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재판이 피고 측과 원고 측의 줄다리기를 통해서 진실을 밝히고 양편 모두를 정당하게 다루어야 하는 정상적인 재판이었다면, 이제는 피고 측의 입장으로 주의를 돌려서 아이히만의 눈에 뜨인 일들 외에도 아이히만의 빈에서의 행위에 대한 자신의 기괴한 설명에 대해 다른 것이없는지, 그리고 그의 현실 왜곡이 실제로 한 개인의 거짓말하는 버릇그 이상의 어떤 것 때문이 아닌지를 알아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재판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아이히만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 없이‘ 확립되었고, 나치 정권을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에게도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 P115

검찰이 확립하려고 한 추가적인 사실들이 판결에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그러한 사실들도 만일 피고 측이 소송과 관련된 자신들의 증거를 제시했다면 결코 ‘의심할 나위없이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충분히 잘 알다시피 세르바티우스박사가 무시하기로 선택한 어떤 사실들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아이히만 재판과는 구별되는 아이히만 사건에 대한 어떠한보고도 완전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 문제‘에 관한 아이히만의 불분명한 의견과 이념에서특별히 잘 나타난다. 대질심문에서 그는 재판장에게 빈에서 "유대인을서로 수용할 만하고 서로에게 공평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상대로 간주했다"고 말했다. - P115

그들은 "사무실의 일벌레일 뿐"이었고,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문장을 통해, 명령을통해" 결정되었으며, "다른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요약하자면그들은 바로 ‘작은 톱니바퀴‘였는데, 피고 측에 의하면 아이히만이 그와 같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총통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들은 모두 작은 톱니바퀴였다. 심지어 힘러의 안마사였던 펠릭스 케르스텐에 의하면, 힘러가 최종 해결책을 열정적으로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상관인 하인리히 뮐러가 ‘신체적 전멸‘과 같은 ‘거친‘ 것을 제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경찰심문관에게 확언했다. 분명한 것은, 아이히만의 눈으로 볼 때 작은 톱니바퀴 이론이 상당히 논점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물론 그는 하우스너 씨가 묘사하려고한 것처럼 비중이 큰 인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히틀러가 아니었고, 그런 점에서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에 관해서는 뮐러나 하이드리히, 또는 힘러와 그 중요도에서 비교할 수 없었다. 그는 과대망상증환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피고 측이 보여주려 한 것만큼 작은 인물도 아니었다. - P117

그런데 그 어떤 객관적 사실보다도 더 빌어먹을 것은 아이히만 자신의 결점투성이인 기억력이었다. 빈에는 그가 아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몇 명의 유대인(뢰벤헤르츠 박사와 상업 고문관 스토퍼)이 있었지만 이들은 그의 이야기를 뒷받침해줄지도 모르는 팔레스타인의 밀사들이 아니었다. 아이히만과의 협상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비망록 (재판에서 새로 공개된 몇 안 되는 문서 중 하나로, 아이히만이 그 일부를보고는 주요 진술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했다)을 전쟁 후에 쓴 요제프뢰벤헤르츠는 나치 당국을 돕기 위해 유대인 공동체 전체를 조직하여기구화 한 첫 번째 유대인 고위층 인사였다. 그리고 그는 조력의 대가를 받은 매우 적은 인사들 중 한 사람이었다.  - P123

히틀러 정부가 유대인을 나가게 할 의향이 있었다는 것은옳다(모든 유대인 이민을 중지하라는 지시는 2년 후, 1941년 가을이되어서야 내려왔다. 그리고 어떤 ‘최종 해결책‘이 이미 결정되더라도,그 누구도 그와 같은 효과를 가진 명령을 아직까지는 내리지 않았다.
동부에서는 유대인이 이미 강제거주구역(게토)으로 수용되고 있었고또한 돌격대에 의해 살해당하고 있긴 했지만, 베를린에서 아무리 ‘협동작업라인 원칙‘에 맞추어서 영리한 시스템을 만든다 해도 이민이 점차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이히만은 이 과정을 이빨을 뽑는 것 같다"고 묘사했다. "…… 양쪽이 모두 무관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쪽에서 말하자면 이민 가능성을 얻는 것이 정말로 어려웠기 때문이었고, 우리 쪽에서는 어떠한 소동이나 급한 일이 없었으며,사람들이 오가는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거대하고 힘있게생긴 건물에 앉은 우리는 삼킬 듯한 공허 속에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전문영역인 유대인 문제가 이민 문제로 머물러 있는 한, 그는 곧 실직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 P128

1939년 9월 1일, 전쟁이 발발하자 비로소 나치 정부는 공개적으로전체주의적으로 되었고, 또 공개적으로 범죄적 성향을 띠었다. 조직의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단계 가운데 하나가, 1934년 이래로 아이히만이 소속된 당조직인 친위대 정보부와 게슈타포라 불린 국가비밀경찰을 포함한 정규 국가보안경찰을 통합한다는 힘러가 서명한 포고령이었다. 이 통합의결과 제국중앙보안본부(R.S.H.A.)가 등장했는데, 최초의 국장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였다. 1942년 하이드리히가 사망한 뒤 아이히만이 린츠에서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박사가 그 직책을 넘겨받았다.
게슈타포뿐만 아니라 형사경찰, 치안담당경찰에 속하는 모든 경찰 간부들은 당원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의 이전 계급에 따라 친위대 계급이부여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루 만에 과거 공무원 중가장 중요한 부분이 나치스 계통에서 가장 근본적인 부분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어느 누구도 저항하거나 자기의 직책을사임하지 않았다.  - P129

그러나 재판기간 동안 ‘객관성‘으로 상을 받을 사람은 피고인 상급대대 지휘관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쾰른 출신의 세법 및 상법 변호사인 세르바티우스 박사였다. 그는 나치당에 참여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법정에서 가르쳐주었는데, 이 사람의 말을 들으면 누구도 그 말을 잊지 못할것이다. 전 재판 과정 중 몇 안 되는 대단한 순간 가운데 하나가 피고측의 짧은 구두 변론 때 나타났다. 이 심문이 끝나면 법정은 4개월 동안판결문 작성을 위해 휴정할 예정이었다. 세르바티우스는 "유골의 수집,
종족 근절, 가스를 사용한 살인, 그리고 이와 유사한 의학적 문제들‘에대한 책임에 기초한 고소 내용에 대해서는 무죄라고 선언했다. 그러자할레비 판사는 그의 말을 중지시키고 "세르바티우스 박사, 가스 살인을의학적 문제라고 말한 것은 말실수라고 생각되는군요"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세르바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것은 실제로 의학 - P130

적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의사가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살인의 문제이고, 살인 역시 의학적 문제입니다." 오늘날 다른 나라에서는 살인이라고 부르는 행위를 독일인들(전 친위대 요원이나 나치 당원이 아니라 보통의 독일인들)이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예루살렘의 판사들이 잊지 않도록 아주 확실히 해두려고 세르바티우스는 대법원에서이 사건을 검토할 때 사용할 ‘1심 판결에 대한 코멘트‘에서 이 표현을반복해서 사용했다. 그는 다시, 아이히만이 아니라 그의 부하 중 한 사람인 롤프 귄터가 "의학적 문제에 항상 개입했다"고 말했다.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제3제국에서 일어난 ‘의학적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뉘른베르크에서 그는 히틀러의 주치의이자 ‘위생 보건 전담위원이며, 안락사 프로그램 책임자였던 카를 브란트 박사의 변호사로 활동했다.) - P131

나아가 이 모든 기관들이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면서 서로 격렬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희생자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의 야심은 항상 같은 것, 즉 가능한 한 많은 유대인을 죽이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직책에 강한 충성심을 고취시킨 이러한 경쟁정신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지금은 그 방향이 정반대가 되었다. 이제는 다른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직책상 무죄를 입증하는 것‘이 당사자의 바람이 된 것이다. 이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의비망록을 대했을 때 아이히만이 설명한 것인데, 그 비망록에는 아이히만이 자기가 결코 하지도 않았고 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도 않다고 주장한 일들을 한 것으로 고발되어 있었다. 자기와 스가아주 친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결백한 일로 자기를 옭아맬행위를 할 개인적 이유가 회스에게는 없다는 것은 아주 쉽게 인정했다. - P133

자기의 유대인을 위한 영토를 획득하려는 아이히만의 열성은 그 자신의 경력을 중심으로 아주 잘 이해될 수 있다. 니스코 계획은 그의 빠른 진급 시기에 ‘탄생한 것이었고. 그는 자신이 폴란드의 한스 프랑크처럼 미래의 총독, 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하이드리히처럼 미래의 섭정관으로 ‘유대인 국가‘에서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전체계획이 완전히 실패로 끝남으로써 그는 이 같은 ‘사적‘주도권이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와 슈탈렉케르가 하이드리히의 지시에 따라그리고 그의 분명한 동의를 받고 행동했기 때문에, 경찰과 친위대에게는 분명한 잠정적 패배를 의미하는 이 같은 유대인의 별난 귀환은 점차로 증가하는 자신의 직책에 따른 권력이 전능할 정도로까지는 미치지못한다는 점, 그리고 국가 장관들과 다른 당 기관들로서는 축소되고 있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싸움을 잘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그에게 교훈으로 남겨 주었다. - P138

‘유대인 발아래 확고한 땅을 두려는‘ 아이히만의 두 번째 시도는 마다가스카르 계획이었다. 400만의 유대인을 유럽에서 아프리카 동남부해안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프랑스령 섬 (437만 명의 원주민과 22만7678평방마일의 척박한 땅으로 이루어진 섬으로 옮기려는 계획은 원래 외무부에서 나온 것이지만 후에 제국중앙보안본부로 넘겨졌는데,
그 이유는 마르틴 루터 박사의 말에 따르면 오직 경찰만이 "유대인을집단적으로 옮기고 피난민들의 감독을 보장할 수 있는 경험과 기술력을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 국가‘는 힘러의 관할하에 경찰총독을 갖게 될 것이었다. 이 계획 자체가 기묘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와 우간다를 혼동한 아이히만은 "유대인 국가라는 이념을주장한 유대인 테오도어 헤르츨이 한때 꾸었던 꿈을 자신이 꾸고 있었다고 늘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이전에 이미 꾸었던 것이었다. 폴 - P138

다가오는 세대들에게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아이히만이 그런사악한 계획들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다가스카르 계획이 무위로 끝난 것은 시간 부족 때문이었고, 시간은 다른 부서들의 끊임없는 간섭 때문에 낭비되었다. 예루살렘에서 법정이나 경찰은 그를 흔들어 스스로 만족에 겨워하는 그를 깨어나게 하려고 애를썼다. 그들은 앞서 언급한 1939년 9월 21일 회의에 관한 두 건의 서류를 그에게 갖다 댔다. 그 중 하나는 하이드리히가 텔레타이프로 쓴 편지로 돌격대에 내리는 어떤 지시를 담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최종 목표‘와 ‘이 최종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들‘
을 처음으로 구별하고 있었다. ‘최종 해결책‘이라는 표현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고, 이 문서는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히만은 그 ‘최종 목표‘란 당연히 그의 마다가스카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계획은 당시 독일의 모든 부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있었다.  - P140

그런데 아이히만은 이 문서를 조심스럽게 읽은 뒤 즉각적으로‘최종 목표‘가 ‘신체적 전멸‘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고 말하며, "이 기본적 생각은 고위 지도자들과 최상층인사들의 마음속에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아마도 사실이었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그는 마다가스카르 계획이 단지 사기에 불과하다는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마다가스카르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수정한 적이 없었고, 또한 분명코 그것을 수정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기억 속에 있는 다른 녹음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이 이성과 논증, 정보, 그리고 여하한 종류의 통찰에도 반대하는 증거자료가됨을 보여준 것은 이 테이프와 같은 기억이었다 - P140

분명히 그때도 제국과 합병된 지역에서는 여러 부서에서 ‘적, 유대인‘을 제거하기 위해최선을 다하고 있었겠지만 어떠한 통일된 정책은 없었을 것이다. 모든부서가 각각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적용하도록 허가를받았거나 다른 부서와 해결책을 찾도록 했을 것이다. 아이히만의 해결책은 경찰국가였고 이를 위해 그는 어떤 지역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기울인 모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관련된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고." ‘경쟁‘, 싸움, 말다툼 때문이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늦었다. 러시아에 대한 전쟁이 "갑자기 청천벽력처럼"
발발했다. 그것은 그의 꿈의 종말을 의미했고, "양편의 이익에 맞추어해결을 추구하려던 시대"의 종말을 고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가 아르헨티나에서 깨닫고 비망록에 쓴 것처럼, "개별 유대인을 다루기 위한법과 조례와 칙령이 존재하는 시대의 종말이었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그것은 그 이상을 의미했는데, 다시 말해 그것은 그의 경력의 종언이기도 했다.  - P141

또 일부 죽음의수용소들 인근에 지사를 차려놓고 노예 노동자들을 이용하여 이익을보려는 수많은 기업체들의 노동력에 대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친위대가 운영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산업체들 외에도 파르벤(I. G.F.arben), 크루프 베르케(Krupp Werke), 지멘스-슈케르트 베르케(Siemens-Schuckert Werke)와 같은 유명한 독일 회사들이 루블린의죽음의 수용소 인근과 아우슈비츠 내부에 공장을 세웠다. 친위대와 사업가들 사이에는 탁월한 협조가 이루어졌다. 아우슈비츠의 회스는 파르벤의 대표들과 아주 진실한 마음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관계에 대해증언했다. 노동 조건을 고려해 보면 분명히 노동을 통한 살인을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힐베르크에 따르면 파르벤 소속 공장 한 곳에서 일한 대략 3만 5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적어도 2만5000명이 사망했다.) 아이히만이 관계된 한에서 볼 때 초점이 되는 것은 이동과 운송이 더 이상 최종단계의 ‘해결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부서는 단지 도구 역할을 했을 뿐이다. 따라서 마다가스카르 계획이 보류되었을때 아주 ‘격분하고 실망할‘ 좋은 이유가 된 셈이다. 그리고 위로를 받은 유일한 일은 1941년 10월에 있었던 상급대대 지휘관으로의 승진이었다. - P142

(마흐는 심각하게 반유대적인 가톨릭 정부 내에서 독일판 반유대주의를 대표했다. 그는 가톨릭 신앙에 따라 영세받은 유대인을 예외로 간주하기를 거부했으며, 슬로바키아 유대인의 집단 이주에 대해 주된 책임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아이히만이 이 점을 기억한 까닭은자신이 정부 각료로부터 사교적 초대를 받은 것은 통상적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명예로운 일이었다. 아이히만이 기억하기에마흐는 자신을 볼링게임에 초대한 사람 좋고 대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는 전시에 브라티슬라바에서 내무부 장관과 볼링을 하러 간 것말고는 다른 할 일이 정말로 없었던가? 그렇다. 다른 일은 결코 없었다.
그는 그들이 어떻게 공을 쳤고, 하이드리히에 대한 암살소식이 전해지기 직전 술이 어떻게 제공되었는지를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 P145

‘정치적 해결책‘의 시대가 가고 ‘신체적 해결책‘의 시대가 시작한 때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그가 다른 맥락에서 인정한 것처럼 최종 해결책에 대한 총통의 명령에 대해 그가 이미 통지를 받은 때 일어났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하이드리히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날짜까지 실제로 유대인이 없는 지역으로 만드는 것은 유대인이 쉽게 죽음의 센터로까지 이송될 수 있도록 하는 지점들에로 수용하고 이동시킨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테레지엔슈타트가 실제로 다른 목적, 즉 외부 세계에 대한 전시장으로서의 목적으로 사용된 것(그곳은 국제적십자사 대표들이 들어가도록 허용된 유일한 게토 또는 수용소였음)은 별개의문제였다. 여기에 대해 아이히만은 당시에 알지 못한 것이 거의 확실한데 여하튼 자신의 지위에서 알 수 있는 범위를 완전히 넘어서는 일이었다. - P146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소련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6주일 내지 8주일 후에 아이히만은 베를린에 있는 하이드리히의 사무실로 소환되었다. 7월 31일 하이드리히는 공군사령관이자 프러시아 수상, 4개년계획 전권위원, 그리고 결코 가장 작은 권력이 아닌, 국가 조직(당 조직과 구별된)에 있어 히틀러의 대리인 역할을 담당한 헤르만 괴링 제국원수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편지에는 하이드리히가 유럽내 독일 영향권에 있는 지역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일반적 해결책(Gesamtlösung)‘을 준비해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최종 해결책(Endlösung)을 보충하는······ 일반적 제안‘을 제출하도록 위임하고 있었다. 하이드리히가 이러한 지시를 받았을 때 그는 이미 (1942년11월 1일자 편지에서 육군최고사령관에게 그가 설명한 것처럼)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책을 준비하는 과제를 수년 동안 위임받아 왔다."
(라이트링거) 그리고 러시아와의전쟁이 시작된 이후 줄곧 그는 동부지역에서 돌격대를 통한 대량학살을 책임지고 있었다. - P147

"총통께서는 유대인의 신체적 전멸을 명령하셨다." 그러고는 "평소의 습관과는 아주 다르게, 자기 말의 영향력을 테스트하고 싶기나 한 듯 그는오랫동안 침묵을 지켰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것을 기억합니다. 처음에는 그가 단어를 선택하는 데 무척 조심스러워했기 때문에 그가 한 말의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저는 이해하게 되었고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할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그러한 일, 폭력을 통한 그 같은 해결책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모든 것, 제 일에 대한 모든 기쁨, 모든 주도권, 모든 관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지쳐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아이히만, 당신은 루블린에 있는 글로보크니크(힘러의 친위대 고위층 및 일반정부의 경찰 수뇌부 중 한 사람)를가서 만나게. 제국지휘관(힘러)이 이미 그에게 필요한 명령을 하달했고, 그동안 그가 완수한 일을 살펴보았네. 내 생각에 그는 유대인을 제거하기 위해 러시아 탱크용 참호를 이용하는 것 같아. 저는 아직도 그말을 기억해요. 제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말을 잊지 못할 겁니다. 면담이 거의 끝나가던 때에 그가 말한 그 문장들을 말이죠." 실제로 하이드리히는 좀더 많은 말을 했다.  - P148

이것을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서도기억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는 잊어버렸다. 그 말은 실제 학살 과정에서의 자신의 권한 문제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상당한 불이익을 가져다줄 내용이었다. 그는 아이히만에게 전체계획이 "친위대행정경제본부의 권한 아래 두었다"고 말했다. (그 자신의 제국중앙보안본부가 아니었다.) 그리고 몰살을 위한 공식 암호는 ‘최종 해결책‘이라고도 말했다. 후아이히만은 결코 히틀러의 의중을 처음으로 전달받은 사람들 중에속해 있지 않았다. 하이드리히가 수년 동안 아마도 전쟁이 시작된 이래이 방향에서 일을 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힘러는 1940년 여름 프랑스를 패배시킨 직후 이 ‘해결책‘에 대해 들었다고 (여기에 대해저항했다고 주장했다. 아이히만이 하이드리히와 면담을 갖기 약 6개 - P148

