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빗속에서 길거리를 걸어가는 ‘노숙자‘는 그렇게 걷고 또 걸어도,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없이 얽히고설킨 길거리들뿐이었다. 아니면 어쩌다가 길모퉁이에서 경찰 두 명이 잡담을 하는 모습이나 경위나 경사가 부하들을 둘러보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밤에 누가 집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모습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아주 드문 일이었다. 누군가 어느 문으로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걸보고 가까이 가보면 웬 남자가 어두운 문 앞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특별히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 험상궂은 달과구름은 양심의 가책에 잠 못 드는 악인처럼 이리저리 뒤척였다. 런던이라는 거대한 도시가 강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 그 자체가 악인의 답답한 몸부림 같았다." 하지만 어쨌든 디킨스는 런던의 공동묘지를 좋아하고 런던의 "수줍어하는 동네들"을 좋아하고 "목가적 런던(ArcadianLondon, 사교계가 한꺼번에 시골로 떠나고 런던 전체가 무덤 같은 평화 속에 잠기는계절을 가리키는 디킨스의 엉뚱한 표현)"을 좋아했듯, 런던의 그 고독한 밤거리"도 좋아했다. - P301

 한편 도시에서 사람이 고독한 이유는 낯선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낯선 사람이 되어보는 일, 비밀을 간직한 채로 말없이 걸어가면서스쳐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을 비밀을 상상하는 일은 더없는 호사 중 하나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은 가능성들 앞에 열려 있다는 것은 도시생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고,가족의 기대, 공동체의 기대에서 벗어나게 된 사람들, 하위문화 실험, 정체성 실험을 시도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해방적 상태이기도 하다. 아울러관찰자의 상태(냉정한 상태, 대상에 거리를 둔 상태, 예민한 감각을 발휘하는 상태)이기도 하고, 성찰해야 하는 사람, 창작해야 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상태이기도 하다. 약간의 우울, 약간의 고독, 약간의 내성은 삶의 가장 세련된 재미에 속한다. - P302

얼마 전에 들은 라디오 방송에 가수 겸 시인 패티 스미스(PattiSmith)가 나왔다. 사회자가 무대 공연을 앞두고 무슨 준비를 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답했다. "두세 시간 동안 길거리를 배회합니다. 그 짧은 대답은 그녀의 무법자적 낭만주의와 함께 그녀에게 길거리 배회가 의미하는 바를 잘 요약하고 있다. 길거리 배회는 그녀의 감성을 더 터프하고 날카롭게 만들어주고, 배회자의 고요한 상념을 깨뜨릴 수 있을 만큼 격렬한 노래와 절실한 노랫말의 자양분인 고독의 베일로 그녀를 휘감아준다.
미국의 수많은 도시(호텔 건물을 나가면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을 나가면 6차선 도로가 있을 뿐 인도는 찾아볼 수 없는 도시)에서는 그런 식의 길거리 배회가 성공하기 어려웠겠지만, 그녀의 발언은 뉴요커로서의 발언이었다. 한편 버지니아 울프가 1930년 수필 「길거리 떠돌기(Street Haunting)」에서 익명성을 근사하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런더너로서의 발언이었다. 뛰 - P302

어난 등산가 레슬리 스티(Leslie Stephen)을 아버지로 둔 그녀는 언젠가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산이니 등산이니 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방에는등산지팡이와 아버지가 정복한 봉우리가 모두 표시되어 있는 입체 지도가 있었잖아요? 내가 런던과 습지를 제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랍니다."「길거리 떠돌기가 나왔을 당시의 런던은 디킨스가 밤 산책을 다니던 때보다 두 배 이상 커져 있었고, 길거리가 다시 한 번 피난처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울프는 한 사람의 정체성이 그 사람을 답답하게 옥죈다는 것을 언급하고, 집에 놓여 있는 물건들이 "우리가 경험한 것들의 기억을 굳히는 방식" 을 언급한 후, 연필을 사러 길을 나섰다. 겨울 저녁이었고, 젊지 않은 여자에게 안전과 정숙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행로의 기록(혹은 상상)인 길거리 떠돌기는 도시를 걸어 다니는 일을다룬 위대한 수필 가운데 하나다. - P303

