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이 나날들에 오웰은 여러 명의 여자를 "아일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수전은 리처드를 사랑하지만, 리처드의 돌봄에 있어 의견 차이가 생길 때는 오웰의 뜻에 따른다. 오웰은 리처드에게 애착 장난감으로 가지고 자라고 목공 작업실에 있던 망치를 주었다. 수전이 그애에게 곰 인형을 사주자고 제안하자 오웰은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날이 정말로 추워진 어느 날, 수전은 오웰이 리처드의 나무 장난감 몇 개를 난롯불에 태우고 있는 걸 보게 되고, "좀 잔인한 일 아닌가" 생각한다. 오웰은 자신이 결핵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수전에게 말하지 않는다. - P498

오웰은 늦잠을 자고 있다. 수전은 심부름꾼이 전해주고 간끈으로 묶인 꾸러미 하나를 차가 담긴 쟁반과 함께 가져다준다. 수전이 방을 나가자 오웰은 침대에서 꾸러미를 열어본다.
그토록 여러 번 거절당한 끝에 마침내 그것이 여기 있다. 우아한 회색과 녹색 표지에 싸인 《동물농장: 동화>가. 아일린은 동화를 좋아했고, 거기 깃들어 있는 심층적인 우화 구조를, 그가벼운 언어를, 그것이 가두고 있는 어두운 두려움들을 이해했다. 오웰은 책을 아무 곳이나 펼친다. - P498

아일린의 존재감에 오웰은 멍해진다. 아일린은 고개를 뒤로젖히고 새하얀 목을 훤히 드러낸 채 웃곤 했다. 아일린이 정보부에서 했던 일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사실들을 보이지 않게정리하고 공적인 기록을 변경하는 일. 오웰은 일어나 앉는다.
그러다 나무로 된 침대 프레임에 머리를 박는다. 그들은 이 침대에서 함께 작업을 했었다.
오웰은 손을 뻗어 침대 협탁 서랍을 연다. 아일린은 잠깐여기 있을 것이다. 오웰은 아일린의 마지막 편지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읽기 시작한 참이다. 오늘은 이 부분이다.
난 당신이 다시 책을 쓰는 게 정말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오웰은 편지들을 이리저리 뒤적인다. 마지막 편지가 그를사로잡는다. 그는 그것을 몇 번이고, 끝까지, 읽고 또 읽는다.
난롯불이랑 시계도 보이고요. - P499

그들은 이 책에 관해 여러 해 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왔다. 아니, 나누어 왔었다. <1984>라는 아일린의 시가 있었다. 아일린은 오웰을 만나기 전에 쓴 그 시에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투영했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가 훨씬 더 선명해진 건 아일린이 정보부에 근무하던 시절, 세너트 하우스에서 뉴스를 삭제하던 시절이었다.
나, 다시 책을 쓰고 있어요! 오웰은 아일린에게 말해준다. 이제 그들이 소통하게 된,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식으로.


여름의 끝 무렵, 원고는 열두 페이지가 된다. 오웰은 뉴캐슬어폰타인에 있는 아일린의 무덤에 찾아가 들장미 한 송이를 그곳에 심는다. 하지만 그는 깨닫는다. 그는 아일린대해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개인적인 노트에도, 편지에도, 일기에도, 한 단어도 쓸 수가 없다. 그가 11월에 어느 에세이에 썼듯, "불행하게도, 한 사람의 감정이 정말로 어떤 상태인지 깨닫기 위해서는 종종 어떤 구체적인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가 되면 이미 너무 늦어 있다. - P500

수전은 오웰이 필요로 하는 것 가운데 집안일과 관련된 부분을제공해 준다. 그리고 이제, 아내 노릇에 포함되는 다른 역할들도 채워져야 한다. 1945년에서 1946년에 이르는 그다음 몇 달 동안, 오웰은 적어도 네 명의 여자를 덮친 다음 청혼한다. 거의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이지만, 그에게는 써야 할 책이 있고, 그래서 사람을 구해야 한다. 시도들이 거절당하자, 오웰은 자신의 아내라는 일자리를,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들과 받게 될 보상, 일이 시작될 날짜와 예상되는 종료 날짜 등 점점 더 내밀한 세부사항을 넣어가며 설명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 일은 쉽지 않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열하는 과정에서 그는 아일린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지를, 전에는 인정하지 않았던 사실들을 적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일린의 이름은 오웰이 그 여자들에게 청혼하며 하는 말들 속에서, 때로는 그가 쓴 가장 사적인 편지들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오웰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동시에 직면(혹은 외면)해야만 한다. 전에 그 일자리를 맡았던 사람이 과로와 방치 속에 사망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 역시 오래 살지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P502

