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구름은 썩어가는 검은 건물 위에 우연히 멈추고 건물안에는 오래된 편지, 저 편지를 아직 아무도 읽지 않았다. 누구도 읽지 않은 편지 위로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곧 건물은 사라지고 읽지 않은 편지 속에 든 상징도 사라져갈 것이다 누군들 사라지는 상징을 앓고 싶었겠는가 마치 촛불 속을 걸어갔다가 나온 영혼처럼 - P100
강혜빈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시인은 빛 속으로 들어간다. "촛불 속을 걸어갔다가 나온 영혼처럼" 재와 연기만 남았겠지만 부재와 상실을 응시한다. 동시에 지금 여기로부터 과거의 시간을 예민하게 감지한다. 구름은 썩어가는 검은 건물 위에 우연히 멈춘다. 시인이 시에 직면하기 직전, 시와 가까운 곳에서 서성거리듯. 넓은 의미의 공간을 시와 마주하는 특별한 ‘장소‘로 변모시킨다. 우연이란 의도가 배제된 것, 어떤 일이 저절로이루어져 공교로운 것. 다만 흐르고 멈추었다가 다시흐를 뿐인 구름은 나날이 낡아가는 화자의 영혼 위에잠시 머무르는 시적 영감과도 닮았다. 우리가 발견하는 수많은 장소 중에서 유독 썩어가고무너져가는, 이제 쇠락한 "검은" 건물 위에 멈춘 구름은 시간이 거기 있음을 가시화한다. 수많은 공간 중 하나였을 건물을 기억의 장소로 기능하게 한다.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은 이제 필연적인 일로 변모한다. "건물은 사라지고" 건물 안에 덩그러니 놓인 "오래된 편지"도 사라질 것이다. 오래된 화자의 영혼처럼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언어들. 시가 읽히지 않는다면 시를 쓰 - P101
는 사람도 사라질 것이다. 상징도, 비유도, 무용한 감탄사들도 사라짐은 자연스러운 것. 그러나 더없이 쓸쓸한 것. 회신 없이 폐기된, 너무 오래 유보되어 검어진 마음도 거기 있다. 아니, 거기 있었다. 과거가 되어 현재에 남는 것은...... 공터에 머무르는 검은 영혼, 정처없는 구름과도 같은. - P102
신이인
"누구도 읽지 않은 편지". 슬픈 말이었다. 더 슬픈 말이 남아 있는지, 그것이 한 편지의 몸 밖으로 나왔는지 여전히 안에 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을 편지들은 해부되지 않은 채, 저절로 잊힐 미라를 기다리겠지. 지구에 모여버린 불운하고 평범한인간들처럼. 구름처럼, 어쩔 수 없는 힘과 물질 앞에서는 한 번씩 철없이 엉엉 울었다. 사라지는 마음, 썩어가는 몸, 이제는 없는 사람, 남아버린 글자...... 그런 것들. 허수경의 시는 거의가 그런 것들이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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