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적 이야기‘를 추구할 때 생기는 또다른 문제는 내가 목도한 장면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한계에 있었다. 2차세계대전 직후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 집단수용소를 촬영한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연합군이 침투했던 바로 그 순간뿐이다. 그 사진들은 해방과 그 직후의 순간을 보여줄 뿐 수년에 걸쳐 누적된 억압과 고통의 맥락을 담아내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개농장이든 번식장이든 도살장이든, 어떤 장소에 들어섰을 때 내가 보는 것도 그 순간뿐이다. (활동가들 또한 그렇다.) 쓰고자 하는 것이 ‘파편의 나열‘이 아니라 ‘이야기‘일 때 일부가 아닌 전체를 보여주려는 욕망은 불가능하지만 불가피하다. - P175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른 인물들을 만나면서 글쓰기는 더욱 복잡한 문제가 되었다. 상충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나는 누구의 편에서 있는가? 누구의 편도 아니라면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이어진 질문은 다음의 질문에 다다랐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이야기의 주체에 대한 물음은 나를 누구와 동일시하느냐는 물음이었다. 리베카솔닛은 동일시란 나를 확장하는 연대이며, 내가 누구와 혹은 무엇과 동일시하느냐가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반면 예술사회학자 이라영은 타인과 연대하고자 한다면 슬픔과 고통의 주체를 함부로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솔닛의 말처럼 나와 동일시하는 대상은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것이다. 또한 이라영의 말처럼 고통의 주체를 나로 착각할 때, 타자의 고통을 이야기할 명분과 진실을 말하겠다는 글의 목적은 당위를 잃을것이다. 상반되는 듯 보이는 두 문장 사이를 오가며 나의 자리를 작가나 창작자가 아니라, 목격자이자 전달자의 위치에 놓았다. - P179
나에게는 들어감보다 물러남이 중요했다. 누군가는 글쓴이의 감응으로 독자를 더 깊이 연루시키는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타자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확신도 없었고, 그들의 고통과 나의 자의식 사이에서 언제나 균형을 잡을 자신도 없었기에 자주 물러나야 했다. 아직 이야기가 문장이 되지 않았을 때, 그래서 내가 보고 들은 것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뒤엉켜 있을 때, 한 대목쯤에서는 개 산업의 카르텔을 쫓는 나의 모습을 쓰고 싶었다. 불과 몇시간 뒤 죽을 동물의 눈빛을 마주하는 괴로움에 대하여, 고문당하고 학대당하는 동물을 지켜보는 무력감에 대하여, 악몽에 시달리다 소스라치며 깨어나는 밤에 대하여 쓰고 싶었다. 그때마다 나는 저 문장을붙들고 나아갔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지만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고통이지만 나의 고통이 아니다.‘ - P180
손택의 또다른 문장에서 사람을 동물로 바꿔 읽는다.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동물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동물에게는거대한 지옥이나 다름없는 세계에서, 내가 쓴 책이 ‘우리의‘ 제도와 관습을 바꾸는 데 기여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세계는 거대하고 복잡한 이익집단들의 집합체이고 고작 한 권의 책으로 이 집합체에 균열을 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내 나름의 방식으로 지옥을 기록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나조차도 그 지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한 채 기록하기. 이것이 내가 고통에 응답하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 P181
손택은 독일출판협회 평화상 수상소감에서 문학은 대화이자 응답이라고 말했다. 살아가고 있는 것과 죽어가는 것을 향해 인간이 보여준 반응의 역사가 곧 문학이라고. 『개의 죽음』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이 이야기는 자격 없는 자의 응답이다."나는 이 책을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하려고 썼다. 그것은 미코를 처음 만난 순간과 비슷했다. 산골마을 유기견,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 바둑이를만났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나는 어떤 식으로든 미코의 눈빛에 응답해야 했다. 미코를 구하는 것은 내가해야 했고 할 수밖에 없었던 응답이었다. 이 책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쓰지 않을 수 없었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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