월 전인 1941년 3월까지는 "유대인이 곧 제거되는 것은 당 고위직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었다"고 총통의 자문관 빅토르 브라크가뉘른베르크에서 증언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에서 주장했으나 허사인 것처럼, 결코 당 고위층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특정한 제한적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은 결코 듣지 못했다. 이 같은 ‘특급비밀‘ 사안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하부 피라미드에서는그가 첫 번째 인사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은 사실이다. 이 소식이 모든당과 국가의 사무실, 노예노동과 관련된 모든 기업들, 그리고 군대의(말단에 이르기까지) 전 장교들에게 두루 전파된 이후에도 이것은 여전히 특급비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비밀로 한 것에는 실질적목적이 있었다. 총통의 명령을 명시적으로 들었던 사람들은 더 이상 단순한 ‘명령을 받은 자‘가 아니라 ‘비밀을 가진 자‘가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특별서약을 했다. (1934년 이래로 아이히만이 소속되어 있는 정보부 요원들은 여하튼 보안서약을 했다.) - P149

나아가 이 문제를 다루는 모든 문서들은 엄격한 ‘언어규칙‘을 따랐다. 돌격대로부터 오는 보고서를 제외하고 ‘제거‘ ‘박멸‘ 또는 ‘학살‘ 같은 명백한 의미의 단어들이 쓰여 있는 보고서를 발견하기는 거의 드문일이다. 학살을 처방하는 암호는 ‘최종 해결책‘ ‘소개‘ (Aussiedlung)와‘특별취급‘ (Sonder-behandlung) 등이었다. 이송에는 ‘거주지 변경‘이라고 불린 특권층 유대인을 위한 ‘노인들의 게토‘ 테레지엔슈타트로가는 유대인을 포함한 경우는 제외하고) 재정착‘ (Umsiedlung)과 동부지역 노동‘ (Arbeitseinsatz im Osten)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런이름을 붙인 것은 유대인이 실제로 게토에서 종종 일시적 재정착을 했고, 또 그들 가운데 일정 비율은 노동을 위해 임시로 부려졌기 때문이다. 특별한 상황에서는 언어규칙에서 약간의 변화가 필요했다. 예컨대외무부 고위관료가 바티칸과 교환되는 모든 서신에 유대인 학살을 ‘근본 해결책‘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 P149

그래도 그는 운이 좋았다. 그는 트레블링카에 있었던 미래의 일산화탄소 방을 마련하는 작업만을 보았을 뿐인데, 이는 수십만 명이 죽게될 동부의 여섯 개의 죽음의 수용소 가운데 하나였다. 이 일이 있은 직후인 그해 가을에 그는 직속상관인 뮐러의 지시에 따라, 제국에 통합된바르테가우라고 불렸던 폴란드 서부 지역의 학살센터를 조사하러 갔다. 이 죽음의 수용소는 쿨름(폴란드 말로는 헤움노)에 있었는데, 이곳은 유럽 전역에서 이송되어 우츠(Lódz) 게토에 ‘재정착‘ 한 30만 명이상의 유대인이 1944년에 살해된 곳이다. 여기서 일은 이미 한창 진행중이었는데 그 방법이 달랐다. 가스실 대신 이동용 가스차량이 사용된것이다. 아이히만이 본 것은 다음과 같았다. 유대인은 큰 방에 있었다.
그들은 옷을 모두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고는 트럭이 도착해서그 방의 출입구 바로 앞에 정차했고, 벌거벗은 유대인은 그 트럭으로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문은 닫혔고 트럭은 떠났다. "얼마나 많은유대인이 들어갔는지 저는 알 수 없었어요. 저는 거의 쳐다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저는 볼 수 없었습니다. 볼 수 없었어요.  - P152

그들은 구덩이 속으로 던져졌고, 한 민간인이 치과용 집게를 가지고 이빨을 뽑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떠났습니다. 제차에 올라타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저는몇 시간 동안 운전기사 옆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저는 충분히 보았습니다. 저는 두손 두발 다 들었습니다. 저는 흰옷을입은 한 의사가 제게 구멍을 통해 트럭 안을 들여다보라고 한 것을 기억할 뿐입니다. 아직도 그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않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곳을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있은 직후 그는 더 끔직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이 일은 그가또다시 뮐러의 명으로 백러시아 민스크로 파견되었을 때 일어났다. 뮐러는 그에게 "민스크에서는 유대인을 총살시킨다고 하는군.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고해 주길 바라네" 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갔고,처음에는 운이 좋은 것 같았다.  - P153

그가 도착했을 때 우연히도 ‘일이 거의끝나가고 있었는데, 이것이 그를 안도하게 했다. "큰 구덩이에 있는 죽은 사람들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는 몇몇 젊은 사수들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여성이 팔이 뒤로 꺾여 있는 모습을 보았고, 그것으로제게는 아주 충분했습니다. 제 무릎은 곧 떨렸고, 저는 그곳을 떠났습니다." 차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엘보브(Lwów)에 들를 생각이 났다.
이것은 좋은 생각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엘보브(또는 렘베르크)는 오스트리아의 도시였고, 그가 도착했을 때 거기서 그는 "끔직한 일을 경험한 다음 처음으로 정겨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프란츠 요제프의 통치 6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된 기차역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아이히만이 항상 ‘찬미한‘ 시기였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부모 집에서 그에 관한 아주 많은 좋은 일들을 들었고 또 계모의 친척들이 말이 유대인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그는 분명히 말했다)이 편안한 사회적 지위를 얼마나 누렸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를 들 - P153

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기차역의 모습은 모든 끔직한 생각들을 떨쳐버리게 했고, 그는 이 일을 세세하게, 예컨대 그곳에 새겨졌던 기념 연도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사랑스런 엘보브 바로 그곳에서 그는 큰 실수를 범했다. 그는 지역 친위대 사령관을 만나러 가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이 근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끔직했습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사디스트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지요. 어떻게사람이 그럴 수가 있는가?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마구 총을 갈겨댔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들은 미치거나 돌아버릴 지경입니다.
우리 민족이 말이지요라고 말이죠." 문제는 그곳 엘보브에서도 민스크에서와 동일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히만은 점않게 사양하려 했지만 그를 맞이한 사람은 기꺼이 그에게 그 광경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끔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구덩이가거기에 있었는데 시체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마치 샘처럼 피가 땅에서 솟아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이전에는 결코본 적이 없었습니다. 임무와 관련하여 저는 충분히 보았습니다. 그래서저는 베를린으로 가서 뮐러 소장에게 보고했습니다." - P154

사실 아이히만은 많은 것을 보지 않았다. 사실 그는 가장 크고 가장유명한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를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18평방마일에 세워진 지역인 아우슈비츠가 상부 실레지아에 위치하는 유일한학살 수용소는 아니었다. 그것은 100만에 달하는 수감자를 거느린 거대한 기업이었고 모든 종류의 죄수들이 그곳에 유치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비유대인과 노예 노동자들 등 가스실로 가지 않을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학살시설들을 피해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아이히만과 아주 친근한 관계에 있던 회는 그가 끔직한 장면들을 보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는 대량총살 집행을 실제로 참관한 적은 없었고, 가스가 주입되는 과정이나 그에 앞서 아우슈비츠에서 이루어진, 일하기에적합한 사람들을 골라내는 작업 (수송 인원 가운데 평균 25퍼센트)을실제로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살상 설비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학살 방법으로는 총살과 가스 주입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것을, 총살은 돌격대가 실행했고 가스 주입은 수용소에서, 즉 작은 방에서 또는 이동차량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수용소에서는 희생자들을 끝까지 속이기 위해서 면밀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 만큼만은 보았다. - P155

(덧붙이자면, 회스는 젊었을 때 살인한 적이 있었다.그는 발터 카도브라는 사람을 암살했는데, 카도브는 레오 슐라게터(라인란트의 민족주의 테러리스트로 후에 나치스에 의해 민족적 영웅으로만들어졌음)를 프랑스 점령 당국에 밀고한 배신자였다. 독일 법정은 그를 5년 동안 수감시켰다. 물론 아우슈비츠에서 회스는 살인할 필요가없었다.) 그러나 아이히만이 그런 종류의 일을 제안받았을 것 같지는않다. 왜냐하면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일을 해낼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아주 잘 알았다." 그렇다. 그는 ‘임박한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맹세한 대로 모든 명령에 복종했고, "자신이 의무를 항상 완수" 하는 데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물론 ‘범죄행위의 결과들을 경감시키려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데 항상 최선을 다했다. 그가 주장한 유일한‘정상참작‘은 그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가능한 한 불필요한 어려움을 피하려고 애썼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참이었는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그리고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이 같은 특정 사안에 대해서 정상참작을 구성할 요건을 거의 갖추지 못했다는 점과는 별개로, 그주장은 타당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어려움을 피하는 것은그가 받은 표준 지령 가운데 있는 내용이었다. - P158

‘국가적 행위‘ 란 독일 법에서는 그 효과를 보다 잘 설명해 주는 방식으로 이름이 붙어져 ‘면책의‘(gerichtsfreie) 또는 ‘재판권이 면제된 사법적 행위 (justizloseHoheitsakte)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주권적 권력의 행사‘에 의존하는것이다. 따라서 그런 행위들은 전적으로 사법권 밖에서 이루어지지만, 다른 한편 모든 명령과 지시는 적어도 이론 상 여전히 사법적 통제하에 있다. 만일 아이히만이 한 일들이 국가적 행위였다면, 그의 상관들 즉 국가수반인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도 어떠한 법정에서도 재판받을 수 없다. ‘국가적 행위‘ 이론은 세르바티우스 박사의 일반적 철학과 아주 잘 일치했기 때문에 그가 이 이론을 다시 주장한 것은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놀랄 만한 일은 판결문이 낭독되었지만선고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상관의 명령에 의한 행위이므로 정상참작을 해달라는 주장을 그가 하지 않은 점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이 재판이 평범한 재판이 아니므로 사람들은 안도하면서 반길수 있었다.  - P159

동부지역의 학살센터를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직후인 1941년 9월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희망‘에 따라 독일과 보호령으로부터 첫 번째 대량이송을 체계화했다. 히틀러는 힘러에게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제국을 유대인이 없는 지역으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첫 선적은 5000명의 집시들과 라인란트에서 온 2만 명의 유대인이었는데, 이 최초의 이송과 연관해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자기 스스로 어떠한 결정도 내려본 적이없었고, 명령으로 둘러싸이도록 항상 극단적으로 조심했으며(그와함께 일을 한 사실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롭게 청취된 증언에서확인된 것처럼), 자발적인 제안조차 원하지 않아서 항상 ‘지시‘해 주기를 바란 아이히만이 이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명령과 반대되는 제안을 했다. 돌격대에 의해 즉각적으로 총살될 리가와 민스크 같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 사람들을 보내는 대신 우츠 게토로 이송하도록지시했는데, 그곳은 그가 어떠한 학살 준비도 아직 되지 않은 곳으로알고 있었다.  - P160

("나는 결코 돌격대가 학살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내가 몰랐던 것은 동부지역으로 소개된 제국출신의 유대인이 동일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나는 모르고있었다" ). 이러한 양심은 과거 당의 일원이었고 러시아 점령지 총경이었던 빌헬름 쿠베라는 사람의 양심과 같은 것이었다. 이 사람은 철십자훈장을 받은 독일계 유대인이 ‘특별취급‘을 받기 위해 민스크에 도착했을 때 격분했다. 쿠베의 진술이 아이히만의 진술보다는 더 상세하기 때문에, 아이히만이 양심으로 번민했을 때 그 마음속에 무엇이 오갔는지에 우리를 생각하게 해준다. 그는 1941년 12월에 자신의 상관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분명히 강한 사람이고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울 준비가 되어 있소. 그러나 나와 같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동물과 같은 토착민 군중들과는 분명히 다른 존재요." 이러한 종류의 양심이 저항을 한다면, 그 양심은 ‘내 자신과 같은 문화적 배경을가진 사람들의 학살에 저항하는 부류의 것으로, 이는 히틀러의 통치기간을 지나서도 남아 있었다. 오늘날 독일인들 가운데에는 ‘오직‘ 동부유럽 유대인만 학살당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잘못된 정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존재한다. - P163

‘원시적인‘ 사람과 ‘문화적인 사람들에 대한 학살을 구별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독일인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유대인의 문화적 정신적업적에 대한 바론(Salo W. Baron) 교수의 증언과 관련해 하리 물리슈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어떻게 갑자기 자신에게 떠올랐는지를 말했다.
"유대인이 만일 문화가 없는 민족이라면 그들의 죽음은 보다 덜 악한일이 되었겠는가? 아이히만은 인간 도살자로 재판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문화의 파괴자로 재판을 받고 있는가? 인간 도살자가 그 과정에서문화도 또한 파괴했다면 그 죄는 더 무거운가?" 그가 이러한 질문을 법무장관에게 했을 때 대답은 "그[하우스너 씨)는 그렇다고 생각하고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 P163

귄터 바이젠보른의 『조용한 봉기』 (Der lautlose Aufstand, 1953)에 나오는 이야기와 연관된 두 소년 농부가 있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날 무렵 친위대로 징집되었으나 입대를 거부했다. 그들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처형당하기 전날 가족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두 사람은 그런 끔직한 일로 우리의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실질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런일도 하지 않은 이러한 사람들의 입장은 음모자들의 입장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는 그들의 능력은 온전하게 남아 있었고 결코 ‘양심의 위기‘를 경험하지 않았다. 레지스탕스 요원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수가 일반 사람들보다 고위직의 음모자들 가운데 더 많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은 영웅도 성인도 아니었고 완전한 침묵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오직 한 경우에, 유일한 절망적인 몸부림으로, 이러한 전적으로 고립된 무언의 요소가 공개적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무니히 대학에 다니던 두 남매이다.
그들의 선생 쿠르트 후버의 영향을 받은 숄 남매는 그 유명한 전단을 - P172

뿌렸는데 거기서 그들은 히틀러를 마침내 그의 실재의 모습대로, 즉
‘대량학살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7월 20일의 음모가 성공하면 히틀러를 계승했을 이른바 ‘다른 독일‘에 대한 서류와 준비된 선언문을 검토해보면 그들조차 세계 다른 지역과 얼마나 큰 거리를 갖고 있었는지 알면 놀랄 것이다. 특히 괴르델러의 환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혹은 어느 누구보다도 힘러나 심지어 리벤트로프 같은 사람이 종전을 몇 달 앞둔 시점에서 패전국 독일을 위해 연합군과 협상할 상대로서의 막대한 새로운 역할을 꿈꾸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 있겠는가. 리벤트로프가 단지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힘러는 그의 인간성이 어떻든간에 결코 바보는 아니었다. - P173

그런데 자신의 충격적인 반응을 더 이상 이웃과 공유할수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식하게 된 신실한 사람들이 쓴 전시의 일기장에서 진실로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몇몇 이야기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이야기들은 국민 전체의 도덕적 붕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해져왔다.
앞서 언급한 레크말레체벤은 농부들에게 격려 연설을 하기 위해1944년 여름에 바바리아로 갔던 한 여성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녀는 ‘기적의 폭탄‘과 승리에 대해 말하는데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것 같다. 그녀는 다가올 패배에 대해 농부들에게 솔직히말했고, 여기에 대해 훌륭한 독일인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총통이 "자비심 많게도 모든 독일 국민들을 위해 전쟁이 불행한종말을 맞을 경우를 대비하여 가스 사용을 통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있도록 준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 - P179

다. "오, 맙소사. 나는 이 장면을 상상할 수 없다. 이 사랑스런 여성이허깨비가 아니라니, 나는 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다. 40대를 바라보는 노란 피부의 미친 눈을 가진 여성을 ......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났던가? 이 바바리아 농부들이 죽음에 대한 그녀의 준비된 열정을 식혀주기 위해 호숫물에 빠뜨렸는가? 그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머리를 저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의 다음 이야기는 핵심에 더욱 근접한다. 왜냐하면 ‘지도자‘도 당원도 아닌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1945년 1월,러시아가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폐허지를 점령하여 연방으로 합병시키기 며칠 전 독일의 다른 변방인 동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일어났다. 이 이야기는 한스 폰 렌스도르프 백작이 프러시아의일기』(Ostpreussisches Tagebuch, 1961)에서 언급한 것이다.  - P180

철수가 불가능한 부상병들을 의사로서 돌보기 위해 그는 그 도시에 남아 있었다. 그는 교외에 있는 한 커다란 피난민 센터로 불려갔는데 그곳은 이미 붉은군대가 장악해 있었다. 거기서 어떤 여성이 다가와 수년 동안앓은 정맥류를 보여주면서 지금 시간이 있으니 바로 치료해 주길 원한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쾨니히스베르크를 탈출하고 치료는 나중에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녀에서 애써 설명했다. 당신은 어디로 가고싶냐고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어디로 갈지 몰랐지만 그들이 제국으로 모두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녀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러시아인들은 결코 우리를 잡지 못할 것이에요. 총통께서는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그가 우리에게 가스를 줄 것이니까요. 나는 은밀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말이 정상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아차린 것 같지않았다." 대부분의 실화처럼 이 이야기는 완전하지 않다. 한 목소리, 더욱이 여성의 목소리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들려왔다. 이제 그 모든 좋고 값비싼 가스를 모두 유대인에게 낭비해버렸으니!  - P180

아이히만의 양심에 대한 내 보고서는 지금까지 아이히만 자신이 잊고 있었던 증거들을 따라가며 쓰였다. 이 문제에 대한 그 자신의 설명에 전환점이 나타난 것은 4주 후가 아니라 4개월 후 즉 1942년 1월에있었던 국가 차관회의에서였는데, 나치스는 이 회의를 반제회의라고불렀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하이드리히는 베를린 교회에있는 한 집에 관계자들을 초청했다. 이 회의의 공식명이 가리키듯 만일최종 해결책이 유럽 전체에 적용될 경우 제국의 국가기구의 암묵적 수용 이상의 것이 요구될 것이기 때문에 이 회의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장관들과 전체 공무원들의 적극적 협조가 요구되는 일이었다. 장관들 면면은 히틀러가 권좌에 오른 뒤 9년이 지나도록 모두가 오랫동안 당직을 유지해온 당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권의 초기 시절에 단지 상황에 맞게 대처해 나간 사람들은 아주 유연하게 그 자리가대체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전폭적인 신뢰를 받지 못했는데,
냐하면 이들 가운데 하이드리히 힘러처럼 전적으로 나치스에 의존하여 자신의 경력을 쌓은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사람들도 외무성의 수장이며 전 샴페인 상인이었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처럼 하잘것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장관들 바로 아래에 있는 고위 공무원에 관해서는 아주 민감하다.  - P181