의사는 오웰이 결핵으로 "위중한 상태"라고 진단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길을 따라 반힐로 돌아가면 안 된다고, 길에 난 구멍에만 빠져도 출혈이 일어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오웰은아르들루사에 머무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플레처 부부의 아이들을비롯해 그곳에 있는 모두를 감염시키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마거릿 플레처는 오웰이 쓰는 식사 도구 일체를 삶아 소독하고 침구류는 버리겠다고 말하며 계속 설득한다. 그날 밤, 로빈 플레처가 오웰의 방에 이야기를 나누러 간다. 방에서 나온 로빈은 마거릿에게말한다. "저 친구도 알아."오웰이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오웰은 거기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집에서 환자로 지내기는 싫다는 것이다. 집이란 그 사람이 만들어가는삶이고, 자기 집에 있는 한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삶 속에 있을 수 있다. 오웰을 태우고 그 끔찍한 길을 달려가는 동안 리스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굳어진다. - P542

빌과 에이브릴이 이제 다섯 살 반이 된 리처드와 함께 오웰을 차에 태워 아르들루사의 대저택으로 데려간다. 그들이 탄 빌의 오스틴 12는 도중에 수렁에 빠지고 만다. 빌과 에이브릴은 차를 끌어낼 농장 트럭을 가져오기 위해 6킬로미터를 걸어서 되돌아간다.
리처드는 그때 아버지와 함께 차 안에 앉아 기다리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우린 그냥 거기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했어요. 비가내리고 있었죠. 날씨가 추웠고, 아버지가 사탕을 주신 기억이 나요. 아버지는 몸이 무척 편찮으셨지만 저랑 계실 때는 아주 쾌활하셨어요. 아무 문제도 없는 척하려고 애를 쓰셨죠. 에이브릴 고모랑 빌 아저씨가 트럭을 몰고 돌아왔을 때는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어요.‘
리처드가 기억하는 게 있다면 사랑이다. 하지만 그가 문 닫힌차 안에 함께 앉아 아버지의 병든 숨결을 들이마시고 있을 때, 그사랑은 해로움에 너무도 가까이 있다. - P546

지금은 늦은 오후다. 노라는 정원에 앉아 있다. 하루가 끝나가고 있다. 책 역시 끝나가고 있다. 노라는 오웰에게 관심이 있었고, 그의 작품들을, 특히 <동물농장>을 즐겁게 읽었다. 하지만 점점 커져가는 자신의 불안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동안, 노라는 자신이 지금껏 리스의 책을 읽고 있었던 건 아일린을 만나기 위해서였음을 깨닫는다. 이제 두 페이지 남았다.
아일린이 언급되는 건 단 한 번이다. 노라는 페이지를 뒤로넘겨 그 부분을 찾아낸다. 여기 있다. 리스가 스페인에 있던 아일린의 직장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아일린은 "내게 그 위험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리스는 쓴다. 그때 아일린은 "정치적인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노라는 무언가가 훅 밀려드는 걸 느낀다. 차가운 건지 뜨거운 건지는 알 수가 없다. 아니, 뜨거운 게 맞다. 하루의 열기는 이미 식었지만 말이다. 콰터스말대로라면 갱년기는 이미 지났을 텐데. 고개를 들자 콰터스가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주방 창문 너머에서 흐릿하게 움직이는, 위로가 되는 그 실루엣이. - P568

