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대의 과학자들은자신의 조상이 아프리카인이라는 것도 싫었고, 뇌는 작으면서 두 다리로 서서 걸어 다닌 때가 있다는 증거, 즉 우리가 머리가 좋아진 게 진화의초기가 아니라 후기였으리라는 증거를 받아들이기도 싫었던 것이다. 인간의 머리뼈 하단에는 척수와 뇌를 연결하는 큰구멍 (foramen magnum)이있는데, 타웅 아이는 그 큰구멍이 원숭이처럼 뒤쪽에 있지 않고 지금 우리처럼 머리뼈 중간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타웅 아이가 직립보행을 했으리라는 증거, 곧 머리가 척추에 매달려 있지 않고 척추 위에 세워져 있었으리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신 유인원의 머리뼈가대개 그렇듯이, 타운 아이의 머리뼈도 현대인이 보기에는 균형이 안 맞는 건물 같다. 예를 들면 눈썹과 턱의 돌출부에 해당하는 포치는 엄청나게 튀어나와 있고, 오늘날 뇌가 커진 공간에 해당하는 다락방은 아예 없다. 대부분의 초기 진화론자들은 보행, 생각, 창조와 같은 우리의 인간적 속성들이 같은 시기에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인간성의 한 부분만 갖고 있는 생물체를 상상하는 일이 어렵거나 불쾌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 P65
팻의 오두막집을 떠나는 날 아침, 나는 국립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출발 지점은 팻이 암벽등반을 가르치고 있는 곳이었고, 보행 속도는 더위나 갈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갈 때 보이는 풍경과 올 때 보이는 풍경이 전혀 다르니까 가는 길에 수시로 뒤돌아보면서 오는 길에 보일 풍경을 미리 봐놓아야 한다. 나에게 이 말을 해준 사람은 팻이다. 팻에게 이말을 해준 사람은 팻의 아버지다. 암벽들이 돌섬이나 돌무더기처럼 촘촘하게 뭉텅이져 있는 그 헷갈리는 풍경 속에서는 과연 좋은 충고다. 각각의 암벽이 고층 건물만 하고, 실제로 고층 건물처럼 시야를 가로막는다. 다른 사막에서라면 길을 찾을 때 멀리 보이는 풍경에 의지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때그때 지형지물을 알아놓아야 한다. 아침 해를 왼쪽으로 두고 남쪽으로 향한 나는 큰길을 가로지르게 될 샛길로 들어섰다. 이샛길 한복판에서는 풀이 자라고 있었다. 작은 도마뱀들이 나를 피해 덤불로 푸드덕 뛰어들자 응달 곳곳에서 신록의 풀들이 바스락거렸다. 두세 - P80
주 전에 폭우가 쏟아진 후로 더욱 뾰족해진 풀잎들이었다. 남서쪽으로휘어지면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큰길로 이어질 샛길을 벗어나 길없는 거대한 사막을 느릿느릿 가로질렀다. 참으로 오랜만에 구속을 벗어난 느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을 맛보았다. 사막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걷다가 사유지에 길이 막힌 나는 둥그렇게 돌아가는 길로 들어섰다. 왔던 길은 아니지만 팻이 있던 암벽 뭉텅이로 이어지는 길일 것 같았다. 그러다가 길을 잃게 되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지평선에서산맥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굽잇길이었다. 어느새 아까 벗어났던 그샛길이 나타났다. 지난 며칠 동안 그 길로 지나간 이들의 희미한 발자국위로 내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나는 한 시간 전의 내가 지나갔던 흔적을 거꾸로 되짚어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다. - P81
보행의 시작에 아프리카, 진화, 필요가 있었다면, 보행의 끝에는 온갖 것이 있다. 보행이 보통 무언가를 찾으러 떠나는 행위라고 할 때, 순례라는보행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찾으러 떠나는 행위다. 우리는 순례중이었다. 잣나무와 노간주나무 사이로 이어진 붉은 흙길에서는 석영 자갈과 운모 조각, 매미들이 17년의 시간을 보낼 땅속으로 들어가며 벗어놓은 허물이 한데 섞여 반짝거리고 있었다. 돌과 매미 허물로 포장된 이상한 길, 뉴멕시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호화로우면서 누추한 길이었다. 그날은 ‘성(聖)금요일‘이었고, 우리는 치마요로 가는 길이었다. 그날의 치마요행(行) 크로스컨트리 모임의 여섯 명 중에서 나는 최연소 참가자이자유일한 외부인 참자가였다. 모임은 며칠 전, 나를 포함해서 몇 사람이 그레그에게 동행을 부탁하면서 결성되었다. 그중 두 명은 그레그의 암 생존자 모임 사람들 (측량기사와 간호사)였고, 한 명은 내 친구 메리델이 데려온 이웃사람 데이비드(목수)였다. - P82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이 점을 포착하고 있다. 