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귀신


눈에서는 무엇이 나올까
나를 사랑하는 눈물말고

눈동자는 무슨 맛이 날까
영혼의 맛이 이럴까

눈에서 나오는 빛을 빛이라 할 수 있을까. 눈에서 나왔다고몸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눈빛은 미리 귀신일까. 아빠 가고달 열흘을 울고 방문을 연 엄마의 눈빛을 뭐라 할까. 280일간 검은 물에 떠 있다가 생전 처음 컬러로 된 내 얼굴을 마주 보던 내딸의 눈에서 나오던 빛은 뭘까.

우리는 영혼의 뒤꿈치로 보는 걸까
우리는 선 채로 꾸는 꿈일까

식기 전에 먹자면서
생물의 시신을 나누는
가족의 눈에서 나오는 - P223

빛은 무얼까

바닥에 쏟아진
두 모금의 물이
되쏘는 빛은 뭘까

문 닫은 창 앞에서 서성거리는
별의 눈빛은 어떨까

죽은 다음에도 보는 일을 쉬지 않는
저 슬픔을 뭐라 할까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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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 이야기‘를 추구할 때 생기는 또다른 문제는 내가 목도한 장면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한계에 있었다. 2차세계대전 직후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 집단수용소를 촬영한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연합군이 침투했던 바로 그 순간뿐이다. 그 사진들은 해방과 그 직후의 순간을 보여줄 뿐 수년에 걸쳐 누적된 억압과 고통의 맥락을 담아내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개농장이든 번식장이든 도살장이든, 어떤 장소에 들어섰을 때 내가 보는 것도 그 순간뿐이다. (활동가들 또한 그렇다.) 쓰고자 하는 것이 ‘파편의 나열‘이 아니라 ‘이야기‘일 때 일부가 아닌 전체를 보여주려는 욕망은 불가능하지만 불가피하다. - P175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른 인물들을 만나면서 글쓰기는 더욱 복잡한 문제가 되었다. 상충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나는 누구의 편에서 있는가? 누구의 편도 아니라면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이어진 질문은 다음의 질문에 다다랐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이야기의 주체에 대한 물음은 나를 누구와 동일시하느냐는 물음이었다. 리베카솔닛은 동일시란 나를 확장하는 연대이며, 내가 누구와 혹은 무엇과 동일시하느냐가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반면 예술사회학자 이라영은 타인과 연대하고자 한다면 슬픔과 고통의 주체를 함부로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솔닛의 말처럼 나와 동일시하는 대상은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것이다. 또한 이라영의 말처럼 고통의 주체를 나로 착각할 때, 타자의 고통을 이야기할 명분과 진실을 말하겠다는 글의 목적은 당위를 잃을것이다. 상반되는 듯 보이는 두 문장 사이를 오가며 나의 자리를 작가나 창작자가 아니라, 목격자이자 전달자의 위치에 놓았다.  - P179

나에게는 들어감보다 물러남이 중요했다. 누군가는 글쓴이의 감응으로 독자를 더 깊이 연루시키는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타자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확신도 없었고, 그들의 고통과 나의 자의식 사이에서 언제나 균형을 잡을 자신도 없었기에 자주 물러나야 했다. 아직 이야기가 문장이 되지 않았을 때, 그래서 내가 보고 들은 것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뒤엉켜 있을 때, 한 대목쯤에서는 개 산업의 카르텔을 쫓는 나의 모습을 쓰고 싶었다. 불과 몇시간 뒤 죽을 동물의 눈빛을 마주하는 괴로움에 대하여, 고문당하고 학대당하는 동물을 지켜보는 무력감에 대하여, 악몽에 시달리다 소스라치며 깨어나는 밤에 대하여 쓰고 싶었다. 그때마다 나는 저 문장을붙들고 나아갔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지만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고통이지만 나의 고통이 아니다.‘ - P180

