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책들 가운데, 아직까지 내 기억 속에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남아 있는 책이 바로 데라다 도라히코‘가 쓴 수필집이다. 내 독서인생 최초의 책다운 책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이와나미 문고판으로 읽은것도 아니었다. 며칠 전 벽장 안 구석구석을 이 잡듯 뒤져보았더니 어지간히 버리기 아까웠던지, 용케 그 수필집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30년 만에 손에들고 보니 아동용 책답게 한자 옆에 일본어 독음이며 삽화까지 곁들여져 있었고 『데라다 도라히코 작품집』寺田集이라는 서명이 붙어 있었다. 출간한 곳은포플러 출판사. 초판은 1959년에 발간되었는데 내 책은 그 이듬해에 나온제2판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총 스무 권짜리 시리즈 중 둘째 권으로, 책 뒤에 달린 광고를 보면 첫째 권에는 요시노 겐자부로源三郞,
셋째 권 이하로는 다니가와 테츠조 아마노 데이유, 가메이 가츠,
이치로井勝一郎, 고이즈미 신조2가 갖고 있던 책은 달랑 데라다 도라히코 작품집』 한 권뿐이었다. - P20

가뜩이나 무보다 문을 숭상하는 전통적 가치관을 지닌 조선인들에게
‘독서‘나 ‘지식‘이라는 말이 지닌 가치는 단연 막중한 것이었다. "아무개는 지식인이다"라는 평판은 최상의 찬사였고, 동시에 ‘무식한 놈‘이라는 말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최악의 모욕이었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지금도 여전히 민족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는데, 그가 뤼순 감옥에서 남긴 수많은 글 중 저 유명한 "一日不讀書, 口中生荊" 이라는 말이 있다. 형 집행을 기다리면서도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것 같아 참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는 단순히 만용을 부린 사람이 아니라 지성인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그의 모습이 조선 민중의 심금을 울렸으리라. - P21

"아아,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하며 이 대목에서 나는 긴 한숨을내쉬곤 했다. 작가는 홀로 남겨진 꼬마가 도토리를 주우며 즐거워하는 모습을바라보면서 "처음과 마지막이 비참했던 어미의 운명만큼은 이 아이에게 반복시키고 싶지 않다"고 글을 맺는다.
어디고 흠잡을 데 없는 문장이었다.
기승전결의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기는 했지만, 물론 어린아이인 내가 그런 것까지 이해했을 턱이 없다. 다만 ‘형식‘이 가져다주는 유려한 문장 흐름과좋은 어조가 전해주는 율동감의 매력을 그때 처음으로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 P27

1992년 여름, 나는 중국 지란의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방문했다. 지난날
‘간도‘로 불리던 이 지역은 조선반도의 민주, 러시아의 국정을 취하고 있어서 20세기 초엽부터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조선인들이 많이 아주했던 곳이다. 그 때문에 이 지방은 일본의 중국 침략 교두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일투쟁의 상품이 되기도 했다. - P61

왜 다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또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소년 아라이의 불행에 생각이 이르자, ‘부조리‘를 느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 테지만 거의 그와 비슷한, 왠지 더이상 감당하기 힘든 감상에 빠졌다. 단한방에 상대를 녹아웃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막내형이 우울해했던 것 역시, 아마도 그 같은 아라이의 현실을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들 "어린 시절은 참으로 좋았다. 가능한 일이라면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나 역시 그 같은 마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지난 시간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하나하나 꼼꼼히 되짚어보면, 그리움이나 즐거움과 마찬가지로 어린아이 나름의 슬픔과 괴로움이 마음속 저편에서 되살아온다. - P81

에리히 케스트너가 국외로 망명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나치스의 폭정이 장기간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신념 때문이었을 테다. 하지만 노모老母 곁을 떠나고싶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 세상에 마마보이가 많다지만 케스트너처럼 용기 있고 훌륭한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사실 『하늘을 나는 교실」에서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글은 제2서문이다. 이 서문에서 케스트너는 "시종일관 재미있는 이야기만 만들면서 아이들을기만하고, 재미로 아이들 정신을 홀리려 애쓰는 아동서 작가들에게 분개하며이렇게 충고한다. - P84