마리아 공주는 자기 집 앞으로 지나가는 무수한 러시아 순례자들에게 먹을 것을내주면서 모종의 열망을 느낀다. "그녀는 순례자들에게 이야기를 청해들을 때가 많았다. 그들의 소박한 말투, 그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하지만 그녀의 귀에는 깊은 의미로 가득한 것처럼 들리는 그 말투에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했던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길을 나설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 이미 그녀는 누더기를 걸친 차림으로 보따리와 지팡이를 들고 흙먼지 자욱한 길을 걸어가는 자기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단 한 곳의 목적지를 향해 명료하고 검소하고 강렬하게 나아가는 고상한 은둔자의 삶을 상상한다. 순례자의 발걸음은 단순 명료함의 표현이자 목적의식의 표현이다. - P91
낸시 프레이(NancyFrey)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의 긴 순례길에 대해 이렇게말한다. "순례자가 걷기 시작하는 순간 세계를 느끼는 방식 몇 가지가 한꺼번에 변하는데, 그 변화는 여정 내내 이어진다. 시간 감각이 바뀌고, 오감이 예민해지고, 자기 몸과 자기 몸을 둘러싼 자연경관에 대한 새로운인식이 생긴다. [......] 그것을 한 독일 청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걷는 경험 속에서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사유가 된다. 자신으로부터도피하기란 불가능하다." 순례길에 나선다는 것은 가족 관계, 애착 관계, 지위, 의무와 같은자신의 복잡한 세속적 자리를 뒤로하고 일개 순례자로서 걸어간다는 뜻이다. 순례자들 사이에는 서열이 없다. 은총과 헌신의 서열이 있을 뿐이다. 터너 부부는 순례를 경계선 상태(liminality)라 말한다. - P91
나는 몇 달 째 냉장고에 맷 헤론(Matt Heron)이 찍은 1965년 셀마 몽고메리 행진 사진을 붙여놓고 있다. 행진의 감동을 잘 보여주는 이 사진에서 행렬은 서너 명씩 한 줄 한 줄 안정적으로 이어지며 사진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여나간다. 사진 속의 사람들이 구름 낀 하늘 쪽으로높이 솟아 있는 것을 보면, 땅에 엎드려서 찍은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사진속 사람들은 자신이 변화를 향해 걸어 나가고 있음을, 그러면서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음을 알고 있는 듯하다. 크게 내딛는 발걸음, 높이들어 올린 손, 자신 있는 자세는 역사와 마주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있다. 그들은 이 행진에서 역사를 견디는 대신 역사를 만들어내는방법을, 자신들의 힘을 가늠해보고 자유를 시험해보는 방법을 발견했다. 마틴 루서 킹의 우렁차고 호매한 연설에서 메아리치는 운명의 감각과 사명감이 사진의 움직임에 표현되어 있다. - P104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먼저 간 사람의 해석을받아들인다는 것, 학자나 탐정이나 순례자처럼 먼저 간 사람의 뒤를 밟는다는 것이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중요한 일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이다. 같은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같은 생각을 하는 방법, 같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따라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행동을 흉내내는 연기가 아니라, 그 누군가의 영혼을 닮기 위한 노력이다. 순례가 다른 모든 보행과 다른 점은 이렇게 반복과 모방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신을 닮기란 불가능하지만, 신이 걸어간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일은 가능하다. 예수가 인류의 실족(Fall)을 대속하는 과정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 발을 헛디디고 진땀을 흘리고 상처입고 세 번 넘어지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14처에서다. 하지만 이 14처가 어느 성당에서나, 아니, 아무 데서나 볼 수있는 일련의 그림이 되면서, 신도들이 따라가는 것은 이제 수난의 장소가 아니라 수난 이야기가 되었다. 성당에 그려진 14처는 신도들이 예루살렘으로 걸어 들어가는 통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속으로들어가는 통로이다. - P117
