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에 관해서......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일이다. 우리 가족 모두가정원에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데, 손자 다니엘이 달팽이 한 마리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녀석이 나를 돌아보더니,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달팽이는 왜 이렇게 느리게 움직이는 거예요?」뜻밖의 질문에 당황한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한동안 우물쭈물했다. 일단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고대답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언제일지는 몰라도 꼭 대급해 주겠다고 말이다.

달팽이들이 왜 그렇게 느린지 알고 싶어 하던 달팽이는 여느 달팽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없었어. 그런데 그 달팽이는 그 문제 때문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게 아니었단다. 다른 문제라면 몰라도 이름이 없다는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야. 나이 많은 달팽이들은 녀석이 왜 그렇게 이름을 갖고 싶어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물어보면 그 달팽이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납매나무는 그렇게 납매나무라고 부르잖아요. 가령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몸을 숨길 때, 우린 납매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한다고 하죠. 그리고 맛있는 민들레도 그렇게 민들레라고 부르잖아요.  - P15

수리부엉이를 만난 후, 달팽이들이 왜 그렇게 느린건지 알고 싶어 하던 달팽이는 또다시 느릿느릿, 아주느릿느릿하게 납매나무가 있는 쪽으로 가고 있었어.
그러던 중, 그들의 말로 <관습>이라고 하던 것에 몰두하고 있는 달팽이들을 만나게 됐단다.
그 일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어. 어느 날, 갖가지 색깔의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려 들판으로 떨어졌다는 거야.
모양새가 반듯하고, 가장자리도 매끈한 게, 그들이 여태껏 본 나무나 풀의 이파리들과는 전혀 달랐어. 그나뭇잎들은 한동안 바람을 타고 떠다니면서 춤을 추듯 하늘하늘 나부끼다가, 결국엔 물기에 젖어 축축한 - P23

단지 느린 이유를 알고 싶었고, 이름을 갖고 싶었을뿐인데, 할아버지 달팽이가 윽박지르자 달팽이는 그만 풀이 죽고 말았어. 더군다나 주변에 있던 달팽이들중 자기편을 들어 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야. 심지어 몇몇 달팽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어. 할아버지 말이 맞고말고. 저 자식만 사라지면 우리도 좀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말이야.」바로 그 순간, 달팽이는 목을 길게 빼더니, 눈이 달린 더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주변에 있던 달팽이들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어. 그러곤 작디작은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말을 했단다. - P28

「여러분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 제가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달팽이들이 왜 느린 건지 알게 되고 제가 이름을 갖게 되는 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거예요.」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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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공원은 이제 이 도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내 방이 있는 부모의 집보다도 기영의 집보다도 나는 공원이 좋았다. 좋아하는 장소가 생긴다는 것은 마치 인생에경력이 쌓이는 듯한 기분이어서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나는 공원이 좋았다.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계절을 느끼는 것.
다들 활기차 있는 것, 배드민턴을 치다가 실수를 해도 웬만해서는 웃어넘기는 것,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노부부들을 보는 것. 가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어슬렁거리는 수상쩍어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개들, 공원에는 많은 개들이 돌아다녔다. 들개가 아닌 강아지들이벤치에 앉아 있으면 산책을 나온 강아지들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 P153

사람들이 나를 남자로 착각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나는 백칠십오 센티미터의 키에 머리가 짧고 화장도 하지 않는데다 몸매가드러나지 않는 옷을 주로 입었다. 길을 가는데 총각이나 아저씨,
하고 나를 부르며 길을 묻는다든가, 찜질방에서 파란색 옷을 주며 남자 탈의실로 안내를 한다든가 하는 일들이 있었다. 언젠가인도로 여행을 갔을 때 함께 간 친구는 예외 없이 ‘madam‘으로불렸지만 나는 때때로 ‘sir‘로 불렸다. 한참이나 내게 호객행위를하던 릭샤꾼이 포기하고 돌아서며 근데 너 남자야, 여자야? 하고대놓고 묻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 익숙했다. 남자로 오해당하면기분 나쁘지 않으냐고 누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오해당하는 건괜찮았다. 때로는 안전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성가신 건 내가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였다. 어떤 사람은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사과를 했는데 그것도 좀 웃긴 일이지만 그건 그런대로 점많은 편이랄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동그란 눈을 하고 찬찬히 내얼굴을 뜯어본 뒤 가슴을 뚫어져라 봤고, 어떤 사람은 왜 그러고다니느냐고 물어봤으며, 어떤 사람은 조언을 했다. 머리를 기르라거나 화장을 하거나 좀더 여성스러운 옷을 입어보라거나 말할 때 솔 톤을 내는 것이 좋다는 식이었다. 나를 위로한답시고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왜들 그런 오해를 하지?  - P155

그 비명은 오래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비명으로 말하려고 했던 스무 살 때였다. 헌책 값을 잘 쳐준다는 책방에 가려고 무거운 짐을 겨우 들고 버스에 탔다. 다행히 자리가 하나 나서 앉았지만 책이 잔뜩 든 가방을 둘 데가 없어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다리가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잠깐 졸았다. 마비된 허벅지가그리고 또 아랫배가 이상하게 꿈틀거리는 것 같은 기분에 잠에서깨서 내 배를 내려다보았을 때 거기에는 손이 하나 있었다. 이게뭐지. 꿈인가. 내가 멍하니 내려다보는 내내 손은 책이 든 가방을가림막 삼아 내 배를 주무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따라 옆자리로시선을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잠깐 멈칫하더니 태연히 손을 거두어갔다. 이게 뭐지. 이게 뭐야? 씨발놈이 인간처럼 - P165

