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한 송이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럽고 싶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 P257

문보영


허수경의 시는 아름답고 아이러니하다. 그는 슬픔을 나비 보듯 한다. 나비를 눈으로 좇다 보면 어느새 사라져 있다. 아, 어디 갔지? 그것은 아름답게 나타났다가 반짝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쳐다보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나비는 눈을 사용하지 않고 날개로 세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눈을 감고도 햇빛의 강도를 감지할 수 있으며 길을 찾을 수 있다. 허수경의 시는 눈을 감고 세상을 보는 나비와 같다. 날개로 세상을 보기. 눈을 감고 날아다니기. 그러다 문득 사라지기. 사라지고 싶을 만큼 살기. 날기.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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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구름은 썩어가는 검은 건물 위에 우연히 멈추고 건물안에는 오래된 편지, 저 편지를 아직 아무도 읽지 않았다. 누구도 읽지 않은 편지 위로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곧 건물은 사라지고 읽지 않은 편지 속에 든 상징도 사라져갈 것이다 누군들 사라지는 상징을 앓고 싶었겠는가 마치 촛불 속을 걸어갔다가 나온 영혼처럼 - P100

강혜빈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시인은 빛 속으로 들어간다. "촛불 속을 걸어갔다가 나온 영혼처럼" 재와 연기만 남았겠지만 부재와 상실을 응시한다. 동시에 지금 여기로부터 과거의 시간을 예민하게 감지한다. 구름은 썩어가는 검은 건물 위에 우연히 멈춘다. 시인이 시에 직면하기 직전, 시와 가까운 곳에서 서성거리듯. 넓은 의미의 공간을 시와 마주하는 특별한 ‘장소‘로 변모시킨다. 우연이란 의도가 배제된 것, 어떤 일이 저절로이루어져 공교로운 것. 다만 흐르고 멈추었다가 다시흐를 뿐인 구름은 나날이 낡아가는 화자의 영혼 위에잠시 머무르는 시적 영감과도 닮았다.
우리가 발견하는 수많은 장소 중에서 유독 썩어가고무너져가는, 이제 쇠락한 "검은" 건물 위에 멈춘 구름은 시간이 거기 있음을 가시화한다. 수많은 공간 중 하나였을 건물을 기억의 장소로 기능하게 한다.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은 이제 필연적인 일로 변모한다. "건물은 사라지고" 건물 안에 덩그러니 놓인 "오래된 편지"도 사라질 것이다. 오래된 화자의 영혼처럼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언어들. 시가 읽히지 않는다면 시를 쓰 - P101

는 사람도 사라질 것이다. 상징도, 비유도, 무용한 감탄사들도 사라짐은 자연스러운 것. 그러나 더없이 쓸쓸한 것. 회신 없이 폐기된, 너무 오래 유보되어 검어진 마음도 거기 있다. 아니, 거기 있었다. 과거가 되어 현재에 남는 것은...... 공터에 머무르는 검은 영혼, 정처없는 구름과도 같은. - P102

신이인



"누구도 읽지 않은 편지". 슬픈 말이었다. 더 슬픈 말이 남아 있는지, 그것이 한 편지의 몸 밖으로 나왔는지 여전히 안에 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을 편지들은 해부되지 않은 채, 저절로 잊힐 미라를 기다리겠지. 지구에 모여버린 불운하고 평범한인간들처럼.
구름처럼, 어쩔 수 없는 힘과 물질 앞에서는 한 번씩 철없이 엉엉 울었다. 사라지는 마음, 썩어가는 몸, 이제는 없는 사람, 남아버린 글자...... 그런 것들. 허수경의 시는 거의가 그런 것들이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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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의 사랑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 P55

안미옥


잊고 싶은 상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늙고 환해지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렇게 불을 켠 듯 환하고, 그래서 오히려 더 아파지는 자리를 향해 가겠다고. 사랑이 나를 버리고 갔을 때, 세월도 저만치 가고 내게 남은 것은 몸 얻지 못한 마음과 말 얻지 못한 꿈뿐일 때,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나도 시인처럼 기꺼이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갈 수 있을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무지개조차도 다시 아프고야 마는 자리. 아프더라도, 기꺼이 다시 겪는 자리로 갈 수 있을까.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내내 나에게 묻고 있다. - P56

