뜯어지지 않는 과자 봉지를 흔들어 대며 "이거 너무 안 잘라져요!" 하고 화를 내는 어린이들 중 그 누구도 내가 가위로 잘라 준다고 할 때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 할 수 있다고
끝끝내 씨름을 한다. 유자청이 든 유리병 뚜껑이 열리지 않아서 내가 공공대면 너도나도 나서서 자기들이 열겠다고 한다. "옛날에 엄마가 딸기잼 못 열 때도 제가 해 줬어요" 같은전적도 꼭 자랑한다.
새로 배운 어려운 말을 꼭 써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전형적인 허세 중 하나다. 아홉 살 다은이는 할머니 생신 잔치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성수신찬이었어요"라고 해서나를 당황하게 했다. 진수성찬이라고 하고 싶었겠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삐삐 롱스타킹‘ 시리즈에 푹 빠졌을 때는 삐삐가 말걀광이"라고 하기도 했다. 다은이에게는 말괄량이 삐삐가 ‘미치광이‘ 같은 느낌이었을까?
어려운 말 쓰기 좋아하는 건 예지도 마찬가지다. 예지가피규어를 사느라 "용돈을 탈진했어요"라고 했을 때는 말투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바로잡아 주지 못했다. - P25

나도 그간 어린이들에게 배운 바가 있으니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고마워. 아무튼 나도 이제 아람이처럼 농구인이야."
그러자 아람이는 조심스럽게 선을 그있다.
"삼일 차 농구인이시죠."
이날 아람이와 헤어질 때, 나는 장난스럽게 경례를 붙였다. 농구 선배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도 아람이는 웃지 않고 내 경례를 경례로 받았다. 나는 아람이의 뒷모습이 충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다음, 삼 일 차 농구인"
이라는 말을 되뇌고는 혼자 소리 내어 웃었다. 도무지 나는어린이를 당해 낼 수가 없다.
- P29

착하다‘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어린이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어린이를 상대로 한 범죄는 어린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시작될 때가 많다. 잃어버린 강아지 찾는 걸 도와 달라거나 짐 옮기는 걸 도와 달라는 식으로, 어린이의 착한 마음을이용해서 어린이를 유인하는 범죄 이야기를 들으면 머리에불이 붙는 것 같다. 슬프고 두려운 일이지만, 가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착한 어린이가 되려고 애쓰다 멍드는 어린이가 어딘가에 늘 있다.
- P33

"나눠줘요"는 ‘곱고 바른 말이고, "같이 놀자" "반겨 주자"는 ‘상냥한 마음씨‘다. 사전 뜻 그대로다. 어린이는 착하다. 착한 마음에는아무런 잘못이 없다. 어른인 내가 할 일은 ‘착한 어린이 가마음 놓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나쁜 어른을 응징하는 착한 어른이 되겠다. 머리에 불이 붙고 속이 시커메질지라도 포기하지 않겠다. 이상한 일이다. 책은 내가 어린이보다 많이 읽었을 텐데, 어떻게 된 게 매번 어린이한테 배운다.
- P37

어딘가 좀 할머니 같은 말이지만,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안하무인으로 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물론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외투 입는 계절에만 제공하는 서비스 하나 가지고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린이들은 그저 좀 독특한 순간으로만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이를 대하는 내 마음을 다잡는 데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의식이다.  - P41

"아유, 귀여워 몇 살이야? 아빠 드려야지." 사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돈을 내는 것은 아빠니까아빠 편을 드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어린이도 자기를 어르는 말에 넘어갔을지 모르고, 아마 그런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점의 정중한 손님 대접이 어린이에게 얼마나 기억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이라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그렇게 하는 사장님의 모습에도 품위가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서점에서 받은 좋은 인상이 더 확실해졌고, 입구의 어린이 코너조차 친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싶다. 어린이 앞에서만 그러면 연기가 들통나기 쉬우니까평소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감사를 자주 표현하고, 사려 깊은 말을 하고, 사회 예절을 지키는 사람, 세상이 혼란하고 떠들썩할 때일수록 더 많이,  - P45

아무리 어린 사람이라도 악몽은 자기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모든 어린이가 안쓰럽기도하고, 새삼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무서운 것들이 어린이의 어떤 면을 자라게 한다는것을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하고, 무서운 것을 마주하면서 용기를 키우고, 무서운 것을 이겨 내면서 새로운 자신이 된다는 것을. 그런 식의 성장은 우리가 어른이된 뒤에도 계속된다. 그러니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해 줄 일은 무서운 대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할 힘을키워 주는 것 아닐까.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을 응원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다독이면서.
하지만 모든 무서운 일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청소년이, 어른이 ‘여성‘ 이기 때문에 무서워하게 되는 그 많은 일들이 모두 그렇다. 그런 무서움은 아무런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세상을 좀먹고 무너뜨린다. 우리는어린이가, 여성이 안전을 위협받는 세상에서 살게 할 수 없다. 수수를, 보리를, 검은콩이를 불안하고 신뢰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할 수 없다. 피해자가 고발하고 여성들이 파헤 - P53

