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하루를 넘긴데다 출산 후에도 출혈이 심한 난산이었다. 출혈이 그치고서도 증조모는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음식이 역하게 느껴져서 묽은 미음도 넘기지 못했다.
어쩌면 친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비 아주머니는 진땀을흘리듯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그동안 그녀에게 얼마나 의지했는지, 그녀와 주고받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지 이해했다. 살아나게 된다면, 새비 아주머니는 생각했다. 삼천이가 살아나게 된다.
면 하늘 아래 부끄러울 것 없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하늘에 빌었다.
새비 아주머니는 고봉으로 푼 밥을 챙겨 증조모에게 갔다. 그러고는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증조모에게 밥을 입에 넣고 씹어서 사발에뱉으라고 말했다. 증조모는 그녀의 말대로 했다. 밥을 씹어 뱉고, 다시 씹어 뱉었다. 며칠을 계속 그렇게 하니 기운이 조금 돌아왔다. 밥알을 삼키지는 못했지만, 밥을 씹는 동안 나온 밥물이 목에 조금씩 넘어간 것이었다. 그다음은 묽은 미음. 그다음에는 조금 덜 묽은 미음,
다음에는 죽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증조모는 살아났다.
- P73

"아저씨가 일본 가서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없었어. 그런 건 철저히 숨겼던 거야."
그 말을 하고서 할머니는 한동안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봤다.
마치 그 자리에 할머니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듯, 방심한 것처럼 보였다. 아저씨의 사진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새비 아주머니가 그린 그림은 있었어. 연필로 그린 그림이었는데 서툰 솜씨였지만 누가 봐도 아저씨였어. 그 그림도 없어져버렸지만.....… 그래도 네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니까, 새비 아저씨는 그만큼더 사는 거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도 모르는 새비 아저씨를 나도 그려볼수 있었으니까. 키가 크고, 목이 길고, 생전 본 적도 없던 백정의 집 - P81

에 가서 간병을 하고, 그 누구의 위에도 서려고 하지 않고,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그러다 혼자 일본으로 떠난, 지금의 나보다 한참은 어린이십대 초반의 남자를 그려볼 수 있었으니까. 그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는 자신이 죽고 나서 태어난 어느 사람에게 이렇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 P82

새비가할머니는 반듯이 누운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며 편지 낭독을 들었다. 그러다가도 가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했고, 두 손을 마주잡기도 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곁눈질로 보면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육십칠 년 전에 쓰인 편지가 남아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편지에서 새비 아주머니의 목소리와 손길이 그대로 느껴지는 게 더 놀라웠다. 마치 새비 아주머니가 내 속으로 들어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 편지를 받아 읽었을 증조할머니의 마음도 내 안에서살아났다. 참 희한하지 않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하는 증조할머니의 모습이 내 눈에도 보였다. 나는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 P121

조선인들이 많이 죽었을 거라고 했어. 그즈음 히로시마에는 조선인들이 많았다구, 희자 아바이처럼 제 발로 간 사람은 드물고 끌려간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됐다. 나도 희자 아이가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몰랐어. 화천 사람들이 많았더라. 주소라도 받아놓았더라면 편지라도 부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고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다고 인타까워했어. 그 말을 하면서 회자 아바이가 얼마나 울던지…… 그 얼굴을 내 똑바로 처다보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죽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회자 아바이가 말했어, 조선 사람이고 일본 사람이고 중국 사람이고 간에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사람은 세삼천지 어디에도 없다고,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희자 아바이는 내 손을 붙잡고서 그 말을 및 번이고 반복했어.
회자 아바이가 어떤 사림이었나. 범시에 감사해하고, 매일 주어지는삶에 감사해하고 ...… 심천아, 우리가 새미에서 예전에 그렇게 굶을 때두, 목숨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한 사람이 희자 아바이었다. 처음엔 이런 미친 아바이가 있나 싶기도 했는데, 그게 회자 아바이 천성이었더랬어. 나두 집안이 온통 천주교 도여서 세례를 받았지만 믿음이라는것이 없었다. 그런데 회자 아바이는 달랐어.
- P123

기억하갔시오. 기래 내답했지. 그게 내가 희자 아바이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인 것만 같아서.
삼천아. 내 너한테 허풍을 떨었다. 희자 아바이가 곁에 있는 시간이어도 괜찮다고 했지. 아예 다시 보지도 못하고 헤어지는 것보다 낫다면서, 그런데 아니야. 희자 아바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거이 내가할 짓이 아니구나, 지옥이 있대두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기야, 삼천아.
내가 허풍을 떨어도 심하게 떨었어. 난 이걸 버틸 수가 없다. 버틸 수가없어.
삼천아, 희자 아바이를 기억해줘. 그게 회자 아바이 유언이다. 희자아바이를 기억해줘, 삼천아.
- P125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 P130

그뒤로 언니가 다시 내 옆에 올 때면 나는 언니를 밀어냈다. 가까이 오지 마. 언니는 슬퍼 보였고 그런 언니를 보는 내 마음도 그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는 나의 세계에서 사라졌다. 가끔은 언니가 해싶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떠올렸고, 언니와 함께 놀 때의 감각을 떠을리기도 했지만 모든 것은 낮잠을 자다 꿨던 꿈처럼 실감을 잃어갔다.
나는 학교에 들어갔고 한글과 숫자를 배웠고 시계를 읽는 법을 배원고 죽은 사람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거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배웠다. 나는 엄마에게 죽은 언니와 놀았다고 말하던 날을 떠올렸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을 떠벌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엄마의 고통 앞에서 나의 진실은 가치가 없었다. 어떤경우에도 엄마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견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잘 자고 잘 먹고 있다.
고, 문제가 없다고, 나는 언제나 잘 웃는 아이였고, 자라서는 잘 웃는어른이 됐다. 마음속으로 울고 있을 때도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P171

할머니는 희자야, 라고 말하지도 못한 채로 자리에 주저앉아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반가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치받치던 두러몸이 그제야 몸밖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이란 신기한 감이었다. 사라지는 순간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니까. 할머니는 자신이 단 한 번도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가 대구까지 무사히 왔으리라고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희망이 꺾였을 때의 충격을 감당할수 없을 것 같아서 작은 희망까지도 모두 버린 채로 피난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할머니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다가 일어나서회자를 끌어안았다. 할머니의 품에 안긴 희자도 울기 시작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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