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어린 팽나무는 아직은 땅바닥의 것들과 가까이 있어서 한두해 피어났다가 사라지는 잡초나 들꽃과 다르지 않았다. 팽나무의 싹이 처음 나왔을 때 부근에 함께 싹을 틔운 들풀들이 많이 있었다. 노랑 꽃이 피는 사데풀, 흰 꽃받침에 노란 꽃이 피는 갯질경이, 연보라 꽃잎 가운데 꽃술이 노란갯개미취, 노란 별 모양의 꽃이 바위나 돌 틈에 한울금씩 무리 지어 피는 기린초, 바위채송화 등이 빈터의 곳곳에 자라났고 취명아주, 띠풀, 해홍나물, 퉁퉁마디 등은 바닷가 쪽에 자랐고 샛강 변에는 천일사초, 억새, 갈대가 우거졌다. 그렇게 제법 키가 큰 풀들 외에도 땅바닥에 달라붙은 듯한 쑥이나 냉이, 민들레, 번행초가 작은 것들끼리 모여서 자랐다. 어떤 것은 부근에 피어났다가 겨울동안에 말라 죽어버렸지만, 봄이 오면 날아간 씨앗으로 새싹이 나서 장소를 옮겨 다시 피어나곤 했다. 어느 꽃나무는 한해 동안, 또 어떤 풀은 두해를 나는 게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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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되면 나무들은 산에서 내려와 들판을 지나 바다로 불어가는 바람에 잎을 살랑이면서 나직하게 노래하는 것 같았다. 이렇듯 나무에게 하루는 한해이고 그것은 열번의 해, 백번의 해와도 같을 것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봄의 성장과 여름의 번성에서 열매를 맺고 잎이 떨어지는 가을을 지나 한해의 끝인 겨울이 사계절 중에 특별한 것은, 오래 사는 나무에게도 죽음 같은 정지 기간이기 때문이었다.
큰 나무들은 자연스럽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살았다. 나무들은 먼 저쪽이나 바로 뒤에 앞에 누가 어떤 나무가 있는지 느끼고 있었고, 땅속에서 뿌리들의 접촉으로 또는 이파리와 꽃과 열매의 냄새와 성질과 뿜어내는 습도와 물질과, 모여드는 벌레와 새 들 때문에 빈터 부근의 숲 전체를 서로 알게 되었다. 나무는 나이테 속에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흔적을 남겼다. 그 겹겹의 섬유질 속에 계절의 재활과 성장과 갈무리와 휴지의 반복이 새겨졌다. 이를테면 지상에서 계속되는 이 반복은 길건짧건 시작이나 끝이 아니라 오래오래, 또다시 오랫동안 되풀이되는 변화에 지나지 않았다. - P37