길거리로 나선다는 것에 대해 "4시에서 6시 사이의 상쾌한 저녁에집을 나설 때는 내 친구들이 나라고 여기는 나의 껍데기를 벗으면서 익명의 떠돌이들로 구성된 거대한 공화국 군대의 일원이 된다. 방에 혼자있다가 그렇게 그들과 함께 있게 되면 참 기분이 좋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인생 속으로 어느 정도는 들어가 볼수 있었다. 한 사람이 하나의 정신에 붙들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환상, 다만 몇 분간이나마 다른 사람들의 정신이나 육체를 빌릴 수 있다는 환상을 품어볼 수는 있을 만한 정도였다. 세탁부도 될 수 있었고 술집 주인도될 수 있었고 거리의악사도 될 수 있었다." 이 익명성에 대해. "각자의 영혼은 다른 영혼들과 다른 모양으로 존재하기 위해 굴 껍데기 같은 외피를 만들어내는데, 그꺼끌꺼끌한 외피가 깨져 없어지면굴알맹이 같은 - P303

"통찰만 남는다. 거대한 눈알이라고 할까. 한겨울의 길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드러나 있으면서도 가려져 있는 곳. 울프는 한때 드퀸시와 앤이 걸었던 옥스퍼드 스트리트를 걸어 내려갔다. 상점 창문으로 들여다보이는 화려한 상품을 가지고 상상 속의 집, 상상 속의 삶을 장식해보는가하면, 그런 집과 삶을 내던지고 다시 현실 속의 길로 걸어 나오기도 했다.
울프의 언어는 주관의 언어워즈워스 등이 만들어내고 드퀸시와 디킨스 등이 더욱 발전시킨 언어)였다. 울프의 상상을 자극하는 것은 덤불에서 부스럭거리는 새들, 상점에서 구두를 신어보는 난쟁이 여자 같은 아주 작은 사건들이었다. 상상이 걷는 길은 두 발이 걷는 길보다 멀리 뻗어 나갔기에 현실 속의 거리로 돌아오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거리를 걷는 일은 이런 글을 통해 지금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워즈워스, 드퀸시, 디킨스 등에게는 괴로움의 상태였던 고독과 주관이 울프에게는 즐거움의상태였고, 울프에게 길거리를 걷는 일은 자신의 짐스러운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울프의 보행이 현대적 의미의 보행인 것은 그 때문이다. - P304

휘트먼의 시를 보면, 그가 행복하게 애인 품에 안겨 있는 사람으로나오는 대목도 많지만, 그런 시보다는 그렇게 자기를 안아줄 애인을 찾아서 혼자 길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사람(게이 크루징의 선구자)으로 나오는 대목이 더 정말처럼 들린다. 풀잎』최종판에 실린 「먼 훗날의 기록관들이여(Recorders Ages Hence)」라는 꽤 거창한 시에서는 자기를 "대개 홀로 걸으면서 소중한 친구들, 소중한 애인들을 생각하던" 사람으로 기록해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더 뒤쪽에 실린 또 한 편의 시는 "잔치가 벌어지는 도시, 걸어갈 길이 있는 도시, 기쁨을 주는 것들이 있는 도시여."라는 돈호법으로 시작된다." 이 시에서 휘트먼은 한 도시를 반짝이게 할수 있는 모든 것(건물, 기선, 퍼레이드 등등)을 열거한 후, 이런 것들 대신 길을걷는 경험("내가 지나갈 때, 오 맨해튼이여, 나를 사랑하겠다는 눈빛으로 반짝 또 반짝 또 반짝하는 너의 눈동자들"을 택한다. - P306