이 회담 날이 아이히만에게 잊혀지지 않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비록 그가 최종 해결책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지만 그는 여전히 ‘폭력을 통한 그러한 피투성이의 해결책‘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을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의구심들이 이제는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 이곳에서, 이 회담에서 가장 유망한 사람들이, 제3제국의 교황들이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히틀러뿐만 아니라, 하이드리히와 스핑크스 뮐러뿐만 아니라, 친위대나 당뿐만 아니라, 착하고 연륜 있는 엘리트 공무원들이 이 ‘피투성이의 문제에서 주도권을 갖는 명예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귀로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일종의 본디오 빌라도"의 감정과 같은 것을 느꼈다. - P183

나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를 심판할 자가 누구인가? ‘이 문제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가진 자가 누구인가? 그는 조심성 때문에 패망하게 된 최초의 사람도 최후의 사람도 아니었다.
아이히만이 기억한 것처럼 그 이후로는 점점 더 쉬워지고 또 곧 일상적이 되어 버렸다. 그는 ‘강제이주‘의 전문가였던 것처럼 재빨리 ‘강제소개‘의 전문가가 되었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유대인은 등록을 해야했고, 손쉬운 식별을 위해서 노란색 표지를 달도록 강요받았으며, 함께집결해서 이송되었고, 다양한 운송수단을 통해 그때마다의 센터의 상대적 수용능력에 따라 동부지역에 있는 이곳저곳의 학살센터로 옮겨다녔다. 유대인을 실은 기차가 센터에 도착하면 그들 중 힘센 사람들은 사역하도록 뽑혀서 때때로 학살 장치를 가동하게 했고 다른 모든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처형되었다.  - P184

교통부는 필요한 열차편을 준비했는데, 철도 차량이 아주 부족할 때도 주로 화물열차가 준비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운송 열차 스케줄이 다른 시간표와 충돌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유대인 장로회는 아이히만과 그의 부하들을 통해 각 열차를 채우는 데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필요한지에 대해 들은 다음 수송될 사람의 명단을 만들어 주었다. 유대인은 등록을 하고, 무수히 많은 서류들을 작성했으며, 재산을 보다 손쉽게 탈취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장의재산 관련 질문지들을 작성하고 또 작성했다. 그리고 그들은 집결지에모여 열차에 탑승했다. 일부 숨거나 탈출하려는 사람들은 유대인 특별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아이히만이 아는 한에서는 아무도 저항하지않았고 아무도 협력을 거절하지 않았다. 1943년 베를린에서 한 유대인목격자가 쓴 것처럼 "매일매일 사람들은 자신의 장례식장을 향해 이곳을떠났다." - P185

아이히만이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킨 가장 유력한요소는 실제로 최종 해결책에 반대한 사람을 한명도, 단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는 단 하나의 예외를 만나게되는데, 그와는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이 일은 1만 대의 트럭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100만 명의 유대인을 석방한다는 힘러의 제안에 대해 그가 카스트너 박사와 형가리에서 협상할 때였다. 새로운 국면 전환에 용기를 얻은 카스트너는아이히만에게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공장‘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는데, - P186

아이히만은 ‘진정으로 기꺼이‘ (herzlich gern) 그렇게 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이 일은 자신의 능력 밖이고, 또 자신의 상관들의 능력 밖이기도 하다고 대답했다. (사실이 그랬다. 물론 그는 유대인이 자신의 파괴작업에 대한 일반적 열정을 공유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그는 단순한 순응 이상의 것, 즉 그들의 협조를 기대했다.) 그래서 그는사실상 상당한 정도로까지 협조를 얻었다. 이것은 빈에서의 활동에서그러한 것처럼 자신이 한 모든 일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행정과경찰 업무에 유대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베를린에서 유대인을 최종적으로 처리하던 일은 내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적으로 유대인 경찰에 의한 것이었음) 완전한 혼돈상태에 빠졌거나 독일의 인력 공급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누수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다.  - P187

모든 진실은 만일 유대인이 정말로 조직이 되어 있지 않았고 또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혼란과수많은 불행들이 있었겠지만 희생자들 전체가 400만, 500만, 600만에탈할 리가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프로이디거의 계산에 따르면유대인위원회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더라면 그들 가운데 절반은 목숨을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물론 단순한 추산에 불과하지만, 이 추산치는 네덜란드에서 나온, 즉 네덜란드 국립전쟁문서연구소소장인 드 종(L. de.Jong) 박사에게서 내가 입수한 더욱 믿을 만한 수치와 이상하게도 일치한다. 모든 국가 당국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위원회도 아주 재빠르게 ‘나치스의 도구‘가 되어버린 네덜란드에서는 10만3000명의 유대인이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대략 5000명은 테레지엔슈타트로 통상적인 방법을 통해 이송되었는데, 이는 물론 유대인위원회의 협력을 받아서였다. 이 가운데 단지 519명의 유대인만이 죽음의 수용소로부터 돌아왔다. 이 숫자와는 대조적으로 그 2만 내지 2만5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1만 명의 유대인은 나치스를 탈출(이것은 유대인위원회로 부터의 탈출도 의미함)하여 지하로 잠적해서 살아남았다. 이것은 40 내지 45퍼센트에 해당한다. 테레지엔슈타트로 보내졌던대부분의 유대인은 네덜란드로 되돌아왔다. - P197

예루살렘 재판이 세계의 눈앞에 그 진정한 차원을 드러내 보이지 못하고 있는 이 장의 이야기에 내가 집중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존경할만한 유럽 사회에서 발생한 나치스의 전반적인 도덕적 붕괴에 대한 가장 놀랄 만한 통찰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에서도, 또 학살자들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에 대해서도그렇다.) 아이히만은 나치 운동의 다른 요소들과 대비하여 항상 ‘좋은사회‘라는 관념에 의해 압도되었고, 그가 종종 독일어를 말하는 유대인지도층 인사들에게 보여주었던 공손함은 대체로 자기가 다루고 있는사람들이 사회적으로는 자기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결과였다. 그는 한 증인이 자기에 대해 말한 것과 같은, 십계명이존재하지 않으며 갈망을 느끼게 해주는 지역으로 도피하기를 원하는 - P197

그가 끝까지 열렬히 믿은 것은 성공이었고, 이것이 그가 알고 있던 ‘좋은 사회‘의 주된 기준이었다. 히틀러(그와 그의동지 자신이 자신들의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를 원한 사람)에 관한 주제에 대해 그가 한 마지막 말은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히틀러가 "모든 것이 틀린 것은 아니고, 이 하나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에서 거의 8000 만에달하는 사람의 총통의 자리에까지 도달했습니다. ...... 그의 성공만으로도 제게는 이 사람을 복종해야만 할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그는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그 ‘좋은 사회‘가 모든 곳에서 열정과 열성을 가지고반응하는 것을 보았을 때 사실상 그의 양심은 휴식상태에 있었다. 판결문에 나오는 말처럼 "양심의 소리에 자신의 귀를 가까이할 필요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것은 그가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양심이 "자기가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함께". 자기 주변에 있는 사회의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더불어 말했기 때문이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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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초, 새로운 밀레니엄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의 몇몇 신문들이 새로운 세기, 새로운 밀레니엄에 필요한, 주목해야 할 사상을 꼽았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인물이 한나 아렌트였다. 그즈음 우리나라에는 아렌트의 사상이 그다지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지금까지 그녀의 주요 저술들이 하나 둘씩 번역되었고, 학문 연구에서도 그 수준이 점차 향상되어가고 있다.
아렌트의 저술 가운데 인구에 가장 많이 회자되어온 것이 바로 이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일 것이다. 아렌트를 본격적인 정치사상가로주목받게 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사후에 출간된 『칸트 정치철학 강의와 정치의 약속』에 이르는 모든 저술들이 학술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유일한 예외로 대중적인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말하자면 어렵게 읽히는 철학적, 정치사상적 저술이 아니라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그러면서도 깊은 고민과 더불어 이 책을 읽는다면, 오늘의 시대에 아렌트가 주는 메시지를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 P13

여기서 ‘평범성‘이라고 번역한 banality는 ‘진‘
라고도 번역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단어가 아렌트의원의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가이다. 앞서 언급한 아이히만의 특성을생각한다면, 악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음을 아렌트가 우리에게 말하려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banality를 ‘진성‘이라고 번역한다면 우리는 이 말을 "평범하고 또익숙할 정도로 많이 접해서 진부해졌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며, 결코
"시간적으로 오래되었다"거나 "구식"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 말을 ‘일상성‘이라는 말로 번역한다면, 그 의미를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 일상적일 정도로 자주 일어나서 그만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게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악의 평범성을터무니없는 잔혹상이 일반화된 것을 표현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렌트의 본의와는 거리가 아주 멀기 때문이다. - P15

이 책은 쉽고 평범하게 쓰인 책이지만 격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책과 관련된 첫 번째의 논쟁은 아렌트와 유대인과의 관계, 또는아렌트와 시온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1963년에 저명한 시온주의 학자인 거솜 숄렘(Gershom Sholem)은 아렌트가 "유대인에 대한 사랑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담은 유명한 공개서한을 보낸다.
이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해 유대인의 민족적 관점에서 날린 직격탄이었다. 아렌트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에 대한 사랑을 결여한 채 마치 유대인이 아닌 것처럼 보편적 관점에서 아이히만 재판을다루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사랑이란 개인의 문제이지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고응수했고, 숄렘이 시온주의자였던 점을 의식하여 아렌트는 자신이 시온주의자들을 도와주었던 독일에서의 이력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때도움을 주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숄렘이기도 했다. 나중에 아렌트는 이 논쟁을 "나와 유대인 간의 전쟁"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 P16

이렇게만 보면 아렌트는 영락없는 보편주의자이지만, 아렌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즉, 앞서 언급한 레싱의 입장을 넘어, 우리가서로 정치적으로 소통하고 좋은 삶을 나누는 근거로서의 인간됨이라는것이 있음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아렌트는 인간성이 마치 인간의 본질로서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입장을 거부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그 책의 제목이 그 같은 고정된 인간성이 있는 것처럼 오해를불러일으킬까봐 염려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긍정적 의미의 인간성이 존재한다는 일상적 믿음이 잘 드러나는 예인 양심의 문제에서도 아렌트는 회의적이었다. 양심에 바탕을 둔 시민 불복종의 경우에도 아렌트는 양심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확증될 수 있는 정도의 보편성을 지닌다는 믿음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 P18

말의 능력과 관련하여 볼 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가장 흥미있는 이야기이지만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던 것이 독일 개신교 목사인그뤼버 감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독일인으로 유일하게 예루살렘법정의 증언대에 서서 검찰 측을 위한 증인이 되었다. 그는 유대인을구하기 위해 아이히만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고, 또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사태의 위험성을 알리는 등의 일을 했다. 그에 대한 반대심문에서 아이히만의 변호사인 세르바티우스는 그에게 "당신은 그에게영향력을 발휘하려고 애를 써보았습니까? 목사로서 당신은 그의 감정에 호소하고, 그에게 설교하고, 그에게 그의 행위가 도덕성에 모순된다고 말하려고 시도해 보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여기에 대해 그는 "행동이 말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말해 봤자 쓸데없었을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아렌트는 그뤼버 감독의 대답이 상투어(cliché)를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아렌트는 단순히 말을하는 것 자체가 행동일 수 있으며, 또한 목사로서의 그의 임무는 말이쓸모가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 P20

상투어들은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심지어 죽음의 힘조차도 느끼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현실을 느끼고 알 수 있는 능력, 나아가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자체가 결여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을 그뤼버 감독 이야기에서알 수 있다. 아렌트는 그뤼버 감독이 아이히만에게 말을 했어야 했다고했다. 말의 유용성은 말이 현실을 알게 하여 사람에게서 변화를 기대할수 있게 하는 데 있다고 아렌트는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목사의 임무가 말이 과연 쓸모가 없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목사가 영향력 있는 존재라면 그 영향력은 전적으로 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아렌트는 생각한 것이다. - P22

상투어나 관용어, 또는 최종 해결책 수행을 위해 고안된 암호화된 언어도 말이나 일상 언어와 마찬가지로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이 양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자연어인지, 의도적으로 만들어져 반복적으로 사용된 인공어인지의 차이로 보인다. 상투어나 관용어 등은 늘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특징을 갖는다. 현실-말-사유의 관계가 유기적이지 못하고, 언어가 고정되어 버림으로써 사유와 판단이 현실과 유리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아렌트가 이야기의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풀어낸 이유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우리는 단순히 과거를 기술하고 이해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미래 지향적으로 이해가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벤하비브의 말처럼 "마음을 미래로 향하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를 얻기 위해서라는것이다.
이야기가 중요하다. 이야기는 이론과는 달리 현실의 힘을 반영하는 - P22

일상 언어를 사용한다. 일상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질 자격을 갖춘다. 구체적인 현실의 힘을 반영하면서도보편적 설득력을 가질 자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구체와 보편의 양 측면의 힘을 동시에 반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어떤 이론이 정치적으로 수용 가능한지를 검증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것은 곧 받아들여지기 위한 첫 단계에 해당된다. 실제로 수용될 것인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제시될 수 없다. 그 기준을 제시한다면 자유주의적 준거를 제시하는 것과 같은 특성이 될 수 있겠으나, 동시에 그것은 공허할 것이다. 수용의 여부는 이야기가 사람들의입에 회자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이야기되는가와 연결된다. 이때 전제되는 것은 보편적 원리나 준거가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람의 존재이다. 이를 달리 표현한 것이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아렌트가 제시한 공통감(sensuscommunis) 개념이다. - P23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주요 차이점은, 아렌트의 정치적 이론화 작업일반, 특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논의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으므로 이를 간략히 살펴보자. 아렌트에게 있어서 정치적, 법적 윤리적 이론화 작업의 주요 범주는 ‘인간의 복수성‘ (human plurality) 또는 다원성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의 복수성이 없다면 인류 또는인간성이란 말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주저 없이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행위와 말, 이 두 가지의 기본 조건이 되는 인간의 복수성은 평등과차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인간들이 평등하지 않다면 그들은서로 그리고 자신들에 앞서 왔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고, 또 미래를 계획하고 자신들 다음에 올 사람들의 필요를 예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인간들이 다르지 않다면 현재 존재하고 과거에 존재했고 앞으로 존재할 사람들과 구별되는 각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말을 하거나 행위를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아렌트에게는 복수성이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실존적 조건이다. - P28

‘출생‘ (탄생)이란 생물학적 현상으로, 각 사람들이 이미 항상 복수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속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는 ‘출산‘(또는 노동)(노동인, homo laborans)"의 현상이다. 후자의 ‘두 번째의 탄생‘을 통해우리는 점점 더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된다고 말한다. 첫 번째의 ‘생물학적‘ 탄생과 두 번째의 상징적‘ 탄생은 동일한 인간적 공적의 연속이다. 이 둘은 동시에 발생한다. 아렌트는 『뉴욕 서평』에 하이데거의 팔순생일에 헌정하는 논문, 80세의 마르틴 하이데거>를 기고한다. ‘생일‘
은 모든 문화권에서 모든 인간 존재를 위해 축하하는 행사이다. 아렌트의 ‘탄생‘ 개념은 그녀의 정치적 이론화 작업에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탄생이란 생명의 시작이며, 인간을 사회적·정치적 존재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 탄생하는 한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의 삶을 시작한다. "어떠한 인간의 삶도, 자연 속 광야에서 살아가는은둔자의 삶조차도, 다른 인간의 현존을 직간접적으로 입증해 줄 수 있는 세계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고 아렌트는 강조한다. - P29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이데거에게는 ‘죽음‘이 현존재(Dasein)의 실존의 표지이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결코 경험할 수 없기에 하이데거는현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 (Sein-zum-Tode)라고 정의했다. 죽음은현존재의 실존의 표지가 되는데,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며, 어떤 다른 사람도 나를 위해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죽음만이 현존재의 실존의 진정성 (Eigentlichkeit)를 입증한다. 죽음,
오직 죽음만이 현존재의 실존을 진정한 것으로 만든다.  - P29

인간을 정치적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의 행위의 능력이다.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동료들과 어울리게 해주고, 공동의 행위를 하게 해주며, 그 재능―새로운 어떤 일을 착수하는 능력 (새로운 것의 시작으로서의 탄생)—이 없었더라면 마음의 욕망은 물론이고 정신의 생각으로도 결코 들지 않았을 일과 목표를 위해 나서게 해준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행위한다는 것은 탄생성의 조건에 대해 인간적인 응답을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탄생을 통해 본질적으로 복수적으로 존재하는 신참자로서 또 시작으로서 이 세상으로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어떤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있다. 탄생의 사실이 없다면 우리는 새로움이 무엇인지를 알지도못했을 것이고, 모든 ‘행위‘는 단순지 행태나 도착적 행동에 불과할것이다." - P30

인간은 어머니가 그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날에 단 한 차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탄생을 해야할 의무를 부여한다.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각각의 탄생과 더불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출생시키고 세계를 자연적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변형시킨다. 더욱이 이러한 산출은 항상 이미 공동 프로젝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복수적인 세계, 즉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되어 있는 세계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만으로는 사회적 실체인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설명할수 없다. ‘이성의 보편성‘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표현을 빌리자면을 믿었던 헤겔은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요, 이성적인것이 현실적이라는 말을 했을 때 쉽게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장 프랑수아 료타르는 홀로코스트가 현실적인 것이었으나 이성적인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반유대주의 자체는 열정이었다. 계몽주의적 합리주의는 그것이 헤겔적인 것이건 다른 것이건 간에 이성으로만 모든 것을판단하려고 하는 한 한계를 지닌다.  - P31

그런데 그녀가 의미한 판단‘의 의미를 알 수 있는실마리들이 그녀의 저술 속에는 충분히 있다. 판단은 ‘특수한 상황에대해 그의 일반성에서가 아니라 ‘그의 특수성 안에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아렌트는 두 종류의 책을 썼다. 하나는 어떤 주제나 안건에 대해 그의 일반성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것과 관련이 되고(예컨대 인간의 조건),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정치에서의 거짓말‘, ‘리틀락에 대한 반성‘, ‘안식할 집‘과 같은 논문과 관련이 되는데,
이 논문들은 『공화국의 위기』(1972)와 책임과 판단』(2003)에 포함되어 있다.
아렌트는 판단의 기능-칸트의 발견물이 사유의 기능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판단은 항상 ‘특수자들과 아주 가까이 있는 일들‘ [예컨대시사적인 일들)과 관계한다. 물론 좋은 판단뿐만 아니라 나쁜 판단도있다는 것과 위대한 철학자라도 나쁜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헤겔과 칸트뿐만 아니라 하이데거와 슈트라우스도―정치나 다른 일에 대해 크거나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항상 좋은 판단을 한다고 보증할 수는 없다. - P32