생겨가지고 미친 새끼가.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내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눈길이 무심히 남자의 손에 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인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혹시 다 보고 있었나. 보면서 아무 제지도 하지 않았나. 나란히 앉아 있어서 남자와 내가 아는 사이일 거라고 여겼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나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친 새끼들이 포르노에 뇌가 절여져서 제대로 된 사리 분별을 못하나? 하지만 나 역시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서서히온몸이, 뇌까지도 마비되는 것 같았다. 나도 내 앞에 선 인간과 똑같은 방관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남자를 해할 방법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인가? 타인을 해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정상적인 걸까. 나는 왜 이런 순간에도 자기검열을 하고 있다. 생각을 멈추고 기사에게 외쳐야 한다.
경찰을 불러주십시오! 이 남자가 저를 성추행했습니다!
잠시만요. 내릴게요.
내가 혼란해하는 사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는 내가자리를 피할 새도 없이 앞좌석과 내 무릎 사이의 비좁은 틈을 통과하며 팔꿈치로 내 머리를 쳤다.
미안합니다.
남자는 내 얼굴을 돌아보며 웃는 낯으로 사과했다. 그다음의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난다. 나는 끙끙대며 들고 탔던 가방을 번쩍 들어 남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무기로 삼을 만한것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목이 꺾여서 죽어버렸 - P166

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목이 꺾이지도 죽어버리지도 않고 나를 돌아봤다. 남자보다 다른 승객들이 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학생, 왜 그래요? 왜 그랬지. 남자가 나를 향해 웃었기 때문에. 아니 실수로 내 머리를 쳤기 때문에. 아니 남자가 내가 잠든 틈을 타 내 배를 주물렀기 때문에. 물론 그것 때문이다. 남자가 나를 폭행했기 때문에. 나는 그제야 비명을 질렀다. 나는 늘 늦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 결정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 모든 과정은 아주 더디게 진행되고 그만큼 반응 속도도 늦다. 나는 때맞춰 지르지 못한 늦은 비명을 질렀다. 비명만큼 압축적으로 많은 의미를담고 있는 언어가 있을 수 있을까. 비명은 나의 언어였다. 그 순간내게 가장 논리적이고 합당한 말이었다. 나는 사력을 다해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돌아보았고 무언가를 직감한 듯 남자가 열린 하차 문으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사람들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았다. 순식간에추론해냈다. 너무 흔하고 상투적인 일이었으니까. 계속 반복되는일이었으니까.
- P167

나는 기영이 판정관이나 심문관처럼 굴지 말고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줬으면 했다. 팔짱을 끼고 어디 책잡을 데가 없나 따져보기 전에 일단 경청부터 해줬으면 했다. 실수 하나에 나를 의심하지 말고 우선은 믿어줬으면 했다. 하지만 나조차도내 멍청함에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나서, 모든 걸 만회하고 싶어서 더 필사적인 사람이 되었다. - P168

예를 들어 사랑을 속삭이는 행위는 남녀 간의 일로 한정되어 있었다. 질투도 부부나 사랑하는 이성 사이에서나 가능했다. 여성 비하적인 표현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런 표현들은우리가 살아온 시대나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떠올려보면 크게 놀지는 않았다. 동성애자의 존재를 지우고 여성의 지위를 깎아내리는 일은 실제 삶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니까. 당연하게도,
국어사전은 한국사회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반영한 표상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리고 개에 대한 표현들을 마주칠 때에도 화가 났다. 만약 지구에 대한 정보가 없는 어떤 외계인이 한국인의 생태를 파악하기위해 국어사전을 분석한다면 개에 대해 뭐라고 할까? 인간을 잘따르고 영리하긴 하나 인간에 비하면 아주 열등하고 하찮은 개 발싸개 같은 생물이라 판단할지도 모른다. 물론 비속한 의미를 담을때 쓰이는 ‘개‘가 모두 다 개소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발음이동일한 탓에 개를 떠올리지 않기란 쉽지 않고 개는 자기 것이 아닌 의미를 거듭 뒤집어쓰면서 그것의 진짜 주인으로 오해당한다. - P177

대담하게 어떤 일을 도모하자고 제안할 때도 있었다.
때로는 비장하게까지 여겨져서 사정을 잘 모르는 미애조차 숙연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런 모습들이 놀랍고 얼마간 감동적으로 다가올 때가 없지 않았으나 미애의 눈에 점점 더 또렷하게보이는 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들의 열망이었다. 그들에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고,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 확신을 지켜나갈 여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자신을 그 모임에 끼워준 진짜 이유라는 것을미애는 모르지 않았다.
세아는 북극에 사는 곰 아저씨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플라스틱 섬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민이가 방법을알 것 같은데?
- P199

그건 희망의 모습과 비슷했다.
삶에 기대를 품는 것이 번번이 자신을 망친다는 결론에 이른뒤로 미애는 가능한 한 희망을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노력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삶은 언제나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야만 했고, 그래서 희망을 부풀리는 능력이 불필요하게 발달한 거라고, 자칫하다간 다시금 눈덩이처럼 커진 희망 아래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에게 수시로 경고하는 것만은 잊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금 희망이라고 할 만한 게 생겨나고 있었다. 아니,
사는 동안 그런 게 절실하지 않은 때가 한 번도 없었다는 걸 미애는 모르지 않았다. - P201