노라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친다.
리스는 오웰의 "과도한 명예의식"을 거론하며 책을 끝맺고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명예의식은 "자기 자신을 향했던 오웰의 가혹함과, 어쩌면 그가 이따금 타인에게 드러냈던 배려 없는 태도까지도 설명해준다. 그럼에도 그의 배려 없는태도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많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의 아내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노라는 숨을 죽인다. 이게 다인 걸까?
"...그리고 자신의 건강과 안전에 무관심했던 그의 태도를꺾고 싶어 했던 다른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없다. 아일린은 거기 없다. - P569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들이 나온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며 예외적일 만큼 사심 없고 용기 있는 남자와 엮이는 일은 때로 커다란 대가를 요구하기도한다. 남다른 성품의 소유자가 삶을 헤치고 나아갈 때, 그 과정이 평범한 사람의 무기력한 여정보다 한층 충격적인 여파를남기리라는 건 예상 가능한 일이다.
"
노라는 페이지를 넘긴다. 거기에는 오직 텅 빈 면지들만 있을 뿐이다.
물론 죽음은 우리 모두를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죽음이 뒤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그토록 고약한 속임수처럼 보이는 건 그래서다. 노라는 자신이 그 속임수를 뒤집어줄 말들을 기대하고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 순간, 기억이 떠오른다. 노라에게도 그런 말들이 조금은 - P569

있다. 그 말들은 저 안에, 책상 맨 위칸에 들어 있다. 노라는 방으로 들어가 열쇠로 그 칸을 연다.


주소를 적어놓은 지도 상당히 오래됐네. 그 뒤로 난 고양이 세 마리랑 놀았고, 담배 한 대를 말았고(요즘은 담배를 말아피워, 맨손으로는 아니지만), 난롯불을 뒤적였고, 에릭, 그러니까 조지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어. 모두 사실은 무슨 말을써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겠지. 늦지 않게 편지를 쓰던 습관을 결혼하고 첫 몇 주 동안 잃어버렸나 봐. 에릭이랑 너무도 끊임없이, 정말이지 격렬하게 싸워댔거든. 살인이나 별거가 성사되면 편지를 딱 한 통 써서 모두에게 보내는 편이 시간절약이 되겠다는 생각까지 들지 뭐야....


아니, 노라는 생각한다. 편지를 든 손이 무릎으로 떨어진다.
아니야. 아일린이 그 대신 이뤄낸 건 삶 그 자체였어.


이제 뭘 해야 할까? - P570

이 책은 출간과 함께 오웰 애호가들로부터 여러 공격을 받기도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오웰과 아일린이 실제로 했다는 증거가 없는 말과 행동을 마치 실제인 것처럼 써놓았느냐고 저자를 비난한다. 그러나 애나 펀더는 그 부분들이 ‘픽션‘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으며,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는 사실의 큰 틀 안에서 역사를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세부사항을 창조해 낼 자유가 있다. 그리고사실상 이 책은 남성 작가 조지 오웰과 후대 여성 작가 애나 펀더의 싸움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웰의 여러 전기 작가들과 아일린의전기 작가 애나 펀더의 싸움, 공식화된 평가와 재평가의 싸움, 남성예술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앙과 그 추앙 속에서 사라진 한 여성을 되살리려는 시도의 싸움에 가깝다. 실제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자 빛나는 부분 중 하나는, 전기 작가들이 오웰의 과오를 덮고 아일린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문장의 시제를 바꾸고 수동태와 사물 주어를 사용해가며 무리한 서술을 이어간 지점들을 저자가 낱낱이 밝혀내는 부분이다. 그 전기 작가들은 후대에 이런 재평가가 이루어질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놀라움과 분노를 넘어 쓴웃음이 지어질 뿐이다. - P583