손택의 또다른 문장에서 사람을 동물로 바꿔 읽는다.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동물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동물에게는거대한 지옥이나 다름없는 세계에서, 내가 쓴 책이 ‘우리의‘ 제도와 관습을 바꾸는 데 기여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세계는 거대하고 복잡한 이익집단들의 집합체이고 고작 한 권의 책으로 이 집합체에 균열을 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내 나름의 방식으로 지옥을 기록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나조차도 그 지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한 채 기록하기. 이것이 내가 고통에 응답하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 P181

손택은 독일출판협회 평화상 수상소감에서 문학은 대화이자 응답이라고 말했다. 살아가고 있는 것과 죽어가는 것을 향해 인간이 보여준 반응의 역사가 곧 문학이라고. 『개의 죽음』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이 이야기는 자격 없는 자의 응답이다."나는 이 책을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하려고 썼다. 그것은 미코를 처음 만난 순간과 비슷했다. 산골마을 유기견,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 바둑이를만났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나는 어떤 식으로든 미코의 눈빛에 응답해야 했다. 미코를 구하는 것은 내가해야 했고 할 수밖에 없었던 응답이었다. 이 책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쓰지 않을 수 없었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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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지 않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알코올사용장애에 관한 글을 쓰기 전에 내가 술을 참을 수 있는지, 참는다면 며칠이나 가능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이 금주가 계기가 되어 술을 끊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다. 인터넷에서 중증 알코올중독자의 사례를 검색하며 조금은 우쭐한 기분으로 중얼거린다. ‘이 사람은 정말 심하네. 나는 이 정도는아니지.‘ 갑자기 피부과에 가서 리쥬란힐러에 대해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낮에 온라인쇼핑몰에서 본 스웨터가 품절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금주를 하는 동안 이미 코트와 청바지와 구두를 구매했으면서.
알코올사용장애가 고통, 욕망, 결핍을 즉각적으로해결하려는 상태라면, 지금의 나는 그 충동을 다른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상태다. 새로운 대상에 매료되 - P90

고 그 매료가 일으킨 충동에 굴복하는 방식으로 ‘한잔만 마시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라는 속삭임은 ‘피부 시술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저 스웨터를 사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로 바뀐다. 갈망이 끝없이 이어지면 언젠가는 감당할 수 없는 대상을 갈망할 것이다. ‘시내 한가운데에 새로 들어선 고급 아파트에 살면 행복해질 거야.‘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내가 중독자라는 사실만 명백해진다. 캐럴라인 냅이 말했듯 소비사회의 특징적 신념은 고통을 즉각적으로 해결하는 것이고, 알코올이 아니라도 ‘욕망을 쫓으라‘ 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 P91

그러나 더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까? 벤만큼, 벤보다 더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까? 벤의 말처럼 늙은이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것이다. 빨리 걷거나 균형을 잡는 일이 어렵거나 때로는 불가능하게 느껴질 것이다. 기억력은 빠르게 감퇴하여 누군가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는 데 애먹을 것이다. 모든 공간을 점령한 듯 보이는 젊은이들을 관망할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데이트를 하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그들이 세상을 차지했다고, 내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고 옹색한 불만을 토로할 것이다. 그리고 마흔여섯 살 가을 더는 젊지 않다고 느꼈던 순간을, ‘속수무책으로 나이들기 시작한 첫날‘을 떠올릴 것이다. - P105

그러나 정신적 지지대만 있으면 우리는 상실과 변화 사이에서 나 자신으로 존재할까? 우리의 삶은 진정 몰락하지 않고 우리의 정신은 끝내 노화하지 않을까? 견딤의 태도를 무엇으로 선택하느냐(체념으로? 집착으로? 의연함으로?)의 차이일 뿐, 결핍은 결핍으로 남아 언제까지고 메워지지 않는 것 아닐까? 외모강박으로 표면화된 나의 두려움은 무엇일까? 내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상실 그 자체보다 내가 잃은 것으로 초래되는 균열이 아닐까?
균열은 삶의 곳곳에서 징후처럼 나타나고 있다.
스스로의 존재가치에 대한 의심으로, 중심에서 밀려나는 불안으로, 시간을 유예하려는 헛된 시도로 나는 과거의 방식으로 더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면서, - P108