팽나무는 꽃을 피우고 풋열매를 맺고 잎이 무성한 여름부터 겨울을 준비했다. 나무는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몇달동안 죽은 듯 잠을 자면서도 이 겨울눈으로 하여 되살아났다. 봄이 오면서 세모 또는 길쭉하고 아니면 동그란 각종의 눈들이 겉으로 흘러나와 말라붙은 끈적한 진물과 몇결의 보자기로 감싼 듯 딱딱하게 굳은 껍질의 틈을 헤치고아주 조금씩 싹을 밀어냈다. 겨울눈을 따서 헤쳐보면 수십장의 미세한 잎들이 돌돌 말려서 겹쳐 있었다. 해마다 찾아오는 겨울은 모든 활동을 멈춘 나무 자신의 몸속에 봄의부활을 간직하게 하는 일시적인 기다림의 기간이었다.
꽃 피고 열매가 익고 잔뜩 번성했던 여름의 끝에 태풍이 찾아왔다. 해마다 그맘때가 되면 거세고 습기 찬 바람이 서남쪽에서 검은 구름을 몰고 와서 폭우를 뿌렸다. 바다와 갯벌과 들판은 온통 회색으로 가득 차고, 바람은 나무를 꺾기도 하고 뿌리째 뽑아버리기도 했다. 풀과 키 작은 관목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대로 줄기와 가지를 숙이고 미친 듯이 잎사귀를 팔락였다. 어두운 하늘을 하얗게가르며 번개가 줄지어 번쩍이고 뒤이은 천둥소리가 하늘을 찢는 것 같았다. 내륙에서 불어난 강물은 하구를 가득채워 어디서부터 바다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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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한마리가 날아왔다.
동쪽 하늘 멀리 흰 눈을 덮어쓴 산맥이 연이었고 그 아래로 높고 낮은 산과 언덕이 물결치듯 내려오다가 그치고, 키 작은 관목 숲이 우거진 들판이 나오면서 드넓은 습지가운데로 강이 나타났다. 어디쯤에서 시작하는지 알 수 없는 긴 강은 구불대며 서쪽에서 동북쪽 바다를 향하여 흘러갔다.
산맥의 깊은 숲에는 가문비나무, 전나무, 낙엽송, 자작나무가 뒤섞여 자라났고 산세가 낮아지면서 참나무, 사시나무 그리고 월귤, 들쭉, 산딸기, 시로미, 노간주나무 열매, 붉나무 열매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자라나 새와 작은 짐승 - P7

들이 먹고살 만해 보였다. 물가에 가까이 가면 물풀과 같대가 자라난 곳과 뺄밭과 모래땅과 자갈밭이 드문드문 나뉘어 있었다. 강변에도 여러 종류의 새들이 살았지만 서로식성과 먹이가 달라서 다투고 빼앗을 필요 없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둥지를 지어 살았다.
개똥지빠귀라는 새 한마리가 산자락이 끝나는 낮은 관목 숲으로 날아왔다. 등은 껍질 벗은 소나무처럼 짙은 갈색이었고, 머리는 검은색에 눈 위로 눈썹 같은 흰 선이 그어졌고, 배는 흰 바탕에 검은 반점이 얼룩얼룩했다. 그곳은 작은 새들의 낙원이었다. 새들이 땅바닥 아무 데나 작은 부리로 젖은 나뭇잎을 들추고 흙을 파헤치면 지렁이든 굼벵이든 나방이든 애벌레든 맛있는 것들이 나왔다. 개똥지빠귀란 새는 어느 것이나 똑같은 모양이라서 여럿이 모이면 분간하기가 어렵지만, 방금 낮은 숲으로 날아온 이 개똥지빠귀는 알록달록 검은 점박이 가슴털이 동그랗게 뜯겨나간 자리가 있었다. 그건 지난여름 어느 날, 강 건너편 풀밭으로 벌레를 잡으러 갔을 때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흔적이었다.
개똥지빠귀는 풀밭에 벌레를 잡아먹으러 내려오면 자기 걸음을 재어보듯이 쪼르르 달려가다가 멈칫 서서 하늘보고, 좌우 보고, 땅속을 부리로 뒤적거리다가 다시 쪼르 - P8

르 달려가곤 했다. 새가 멀리서도 벌레가 있을 듯한 장소를 찜해놓고 달려가 멈추어 서서 부리로 몇번 콕콕 찌르면나뭇잎 아래나 얕은 땅속에서 지렁이, 애벌레, 굼벵이, 딱정벌레가 나왔다.
풀밭 위쪽 언덕 비탈에 자라난 참나무 가지 위에 갈색의털북숭이 새가 앉아 있었다. 그것은 말똥가리였는데, 동그랗게 놀란 듯한 눈을 부릅뜨고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날개를 펼치고 풀밭을 향하여 날아갔다. 말똥가리가 지상을 훑듯이 얕게 날아 지나가면서 발가락을 쫙 벌려 벌레 잡기에 골똘한 개똥지빠귀를 잡아챘다. 개똥지빠귀는 울부짖고 날개를 퍼덕이며 천적의 발톱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자작나무 숲에 둥지를 튼 까마귀들이 후다닥 날아올랐고 그중 세마리가 말똥가리에게 달려들었다. 까마귀들은 몸집은 작았지만 빠르고 날쌔게 말똥가리를 추격하여 등뒤에서 쏘았고, 다른 까마귀 두마리도 연달아 달려들며 날개로 적을 후려쳤다. 말똥가리는 움키고 있던 개똥지빠귀를 놓쳐버렸다. 까마귀들이 말똥가리를 자기네 영역에서 멀리 쫓아내는 사이에 겨우 빠져나온 개똥지빠귀는 강건너편 관목 숲의 아늑한 둥지로 날아갔다. 작은 새는 찔레나무의 가시덤불 아래 지은 둥지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개똥지빠귀는 앞가슴의 털이 뜯기 - P9