장미도


펼쳐진 고독을 읽고 벗어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견더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시집입니다. ‘마음‘과 ‘사랑‘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요. 이 시에서 사람은 "환하고 아픈" 사랑의 자리에 있습니다. 썩었을지도 모르는 그 마음을 더듬어볼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사랑입니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에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존재입니다. 아무도 없는 문 앞에서 노크를 하고, 잠긴 창문 앞에서 계절을 기다리는 사람, 사랑의 마음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합니다. - P57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 P65

김뉘연


자신에게 주어진 언어와 무관히 시인은 저마다의 모어를 구사한다는 진실을 몸소 증명했던 한 시인의 집을 통과한다. 몸으로 지나간 말들을 지나, 「흰 꿈 한꿈에서 흘러나온 "당신......" 이 잠시 머문 곳을 본다.
「혼자 가는 먼 집」을 여는 "당신......"은 말줄임표를 지나며 소리를 얻는다. 시에서 혼자인 나는 당신이라는 말이 참 좋아서 당신을 부른다. 울음과 슬픔과 상처와 시름과 참혹과 기타 등등의 사이에서 좋아서, 참을 수 없어 터져버린 웃음소리가 당신이라는 먼 집까지의 거리를 간간히 좁히며 시의 리듬을 조율한다. 거듭 호명되며 시를 통과해낸 당신은 영영 "킥킥 당신"이다. - P66

박지일


책에서 말줄임표를 마주할 때마다 허수경 시인의「혼자 가는 먼 집」을 떠올린다. 할 말이 없거나 할 말을 생략하기 위한 말줄임표가 아닌, 변방의 무수한 말들을 펼쳐놓기 위한 말줄임표. 효과를 위해 사용하는 말줄임표가 아닌, 효과 그 자체의 말줄임표. 「혼자 가는먼 집」의 말줄임표는 종이 위로 차분하게 정착한 여섯개의 점으로 읽히지 않는다. 각각의 점은 끊임없이 둥실거린다. 각각의 점은 이곳과 저곳과 그곳을 동시에떠다니는 발들의 버둥질에 가깝다. 킥킥대면서라도 현재에 자신을 발붙이고자 쓸 수밖에 없는 버둥거림으로서의 점. 허수경 시인의 정처 없음을 배길 수 없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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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린 팽나무는 아직은 땅바닥의 것들과 가까이 있어서 한두해 피어났다가 사라지는 잡초나 들꽃과 다르지 않았다. 팽나무의 싹이 처음 나왔을 때 부근에 함께 싹을 틔운 들풀들이 많이 있었다. 노랑 꽃이 피는 사데풀, 흰 꽃받침에 노란 꽃이 피는 갯질경이, 연보라 꽃잎 가운데 꽃술이 노란갯개미취, 노란 별 모양의 꽃이 바위나 돌 틈에 한울금씩 무리 지어 피는 기린초, 바위채송화 등이 빈터의 곳곳에 자라났고 취명아주, 띠풀, 해홍나물, 퉁퉁마디 등은 바닷가 쪽에 자랐고 샛강 변에는 천일사초, 억새, 갈대가 우거졌다. 그렇게 제법 키가 큰 풀들 외에도 땅바닥에 달라붙은 듯한 쑥이나 냉이, 민들레, 번행초가 작은 것들끼리 모여서 자랐다. 어떤 것은 부근에 피어났다가 겨울동안에 말라 죽어버렸지만, 봄이 오면 날아간 씨앗으로 새싹이 나서 장소를 옮겨 다시 피어나곤 했다. 어느 꽃나무는 한해 동안, 또 어떤 풀은 두해를 나는 게 고작이었다.
- P34