새로운 방식에도 온전히 적응하지 못한 채 자주 비틀거린다. 젊음의 상실에 잇따르는 것은 허방을 딛는 감각이다.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상태.
전신거울 앞에 서는 일은, 알고 있는 것과 겪고 있는 것 사이에 나를 놓아두는 일이다. 영혼의 노예가된 자에게 가장 혼란스러운 지점은 지적 이해와 정서적 경험이 충돌하는 모순적 내면인지 모른다. 지적인 사람도 노화와 쇠퇴, 환대받지 못하는 현실로 말미암아 무력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육체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에 환멸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나, 다시금 외모강박에 사로잡힌 나는 오늘도 내면의 전신거울 앞에서나의 몸과 이목구비를, 처지고 겹치고 불거지고 주름진 살을 면밀히 뜯어본다. 이 가학 행위를 통해 나이듦을 말하기에는 젊고, 젊음을 말하기에는 나이든 나의 진실을 포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 P109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의 전환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지만, 반려동물보다 확장된 개념을요청하는 이들도 있다. 도나 해러웨이는 『해러웨이 선언문 중 ‘반려종 선언‘에서 반려동물을 넘어서는
‘반려종companion species‘"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반려종은 반려동물보다 거대하고 이질적인 범주다. 인간의 애정을 받는 동물만을 뜻하지 않고, 인간의 삶을 구성하기도 하고, 인간의 삶을 통해 구성되기도하는 모든 유기체적 존재자를 의미한다. 이 범주는 - P156

쌀, 꿀벌, 장내 세균총까지 포함하며 공구성과 유한성, 불순성과 역사성, 그리고 복잡성을 전제한다. 20반려동물이 인간의 대용물이나 가족으로 기능한다면, 반려좋은 서로를 변화시키는 존재자들 사이의관계적 생성의 장이다. 해러웨이에게 중요한 것은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벗어난 ‘얽힘entanglement‘의 존재론적 의미이며, 인간과 인간이 공동으로 존재를구성해가는 ‘함께ㅡ되어감becoming-with‘의 과정이다."
나의 ‘얽힘‘은 내가 마음쓰지 않았던 것을 마음쓰게 한다. 산책을 하다가 개미를 밟지 않으려 걸음을멈추고, 호동이가 한참 냄새 맡은 나뭇잎을 집으로가져온다. 건물을 세우기 위해 오래된 아름드리나무를 잘라낸 이들에게 하릴없이 원망을 품다가, 나 또한 이 세상에서 더없이 유해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무수한 생명체가 얽혀 있음을 돌연히 체감하는 ‘함께ㅡ되기‘의 순간, 어딘가에 있지만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비인간을 떠올리며, 감응하지만 개입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각한다. - P157

반려인 동시에 타자인 나의 개는 양가성으로 인해수많은 질문을 불러온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는가? 나와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는 너의 인간적 자질인가. 나에게서 사라졌거나 사라졌다고 믿는 너의 야생적 본성인가? 내가 너와 소통한다면 나는 무엇을 소통이라 믿는가? 너의행동에 대한 인간중심적 해석인가, 비언어적 교감의순간인가? 너와 내가 닮았다면 그 유사성은 인간성인가, 짐승인가? 언제나 수긍하고 마는 것은 내가타자에 관해 알지 못한다는 것, 알지 못하기에 알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또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내가 너를 선택한 것인가, 네가 나를 선택한 것인가? 아무에게도선택받지 못한 이 개가 나를 선택했다고 느낀 순간그 감각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인간과 비인간의 - P160

