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영
2006년 계간 아시아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2018년부터 논픽션을 썼다. 버려진 개들의 삶과 죽음을 담은 르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집과 여성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어머니의 삶을 인터뷰하고 해석을 붙여완성한 공동 회고록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어린이를 위한 동물권 이야기 운동화 신은 우탄이」를 썼다. - P-1
어떤 이야기는 ‘말의 결핍‘ 속에 존재한다. 말하지않음도 말하지 못함도 아닌 다만 말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 아직 나의 것이 아닌 말, 미처 건너오지 못한 말, 부재하고 지연된 말이 결핍 속에 머문다. 여기는 문장이 되지 못한 말이 갇힌 곳, 동시에 새로운말이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여백이다. 도착하지 않은모든 부적절한 말이 이곳에 있다. 우리가 가진 문법을 부수고, 모르는 세계를 열어줄 말이. 글을 쓰는 동안 ‘무엇을 썼는가?‘보다 ‘무엇을 쓰지 못했는가?‘에 더 오래 머물렀다. 즉, 말의 충만이아니라 말의 결핍에 폭력에 대해 쓰려고 하면 몸이굳었고, 통증에 대해 쓰려고 하면 어휘가 떠오르지않았다. 욕망이나 중독은 부끄러움이어서 내면의 감시자를 잠재우지 않고는 한마디도 적을 수 없었다. 쓰지 못한 이야기는 끝내 나의 말이 되지 못했으나, 그 결핍이야말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증명이었다. - P7
원고의 절반은 지난가을 치앙마이로 떠나기 전에, 나머지 절반은 돌아온 후에 쓰였다. 치앙마이에서 지냈던 석 달 동안 나는 책을 읽지도 글을 쓰지도 않았다. 낯선 언어의 영토에서, 모국어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언어에 대해 정확하게는 말할 수 있는 자와 말할 수 없는 자의 경계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었다. 세상은 누구의말을 듣는가? 백인 남성, 영어 원어민이라는 정체성은 전 세계어디에서나 통용되는 특권이었다. 그들은 말할 수있는 자리를 차지했고, 사소한 말에도 반응을 얻었으며, 조금만 말해도 배려받았다. 아시아 여성에 주류 언어 바깥의 존재인 나의 말은 대부분 도착하지못했다. 느리고 불완전한 외국어로 말을 이어갈 때, 내 말은 들리지 않거나 기다려지지 않거나 이해받지 못했다. 발음이나 문법의 문제라기보다. 세계를구성하는 질서와 태도의 문제였다. 언어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경험은 말의 결핍을심화한다. 극단으로 치달은 결핍은 침묵이 되고 침 - P8
묵은 존재를 삭제한다. 이방인은 종종 입 없는 자가된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 섬세하게 단어를 고르는사람, 사려 깊은 표현을 찾아내는 사람, 정확한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 경애하는 작가의 말을 즐겨 인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어눌한 말투를가진 사람, 알아듣지 못한 질문에 당황하는 사람, 말할 틈새를 찾느라 눈치를 보는 사람,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을 발음하려다 말이 가로채이는 사람, 끝내이해받지 못한 채 어색하게 웃는 사람이었다. 내가 속한 세계에서도 나는 종종 언어의 타자였기에, 두 언어의 경계에서 말을 찾아 헤매는 일은 낯선경험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기억에 목소리를 부여하기까지, 나는 얼마나 오래 말을 잃었던가? 욕망의장소를 마련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지배자의 언어를흉내냈으며, 여성의 경험을 주변화하는 관습을 의심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세상이 정해놓은 문법을 내면화했던가? 세상은 누구의 말을 듣는가? 세상이 들어주는 말을 하려고 나는 얼마나 오래 내가 아닌 채로 살았던가? - P9
침묵은 우리를 보호한 적이 없다는 오티 로드의 선언으로부터, 여자가 욕망의 장소에서 글을 쓰지 않는다면 표절을 하는 것이라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단언으로부터, 타자와의 얽힘을 통해 공동의 세계를구성하려는 도나 해러웨이의 시도로부터 자기 파괴의 서사를 해부하는 캐럴라인 냅의 탐구로부터 나는 나아갔다. 이 입 없는 자들과의 연대가 나를 더 먼 곳으로 데려가리라 믿었다.
‘말의 결핍‘이 말이 도착하지 않은 자리라면 ‘결핍의 말은 도착하지 않은 자리에서 태어난 말이다. 침묵의 잔해에서 부서진 언어를 재건하고, 부서진 언어를 낯선 문장으로 창조하기. 말의 결핍과 결핍의말 사이에서 더디게 쓴 이 글들은 완결된 진술이 아니다. 다만 부적절한 장소와 시간 속에서 균열을 일으키려 노력한 발화다. 나는 말이 도착하지 않은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출발한다.