밤이되면 나무들은 산에서 내려와 들판을 지나 바다로 불어가는 바람에 잎을 살랑이면서 나직하게 노래하는 것 같았다. 이렇듯 나무에게 하루는 한해이고 그것은 열번의 해, 백번의 해와도 같을 것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봄의 성장과 여름의 번성에서 열매를 맺고 잎이 떨어지는 가을을 지나 한해의 끝인 겨울이 사계절 중에 특별한 것은, 오래 사는 나무에게도 죽음 같은 정지 기간이기 때문이었다.
큰 나무들은 자연스럽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살았다. 나무들은 먼 저쪽이나 바로 뒤에 앞에 누가 어떤 나무가 있는지 느끼고 있었고, 땅속에서 뿌리들의 접촉으로 또는 이파리와 꽃과 열매의 냄새와 성질과 뿜어내는 습도와 물질과, 모여드는 벌레와 새 들 때문에 빈터 부근의 숲 전체를 서로 알게 되었다. 나무는 나이테 속에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흔적을 남겼다. 그 겹겹의 섬유질 속에 계절의 재활과 성장과 갈무리와 휴지의 반복이 새겨졌다. 이를테면 지상에서 계속되는 이 반복은 길건짧건 시작이나 끝이 아니라 오래오래, 또다시 오랫동안 되풀이되는 변화에 지나지 않았다. - P37

팽나무는 꽃을 피우고 풋열매를 맺고 잎이 무성한 여름부터 겨울을 준비했다. 나무는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몇달동안 죽은 듯 잠을 자면서도 이 겨울눈으로 하여 되살아났다. 봄이 오면서 세모 또는 길쭉하고 아니면 동그란 각종의 눈들이 겉으로 흘러나와 말라붙은 끈적한 진물과 몇결의 보자기로 감싼 듯 딱딱하게 굳은 껍질의 틈을 헤치고아주 조금씩 싹을 밀어냈다. 겨울눈을 따서 헤쳐보면 수십장의 미세한 잎들이 돌돌 말려서 겹쳐 있었다. 해마다 찾아오는 겨울은 모든 활동을 멈춘 나무 자신의 몸속에 봄의부활을 간직하게 하는 일시적인 기다림의 기간이었다.
꽃 피고 열매가 익고 잔뜩 번성했던 여름의 끝에 태풍이 찾아왔다. 해마다 그맘때가 되면 거세고 습기 찬 바람이 서남쪽에서 검은 구름을 몰고 와서 폭우를 뿌렸다. 바다와 갯벌과 들판은 온통 회색으로 가득 차고, 바람은 나무를 꺾기도 하고 뿌리째 뽑아버리기도 했다. 풀과 키 작은 관목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대로 줄기와 가지를 숙이고 미친 듯이 잎사귀를 팔락였다. 어두운 하늘을 하얗게가르며 번개가 줄지어 번쩍이고 뒤이은 천둥소리가 하늘을 찢는 것 같았다. 내륙에서 불어난 강물은 하구를 가득채워 어디서부터 바다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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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한마리가 날아왔다.
동쪽 하늘 멀리 흰 눈을 덮어쓴 산맥이 연이었고 그 아래로 높고 낮은 산과 언덕이 물결치듯 내려오다가 그치고, 키 작은 관목 숲이 우거진 들판이 나오면서 드넓은 습지가운데로 강이 나타났다. 어디쯤에서 시작하는지 알 수 없는 긴 강은 구불대며 서쪽에서 동북쪽 바다를 향하여 흘러갔다.
산맥의 깊은 숲에는 가문비나무, 전나무, 낙엽송, 자작나무가 뒤섞여 자라났고 산세가 낮아지면서 참나무, 사시나무 그리고 월귤, 들쭉, 산딸기, 시로미, 노간주나무 열매, 붉나무 열매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자라나 새와 작은 짐승 - P7

들이 먹고살 만해 보였다. 물가에 가까이 가면 물풀과 같대가 자라난 곳과 뺄밭과 모래땅과 자갈밭이 드문드문 나뉘어 있었다. 강변에도 여러 종류의 새들이 살았지만 서로식성과 먹이가 달라서 다투고 빼앗을 필요 없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둥지를 지어 살았다.
개똥지빠귀라는 새 한마리가 산자락이 끝나는 낮은 관목 숲으로 날아왔다. 등은 껍질 벗은 소나무처럼 짙은 갈색이었고, 머리는 검은색에 눈 위로 눈썹 같은 흰 선이 그어졌고, 배는 흰 바탕에 검은 반점이 얼룩얼룩했다. 그곳은 작은 새들의 낙원이었다. 새들이 땅바닥 아무 데나 작은 부리로 젖은 나뭇잎을 들추고 흙을 파헤치면 지렁이든 굼벵이든 나방이든 애벌레든 맛있는 것들이 나왔다. 개똥지빠귀란 새는 어느 것이나 똑같은 모양이라서 여럿이 모이면 분간하기가 어렵지만, 방금 낮은 숲으로 날아온 이 개똥지빠귀는 알록달록 검은 점박이 가슴털이 동그랗게 뜯겨나간 자리가 있었다. 그건 지난여름 어느 날, 강 건너편 풀밭으로 벌레를 잡으러 갔을 때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흔적이었다.
개똥지빠귀는 풀밭에 벌레를 잡아먹으러 내려오면 자기 걸음을 재어보듯이 쪼르르 달려가다가 멈칫 서서 하늘보고, 좌우 보고, 땅속을 부리로 뒤적거리다가 다시 쪼르 - P8

