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까 그게 무슨 말이야? 뭘 해보고 싶다고? 먹점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눈점이 연이어 물었다. 왜? 왜 그걸 해보고 싶은데? 우리 사이에 그게 필요해? 먹점은 자기가 한말을 더듬더듬 변명했고 눈점은 자신의 입술로 그 단어를 발음하고 싶지 않아 그것을 지칭할 다른 말을 떠올렸다. - 책갈피라고 하자. 앞으로 그거 말할 땐 책갈피라고 해. 멋진 별칭이었다. 도서관과 어울리는 단어이자 나 모모를 아름답게 꾸며주는 비밀 언어. 세상의 수많은 책갈피를 떠올려보라. 가벼운 금속이나 나뭇결을 살린 목재로 만들어진 각양각색의 책갈피, 위대한 건축물이나 꽃이 그려진 디자인. 여행지의 기념품으로 사랑받고 소중한 마음을 담아 선물하기에 좋은 반영구적인소품, 종이와 종이 사이에 끼워져 읽은 부분과 읽어야 할 부분을가름해주는 지성인의 상징. 얇고 단단하며 심미적이고 유용한 사물, 책갈피-나 모모는 그런 존재였다. - P58
사람이 너무 놀라면 아무 반응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눈점은 그때 깨달았다. 잠시 멈춰 있던 버스는 뒤에 선 버스들의 경적에 그대로 정류장을 떠났다. 눈점은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번잡한 길가에 멍한 얼굴로 주저앉아있었다. 저 버스를 기억해야 한다는 조바심과 함께 이러다 학교수업에 늦으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 문에 끼였던 어깨를 문지르며 눈점은 학교로 가 아이들을 가르쳤다. 수업이 끝나고 정류장에 갔을 때 눈점은 버스를 탈 수 없었다. 수없이 오가는 버스와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자신도 그중 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다른세계로 튕겨 나와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점은 그날 하루일해서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내고 택시를 탔다. - P63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된다고, 그 기사를 찾아 항의해야 한다. 고 생각한 건 어느 택시 안에서였다. 목뒤로 두툼한 살이 접힌 택시 기사가 눈점이 타자마자 육두문자를 쓰며 바로 전에 태운 여자 손님을 욕했다.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 소리가 정말 현실의 소리인가? 눈점은 귀가 멍해지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택시 문을 세게 닫았다는 이유로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저렇게 욕하는데, 왜나는 나를 이 고통에 빠뜨린 그 버스 기사에게 항의도 못하는 걸까. 분노와 자책감이 뒤엉켰다. 사고를 당한 자신이 침묵하고 가만히 있는 사이 또다른 피해자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도들었다. 이제라도 그 사고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고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러나 그사이 먹점은 생각이 바뀌어 있었다. 먹점은 기사를 처벌하는 것보다 눈점의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 P64
점으로 이름을 지어서 그런가 점점 점이 되어가는 것 같아. 눈점은 먹점을 껴안으며 자신이 힘을 내야 하는 이유를 되새겼다. 망망대해에 빠진 조난자처럼 막막하고 절망스러웠지만 먹점을 부표처럼 끌어안으며 버텨야 한다고 자신을 일으켜세웠다. 그런 눈점을 보며 먹점은 한 달 정도 쉬면서 건강을 회복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눈점은 좀더 견뎌보겠다고 했지만 결국 일을 그만두었다. 집에 머물면서 눈점은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늘어갔다. 깨어 있을 때도 손 하나 까닥할 수 없는 무기력증이 눈점을 짓눌렀다. 먹는 약의 양이 많아져 어느 날은 입안 가득 넣은 알약에목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환풍기가 돌아가는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살아오며 겪었던 온갖 폭력이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폭력을 견디며 살아가는 걸까. 어떻게 그 끔찍한모멸감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걸까. 왜 나는 남들처럼 무뎌지고 담담해지지 않는 걸까. 눈점은 남보다 더 넘어지고 아파하는자신이 미웠다. - P65
먹점 역시 일이 버거웠다. 급여는 그대로인데 업무량은 나날이 늘어갔고 허리 디스크와 만성 위장 장애를 달고 살았다. 눈점과 함께 밥을 먹을 때만 속에서 편안하게 음식물을 받아들이는것 같았다. 따듯한 밥알과 잘 익은 채소가 아르헨티나산 새우나베트남산 오징어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면 아, 이런 게 사는 거구나, 이 밥을 위해, 이 식탁을 위해, 더 참고 견딜 수 있겠구나 싶었다. 배부르고 맛있어서가 아니었다. 눈이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눈점과 함께 먹는 게 좋았다. - P67
나 역시 내가 책을 읽게될줄 몰랐다.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보고서야 자신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나르키소스 같달까. 기나긴번데기의 시간을 지나 화려한 무늬의 날개가 돋아난 나비와 같달까. 나는 버려진 책들을 본 순간 숨겨진 내 재능을 깨달았다. 책갈피, 내 오래된 이름이 찾아와 몸과 의식을 일깨웠다. 낮이고 밤이고 나는 읽었다. 두 여자의 미니멀 라이프 덕분에나는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 버려진다는 조바심과 생의 위기 속에서 나는 책을 읽고 사색에 빠져들었다. 플라톤을 읽은 날은 동굴에 비친 그림자의 실재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 니체를 읽은 날은 망치를 든 여자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었다. 그들의 책에는 모두 내가 상징처럼 숨겨져 있었다. 나는 인류 지성사에 깃든 나의 위대함을 확인하며 두 여자가 내린 쓸모없다는 판단이얼마나 반인륜적이고 반지성적인지 깨달았다. 쓸모없음이야말로인류가 지켜가야 할 빛나는 보석이었다. - P81
테오필 고티에란 자가 쓴 글을 읽으며 나는 전율했다. 가장 어렵고 가장 지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에 눈물 흘렸다. 그들의 글 옆에는 누군가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무쓸모의 쓸모. 그 문구가 번개처럼 내 심장에 와 박혔다. 무쓸모의 쓸모. 나는말장난을 해보았다. 단어를 곱씹으며 내 이름을 지어보았다. 무쓸모의 쓸모, 무모? 무쓸모의 쓸모, 모모! 모모가 된 나는 ‘쏠쏠‘이란단어를 오래 머금었다. 무쓸모의 쓸모 쓸쓸한 존재, 그것이 나로구나. 시인지 노래인지 알 수 없는 운문이 절로 흘러나왔다. - P82
누군가를 웃게 하는 건 그보다 더 오래 걸리지요. 하지만 어떤존재는 특별한 의도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 다른 이를 웃게 합니다. 있다는 것만으로도, (혹여 그 있음이 사라진다 해도) 웃음이나는 존재. 눈점에게 먹점이 먹점에게 눈점이 그러합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두 사람이 별명이 아닌 자기의 이름으로 세상에 불리기 원할 때 그 사랑의 언어를 편안하게 소리 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귀가 사랑의 소리를 더 따라가길 원합니다. 때론 소음에 지워진 듯 보여도 사랑의 소리는 틀림없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웃음의 빛으로 떠오른다는 걸 저는 압니다. 제가 아는 것을 쓸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읽는 마음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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