화랑 바닥이 다르고, 그냥 운동화보다 발등 부분이 납작해서 공 차기가 좋다고 했다. 아버지랑 같이 인터넷 쇼핑몰을 둘러보며 골랐고, 자기는 3학년치고는 발이 작아서 치수를 정할 때 좀 고민했고, 지난주에 주문했는데 어제야 도착했기 때문에 오늘 처음 신었으며, 이걸 신었더니 잘 뛰어지는 것 같았고, 그런데 생각만큼 그렇게 잘 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야기를 계속하려는 현성이를 간신히 말렸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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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하루를 넘긴데다 출산 후에도 출혈이 심한 난산이었다. 출혈이 그치고서도 증조모는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음식이 역하게 느껴져서 묽은 미음도 넘기지 못했다.
어쩌면 친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비 아주머니는 진땀을흘리듯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그동안 그녀에게 얼마나 의지했는지, 그녀와 주고받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지 이해했다. 살아나게 된다면, 새비 아주머니는 생각했다. 삼천이가 살아나게 된다.
면 하늘 아래 부끄러울 것 없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하늘에 빌었다.
새비 아주머니는 고봉으로 푼 밥을 챙겨 증조모에게 갔다. 그러고는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증조모에게 밥을 입에 넣고 씹어서 사발에뱉으라고 말했다. 증조모는 그녀의 말대로 했다. 밥을 씹어 뱉고, 다시 씹어 뱉었다. 며칠을 계속 그렇게 하니 기운이 조금 돌아왔다. 밥알을 삼키지는 못했지만, 밥을 씹는 동안 나온 밥물이 목에 조금씩 넘어간 것이었다. 그다음은 묽은 미음. 그다음에는 조금 덜 묽은 미음,
다음에는 죽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증조모는 살아났다.
- P73

"아저씨가 일본 가서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없었어. 그런 건 철저히 숨겼던 거야."
그 말을 하고서 할머니는 한동안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봤다.
마치 그 자리에 할머니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듯, 방심한 것처럼 보였다. 아저씨의 사진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새비 아주머니가 그린 그림은 있었어. 연필로 그린 그림이었는데 서툰 솜씨였지만 누가 봐도 아저씨였어. 그 그림도 없어져버렸지만.....… 그래도 네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니까, 새비 아저씨는 그만큼더 사는 거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도 모르는 새비 아저씨를 나도 그려볼수 있었으니까. 키가 크고, 목이 길고, 생전 본 적도 없던 백정의 집 - P81

에 가서 간병을 하고, 그 누구의 위에도 서려고 하지 않고,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그러다 혼자 일본으로 떠난, 지금의 나보다 한참은 어린이십대 초반의 남자를 그려볼 수 있었으니까. 그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는 자신이 죽고 나서 태어난 어느 사람에게 이렇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 P82

새비가할머니는 반듯이 누운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며 편지 낭독을 들었다. 그러다가도 가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했고, 두 손을 마주잡기도 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곁눈질로 보면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육십칠 년 전에 쓰인 편지가 남아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편지에서 새비 아주머니의 목소리와 손길이 그대로 느껴지는 게 더 놀라웠다. 마치 새비 아주머니가 내 속으로 들어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 편지를 받아 읽었을 증조할머니의 마음도 내 안에서살아났다. 참 희한하지 않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하는 증조할머니의 모습이 내 눈에도 보였다. 나는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 P121

조선인들이 많이 죽었을 거라고 했어. 그즈음 히로시마에는 조선인들이 많았다구, 희자 아바이처럼 제 발로 간 사람은 드물고 끌려간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됐다. 나도 희자 아이가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몰랐어. 화천 사람들이 많았더라. 주소라도 받아놓았더라면 편지라도 부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고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다고 인타까워했어. 그 말을 하면서 회자 아바이가 얼마나 울던지…… 그 얼굴을 내 똑바로 처다보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죽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회자 아바이가 말했어, 조선 사람이고 일본 사람이고 중국 사람이고 간에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사람은 세삼천지 어디에도 없다고,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희자 아바이는 내 손을 붙잡고서 그 말을 및 번이고 반복했어.
회자 아바이가 어떤 사림이었나. 범시에 감사해하고, 매일 주어지는삶에 감사해하고 ...… 심천아, 우리가 새미에서 예전에 그렇게 굶을 때두, 목숨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한 사람이 희자 아바이었다. 처음엔 이런 미친 아바이가 있나 싶기도 했는데, 그게 회자 아바이 천성이었더랬어. 나두 집안이 온통 천주교 도여서 세례를 받았지만 믿음이라는것이 없었다. 그런데 회자 아바이는 달랐어.
- P123

기억하갔시오. 기래 내답했지. 그게 내가 희자 아바이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인 것만 같아서.
삼천아. 내 너한테 허풍을 떨었다. 희자 아바이가 곁에 있는 시간이어도 괜찮다고 했지. 아예 다시 보지도 못하고 헤어지는 것보다 낫다면서, 그런데 아니야. 희자 아바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거이 내가할 짓이 아니구나, 지옥이 있대두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기야, 삼천아.
내가 허풍을 떨어도 심하게 떨었어. 난 이걸 버틸 수가 없다. 버틸 수가없어.
삼천아, 희자 아바이를 기억해줘. 그게 회자 아바이 유언이다. 희자아바이를 기억해줘, 삼천아.
- P125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 P130