관계에서 선택하는 쪽은 인간이고 선택받는 쪽은비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물을 인간의 의도와 감정에 반응하는, 무력하고 순응적인 객체로만 보는 시선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호동이는 사유나 담론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의 사고방식과 삶의 형태에 개입한다. 그리하여 나를 새로운세계로 데려간다. 호동이의 입양 공고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작고 하얗고예쁜 개는 아니지만......"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이 개에게 선택받은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사건 가운데 하나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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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삶의 전환점이 될 만큼 중요한 일인지몰랐지만, 돌이켜보면 개인의 역사에서 변화를 일으킨 계기가 된 일이 있다. 나에게는 체리빙수 사건이었다. 그날 이후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아침에는허기를 느끼며 깨어났고, 깨어 있는 내내 허기가 가시지 않았으며, 밤에는 허기에 허덕이며 잠들었다. 나는 언제나 배고픔에 시달리는 상태인 동시에 살을 빼야 한다는 강박에도 시달리는 상태였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굶기와 먹기라는 한계선을 오가는 전쟁이었다. 절제와 충동이 대립하는 전쟁이었다. 물론 식욕을 참으려고 애쓰는 일은 일반적으로다이어트라고 표현하지, 전쟁이라고 명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몸을 전장으로 삼는 전쟁이었다. 본능적 욕구를 억누르는, 절제력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허기와 욕망이 충돌하는, 음식과 관련한 모든 것을 적으로 돌리는 전쟁.
그러나 (물리적 허기든 정신적 허기든) 허기를 채워주는 것은 음식이다. 나는 수업시간에도 책상 밑에도시락을 꺼내놓고 먹었다. 가족들이 잠들면 불 꺼진 주방으로 숨어들어 냉장고를 열고 맨손으로 반찬을 집어 허겁지겁 입안에 욱여넣었다. 피자 한 판 - P69

을 몽땅 먹어치운 뒤 토하거나, 치킨을 상자째 먹고나처 설사약을 집어삼켰다. 록산 게이는 「헝거』에서
"나는 배고프지 않으면서 배고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 허기는 마음과 몸과 심장과 영혼에 모두 깃들어 있다"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것이무슨 상태인지 안다.
하루종일 공복감이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허기라는 형벌에 고문당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배고픔이라고 여긴 것의 진짜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10대 초반부터 싹트기 시작한 결핍감, 10대 중반에 완전히 사라진 가능성,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는발레리나의 꿈, 열패감에도 불구하고 놓아지지 않는희망, 그 모든 것이 허기라는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로 환원되지 않았을까? 달리 말해 허기란 내가 가지지 못한 몸이었고, 내가 가지지 못한 몸에 대한 욕망이었으며, 내가 가지지 못한 몸에 대한 욕망의 좌절이었다. - P70

내가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도 네 권의 논픽션을 완성했다. 원고 마감을 어기거나 미루지도 않는다. 취재나 강연에 늦은 적도 없고, 준비를 소홀히 한 적도 없다. 나의 일상은 잘 유지되고 있다. 집은 언제나 정돈되어 있고, 가구와 바닥은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으며, 모든 물건은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다. 관리비나 공과금을 연체하지 않고, 나의 능력치를 넘어서 출판계약서에 사인하지 않는다. 외출할 때는 깔끔하게 옷을 입는다. 옅게 화장하고 질 좋은 핸드백과 구두를 착용한다. 귀가하면 구두를 신발장에 넣고, 핸드백 속의 물건을 제자리에 수납하며, 옷을 옷걸이에 건다. 나는알코올중독자의 이미지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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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영

2006년 계간 아시아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2018년부터 논픽션을 썼다. 
버려진 개들의 삶과 죽음을 담은 르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집과 여성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어머니의 삶을 인터뷰하고 해석을 붙여완성한 공동 회고록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어린이를 위한 동물권 이야기 운동화 신은 우탄이」를 썼다. - P-1

어떤 이야기는 ‘말의 결핍‘ 속에 존재한다. 말하지않음도 말하지 못함도 아닌 다만 말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 아직 나의 것이 아닌 말, 미처 건너오지 못한 말, 부재하고 지연된 말이 결핍 속에 머문다. 여기는 문장이 되지 못한 말이 갇힌 곳, 동시에 새로운말이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여백이다. 도착하지 않은모든 부적절한 말이 이곳에 있다. 우리가 가진 문법을 부수고, 모르는 세계를 열어줄 말이.
글을 쓰는 동안 ‘무엇을 썼는가?‘보다 ‘무엇을 쓰지 못했는가?‘에 더 오래 머물렀다. 즉, 말의 충만이아니라 말의 결핍에 폭력에 대해 쓰려고 하면 몸이굳었고, 통증에 대해 쓰려고 하면 어휘가 떠오르지않았다. 욕망이나 중독은 부끄러움이어서 내면의 감시자를 잠재우지 않고는 한마디도 적을 수 없었다. 쓰지 못한 이야기는 끝내 나의 말이 되지 못했으나, 그 결핍이야말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증명이었다. - P7