이렇듯 한 편의 이야기와 한 번의 여행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다. 이야기가 있는 글을 쓰는 일이 걷는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도 그때문일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상상의 영토에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 혹은 익숙한 길 위에서 새로운 면들을 가리켜 보이는 일이다. 글을 읽는 일은 저자라는 가이드를 따라가는 일이다. 우리가 그의 말에 항상 동의하거나 그를 항상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이드가 우리를 어딘가로데려다주리라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내가 쓰는 모든 문장들이 한 줄로멀리까지 이어지면서 글이 곧 길이고 독서가 곧 여행임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실제로 계산을 해본 적도 있었는데, 실이 둘둘 말려 있는 실타래처럼 글이 빽빽이 차 있는 책을 한 줄로 쭉 풀면, 내가 쓴 책 한권의 길이는 6킬로미터가 넘는다). 펼치면서 읽는 중국 족자에는 이런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을까. 풍경과 이야기 사이의 융합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는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노랫길(songline)이다. 노래는 깊은 사막 한복판에서 길을 찾는 내비게이션이고, 사막 속 풍경은 노래 속 이야기를 떠 - P122
올리는 기억 증진 장치다. 한마디로, 노래는 지도요 풍경은 이야기다. 이야기가 여행이고 여행이 이야기인 것은 그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상징적 길을 비롯해서 모든 길이 이런 울림을 갖는 이유는 우리가인생 그 자체를 여행으로 그려보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어떤 것인지를 그려보기가 어려운 것처럼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영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려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을 공간상에 존재하는 물리적 대상에 비유하게 된다. 그렇게 대상과 물리적, 공간적 관계를 맺게 되면, 대상을 향해 나아가거나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시간을 공간으로 보게 되면,인생이라는 시간도 여행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살면서 실제로 여행을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 같은 것은 상관없다. 보행과 여행은 우리가 하는생각과 우리가 쓰는 언어에서 너무나 중요한 비유로 자리 잡은 탓에 이제는 그것이 비유라는 것을 깨닫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 P123
우리에게 할당된 시간, 혹은 삶 그 자체를 여행에 비유할 때 가장자주 떠오르는 이미지는 걷는 여행, 혹은 개인사의 풍경을 가로지르는순례자의 역정이다. 나 자신을 상상할 때 자주 떠오르는 이미지도 내가걸어가는 모습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이승을 걷는 것(walk the earth)‘이고, 직업은 ‘이승의 행보(walk of life)‘이고, 전문가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walking encyclopedia)‘이다. 구약성서는 은총을 받은 상태를 "하느님과함께 걸었다(he walked with God)"고 묘사한다. 걷는 사람, 즉 한곳에 머물 - P124
기보다 혼자 한 발 한발 앞으로 나가는 사람의 이미지는, 초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유인원이든 시골길을 어기적어기적 걸어 내려오는 사뮈엘베케트(Samuel Beckett)의 등장인물이든 인간의 의미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걷는다는 비유가 비유이기를 그칠 때는 우리가 실제로 걸을 때다. 삶이 여행이라면, 우리가 실제로 여행할 때 우리 삶은 실제의 삶(도착이 가능한 목표 지점, 확인이 가능한 진행 과정, 이해가 가능한 평가 결과가 수반되는 삶이된다. 비유가 행동과 하나가 된다고 할까. 미로를 걸으면서, 순례에 나서면서, 산을 오르면서, 어떤 분명하고 바람직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할당된 시간을 글자 그대로의 길(오감을 통해서 영적차원에 접근하는 길)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걸어가는 것, 여행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의 중요한 비유라면, 모든 걷기와 모든 여행을 통해(그중에서도특히 십자가의 길과 미로를 통해) 우리는 모종의 상징 공간으로 걸어 들어갈수 있다. - P125