유대 민족에 대해 자행된 그의 범죄의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아이히만은 어떠한 후회도, 또 어떠한 가책의 감정도 표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렌트에 대한 비판가들 사이에 있었던 도덕적 분노에 기름을 끼없음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그리고 그와 유사한 많은 사람들은 "도착적이거나 가학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아이히만은 "잘못을 행하려는 의도가 범죄를 구성하는 데필수적이라는, 모든 현대 법체계에서 통용되는 가정" (379쪽)을 무시했다. 아이히만에 대해 이스라엘 경찰의 심문 기록은 아이히만의 ‘악의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보고를 지지한다. 아렌트가 최초의 보고를 한지 10년이 지나 사회 연구」(Social Research)에 게재된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꽤 긴 반성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수년 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해 보고를 하면서 나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언급을 하였는데, 이는 어떠한 이론이 - P36

나 사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주 사실적인 어떤 것, 엄청난규모로 자행된 악행의 현상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었다. 이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특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또 그에 앞서 있었던 경찰심문에서보인 그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의 과거에서 사람들이 탐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특징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흥미로운, 아주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다. 그는 한때 자기가 의무로 여겼던 것이 이제는 범죄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이러한 새로운 판단의 규칙을 마치 단지 또 다른 하나의 언어규칙에 불과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의 다소 제한된 양의관용구에다 몇 가지의 새로운 것들을 추가했던 것이고, 따라서 그가그 관용구 가운데 어떤 것도 적용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는 전혀 어찌할 수 없었다.  - P37

가장 기괴한 순간은 그가 교수대에 서서말을 하게 되었던 때로, 그는 장례식 연설에서 사용하는 상투어에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자기가 살아남아 있는 자가 아니기때문에 이 경우에는 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줄곧 예상했을 사형선고의 순간에 그가 남겨야 했을 마지막 말이 무엇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해 보건대, 이러한 단순한 사실을 그는 생각 못했던 것 같다.
마치 재판 때의 심문과 반대심문에서 드러난 불일치와 심각한 모순들로 인해 그가 괴롭게 느끼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상투어, 관용구, 관습적이고 표준화된 표현과 행위 규칙의 고수 등은우리를 현실로부터 막아주는, 즉 모든 사건과 사실들이 발생함으로써 일으키게 되는 우리의 생각하는 주의력에 대한 요구를 막아주는사회적으로 인정된 기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요구에 대해항상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곧 지쳐버리게 될 것이다. 아이히만 - P37

의 경우에 달랐던 점은 분명히 그는 어떠한 그 같은 주의에 대해서도알지 못했던 것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이히만은 거의 초현실주의적(현실 초월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극단적으로 ‘몽상하는 사람이거나, 또는 아렌트가 위에서 언급한 인용문에서 묘사한 그의 모든 특성들을 다 더해본다면 그는 ‘몽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 있었다. 특별할 정도로 ‘천박하지만 ‘악마적‘이지도 또 ‘어리석지도 않은 아이히만의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 또는 ‘사유의 전적인 부재‘는 인간적 실존성을 결여하고 있고 또 그것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그는 정신병으로 무죄를 요구할 수있을 정도로 이데올로기적이거나 병리적이지 않았다. 아렌트에 따르면그의 ‘인류에 대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근본악‘이 아니었다.  - P38

왜냐하면 그것은 말하자면 아무것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근본적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수전 니만은 그의 잘 알려진 저서 『근대적 사유에서의 악: 철학의 대안적 역사에서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악의 문제에 대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 15)로 간주했다. 첫째, 이 책은 20세기에 쓰였지만 그의 윤리적 함축은 20세기보다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둘째, 이 책은 악이라는 주제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윤리적인 것의 전 영역과 관련된 것이라고 나는생각한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 대해 사유할 능력이 없는 일반적이고 정상적인사람이라고 규정했을 때, 의미한 것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아렌트는 아 - P38

이히만이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106쪽). 이것은 아렌트가 인간의 복수성에 있어서 ‘평등‘ (정체성또는 동일성)의 다른 측면, 또는 다른 갈고리인 ‘차이‘라고 불렀던 것에대한 문제이다. 인간의 복수의 우선은 활동적 삶(행위와 작업과 노동)과 관조적 삶(즉, 사유) 양자를 연결시키는 조직이다. 이 양자에 대해서 아렌트는 기포드 강의에서 ‘사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의지‘
와 ‘판단‘에 대해서도 폭넓게 논의한 바 있다. ‘특별히 천박했던 아이히만은 ‘사유‘도 ‘의지‘도 ‘판단도 할 수 없었다.
‘차이‘가 없으면 소통의 필요가 없다고 아렌트가 생각한 것은 옳았다.
그렇다면 ‘말‘과 ‘행위‘도 필요없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우리 모두가 똑같다면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다. 차이가 없다면결국 인간의 복수성 자체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개념이 될 것이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월처 (Michael Walzer)가 차이란 인간관계에서 관용을 필수적으로 만드는 반면 관용은 차이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한 것은 논박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차이 (Differenz)를 구별(Unterschied)이라고 말놀이한 것은 ‘차이‘를 ‘관계적인 것과 연결지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차이는 실로 구별인 것이다. - P39

아이히만은 타인 또는 타자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그는 또한 ‘행위‘할 능력, 또는 더 잘 말하자면 도덕행위를 ‘수행‘할 능력도 없다. 예컨대 그에게는 어떤 것을 ‘말하기‘란 언어놀이를 하는 것과 동일했다. 그는 수행행위로서의 말하기에 대한 이해, 즉 필연적으로윤리적인 발화행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아이히만의 문제는 그가 본질적으로 혼돈에 빠진(함께 뒤섞여버린) ‘동일주의자‘인간관계에서 차이를 알지 못하거나 차이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ㅡ라는 점이다. 예컨대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교수대 아래에서 자신의 사형선고를 ‘회피하는 것을 죽음의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생존‘한 것과 부적절하게 동일시했다. 아이히만은 또한 자신의 ‘복종‘과 칸트의 ‘의무‘ 또는 ‘책무‘와 구별하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의국가(Der Judenstaat)를 쓴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과 같은 ‘이상주의자‘라고 잘못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그에게 ‘이상주의자‘란 단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P40

‘끔찍하게도 또 전율스럽게도 정상적인‘ 아이히만에 의해 자행된 ‘인류에 대한 범죄는 폭력의 행위(즉 홀로코스트)를 포함한다. 폭력은 차이를 지우려 할 때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값비싼 대가이다. 인종차별주의로서의 나치즘의 경우가 그러했다. 나치즘의 반유대주의의 목표는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유대인종을 이 지구상에서 쓸어내려는,
멸절시키려는 것이었다. 전쟁도 또한 ‘전율스럽게도 정상적‘으로 되었다. 전쟁은 정치만큼이나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카를 클라우제비츠(Karl Clausewitz)에 따르면 전쟁은 폭력적 형태의 정치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을 사용한 정치의 연장‘이라고 했던것이다. 그의 말은 20세기의 국제정치에서 당연시되었고 으레 그런 문제로 받아들였다.  - P42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점점 더 일차원적으로 그리고 전체주의적으로 되어왔고, 또 그렇게 되어가게 될 이 지구상의 인류를 위해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담론에서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두 번째로 궁극적인 메시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없어 보인다.
지구상의 인류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잔인함, 죽음, 고통을 끼치는 데 이를 것이라고 필자가 두려워하는 ‘무사유‘를 우리 모두의 모습으로 갖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18) 바로 이때 인류의 역사-아무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표현을 사용하자면—는 깨어날 길이 없는 악몽이 될 것이다. - P43

"베스 하미쉬파스" (Beth Hamishpath, 정의의 집). 법정 정리가 큰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면서 세 명의 판사가 도착했음을 알렸을 때 우리는 모두 벌떡 일어섰다. 판사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검은 법복을 입은 채 옆문을 통해 법정으로 들어와 높게 만든 단 제일 앞줄에자리잡았다. 곧 수많은 책과 1500편 이상의 기록 문서로 가득 채워질긴 탁자 좌우 양편에는 법정 속기사들이 앉아 있다. 판사 바로 아래에는 피고인과 변호인, 그리고 법정 사이에서 직접적인 의견 교환을 도와줄 통역사들이 있다. 재판은 히브리어로 진행되어, 독일어를 쓰는 피고측 사람들은 대부분의 방청객들과 마찬가지로 무선 동시통역 장치를통해 재판 진행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 통역사들의 불어 통역은 탁월하고 영어 통역은 참고 들어줄 만한데, 독일어 통역은 완전 코미디 수준이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이 재판을 위한 기술적 장치들은 꼼꼼히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인구가운데 독일 출신이 높은 비율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피고인과 그의 변호사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인 독일어 통역을 제대로은 구하지 못했다는 것은 새로운 국가 이스라엘의 작은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이다. - P49

판사들의 행동에 극적인 요소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일부러 꾸민 듯한 걸음걸이를 하지 않았고, 그들의 맑고 강한 집중력이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청취할 때 눈에 띄게 나타났던 경직된 모습 등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증언을 무한정 끌고 가려는 검사의 시도에 대해서는 참지 않고 즉각적으로 제동을 걸었는데,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또 세르바티우스 박사(Dr. Servatius)가 격렬한 전쟁과 같은 이처럼 불편한 환경 속에 거의 혼자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기라도 하듯 판사들의 태도가 좀 지나치게 공손한 듯했지만, 피고인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항상 비난의 소지가 없었다.  - P50

그러나 판사들이 아무리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외면한다 해도 그들은 마치 연극 무대에서 관객들을 바라보듯 단의 제일 윗자리에서 방청객을 마주 대한 채 바로 거기에 앉아 있었다. 방청객들은 전세계를 대표하는 듯 생각되었는데, 실제로 처음 몇 주간은 방청객들이주로 세계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신문기자와 잡지 작가들이었다. 그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끈 광경을 지켜볼 수 있겠지만, 이번 경우는 "유대인의 비극 전체가 주요 관심사가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비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이유로해서도 [아이히만을 처벌한다면, …… 이는 그가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놀랍게도 "우리가 어떤 인종차별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검사가 논고 서두에서 내뱉은 이 주목할 만한 말은 분명 이번기소에서 핵심 문장임이 입증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소송사건은 아이히만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이 무엇을 겪었느냐를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다.  - P53

그가 보기에 이 재판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파도 위에서 출렁이는 배‘와 같은, 피투성이의 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방지하려는 그의 노력이 자주 실패한 것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피고 측의 잘못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부적절하고 하찮은 증언이라도 피고 측은 적절히 이의를 제기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를 세르바티우스박사라고 불렀는데, 그는 증거 자료를 제출하는 문제에서는 보다 용감했다. 그가 원고를 방해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원고 측이 뉘른베르크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전 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의 일기를 증거로 제출했을 때였다. "제가 할 질문은 한 가지뿐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이름, 즉 피고인의 이름이 저 29권 (실제로는 38권에 언급된 적이 있습니까?
··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이름은 29권 가운데 어디에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 더 이상 질문이 없습니다. 감사......
합니다." - P57

그렇다면 그가 살인의 방조자로 기소되었다면 유죄라고 인정했을까?아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조건들을 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은 회고를 할 때에만 범죄일 뿐, 자기는 언제나 법률을 준수하는 시민이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최선을 다해 수행한 히틀러의 명령은 제3제국에서는 ‘법의 효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피고 측은 아이히만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제3제국 시대에 가장 유명한 헌법 전문가 중 한 사람으로 현재 바바리아의 교육과 문화장관으로 있는 테오도어 마운츠의 말을 인용하려 할 것이다.  - P77

그는 1943년에
"총통의 명령은∙∙∙∙∙∙ 현재 법적 질서에서 절대적인 중심이다"라고 썼다). 오늘날 아이히만에게 그가 달리 행동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단적으로 그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잊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 와서 자신들은 언제나 반대한 척하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실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수행하는 데매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마운츠 교수처럼 그도 "다른 통찰에 도달했다." 그가 한 일들은 한 것이고, 이를 굳이 부정하고싶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구상의 모든 반유대주의자들에 대한경고로 공개적인 교수형을 당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말은 그가 무엇을 우회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후회는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것이다"고 그는 말했다 - P77

시간의 회오리바람 속의 낙엽처럼 그는 마법으로 차려진 식탁에서통닭이 입으로 날아드는 환상세계인슐라라피아(더 정확히 말하자면,학위와 보장된 직업과 세련된 유머의식‘을 가진, 가장 큰 악덕이란 농담 섞인 장난을 치고 싶어 참을 수 없어하는 충동인, 존경받는 속물들의 모임)에서, 정확히 12년 3개월간 지속된 천년제국의 행군 대열로 달려갔다. 어쨌든 간에 그는 신념을 가지고 당에 가입한 것도 아니었고,또 어떤 신념에 설득된 적도 없었다. 당에 가입한 이유를 말해달라고하면 그는 언제나 ‘베르사유 조약‘과 ‘실업‘과 같은 똑같은 진부한 표현들(clichés)을 반복했다. 또는 그가 법정에서 ‘어떠한 기대나 사전 결심 없이 그냥 당에 의해서 집어삼켜진 것과 같았습니다. 너무도 빠르고갑작스럽게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는 제대로 정보를 입수할 시간도 없었고, 알고 싶은 욕구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당의 정강도 몰랐고 「나의 투쟁』도 읽지 않았다. 칼텐브루너가 그에게 "친위대에
"가입하는 것이 어때?" 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지 뭐"라고대답했다. 일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그게 전부였다. - P87

따라서 뉘른베르크 법은 독일 제국에서 유대인이 처하게 된 새로운 상황을 안정시킨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말하면 그들은 1933년 1월 30일 이후로는 2급 시민이었다. 이들이 나머지 주민으로부터 거의 완벽히 분리되기까지는 몇 주 또는 몇 개월밖에 걸리지않았다. 이 일은 공포를 줌으로써,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일상적인 묵인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벽이 있었습니다"라고 베를린의 베노콘 박사는 증언했다. "독일 내에서 어디로 여행하든 나는 기독교인과 대화한 기억이 없습니다." 유대인은 이제 자신만의 법을 부여받았으므로 더 이상 법적 국외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느꼈다. 어차피 그들에게 강요된 것처럼, 그들은 자기들끼리 산다면 간섭받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독일 소재 유대인 제국대변단(모든 유대인 공동체와 조직의 전국 연합으로 1933년 9월에 베를린공동체의 주도 하에 창설되었는데, 이는 결코 나치스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의 말에 의하면, 뉘른베르크 법령의 의도는 ‘독일과 유대 민족 간에 참을 만한 관계 수준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 P95

모두 오랫동안 지위를 유지해온 저명한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지도층인사들과 그의 첫 개인적인 접촉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가 ‘유대인문제‘에 그렇게 매혹된 이유는 그 자신의 이상주의‘ 때문이었다고 그는설명했다. 그가 언제나 멸시한 동화론자들이나 그를 지루하게 만든 정통파 유대인과는 달리 이 유대인은 그와 같은 이상주의자‘였다. 아이히만의 생각에 따르면 ‘이상주의자‘란 단지 어떤 ‘이상‘을 신봉하거나,
또는 도둑질하거나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조건은 필수불가결하기도 하다.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었고(따라서 사업가 같은 사람은 아니었음),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경찰심문에서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 명령을 받고 있었는지만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자신이 얼마나 ‘이상주의자‘로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 P97

이것은 불성실 (bad faith)의 교과서적인 예, 즉 터무니없는 어리석음과 허위의 자기기만이 결합한 전형적인 예인가? 아니면 이것은 단지 영원히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일기에서, 시베리아에 있는 수많은 살인자와 강간범, 도둑들 사이에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의예일 뿐인가? 그런 사람이란 자신의 범죄가 현실의 한 부분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현실을 대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이히만의 경우는 평범한 범죄자의 경우와 다르다. 평범한 범죄자는 자기의 범죄집단이라는 좁은 한계 내에서만 범죄 없는 현실로부터 효과적으로자신을 분리할 수 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느끼기 위해서는 단지 과거를상기하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세상과 그는 한때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8000만 명으로 이루어진독일 사회가 동일한 방법, 동일한 자기기만, 거짓말, 어리석음을 통해현실과 사실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 아이히만의정신 속에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 P109

문제에 대한 그 자신의 신념은 겸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명이 내게부여한 얼마 안 되는 재능 가운데 하나는 진실에 대한 능력입니다. 그것이 내게 달린 일인 한에서는 말이죠." 검사가 아이히만이 저지르지않은 범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기 전에도 그는 이 재능에 대한주장을 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진 자센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당시 자신이 지적한 것처럼 "내가 전적으로 물리적, 정신적인 자유를소유하고 있었던" 때) 만든 정리가 안 된 장황한 메모 속에서 그는 ‘여기에 기록된 이 진실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미래의 역사가들은 충분히 객관적이도록 하라‘는 환상적인 경고를 했다. 이러한 경고가 환상적이라고 한 이유는, 이처럼 갈겨쓴 모든 문장에서 자신의 일에 기술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직접 연관이 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철저한무지가 나타나며, 또한 그의 기억력에 엄청난 결함이 있음을 보여주기때문이다. - P112

그 후에 판사로부터 자신의 변호를 위한 증언을하고 싶으면 "선서를 한 뒤 할 수도 있고 선서 없이 할 수 있다"는 말을분명히 듣고 난 뒤, 두말 않고 즉시 선서 아래에서 증언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과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또는 경찰심문관에게 그랬듯이, 법정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짓은 자신의 진정한 책임을 벗어나 자신의 목숨을 위해 싸우거나 자비를 간청하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매우 감정적으로 확언한 뒤, 자신의 변호인의 지시에따라 자비를 호소하는 자필 문서를 제출한 사람과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이히만에게는 이것은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들이었고, 그가기억 속에서나 즉흥적으로 자신의 기분을 북돋우는 관용구들을 찾을수 있다면 그는 ‘모순‘ 따위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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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빗속에서 길거리를 걸어가는 ‘노숙자‘는 그렇게 걷고 또 걸어도,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없이 얽히고설킨 길거리들뿐이었다. 아니면 어쩌다가 길모퉁이에서 경찰 두 명이 잡담을 하는 모습이나 경위나 경사가 부하들을 둘러보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밤에 누가 집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모습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아주 드문 일이었다. 누군가 어느 문으로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걸보고 가까이 가보면 웬 남자가 어두운 문 앞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특별히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 험상궂은 달과구름은 양심의 가책에 잠 못 드는 악인처럼 이리저리 뒤척였다. 런던이라는 거대한 도시가 강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 그 자체가 악인의 답답한 몸부림 같았다." 하지만 어쨌든 디킨스는 런던의 공동묘지를 좋아하고 런던의 "수줍어하는 동네들"을 좋아하고 "목가적 런던(ArcadianLondon, 사교계가 한꺼번에 시골로 떠나고 런던 전체가 무덤 같은 평화 속에 잠기는계절을 가리키는 디킨스의 엉뚱한 표현)"을 좋아했듯, 런던의 그 고독한 밤거리"도 좋아했다. - P301