미애는 어떻게든 문을 열 수 있는 말을 찾고 싶었고, 그럴수록어떤 말로도 굳게 닫힌 저 문을 열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커졌다.
그럼에도 미애는 계속 말했다. 나중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문이 열릴 거라는 기대와 결코 문이 열리지않을 거라는 체념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마음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고 나서야 미애는 돌아섰다. - P216

나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희망이 있다. 희망을 가져라. 그렇게 말할 때의 확고하고 단호한 표정이 아니라, 주저하고 망설이면서도 어쨌든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다. 희망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일단 가봐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의변화. 그 변화가 불러오는 찰나의 활력과 활기를 붙잡고 싶었던것 같다.
희망이라는 것은 지금은 없는 어떤 것을 상상하는 힘이고 그것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마침내 어디에 다다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자세에 따라, 잠깐 고개를 돌리면또 달라지고 마는 직진의 방향처럼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논리와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때때로 무모하고 터무니없기까지 한 어떤것. 그러니까 희망은 그저 아주 작은 가능성을 담보한 에너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 P221

진우뿐만 아니라 한인 식당, 한인 슈퍼, 한인 여행사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은 모두 그런 대우를 받으며 일했다. 457 비자를 신청해준다는 명목으로 주에 오십 시간씩 일을 시키면서 주급으로 백불만을 주는 업체도 있었다. 이 년을 무상으로 일해주고 비자를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진우의 사장은 악덕 업주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들 했다. 진우 역시 부당한 처우에 불평하기보다는 자신이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했다.
457 비자로 이 년을 일하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었다. 그러면 많은 것이 달라질 거였다. 급여는 적어도 두 배, 경력을 고려하면 세 배가 될 터였고 법정 유급휴가사 주에 공공 의료와 공교육이 무료였다. 진우는 한국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들을 약속하며서인을 설득했다.
한국에서 혼인신고만 하고 돌아온 이후에도 문제가 남아 있었다. 457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영어 점수가 필요했는데 주에칠십이 시간씩 일하는 진우로서는 공부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필요한 점수를 받으려면 일을 그만두고 몇 달간 시험 준비에 전념해야 했는데, 진우의 시급이 서인보다 높았고 홀에서 영어로 서빙을 하는 서인의 영어 실력이 진우에 비해 훨씬 나았으므로, 진우가 일을 하고 서인은 영어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진우 대신 서인의 이름으로 비자 신청을 하게 되었다. - P236

진우는 서인을 때리고 싶었다. 뺨을 갈기고 그 작은 어깨를 잡아 마구 흔들고 싶었다. 둘 다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몇 주에 걸쳐서 같은 싸움을 계속하는 동안 진우에게 점점 더 명확하게 다가온 것은 서인이 돌아간다면진우의 비자가 취소되어버린다는 사실이었다.
헤드 셰프로 일하면서 457 비자를 얻어낸 것은 진우였지만 서류상에는 서인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진우는 서인의 파트너자격으로 거주를 허락받은 것뿐이었다. 진우가 영어 점수를 받고다시 비자를 신청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한번 비자가 취소되면 그후로는 다시 받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 - P239

진우는 주머니에 있는 오팔 반지를 생각했다. 진우는 서인에게 반지를 내밀며 무릎을 꿇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입장해 서인에게 입을맞춘 적도 없었다.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서인의 눈을 닮은 아이를 보며 경탄한 적도 없었다. 진우와 서인은 빛나는 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빛나는 순간 진우는 그들이 늘그것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절대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붉은 햇빛이 차 안에 가득 들어찼다. 진우는 온통 붉기만 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 P253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당신이 이 소설을 읽으며 슬퍼하기를 바란다. 뒤뜰을 가꾸는 서인의 뒷모습을, 캥거루를 쇠막대로 내리치는 진우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아주기를 바란다. 지나가버린사랑을 온 힘을 다해 움켜쥐고 있는 이들을 안쓰럽게 여겨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사랑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언젠가는 사랑에 다가갈 수도있지 않겠냐고 말해주기를 바란다.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속 쓰겠다. 사랑을 쓰겠다. 손에 잡히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 P255

병든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아픈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자주 아픈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시름시름 앓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체력이 좋지 않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알을잘 낳지 못하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알을 낳지 못하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살이 잘 찌지 않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체구가 작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근육이 너무 많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날고 싶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호기심이 많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고집이 센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질투가 많은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선한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산만한 닭(쓸모없음/폐기처분). 똑똑한 닭(쓸모없음/폐기처분). 그리 똑똑하지 못한 닭(쓸모없음/폐기처분). 화를 잘 내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잘 웃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잘우는 닭(쓸모없음/폐기처분). 소심한 닭(쓸모없음/폐기처분).