고 날개깃도 몇개 빠졌지만, 둥지에서 쉬면서 싱싱한 들쭉과 시로미 열매를 따 먹고 회복이 되었다. 이 개똥지빠귀가 같은 부류의 새와 달라진 것은 가슴의 검은 얼룩 털이 동그랗게 빠져 하얀 점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머나먼 남쪽 나라에서 겨울을 보낸 새들이 제각기 무리를 지어 아무르 강변에 찾아온 것은 네번째 달이 끝나갈때쯤이었다. 시베리아는 이제 가을부터 겨우내 얼어붙었던 강이 풀리기 시작했고 기슭에는 떠내려오다 걸린 얼음덩이와 살얼음이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그래도 풀과 꽃은 이른 봄의 바람과 진눈깨비를 견디고 싹을 틔워 파릇파릇올라왔다. 기러기, 두루미, 황새, 오리 같은 물가의 새들이 먼저 습지에 자리를 잡았고, 개똥지빠귀들은 근처에 살던 스무마리 또는 서른마리쯤의 작은 무리가 먼 길을 날아와늘 돌아오던 고향의 들녘 숲이나 들판 가운데 덤불 속에둥지를 지었다.
흰 점박이 개똥지빠귀는 이번 여행에서 짝을 잃었고, 새끼들과는 이웃 둥지에 살며 가장 약한 한마리를 보살펴주었다. 약한 새끼는 가을에 남쪽으로 내려가며 중간의 쉼터에서 출발할 때마다 늘 뒤처졌고, 흰 점박이는 무리에서멀어지지 않도록 새끼 곁을 날며 보살폈다. 남쪽 나라에서S - P10

겨울을 보내는 동안에는 산수유와 가시나무 숲에 둥지를지어 온 무리가 굶주리지 않고 살아냈다. 흰 점박이의 짝은 지난봄에 남쪽에서 떠나 북으로 날아오다가 두번째 쉼터에서 사라졌다. 새들은 종종 뒤처져 외톨이가 되었다가밤중에 부엉이, 올빼미 등에게 잡아먹히기도 했다. 흰 점박이는 낯익은 아무르 강변의 관목 숲에 도착하여 마지막 새끼와 헤어졌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다 자란 새끼가 여느 때처럼 나란히 앉으려 하자, 아비 새인 흰 점박이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위협적으로 날개로 치며 머리를 치켜들었다가 숙이면서 새끼의 대가리를 쪼아버렸다. 녀석은 놀라서 급히 날아올랐다가 다시 아래편 가지에 앉으려는 것을 흰 점박이가 두 날개를 펼치고 퍼덕이며 찌르르 높은 경고의 소리를 내지르자 멀리 달아나버렸다. 이제 각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놈도 알았을 것이다.
여섯번째 달이 되자 풀밭과 땅 밑은 물론이고 공중에도 벌레가 사방에 날아다녔다. 이제부터 여기는 들판이건 강물이건 바닷가건 어디나 낙원이 될 것이다. 개똥지빠귀들은 너른 평원의 덤불 속과 관목 숲에 흩어져 살았다. 먹이가 풍족한 때에는 모여서 살 필요가 없었다. 한해 중 바로이맘때에 흰 점박이는 새로운 암컷을 찾아야 했다. 이 수컷 개똥지빠귀는 관목 숲 가운데 제법 높은 개살구나무 가 - P11

