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어린 팽나무는 아직은 땅바닥의 것들과 가까이 있어서 한두해 피어났다가 사라지는 잡초나 들꽃과 다르지 않았다. 팽나무의 싹이 처음 나왔을 때 부근에 함께 싹을 틔운 들풀들이 많이 있었다. 노랑 꽃이 피는 사데풀, 흰 꽃받침에 노란 꽃이 피는 갯질경이, 연보라 꽃잎 가운데 꽃술이 노란갯개미취, 노란 별 모양의 꽃이 바위나 돌 틈에 한울금씩 무리 지어 피는 기린초, 바위채송화 등이 빈터의 곳곳에 자라났고 취명아주, 띠풀, 해홍나물, 퉁퉁마디 등은 바닷가 쪽에 자랐고 샛강 변에는 천일사초, 억새, 갈대가 우거졌다. 그렇게 제법 키가 큰 풀들 외에도 땅바닥에 달라붙은 듯한 쑥이나 냉이, 민들레, 번행초가 작은 것들끼리 모여서 자랐다. 어떤 것은 부근에 피어났다가 겨울동안에 말라 죽어버렸지만, 봄이 오면 날아간 씨앗으로 새싹이 나서 장소를 옮겨 다시 피어나곤 했다. 어느 꽃나무는 한해 동안, 또 어떤 풀은 두해를 나는 게 고작이었다.
- P34

밤이되면 나무들은 산에서 내려와 들판을 지나 바다로 불어가는 바람에 잎을 살랑이면서 나직하게 노래하는 것 같았다. 이렇듯 나무에게 하루는 한해이고 그것은 열번의 해, 백번의 해와도 같을 것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봄의 성장과 여름의 번성에서 열매를 맺고 잎이 떨어지는 가을을 지나 한해의 끝인 겨울이 사계절 중에 특별한 것은, 오래 사는 나무에게도 죽음 같은 정지 기간이기 때문이었다.
큰 나무들은 자연스럽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살았다. 나무들은 먼 저쪽이나 바로 뒤에 앞에 누가 어떤 나무가 있는지 느끼고 있었고, 땅속에서 뿌리들의 접촉으로 또는 이파리와 꽃과 열매의 냄새와 성질과 뿜어내는 습도와 물질과, 모여드는 벌레와 새 들 때문에 빈터 부근의 숲 전체를 서로 알게 되었다. 나무는 나이테 속에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흔적을 남겼다. 그 겹겹의 섬유질 속에 계절의 재활과 성장과 갈무리와 휴지의 반복이 새겨졌다. 이를테면 지상에서 계속되는 이 반복은 길건짧건 시작이나 끝이 아니라 오래오래, 또다시 오랫동안 되풀이되는 변화에 지나지 않았다. - P37

팽나무는 꽃을 피우고 풋열매를 맺고 잎이 무성한 여름부터 겨울을 준비했다. 나무는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몇달동안 죽은 듯 잠을 자면서도 이 겨울눈으로 하여 되살아났다. 봄이 오면서 세모 또는 길쭉하고 아니면 동그란 각종의 눈들이 겉으로 흘러나와 말라붙은 끈적한 진물과 몇결의 보자기로 감싼 듯 딱딱하게 굳은 껍질의 틈을 헤치고아주 조금씩 싹을 밀어냈다. 겨울눈을 따서 헤쳐보면 수십장의 미세한 잎들이 돌돌 말려서 겹쳐 있었다. 해마다 찾아오는 겨울은 모든 활동을 멈춘 나무 자신의 몸속에 봄의부활을 간직하게 하는 일시적인 기다림의 기간이었다.
꽃 피고 열매가 익고 잔뜩 번성했던 여름의 끝에 태풍이 찾아왔다. 해마다 그맘때가 되면 거세고 습기 찬 바람이 서남쪽에서 검은 구름을 몰고 와서 폭우를 뿌렸다. 바다와 갯벌과 들판은 온통 회색으로 가득 차고, 바람은 나무를 꺾기도 하고 뿌리째 뽑아버리기도 했다. 풀과 키 작은 관목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대로 줄기와 가지를 숙이고 미친 듯이 잎사귀를 팔락였다. 어두운 하늘을 하얗게가르며 번개가 줄지어 번쩍이고 뒤이은 천둥소리가 하늘을 찢는 것 같았다. 내륙에서 불어난 강물은 하구를 가득채워 어디서부터 바다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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