어째서 어른들은 자기가 어렸을 때의 일들을 그렇게도 새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아이들도 때로는 지극히 애처로운, 가엾고 불행한 존재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변해버리는 것일까요? (……) 아이들의 눈물은 결코 어른들의 눈물보다 가볍지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 무거울 수도 있다는 말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 P85

어른의 눈물을 아는 자가 아이의 눈물을 안다. 아이의 눈물을 이해하는 자가 어른의 눈물까지 이해하는 것이다. - P85

나는 마음속으로 고상한 중산층 속으로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나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들을 나몰라라 배신하지는 않을까? 아니, 나는 벌써 그들을 배신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자문을 내가 수없이 반복하게 된 것은, 위태로울 정도로 예민해져가는 소년기의 자의식과 불균형한 자기애의 양상을 이 작품이그만큼 능숙하게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이 글을 접한 이후로 나는 오랫동안 다자이 오사무를 싫어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거의 자기혐오와 같은 감정이었다. - P121

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
기차는 열풍 속을 뚫고 지나가리라
기적소리 어두움 속에 울부짖듯 외치고
불꽃은 평야를 밝게 비추는데
아직, 조슈의 산은 보이지 않누나.


이렇게 시작하는 「귀향」은 곧바로 암기해버렸다.
이 시에 등장하는 "모래자갈 같은 인생이런가"라는 구절이 아직 열두 살도안 된, 인생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는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뒤로 얼마동안 잊고 지냈는데, 십여 년 세월이 흘러 옥중에 갇힌 작은형에게 반입할 생각에 홋타 요시에 젊은 시인들의 초상의사서詩人肖像(1968)을읽어보니, 주인공이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가나자와로 귀향할 때마다 이 시를 머릿속에 떠올렸다는 대목이 나와서,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때야 비로소 "모래자갈 같은 인생" 이라는 시구에 대해 나도 아주 조금은실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던 것이다. - P128

하기와라 사쿠타로에 마음이 이끌린 뒤부터 나는 한 권 두 권 시집을 사고,
시인 흉내도 내면서 시 비슷한 글들을 끄적이게 되었다. 따로 공책을 마련해선마음에 드는 시구들이나 경구, 혹은 자작시 비슷한 글귀들을 적어두었다. 이 공책만큼은 절대로 형들에게 발각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숨겨둘 장소를 물색하느라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시절 나는 이미 형들에게
‘시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시인의 이미지란 베레모에 루바스카 차림을 한 ‘문약한 무리‘, 비위를 거스르는 ‘뇌꼴스러운 놈들‘, 꼴사납게 ‘잘난 체하는 배부른 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행여 형들이 내 기록들을 훔쳐보고 비웃기라도 한다면 가출하는 길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고지식한 생각을 하며 괴로워했다. - P129

1970년대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서재나 연구실에서 씌어진 말이 아니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징벌‘
이라 부르던, 수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서 금지처분을 당하던 상황에서 써 보낸편지였다.
나는 곧바로 형의 이 말을 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항변1의 여지가 없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독서.
으로서의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그 같은 절실함이 내게는 결여돼 있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읽지 않은 채,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시시각각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P146

또다른 하나는 ‘사춘기의 교양 콤플렉스‘ 라고 불러야 마땅할 방향에서 시작되었다. 이 분야에도 꼭 읽어야 할 책들이 숨이 막힐 정도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을 읽는다는 말은 적어도 내게는, 자기를연마하고 인격을 도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도 특정 부류에 편입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과 동일한 의미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로 그런 생각은 감당할 수없이 비대해져 강박관념이 되기도 했다. ‘특정 부류‘라고 막연하게 표현해까닭은, 우뚝 솟은 산 정상을 우러러볼 때 그럴 수 있듯이, 참된 지식의 거인을향한 동경과 단순한 ‘문화적 특권 계급‘에 대한 선망이라는 본디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아직 미숙한 내 머리에서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 P152

에리히 케스트너나 쥘 베른에 정신이 팔려 있던 시절부터 가지이 모토지로梶井基永郞"의『레몬』, 구라타 햐쿠조출가와 그 제자의弟子,
또는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곡』La symphonie pastorale 등을 읽게 될 때까지 불과 2~3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죽음‘과 ‘성‘이라는 인간의 두 가지 근본문제가 불현듯 내 머리를 온통 뒤덮게 되었던 것이다. 그 즈음에는 1년 사이에 내키가 10여 센티미터나 자랐던 터이므로 그런 일쯤이야 별로 이상할 것 없다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사춘기‘ 라는 극히 짧은기간 동안 너무나도 급격한 정신적 성장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잔혹할 정도의 경험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나와 여전히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는 나 사이의, 그 버거운 불균형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했던 것이다. - P153