지에 앉아서 ‘쯔빗 빗 호로로록‘ 맑고 높은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목을 쳐들고 노래할 때 연분홍의 별처럼 빈 나뭇가지에 피어난 개살구꽃이 파르르 떨리곤 했다. 흰 점박이의 노래는 매번 똑같은 소리가 아니었다. 그냥 ‘호로로 호로로로‘ 하기도 하고 짧게 끊어서 ‘짝짹짹짹‘ 하기도 하며 길게 ‘휘이이이‘ 하는 휘파람 소리를 내기도 한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노래하고 어떤 때에는 캄캄한 밤에 어둠 속에서 울기도 한다. ‘짹짹 찌릿‘ 하는 암컷 개똥지빠귀의 응답이 들리자 흰 점박이는 한껏 목청을 높여 아름답게 노래했다. 개살구나무 아래 풀밭 위에 암컷 개똥지빠귀가 내려앉았다. 흰 점박이는 아래로 날아가 암컷의 주위를 뽐내듯이 재빨리 달리다가 우뚝 서서,
꼬리는 아래로 낮추고 목은 위로 치켜올려 키를 한껏 늘리면서 자기가 얼마나 크고 힘찬 새인가를 보여주었다. 암컷은 흰 점박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근처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랐다가, 조금 더 먼 곳에 보이는 측백나무와 눈잣나무몇그루가 모인 숲으로 날아갔다. 암컷의 배와 가슴은 갈색 점이 보다 짙은 갈색으로 덧칠되어 뭉개진 것처럼 보였고 날개는 수컷보다 좀더 밝은 적갈색이었다. 암컷이 나무 아래 땅에 내려앉자 흰 점박이도 뒤쫓아 아래로 내려왔다. 암컷은 고개를 숙이고 날개를 접고 얌전히 앉았고, 흰 - P12

점박이는 그 등 위에 올라앉아 짝짓기하고는 얼른 떨어졌다. 개똥지빠귀 암수 두마리는 제각기 다른 소리로 ‘짹짹찌르르‘ 하며 요란하게 노래했다. 어디선가 이들의 기척을 알아챈 수컷 개똥지빠귀 한마리가 날아와 앉더니 재빠른 걸음으로 주위를 맴돌다 정지해서 그들을 관찰했다. 흰점박이는 재빨리 그 녀석을 향하여 달려가 머리를 숙였다치켰다 하며 달려들었다. 경쟁자 수컷은 이미 짝짓기가 끝났다는 걸 알아채고 포르릉 날아가버렸다. 암컷은 잘 익은 개암 열매처럼 밝은 적갈색 날개를 가졌으니, 개암이 날개라고 부를 만했다. 흰 점박이가 하나뿐인 개똥지빠귀가 된것처럼 개암이 날개도 하나뿐인 암컷 개똥지빠귀가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 너른 하늘과 땅에서 단둘이 살아나갈 한쌍의 새가 되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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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고교 재학 중 단편소설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단편소설 「탑」이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작품으로 『객지」 가 「삼포 가는 길』 『한씨연대기』 『무기의 그늘」 「장길산』 「오래된 정원」 『손님」 「모랫말 아이들』 「심청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철도원 삼대』, 자전 수인』 등이 있다.
1989년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다룬 『무기의 그늘로만해문학상을, 2000년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변혁을 꿈꾸며 투쟁했던 이들의 삶을 다룬 『오래된 정원으로 단재상과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2001년 ‘황해도 신천 대학살사건‘을 모티프로 한 손님으로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손님 「심청, 연꽃의 길」 「오래된정원이 프랑스 페미나상 후보에 올랐으며, 『해질 무렵으로 프랑스 에밀 기메 아시아 문학상을 수상했다. 2024년 『철도원 삼대가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 P-1

