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지 않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알코올사용장애에 관한 글을 쓰기 전에 내가 술을 참을 수 있는지, 참는다면 며칠이나 가능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이 금주가 계기가 되어 술을 끊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다. 인터넷에서 중증 알코올중독자의 사례를 검색하며 조금은 우쭐한 기분으로 중얼거린다. ‘이 사람은 정말 심하네. 나는 이 정도는아니지.‘ 갑자기 피부과에 가서 리쥬란힐러에 대해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낮에 온라인쇼핑몰에서 본 스웨터가 품절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금주를 하는 동안 이미 코트와 청바지와 구두를 구매했으면서.
알코올사용장애가 고통, 욕망, 결핍을 즉각적으로해결하려는 상태라면, 지금의 나는 그 충동을 다른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상태다. 새로운 대상에 매료되 - P90

고 그 매료가 일으킨 충동에 굴복하는 방식으로 ‘한잔만 마시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라는 속삭임은 ‘피부 시술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저 스웨터를 사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로 바뀐다. 갈망이 끝없이 이어지면 언젠가는 감당할 수 없는 대상을 갈망할 것이다. ‘시내 한가운데에 새로 들어선 고급 아파트에 살면 행복해질 거야.‘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내가 중독자라는 사실만 명백해진다. 캐럴라인 냅이 말했듯 소비사회의 특징적 신념은 고통을 즉각적으로 해결하는 것이고, 알코올이 아니라도 ‘욕망을 쫓으라‘ 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 P91

그러나 더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까? 벤만큼, 벤보다 더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까? 벤의 말처럼 늙은이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것이다. 빨리 걷거나 균형을 잡는 일이 어렵거나 때로는 불가능하게 느껴질 것이다. 기억력은 빠르게 감퇴하여 누군가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는 데 애먹을 것이다. 모든 공간을 점령한 듯 보이는 젊은이들을 관망할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데이트를 하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그들이 세상을 차지했다고, 내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고 옹색한 불만을 토로할 것이다. 그리고 마흔여섯 살 가을 더는 젊지 않다고 느꼈던 순간을, ‘속수무책으로 나이들기 시작한 첫날‘을 떠올릴 것이다. - P105

그러나 정신적 지지대만 있으면 우리는 상실과 변화 사이에서 나 자신으로 존재할까? 우리의 삶은 진정 몰락하지 않고 우리의 정신은 끝내 노화하지 않을까? 견딤의 태도를 무엇으로 선택하느냐(체념으로? 집착으로? 의연함으로?)의 차이일 뿐, 결핍은 결핍으로 남아 언제까지고 메워지지 않는 것 아닐까? 외모강박으로 표면화된 나의 두려움은 무엇일까? 내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상실 그 자체보다 내가 잃은 것으로 초래되는 균열이 아닐까?
균열은 삶의 곳곳에서 징후처럼 나타나고 있다.
스스로의 존재가치에 대한 의심으로, 중심에서 밀려나는 불안으로, 시간을 유예하려는 헛된 시도로 나는 과거의 방식으로 더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면서, - P108

새로운 방식에도 온전히 적응하지 못한 채 자주 비틀거린다. 젊음의 상실에 잇따르는 것은 허방을 딛는 감각이다.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상태.
전신거울 앞에 서는 일은, 알고 있는 것과 겪고 있는 것 사이에 나를 놓아두는 일이다. 영혼의 노예가된 자에게 가장 혼란스러운 지점은 지적 이해와 정서적 경험이 충돌하는 모순적 내면인지 모른다. 지적인 사람도 노화와 쇠퇴, 환대받지 못하는 현실로 말미암아 무력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육체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에 환멸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나, 다시금 외모강박에 사로잡힌 나는 오늘도 내면의 전신거울 앞에서나의 몸과 이목구비를, 처지고 겹치고 불거지고 주름진 살을 면밀히 뜯어본다. 이 가학 행위를 통해 나이듦을 말하기에는 젊고, 젊음을 말하기에는 나이든 나의 진실을 포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 P109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의 전환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지만, 반려동물보다 확장된 개념을요청하는 이들도 있다. 도나 해러웨이는 『해러웨이 선언문 중 ‘반려종 선언‘에서 반려동물을 넘어서는
‘반려종companion species‘"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반려종은 반려동물보다 거대하고 이질적인 범주다. 인간의 애정을 받는 동물만을 뜻하지 않고, 인간의 삶을 구성하기도 하고, 인간의 삶을 통해 구성되기도하는 모든 유기체적 존재자를 의미한다. 이 범주는 - P156

쌀, 꿀벌, 장내 세균총까지 포함하며 공구성과 유한성, 불순성과 역사성, 그리고 복잡성을 전제한다. 20반려동물이 인간의 대용물이나 가족으로 기능한다면, 반려좋은 서로를 변화시키는 존재자들 사이의관계적 생성의 장이다. 해러웨이에게 중요한 것은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벗어난 ‘얽힘entanglement‘의 존재론적 의미이며, 인간과 인간이 공동으로 존재를구성해가는 ‘함께ㅡ되어감becoming-with‘의 과정이다."
나의 ‘얽힘‘은 내가 마음쓰지 않았던 것을 마음쓰게 한다. 산책을 하다가 개미를 밟지 않으려 걸음을멈추고, 호동이가 한참 냄새 맡은 나뭇잎을 집으로가져온다. 건물을 세우기 위해 오래된 아름드리나무를 잘라낸 이들에게 하릴없이 원망을 품다가, 나 또한 이 세상에서 더없이 유해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무수한 생명체가 얽혀 있음을 돌연히 체감하는 ‘함께ㅡ되기‘의 순간, 어딘가에 있지만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비인간을 떠올리며, 감응하지만 개입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각한다. - P157

반려인 동시에 타자인 나의 개는 양가성으로 인해수많은 질문을 불러온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는가? 나와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는 너의 인간적 자질인가. 나에게서 사라졌거나 사라졌다고 믿는 너의 야생적 본성인가? 내가 너와 소통한다면 나는 무엇을 소통이라 믿는가? 너의행동에 대한 인간중심적 해석인가, 비언어적 교감의순간인가? 너와 내가 닮았다면 그 유사성은 인간성인가, 짐승인가? 언제나 수긍하고 마는 것은 내가타자에 관해 알지 못한다는 것, 알지 못하기에 알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또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내가 너를 선택한 것인가, 네가 나를 선택한 것인가? 아무에게도선택받지 못한 이 개가 나를 선택했다고 느낀 순간그 감각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인간과 비인간의 - P160

관계에서 선택하는 쪽은 인간이고 선택받는 쪽은비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물을 인간의 의도와 감정에 반응하는, 무력하고 순응적인 객체로만 보는 시선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호동이는 사유나 담론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의 사고방식과 삶의 형태에 개입한다. 그리하여 나를 새로운세계로 데려간다. 호동이의 입양 공고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작고 하얗고예쁜 개는 아니지만......"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이 개에게 선택받은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사건 가운데 하나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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