 한편 도시에서 사람이 고독한 이유는 낯선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낯선 사람이 되어보는 일, 비밀을 간직한 채로 말없이 걸어가면서스쳐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을 비밀을 상상하는 일은 더없는 호사 중 하나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은 가능성들 앞에 열려 있다는 것은 도시생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고,가족의 기대, 공동체의 기대에서 벗어나게 된 사람들, 하위문화 실험, 정체성 실험을 시도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해방적 상태이기도 하다. 아울러관찰자의 상태(냉정한 상태, 대상에 거리를 둔 상태, 예민한 감각을 발휘하는 상태)이기도 하고, 성찰해야 하는 사람, 창작해야 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상태이기도 하다. 약간의 우울, 약간의 고독, 약간의 내성은 삶의 가장 세련된 재미에 속한다. - P302

얼마 전에 들은 라디오 방송에 가수 겸 시인 패티 스미스(PattiSmith)가 나왔다. 사회자가 무대 공연을 앞두고 무슨 준비를 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답했다. "두세 시간 동안 길거리를 배회합니다. 그 짧은 대답은 그녀의 무법자적 낭만주의와 함께 그녀에게 길거리 배회가 의미하는 바를 잘 요약하고 있다. 길거리 배회는 그녀의 감성을 더 터프하고 날카롭게 만들어주고, 배회자의 고요한 상념을 깨뜨릴 수 있을 만큼 격렬한 노래와 절실한 노랫말의 자양분인 고독의 베일로 그녀를 휘감아준다.
미국의 수많은 도시(호텔 건물을 나가면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을 나가면 6차선 도로가 있을 뿐 인도는 찾아볼 수 없는 도시)에서는 그런 식의 길거리 배회가 성공하기 어려웠겠지만, 그녀의 발언은 뉴요커로서의 발언이었다. 한편 버지니아 울프가 1930년 수필 「길거리 떠돌기(Street Haunting)」에서 익명성을 근사하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런더너로서의 발언이었다. 뛰 - P302

어난 등산가 레슬리 스티(Leslie Stephen)을 아버지로 둔 그녀는 언젠가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산이니 등산이니 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방에는등산지팡이와 아버지가 정복한 봉우리가 모두 표시되어 있는 입체 지도가 있었잖아요? 내가 런던과 습지를 제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랍니다."「길거리 떠돌기가 나왔을 당시의 런던은 디킨스가 밤 산책을 다니던 때보다 두 배 이상 커져 있었고, 길거리가 다시 한 번 피난처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울프는 한 사람의 정체성이 그 사람을 답답하게 옥죈다는 것을 언급하고, 집에 놓여 있는 물건들이 "우리가 경험한 것들의 기억을 굳히는 방식" 을 언급한 후, 연필을 사러 길을 나섰다. 겨울 저녁이었고, 젊지 않은 여자에게 안전과 정숙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행로의 기록(혹은 상상)인 길거리 떠돌기는 도시를 걸어 다니는 일을다룬 위대한 수필 가운데 하나다. - P303

길거리로 나선다는 것에 대해 "4시에서 6시 사이의 상쾌한 저녁에집을 나설 때는 내 친구들이 나라고 여기는 나의 껍데기를 벗으면서 익명의 떠돌이들로 구성된 거대한 공화국 군대의 일원이 된다. 방에 혼자있다가 그렇게 그들과 함께 있게 되면 참 기분이 좋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인생 속으로 어느 정도는 들어가 볼수 있었다. 한 사람이 하나의 정신에 붙들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환상, 다만 몇 분간이나마 다른 사람들의 정신이나 육체를 빌릴 수 있다는 환상을 품어볼 수는 있을 만한 정도였다. 세탁부도 될 수 있었고 술집 주인도될 수 있었고 거리의악사도 될 수 있었다." 이 익명성에 대해. "각자의 영혼은 다른 영혼들과 다른 모양으로 존재하기 위해 굴 껍데기 같은 외피를 만들어내는데, 그꺼끌꺼끌한 외피가 깨져 없어지면굴알맹이 같은 - P303

"통찰만 남는다. 거대한 눈알이라고 할까. 한겨울의 길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드러나 있으면서도 가려져 있는 곳. 울프는 한때 드퀸시와 앤이 걸었던 옥스퍼드 스트리트를 걸어 내려갔다. 상점 창문으로 들여다보이는 화려한 상품을 가지고 상상 속의 집, 상상 속의 삶을 장식해보는가하면, 그런 집과 삶을 내던지고 다시 현실 속의 길로 걸어 나오기도 했다.
울프의 언어는 주관의 언어워즈워스 등이 만들어내고 드퀸시와 디킨스 등이 더욱 발전시킨 언어)였다. 울프의 상상을 자극하는 것은 덤불에서 부스럭거리는 새들, 상점에서 구두를 신어보는 난쟁이 여자 같은 아주 작은 사건들이었다. 상상이 걷는 길은 두 발이 걷는 길보다 멀리 뻗어 나갔기에 현실 속의 거리로 돌아오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거리를 걷는 일은 이런 글을 통해 지금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워즈워스, 드퀸시, 디킨스 등에게는 괴로움의 상태였던 고독과 주관이 울프에게는 즐거움의상태였고, 울프에게 길거리를 걷는 일은 자신의 짐스러운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울프의 보행이 현대적 의미의 보행인 것은 그 때문이다. - P304

휘트먼의 시를 보면, 그가 행복하게 애인 품에 안겨 있는 사람으로나오는 대목도 많지만, 그런 시보다는 그렇게 자기를 안아줄 애인을 찾아서 혼자 길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사람(게이 크루징의 선구자)으로 나오는 대목이 더 정말처럼 들린다. 풀잎』최종판에 실린 「먼 훗날의 기록관들이여(Recorders Ages Hence)」라는 꽤 거창한 시에서는 자기를 "대개 홀로 걸으면서 소중한 친구들, 소중한 애인들을 생각하던" 사람으로 기록해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더 뒤쪽에 실린 또 한 편의 시는 "잔치가 벌어지는 도시, 걸어갈 길이 있는 도시, 기쁨을 주는 것들이 있는 도시여."라는 돈호법으로 시작된다." 이 시에서 휘트먼은 한 도시를 반짝이게 할수 있는 모든 것(건물, 기선, 퍼레이드 등등)을 열거한 후, 이런 것들 대신 길을걷는 경험("내가 지나갈 때, 오 맨해튼이여, 나를 사랑하겠다는 눈빛으로 반짝 또 반짝 또 반짝하는 너의 눈동자들"을 택한다. - P306

잔치를 즐기는 것보다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기쁨이고, 약속이 지켜지는 것보다는 약속이 맺어지는 것이 기쁨이라는 뜻이다. 휘트먼은 수많은 것들을 열거하고 다양한 것들을 묘사하는 탁월한 목록 작성자였고, 최초로 군중을 사랑한 작가 중 하나였다. 군중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연애의 가능성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적 이상, 드넓게 퍼지는 활기의 표현이었다. 잔치가 벌어지는 도시(City of Orgies)」 뒤에 실린 시 가운데 어느 낯선 사람에게 (To aStranger)」가 있다. "거기 지나가는 낯선 사람이여! 내가 당신을 얼마나 그 - P306

혼자 걷는 도시
"그리운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당신은 모른다. 휘트먼에게 스쳐 지나가는사람의 눈빛과 친밀한 사랑은 익명의 군중과 그의 강력한 자아의 관계처럼 상보적이었다. 이렇듯 휘트먼의 시는 맨해튼이라는 점점 넓어지는메트로폴리스에 대한 찬양, 대도시의 크기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가능성들에 대한 찬양이었다.
휘트먼이 죽은 1892년은 모두가 뉴욕을 찬양하기 시작할 때였다. 파리가 19세기의 수도였다면, 뉴욕은 20세기 중반까지의 수도였던것 같다. 급진파와 재벌 총수가 똑같이 도시에 사활을 걸고 희망을 걸었던 시절, 뉴욕은 호화 여객선이 입항하고 이민자가 엘리스 섬으로 밀려들어오는 도시, 그야말로 최고의 현대 도시였다. 조지아 오키프(GeorgiaOKeeffe조차 뉴요커 시절에는 뉴욕의 마천루 그림을 안 그릴 수 없었다. 1920년대에는 뉴욕 사람들을 위한 《뉴요커>라는 잡지가 나왔다. 그중 타운 토크(Talk of the Town)」라는 수필란 (18세기에 런던에서 나온 <스펙데이터》와 《램블러>의 전통을 잇는 지면에서는 필자들이 엮은 길거리의 작은 사건들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 P307

긴즈버그가 샌프란시스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실제로 긴즈버그가 시인으로서의 목소리를 찾은 곳은 1950년대의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였다. 하지만 그는 뉴욕의 시인이었고, 그의 시에등장하는 도시들은 크고 무정한 대도시다. 백인 중간층이 도시생활을뒤로하고 교외로 몰려가던 그때, 긴즈버그와 그 시대의 시인들은 열렬한도심 애호가들이었다.(다만 소위 비트 작가들 다수가 샌프란시스코로 몰려왔다고는 해도, 그들 대부분은 시에서 자기네들이 걸어 다니는 길거리를 다루기보다는 좀더 개인적인 내용, 또는 좀 더 일반적인 내용을 다루었다. 그들에게 샌프란시스코라는도시는 아시아로 가는 관문, 또는 서부 풍경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긴즈버그의경우, 교외를 다룬 시가 없지는 않다. - P308

 "가까운 곳에 지하철이 있고, 음반 가게 같은, 사람들의 인생 유감이 진심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있다. 그런 것이 없었다면 내가 풀잎 하나인들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 불성실한 것일수록 믿어주는 게 더 중요하다. 저 구름은 저 모습그대로 관심의 대상이 되는데." 직장에 걸어가면서(Walking to Work)」라는 시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길거리에녹아들고 있어.
당신은 누구를 사랑해?
나를?
빨간불인데 그냥 건널래."


역시 걸어가는 길을 그린 또 한 편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속옷을 안 입고 다니는 일에 지치다가도
또 괜찮아져요
길을 걷다 보면
바람이 내 생식기로 살며시 불어와주니까" - P311

나는 다른 사람들이 있는 데서 입을 열어 말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 [………] 나중에 연필을 집어 들고 종이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장면들, 감정들이 풀려나왔다." "길거리에서 떨어져 나온 후"라는 표현은 길거리가 하나의 총체적 세계라는 점, 즉 길거리에 속한 사람들이 따로 있고, 길거리를 다스리는 법과 길거리에서 쓰이는 언어가 따로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트라우마를 낳은 집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길거리"라는 집 밖 나라의 원주민이다.
오만과 편견이 거의 200년 전에 어느 시골 숙녀가 보행의 효용을기록한 깔끔한 연대기였다면, 칼들과 가까이 중 미국에서 퀴어로 산다는 것: 분열의 일기(Being Queer in America: A Journal of Disintegration)」라는 글은 1980년대 미국 도시에서 어느 퀴어 남자가 길거리의 효용을 기록한 『오만과 편견』 못지않게 깔끔한 연대기다. 보행은 우선 성애가 된 - P313

길거리에서다. "지금 내가 지나가는 복도의 창문은 느릿느릿 죽어가는 하늘을 몇 조각으로 깨뜨리고 있다. 그 애가 멀리 문 열 개 너머에서 갑자기 어느 문 안으로 들어간다. 조용한 바람이 따라 들어간다." 그도 그 방으로 따라들어가서 펠라치오한다. 왠지 모르지만 그가 전에 크루징하던 선창, 아니면 창고와 비슷한 방이다. 몇 페이지 뒤에서는 보행이 그의 친구이자에이즈로 죽은 사진작가 피터 후자(Peter Huiar)에 대한 애도가 된다. "그가 죽고 나서, 나는 길거리를 몇 시간씩 배회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차가 많아졌다. 몸뚱이들이 차도 가장자리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었고,
문간의 개들은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들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빌딩 위의구름들에 녹색 테두리가 생기는 시간이었다. [……]  - P314

"풍경화였다가 숙소였다가" 발터 베냐민이 보행자의 파리 경험에 대해 쓴 구절이다. 도시를 연구하고 도시를 거니는 기술을 연구한 뛰어난 학자 중 하나인 베냐민은 파리의 매력에 이끌려 파리의 뒷골목들을 헤매는 신세로 전락한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파리라는 주제는 1940년에 세상을 떠난 그의 마지막 10년간의 모든 글 속에서 다른모든 주제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가 처음 파리를 여행한 1913년 이후로 그의 파리 여행 기간은 점점 길어졌고, 1920년대 말에 결국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고향 베를린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펜 끝은 파리를향해서 걸었다. "도시에서 길을 잘못 찾는 일은 흥미로울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다. 길을 잘 모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도시를 헤매는 일, 마치 숲속을 헤매듯 도시를 헤매는 일에 필요한 훈련은 길을 찾는 일에 필요한 훈련과는 전혀 다르다. 도시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간판들, 도로의 이름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집들, 노점들, 술집들로부터 메시지를 듣는 방식은 숲속을 헤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자기 발에 밟힌 잔가지로부터,  - P318

 내게 이 배회의 기술을 가르쳐준 도시가 파리였다. 학창 시절의 공책 압지에 찍힌 미로 속에서 최초의 흔적을드러낸 나의 꿈을 실현해준 것도 파리였다." "그는 세기 전환기에 모범적 독일인 아이로 교육받은 결과 산과 숲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릴 때 사진 중에는 등산용 지팡이를 들고 알프스 산맥이 그려진 배경 앞에 서 있는 사진도 있고,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덕분에 슈바르츠발트나스위스로 긴 휴가를 다녀오는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의 사랑이 향하는 곳은 도시였다. 그의 도시 사랑은 자연 경외 따위의 케케묵은 낭만주의에 대한 거부이면서 동시에 모더니즘의 도시주의를 향한 열정이었다. - P319

베냐민에게 도시는 매혹적 구성물이었다. 연대기가 깔끔한 직선의시간적 구성물이라면, 도시는 배회하지 않고서는 지각할 수 없는 공간적 구성물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베를린 연대기에서 그는 자기의 인생이 지도나 미로 같은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적 구성물이 아닌 공간적 구성물이라고 하면서 그 깨달음을 얻은 곳이 파리의 한 카페라고 말한다. "파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곳의 담벼락과 강둑길, 포장도로, 박물관과 쓰레기, 창살과 광장, 아케이드와 노점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언어는 그토록 특별하기에 ----- 58 모스크바 일기는 그의 인생을 모스크바라는 도시에 대한 설명과 뒤섞은 글이고, 『일방통행로』는 도시를 흉내 내는 형식의 책이다. 이 책은 「주유소」, 「건설 현장」, 「멕시코 대사관,「최고급 가구가 딸린 방 열칸짜리 집」, 「중국 골동품」 등 도시의 특정한장소나 안내문을 연상시키는 소제목의 짤막한 구절들을 이어 붙인 전복적 몽타주다. 이야기 한 편이 쭉 이어진 길 하나라면, 일방통행로』의 짧은 이야기들은 뒤엉킨 골목길들이다. - P319

베냐민 자신부터가 뛰어난 배회자였다. 베냐민의 친구 하나는 그가 어떻게 걸었는지를 말해준다. "그 사람이 머리를 치켜세우고 걷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걸음걸이,
신중하게 한 발 한 발 더듬어 나가는 듯한 걸음걸이였다. 근시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근시가 심한 베냐민과 근시가 더 심한 또 한 명의 망명자 제임스 조이스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조이스는 파리에 1920년부터 1940년까지 살았다. 더블린 거리를 배회하는한 유대인에 대한 막연한 정보로 점철된 다층적 소설을 쓴 가톨릭 망명자 조이스와, 파리 거리를 거닐고 또 시로 쓴 가톨릭 신자(샤를 보들레르)에 관한 서정적 역사를 기록하면서 파리 거리를 배회하는 베를린 출신유대인 망명자 베냐민 사이에는 모종의 대칭이 존재한다.  - P320

조이스는 생전에 최고의 명성을 얻었지만, 베냐민은 그 명성을 한참 나중에야 얻게 된다. 독일에서 그의 작업을 재발견한 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였고, 영어권에서는 더 나중이었다. 지금 그는 문화연구의 수호성인으로 자리 잡았고, 그의 글은 지금까지 수백 권이 넘는 논문과 저서를 낳고 있다. 베냐민을 해석하는 글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것은 그의 글이 혼종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베냐민의 글은 주제 면에서는 학술적이지만 아름다운 아포리즘과 창조적 비약으로 가득하고, 정의를 내리는 연구가 아니라 영감을불러일으키는 연구다. 그중 특히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파리에 관한 연구였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베냐민이 책을 쓰기 위해 작성한 방대한 분량의 인용과 메모다. 보들레르, 파리, 파리의 아케이드, 플라뇌르(Hâneur)라는 일련의 주제를 다루었을 연구였다. 파리를 "19세기의 수도"
라고 부른 사람이 바로 베냐민이고, 플라뇌르를 20세기 말의 학문적 주제로 만든 사람도 바로 베냐민이다. - P320