잔치를 즐기는 것보다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기쁨이고, 약속이 지켜지는 것보다는 약속이 맺어지는 것이 기쁨이라는 뜻이다. 휘트먼은 수많은 것들을 열거하고 다양한 것들을 묘사하는 탁월한 목록 작성자였고, 최초로 군중을 사랑한 작가 중 하나였다. 군중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연애의 가능성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적 이상, 드넓게 퍼지는 활기의 표현이었다. 잔치가 벌어지는 도시(City of Orgies)」 뒤에 실린 시 가운데 어느 낯선 사람에게 (To aStranger)」가 있다. "거기 지나가는 낯선 사람이여! 내가 당신을 얼마나 그 - P306

혼자 걷는 도시
"그리운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당신은 모른다. 휘트먼에게 스쳐 지나가는사람의 눈빛과 친밀한 사랑은 익명의 군중과 그의 강력한 자아의 관계처럼 상보적이었다. 이렇듯 휘트먼의 시는 맨해튼이라는 점점 넓어지는메트로폴리스에 대한 찬양, 대도시의 크기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가능성들에 대한 찬양이었다.
휘트먼이 죽은 1892년은 모두가 뉴욕을 찬양하기 시작할 때였다. 파리가 19세기의 수도였다면, 뉴욕은 20세기 중반까지의 수도였던것 같다. 급진파와 재벌 총수가 똑같이 도시에 사활을 걸고 희망을 걸었던 시절, 뉴욕은 호화 여객선이 입항하고 이민자가 엘리스 섬으로 밀려들어오는 도시, 그야말로 최고의 현대 도시였다. 조지아 오키프(GeorgiaOKeeffe조차 뉴요커 시절에는 뉴욕의 마천루 그림을 안 그릴 수 없었다. 1920년대에는 뉴욕 사람들을 위한 《뉴요커>라는 잡지가 나왔다. 그중 타운 토크(Talk of the Town)」라는 수필란 (18세기에 런던에서 나온 <스펙데이터》와 《램블러>의 전통을 잇는 지면에서는 필자들이 엮은 길거리의 작은 사건들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 P307

긴즈버그가 샌프란시스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실제로 긴즈버그가 시인으로서의 목소리를 찾은 곳은 1950년대의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였다. 하지만 그는 뉴욕의 시인이었고, 그의 시에등장하는 도시들은 크고 무정한 대도시다. 백인 중간층이 도시생활을뒤로하고 교외로 몰려가던 그때, 긴즈버그와 그 시대의 시인들은 열렬한도심 애호가들이었다.(다만 소위 비트 작가들 다수가 샌프란시스코로 몰려왔다고는 해도, 그들 대부분은 시에서 자기네들이 걸어 다니는 길거리를 다루기보다는 좀더 개인적인 내용, 또는 좀 더 일반적인 내용을 다루었다. 그들에게 샌프란시스코라는도시는 아시아로 가는 관문, 또는 서부 풍경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긴즈버그의경우, 교외를 다룬 시가 없지는 않다. - P308

 "가까운 곳에 지하철이 있고, 음반 가게 같은, 사람들의 인생 유감이 진심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있다. 그런 것이 없었다면 내가 풀잎 하나인들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 불성실한 것일수록 믿어주는 게 더 중요하다. 저 구름은 저 모습그대로 관심의 대상이 되는데." 직장에 걸어가면서(Walking to Work)」라는 시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길거리에녹아들고 있어.
당신은 누구를 사랑해?
나를?
빨간불인데 그냥 건널래."