그동안 ‘여성서사‘에 해당하는 여러 작품을 번역해 왔지만 이토록 강렬하게 모든 감각을 파고드는 고통을 선사하는 작품은 처음이었다. 거의 모든 페이지가 그곳에 적혀 있는 구체적인 사실들이,
원치 않았지만 나 역시 이 괴로운 ‘이중고‘에 한데 얽힌 공범이라는 실감이 악몽처럼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내 머릿속에 맺혀 끝내사라지지 않았던 질문 한 가지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평범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고통의 비명보다는 유명작가가 내뱉는 별 의미 없는 한 마디 말을 더 가치 있게 여기고, 거기에 귀를 기울인다. 이 책의 말미에는 "아일린이 이뤄낸 것은 삶자체였다는 말이 나온다. 저자는 왜 이 당연한 사실을 이토록 많은페이지를 들여 말해야만 했던 걸까? 왜 작가가 아니었던, 그저 ‘삶‘을 살았던 아일린이 존중받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다지도 어려운 일일까? 한 사람이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 존재만으로 존중받는일이 불가능하다면, 한 유명인의 재능과 성취에 대한 추앙이 수천, 수만의 타인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대체해 버리는 일이 계속된다면, 그 낡디 낡은 검은 상자의 흑마술은 언제까지나 끝나지않을 것이다. 부디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예리하고 의미 있고 풍성한 질문들로 남기를 바란다. - P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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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의 아내는 슬픔과 병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일린은 부부의생계를 위해 풀타임으로 일할 뿐 아니라 집안일을 하고, 집에 먹을것을 마련해 두고, 요리까지 하지만, 오웰은 그 이상을 원한다. 그래서 또 다른 관계를 시작한다.
이네즈 홀든 Inez Holden은 "부서질 듯 섬세한 외모"와 "병약한 매력"을 지닌 "재미있는" 여성으로, 소설가이자 기자다. 오웰의 문학적 영웅 중 한 명인 H. G. 웰스의 친구이기도 한 이네즈는 웰스의차고 위층에 있는 아파트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다. 이네즈와 함께동물원에 다녀온 오웰은 "차나 한잔하자"며 그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간다. 그런 다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운다. 다시 나타난 오웰은 국방 시민군 군복으로 갈아입고 있다. 다음 순간, 그는 이네즈를 "덮쳤다". 이네즈는 오웰이 섹스에서 내보이는 "강렬함과 다급함"에 "놀란다". - P386

그리고 BBC의 어떤 고위 인사와 관련된, 어느 한 사람에게서 나온불확실한 소문들이 있을 뿐이다. 반면 오웰에게는 거의 셀 수 없을정도로 많은 연애 사건과 누군가를 ‘덮치는‘ 행위, 혹은 강간 미수들이 존재한다.
몇 번 아일린은 오웰의 행동 때문에 심하게 괴로워한다. 그리고 적어도 한 번은 그에게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으면떠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가장 심오한 자아를 해치는일에도 괜찮다고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길들여지는 방식의 정점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우리를 이용하는 체제에 동조하도록 길들여진다. 그러고는 결국 우리가 동의했다고, 기분 나쁘지 않았다고, 심지어는 우리 스스로 원한 일이라고말하게 된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분명 그것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간주되고, 우리가 고통받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로 남을 것이다. - P390

아일린은 리디아의 표현대로 2년 동안 "가장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잦은 자궁 출혈로 몸이 좋지 않다. 여전히 가족을 잃은슬픔을 안고 있고, 지금 하는 일도 좋아하지 않는다. 집안일을 하고, 친척들과 폭격으로 집을 잃은 친구들을 챙기고, 그들에게 머무를 곳을 찾아주고, 오웰의 글을 교열하고 타자로 치고, 장을 보고요리를 하고, 그가 아플 때면 간호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을 계속하기는 쉽지 않다. 1941년 6월, 아일린은 더는 버틸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검열과에서 사직한다.
전기 작가들은 아일린이 오웰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아일린을 그 일에서 구해준 건 오웰이라고 언급하기를 좋아한다. 한 전기 작가는 이렇게 쓴다. "이 시점에서 오웰은 아일린이 과로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일을 그만두라고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6월이 되자 아일린은 다시자유로운 여성이 되어 있다. " 공정하게 말하자면, 이 전기 작가는 자신의 주인공이 남긴 글을 바탕으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그의 주인공은 이렇게 쓴다. "일 때문에 건강이 엉망이 되고 있으니한동안 일을 쉬는 게 좋겠다고 난 아일린을 설득했어요." - P392

오웰은 러시아 혁명을 배반하고 새로운 독재 정권을 도입한 스탈린에게 책임을 묻는 에세이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아일린이보기에 그건 끔찍한 생각이다. 영국이 독일과 싸우는 걸 러시아가돕고 있는 상황에서 당장 그 부분을 공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두 사람은 얼어붙을 듯 추운 침실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한다. 리디아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힘겨운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동물농장>의 아이디어가 탄생한 건킬번의 그 집에서였다. " 아일린은 그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자신이 매우 좋아하고 한때는 직접 써보고 싶어 하기도 했던 동물이 나오는 우화로 써보라고 제안한다. 오웰이 집필을 시작하자 아일린은 "그 작품이 성공할 거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보았다고 리디아는 기억한다. 매일 저녁 오웰은 아일린에게 그날 쓴 부분을 읽어주고, 그들은 함께 의견을 주고받는다. 매일 아침 아일린은 식품 - P416