베냐민에게 처음 아케이드에 관심을 갖게 해준 작가, 보행을 문화적 행위로 성좌(星座)화할 가능성을 포착하게 해준 작가는 보들레르가 아니라 베냐민의 동시대인들이었다. 같은 베를린 출신이자 친구였던 프란츠헤셀(Franz Hessel)과 초현실주의 작가 루이 아라공(Louis Aragon)이 그들이다.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Paysan de Paris)』(1926)를 읽고 너무 흥이 났던 베냐민은 "저녁마다 침대에서 읽었는데, 두세 장 읽으면 책을 내려놔야 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더 읽어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노트가 처음 나온 것이 실은 그때였습니다. 헤셀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 우정의 제일 멋진 부분을 길러나간 것은 베를린으로 돌아온 이후였습니다."  - P333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는 1920년대 후반에 출간된초현실주의3대 저서 중 하나다. 나머지 둘은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의 『나자』와 필리프 수포(Philippe Soupault)의 『파리의 마지막밤들 (Les Dernières nuits deparis)』이다. 세 작품 모두 파리를 배회하는 남자를 일인칭으로 서술하고있고, 매우 구체적인 지명과 장소 묘사를 제시하고 있고, 창녀를 주요 목적지로 설정하고 있다. 초현실주의가 중시한 것은 꿈에 나온 것들, 무의식적·비(非)자의식적 정신의 자유 연상, 충격적 병치, 요행과 우연, 일상의 시적 가능성 등이었다. 도시를 배회하는 것은 이런 모든 것에 관여하는 이상적 방법이었다. 브르통도 그 점을 지적했다. "산책의 탁월한 동행이 되어주었던 아라공이 눈에 선하다. 그에게서는 파리에서 가장 재미없는 곳을 더없이 흥미진진한 곳으로 만드는 마술적이고 몽상적인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이야기가 막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야기가 폭발하는 데는 길모퉁이 하나 도는 것, 아니면 상점 창문 한 번 보는 것만으로충분했다." - P334

베냐민은 자기를 가리켜 "악어 아가리를 지렛대로 비틀어 열고 거기 들어가 사는 사람" 같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 문학을 제일 좋아했고 거의 일평생을 프랑스 문학에 나오는 조연들처럼 배회하면서 살았다. 그를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바로 프랑스 문학인 것 같기도 하다. 파리를 탈출할 시기를 놓친 것이 프랑스 문학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말년에 제3제국의 어두운 그림자를 헤쳐 나가는 데는 프랑스 문학보다는 소년 모험소설이나 탐험일지 같은 것이 좀 더 유익하지 않았을까 싶다. 1939년9월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에 있던 다른 독일인들과 함께 검거된 - P339

그는 억류자로 분류되어 수용소가 있는 느베르까지 남쪽으로 150킬로미터가 훌쩍 넘는 길을 걸어가야 했다. 살이 찌고 심장에 병이 생긴 탓에파리의 길거리에서도 몇 분에 한 번씩 걸음을 멈추어야 했던 그는 수용소로 가는 길에 여러 번 정신을 잃기도 했지만, 세 달 가까이 되는 수용소 억류 기간 중에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다. 담배 몇 개비를 수업료로철학 강의를 열기도 했다. 국제펜클럽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파리로 돌아온 후에는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이어나가면서 비자를 받고자 애썼다.
통렬하게 서정적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쓴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나치의 프랑스 점령 후 남유럽으로 도망친 그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에스파냐의 포르트부까지 걸어갔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하는 가파른 도주로였지만, 그는 무거운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원고가 그 안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사 급한 포도밭 구간에서는걸음을 옮기지 못할 만큼 지친 그를 동행자들이 부축해주어야 했다. 그의 동행자 중 하나였던 구를란트 부인이라는 여자에 따르면 "길을 아는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네 발로 기어서 넘은 구간도 있었다. - P340

에스파냐당국이 요구한 것은 프랑스 출국 비자였다. 베냐민의 친구들이 마지막순간에 마련해준 미국 입국 비자로는 통과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그 험난한 산길을 걸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처지를비관한 베냐민은 에스파냐 국경에서 모르핀을 과다 복용했고, 1940년 9월 26일에 사망했다. 한나 아렌트가 쓴 글에 따르면 "그의 자살로 마음이 움직인 출입국관리 공무원들은 그의 동행자들이 포르투갈에 입국하는 것을 허가했다." 그의 서류 가방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같은 글에서 아렌트는 자기도 1960년대에 파리에 산 적이 있다고말했다. "파리에서 외국인이 고향 같은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파리라 - P340

는 도시 전체가 내 방 같기 때문이다. 집을 안락한 곳으로 만드는 방법이집을 그저 자고 먹고 일하는 곳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집에 마음을 붙이고 사는 것이듯, 도시에 마음을 붙이고 사는 방법은 아무 정처 없이, 아무목적 없이 도시를 마냥 걸어 다니는 것이다. 그러니 파리에서 체류를지탱해주는 것은 무수한 카페들이다. 길거리에는 그런 카페들이 줄지어늘어서 있고, 보행자들은 카페들 앞을 지나가면서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대도시 중에서 걸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이제 파리뿐이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로부터 활기를 얻는 도시는 단연 파리다."내가 1970년대 말에 가출해서 파리로 왔을 때만 해도 (일부 파리 남자들의 하찮은 색욕과 무례를 무시한다면) 파리는 보행자의 천국이었다. 돈 없고 어렸던 나는 어디든 몇 시간씩 걸어 다녔고 박물관에 잘 들락거렸다. - P341

평일의 걷기는 혼자 걷기 (기껏해야 두어 명이 함께 걷기)이고, 보도 걷기이다. 평일의 큰길은 운송 공간이다. 기념일(역사적, 종교적 사건을 기리는 공휴일, 또는 우리 스스로가 역사를 만드는 특별한 날)의 걷기는 다 함께 걷기다. 그런 날의 큰길은 그날의 의미를 두 발로 다지는 공간이다. 걷기는 기도도될 수 있고 섹스도 될 수 있고 땅과의 교감도 될 수 있고 사색도 될 수 있으니, 그런 날의 걷기는 발언이 된다. 많은 역사가 시민의 발걸음으로 만들어졌다. 자기 도시를 걸어서 헤쳐 나가는 일은 정치적·문화적 신념의육체적 표현이자 비교적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적 표현 형태 중 하나다. 공동의 고지를 향해서 함께 걷는다는 의미에서는 행군이라고 할 수있지만, 행군하는 군인들은 개체성을 포기한 존재들인 반면, 행진하는시민들은 개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 P350

그로부터 몇 년 앞서 일어난 또 다른 반란에서도 광장이 무대가 되었다. ‘5월 광장의 어머니회‘의 무용담은 이 여자들이 경찰서와 정부청사 이곳저곳에서 서로를 알아보면서 시작됐다. 1987년에 정권을 장악한잔인한 군부 요원들에 의해 ‘실종‘당한 자식들을 찾아다녔지만 모두가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다. 마게리트 구츠만 부바르(Marguerite GuzmånBouvard)에 따르면 "숨기기는 군부가 벌인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의특징이었다. [……] 아르헨티나에서는 정상화라는 허울 아래 유괴 사건들이 자행되었다. 항의는 불가능했고, 유괴당한 사람들의 가족조차도끔찍한 실상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112 대부분 교육받은 적이 거의 없고 정치적 경험도 전혀 없는 전업주부였던 여자들은 자기네가 그 비밀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대의를 위해 싸우면서 자기의 안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1977년 4월 31일, 열네 명의 어머니가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의 5월 광장으로 갔다. 1810년에 아르헨티나가 독립을 선언한 곳이었고, 후안 페론이 대중주의 연설들을 한 곳이었다. 나라의 심장 같은 광장이었다. 거기 앉아 있는 - P362

것은 불법 집회나 마찬가지라고 한 경찰이 소리쳤다. 그래서 그들은 광장한복판에 있는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걷기 시작했다.
군부가 최초의 전투에 패하고 5월 광장의 어머니회가 자기들의 정체성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 그곳에서였다고 한 프랑스인은 말하기도했다. 그 광장이 그들에게 이름을 주었고, 금요일마다 광장을 걸은 일이그들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부바르에 따르면 "언젠가부터 그들은 그렇게 걷는 일을 행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목적 없이 한곳을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걸어 나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금요일마다 걸었다. 5월 광장의 어머니회의 수가 점점 불어나면서 경찰은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대형경찰차에서 쏟아져 나온 경찰들이 폭언과 폭행을 퍼부으며 그들을 강제해산시켰다.  - P363

개들에게 공격당하고 곤봉으로 구타당하고 체포당하고심문당하면서도 그들은 또 나와서 또 걸었다. 그렇게 수년간 걸음으로써그들은 기억하면서 걷는다는 이 단순한 행동을 의례로, 나아가 역사로만들었다. 그리고 이 광장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행진하면서 그들은 실종된 아이의 사진을 정치 플래카드처럼 막대기에 붙이거나 목에 걸기도 했고, 아이의 이름과 실종된 날짜를 수놓은 흰 손수건을 머리에 쓰기도 했다. 수놓인 글자가 "살아 돌아와라(Aparición con Vida)"로 바뀐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그들과 함께 걸은 시인 마저리 아고신(Marjorie Agosin)에 따르면 "행진하는 동안에는 아이들과 아주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그들은내게 말했다.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망각이 허용되지 않는 이 광장에서는 기억이 원래의 의미를 회복한다." 국가의 트라우마를 행진으로 표출하는 이 여자들이 수년 동안 가장 공공연한 반체제 세력이었다. 1980년 - P363

대에 이르면 그들은 전국적 규모의 어머니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 1981년, 그들은 첫 번째 인권의 날 기념 연례 24시간 행진을 시작했고, 아울러전국 곳곳의 종교 행렬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 무렵은 5월 광장의 어머니회의 행진이 큰 관심을 얻은 후였다. 5월 광장은 계엄 상황 속에서 중년여성들이 행진을 이어나가는 기이한 현상을 취재하러 온 외신 기자들로북적거렸다" 군사정권이 몰락한 1983년, 5월 광장의 어머니회는 새로선출된 대통령 취임식의 국빈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어머니들은 매주5월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걷는 일을 계속해나갔고, 그 전까지두려움 때문에 동참하지 못했던 수천 명이 어머니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들은 매주 목요일에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걷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 P364

하지만 영원히 영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라앉는다는 것은 혁명의 본질이다. 가라앉는 것은 실패하는 것과는 다르다. 혁명은 낡은 기성 제도들의 무지몽매함을 조명하고 새로운 가능성을계시하는 번갯불이다. 혁명의 빛을 받았던 것을 예전 그대로 바라보기란불가능하다.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모종의 절대적 자유, 혁명이 극에 달했을 때 내가 하는 행동과 내가 품는 희망 속에서만 생겨나는자유를 위해서다. 혁명으로 독재자를 몰아낸 경우도 있지만, 또 다른 독재자가 나타나서 인민을 협박하고 예속하는 다른 방법을 들여오는 경우도 있다. 혁명으로 모두가 투표권을 확보하기도 하고 식량과 정의를 아쉬운 대로 확보하기도 하지만, 그 후에는 다시 자동차들이 도로를 뒤덮고포스터는 자취를 감추고 혁명가들은 주부나 학생이나 청소부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내 마음은 다시 사사로워진다. - P369

1870년에 영국의 채텀에서 열아홉 살의 캐럴라인 와이버그는 선원과 산책을 나갔다. 산책은 이미 오래 전에 구애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산책은 돈이 안 들고, 연인들에게 공원에서든 광장에서든 큰길에서든 샛길에서든 부분적인 사적 공간을 마련해준다.(연인의 오솔길 같은 으슥한 곳은 완전한 사적 공간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행진은 한 집단이 연대를 확인하고조성하는 방법인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나란히 걷는다는 이 섬세한 행위는 두 사람이 감정적, 육체적으로 한 편이 되는 방법인 것 같다. 두 사람이 처음 한 쌍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그렇게 함께 저녁을 보내고 함께 거리를 지날 때, 그렇게 함께 세상을 누빌 때인 것 같다. 함께 걷는 행위,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는 다르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가장 비슷한 그 행위를 통해서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 필요나 대화를 피하게 해주는 다른 일에 열중할 필요도 없이 함께 있음을 한껏 누릴 수 있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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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이런 문학은 이상향의 문학(근본적으로 잘못된 점이 없는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고, 따라서 주인공(건강하고 경제적 기반을 갖췄으며 매인 데가 없는 인물)이 가벼운 모험을 찾아 나설 수 있다. 이상향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각, 동료들의 성격,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주변 환경 정도다. 안타깝게도 이런 장거리 여행 전문 작가가 지루하지 않은 사유를 펼치는 경우는 별로 없고, 그 사람과 한블록을 함께 걷기가 지루하다면 그 사람이 6개월을 걸은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점이 멀리까지 걸어갔다는 사실뿐인 사람에게 걷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청해 듣는 것은 파이 먹기 대회에서 우승을 한 것이 유일한 이력인 사람에게 음식에 대한조언을 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양보다 질이다. 하지만 뮤어는 질도 뛰어나다.  - P208

자신을 둘러싼 자연계의 예리한 관찰자인 한편, 수시로 열광에빠지는 관찰자인 뮤어는 자기가 왜 걷는지에 대해 『멕시코 만까지 걸어서 1000마일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몸은 튼튼한데 돈은 없고, 내가 좋아하는 식물 연구를 실컷 하려면 걷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은 굳이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뮤어는 역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보행자 가운데 한 명이면서도 좀체 보행 그 자체를 주제로 삼지 않는다. 보행 수필과 자연 수필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자연 수필에서는 보행이 나오는 경우가 별로 없고 나온다고해도 기껏해야 배경, 즉 눈앞의 자연과 만나게 해준 수단일 뿐 주제로 다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육체과 영혼이 주변 환경 속으로 사라져 없어지는 것 같다고 할까. 다만 뮤어의 글에서는 뮤어의 육체가 다시 나타나는 때가 있다. 이상향 문학의 주인공이 누리는 행운이 고갈될 때, 돈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굶주릴 때, 그리고 나중에 중병에 걸렸을 때가 그 - P208

것이다. 소로의 보행 기록들은 보행 수필이라기보다는 자연 수필, 곧 자가를 둘러싼 자연과 그 속을 걷는 자기의 경험을 똑같이 과학적으로 관찰하는 종류의 글이다.
뮤어가 그렇게 걸은 지 17년이 지났을 때, 찰스 루미스(Charles F.Lammis)라는 또 한 명의 이십 대 청년이 더 먼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신시내티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미국의 떠돌이(TrampAlons the Continent)』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왜 걸어가? 기차 노선이 없는 것도 아니고, 풀만[Pullman, 안락한 설비가 갖춰진 특별 객차옮긴]도 많은데, 걸어갈 이유가 없잖아? 오하이오에서 캘리포니아까지 걸어가겠다는 나의 말에 정말 많은 친구들이 던진 질문이었다. 걷는 즐거움을 위한여행 중 기록상으로 가장 긴 이야기 앞에서 독자들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걷는 기쁨에 대한생각과 함께 친구들, 독자, 기록에 대한 생각이 있다는 뜻이다. - P209

하지만 그가 내놓는 대답은 좀 다르다. "내가 추구한 것은 시간이나 돈이 아니었다. 내가 추구한 것은 생명이었다. 그것은 건강 지상주의자가 추구하는한심한 생명이 아니라(나는 완벽하게 건강했고, 운동선수로서 체력이 단련돼 있다.), 좀 더 참된 의미의 생명, 좀 더 폭넓고 좋은 의미의 생명, 곧 사회의안타까운 장벽들을 넘어선 곳에서 완벽한 육체와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 느껴지는 그 용솟음치는 기쁨이었다. [………] 나는 미국인이지만 그때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잘 몰랐고, 잘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미국을 잘 모른다." 79쪽을 더 읽고 나면, 그가 잠시 동행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람은 긴 여행을 통틀어 내가 만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진짜 보행자였다. 그런 사람과 함께수 킬로미터를 걸으며 얼어붙은 길을 이야기로 녹이는 일에는 얼얼한 묘 - P209

정원에서 자연으로미가 있었다." 허풍이 심한 루미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터프함이 서부의 총잡이도 이기고 방울뱀도 이기고 눈보라도 이긴다. 심각한 트웨인풍(風) 농담은 불발로 끝날 때가 많다. 반면에 남부 사람들과 땅에 대한커다란 애정, 그리고 자기를 깎아내리는 일화들은 장점에 속한다.(그 당시만 해도 남부에 애정을 표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여하간 이 책이 터프함과 길 찾기 능력과 적응력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인 것은 분명한다. 북미의 장거리 도보 여행은 신사들의 도보 유람과는 완전히 달랐다. 잉글랜드에서하루 종일 걷는다면 술집이나 여관(요즘은 호스텔)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계속 걷는다면 오지 한복판에서 밤을 보낼 가능성이 높고,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 정도는 고속도로와 적대적인 도심 등 잉글랜드와는 스케일이 다르게 꺼림칙한 공간들을 맞닥뜨릴 것이다. - P210

이런 장거리 도보 여행은 세 가지 동기의 결합인 듯하다. 장소의 자연적·사회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기록을 세우는 것. 아주 긴 여행은 일종의 순례로 여겨질 때가 많다. 달리 말하자면, 장거리 여행이 영적 발견이나 실리적 발견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자 일종의 믿음 내지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기능하는 것이다. 또 여행이 흔해지면서 여행 작가들이 더 극단적인 경험, 더 멀리 있는 장소를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런 유형의 글을 보면, 여행한 사람보다는 여행 자체가 이례적이어야 읽어볼 가치가 있다는 전제를 내포한다.(버지니아 울프는 연필을 사러 나갔던 런던의 어느 날 밤에 대한 뛰어난 수필을 썼고, 제임스 조이스는 어느 땅딸막한 광고업자가 더블린의 길거리를 걸어 다닌 이야기로 20세기 최고의 소설을 썼지만 말이다.) 작가에게 장거리 도보 여행은 내러티브의 연속성을 마련하는 쉬운 방법이다. 내가 이 책 앞부분에서 말했듯 한 번 걸어가는 길이 한 편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계속 걸어가는 일은 일관성 있는 - P210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아주 오래 걸어가는 길은 긴 책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요즘에 나오는 책들의 논리인데, 아주 틀린 논리는 아니다. 걸을 때는눈앞에 나타난 것들을 그냥 뛰어넘기보다 자세하게 관찰하게 되고, 많은일을 온몸으로 겪게 되고, 현지 사람들이나 장소들과 접촉하게 되기 때문이다.한편 걷는 일 자체에 온 힘을 쏟아붓는 탓에 주위 환경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도보 여행자도 있다. - P211

 "매일 30킬로미터씩 날마다 몇달을 걸어가다보면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나중에 되돌아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것들이 있다. 일례로 나는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일과 만났던 모든 사람을 세세하고 선명하게 기억했다. 내가 나눴던 모든 대화 엿들었던 모든단어 하나하나가 기억났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유년 시절까지 기억났다. 이런 식으로 나는 과거의 사건들을 정서적인 거리를 두고 돌아볼 수있었다. 마치 이런 일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나는오래전에 죽은, 잊고 있었던 사람을 다시 발견하고 새롭게 알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행복했다. 행복했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그녀는 우리를 철학자의 영역, 걷기를 다루는 수필가의 영역으로데려가며 걷기와 정신의 관계를 알려준다. 그녀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거의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극단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 P213