역시 걸어가는 길을 그린 또 한 편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속옷을 안 입고 다니는 일에 지치다가도
또 괜찮아져요
길을 걷다 보면
바람이 내 생식기로 살며시 불어와주니까" - P311

나는 다른 사람들이 있는 데서 입을 열어 말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 [………] 나중에 연필을 집어 들고 종이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장면들, 감정들이 풀려나왔다." "길거리에서 떨어져 나온 후"라는 표현은 길거리가 하나의 총체적 세계라는 점, 즉 길거리에 속한 사람들이 따로 있고, 길거리를 다스리는 법과 길거리에서 쓰이는 언어가 따로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트라우마를 낳은 집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길거리"라는 집 밖 나라의 원주민이다.
오만과 편견이 거의 200년 전에 어느 시골 숙녀가 보행의 효용을기록한 깔끔한 연대기였다면, 칼들과 가까이 중 미국에서 퀴어로 산다는 것: 분열의 일기(Being Queer in America: A Journal of Disintegration)」라는 글은 1980년대 미국 도시에서 어느 퀴어 남자가 길거리의 효용을 기록한 『오만과 편견』 못지않게 깔끔한 연대기다. 보행은 우선 성애가 된 - P313

길거리에서다. "지금 내가 지나가는 복도의 창문은 느릿느릿 죽어가는 하늘을 몇 조각으로 깨뜨리고 있다. 그 애가 멀리 문 열 개 너머에서 갑자기 어느 문 안으로 들어간다. 조용한 바람이 따라 들어간다." 그도 그 방으로 따라들어가서 펠라치오한다. 왠지 모르지만 그가 전에 크루징하던 선창, 아니면 창고와 비슷한 방이다. 몇 페이지 뒤에서는 보행이 그의 친구이자에이즈로 죽은 사진작가 피터 후자(Peter Huiar)에 대한 애도가 된다. "그가 죽고 나서, 나는 길거리를 몇 시간씩 배회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차가 많아졌다. 몸뚱이들이 차도 가장자리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었고,
문간의 개들은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들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빌딩 위의구름들에 녹색 테두리가 생기는 시간이었다. [……]  - P314

"풍경화였다가 숙소였다가" 발터 베냐민이 보행자의 파리 경험에 대해 쓴 구절이다. 도시를 연구하고 도시를 거니는 기술을 연구한 뛰어난 학자 중 하나인 베냐민은 파리의 매력에 이끌려 파리의 뒷골목들을 헤매는 신세로 전락한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파리라는 주제는 1940년에 세상을 떠난 그의 마지막 10년간의 모든 글 속에서 다른모든 주제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가 처음 파리를 여행한 1913년 이후로 그의 파리 여행 기간은 점점 길어졌고, 1920년대 말에 결국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고향 베를린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펜 끝은 파리를향해서 걸었다. "도시에서 길을 잘못 찾는 일은 흥미로울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다. 길을 잘 모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도시를 헤매는 일, 마치 숲속을 헤매듯 도시를 헤매는 일에 필요한 훈련은 길을 찾는 일에 필요한 훈련과는 전혀 다르다. 도시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간판들, 도로의 이름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집들, 노점들, 술집들로부터 메시지를 듣는 방식은 숲속을 헤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자기 발에 밟힌 잔가지로부터,  - P318

 내게 이 배회의 기술을 가르쳐준 도시가 파리였다. 학창 시절의 공책 압지에 찍힌 미로 속에서 최초의 흔적을드러낸 나의 꿈을 실현해준 것도 파리였다." "그는 세기 전환기에 모범적 독일인 아이로 교육받은 결과 산과 숲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릴 때 사진 중에는 등산용 지팡이를 들고 알프스 산맥이 그려진 배경 앞에 서 있는 사진도 있고,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덕분에 슈바르츠발트나스위스로 긴 휴가를 다녀오는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의 사랑이 향하는 곳은 도시였다. 그의 도시 사랑은 자연 경외 따위의 케케묵은 낭만주의에 대한 거부이면서 동시에 모더니즘의 도시주의를 향한 열정이었다. - P319