건강한 닭. 알을 잘 낳는 닭. 살이 잘 오른 닭. 남은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닭, - P278

올해도 야생 철새의 분변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되었다. 그게 변이 바이러스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사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바이러스는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이한다. 변이하고 또변이한다. 변이하고 또 변이하며, 환경에 잘 적응한다. 살아남기위한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철새도 살아남기 위해 이동한다.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알을 낳기 위해, 추위를 견디기 위해. 국경을 넘어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는 철새들이니, 언제 어디서든 얼마든지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다고 해서 철새들이 모조리 죽는 것도 아니었다. 모조리 감염되는 것도아니었다. 물론, 참새나까치와 같은 텃새들도 마찬가지다. 모조리 감염되는 건, 철새가 아니라 축사의 닭들이었다.  - P279

인간이 나와 인간을 만나 인간에 대해 사유하는 문학 인간이 인간에게 감동받는 문학, 인간에 대한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문학. 오직 인간만을 위한 문학, 인간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문학,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문학.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문학. 망각의 문학, 의인화. 닭에게 인격을부여하는 건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붙잡아 쓸 수 없음. 문장을 이어갈 수 없음. 닭에게 인간의 목소리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닭의 목소리가 부여될 수 있기를 바람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쓰기. - P290

죽음이 너무 많았다. 죽음이 너무 많아서 죽음인가보다 했다.
죽음이 너무 많고, 죽음이 여전히 너무 많아서 여전히 죽음인가보다 했다. 죽어가다가 죽음. 죽음이 너무 많아서 나도 죽나보다 했다. 나도 죽어가다가 언젠가 죽음. 그러나 닭들은 너무 빨리 죽어갔다. 알을 낳지 못해 죽고, 알을 많이 낳아서 죽고, 병들어서 죽고, 병들 수 있기 때문에 죽고, 스트레스 받아서 죽고, 끼여 죽고,
눌려 죽고, 깔려죽고, 먹히기 위해 죽고, 죽고 또 죽고, 빠르게, 빠르게 죽고 빠르게 죽으면, 그다음에는 더 빠르게 죽어야 했다. 너무 빨리 죽어서,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때가 있었다. 내가 아는 죽음보다 사실 더 많은 죽음이 있었다. 더 많은 죽음이 있다. 나는 내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많은 죽음들을 빌려 산다. - P296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모자이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비극이 있었다. 음소거로도 지워지지 않는 소리가있었다. 처참하게 죽어가는 닭들의 비명. 죽음 앞에서 고통스럽게우는 사람들. 그러나 내가 목격한 것은 죽어가는 닭들이지 죽어가는 닭의 심정이 아니다. 울고 있는 사람이지 울고 있는 사람의 심정이 아니다. 나는 그들의 입장이 되어 글을 써보려고 노력하지만, 차마 쓸 수 없음. 이미 벌어진 비극에 대해서는 쓸 수 없음. 상상력이 조금이라도 동원되는 순간, 누군가의 고통은 허구가 될 수있다. 슬픔은 가짜가 될 수 있다. 그런 생각들이 나를 붙잡아 아무것도 쓸 수 없음. 소설을 쓰는 데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서 아무것도 쓸 수 없음. 어떤 끄덕거림, 토닥거림. 타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는 상상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타자는 내가 상상한 타자이기도 하다. 타자를 함부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붙잡아 아무것도 쓸 수 없음. 그러나 반드시 써야 한다면, 어디에선가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는 쓸 수 있을지 모른다. 또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일에 대해, 어쩌면 앞으로 벌어질 수도 있는 일에 대해 누구라도겪게 될 수 있지만, 누구라도 겪어서는 안 될 일들에 대해. 새 인간 사태 이후의 모습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비극은 현실이 아니라 소설이 되어야 한다는 가정하에 반드시 소설적 허구가 되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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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내가 진심으로 감탄해 마지않은 건 펜스 너머로 펼쳐진 풍경이었다. 비탈을 올라올 때는 그저 암벽처럼 보였던 축대의 뒤편으로 숲이 우거져 있었던 것이다. 조금씩 다른 농도로 이루어진 초록의 다발을 가만히 눈에 담고 있자니 서울 근교의 펜션이나 산장으로 캠핑을 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왜 이런 풍경을 보지 못한 건지 의아해하는 사이 인주씨가 말했다. - P114

그리고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테라스가 아닌 베란다라는 공간을 둘러봤다. 나무 바닥이 빛을 반사하며 윤이 나는 것처럼 일렁였고 이마에 와닿은 햇볕이 한가을임에도 제법 따스했다.
그렇게 얼마쯤 서 있었을까. 건너편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느끼며 숨을 한가득 들이마시는데 가벼운 진동 소리가 났다. 눈을 돌리자 인주씨가 휴대폰을 확인하며 피식 웃었고, 이내 뭔가를 증명하려는 것처럼 화면을 내쪽으로 들어 보였다. 카페에서책을 읽고 있는 주호의 사진 위로 하트 이모티콘이 선명했다.
빨리 오네요. 서울 들어오면 전화한다고 했거든요. - P115

그날 주호는 한때 경험했던 배우의 삶에 대해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몸담았던 극단의 역사와 구조, 운영 방식은 물론이고 함께활동했던 선후배들의 성격이나 심리상태, 평균 소득까지 얘기했다. 나는 어쩌다보니 극단의 설립자이자 몇 년 전 성범죄 사실이밝혀져 극단을 공중분해시킨 연출가가 메소드 연기 주창자인 스타니슬랍스키의 신봉자라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그건 주호가 너무 암울한 얘기만 하고 싶지는 않다며 자신이 습득한 호흡과 발 - P116

성, 걸음걸이, 장면 연기 같은 훈련법에 대해 꽤 자세히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주호가 애써 해주는 말들에 집중하지 못했다. 흘려들은 건 아니었으나 주호가 무슨 말을 더 할 때마다 이렇게 대꾸하고 싶은 마음에 제대로 귀담아들을 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럼 뭐해, 너는 이제 안 한다며. - P117