2025년 가을 하재영 - P13
남자의 몸 아래 깔려 목이 졸린다. 정신이 아득 해지고 팔다리에 힘이 빠진다. 죽는구나....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하며 바깥으로 달아난다. 욕 설이 들리고 뒤통수에 소지품과 옷가지가 날아 든다. 나는 반 벌거벗은 채 맨발이다.
이 문단을 쓰기까지 오래 걸렸다. 책상 앞을 서성이며 일주일이 걸렸다. 아니, 그 일이 벌어진 날로부터 십수 년이 걸렸다. 어려운 일이지만 어려운 일이아니기도 했다. 막상 쓰고 보니 이 사건이 오랫동안마음에 품고 살 정도로 대단한 비밀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여자에게 매일 일어나는 평범한사건일 수 있다는 생각도. 이 경험이 흐름과 인과를 갖춘 ‘이야기‘였다면 글쓰기는 훨씬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이야기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기억도 아니다. 고착된 채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일 뿐이다. 기억과 ‘외 - P19
상기억‘은 다르다. 기억은 전개하는 이야기 속에 통합된 언어적 서사인 반면, 외상기억은 맥락 없이 감각과 심상으로 각인된 비언어적 파편이다. 정신분석학자 피에르 자네는 외상기억을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 사실상 기억이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말이 되지않은 것을 말하려는 일‘이다. 시간은 멈춰 있고 감각으로만 남은 장면 ㅡ‘얼어붙은 기억frozen memory‘ ㅡ을 언어로 옮기려는 불가능한 시도다. - P20
침탈당한 권리를 되찾거나 기존의 관념에 도전하는 행위는 너무나 거대하여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시도하고자 하는바는 스스로 봉인해버린 시간을 해제하는 일이다. 한 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면, 외상기억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존자의 임무를 발견하고 싶다. 생존만으로도 버거운데 임무라니, 몇 년 전의 나였다면화가 났을 것이다. 물론 어떤 외상은 평생 애도만 하기에도 검질기다. 바깥에 나가거나 다시 사람을 믿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칭찬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주디스 허먼의 말처럼 피해자는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로 인한 결과를 이해한 뒤에야, 외상경험에 담긴 의미를 삶에 통합시킬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염원한다. 두려움, 무력감, 고립감이 지나갔을 때 다시 세상과 연결될 수 있기를. - P29
육체적·정신적 침범을 겪은 사람들이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임무를 발견한다면, 망각을 거부하고침묵을 거부하고 은폐를 거부하고 허구를 거부하고낙인을 거부하고, 그렇게 지금껏 거부하지 못했던모든 것을 마침내 거부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영영 숨어 있기를, 눈에 띄지 않기를,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들 앞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공간을 차지하고, 장소를 차지하는 것의 의미를 증명할 수 있지않을까? 어쩌면 비언어적 감각을 언어로 옮기려는불가능한 시도 또한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남자의 몸 아래 깔려 목이 졸린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일처럼. - P30
주디스 허먼이 지적했듯, 천재지변 같은 재난이일어났을 때는 자기 일처럼 비통해하면서도 인간이인간을 고통에 빠뜨렸을 때는 양쪽 입장을 다 들어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느라 행동을 미루다가 시간이 지나면 잊는 것을 본다. 가해자는 사람들이 망각하기를,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기에 자주 성공한다. 피해자는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행동하기를 바라기에 거의 실패한다. 과거는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회유, 망각과 침묵을 유도하는 방식이 반복된다. 가해자의 전략은 언제나 편리하고 피해자의 언어는 여전히 불리하다. - P41
질문은 현상을 넘어 다른 차원을 향한다. 피해와생존의 이야기가 많아지는 상황은 중요하고 의미있지만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이야기가 쏟아지면서익숙한 일, 기시감이 드는 일, 그래서 감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일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활화산같은 이야기가 기사 몇 줄로 납작해지고 피해 경험에만 초점이 맞춰진 채 피해 너머, 생존 이후를 상상하는 일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관을 말하는 대신 책상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나의 이야기가 시작된 장소, 여성의 이야기를 읽으며 새로운 언어를 내면화한 장소, 평생의 가장 큰 사치로써 마련한 호두나무 책상에 대해, 상상 속에서 나의 방은 광장이 되고 책상은 단상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상은 견고하고 아름답다. 세상이 주입한 언어를 버리고, 찬양받거나 멸시당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버리고, 새로운언어로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면 견고하고 아름다운 단상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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