베냐민에게 도시는 매혹적 구성물이었다. 연대기가 깔끔한 직선의시간적 구성물이라면, 도시는 배회하지 않고서는 지각할 수 없는 공간적 구성물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베를린 연대기에서 그는 자기의 인생이 지도나 미로 같은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적 구성물이 아닌 공간적 구성물이라고 하면서 그 깨달음을 얻은 곳이 파리의 한 카페라고 말한다. "파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곳의 담벼락과 강둑길, 포장도로, 박물관과 쓰레기, 창살과 광장, 아케이드와 노점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언어는 그토록 특별하기에 ----- 58 모스크바 일기는 그의 인생을 모스크바라는 도시에 대한 설명과 뒤섞은 글이고, 『일방통행로』는 도시를 흉내 내는 형식의 책이다. 이 책은 「주유소」, 「건설 현장」, 「멕시코 대사관,「최고급 가구가 딸린 방 열칸짜리 집」, 「중국 골동품」 등 도시의 특정한장소나 안내문을 연상시키는 소제목의 짤막한 구절들을 이어 붙인 전복적 몽타주다. 이야기 한 편이 쭉 이어진 길 하나라면, 일방통행로』의 짧은 이야기들은 뒤엉킨 골목길들이다. - P319

베냐민 자신부터가 뛰어난 배회자였다. 베냐민의 친구 하나는 그가 어떻게 걸었는지를 말해준다. "그 사람이 머리를 치켜세우고 걷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걸음걸이,
신중하게 한 발 한 발 더듬어 나가는 듯한 걸음걸이였다. 근시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근시가 심한 베냐민과 근시가 더 심한 또 한 명의 망명자 제임스 조이스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조이스는 파리에 1920년부터 1940년까지 살았다. 더블린 거리를 배회하는한 유대인에 대한 막연한 정보로 점철된 다층적 소설을 쓴 가톨릭 망명자 조이스와, 파리 거리를 거닐고 또 시로 쓴 가톨릭 신자(샤를 보들레르)에 관한 서정적 역사를 기록하면서 파리 거리를 배회하는 베를린 출신유대인 망명자 베냐민 사이에는 모종의 대칭이 존재한다.  - P320

조이스는 생전에 최고의 명성을 얻었지만, 베냐민은 그 명성을 한참 나중에야 얻게 된다. 독일에서 그의 작업을 재발견한 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였고, 영어권에서는 더 나중이었다. 지금 그는 문화연구의 수호성인으로 자리 잡았고, 그의 글은 지금까지 수백 권이 넘는 논문과 저서를 낳고 있다. 베냐민을 해석하는 글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것은 그의 글이 혼종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베냐민의 글은 주제 면에서는 학술적이지만 아름다운 아포리즘과 창조적 비약으로 가득하고, 정의를 내리는 연구가 아니라 영감을불러일으키는 연구다. 그중 특히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파리에 관한 연구였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베냐민이 책을 쓰기 위해 작성한 방대한 분량의 인용과 메모다. 보들레르, 파리, 파리의 아케이드, 플라뇌르(Hâneur)라는 일련의 주제를 다루었을 연구였다. 파리를 "19세기의 수도"
라고 부른 사람이 바로 베냐민이고, 플라뇌르를 20세기 말의 학문적 주제로 만든 사람도 바로 베냐민이다. - P320