쳐야 겨우 끔찍한 범죄가 드러나는 세상에서, 죄 지은 자들이 처벌 받으리라 확신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래서 매번
‘청원‘을 넣어야 하는 세상에서 살게 할 수 없다. 둥글레가강낭콩이가 이것을 반복하게 할 수 없다.
이 무가치한 두려움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성범죄에 대한관용 없는 판결과 완전한 법 집행뿐이다. 단 한 명의 성범죄자도 빠짐없이 죗값을 치러야 한다. 가해자는 어떤 요행도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곳곳에서 날마다 확인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어린이를 피해자로도 가해자로도 키우지 않을 수 있다. 지금껏 해결하지 못한 많은 성범죄 사건들의 연장선 위에 n번방 사건‘이 있다. 마지막 기회인데도 해결이 지지부진해서 나는 두렵다. 지금 우리는 굴다리를 지나는 걸까, 동굴에 갇힌 걸까.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들고 출구를 내야 할 때다.
- P54

읽기는 쓰기와 나란히 간다. 읽기 시작한 어린이가 힘껏글자를 쓰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대견하다. ‘ㄹ‘을 그리다가언제 끝낼지 몰라 본의 아니게 한자 ‘‘을 쓰기도 하고, ‘ㄹ‘
에 익숙해질 무렵 잘 쓰던 ‘ㄷ‘이 갑자기 그이 되는 때도 있지만 결국 해낸다. 나는 어린이가 글을 쓰다가 모르는 글자를 물어보면 되도록 책에서 찾아서 가르쳐 준다. 책에는 뭐가 많이 있다‘ ‘선생님도 책을 보고 알게 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한번은 규민이가 뾰족뾰족‘을 어떻게 쓰냐고 물어봤다. 내가 종이에 쓰려고 하자 규민이는 가만히 내팔을 붙들었다.
"뾰족뾰족은 책에 없어요?"
- P69

자람이가 가고 보니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 책이 선생님한테 있잖아요? 하지만 다 똑같은 책이어도 이 책안 제 마음이 있어요."
이 책앤 자람이의 마음이 담겨 있다. 나도 마음을 담아읽을 것이다. 그러니 똑같아 보여도 다 다른 책이다. 자람이말이 완전히 맞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코로나 사태에 어쩔 수 없이 조금씩마음이 어둡고 무거워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그래서겠지만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말과 글에 소스라칠 때가자꾸 생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책 『핑크트헨과 안톤을펼치면서 나는 읽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글은 똑같은 글인데 읽는 사람에게 그려지는 세계는 모두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좋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다. 얼마 전에 만난 친구는 글이 무거워요. 한 글자 한 글자가 무거운 거예요"라고 했다. 글자를 익히고, 글을 읽어 내 것으로 만들고,
어려운 글자를 써서 연습했던 나는 지금 글을 무겁게 귀하 - P72

게 여기고 있을까? 읽고 쓰기를 배우던 시절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핑크트헨과 안톤』을 다시 읽을 생각이다.
- P73

길어야 3, 4년 전의 일을 두고 힘주어 "예엣날"이라고 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정말 까마득한 옛날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흔 살의 3년 전과 열 살의 3년 전은 똑같은 기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살아온 날들에 대한 비율로 따져 보니 열 살이 회상하는 ‘일곱 살 때‘는 마흔 살에게는 이십 대 후반이된다. 그런 만큼 어린이에게 어른은 엄청나게 오래 산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할 것 같다.
- P77

어린이를 만드는 건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어린이의 것이다. 남과 다른 점뿐 아니라 남과 비슷한 점도, 심지어 남과 똑같은 점도 어린이 고유의 것이다. 개성을 고유성‘으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나는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 순간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간다.
고 할 때, 다양하다‘는 사실상 ‘무한하다‘에 가깝다고도 할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메리 올리버의 문장들이 떠오른다.
"우주가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아름다운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그러면서도 우주는 활기차고 사무적이다."(『완벽한 날들』 중에서) - P91

키우는 강아지가 언니하고만 친해서 강아지를 원망하는 어린이도, 노래는 잘하지만 남들 앞에 서는 게 싫어서 음악 시간에 빠지고 싶은 어린이도 있었겠지. 지금도 어딘가에 비슷한 고민을 하는 전혀 다른 어린이와 어른이 있겠지.
사람들이 각자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주는 활기차다.
서로 달라서 생기는 들쭉날쭉함이야말로 사무적으로 보일만큼 안정적인 질서다. 그런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나는 안심이 된다. 우주가 우리 모두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넓다
는 사실도.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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