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의 사랑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 P55
안미옥
잊고 싶은 상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늙고 환해지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렇게 불을 켠 듯 환하고, 그래서 오히려 더 아파지는 자리를 향해 가겠다고. 사랑이 나를 버리고 갔을 때, 세월도 저만치 가고 내게 남은 것은 몸 얻지 못한 마음과 말 얻지 못한 꿈뿐일 때,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나도 시인처럼 기꺼이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갈 수 있을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무지개조차도 다시 아프고야 마는 자리. 아프더라도, 기꺼이 다시 겪는 자리로 갈 수 있을까.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내내 나에게 묻고 있다. - P56
장미도
펼쳐진 고독을 읽고 벗어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견더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시집입니다. ‘마음‘과 ‘사랑‘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요. 이 시에서 사람은 "환하고 아픈" 사랑의 자리에 있습니다. 썩었을지도 모르는 그 마음을 더듬어볼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사랑입니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에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존재입니다. 아무도 없는 문 앞에서 노크를 하고, 잠긴 창문 앞에서 계절을 기다리는 사람, 사랑의 마음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합니다. - P57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 P65
김뉘연
자신에게 주어진 언어와 무관히 시인은 저마다의 모어를 구사한다는 진실을 몸소 증명했던 한 시인의 집을 통과한다. 몸으로 지나간 말들을 지나, 「흰 꿈 한꿈에서 흘러나온 "당신......" 이 잠시 머문 곳을 본다. 「혼자 가는 먼 집」을 여는 "당신......"은 말줄임표를 지나며 소리를 얻는다. 시에서 혼자인 나는 당신이라는 말이 참 좋아서 당신을 부른다. 울음과 슬픔과 상처와 시름과 참혹과 기타 등등의 사이에서 좋아서, 참을 수 없어 터져버린 웃음소리가 당신이라는 먼 집까지의 거리를 간간히 좁히며 시의 리듬을 조율한다. 거듭 호명되며 시를 통과해낸 당신은 영영 "킥킥 당신"이다. - P66
박지일
책에서 말줄임표를 마주할 때마다 허수경 시인의「혼자 가는 먼 집」을 떠올린다. 할 말이 없거나 할 말을 생략하기 위한 말줄임표가 아닌, 변방의 무수한 말들을 펼쳐놓기 위한 말줄임표. 효과를 위해 사용하는 말줄임표가 아닌, 효과 그 자체의 말줄임표. 「혼자 가는먼 집」의 말줄임표는 종이 위로 차분하게 정착한 여섯개의 점으로 읽히지 않는다. 각각의 점은 끊임없이 둥실거린다. 각각의 점은 이곳과 저곳과 그곳을 동시에떠다니는 발들의 버둥질에 가깝다. 킥킥대면서라도 현재에 자신을 발붙이고자 쓸 수밖에 없는 버둥거림으로서의 점. 허수경 시인의 정처 없음을 배길 수 없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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