베냐민에게 처음 아케이드에 관심을 갖게 해준 작가, 보행을 문화적 행위로 성좌(星座)화할 가능성을 포착하게 해준 작가는 보들레르가 아니라 베냐민의 동시대인들이었다. 같은 베를린 출신이자 친구였던 프란츠헤셀(Franz Hessel)과 초현실주의 작가 루이 아라공(Louis Aragon)이 그들이다.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Paysan de Paris)』(1926)를 읽고 너무 흥이 났던 베냐민은 "저녁마다 침대에서 읽었는데, 두세 장 읽으면 책을 내려놔야 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더 읽어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노트가 처음 나온 것이 실은 그때였습니다. 헤셀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 우정의 제일 멋진 부분을 길러나간 것은 베를린으로 돌아온 이후였습니다."  - P333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는 1920년대 후반에 출간된초현실주의3대 저서 중 하나다. 나머지 둘은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의 『나자』와 필리프 수포(Philippe Soupault)의 『파리의 마지막밤들 (Les Dernières nuits deparis)』이다. 세 작품 모두 파리를 배회하는 남자를 일인칭으로 서술하고있고, 매우 구체적인 지명과 장소 묘사를 제시하고 있고, 창녀를 주요 목적지로 설정하고 있다. 초현실주의가 중시한 것은 꿈에 나온 것들, 무의식적·비(非)자의식적 정신의 자유 연상, 충격적 병치, 요행과 우연, 일상의 시적 가능성 등이었다. 도시를 배회하는 것은 이런 모든 것에 관여하는 이상적 방법이었다. 브르통도 그 점을 지적했다. "산책의 탁월한 동행이 되어주었던 아라공이 눈에 선하다. 그에게서는 파리에서 가장 재미없는 곳을 더없이 흥미진진한 곳으로 만드는 마술적이고 몽상적인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이야기가 막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야기가 폭발하는 데는 길모퉁이 하나 도는 것, 아니면 상점 창문 한 번 보는 것만으로충분했다." - P334

베냐민은 자기를 가리켜 "악어 아가리를 지렛대로 비틀어 열고 거기 들어가 사는 사람" 같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 문학을 제일 좋아했고 거의 일평생을 프랑스 문학에 나오는 조연들처럼 배회하면서 살았다. 그를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바로 프랑스 문학인 것 같기도 하다. 파리를 탈출할 시기를 놓친 것이 프랑스 문학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말년에 제3제국의 어두운 그림자를 헤쳐 나가는 데는 프랑스 문학보다는 소년 모험소설이나 탐험일지 같은 것이 좀 더 유익하지 않았을까 싶다. 1939년9월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에 있던 다른 독일인들과 함께 검거된 - P339

그는 억류자로 분류되어 수용소가 있는 느베르까지 남쪽으로 150킬로미터가 훌쩍 넘는 길을 걸어가야 했다. 살이 찌고 심장에 병이 생긴 탓에파리의 길거리에서도 몇 분에 한 번씩 걸음을 멈추어야 했던 그는 수용소로 가는 길에 여러 번 정신을 잃기도 했지만, 세 달 가까이 되는 수용소 억류 기간 중에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다. 담배 몇 개비를 수업료로철학 강의를 열기도 했다. 국제펜클럽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파리로 돌아온 후에는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이어나가면서 비자를 받고자 애썼다.
통렬하게 서정적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쓴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나치의 프랑스 점령 후 남유럽으로 도망친 그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에스파냐의 포르트부까지 걸어갔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하는 가파른 도주로였지만, 그는 무거운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원고가 그 안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사 급한 포도밭 구간에서는걸음을 옮기지 못할 만큼 지친 그를 동행자들이 부축해주어야 했다. 그의 동행자 중 하나였던 구를란트 부인이라는 여자에 따르면 "길을 아는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네 발로 기어서 넘은 구간도 있었다. - P340

에스파냐당국이 요구한 것은 프랑스 출국 비자였다. 베냐민의 친구들이 마지막순간에 마련해준 미국 입국 비자로는 통과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그 험난한 산길을 걸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처지를비관한 베냐민은 에스파냐 국경에서 모르핀을 과다 복용했고, 1940년 9월 26일에 사망했다. 한나 아렌트가 쓴 글에 따르면 "그의 자살로 마음이 움직인 출입국관리 공무원들은 그의 동행자들이 포르투갈에 입국하는 것을 허가했다." 그의 서류 가방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같은 글에서 아렌트는 자기도 1960년대에 파리에 산 적이 있다고말했다. "파리에서 외국인이 고향 같은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파리라 - P340