캠벨이 걷는 이유는 많은 경우 명분 있는 모금을 위해서였다. 그 점에서는 걷기 마라톤 참가자들과 비슷한 데가 있다.(캠벨이 스태프 인건비, 홍보비 등 종종 크게 불어나는 여행경비 마련을 위해서 명분을 물색한 것이라고 말할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하루에 80킬로미터를 걷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또 그렇게 걷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음습한 날씨에 황량한 도로를 날마다 그렇게 걸어서 오스트레일리아 아웃백을 도파한다는 것은 지독한 일이다. 그 일을 캠벨은 해냈다. 95일 만에 5000킬로미터 오스트레일리아 횡단에 성공한 것은 세계 신기록이었다. 그녀의 두 다리는 목표를 향해서 가차 없이 매진하지만, 그렇게 걸은 후에 남는 것은 걸었다는 사실밖에 없다. 아름다운 풍경도, 즐거움도 없고, 사람들과의 만남도 거의 없다. 12만8000킬로미터를 걸어가는 그녀의 목표는 자신을 옥죄는 고통을 두 발로 털어내고 자기 자신을찾는 것이지만, 그녀가 자기의 가치를 설파하는 대목들은 걱정스러우리만치 불투명하다.  - P216

캠벨은 우리에게 그냥 걷기만 하는 순수한 보행이 어떤 것인지를보여준다. 보행을 중요한 행위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불순함이다. 보행이 풍경, 생각, 만남과 불순하게 뒤섞일 때, 걸음을 옮기는 육체는 마음과 세상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그리고 그럴 때 세상이 마음에 스며든다. 이런 책은 역설적으로 보행이라는 주제가 다른 주제로 미끄러지기쉽다는 것, 걷는 것 자체에 집중하면서 다른 것들을 외면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걸어가는 사람의 성격, 걸어가면서 만난 사람들, 걸어갈 때 보이는 자연, 걸어가는 길에 해낸 일 등을 담고 있는 보행에 대한글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글일 때가 많다. 보행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는 글도 많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을 걸어 다니는 이유들의 역사, 또한 구불구불 이어져온 200년의 역사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보행 수필과 여행 문학의 정전들로 구성되어 있다.  - P217

보행 문화가 이렇게 걸어왔다면, 우리 셋은 숲을 벗어나서 시내가흐르는 아름다운 고원들을 가로질렀다. 1968년에 시에라 클럽의 마지막등반 여행 몇 건을 이끈 것이 마이클과 발레리였다. 전설적인 등산가이자괴팍한 ‘산속의 노인‘ 노먼 클라이드(Norman Clyde)가 아직 참여하는시기였지만, 단체 캠핑과 단체 등산의 여파가 시에라 클럽을 곤혹스럽게만들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했다. 등반 여행 전통이 막을 내린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우리 셋이 모노 패스로 가는 길에 본 들꽃은 내가 그지점에서 500킬로미터 미만 거리에 있는 마린 헤드랜즈에서 3월에 보았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 P251

즐거움을 위해 걷는 일은 인간의 가능성을 구성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되었고, 그 가능성의 실현을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 몇몇이 세상을 바꾸는 작업에 나섰다. 그 결과로 세상은 일종의 정원, 요컨대 모두가 출입할수 있는 담장 없는 정원이 되었다. 보행 단체들이 발로 그린 땅은 나라마 - P272

다 다른 방식으로 확장하고 있다. 미국에는 곳곳에 조성된 국립공원들과 함께 광범위한 정치운동으로 만들어진 지형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지좋은 21개국으로 퍼져나가는 수백 개의 숙소와 함께, 각양각색의 환경주의 취향을 가진 50만 명 이상의 야외 애호가들이 만들어냈다. 영국의 지좋은 2만 2500킬로미터의 산길과 함께 지주를 대하는 공격적 태도로 이루어져 있다. 보행이 지금의 세상을 형성해온 세력 중 하나라고 할 때, 보행이라는 세력은 경제 세력에 맞서는 경우가 많았다. - P273

자유롭게 걸을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또 있었다. 이 장에서는 오직 자연과 시골 공간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주로 다루었지만,도심의 공원 조성과 관련해서도 풍요로운 역사가 있다. 예컨대 센트럴 파크는 뉴욕을 떠날 만한 여유가 없는 도심 주민에게 전원의 미덕을 선사한다는 민주적·낭만적 기획이었다. 한편 자유로운 육체는 자유로운 시간이나 자유롭게 걸을 장소에 비해서 미묘한 주제다. 초창기 시에라 클럽에서 샤프롱을 동반하지 않은 여자들이 반바지를 입고 등산을 하거나 솔가지를 모아 침대로 삼았듯, 캘리포니아에서는 육체의 자유를 위해 걸었다기보다 걸음으로써 육체가 자유로워졌다. 의복이 여자를 얕은 호흡, 좁 - P273

은 보폭, 불안정한 균형이라는 예의범절 안에 가두어두는 감옥의 역할을하는 빅토리아 시대였기 때문이다. 또 초창기 독일과 오스트리아 야외활동 단체들의 나체주의에서도 알 수 있듯, 어떤 사람들에게는 산에 가는 일이 에로스를 포함한 자연스러움 전체를 받아들이는 포괄적 기획의일부였다. 나체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옷은 몸이 드러나는 편한 반바지였다. 한편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파란 하늘 아래에서 활보할 권리를 위해 투쟁했는지는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영국 노동자계급의상태를 읽어보기만 해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책은 공장 노동자들의육체에 기형과 질병을 초래할 정도로 처참한 생활환경과 노동환경을 고발한다. 요컨대 자연 속을 걷는 일은 중류층의 육체를 집과 사무실에 갇혀 있는 시대착오적 물건으로 변형시키는 환경, 노동자의 육체는 공장의기계 부품으로 변형시키는 환경에 대한 거부반응이었다.
자연으로 걸어 나간 이 역사가 시작하는 지점에서 루소와 워즈워스라는 두 작가는 사회적 자유와 자연에 대한 사랑을 연결시켰다. 이후의 보행 문화는 보이스카우트, 야외장비 산업 등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지만, 다행히도 루소와 워즈워스는 거기까지 내다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보행 단체들은 보행의 이상이 자연 속을 막힘없이 자유롭게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 이상을 심어주었다. - P274

오랫동안 뉴멕시코의 시골에서 살던 나에게는 샌프란시스코가 낯설게느껴졌다. 그해 봄의 풍요로움까지도 도회적으로 느껴졌다. 화려한 도시불빛의 유혹을 노래하는 모든 컨트리 음악을 그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있었다. 5월의 향기로운 낮과 밤을 여기저기 걸어 다니면서 보냈다. 산책이 수많은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문 밖을 나서기만 하면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전율하기도 했다. 모든건물 입구, 모든 가게 입구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출구인 듯했다. 다양한인생의 가능성이 압축돼 있는 곳, 다양함이 다채로움을 만들어내는 곳이었다. 일본의 시, 멕시코의 역사, 러시아의 소설이 아무렇게나 꽂힐 수있는 책꽂이처럼, 내가 사는 도시의 건물들에는 선(禪) 연구소, 오순절교회, 문신 시술소, 채소 가게, 부리토 가게, 극장, 딤섬 가게가 들어차 있었다. 더없이 평범한 것들이 내게는 신기해 보였고, 길거리의 사람들은나의 삶과 아주 비슷하기도 하고 전혀 다르기도 한 삶의 단면들을 무수히 엿보게 해주었다. - P277

면서 바구니를 만들 만한 줄기가 있는지 살펴보듯이, 도시 보행자는 늦게까지 문을 여는 식료품 가게나 구두 수선 가게 같은 곳을 기억해둘 수도 있고, 먼 길을 돌아서 우체국에 들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시골 보행자는 흔히 전체 풍경, 전체적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되고 그때의 풍경은완만하게 변화하는 연속체로 펼쳐진다. 예컨대 멀리서 산을 바라보면서걷다가 그 산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나, 숲에서 나무가 듬성듬성해지다가 어느새 초원이 될 때의 풍경처럼 말이다. 반면 도시 보행자는 특정한 것들(기회들, 사람들, 필요한 물건들을 찾아다니게 되고 그때의 풍경은 급한 변화 속에 펼쳐진다. 물론 도시가 원시생활과 더 비슷하다는말에는 부정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인간이 아닌 포식자의 개체 수가 북아메리카에서는 급격히 감소했고 유럽에서는 아예 멸종했지만, 그런 지역에서도 도시 보행자는 인간 포식자가 나타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이 계속 (최소한 특정 시간과 특정 장소에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P282

고향으로 돌아와서 처음 몇 달 동안 모든 것에 너무 매료된 나는 산책 일기를 써나갔다. 그 멋진 여름의 어느 날, 나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일곱 시간 동안 거의 꼬박 책상 앞에 앉아 있었음을 갑자기 깨달음.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등은 굽고. 필모어 스트리트 위쪽 클레이 극장에 갈까 하고 집을 나옴. 가는 길에 브로더릭 스트리트에서 처음 보는 길 하나를 발견함. 임대주택 단지 근처인데, 예쁜 단층집들이 옛날 빅토리아 시대풍이었음. 너무 잘 아는 장소에서 모르는 장소가 튀어나올 때 언제나그렇듯 기분이 좋았음. 「각자의 고양이를 찾아서(Chacun cherche son chat)」라는 영화를 봄. 바스티유 광장 동네에서 혼자 사는 젊은 파리지엔느가사라진 고양이를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웃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 P282

이야기. 평범한 사건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관계들, 건물의 옥상들, 불분명하게 발음되는 속어들로 가득 극장을 나오니 들뜬 기분. 검은밤, 진주색 안개. 빠른 걸음으로 돌아오는 길. 일단 캘리포니아 스트리트를 따라 걸으면서 한 쌍의 남녀를 지나감. 여자는 평범, 남자는 고급 갈색양복 차림에 오다리. 한동안 다리에 부목을 댔었나. 그렇게 버스를 그냥보냄. 디비자데로 스트리트에서 또 그 버스를 그냥 보냄. 어느 골동품 가게 진열창 앞에서 걸음을 늦추고 커다란 꽃병을 구경함. 꽃병은 크림색,
꽃병에 그려진 중국 현자들은 파란색. 길을 좀 더 내려오다 보니 어느 가게 앞에서 머리가 벗겨진 중국 남자가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진열장 높이로 안아 올림. 가게 안에 있는 여자가 진열창 너머로 아이와 장난침, 내가 너무 웃어 보였는지 그 사람들이 당황함. 밤 산책의 인공적 조명과 자연적 어둠이 낮의 연속체를 연극 속 활인화, 비네트, 세트피스로 탈바꿈시키는 방식들. 가로등을 하나하나 지나가는 나의 그림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할 때의 어두운 설렘. 길을 건너갈 때 신호등이 바뀌길래 차를 피하느라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달리다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단숨에 몇블록을 더 뛰어감. 더워지는 것이 단점. - P283

디비자데로 스트리트를 쭉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 문 연 곳들을주시(주류판매점, 담배 가게), 내가 사는 스트리트와 만남. 교차로에 서 있는데 젊은 흑인 남자(와치캡, 검은 옷)가 나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내려오길래 만약을 위해서 주위를 둘러봄. 무슨 편견 때문이 아니라 그가 빅토리아 여왕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나한테 질주해왔다면 신경이 쓰였을것 같음. 그는 내가 주춤주춤하는 것을 보더니 더없이 상냥한 청년의 목소리로 ‘쫓아온 거 아니고요, 약속에 늦어서.‘라고 말하면서 달려가고,
나는 ‘조심해서 가요.‘라고 말함. 그가 내가 가는 길로 앞서 가고 나도 생 - P283

각을 정리할 여유가 생겨서, ‘의심하는 사람같이 보였으면 미안한데, 너무 빨리 달려와서.‘라고 말함. 그가 웃고 나도 웃음. 그러고 나니까 최근에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마주쳤던 일들이 다 떠오름. 그냥 인사해오는 것을 보고 말썽을 일으키려는 줄로 오해할 뻔 했던 일들. 이제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게 된 데 뿌듯함을 느낌. 그러면서 고개를 들었는데 어느 건물 꼭대기 층 창문에 붙어 있는 만 레이 ((Man Ray)의 동정을살필 시간 (A Pheure de Pobservatoire: les Amoureux)」(해 지는 하늘에 길쭉한 붉은색 입술이 떠 있는 그림)의 포스터가 보임. 어젯밤인가 그젯밤에 시내 어느 다른 건물 창문에서 본 그림과 똑같음. 오늘밤에 본 그림이 더 큼. 오늘밤이 더 활기참, 「동정을 살필 시간을 두 번 보다니 신기함. 집에 오는 데 20분도 안걸림." - P284

길거리는 건물이 없는 빈 공간이다. 집 한 채는 빈 공간이라는 바다에 떠있는 섬이다. 도시보다 앞서 존재한 소읍은 그저 그 바다에 떠 있는 군도였다. 그러나 건물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군도는 육지가 되었고, 바다였던 빈 공간은 넓은 땅 사이로 흐르는 강, 운하, 개울이 되었다. 예전 사람들이 시골 땅이라는 바다를 아무렇게나 지나다녔다면, 이제 사람들은거리를 따라 지나다니게 되었다. 물길의 폭이 줄어들면 물살의 강도와속도가 늘어나듯, 빈 공간이었던 곳이 거리가 되면 보행자들의 흐름이방향과 세기를 갖게 된다. 대도시에서는 장소뿐 아니라 공간도 설계 대상이다. 실내에서 먹거나 자거나 신발을 만들거나 사랑을 하거나 음악을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걷거나 주변을 둘러보거나 공공장소에서 시간을보내는 것이 주요한 설계 목적이라는 뜻이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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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의 과학자들은자신의 조상이 아프리카인이라는 것도 싫었고, 뇌는 작으면서 두 다리로 서서 걸어 다닌 때가 있다는 증거, 즉 우리가 머리가 좋아진 게 진화의초기가 아니라 후기였으리라는 증거를 받아들이기도 싫었던 것이다. 인간의 머리뼈 하단에는 척수와 뇌를 연결하는 큰구멍 (foramen magnum)이있는데, 타웅 아이는 그 큰구멍이 원숭이처럼 뒤쪽에 있지 않고 지금 우리처럼 머리뼈 중간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타웅 아이가 직립보행을 했으리라는 증거, 곧 머리가 척추에 매달려 있지 않고 척추 위에 세워져 있었으리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신 유인원의 머리뼈가대개 그렇듯이, 타운 아이의 머리뼈도 현대인이 보기에는 균형이 안 맞는 건물 같다. 예를 들면 눈썹과 턱의 돌출부에 해당하는 포치는 엄청나게 튀어나와 있고, 오늘날 뇌가 커진 공간에 해당하는 다락방은 아예 없다. 대부분의 초기 진화론자들은 보행, 생각, 창조와 같은 우리의 인간적 속성들이 같은 시기에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인간성의 한 부분만 갖고 있는 생물체를 상상하는 일이 어렵거나 불쾌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 P65

팻의 오두막집을 떠나는 날 아침, 나는 국립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출발 지점은 팻이 암벽등반을 가르치고 있는 곳이었고, 보행 속도는 더위나 갈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갈 때 보이는 풍경과 올 때 보이는 풍경이 전혀 다르니까 가는 길에 수시로 뒤돌아보면서 오는 길에 보일 풍경을 미리 봐놓아야 한다. 나에게 이 말을 해준 사람은 팻이다. 팻에게 이말을 해준 사람은 팻의 아버지다. 암벽들이 돌섬이나 돌무더기처럼 촘촘하게 뭉텅이져 있는 그 헷갈리는 풍경 속에서는 과연 좋은 충고다. 각각의 암벽이 고층 건물만 하고, 실제로 고층 건물처럼 시야를 가로막는다. 다른 사막에서라면 길을 찾을 때 멀리 보이는 풍경에 의지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때그때 지형지물을 알아놓아야 한다. 아침 해를 왼쪽으로 두고 남쪽으로 향한 나는 큰길을 가로지르게 될 샛길로 들어섰다. 이샛길 한복판에서는 풀이 자라고 있었다. 작은 도마뱀들이 나를 피해 덤불로 푸드덕 뛰어들자 응달 곳곳에서 신록의 풀들이 바스락거렸다. 두세 - P80

주 전에 폭우가 쏟아진 후로 더욱 뾰족해진 풀잎들이었다. 남서쪽으로휘어지면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큰길로 이어질 샛길을 벗어나 길없는 거대한 사막을 느릿느릿 가로질렀다. 참으로 오랜만에 구속을 벗어난 느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을 맛보았다. 사막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걷다가 사유지에 길이 막힌 나는 둥그렇게 돌아가는 길로 들어섰다. 왔던 길은 아니지만 팻이 있던 암벽 뭉텅이로 이어지는 길일 것 같았다. 그러다가 길을 잃게 되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지평선에서산맥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굽잇길이었다. 어느새 아까 벗어났던 그샛길이 나타났다. 지난 며칠 동안 그 길로 지나간 이들의 희미한 발자국위로 내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나는 한 시간 전의 내가 지나갔던 흔적을 거꾸로 되짚어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다. - P81

보행의 시작에 아프리카, 진화, 필요가 있었다면, 보행의 끝에는 온갖 것이 있다. 보행이 보통 무언가를 찾으러 떠나는 행위라고 할 때, 순례라는보행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찾으러 떠나는 행위다. 우리는 순례중이었다. 잣나무와 노간주나무 사이로 이어진 붉은 흙길에서는 석영 자갈과 운모 조각, 매미들이 17년의 시간을 보낼 땅속으로 들어가며 벗어놓은 허물이 한데 섞여 반짝거리고 있었다. 돌과 매미 허물로 포장된 이상한 길, 뉴멕시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호화로우면서 누추한 길이었다.
그날은 ‘성(聖)금요일‘이었고, 우리는 치마요로 가는 길이었다. 그날의 치마요행(行) 크로스컨트리 모임의 여섯 명 중에서 나는 최연소 참가자이자유일한 외부인 참자가였다. 모임은 며칠 전, 나를 포함해서 몇 사람이 그레그에게 동행을 부탁하면서 결성되었다. 그중 두 명은 그레그의 암 생존자 모임 사람들 (측량기사와 간호사)였고, 한 명은 내 친구 메리델이 데려온 이웃사람 데이비드(목수)였다. - P82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이 점을 포착하고 있다. 마리아 공주는 자기 집 앞으로 지나가는 무수한 러시아 순례자들에게 먹을 것을내주면서 모종의 열망을 느낀다. "그녀는 순례자들에게 이야기를 청해들을 때가 많았다. 그들의 소박한 말투, 그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하지만 그녀의 귀에는 깊은 의미로 가득한 것처럼 들리는 그 말투에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했던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길을 나설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 이미 그녀는 누더기를 걸친 차림으로 보따리와 지팡이를 들고 흙먼지 자욱한 길을 걸어가는 자기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단 한 곳의 목적지를 향해 명료하고 검소하고 강렬하게 나아가는 고상한 은둔자의 삶을 상상한다. 순례자의 발걸음은 단순 명료함의 표현이자 목적의식의 표현이다.  - P91