두 사람이 북부 잉글랜드의 페나인 산맥을 걸어서 넘었다는 것, 그리고그 전에도, 그 후로도 또 다른 여러 곳을 걸었다는 것은 참 특별한 일이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특별한 일이었는지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걸어서 여행한 사람은 전에도 있었다. 더 먼 길도 있었고 더 험한 길도있었다. 영국 시골 지역에서 가장 험한 풍경들(산맥, 벼랑, 황야, 폭풍, 바다, 그리고 폭포)이 경탄의 대상이 된 것은 이 시인 남매가 태어나기 거의 30년전부터였다. 프랑스와 스위스에서도 등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중이었다. 누군가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정인 몽블랑 정상에 처음 오른 것은 19세기가 시작되기 14년 전이었다. 많은 평자들은 워즈워스와 그의동행들이 보행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그 무엇으로 만들었고, 이로써수많은 일들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제1세대 낭만주의자들이 보행 그 자체를 위한 보행, 즉 자연 속을 걷는 즐거움의 계보를 만들었다는것, 이로써 문화적 행위로서의 보행과 예술적 경험으로서의 보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 P137
보행의 역사는 이렇듯 보행의 공간을 만든 또 다른 역사 속에 감추어져 있다. 18세기 내내 보행의 공간은 점점 더 넓어졌고, 아울러 보행의 문화적 의미는 점점 더 커졌다. 또보행의 역사는 취향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 역사를 반영하기도 한다. 격식에 맞는 것, 양식화된 것을 선호하는취향이 격식 없는 것, 자연 그대로의 것을 선호하는 취향으로 바뀐 것이다. 그 변화의 기원은 나태한 귀족계급과 그들의 건축에 일어난 변화라는 하찮은 역사에 불과하지만, 그 변화의 결과로 그 시대에 가장 전복적이면서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장소들과 관행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렇듯 보행 취향과 자연 취향이 트로이의 목마 같은 역할을 담당하면서, 많은 의미 있는 공간들이 민주화되기에 이르렀고, 20세기에는 귀족영지들을 에워싸고 있던 장벽들이 그야말로 허물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P143
도보 여행 내내 냉대받는 기분을 느꼈던 독일인 여행자 모리츠는 사실노상에서 무수한 보행자들을 만났다. 그들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기는오늘날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그리니치에서 런던까지 걸어가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모리츠는 그들에 대해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런던의 세인트 제임시즈 공원에서 걷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겼다. "이 공원의 별볼일 없음을크게 상쇄해주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다.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날씨가 좋으면 사람들이 모여든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여름의 가장 멋진보행로라고 해도 사람들이 이 정도로 모여들지는 않는다. 이렇게 모여든사람들은 대부분 잘 차려입었고 잘생겼다. 그런 사람들과 자유롭게 한데 섞이는 짜릿한 기쁨을 나는 오늘 저녁 처음으로 경험했다."사실 이글에서 모리츠는 영국이 독일에 비해 보행, 특히 공공장소에서의 보행을더 품위 있는 취미로 간주한다는 걸 말하고 있다. - P155