는 도시 전체가 내 방 같기 때문이다. 집을 안락한 곳으로 만드는 방법이집을 그저 자고 먹고 일하는 곳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집에 마음을 붙이고 사는 것이듯, 도시에 마음을 붙이고 사는 방법은 아무 정처 없이, 아무목적 없이 도시를 마냥 걸어 다니는 것이다. 그러니 파리에서 체류를지탱해주는 것은 무수한 카페들이다. 길거리에는 그런 카페들이 줄지어늘어서 있고, 보행자들은 카페들 앞을 지나가면서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대도시 중에서 걸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이제 파리뿐이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로부터 활기를 얻는 도시는 단연 파리다."내가 1970년대 말에 가출해서 파리로 왔을 때만 해도 (일부 파리 남자들의 하찮은 색욕과 무례를 무시한다면) 파리는 보행자의 천국이었다. 돈 없고 어렸던 나는 어디든 몇 시간씩 걸어 다녔고 박물관에 잘 들락거렸다. - P341

평일의 걷기는 혼자 걷기 (기껏해야 두어 명이 함께 걷기)이고, 보도 걷기이다. 평일의 큰길은 운송 공간이다. 기념일(역사적, 종교적 사건을 기리는 공휴일, 또는 우리 스스로가 역사를 만드는 특별한 날)의 걷기는 다 함께 걷기다. 그런 날의 큰길은 그날의 의미를 두 발로 다지는 공간이다. 걷기는 기도도될 수 있고 섹스도 될 수 있고 땅과의 교감도 될 수 있고 사색도 될 수 있으니, 그런 날의 걷기는 발언이 된다. 많은 역사가 시민의 발걸음으로 만들어졌다. 자기 도시를 걸어서 헤쳐 나가는 일은 정치적·문화적 신념의육체적 표현이자 비교적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적 표현 형태 중 하나다. 공동의 고지를 향해서 함께 걷는다는 의미에서는 행군이라고 할 수있지만, 행군하는 군인들은 개체성을 포기한 존재들인 반면, 행진하는시민들은 개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 P350

그로부터 몇 년 앞서 일어난 또 다른 반란에서도 광장이 무대가 되었다. ‘5월 광장의 어머니회‘의 무용담은 이 여자들이 경찰서와 정부청사 이곳저곳에서 서로를 알아보면서 시작됐다. 1987년에 정권을 장악한잔인한 군부 요원들에 의해 ‘실종‘당한 자식들을 찾아다녔지만 모두가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다. 마게리트 구츠만 부바르(Marguerite GuzmånBouvard)에 따르면 "숨기기는 군부가 벌인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의특징이었다. [……] 아르헨티나에서는 정상화라는 허울 아래 유괴 사건들이 자행되었다. 항의는 불가능했고, 유괴당한 사람들의 가족조차도끔찍한 실상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112 대부분 교육받은 적이 거의 없고 정치적 경험도 전혀 없는 전업주부였던 여자들은 자기네가 그 비밀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대의를 위해 싸우면서 자기의 안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1977년 4월 31일, 열네 명의 어머니가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의 5월 광장으로 갔다. 1810년에 아르헨티나가 독립을 선언한 곳이었고, 후안 페론이 대중주의 연설들을 한 곳이었다. 나라의 심장 같은 광장이었다. 거기 앉아 있는 - P362

것은 불법 집회나 마찬가지라고 한 경찰이 소리쳤다. 그래서 그들은 광장한복판에 있는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걷기 시작했다.
군부가 최초의 전투에 패하고 5월 광장의 어머니회가 자기들의 정체성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 그곳에서였다고 한 프랑스인은 말하기도했다. 그 광장이 그들에게 이름을 주었고, 금요일마다 광장을 걸은 일이그들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부바르에 따르면 "언젠가부터 그들은 그렇게 걷는 일을 행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목적 없이 한곳을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걸어 나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금요일마다 걸었다. 5월 광장의 어머니회의 수가 점점 불어나면서 경찰은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대형경찰차에서 쏟아져 나온 경찰들이 폭언과 폭행을 퍼부으며 그들을 강제해산시켰다.  - P363