원고의 절반은 지난가을 치앙마이로 떠나기 전에, 나머지 절반은 돌아온 후에 쓰였다. 치앙마이에서 지냈던 석 달 동안 나는 책을 읽지도 글을 쓰지도 않았다. 낯선 언어의 영토에서, 모국어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언어에 대해 정확하게는 말할 수 있는 자와 말할 수 없는 자의 경계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었다. 세상은 누구의말을 듣는가?
백인 남성, 영어 원어민이라는 정체성은 전 세계어디에서나 통용되는 특권이었다. 그들은 말할 수있는 자리를 차지했고, 사소한 말에도 반응을 얻었으며, 조금만 말해도 배려받았다. 아시아 여성에 주류 언어 바깥의 존재인 나의 말은 대부분 도착하지못했다. 느리고 불완전한 외국어로 말을 이어갈 때, 내 말은 들리지 않거나 기다려지지 않거나 이해받지 못했다. 발음이나 문법의 문제라기보다. 세계를구성하는 질서와 태도의 문제였다.
언어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경험은 말의 결핍을심화한다. 극단으로 치달은 결핍은 침묵이 되고 침 - P8

묵은 존재를 삭제한다. 이방인은 종종 입 없는 자가된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 섬세하게 단어를 고르는사람, 사려 깊은 표현을 찾아내는 사람, 정확한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 경애하는 작가의 말을 즐겨 인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어눌한 말투를가진 사람, 알아듣지 못한 질문에 당황하는 사람, 말할 틈새를 찾느라 눈치를 보는 사람,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을 발음하려다 말이 가로채이는 사람, 끝내이해받지 못한 채 어색하게 웃는 사람이었다.
내가 속한 세계에서도 나는 종종 언어의 타자였기에, 두 언어의 경계에서 말을 찾아 헤매는 일은 낯선경험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기억에 목소리를 부여하기까지, 나는 얼마나 오래 말을 잃었던가? 욕망의장소를 마련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지배자의 언어를흉내냈으며, 여성의 경험을 주변화하는 관습을 의심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세상이 정해놓은 문법을 내면화했던가? 세상은 누구의 말을 듣는가? 세상이 들어주는 말을 하려고 나는 얼마나 오래 내가 아닌 채로 살았던가? - P9

침묵은 우리를 보호한 적이 없다는 오티 로드의 선언으로부터, 여자가 욕망의 장소에서 글을 쓰지 않는다면 표절을 하는 것이라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단언으로부터, 타자와의 얽힘을 통해 공동의 세계를구성하려는 도나 해러웨이의 시도로부터 자기 파괴의 서사를 해부하는 캐럴라인 냅의 탐구로부터 나는 나아갔다. 이 입 없는 자들과의 연대가 나를 더 먼 곳으로 데려가리라 믿었다.


‘말의 결핍‘이 말이 도착하지 않은 자리라면 ‘결핍의 말은 도착하지 않은 자리에서 태어난 말이다. 침묵의 잔해에서 부서진 언어를 재건하고, 부서진 언어를 낯선 문장으로 창조하기. 말의 결핍과 결핍의말 사이에서 더디게 쓴 이 글들은 완결된 진술이 아니다. 다만 부적절한 장소와 시간 속에서 균열을 일으키려 노력한 발화다. 나는 말이 도착하지 않은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출발한다.

2025년 가을
하재영 - P13

남자의 몸 아래 깔려 목이 졸린다. 정신이 아득
해지고 팔다리에 힘이 빠진다. 죽는구나....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하며 바깥으로 달아난다. 욕
설이 들리고 뒤통수에 소지품과 옷가지가 날아
든다. 나는 반 벌거벗은 채 맨발이다.