부에 출근해 새로 추가된 부분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친구들을 즐겁게 해준다. "커피를 마실 때면 아일린은 그 이야기의 일부를 인용하곤했어요. 굉장히 흥미진진했죠. 
《동물농장은 3개월 만에 완성된다. 그 작품은 스탈린 수하에서 새로운 지배계급 엘리트들로 무장하고 극악무도한 독재 정권으로 굳어져 버린 러시아 혁명에 대한 알레고리를 담은 걸작이다. 동시에 아일린이 톨킨 밑에서 배웠던 동화와 우화들처럼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 한 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칼 마르크스를 상징하는 늙은 돼지 ‘메이저‘에겐 꿈이 하나 있다. 언젠가 농장 동물들이자신들을 착취하는 인간들로부터 자신들의 삶에 관한 통제권을 빼앗은 다음, 동물들끼리만 평등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꿈이다. 메이저가 죽자, 트로츠키와 스탈린을 상징하는 다른 돼지들은 동물들을 이끌고 그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기 위한 혁명을 일으킨다. - P417

‘네 다리 좋음 두 다리 나쁨‘ 같은 구호 아래 결집한 동물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돼지들이 얻은 권력이 굳어지면서 그들은 서서히 자신들이 쫓아낸 인간들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구호들이 바뀐다. 역사가 다시 쓰인다. 돼지들은 인간의 옷을 입고, 두 다리로 걸어 다니며,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 권력이 유지되도록 돕는 건 사나운 비밀경찰개들이다. 그 개들은 강아지 때 어미와 떨어졌고, 남을 돕는 자신들의 본성을 부정하도록 훈련받았다. 결국 옛 권력 관계가 복원된다.
다만 인간 엘리트 대신 돼지가 그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모든 동물은 동등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동등하다.‘
- P417

아일린의 친구들은 진실을 알지만 오웰의 업적을 깎아내리지않기 위해 조심스러운 표현을 고른다. 레티스는 이렇게 말했다. "아일련을 알던 어떤 사람들은 《동물농장>의 소박함과 우아함이 부분적으로는 아일린의 영향 덕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요. 리디아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 소설의 몇몇 장면에서 아일린 특유의유머 감각이 엿보이는 걸 알아보았다. 아일린이 직접 그런 제안들을 한 것인지, 혹은 조지가 자기 아내의 기발한 말하기 방식과 사물을 보는 시선 일부를 자신도 모르게 흡수한 것인지는 이 맥락에서크게 중요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일린이 미묘하고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동물농장>의 창작에 협력했다고 확신한다.
"얼어붙을 것 같이 추운 1층 침실에서 《동물농장》을 쓰는 일은 아일린에게는 기쁨이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다시여름이 되면서 거절 편지는 점점 쌓여간다. 아무리 알레고리라 해도 그토록 스탈린을 비판하는 소설을 다루려는 출판사는 한 군데도 없다. - P420