『오만과 편견』의 어디를 보나 걷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주인공은걸을 수 없는 상황만 아니면 온갖 곳에서 걷는다. 이 책에서는 결정적 만남이 성사되거나 결정적 대화가 오가는 순간이 두 등장인물이 함께 걷는 동안일 때가 많다. 이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 점잖은 사람들(오스틴의 등장인물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걷는 일은 일상의 근간이었다. 잉글랜드에서 18세기 내내, 그리고 19세기 이후까지 보행은 특히 여자들에게 중요한 일상이었다. 도시 워즈워스가 1792년에 쓴 편지에 따르면 "그들은 시골 숙녀이기에, 보행이라는 시골 숙녀의 취미생활을 즐기는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보행은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자들이 쓴 글을 보면, 정원을 설계하고 감상하는 내용이 많지만, 실제로정원을 걷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글은 대개 여자들이 쓴 편지나 소설이다. 아마도 여성들이 일상을 더 세밀하게 다루기 때문이기도 하고, 잉글랜드 여자들(특히 귀부인들)이 걷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기때문이기도 하다. 『오만과 편견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이 자신의 - P160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시간 사이사이에 한 일은 다량의 독서, 편지 쓰기, 약간의 바느질, 그런대로 들어줄 만한 피아노 연주, 그리고 걷기였다. 소설이 시작되고 얼마 후, 제인 베넷이 말을 타고 구혼자 빙리 씨의저택이 있는 네더필드로 가면서 감기에 걸린다. 동생 엘리자베스는 언니를 간호하기 위해 네더필드까지 걸어간다. 걸어가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였기도 있지만(엘리자베스는 "말 타는 여자"가 아니고, 마차를 타고 가려면 두마리의 말이 필요한데 남은 말은 한 마리뿐이다.) 용감한 활기가 매력적인 여주인공답게 걷기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걸어가면 되잖아요. 가야 한다면 멀든 가깝든 상관없어요. 겨우 3마일인 걸요." 그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그녀의 비인습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첫 번째 신호다. 그녀는 그 거리를 걸어감으로써 자기 계급 여자들이 지켜야 할 예법을 위반한다. - P161
워즈워스라는 거대한 존재에 대해서 대부분의 다음 세대 시인들은 존경심과 적대감이 뒤섞인 감정을 가졌다. 그것은 토머스 드퀸시(Thomas DeQuincey)도 마찬가지였다. "두 다리에 일가견이 있는 모든 여성들이 그의두 다리에 신랄한 비난을 가했다. [……. 심하게 흉하게 생긴 것은 아닐뿐더러 평균치 인간의 다리에 비해서 많은 일을 해낸 다리였다. 믿을 만한자료를 토대로 계산해본 결과 워즈워스는 바로 이 다리로 28만2000~29만 킬로미터를 답파했다. 포도주나 독주 같은 것으로 혈기를 얻는 다른사람들과 달리 워즈워스는 이렇게 몸을 움직이면서 혈기를 얻었다. 워즈워스 자신이 구름 한점 없이 행복한 인생을 영위해온 것도, 우리 독자들이 워즈워스의 글 중에서도 아주 탁월한 글들을 읽을 수 있게 된 것도그 덕분이다."38 사람들은 워즈워스 이전에도, 이후에도 걸었다. 다른 낭만주의 시인들 중에서도 걸어서 여행한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워즈워스만큼 걷는 일을 인생과 예술의 중심에 놓은 이는 그 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 P171
그의 보행을 이해하려면 쾌적한 장소를 잠시 거닌다는 뜻의 ‘산책‘개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동시에 낭만주의적 보행을 장거리 도보 여행이라고 규정하는 현대 저작물들의 또 다른 정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에게 보행은 여행하는 방법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법이었다. 스물한 살에 걸어서 3000킬로미터를 여행했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50년 동안은 시를 쓰기 위해 작은 정원 테라스를 왔다 갔다 했다. 그에게는 둘 다중요한 보행이었다. 파리와 런던의 길거리를 쏘다니고 산을 올라가는 것도, 여동생 혹은 친구들과 함께 거니는 것도 모두 중요한 보행이었다. 이모든 보행이 그의 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앞서 보행을 사유의 과정으로 창안한 철학적 작가들을 다룬 장이나, 뒤에서 대도시 보행의 역사를다룰 장에서 그의 보행을 함께 다룰 수도 있었지만, 워즈워스 자신은 보행을 전적으로 새롭고 강력한 방식으로 자연, 시, 가난, 부랑과 연결 지었다. 도시보다 시골에 훨씬 가치를 두었음은 물론이다. - P172