르 달려가곤 했다. 새가 멀리서도 벌레가 있을 듯한 장소를 찜해놓고 달려가 멈추어 서서 부리로 몇번 콕콕 찌르면나뭇잎 아래나 얕은 땅속에서 지렁이, 애벌레, 굼벵이, 딱정벌레가 나왔다.
풀밭 위쪽 언덕 비탈에 자라난 참나무 가지 위에 갈색의털북숭이 새가 앉아 있었다. 그것은 말똥가리였는데, 동그랗게 놀란 듯한 눈을 부릅뜨고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날개를 펼치고 풀밭을 향하여 날아갔다. 말똥가리가 지상을 훑듯이 얕게 날아 지나가면서 발가락을 쫙 벌려 벌레 잡기에 골똘한 개똥지빠귀를 잡아챘다. 개똥지빠귀는 울부짖고 날개를 퍼덕이며 천적의 발톱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자작나무 숲에 둥지를 튼 까마귀들이 후다닥 날아올랐고 그중 세마리가 말똥가리에게 달려들었다. 까마귀들은 몸집은 작았지만 빠르고 날쌔게 말똥가리를 추격하여 등뒤에서 쏘았고, 다른 까마귀 두마리도 연달아 달려들며 날개로 적을 후려쳤다. 말똥가리는 움키고 있던 개똥지빠귀를 놓쳐버렸다. 까마귀들이 말똥가리를 자기네 영역에서 멀리 쫓아내는 사이에 겨우 빠져나온 개똥지빠귀는 강건너편 관목 숲의 아늑한 둥지로 날아갔다. 작은 새는 찔레나무의 가시덤불 아래 지은 둥지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개똥지빠귀는 앞가슴의 털이 뜯기 - P9

고 날개깃도 몇개 빠졌지만, 둥지에서 쉬면서 싱싱한 들쭉과 시로미 열매를 따 먹고 회복이 되었다. 이 개똥지빠귀가 같은 부류의 새와 달라진 것은 가슴의 검은 얼룩 털이 동그랗게 빠져 하얀 점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머나먼 남쪽 나라에서 겨울을 보낸 새들이 제각기 무리를 지어 아무르 강변에 찾아온 것은 네번째 달이 끝나갈때쯤이었다. 시베리아는 이제 가을부터 겨우내 얼어붙었던 강이 풀리기 시작했고 기슭에는 떠내려오다 걸린 얼음덩이와 살얼음이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그래도 풀과 꽃은 이른 봄의 바람과 진눈깨비를 견디고 싹을 틔워 파릇파릇올라왔다. 기러기, 두루미, 황새, 오리 같은 물가의 새들이 먼저 습지에 자리를 잡았고, 개똥지빠귀들은 근처에 살던 스무마리 또는 서른마리쯤의 작은 무리가 먼 길을 날아와늘 돌아오던 고향의 들녘 숲이나 들판 가운데 덤불 속에둥지를 지었다.
흰 점박이 개똥지빠귀는 이번 여행에서 짝을 잃었고, 새끼들과는 이웃 둥지에 살며 가장 약한 한마리를 보살펴주었다. 약한 새끼는 가을에 남쪽으로 내려가며 중간의 쉼터에서 출발할 때마다 늘 뒤처졌고, 흰 점박이는 무리에서멀어지지 않도록 새끼 곁을 날며 보살폈다. 남쪽 나라에서S - P10