성 소수자의 사회적 가시화나 시민권 획득, 동성혼 법제화에대한 책을 주로 읽는 모임 안에서 주호는 낯선 존재였다. 젠더 다양성이나 해체를 운운하는 주호를 다들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가슴으로는 아니었고, 그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게 힘겹게 받아들인 정체성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경험이지 다시 혼란해지거나 불안해지는 경험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려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야만 느낄 수 있는 위안과 위로, 소속감이 절실했고, 모임은 모든 성별과 정체성을 환영한다는 기조를 내걸기는 했으나 어쨌든 게이 정체성을 핵심 동력으로 삼고있었으니까. - P118

하지만 나는 그런 주호가 마음에 들었다. 모임 안에서 체호프를 좋아하는 유일한 사람이어서 마음이 가는 것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하는 말에 과연 그런가 싶은 뚱한 표정으로 한 번씩 물음표를 던지는 모습은 특별해 보였으니까. 주호는 배열이 조금 다른 회로를 장착하고 있는 듯 자신에게 다가오는 건 그게 사람이든 생각이든 감정이든 일단 멈추게 한 다음 판단을 보류했고, 나는 무릇 예술가란 이래야 하는 게 아닐까, 뭐든 그런가보다 하며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이렇게 의심하고 분별해봐야 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그즈음 주호가 학교 사람들과 선보인 몇몇 무대는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내게는 그런 어설프고 난삽한 무대를 감행하는 주호의 객기마저 남달라 보여 우리는 차차따로 만나 연극을 보거나 서점에 가거나 밥을 먹으며 가까워졌다. 무엇보다도 읽은 소설이나 희곡 얘기를 할 때면 역시 대화란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잘 통했고, 함께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 P119

주호는 자신과 인주씨 모두 타인에게 성적 끌림은 느끼지 않으나 로맨틱한 끌림은 느끼는 유로맨틱이라 했고, 자신은 양성 모두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는 논모노로맨틱, 인주씨는 이성에게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는 모노로맨틱이라고도 했다. 지금 뭐라는 거냐고 되묻고 싶은 내 마음이 표정에 역력했는지 주호가먼저 웃었다.
알아, 복잡하지. 나도 헷갈려.
나는 정체성이라는 게 필요하면 장착했다 싫증나면 벗어버리는 게임 아이템 같은 건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고, 도대체 어떻게성적인 끌림을 느낄 수 없다는 건지, 아니 그럴 수 있대도 그건 정체성이라기보다는 일정 기간의 상태가 아닌지 묻고 싶었다. 만약그런 상태가 지속되는 거라면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고. 하지만 정작 입을 열었을 때 내게서 튀어나온 질문은이거였다. 내가 정말 궁금한 것도, 내게 가장 중요한 것도 사실은이거라고 자인하듯이.
- P122

나는 찬물 세례라도 받은 것처럼 동작을 멈췄다. 나를 스치는인주씨의 눈빛이 자신은 소설가란 족속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비난 혹은 자신을 함부로 소재 삼지 말라는 경고로 다가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인주씨가 그렇게 묻기 전까지는 오늘에 대해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므로 그 순간의 내 대답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때 인주씨가 난해한 모양새로 눈썹을 치켜올리더니왜냐고 물었다. 혹시 우리의 만남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냐고묻기도 하고 자신이 한 얘기가 재미없었던 거냐고 묻기도 하면서장난스레 서운한 척을 했다. 내가 그런 게 아니라며 머뭇거리는사이, 인주씨가 말을 이었다. - P129

나는 인주씨가 하는 말의 진의를 파악해보려다 애매하게 남아있던 웃음기를 지웠다. 내가 다른건 몰라도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진지하다는 것을, 무엇을 쓸 수 있고 또 없는지에 대한 나름의 가치판단을 하며 글쓰기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당사자도 아니면서 그 삶에 대해 내가 함부로쓸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고, 만에 하나 그게 더 큰 의미를 보장한다고 해도 잘 알지도 못하는 걸 쓰고 싶지는 않다고도 말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나는 커밍아웃과 진배없었던 첫 책 출간 이후로, 그렇게 나 자신을 까발려도 환대받을 수 있다는 경험을 획득한 이후로 더욱더 내게이 정체성에 천착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건 자기 삶을 내걸어 쓴 게 분명해 보이는 작품에만 마음이 가는 내 편협과도 관련이 있었다.
- P130

내가 주호와 인주씨,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자신을 에이섹슈얼로 정체화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알게 된 건 그날로부터 반년여가 흐른 뒤였다. 그즈음 내 첫 책의편집자인 규철씨가 중쇄 소식을 알리며 혹시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지를 물었다. 메일에는 규철씨가 지난 주말에 책을 다시훑어보며 잡아냈다는 오탈자가 정리되어 있었는데, 출간 전 그렇게 여러 번 들여다봤건만 또 고칠 게 나온다는 게 어쩐지 기묘한것 같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아무래도 이 문장은 재고해보는 게좋겠다는 규철씨의 제안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황급히 책을 펼쳤다. 그리고 297쪽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기어코 커밍아웃을 했으나 그 이후로 날마다 쏟아지는 원색적인 비난과 악성 댓글에 결국 공황장애를 앓게 된 배우 김학수가 어느 날 백오십만 명이 지켜보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피드에남긴 울분의 메시지였다.

