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한마리가 날아왔다.
동쪽 하늘 멀리 흰 눈을 덮어쓴 산맥이 연이었고 그 아래로 높고 낮은 산과 언덕이 물결치듯 내려오다가 그치고, 키 작은 관목 숲이 우거진 들판이 나오면서 드넓은 습지가운데로 강이 나타났다. 어디쯤에서 시작하는지 알 수 없는 긴 강은 구불대며 서쪽에서 동북쪽 바다를 향하여 흘러갔다.
산맥의 깊은 숲에는 가문비나무, 전나무, 낙엽송, 자작나무가 뒤섞여 자라났고 산세가 낮아지면서 참나무, 사시나무 그리고 월귤, 들쭉, 산딸기, 시로미, 노간주나무 열매, 붉나무 열매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자라나 새와 작은 짐승 - P7

들이 먹고살 만해 보였다. 물가에 가까이 가면 물풀과 같대가 자라난 곳과 뺄밭과 모래땅과 자갈밭이 드문드문 나뉘어 있었다. 강변에도 여러 종류의 새들이 살았지만 서로식성과 먹이가 달라서 다투고 빼앗을 필요 없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둥지를 지어 살았다.
개똥지빠귀라는 새 한마리가 산자락이 끝나는 낮은 관목 숲으로 날아왔다. 등은 껍질 벗은 소나무처럼 짙은 갈색이었고, 머리는 검은색에 눈 위로 눈썹 같은 흰 선이 그어졌고, 배는 흰 바탕에 검은 반점이 얼룩얼룩했다. 그곳은 작은 새들의 낙원이었다. 새들이 땅바닥 아무 데나 작은 부리로 젖은 나뭇잎을 들추고 흙을 파헤치면 지렁이든 굼벵이든 나방이든 애벌레든 맛있는 것들이 나왔다. 개똥지빠귀란 새는 어느 것이나 똑같은 모양이라서 여럿이 모이면 분간하기가 어렵지만, 방금 낮은 숲으로 날아온 이 개똥지빠귀는 알록달록 검은 점박이 가슴털이 동그랗게 뜯겨나간 자리가 있었다. 그건 지난여름 어느 날, 강 건너편 풀밭으로 벌레를 잡으러 갔을 때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흔적이었다.
개똥지빠귀는 풀밭에 벌레를 잡아먹으러 내려오면 자기 걸음을 재어보듯이 쪼르르 달려가다가 멈칫 서서 하늘보고, 좌우 보고, 땅속을 부리로 뒤적거리다가 다시 쪼르 - P8

르 달려가곤 했다. 새가 멀리서도 벌레가 있을 듯한 장소를 찜해놓고 달려가 멈추어 서서 부리로 몇번 콕콕 찌르면나뭇잎 아래나 얕은 땅속에서 지렁이, 애벌레, 굼벵이, 딱정벌레가 나왔다.
풀밭 위쪽 언덕 비탈에 자라난 참나무 가지 위에 갈색의털북숭이 새가 앉아 있었다. 그것은 말똥가리였는데, 동그랗게 놀란 듯한 눈을 부릅뜨고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날개를 펼치고 풀밭을 향하여 날아갔다. 말똥가리가 지상을 훑듯이 얕게 날아 지나가면서 발가락을 쫙 벌려 벌레 잡기에 골똘한 개똥지빠귀를 잡아챘다. 개똥지빠귀는 울부짖고 날개를 퍼덕이며 천적의 발톱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자작나무 숲에 둥지를 튼 까마귀들이 후다닥 날아올랐고 그중 세마리가 말똥가리에게 달려들었다. 까마귀들은 몸집은 작았지만 빠르고 날쌔게 말똥가리를 추격하여 등뒤에서 쏘았고, 다른 까마귀 두마리도 연달아 달려들며 날개로 적을 후려쳤다. 말똥가리는 움키고 있던 개똥지빠귀를 놓쳐버렸다. 까마귀들이 말똥가리를 자기네 영역에서 멀리 쫓아내는 사이에 겨우 빠져나온 개똥지빠귀는 강건너편 관목 숲의 아늑한 둥지로 날아갔다. 작은 새는 찔레나무의 가시덤불 아래 지은 둥지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개똥지빠귀는 앞가슴의 털이 뜯기 - P9

고 날개깃도 몇개 빠졌지만, 둥지에서 쉬면서 싱싱한 들쭉과 시로미 열매를 따 먹고 회복이 되었다. 이 개똥지빠귀가 같은 부류의 새와 달라진 것은 가슴의 검은 얼룩 털이 동그랗게 빠져 하얀 점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머나먼 남쪽 나라에서 겨울을 보낸 새들이 제각기 무리를 지어 아무르 강변에 찾아온 것은 네번째 달이 끝나갈때쯤이었다. 시베리아는 이제 가을부터 겨우내 얼어붙었던 강이 풀리기 시작했고 기슭에는 떠내려오다 걸린 얼음덩이와 살얼음이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그래도 풀과 꽃은 이른 봄의 바람과 진눈깨비를 견디고 싹을 틔워 파릇파릇올라왔다. 기러기, 두루미, 황새, 오리 같은 물가의 새들이 먼저 습지에 자리를 잡았고, 개똥지빠귀들은 근처에 살던 스무마리 또는 서른마리쯤의 작은 무리가 먼 길을 날아와늘 돌아오던 고향의 들녘 숲이나 들판 가운데 덤불 속에둥지를 지었다.
흰 점박이 개똥지빠귀는 이번 여행에서 짝을 잃었고, 새끼들과는 이웃 둥지에 살며 가장 약한 한마리를 보살펴주었다. 약한 새끼는 가을에 남쪽으로 내려가며 중간의 쉼터에서 출발할 때마다 늘 뒤처졌고, 흰 점박이는 무리에서멀어지지 않도록 새끼 곁을 날며 보살폈다. 남쪽 나라에서S - P10