작가의 말

군산은 일제가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설계한 식민지 근대의 살아 있는 흔적이다. 항구에밀집한 적산가옥과 근대건축군 등은 모두 식민 권력의 경제적 지배를 가능케 한 기반 시설이었다. 젊은 시절 전주에 놀러 갔다가 기차를 타고 이리역에서 내려 일부러 시외버스를 타고 군산 항구를 찾아 들어와보기도 했다. 그 무렵만 해도 옛 군산 내항 일대는 마치 일본의 작은 어촌을연상시키는 항구 뒷골목의 선술집 분위기와 해물 안주로술꾼들에게 잘 알려진 명소였다.
나는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수도 장춘에서 태어났고, 해방 후 외가인 평양을 거쳐 서울 변두리 산업지구였던 영등 - P218

포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지금 와서 따져보면 네살 적부터 살았던 영등포야말로 내 고향이다. 예전 영등포역과시장 일대의 기억이 각인된 나는 그곳과 비슷한 장소를 만나면 정서적으로 안정된 느낌이 들곤 했다.


군산에 오니 문정현 신부가 떡 버티고 있었다. 문 신부는 노동자 시위와 각종 철거 현장에 출몰하여 ‘길 위의 사제‘라는 불편한 별명을 얻었는데, 군산에 와보니 그이가 ‘만년 사업‘ 중이었다. 문 신부와 그를 중심으로 모여든 환경·평화 활동가들은 미군기지 용지로 결정되어 철거한 삼백년 된 포구 마을 ‘하제‘ 터를 지키고 있었다. 그 하제 마을 제일 안쪽 구석에 있는 육백년 묵은 서낭목 팽나무가 빈터의 상징이었다. 문정현 신부와 ‘평화 바람‘ 일동은 한달에 한번씩 팽나무 제를 지내며 전국의 문화 놀이꾼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으며, 드디어 시민들의 염원에 따라 팽나무는 천연기념물 및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제 이 나무는 아무도 함부로 베거나 없애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군산에 이사 오자마자 하제 마을 빈터를 찾아가 막걸리 네병을 나무뿌리에 부어드리고 축문을 지어 소지하며 지켜드릴 것을 서원했다. 그 서원 안에는 팽나무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한편 쓰겠다는 염원도 들어 있었다. - P219

이 나무가 통과한 육백년이라는 시간은 물론 사람이 정한 시간일 뿐이며,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바다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구분되지 않는 흐름 가운데 있다. 나는 사람으로서 이 육백년을 나무와 더불어 생각해보기로했다. 불교의 시간 개념 가운데 윤회를 떠올렸다. 그렇지만 윤회란 고대 브라만교 이래로 내려온 생각일 뿐, 석가모니는 윤회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는 관계의 영원한 순환에 대하여 말하고 카르마의 이어짐에 대하여 말했다. 브라만나 후대의 세속 불교가 전도와 사원의 유지를 위하여 윤회를 말하고 있을 뿐, 석가모니는 죽음 이후나 그 어떤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도 침묵했다. 가령 내가 죽어 수백의 화학물질이 분해되어 어느 소나무 뿌리를 타고 올라 나뭇가지 끝의 일부분이 되어 다시 수백년 마을 풍경을 내다본다든가 하는 상상은 브라만의 영원한 자아 ‘아트만‘과 상관없으니, 석가모니 식으로 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이 나무를 둘러싼 육백년은 역사가 아니라 인연과 관계의 순환이며 카르마의 계속되는 전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수년 전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부처의 ‘열반경‘과 해월 최시형의 ‘사인여천‘에 깃든 설법을 읽으며,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던 생각이 - P220

군산에 와서 ‘팽나무‘를 만나면서 이제야 성사되었다.
생사는 물론 세상만사는 인연에 따라 변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벽은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큰 바람일 것이다.