아일린은 두 손으로 배를 감싸고 엄지손가락을 배꼽에 댄다. 푸른 눈을 한 자신의 딸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날 일은 없을것이다. 그 애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 애가 당연히 존재하리라 여겼다는 걸 아일린은 이제 깨닫는다.
좋아. 아일린은 밤색 트위드 스커트 속에 다리를 집어넣고 재킷을 걸친다. 떨리는 손가락에 닿은 단추들이 빽빽하게 느껴진다. 가슴속이 텅 빈 것만 같다. 아일린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음 노란 모자를 쓴다. 자신이 무언가를 닮았다면 여러 가지맛이 섞인 감초 사탕 정도일 것이다. 이제 아일린은 돌아서서여행 가방을 탁 소리가 나게 닫고 아기방으로 걸어간다.
빗줄기가 버스정류장의 검은 아스팔트에 부딪치자 빗방울들이 그대로 위로 튕겨 나오며 춤을 춘다. 마치 기쁨으로 도약하듯이. 자유가 밀려든다. 아일린이 사랑하는 책이 있고, 사내아이가 있고, 아일린이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다가올 삶이 있다.
아일린은 버스 뒷자리에 앉아 여행 가방을 옆에 놓는다. 스톡턴 온 티즈에서 뉴캐슬까지는 버스로 1시간 45분 거리다. - P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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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일 전 이곳에 처음 짐을 풀었다. 반년 전부터 수시로 숙박 사이트를 드나들다 큰맘 먹고 결제한 데였다. 여행 경험이많진 않지만 전부터 비행기표 알아보는 걸 좋아했다. 앞으로절대 가볼 일 없고, 가보지 못할 나라라도 그랬다. 직장 일로영혼이 어둑해지거나 인간에게 자주 실망할 때면 혼자 이국의낯선 도시를 검색해보곤 했다. 태블릿 피시와 다정히 얼굴을맞댄 채 열대지방 햇볕 쬐듯 전자파를 쐬었다. 세상에는 정말많은 도시와 방이 있었다. 인터넷 덕에 이제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는 유럽의 수백 년 된 성을 빌릴 수 있고, 성공한 현대미술가나 살 법한 대도시의 감각적인 스튜디오도 구할 수 있었다. 극지방의 오두막이나 구 공산권 국가의 아파트도 마찬가지였다. 거주 형태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성수기와비수기, 체류 기간에 따른 할인율도 달랐다. 세계 각국의 임대인과 임차인이 직접 거래하는 그 사이트는 어디선가 떠나오고 또 떠나가는 이들로 늘 북적였다. 세상에 자기 좌표를 마음대로 옮길 수 있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인터넷에 올라온 후기나 사진을 보면 가끔 삶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인생이 홀씨처럼 가볍고 클릭처럼 쉬운 것으로 여겨졌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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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이 꽃다발을 내밀자 오대표가 "샤베트 튤립이네요?" 하고 차분히 반색했다. 이연은 오대표의 느긋하고 위엄 있는목소리가 단정한 외모와 묘하게 어긋난다 느꼈다. 어쩌면 그런 어긋남이 상대를 집중시키는 힘인지 모르겠다고. 오대표가가슴에 꽃을 안고 천천히 두 사람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기역자로 꺾인 복도 너머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노란 불빛, 달콤한 알코올 냄새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이연은 마스크를벗어 코트 호주머니에 넣고 성민을 따라 그 빛 속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 P12

실제로 이 년 넘게 전염병이 이어지며 많은 이들이 관계를실내로 들였다. 더불어 사적 관계도 조금 더 선택적으로 변했는데, 누군가와 숨을 섞고 대화를 나누는 게 어느새 모험이자사치가 된 까닭이었다. 모임을 위해서는 일단 서로 믿을 만한상대를 택해야 했다. 성민은 ‘홈 파티의 그런 내밀하고 폐쇄적인 성격이 우정의 위상을 높여주고, 서로에게 특권을 주는 듯해 싫지 않다‘고 했다. ‘정말 비싼 정보는 온라인에 없고 세상 많은 중요한 일은 식탁에서 이뤄지기 마련‘이라면서 이연 듣기에 ‘최고경영자 과정‘ 밟은 티를 냈다. - P13