이 문단을 쓰기까지 오래 걸렸다. 책상 앞을 서성이며 일주일이 걸렸다. 아니, 그 일이 벌어진 날로부터 십수 년이 걸렸다. 어려운 일이지만 어려운 일이아니기도 했다. 막상 쓰고 보니 이 사건이 오랫동안마음에 품고 살 정도로 대단한 비밀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여자에게 매일 일어나는 평범한사건일 수 있다는 생각도.
이 경험이 흐름과 인과를 갖춘 ‘이야기‘였다면 글쓰기는 훨씬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이야기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기억도 아니다. 고착된 채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일 뿐이다. 기억과 ‘외 - P19

상기억‘은 다르다. 기억은 전개하는 이야기 속에 통합된 언어적 서사인 반면, 외상기억은 맥락 없이 감각과 심상으로 각인된 비언어적 파편이다. 정신분석학자 피에르 자네는 외상기억을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 사실상 기억이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말이 되지않은 것을 말하려는 일‘이다. 시간은 멈춰 있고 감각으로만 남은 장면
ㅡ‘얼어붙은 기억frozen memory‘ ㅡ을 언어로 옮기려는 불가능한 시도다.
- P20

침탈당한 권리를 되찾거나 기존의 관념에 도전하는 행위는 너무나 거대하여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시도하고자 하는바는 스스로 봉인해버린 시간을 해제하는 일이다. 한 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면, 외상기억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존자의 임무를 발견하고 싶다. 생존만으로도 버거운데 임무라니, 몇 년 전의 나였다면화가 났을 것이다. 물론 어떤 외상은 평생 애도만 하기에도 검질기다. 바깥에 나가거나 다시 사람을 믿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칭찬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주디스 허먼의 말처럼 피해자는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로 인한 결과를 이해한 뒤에야, 외상경험에 담긴 의미를 삶에 통합시킬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염원한다. 두려움, 무력감, 고립감이 지나갔을 때 다시 세상과 연결될 수 있기를. - P29

육체적·정신적 침범을 겪은 사람들이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임무를 발견한다면, 망각을 거부하고침묵을 거부하고 은폐를 거부하고 허구를 거부하고낙인을 거부하고, 그렇게 지금껏 거부하지 못했던모든 것을 마침내 거부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영영 숨어 있기를, 눈에 띄지 않기를,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들 앞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공간을 차지하고, 장소를 차지하는 것의 의미를 증명할 수 있지않을까? 어쩌면 비언어적 감각을 언어로 옮기려는불가능한 시도 또한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남자의 몸 아래 깔려 목이 졸린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일처럼. - P30

주디스 허먼이 지적했듯, 천재지변 같은 재난이일어났을 때는 자기 일처럼 비통해하면서도 인간이인간을 고통에 빠뜨렸을 때는 양쪽 입장을 다 들어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느라 행동을 미루다가 시간이 지나면 잊는 것을 본다. 가해자는 사람들이 망각하기를,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기에 자주 성공한다. 피해자는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행동하기를 바라기에 거의 실패한다. 과거는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회유, 망각과 침묵을 유도하는 방식이 반복된다. 가해자의 전략은 언제나 편리하고 피해자의 언어는 여전히 불리하다. - P41

질문은 현상을 넘어 다른 차원을 향한다. 피해와생존의 이야기가 많아지는 상황은 중요하고 의미있지만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이야기가 쏟아지면서익숙한 일, 기시감이 드는 일, 그래서 감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일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활화산같은 이야기가 기사 몇 줄로 납작해지고 피해 경험에만 초점이 맞춰진 채 피해 너머, 생존 이후를 상상하는 일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관을 말하는 대신 책상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나의 이야기가 시작된 장소, 여성의 이야기를 읽으며 새로운 언어를 내면화한 장소, 평생의 가장 큰 사치로써 마련한 호두나무 책상에 대해, 상상 속에서 나의 방은 광장이 되고 책상은 단상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상은 견고하고 아름답다. 세상이 주입한 언어를 버리고, 찬양받거나 멸시당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버리고, 새로운언어로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면 견고하고 아름다운 단상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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