차라리 무성애자였으면 좋겠어.
아무 감정도 못 느꼈으면 좋겠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으면 좋겠어.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책속에 이런 무지와 혐오를 보란듯이 전시해놓고도 까맣게 몰랐는지, 어떻게 이런 걸 써놓고도 출간 직후 주호에게 다정한 인사말 - P133

을 적어 책을 선물했으며, 어떻게 그토록 당당하게 연대와 다양성과 자긍심 같은 말을 끌어다 책을 홍보했는지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싶지만 나는 정말이지 몰랐고, 어쩌면 계속 모를 수도 있었지. - P134

나는 오래전부터 그날에 대해 써보고자 했다. 뭔가를 써야 할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날이 다가와 나를 건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날에 대해 쓰지 못하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로부터 얼마만큼 멀어졌는지 나 자신에게조차 증명할 길이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 - P135

그리고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현실의 알리바이를 모두 소거한 허구를 만들어냈다는 기쁨보다는 결국 무엇을 쓰더라도 나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한계를 확인하는 게 더 좋았다.
전혀 의도하지 않아도 내 일상이 어떤 식으로든 소설에 담긴다는게 좋았고, 살아가는 일과 쓰는 일이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게 좋았다.
소설과 삶이 서로에게 무용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 소설과삶이 서로를 외면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것. 요즘 내게 점점 더 중요해지는 건 바로 이런 일들인 것 같다.

소설에서 삶을 말끔하게 분리하는 노력이 아니라 소설과 삶 사이의 복잡한 긴장을 버티는 노력을 하고 싶다. 완전무결해지려는노력이 아니라 그럼에도 천천히, 조심스럽게 연루되어보려는 노력을 하고 싶다. 어차피 어려운 일이라면, 그래도 무릅쓰고 싶다면 그게 더 좋을 것 같다. - P139

‘우리‘의 가능성을 묻는 ‘나‘의 소설이 한계에 부딪히고 마는까닭도 이러한 물음에 있다. ‘나‘의 탐색은 소설의 문법과 싸우는 일이고, 궁극적으로는 소설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사회의 규범과 통념 등의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일이다. 그 싸움에서 ‘나‘는 항상 무력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우리‘는 사유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유와 실천은언제나 ‘나‘의 몫이다. ‘나‘들이 사유하고 실천하는 그때에야 ‘나‘
는 ‘우리‘일 수 있고, ‘나‘보다 거대한 것과 맞설 수 있다. 그것이
‘나‘의 한계이자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나‘의 소설은 어떻게 쓰여야 할까. 고작 대상이 이것 아니면 저것임을 지시할 뿐인 리트머스와 같은 도구로는 충분하지 않다. 보다 섬세한 질문과 응답이필요하다. 소설쓰기에 방법이나 정답이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므로 ‘나‘는 쓰고 지운다. 지금도 ‘나‘의 물음과 탐색은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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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까 그게 무슨 말이야? 뭘 해보고 싶다고?
먹점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눈점이 연이어 물었다. 왜? 왜 그걸 해보고 싶은데? 우리 사이에 그게 필요해? 먹점은 자기가 한말을 더듬더듬 변명했고 눈점은 자신의 입술로 그 단어를 발음하고 싶지 않아 그것을 지칭할 다른 말을 떠올렸다.
- 책갈피라고 하자. 앞으로 그거 말할 땐 책갈피라고 해.
멋진 별칭이었다. 도서관과 어울리는 단어이자 나 모모를 아름답게 꾸며주는 비밀 언어. 세상의 수많은 책갈피를 떠올려보라.
가벼운 금속이나 나뭇결을 살린 목재로 만들어진 각양각색의 책갈피, 위대한 건축물이나 꽃이 그려진 디자인. 여행지의 기념품으로 사랑받고 소중한 마음을 담아 선물하기에 좋은 반영구적인소품, 종이와 종이 사이에 끼워져 읽은 부분과 읽어야 할 부분을가름해주는 지성인의 상징. 얇고 단단하며 심미적이고 유용한 사물, 책갈피-나 모모는 그런 존재였다. - P58

사람이 너무 놀라면 아무 반응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눈점은 그때 깨달았다. 잠시 멈춰 있던 버스는 뒤에 선 버스들의 경적에 그대로 정류장을 떠났다. 눈점은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번잡한 길가에 멍한 얼굴로 주저앉아있었다. 저 버스를 기억해야 한다는 조바심과 함께 이러다 학교수업에 늦으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 문에 끼였던 어깨를 문지르며 눈점은 학교로 가 아이들을 가르쳤다. 수업이 끝나고 정류장에 갔을 때 눈점은 버스를 탈 수 없었다. 수없이 오가는 버스와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자신도 그중 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다른세계로 튕겨 나와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점은 그날 하루일해서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내고 택시를 탔다. - P63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된다고, 그 기사를 찾아 항의해야 한다.
고 생각한 건 어느 택시 안에서였다. 목뒤로 두툼한 살이 접힌 택시 기사가 눈점이 타자마자 육두문자를 쓰며 바로 전에 태운 여자 손님을 욕했다.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 소리가 정말 현실의 소리인가? 눈점은 귀가 멍해지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택시 문을 세게 닫았다는 이유로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저렇게 욕하는데, 왜나는 나를 이 고통에 빠뜨린 그 버스 기사에게 항의도 못하는 걸까. 분노와 자책감이 뒤엉켰다. 사고를 당한 자신이 침묵하고 가만히 있는 사이 또다른 피해자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도들었다. 이제라도 그 사고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고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러나 그사이 먹점은 생각이 바뀌어 있었다. 먹점은 기사를 처벌하는 것보다 눈점의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 P64