이 시가 그 모든 이탈과 우회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시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걷는 사람의 이미지가 되풀이되는 덕이다. 이 시의 독자는 워즈워스를 천로역정』의 크리스천 같기도 하고 「신곡」의 단테 같기도 한 형상, 다시 말해 두 발로 걸어서 온 세상을 여행하는 작은 형상으로 그려보게 된다. 단, 시에 나오는세상은 호수들, 춤들, 꿈들, 책들, 우정들, 그리고 많고 많은 장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서곡은 한 시인이 성장하기까지 어떤 곳을 거쳐 갔는가(이 도시는 어떤 역할을 했나, 저 산은 어떤 역할을 했나.)를 보여주는 지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이 시에서는 장소가 사람보다 중요하게 등장한다. 드퀸시가 워즈워스의 두 다리에 존경 어린 독설을 던졌듯, 수필가 월리엄 해즐릿(William Hazlitt)도 비슷한 어조의 재담을 던졌다. "그의 눈에보인 것은 우주, 그리고 자기 자신뿐이었다. - P174
워즈워스는 이렇게 길을 걷고, 이런 사람들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문체를 찾아나갔다. 그가 아주 초기에 쓴 시들은 고고하고 애매모호하면서 관습적 이미지들이 가득하다는 점에서 톰슨의 『사계절 양식인 데 비해, 그 후 혁명적 열정, 가난한 사람들과의 공감적 동일시가 생겨나면서 그런 이류 풍경 시인의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도러시의 글이 존슨 박사(Samuel Johnson)나 제인 오스틴 같은 심오한 아포리즘을 벗어나 묘사의 생생함과 현실성을 얻으면서, 비슷하게 변한 것도 1790년대 10년동안이었다.) 소재와 문체 둘 다 변화했다. 워즈워스가 서정 가요집 (LyricalBelds)』 (워즈워스와 콜리지가 1789년에 함께 낸 획기적 시집)을 되돌아보면서 쓴서문에 따르면, "요컨대 이 시들을 쓸 때 중요시했던 원칙은 서민 생활에서 펼쳐지는 사건이나 장면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 서민들이 실제로 쓰는 언어를 선별해 사건은 최대한 철저히 서술하고 장면은 최대한 철저히묘사해야 한다는 것, - P181
그러면서도 그 서술과 묘사에 상상의 빛깔을 가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미천하고 조야한 이들의 삶을 주로 택했던이유는 그런 상태에 있을 때라야 근원적 희로애락이 더 나은 토양에서[......] 더 소박하고 더 강력한 언어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그는 풍경에 대해서 말할 때 거창하게 일반화하거나 고전을 인유하는 대신 구체적으로 묘사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할 때도 그들이 우화 속의 등장인물인 양 미덕과 연민을 설교하는 대신 그들의 현실을 그려 보이고자 했다. 그가 더 소박한 언어를 택한 것은 정치적 행동이었고, 바로이 정치적 행동이 스펙터클한 예술적 결실로 이어졌다. - P181
워즈워스에게 보행은 시의 주제이기도 했지만, 시를 쓰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 방식이란 주로 걸으면서 소리내어 이야기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같이 걷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이야기했고, 혼자 걸을 때는혼잣말을 했다. 그것 때문에 종종 우스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그래스미어에 사는 사람들이 그를 좀 이상하게 보기도 했다. "딴 사람들한테는말을 많이 안 했는데 혼자서 그렇게 말을 많이 했더라고. 입모양을 보면알지. "머리는 앞으로 내밀고 두 손은 뒤로 하는 거야. 그 자세로 슬슬걷는 거야. 걷다가 걷다가 또 걷더니 딱 서는 거야. 그러고는 또 걷다가 걷다가 길 끝까지 쭉 걸어가는 거야. 그러더니 어디 앉아서 종이를 꺼내 뭘쓰는 거야."『서곡』에서 그는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걸어갈 때 모르는 사람이 다가오면 개가 그에게 입을 다물라는신호를 보내서 그가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는 것을 막아준다는 이야기이다.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였던 워즈워스는 예전에 보았던 장면의 시각적 디테일과 감정적 생생함을 그릴 수 있었고, 자기가 존경하는 시인들의긴 시구를 인용하거나, 걸으면서 머릿속으로 쓴 시를 나중에 글로 옮길수 있었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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