겨울을 보내는 동안에는 산수유와 가시나무 숲에 둥지를지어 온 무리가 굶주리지 않고 살아냈다. 흰 점박이의 짝은 지난봄에 남쪽에서 떠나 북으로 날아오다가 두번째 쉼터에서 사라졌다. 새들은 종종 뒤처져 외톨이가 되었다가밤중에 부엉이, 올빼미 등에게 잡아먹히기도 했다. 흰 점박이는 낯익은 아무르 강변의 관목 숲에 도착하여 마지막 새끼와 헤어졌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다 자란 새끼가 여느 때처럼 나란히 앉으려 하자, 아비 새인 흰 점박이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위협적으로 날개로 치며 머리를 치켜들었다가 숙이면서 새끼의 대가리를 쪼아버렸다. 녀석은 놀라서 급히 날아올랐다가 다시 아래편 가지에 앉으려는 것을 흰 점박이가 두 날개를 펼치고 퍼덕이며 찌르르 높은 경고의 소리를 내지르자 멀리 달아나버렸다. 이제 각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놈도 알았을 것이다.
여섯번째 달이 되자 풀밭과 땅 밑은 물론이고 공중에도 벌레가 사방에 날아다녔다. 이제부터 여기는 들판이건 강물이건 바닷가건 어디나 낙원이 될 것이다. 개똥지빠귀들은 너른 평원의 덤불 속과 관목 숲에 흩어져 살았다. 먹이가 풍족한 때에는 모여서 살 필요가 없었다. 한해 중 바로이맘때에 흰 점박이는 새로운 암컷을 찾아야 했다. 이 수컷 개똥지빠귀는 관목 숲 가운데 제법 높은 개살구나무 가 - P11

지에 앉아서 ‘쯔빗 빗 호로로록‘ 맑고 높은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목을 쳐들고 노래할 때 연분홍의 별처럼 빈 나뭇가지에 피어난 개살구꽃이 파르르 떨리곤 했다. 흰 점박이의 노래는 매번 똑같은 소리가 아니었다. 그냥 ‘호로로 호로로로‘ 하기도 하고 짧게 끊어서 ‘짝짹짹짹‘ 하기도 하며 길게 ‘휘이이이‘ 하는 휘파람 소리를 내기도 한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노래하고 어떤 때에는 캄캄한 밤에 어둠 속에서 울기도 한다. ‘짹짹 찌릿‘ 하는 암컷 개똥지빠귀의 응답이 들리자 흰 점박이는 한껏 목청을 높여 아름답게 노래했다. 개살구나무 아래 풀밭 위에 암컷 개똥지빠귀가 내려앉았다. 흰 점박이는 아래로 날아가 암컷의 주위를 뽐내듯이 재빨리 달리다가 우뚝 서서,
꼬리는 아래로 낮추고 목은 위로 치켜올려 키를 한껏 늘리면서 자기가 얼마나 크고 힘찬 새인가를 보여주었다. 암컷은 흰 점박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근처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랐다가, 조금 더 먼 곳에 보이는 측백나무와 눈잣나무몇그루가 모인 숲으로 날아갔다. 암컷의 배와 가슴은 갈색 점이 보다 짙은 갈색으로 덧칠되어 뭉개진 것처럼 보였고 날개는 수컷보다 좀더 밝은 적갈색이었다. 암컷이 나무 아래 땅에 내려앉자 흰 점박이도 뒤쫓아 아래로 내려왔다. 암컷은 고개를 숙이고 날개를 접고 얌전히 앉았고, 흰 - P12

점박이는 그 등 위에 올라앉아 짝짓기하고는 얼른 떨어졌다. 개똥지빠귀 암수 두마리는 제각기 다른 소리로 ‘짹짹찌르르‘ 하며 요란하게 노래했다. 어디선가 이들의 기척을 알아챈 수컷 개똥지빠귀 한마리가 날아와 앉더니 재빠른 걸음으로 주위를 맴돌다 정지해서 그들을 관찰했다. 흰점박이는 재빨리 그 녀석을 향하여 달려가 머리를 숙였다치켰다 하며 달려들었다. 경쟁자 수컷은 이미 짝짓기가 끝났다는 걸 알아채고 포르릉 날아가버렸다. 암컷은 잘 익은 개암 열매처럼 밝은 적갈색 날개를 가졌으니, 개암이 날개라고 부를 만했다. 흰 점박이가 하나뿐인 개똥지빠귀가 된것처럼 개암이 날개도 하나뿐인 암컷 개똥지빠귀가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 너른 하늘과 땅에서 단둘이 살아나갈 한쌍의 새가 되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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