그뒤로 언니가 다시 내 옆에 올 때면 나는 언니를 밀어냈다. 가까이 오지 마. 언니는 슬퍼 보였고 그런 언니를 보는 내 마음도 그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는 나의 세계에서 사라졌다. 가끔은 언니가 해싶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떠올렸고, 언니와 함께 놀 때의 감각을 떠을리기도 했지만 모든 것은 낮잠을 자다 꿨던 꿈처럼 실감을 잃어갔다.
나는 학교에 들어갔고 한글과 숫자를 배웠고 시계를 읽는 법을 배원고 죽은 사람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거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배웠다. 나는 엄마에게 죽은 언니와 놀았다고 말하던 날을 떠올렸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을 떠벌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엄마의 고통 앞에서 나의 진실은 가치가 없었다. 어떤경우에도 엄마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견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잘 자고 잘 먹고 있다.
고, 문제가 없다고, 나는 언제나 잘 웃는 아이였고, 자라서는 잘 웃는어른이 됐다. 마음속으로 울고 있을 때도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P171

할머니는 희자야, 라고 말하지도 못한 채로 자리에 주저앉아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반가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치받치던 두러몸이 그제야 몸밖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이란 신기한 감이었다. 사라지는 순간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니까. 할머니는 자신이 단 한 번도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가 대구까지 무사히 왔으리라고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희망이 꺾였을 때의 충격을 감당할수 없을 것 같아서 작은 희망까지도 모두 버린 채로 피난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할머니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다가 일어나서회자를 끌어안았다. 할머니의 품에 안긴 희자도 울기 시작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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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우에게 물었다.
지우는 개새끼라는 말은 개의 새끼라는 뜻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 개는 가짜라는 뜻이라고, 그러니까 정상 가족‘ 이라는 테두리 밖의
‘가짜‘ 자식을 뜻하는 멸칭이라고 했다. 지우는 거기까지 설명하더니나쁜 말이네, 라고 말하고는 앞으로는 그 던어를 쓰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더니 개새끼. 미친놈, 씨발놈 어느 것 하나 쓸 만한 말이 없다.
면서, 인간은 왜 이렇게 치졸하냐고, 왜 꼭 약한 사람을 짓밟는 식으로밖에 욕을 못 만드느냐고 했다.
"참신한 욕이 필요해, 분이 풀리는 욕이 필요해."
그것이 지우의 결론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개새끼라는 단어를 종이에 펜으로 써보았다. 개새끼. 어원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로그 말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강아지를 떠올렸다. 자기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의 바짓자락에 붙어서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왜 개새끼라고 하나, 개가 사람한테 너무 잘해줘서 그런 거 아닌가.
아무 조건도 없이 잘해주니까. 때려도 피하지 않고 꼬리를 흔드니까.
복종하니까, 좋아하니까 그걸 도리어 우습게 보고 경멸하는 게 아닐까. 그런 게 사람 아닐까. 나는 그 생각을 하며 개새끼라는 단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나 자신이 개새끼 같았다.
- P13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이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 P14

증조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 잠시라도 뒤돌아보면떠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십칠 년 동안 살던 집, 누린내가 가시지않던 집, 똥지게꾼도 상대해주지 않아 스스로 오물을 퍼내야 했던 집해질녘 구석에 핀 꽃이 예뻐 바라보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날아온 돌에머리를 맞아야 했던, 무엇 하나 좋은 기억이 없던 집. 그 집을 떠나 기차역으로 가는데 그 짧은 길이 천릿길 같았고, 걸음걸음이 무거워 납으로 만든 신발을 신은 것 같았다.
그래도 떠나야 했다. 그게 사는 길이었으니까. 열차에서 노란 위액을 게워내면서 증조모는 생각했다. 잊을 거라고, 잊어버릴 거라고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할머니는 증조부가 증조모에게 왜 미쳤었는지 조금은 이해한다고말했다. 증조모의 눈 속에는 아이들에게서나 보일 법한 호기심과 장 - P34

난기가 있었다. 타고난 기질이 그랬다. 백정 딸 주제에 뭐가 당당하고즐거워서 저런 표징을 짓는 거지? 그런 이유로 어린 시절에는 맞기도했다. 고개 숙이고 걸어. 감히 양민과 눈을 마주치려 해?
그러나 중조모는 고개를 숙이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숙이려다가도 저절로 머리를 들게 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리 지어 날아가는 하늘의 새들을 쳐다보느라 넋을 놓았다. 만사를 궁금해했다. 세상이 궁금하고 사람이 궁금했다. 증조모가 증조부를 만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증조모는 역사 앞에서 삶은 옥수수를 팔았는데, 일이 끝나면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칠로를 따라 걸었다. 어느 날은 이 절로가 대체 몇리나 이어져 어디에 넣는지 궁금했다.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어 저쪽멀리서 철로를 따라 걷고 있던 남자에게 가서 물었다.
- 이 철길은 몇 리나 이어지는 기라요?
말을 뱉어놓고 나서야 증조모는 정신이 들었다. 백점이 양민의 길을 막았으니 호되게 맞아도 할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 어린 남자는 멀뚱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 P35

그들은 그저 그녀를 피했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다가도 그녀가다가가면 조용해졌고 도무지 끼워주지 않았다. 그녀가 인사를 하면고개를 돌렸다. 적극적으로 그녀를 위협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녀는공격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처를 입었다. 그녀는 댓돌에 멍하니앉아서 마당에 떨어지는 햇빛을 바라보곤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빠르게 포기하고체념하는 게 사는 법이라고 가르쳤다. 삶에 무언가를 기대한다고? 그건 사치이기 전에 위험한 일이었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 P54

나는 혼자 슬퍼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부정 탄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일어난 일을 평가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게 사는 법이라고,
그녀는 댓돌에 앉은 채 엄마가 알려준 방법으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아픈 엄마를 버렸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엄마를 땅에 묻어주지 못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개성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래, 그런 일이 있다. 그건 항상 그랬던 일이다.
엄마의 말대로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그런 식의 생각은 오히려 그녀를 더 화나게 할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어떤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재능,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
그래, 개성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주먹을 쥐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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