겨울을 보내는 동안에는 산수유와 가시나무 숲에 둥지를지어 온 무리가 굶주리지 않고 살아냈다. 흰 점박이의 짝은 지난봄에 남쪽에서 떠나 북으로 날아오다가 두번째 쉼터에서 사라졌다. 새들은 종종 뒤처져 외톨이가 되었다가밤중에 부엉이, 올빼미 등에게 잡아먹히기도 했다. 흰 점박이는 낯익은 아무르 강변의 관목 숲에 도착하여 마지막 새끼와 헤어졌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다 자란 새끼가 여느 때처럼 나란히 앉으려 하자, 아비 새인 흰 점박이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위협적으로 날개로 치며 머리를 치켜들었다가 숙이면서 새끼의 대가리를 쪼아버렸다. 녀석은 놀라서 급히 날아올랐다가 다시 아래편 가지에 앉으려는 것을 흰 점박이가 두 날개를 펼치고 퍼덕이며 찌르르 높은 경고의 소리를 내지르자 멀리 달아나버렸다. 이제 각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놈도 알았을 것이다.
여섯번째 달이 되자 풀밭과 땅 밑은 물론이고 공중에도 벌레가 사방에 날아다녔다. 이제부터 여기는 들판이건 강물이건 바닷가건 어디나 낙원이 될 것이다. 개똥지빠귀들은 너른 평원의 덤불 속과 관목 숲에 흩어져 살았다. 먹이가 풍족한 때에는 모여서 살 필요가 없었다. 한해 중 바로이맘때에 흰 점박이는 새로운 암컷을 찾아야 했다. 이 수컷 개똥지빠귀는 관목 숲 가운데 제법 높은 개살구나무 가 - P11

지에 앉아서 ‘쯔빗 빗 호로로록‘ 맑고 높은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목을 쳐들고 노래할 때 연분홍의 별처럼 빈 나뭇가지에 피어난 개살구꽃이 파르르 떨리곤 했다. 흰 점박이의 노래는 매번 똑같은 소리가 아니었다. 그냥 ‘호로로 호로로로‘ 하기도 하고 짧게 끊어서 ‘짝짹짹짹‘ 하기도 하며 길게 ‘휘이이이‘ 하는 휘파람 소리를 내기도 한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노래하고 어떤 때에는 캄캄한 밤에 어둠 속에서 울기도 한다. ‘짹짹 찌릿‘ 하는 암컷 개똥지빠귀의 응답이 들리자 흰 점박이는 한껏 목청을 높여 아름답게 노래했다. 개살구나무 아래 풀밭 위에 암컷 개똥지빠귀가 내려앉았다. 흰 점박이는 아래로 날아가 암컷의 주위를 뽐내듯이 재빨리 달리다가 우뚝 서서,
꼬리는 아래로 낮추고 목은 위로 치켜올려 키를 한껏 늘리면서 자기가 얼마나 크고 힘찬 새인가를 보여주었다. 암컷은 흰 점박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근처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랐다가, 조금 더 먼 곳에 보이는 측백나무와 눈잣나무몇그루가 모인 숲으로 날아갔다. 암컷의 배와 가슴은 갈색 점이 보다 짙은 갈색으로 덧칠되어 뭉개진 것처럼 보였고 날개는 수컷보다 좀더 밝은 적갈색이었다. 암컷이 나무 아래 땅에 내려앉자 흰 점박이도 뒤쫓아 아래로 내려왔다. 암컷은 고개를 숙이고 날개를 접고 얌전히 앉았고, 흰 - P12

점박이는 그 등 위에 올라앉아 짝짓기하고는 얼른 떨어졌다. 개똥지빠귀 암수 두마리는 제각기 다른 소리로 ‘짹짹찌르르‘ 하며 요란하게 노래했다. 어디선가 이들의 기척을 알아챈 수컷 개똥지빠귀 한마리가 날아와 앉더니 재빠른 걸음으로 주위를 맴돌다 정지해서 그들을 관찰했다. 흰점박이는 재빨리 그 녀석을 향하여 달려가 머리를 숙였다치켰다 하며 달려들었다. 경쟁자 수컷은 이미 짝짓기가 끝났다는 걸 알아채고 포르릉 날아가버렸다. 암컷은 잘 익은 개암 열매처럼 밝은 적갈색 날개를 가졌으니, 개암이 날개라고 부를 만했다. 흰 점박이가 하나뿐인 개똥지빠귀가 된것처럼 개암이 날개도 하나뿐인 암컷 개똥지빠귀가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 너른 하늘과 땅에서 단둘이 살아나갈 한쌍의 새가 되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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