점으로 이름을 지어서 그런가 점점 점이 되어가는 것 같아.
눈점은 먹점을 껴안으며 자신이 힘을 내야 하는 이유를 되새겼다. 망망대해에 빠진 조난자처럼 막막하고 절망스러웠지만 먹점을 부표처럼 끌어안으며 버텨야 한다고 자신을 일으켜세웠다. 그런 눈점을 보며 먹점은 한 달 정도 쉬면서 건강을 회복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눈점은 좀더 견뎌보겠다고 했지만 결국 일을 그만두었다. 집에 머물면서 눈점은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늘어갔다. 깨어 있을 때도 손 하나 까닥할 수 없는 무기력증이 눈점을 짓눌렀다. 먹는 약의 양이 많아져 어느 날은 입안 가득 넣은 알약에목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환풍기가 돌아가는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살아오며 겪었던 온갖 폭력이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폭력을 견디며 살아가는 걸까. 어떻게 그 끔찍한모멸감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걸까. 왜 나는 남들처럼 무뎌지고 담담해지지 않는 걸까. 눈점은 남보다 더 넘어지고 아파하는자신이 미웠다.  - P65

먹점 역시 일이 버거웠다. 급여는 그대로인데 업무량은 나날이 늘어갔고 허리 디스크와 만성 위장 장애를 달고 살았다. 눈점과 함께 밥을 먹을 때만 속에서 편안하게 음식물을 받아들이는것 같았다. 따듯한 밥알과 잘 익은 채소가 아르헨티나산 새우나베트남산 오징어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면 아, 이런 게 사는 거구나, 이 밥을 위해, 이 식탁을 위해, 더 참고 견딜 수 있겠구나 싶었다. 배부르고 맛있어서가 아니었다. 눈이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눈점과 함께 먹는 게 좋았다.  - P67

나 역시 내가 책을 읽게될줄 몰랐다.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보고서야 자신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나르키소스 같달까. 기나긴번데기의 시간을 지나 화려한 무늬의 날개가 돋아난 나비와 같달까. 나는 버려진 책들을 본 순간 숨겨진 내 재능을 깨달았다. 책갈피, 내 오래된 이름이 찾아와 몸과 의식을 일깨웠다.
낮이고 밤이고 나는 읽었다. 두 여자의 미니멀 라이프 덕분에나는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 버려진다는 조바심과 생의 위기 속에서 나는 책을 읽고 사색에 빠져들었다. 플라톤을 읽은 날은 동굴에 비친 그림자의 실재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 니체를 읽은 날은 망치를 든 여자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었다. 그들의 책에는 모두 내가 상징처럼 숨겨져 있었다. 나는 인류 지성사에 깃든 나의 위대함을 확인하며 두 여자가 내린 쓸모없다는 판단이얼마나 반인륜적이고 반지성적인지 깨달았다. 쓸모없음이야말로인류가 지켜가야 할 빛나는 보석이었다. - P81

테오필 고티에란 자가 쓴 글을 읽으며 나는 전율했다. 가장 어렵고 가장 지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에 눈물 흘렸다. 그들의 글 옆에는 누군가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무쓸모의 쓸모.
그 문구가 번개처럼 내 심장에 와 박혔다. 무쓸모의 쓸모. 나는말장난을 해보았다. 단어를 곱씹으며 내 이름을 지어보았다. 무쓸모의 쓸모, 무모? 무쓸모의 쓸모, 모모! 모모가 된 나는 ‘쏠쏠‘이란단어를 오래 머금었다. 무쓸모의 쓸모 쓸쓸한 존재, 그것이 나로구나. 시인지 노래인지 알 수 없는 운문이 절로 흘러나왔다. - P82

누군가를 웃게 하는 건 그보다 더 오래 걸리지요. 하지만 어떤존재는 특별한 의도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 다른 이를 웃게 합니다. 있다는 것만으로도, (혹여 그 있음이 사라진다 해도) 웃음이나는 존재. 눈점에게 먹점이 먹점에게 눈점이 그러합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두 사람이 별명이 아닌 자기의 이름으로 세상에 불리기 원할 때 그 사랑의 언어를 편안하게 소리 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귀가 사랑의 소리를 더 따라가길 원합니다. 때론 소음에 지워진 듯 보여도 사랑의 소리는 틀림없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웃음의 빛으로 떠오른다는 걸 저는 압니다.
제가 아는 것을 쓸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읽는 마음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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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은 초파리를 좋아했다. 초파리의 날개와 눈을 특히 좋아했다. 투명하고 얇은 날개는 성당에서 보았던 스테인드글라스를닮았다. 정교하게 짜인 무늬 사이사이로 무지갯빛이 감돌았다.
새빨간 눈은 석류의 단면을 닮았다. 붉고 영롱한 수천 개의 알갱이들이 빼곡하게 모여 하나의 동그라미를 이루었다. 마취된 초파리는 생명이 유지된 채 멈추어 있었다. 초파리의 눈을 보고 있자면 눈을 이루는 무수한 동그라미들이 일제히 원영의 눈동자를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초파리와 교감을 하는 것 같았다. - P9