낸시 프레이(NancyFrey)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의 긴 순례길에 대해 이렇게말한다. "순례자가 걷기 시작하는 순간 세계를 느끼는 방식 몇 가지가 한꺼번에 변하는데, 그 변화는 여정 내내 이어진다. 시간 감각이 바뀌고, 오감이 예민해지고, 자기 몸과 자기 몸을 둘러싼 자연경관에 대한 새로운인식이 생긴다. [......] 그것을 한 독일 청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걷는 경험 속에서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사유가 된다. 자신으로부터도피하기란 불가능하다." 순례길에 나선다는 것은 가족 관계, 애착 관계, 지위, 의무와 같은자신의 복잡한 세속적 자리를 뒤로하고 일개 순례자로서 걸어간다는 뜻이다. 순례자들 사이에는 서열이 없다. 은총과 헌신의 서열이 있을 뿐이다. 터너 부부는 순례를 경계선 상태(liminality)라 말한다.  - P91

나는 몇 달 째 냉장고에 맷 헤론(Matt Heron)이 찍은 1965년 셀마 몽고메리 행진 사진을 붙여놓고 있다. 행진의 감동을 잘 보여주는 이 사진에서 행렬은 서너 명씩 한 줄 한 줄 안정적으로 이어지며 사진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여나간다. 사진 속의 사람들이 구름 낀 하늘 쪽으로높이 솟아 있는 것을 보면, 땅에 엎드려서 찍은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사진속 사람들은 자신이 변화를 향해 걸어 나가고 있음을, 그러면서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음을 알고 있는 듯하다. 크게 내딛는 발걸음, 높이들어 올린 손, 자신 있는 자세는 역사와 마주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있다. 그들은 이 행진에서 역사를 견디는 대신 역사를 만들어내는방법을, 자신들의 힘을 가늠해보고 자유를 시험해보는 방법을 발견했다. 마틴 루서 킹의 우렁차고 호매한 연설에서 메아리치는 운명의 감각과 사명감이 사진의 움직임에 표현되어 있다. - P104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먼저 간 사람의 해석을받아들인다는 것, 학자나 탐정이나 순례자처럼 먼저 간 사람의 뒤를 밟는다는 것이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중요한 일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이다. 같은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같은 생각을 하는 방법, 같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따라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행동을 흉내내는 연기가 아니라, 그 누군가의 영혼을 닮기 위한 노력이다. 순례가 다른 모든 보행과 다른 점은 이렇게 반복과 모방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신을 닮기란 불가능하지만, 신이 걸어간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일은 가능하다. 예수가 인류의 실족(Fall)을 대속하는 과정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 발을 헛디디고 진땀을 흘리고 상처입고 세 번 넘어지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14처에서다. 하지만 이 14처가 어느 성당에서나, 아니, 아무 데서나 볼 수있는 일련의 그림이 되면서, 신도들이 따라가는 것은 이제 수난의 장소가 아니라 수난 이야기가 되었다. 성당에 그려진 14처는 신도들이 예루살렘으로 걸어 들어가는 통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속으로들어가는 통로이다. - P117

이렇듯 한 편의 이야기와 한 번의 여행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다. 이야기가 있는 글을 쓰는 일이 걷는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도 그때문일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상상의 영토에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 혹은 익숙한 길 위에서 새로운 면들을 가리켜 보이는 일이다. 글을 읽는 일은 저자라는 가이드를 따라가는 일이다. 우리가 그의 말에 항상 동의하거나 그를 항상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이드가 우리를 어딘가로데려다주리라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내가 쓰는 모든 문장들이 한 줄로멀리까지 이어지면서 글이 곧 길이고 독서가 곧 여행임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실제로 계산을 해본 적도 있었는데, 실이 둘둘 말려 있는 실타래처럼 글이 빽빽이 차 있는 책을 한 줄로 쭉 풀면, 내가 쓴 책 한권의 길이는 6킬로미터가 넘는다). 펼치면서 읽는 중국 족자에는 이런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을까. 풍경과 이야기 사이의 융합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는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노랫길(songline)이다. 노래는 깊은 사막 한복판에서 길을 찾는 내비게이션이고, 사막 속 풍경은 노래 속 이야기를 떠 - P122

올리는 기억 증진 장치다. 한마디로, 노래는 지도요 풍경은 이야기다.
이야기가 여행이고 여행이 이야기인 것은 그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상징적 길을 비롯해서 모든 길이 이런 울림을 갖는 이유는 우리가인생 그 자체를 여행으로 그려보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어떤 것인지를 그려보기가 어려운 것처럼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영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려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을 공간상에 존재하는 물리적 대상에 비유하게 된다. 그렇게 대상과 물리적, 공간적 관계를 맺게 되면, 대상을 향해 나아가거나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시간을 공간으로 보게 되면,인생이라는 시간도 여행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살면서 실제로 여행을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 같은 것은 상관없다. 보행과 여행은 우리가 하는생각과 우리가 쓰는 언어에서 너무나 중요한 비유로 자리 잡은 탓에 이제는 그것이 비유라는 것을 깨닫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 P123

우리에게 할당된 시간, 혹은 삶 그 자체를 여행에 비유할 때 가장자주 떠오르는 이미지는 걷는 여행, 혹은 개인사의 풍경을 가로지르는순례자의 역정이다. 나 자신을 상상할 때 자주 떠오르는 이미지도 내가걸어가는 모습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이승을 걷는 것(walk the earth)‘이고, 직업은 ‘이승의 행보(walk of life)‘이고, 전문가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walking encyclopedia)‘이다. 구약성서는 은총을 받은 상태를 "하느님과함께 걸었다(he walked with God)"고 묘사한다. 걷는 사람, 즉 한곳에 머물 - P124

기보다 혼자 한 발 한발 앞으로 나가는 사람의 이미지는, 초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유인원이든 시골길을 어기적어기적 걸어 내려오는 사뮈엘베케트(Samuel Beckett)의 등장인물이든 인간의 의미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걷는다는 비유가 비유이기를 그칠 때는 우리가 실제로 걸을 때다. 삶이 여행이라면, 우리가 실제로 여행할 때 우리 삶은 실제의 삶(도착이 가능한 목표 지점, 확인이 가능한 진행 과정, 이해가 가능한 평가 결과가 수반되는 삶이된다. 비유가 행동과 하나가 된다고 할까. 미로를 걸으면서, 순례에 나서면서, 산을 오르면서, 어떤 분명하고 바람직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할당된 시간을 글자 그대로의 길(오감을 통해서 영적차원에 접근하는 길)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걸어가는 것, 여행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의 중요한 비유라면, 모든 걷기와 모든 여행을 통해(그중에서도특히 십자가의 길과 미로를 통해) 우리는 모종의 상징 공간으로 걸어 들어갈수 있다. - P125

두 사람이 북부 잉글랜드의 페나인 산맥을 걸어서 넘었다는 것, 그리고그 전에도, 그 후로도 또 다른 여러 곳을 걸었다는 것은 참 특별한 일이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특별한 일이었는지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걸어서 여행한 사람은 전에도 있었다. 더 먼 길도 있었고 더 험한 길도있었다. 영국 시골 지역에서 가장 험한 풍경들(산맥, 벼랑, 황야, 폭풍, 바다, 그리고 폭포)이 경탄의 대상이 된 것은 이 시인 남매가 태어나기 거의 30년전부터였다. 프랑스와 스위스에서도 등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중이었다. 누군가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정인 몽블랑 정상에 처음 오른 것은 19세기가 시작되기 14년 전이었다. 많은 평자들은 워즈워스와 그의동행들이 보행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그 무엇으로 만들었고, 이로써수많은 일들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제1세대 낭만주의자들이 보행 그 자체를 위한 보행, 즉 자연 속을 걷는 즐거움의 계보를 만들었다는것, 이로써 문화적 행위로서의 보행과 예술적 경험으로서의 보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 P137

보행의 역사는 이렇듯 보행의 공간을 만든 또 다른 역사 속에 감추어져 있다. 18세기 내내 보행의 공간은 점점 더 넓어졌고, 아울러 보행의 문화적 의미는 점점 더 커졌다. 또보행의 역사는 취향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 역사를 반영하기도 한다. 격식에 맞는 것, 양식화된 것을 선호하는취향이 격식 없는 것, 자연 그대로의 것을 선호하는 취향으로 바뀐 것이다. 그 변화의 기원은 나태한 귀족계급과 그들의 건축에 일어난 변화라는 하찮은 역사에 불과하지만, 그 변화의 결과로 그 시대에 가장 전복적이면서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장소들과 관행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렇듯 보행 취향과 자연 취향이 트로이의 목마 같은 역할을 담당하면서, 많은 의미 있는 공간들이 민주화되기에 이르렀고, 20세기에는 귀족영지들을 에워싸고 있던 장벽들이 그야말로 허물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P143

도보 여행 내내 냉대받는 기분을 느꼈던 독일인 여행자 모리츠는 사실노상에서 무수한 보행자들을 만났다. 그들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기는오늘날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그리니치에서 런던까지 걸어가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모리츠는 그들에 대해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런던의 세인트 제임시즈 공원에서 걷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겼다. "이 공원의 별볼일 없음을크게 상쇄해주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다.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날씨가 좋으면 사람들이 모여든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여름의 가장 멋진보행로라고 해도 사람들이 이 정도로 모여들지는 않는다. 이렇게 모여든사람들은 대부분 잘 차려입었고 잘생겼다. 그런 사람들과 자유롭게 한데 섞이는 짜릿한 기쁨을 나는 오늘 저녁 처음으로 경험했다."사실 이글에서 모리츠는 영국이 독일에 비해 보행, 특히 공공장소에서의 보행을더 품위 있는 취미로 간주한다는 걸 말하고 있다. - P155

『오만과 편견』의 어디를 보나 걷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주인공은걸을 수 없는 상황만 아니면 온갖 곳에서 걷는다. 이 책에서는 결정적 만남이 성사되거나 결정적 대화가 오가는 순간이 두 등장인물이 함께 걷는 동안일 때가 많다. 이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 점잖은 사람들(오스틴의 등장인물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걷는 일은 일상의 근간이었다. 잉글랜드에서 18세기 내내, 그리고 19세기 이후까지 보행은 특히 여자들에게 중요한 일상이었다. 도시 워즈워스가 1792년에 쓴 편지에 따르면
"그들은 시골 숙녀이기에, 보행이라는 시골 숙녀의 취미생활을 즐기는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보행은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자들이 쓴 글을 보면, 정원을 설계하고 감상하는 내용이 많지만, 실제로정원을 걷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글은 대개 여자들이 쓴 편지나 소설이다. 아마도 여성들이 일상을 더 세밀하게 다루기 때문이기도 하고, 잉글랜드 여자들(특히 귀부인들)이 걷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기때문이기도 하다. 『오만과 편견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이 자신의 - P160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시간 사이사이에 한 일은 다량의 독서, 편지 쓰기, 약간의 바느질, 그런대로 들어줄 만한 피아노 연주, 그리고 걷기였다.
소설이 시작되고 얼마 후, 제인 베넷이 말을 타고 구혼자 빙리 씨의저택이 있는 네더필드로 가면서 감기에 걸린다. 동생 엘리자베스는 언니를 간호하기 위해 네더필드까지 걸어간다. 걸어가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였기도 있지만(엘리자베스는 "말 타는 여자"가 아니고, 마차를 타고 가려면 두마리의 말이 필요한데 남은 말은 한 마리뿐이다.) 용감한 활기가 매력적인 여주인공답게 걷기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걸어가면 되잖아요.
가야 한다면 멀든 가깝든 상관없어요. 겨우 3마일인 걸요." 그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그녀의 비인습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첫 번째 신호다. 그녀는 그 거리를 걸어감으로써 자기 계급 여자들이 지켜야 할 예법을 위반한다. - P161

워즈워스라는 거대한 존재에 대해서 대부분의 다음 세대 시인들은 존경심과 적대감이 뒤섞인 감정을 가졌다. 그것은 토머스 드퀸시(Thomas DeQuincey)도 마찬가지였다. "두 다리에 일가견이 있는 모든 여성들이 그의두 다리에 신랄한 비난을 가했다. [……. 심하게 흉하게 생긴 것은 아닐뿐더러 평균치 인간의 다리에 비해서 많은 일을 해낸 다리였다. 믿을 만한자료를 토대로 계산해본 결과 워즈워스는 바로 이 다리로 28만2000~29만 킬로미터를 답파했다. 포도주나 독주 같은 것으로 혈기를 얻는 다른사람들과 달리 워즈워스는 이렇게 몸을 움직이면서 혈기를 얻었다. 워즈워스 자신이 구름 한점 없이 행복한 인생을 영위해온 것도, 우리 독자들이 워즈워스의 글 중에서도 아주 탁월한 글들을 읽을 수 있게 된 것도그 덕분이다."38 사람들은 워즈워스 이전에도, 이후에도 걸었다. 다른 낭만주의 시인들 중에서도 걸어서 여행한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워즈워스만큼 걷는 일을 인생과 예술의 중심에 놓은 이는 그 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 P171

그의 보행을 이해하려면 쾌적한 장소를 잠시 거닌다는 뜻의 ‘산책‘개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동시에 낭만주의적 보행을 장거리 도보 여행이라고 규정하는 현대 저작물들의 또 다른 정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에게 보행은 여행하는 방법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법이었다. 스물한 살에 걸어서 3000킬로미터를 여행했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50년 동안은 시를 쓰기 위해 작은 정원 테라스를 왔다 갔다 했다. 그에게는 둘 다중요한 보행이었다. 파리와 런던의 길거리를 쏘다니고 산을 올라가는 것도, 여동생 혹은 친구들과 함께 거니는 것도 모두 중요한 보행이었다. 이모든 보행이 그의 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앞서 보행을 사유의 과정으로 창안한 철학적 작가들을 다룬 장이나, 뒤에서 대도시 보행의 역사를다룰 장에서 그의 보행을 함께 다룰 수도 있었지만, 워즈워스 자신은 보행을 전적으로 새롭고 강력한 방식으로 자연, 시, 가난, 부랑과 연결 지었다. 도시보다 시골에 훨씬 가치를 두었음은 물론이다. - P172

 이 시가 그 모든 이탈과 우회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시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걷는 사람의 이미지가 되풀이되는 덕이다. 이 시의 독자는 워즈워스를 천로역정』의 크리스천 같기도 하고 「신곡」의 단테 같기도 한 형상, 다시 말해 두 발로 걸어서 온 세상을 여행하는 작은 형상으로 그려보게 된다. 단, 시에 나오는세상은 호수들, 춤들, 꿈들, 책들, 우정들, 그리고 많고 많은 장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서곡은 한 시인이 성장하기까지 어떤 곳을 거쳐 갔는가(이 도시는 어떤 역할을 했나, 저 산은 어떤 역할을 했나.)를 보여주는 지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이 시에서는 장소가 사람보다 중요하게 등장한다. 드퀸시가 워즈워스의 두 다리에 존경 어린 독설을 던졌듯, 수필가 월리엄 해즐릿(William Hazlitt)도 비슷한 어조의 재담을 던졌다. "그의 눈에보인 것은 우주, 그리고 자기 자신뿐이었다. - P174

워즈워스는 이렇게 길을 걷고, 이런 사람들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문체를 찾아나갔다. 그가 아주 초기에 쓴 시들은 고고하고 애매모호하면서 관습적 이미지들이 가득하다는 점에서 톰슨의 『사계절 양식인 데 비해, 그 후 혁명적 열정, 가난한 사람들과의 공감적 동일시가 생겨나면서 그런 이류 풍경 시인의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도러시의 글이 존슨 박사(Samuel Johnson)나 제인 오스틴 같은 심오한 아포리즘을 벗어나 묘사의 생생함과 현실성을 얻으면서, 비슷하게 변한 것도 1790년대 10년동안이었다.) 소재와 문체 둘 다 변화했다. 워즈워스가 서정 가요집 (LyricalBelds)』 (워즈워스와 콜리지가 1789년에 함께 낸 획기적 시집)을 되돌아보면서 쓴서문에 따르면, "요컨대 이 시들을 쓸 때 중요시했던 원칙은 서민 생활에서 펼쳐지는 사건이나 장면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 서민들이 실제로 쓰는 언어를 선별해 사건은 최대한 철저히 서술하고 장면은 최대한 철저히묘사해야 한다는 것, - P181

그러면서도 그 서술과 묘사에 상상의 빛깔을 가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미천하고 조야한 이들의 삶을 주로 택했던이유는 그런 상태에 있을 때라야 근원적 희로애락이 더 나은 토양에서[......] 더 소박하고 더 강력한 언어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그는 풍경에 대해서 말할 때 거창하게 일반화하거나 고전을 인유하는 대신 구체적으로 묘사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할 때도 그들이 우화 속의 등장인물인 양 미덕과 연민을 설교하는 대신 그들의 현실을 그려 보이고자 했다. 그가 더 소박한 언어를 택한 것은 정치적 행동이었고, 바로이 정치적 행동이 스펙터클한 예술적 결실로 이어졌다. - P181

워즈워스에게 보행은 시의 주제이기도 했지만, 시를 쓰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 방식이란 주로 걸으면서 소리내어 이야기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같이 걷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이야기했고, 혼자 걸을 때는혼잣말을 했다. 그것 때문에 종종 우스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그래스미어에 사는 사람들이 그를 좀 이상하게 보기도 했다. "딴 사람들한테는말을 많이 안 했는데 혼자서 그렇게 말을 많이 했더라고. 입모양을 보면알지. "머리는 앞으로 내밀고 두 손은 뒤로 하는 거야. 그 자세로 슬슬걷는 거야. 걷다가 걷다가 또 걷더니 딱 서는 거야. 그러고는 또 걷다가 걷다가 길 끝까지 쭉 걸어가는 거야. 그러더니 어디 앉아서 종이를 꺼내 뭘쓰는 거야."『서곡』에서 그는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걸어갈 때 모르는 사람이 다가오면 개가 그에게 입을 다물라는신호를 보내서 그가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는 것을 막아준다는 이야기이다.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였던 워즈워스는 예전에 보았던 장면의 시각적 디테일과 감정적 생생함을 그릴 수 있었고, 자기가 존경하는 시인들의긴 시구를 인용하거나, 걸으면서 머릿속으로 쓴 시를 나중에 글로 옮길수 있었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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