식탁 위 다채로운 식기와 소품을 보며 이연은 평소 오대표가색을 얼마나 대범하게 쓰고, 색 쓰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지 알수 있었다. 대학 때 미술을 전공했다는 오대표는 지금은 인테리어 편집숍을 운영한다고 했다. 더불어 그 집에는 그런 개성뿐 아니라 서사적 윤기‘라 부를 만한 것이 곳곳에 포진돼 있었다. 한쪽 바닥에 무심하게 놓인 현대 회화 액자와 아프리카대륙에서 온 걸로 추측되는 나무 조각품들, 은은하게 색이 바랜 진짜 아라비아산 카펫까지…… 오대표가 일일이 설명하지않아도 이연은 물건 하나하나에 깃든 집주인의 시간과 체력,
미감과 여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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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들이 잡혀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조지에게 전한 사람은아일린이었다. 바로 아일린이 밤마다 호텔 로비에서 감수하고있는 위험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아일린은 스페인에서자신이 했던 경험들이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걸 알게된다. 그 경험은 조지의 일반적인 지식, 아일린은 기여한 적도 관련된 바도 없는 지식이 되어 있다. 경찰이 "누구든 손닿는 대로 체포하고 있었다"는 건 아일린의 동료들 이야기였다. 퍼지고 있던 소문, 벨트에 폭탄을 술 장식처럼 매달고 라운지를 성큼성큼 걸어다니던 러시아인 스파이・・・ 모두 아일린이 조지에게 말해 준 것들이다. 아일린 자신도 ‘내 아내‘로 일반화되어 있다. 아일린의 모든 정체성과 행동과 지식이 멋대로 조지의 것이 되어 있다. - P270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언어를 아일린은 사실상 찾아낼 수가 없다. 아일린은 조지의 원고 페이지들을, 여백에 온통 휘갈겨진 자신의 글씨들을 노려본다. 아일린은 누구에게도 보이지않을 방식을 통해서만 이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 마치 발판이나 뼈대처럼, 최종 결과에서는 사라지거나 가려져 버리는 무언가처럼. 아일린이 생각하기에 자기말소 성향이란 오직 그것을지닌 사람이 여전히 존재할 때만 효과가 있다. 자신이 한 역할이 보잘것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거기에 오히려 주의를 집중시키는 교묘한 방법으로서만 자기말소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리 없는데, 그런데, 여기 그것이 있다.
아일린은 유리 재떨이에 가느다란 담배를 내려놓는다. 누군가가 여기, 타자로 치고 있는 행간에서 날 발견할 일이 있기는 할까. - P271

그것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남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고방식이다. 리디아는 자신이 오웰을 거절하면 ‘내숭을 떤다‘는 모욕을 듣게 될 거라고 예상한다. 리디아가 ‘그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그건 곧 유머 감각이 없다는 뜻이 될 터였다. 리디아는 명확히 말로표현할 수 없는 상황 속에 갇혀버린다. 그 상황에서는 사랑하는 친구의 병든 남편과 키스하는 것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보다 어째선지더 쉬운 일이 되어버린다. 그 키스가 아일린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어쩌면 죽음을 부르는 키스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다. 아일린이 스페인에서 언제든 죽을 수 있었던 조르주 코프에게 자신을 하나의 위안으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리디아는 자신을 오웰이 누려 마땅한 기쁨으로 여긴다.
키스는, 특히 첫 키스는 그저 키스만은 아니다. 그건 여성이 헤쳐 나가야 하는 하나의 상황이 된다. 여성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내숭 떠는 여자 아니면 걸레, 혹은 유머감각 없는 년 아니면 공범이다. 그 둘을 나누는 경계선은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나아가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비좁은 공간이다. - P283

그 부부중 남편은 우리 아버지처럼 의학 교수였다. 그런데 대화가 이어지던 도중에 그 교수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몸을 굽히더니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자신의 사타구니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무슨 말을, 농담 같은 걸 했을 수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이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기억이 내게는 전혀 없다.
나중에 나는 그 일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머니도그곳에 있었는데. 나는 어머니가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는 걸 믿을수가 없다. 어딘가에 정신을 팔고 계셨던 걸까? 음식을 챙기느라고? 정신없이 날뛰는 개를 제지하느라고? 나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꼭 자루에 든 버섯들을 만지는 것 같았어요." 어머니는 웃었다. 비유를 좋아하는 분이었으니까. 그리고 흔히들 말하듯, 그게 다였다.
나는 정신적 외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 상황은 너무도 공공연하게벌어졌기에 위협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내가 받은 충격은 한남자가 자기 아내와 우리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우리 집에서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그래도 된다고 느꼈거나, 그래야 한다고느꼈거나, 어쩌면 둘 다였을지 모른다는 깨달음에서 왔다. 그리고그는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보이지않는 존재가 된다는 건 손끝에 버섯들이 와닿고, 귓가에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은 경험이다. - P288