준비부터 마치기까지 사년이나 걸렸다. 그동안 참아주고 기다리며 자료 수집에서 잡다한 일에 이르기까지 거들어주던 창비의 이진혁, 전성이 편집자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곁에서 일상을 책임지며 보살펴준 아내 윤지원의 격려가 없었다면 이 작품을 잘 끝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몇해나 더 글을 쓰게 될지 모르지만 그가 든든한 버팀목이되어주리라 믿고 있다.

2025년 늦가을, 군산에서
황석영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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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노래


작은 사과나무를 돌보는 아버지 옆에 서면 사과나무꽃입술이 흙 가장 보드라운 살에 떨어져 분홍 웃음소리. 아버지는 꺼멓게 말라가는 속잎을 따내면서 "얘야 일찍들어온나 처녀애들 밤길은 위험하니라" 전지가위에 잘려 나간 곁가지를 주워 담을 때 본 근육통으로 부어오던 아버지의 손등. "밤길 어둡다고 바래다주는 사람이 있는걸요" 물뿌리개에서 햇살이 번져 올랐습니다. - P41

임지은

아빠는 가꾸고 돌보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쉬는날이면 심은 나무의 가지를 치고, 잡초를 솎고, 집 앞마당에서 시작해 동네 골목을 전부 쓸곤 했다. 한 친구는그런 아빠를 보고 내게 저 사람은 청소부냐고 물어보았다. 아빠가 그 친구의 자전거까지 고쳐주는 것을 보고 나는 알았다. 아빠는 가족을 가꾸는 일을 제일 어려워했다는 것을. 아빠가 내게 당부한 것은 대체로 알아서 잘해라, 라는 종류의 것이었다. 시 속에서 아버지가 최대한 다정하게 할 수 있는 당부가 위험하니 일찍 들어오라는 말인 것처럼, 딸이 귀가할 때까지 잠들지 않고기다렸다 문을 따줄 거면서 왜 마중을 나온 적은 없었을까. 그래서 나는 바래다주는 사람이 없어도 바래다주는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 같다. - P42



젖은 발가락으로 꿈을 꾼다 무거운 흙 속에서도 꼼지락거리며 꿈은 사랑과 같이 스며들어 자유로 다시 선다
잠 속에서도 자유하지 못하는 한낱 남루보다 못한 깃발
꿈은 하늘이 되고 땅이 되고 숟가락처럼 가지런히 버티고 선다 이렇게 아래에서 꿈꾸는 것들이 자식을 기른다천년을 버티고 역사를 세운다 - P43

정재율이 시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다 나의 어깨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몸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새와는 다르게 꿈에서조차 가벼울 수 없는, 무거운 흙 속에 두 발이 묶인 이는 그 누구보다 자유를 원할 것이다. 무거운 마음을 묻어둔 채 그 위에 깃발을 꽂고, 숟가락을 꽂는 사람만이, 그렇게 안간힘을 써가며 자유를 외치는 사람만이또 다른 역사를 세울 수 있다. 지나온 과거의 날들에 대해, 그 행적에 놓여 있는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해 생각한다. 정말 감사하게도 나는 이 역사의 땅에서 시인 허수경의 시를 다시 읽을 수 있다. 창밖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자유를 원하는 새 한 마리가. 그것도 무척이나 가볍게.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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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가능성


아침에 물을 받아 몸을 담근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비누의 미끄러지는 속도와
그 비누가 바닥에 떨어지는 속도를 지켜봤습니다

제힘으로 펼치고 닫는 것들이 있습니다
매달아놓은 휴지가 저 혼자 힘으로 풀려버리거나
가만히 있던 돌이 구르기 시작하죠

목욕하는 동안의 고독은 잠시였으며
오전 내내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는
점퍼의 지퍼와 씨름했답니다

열어놓은 창문 앞에는
하나 남은 사과가 있습니다

친구에게 빌린 차 뒷자리에는
1미터쯤 되는 선물 포장지가 말려 있고요

오늘을 오래 기다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P-1

내가 잘못 들은 말인지도요

어디쯤 오고 있나요
나는 조금 일찍 도착할 것 같습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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