개들에게 공격당하고 곤봉으로 구타당하고 체포당하고심문당하면서도 그들은 또 나와서 또 걸었다. 그렇게 수년간 걸음으로써그들은 기억하면서 걷는다는 이 단순한 행동을 의례로, 나아가 역사로만들었다. 그리고 이 광장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행진하면서 그들은 실종된 아이의 사진을 정치 플래카드처럼 막대기에 붙이거나 목에 걸기도 했고, 아이의 이름과 실종된 날짜를 수놓은 흰 손수건을 머리에 쓰기도 했다. 수놓인 글자가 "살아 돌아와라(Aparición con Vida)"로 바뀐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그들과 함께 걸은 시인 마저리 아고신(Marjorie Agosin)에 따르면 "행진하는 동안에는 아이들과 아주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그들은내게 말했다.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망각이 허용되지 않는 이 광장에서는 기억이 원래의 의미를 회복한다." 국가의 트라우마를 행진으로 표출하는 이 여자들이 수년 동안 가장 공공연한 반체제 세력이었다. 1980년 - P363

대에 이르면 그들은 전국적 규모의 어머니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 1981년, 그들은 첫 번째 인권의 날 기념 연례 24시간 행진을 시작했고, 아울러전국 곳곳의 종교 행렬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 무렵은 5월 광장의 어머니회의 행진이 큰 관심을 얻은 후였다. 5월 광장은 계엄 상황 속에서 중년여성들이 행진을 이어나가는 기이한 현상을 취재하러 온 외신 기자들로북적거렸다" 군사정권이 몰락한 1983년, 5월 광장의 어머니회는 새로선출된 대통령 취임식의 국빈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어머니들은 매주5월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걷는 일을 계속해나갔고, 그 전까지두려움 때문에 동참하지 못했던 수천 명이 어머니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들은 매주 목요일에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걷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 P364

하지만 영원히 영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라앉는다는 것은 혁명의 본질이다. 가라앉는 것은 실패하는 것과는 다르다. 혁명은 낡은 기성 제도들의 무지몽매함을 조명하고 새로운 가능성을계시하는 번갯불이다. 혁명의 빛을 받았던 것을 예전 그대로 바라보기란불가능하다.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모종의 절대적 자유, 혁명이 극에 달했을 때 내가 하는 행동과 내가 품는 희망 속에서만 생겨나는자유를 위해서다. 혁명으로 독재자를 몰아낸 경우도 있지만, 또 다른 독재자가 나타나서 인민을 협박하고 예속하는 다른 방법을 들여오는 경우도 있다. 혁명으로 모두가 투표권을 확보하기도 하고 식량과 정의를 아쉬운 대로 확보하기도 하지만, 그 후에는 다시 자동차들이 도로를 뒤덮고포스터는 자취를 감추고 혁명가들은 주부나 학생이나 청소부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내 마음은 다시 사사로워진다. - P369

1870년에 영국의 채텀에서 열아홉 살의 캐럴라인 와이버그는 선원과 산책을 나갔다. 산책은 이미 오래 전에 구애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산책은 돈이 안 들고, 연인들에게 공원에서든 광장에서든 큰길에서든 샛길에서든 부분적인 사적 공간을 마련해준다.(연인의 오솔길 같은 으슥한 곳은 완전한 사적 공간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행진은 한 집단이 연대를 확인하고조성하는 방법인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나란히 걷는다는 이 섬세한 행위는 두 사람이 감정적, 육체적으로 한 편이 되는 방법인 것 같다. 두 사람이 처음 한 쌍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그렇게 함께 저녁을 보내고 함께 거리를 지날 때, 그렇게 함께 세상을 누빌 때인 것 같다. 함께 걷는 행위,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는 다르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가장 비슷한 그 행위를 통해서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 필요나 대화를 피하게 해주는 다른 일에 열중할 필요도 없이 함께 있음을 한껏 누릴 수 있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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