놓고 바라보보다 아름다웠다. 살아 있었으니까.
원영은 붓을 들었다. 초파리가 다치지 않도록 붓 끝으로 살살건드렸다. 눈이 하얗거나 하트 모양으로 찌그러진 초파리들을 재물대 왼쪽으로 치웠다. 유전자 변형이 일어난 것들이었다. 눈이동그랗고 붉은 빛깔이 또렷한 것, 털과 무늬의 간격이 균질하며영양 상태가 좋은 초파리를 한 마리씩 골라냈다. 새로운 시험관에 담았다. 수백 마리의 초파리 중에서 가장 건강한 열다섯 마리를 골라 번식시키는 것이 원영의 업무였다. 원영의 선택을 받은초파리들은 시험관에서 일주일을 더 살 것이다. 나머지는 냉동실에 보관되다가 폐기처분될 것이다. - P10

집에 있어도 되지 않느냐 했다. 딸에게 개인 교습을 시켜줄 수는없었지만, 학원에 보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학원에 보낼 형편이 안 되었던 시절에도 원영은 비슷한 말을 들었다. 학원비 및 품버느니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편이 낫지 않나는 식이었다. 원영은 자기 일을 갖고 싶었다. 집을 갖고 싶다거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여느 사람처럼 그랬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삼십삼 년 동안 그랬다. 텔레마케팅 사무실은 창문이 없긴 했지만 무제한으로믹스 커피를 제공하는 탕비실이 있었고 천장에는 시스템 에어컨이 있었다. 칸막이가 설치된 책상이 직원 모두에게 제공되었다.
가져본 적 없는 자신만의 책상이었다. 첫 출근 전날 원영은 문구점을 찾아갔다.  - P11

초파리는 사람과 닮은 점이 많았다. DNA가 절반 이상 같았다.
질병에 관여하는 유전자는 칠십 퍼센트 이상 일치했다. 인간이앓는 질병을 초파리도 비슷하게 앓는 경우가 많았다. 한 질병을않고 있는 초파리들의 염기 서열을 분석하면 그 질병에 관여하는유전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약물에 대해서도 사람과 비슷한 영향을 받고 비슷한 행동 패턴을 보였다. 초파리의 눈이나 장기, 배아 등에 약물을 주입하여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 P15

실험동에서 초파리를 훔쳐왔던 그날부터 원영의 머리카락은뭉텅뭉텅 빠졌다. 일주일 만에 정수리부터 두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눈썹과 속눈썹도 사라졌다. 원영은 통풍이 잘되는 두건과모자를 구입했고, 가발을 맞췄다. 눈썹은 그려넣으면 넣을수록티가 났다. 실험동 동료들은 원영에게 자꾸 괜찮으냐 물었다. 버스나 길에서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것 같다고 원영은 말했다.
잠깐 쉬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했고, 언제든실험동으로 돌아오라는 대답을 들었다. - P22

갱년기 때문에 음식을 못 삼킬 수는 없었다. 원영의 몸은 십일년 동안 꾸준히 약해진 것 같았고, 이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정도였다. 산재다. 지유는 의심이 들었다. 초파리 실험실에서부터 원영이 잘못된 것이다.
"이게 생숙탕이야. 이렇게 섞어 마시면 몸 안에 좋은 기류가 생긴대. 설사도 낫고, 소화도 잘된대. 꼭 뜨거운 물에 찬물을 부어야해. 반대로 하면 안 돼."
지유와 원영은 식탁에 마주앉아 생숙탕을 마셨다. 원영은 욕실로 갔다. 천일염을 잇몸에 문지르고 머금고 있다가 뱉어냈다. 그다음에는 야로 오일을 입안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 그다음에는테니스공으로 발바닥을 마사지했다. 

그 이야기야말로 인터넷 기사에서 많이 본 것 같다고 지유는답했다. 원영은 다른 이야기도 들려줬다. 텔레마케팅 사무실에서헤드셋 너머로 종일 욕설을 듣는 여자 이야기. 평생 자기 책상을가져보지 못해서 아프기 시작한 여자 이야기. 식기세척기를 구입하면 어떻겠냐고 물으면서도 책상이 필요하지 않으냐고는 한 번도 묻지 않는 가족 이야기. 밀가루가 체질에 맞지 않아 늘 위무력증에 시달렸지만 남편이 국수를 좋아해서 삼십 년 동안 국수를먹은 여자 이야기. 체할 때마다 그러게 왜 국수를 먹느냐고 다그치던 딸 이야기. 그러면서도 일요일 저녁이면 와, 국수다, 라며 손뼉을 치던 딸 이야기・・・・・・ 원영은 조금씩 이야기를 바꾸어가며 말했다. 거의 소설이 되어갔다. 원영은 너무 사소해서 오히려 무시했던 일화들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 P29

"솔아야, 너무 열심히 쓰지 마."
원영은 말했다. 그 말이 나는 못내 서운했다. 내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열심히 하려는 사람에게 왜 자꾸 그런말을 하느냐고, 나는 불만을 섞어 볼멘소리를 했다.
"너무 열심히 하면 무서워져"
공부든, 글쓰기는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너무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고원영은 말했다. 내가 모르는, 원영은 잘 아는 이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열심히 쓰지 마.
이 소설을 쓸 때 가장 많이 떠올린 말이다. 원영이 내게 누누이말해왔던 것처럼 원영도 잘 먹기를 잘 자기를 행복하기를. 오직그것만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외면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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