변소 청소가 그 모든 일의 절정(혹은 밑바닥)이었다. 조지는몸이 좋지 않아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아일린의 머릿속에 깊이새겨진 한순간이 있다. 일을 반쯤 했을 때, 조지가 저 창문을 열고 아일린을 불렀다. 아일린은 조심스럽게 몸을 빼냈다. 변기위로 넘쳐흐른 짙은 색 배설물에서 부츠 신은 발을 꺼냈다. 소용돌이치는 그 오물은 너무도 역겨웠고, 악취에 속이 뒤집힐지경이었다. 아일린은 조지가 뭐라고 하는지 들으려고 창문 쪽으로 네 걸음을 떼었다. 그러고는 거기 서 있었다. 조지의 녹색낚시용 장화를 신고, 장갑 낀 두 손을 옆으로 벌리고, 온몸이 똥투성이가 된 채로,
"차 마실 시간이잖아요. 안 그래요?" 그때 조지는 그렇게 말했다. - P334

아일린의 피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었다. 조지가 자신을 위해 차를 끓여주려고 그 말을 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들지 않았다.
아일린은 딸기가 든 그릇을 창문 아래 싱크대 한쪽에 내려놓는다. 유리병들을 찬물에 씻고 헹구기 시작한다. 팔뚝에 팔꿈치까지 소름이 돋는 순간, 아일린은 깨닫는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그것이 어떻게 느껴지게 될 지 이해하는 거라고 아일린은 언제나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아일린은 경험 자체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경험은 일어나고 있는 일을 머리가 채 깨닫기도 전에 피를 얼려버릴 수 있다. 아일린은 그 경험의 세부사항이 그렇듯 끔찍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조지가다른 여자들과 섹스하기 위해 자신에게 ‘허락‘을 구할 거라고는 그에게 강력해진 기분을 선사하는 건 그 여자들과의 섹스일까? 아니면 아일린이 느끼는 모멸감이 그런 효과를 내는 걸까? 모멸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아일린이 겨우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일이 중요하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는 건 (아일린은 마지막으로 헹군 유리병을 마른행주 위다른 병들 옆에 놓는다) 결국 아일린 자신이 중요하지 않은 존재인 척하는 것이다. 아일린은 수도꼭지를 잠근다. 다정한 윌리엄이 필요하다. "흔들리는 마음의 균형을 바로잡는 워즈워스가. - P335

몽상가가 된다는 건 훗날의 작품이라는 꿈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예술가처럼 사고하는 것일까? 그러면서 자신이 남기고 갈 무언가를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닭들이 있고 폭탄이 터지지만 정해진목적은 없는 삶과는 달리, 이 꿈에는 한 가지 목적이 있다. 오웰이 쓰는 모든 책은 불멸에 대한 착수금이 된다. 오웰은 유명한 작가가되겠다는 목표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는 아일린이 필요하다. 인생이라는 끊임없이 흐르는 혼돈으로부터 원인과 결과를, 인물들과 그들의 운명을풀어내는 이야기꾼으로서 아일린이 지닌 재능이 필요하다. 삶을 변화시킬 수 없을 때는 아이러니로, 조각난 삶을 다시 한데 엮어내고싶을 때는 은유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아일린의 재능이 필요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일깨워줄 수 있는 로런스가 있었을 때, 아일린은 그런 재능 모두를 오웰에게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로런스가 사라졌다. 로런스의 죽음은 아일린에게서 삶에 대한 꿈을 앗아가 버렸다. 그리고 다른 모든 꿈이 그렇듯, 그 꿈 역시 한번 잃어버리면 되찾기 어렵다. - P362

로런스가 세상을 떠난 뒤로, 아일린은 매일 아침 깨어날 때마다 둔탁한 충격과 함께 다시금 쓰러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오늘 아침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마 내일은 다시 그럴 것 같지만, 오늘은 아니다. 지금, 오빠와 함께 사라져버렸던 아일린의 일부는 되돌아오는 중이다. 눈을 뜨는 순간 아주 짧은 찰나지만 자신이 온전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안다. 오빠를 남겨두고떠나는 순간에는 새로운 슬픔이 가슴을 찔러온다.
아일린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모두가 누군가를 잃었고, 그 슬픔을 용감하게, 혹은 연극적으로 품고 살아간다. 대부분은 용감하게, 즉 드러내지 않은 채 품고 지낸다.
하지만 하혈과 어지러움, 복부의 통증과 온몸을 짓누르는 불쾌함을 숨기기는 더 어려워졌다. 한 달 전, 그웬은 아일린에게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단호히 말했다. 때로 아일린은 그저 침대시트 아래 놓인 하나의 곡선에 불과한 존재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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