이 말을 들은 나는 완전히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경멸당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기 때문이다. ‘읽었다‘고그녀가 자만해주었더라면 나로서도 그럭저럭 참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그녀는 그 책만큼은 읽을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 만큼은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책을 많이 읽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당장 현관 서가에 꽂힌 문학전집쯤은 거의 독파했을 게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와 재빨리 형이 읽던 ‘마의 산을 손에 쥐었다. "넌 이 책 읽을마음이 없다지만, 여차여차하고 이러저러해서 난 재미있게 읽었단다." 이 말을꼭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죽고 싶을 정도로지루해져버려, 곧바로 내팽개치고 말았다. - P160

몇 년 전 스위스의 세간티니미술관Segantini Museum을 방문하는 도중에 다보스Davos를 지나치게 되었다.
‘다보스?‘ 그때 갑자기 다보스라는 지명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왜일까?
불현듯 다보스가 ‘마의 산의 무대였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내가 이 장소를 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다보스에 와 있는 것이다. 작가 토마스 만은 요양소에 입원한 아내의 수발을 들면서, 이곳에 3주 동안 머물며 「마의 산』을 착상하고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12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눈 깜짝하는 사이 다보스를 뒤로하고, 냉랭한 고원의 대기를 헤치고 생모리2츠St. Moritz를 향해 급히 차를 모는 동안 "나・・・・・・ 그 책만큼은, 읽고 싶은 마음이영 들지 않아" 라던 소녀의 말이 귓전에 다시 울렸고, 그때 그녀의 표정까지도바로 어제의 일처럼 떠올랐다. - P162

그 시절의 나는 왜 모든 일에 그렇게도 과도한 의식으로 대했던 것이며, 또사사건건 거북살스러워했던 것일까? 도대체 왜 자신의 친근한 감정과 그리워하는 감정에 자연스러울 수 없었던 것일까?
눈 깜짝할 사이 저 답답하고 안타깝던 지난날에서 어느덧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의 사춘기는 벌써 저 멀리 떠나간 것이다. 그러나 마의 산을 정복하지 않는 한, 나는 언제까지고 사춘기 때의 번민을 떨쳐버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마의 산은 사춘기 콤플렉스의 상징이요 끝까지 등정할 수 없었던, 영원한 미답의 봉우리와도 같은 존재이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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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소년의 눈물은 특히나 애착이 많이 가는 책이다. 그것은 작품에대한 애착이라기보다는 소년 시절에 대한 애착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내 책 중 몇 권이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은 이 소년의눈물이야말로 조국의 독자들이 읽어주었으면 하고 내가 진작부터 소망해온책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곧 그런 바람이 무리이겠다 싶어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기도 했다.
내가 이렇듯 체념했던 것은, 우선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일본 작가들의 이름이며 이들의 작품, 또 그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지명 등등을 한국어로 번역해내기가 녹록지 않기도 하거니와, 한국 독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이들이친숙하지 않은 만큼 그에 관한 정보가 도리어 번거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60년대 재일교포들이 살아온 삶의 현장이며, 일본사회의 주류를 향해 소수자들이 품고 있을 굴절된 심정, 또 흡사 짝사랑과도 같은,
조국을 향한 그 복잡다단한 애증의 추억들을 한국의 독자들이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 P5

일제가 조선을 식민 지배한 결과 나는 일본 땅에서 태어났고, 그들의 민족차별정책 때문에 충분한 ‘우리말‘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 민족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일본어를 모어 사용하는 인간이되고 말았다. 그 같은 역사가 나의 ‘빼어난 일본어 표현‘을 가능케 해주었고 끝내 이런 상까지 안겨준 것이라 할진대, 내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 상을 받을수 있었을까?
에세이스트클럽상 수상 인사말에서 나는 자신을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으로 표현했다. "나는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를 반대한다.
그 연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정책을 반대한다.
식민지배의 죄과를 부인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의 사상을 반대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일본어로 사고하고 일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어를 거치지 않는다면 나의 사고며 표현 행위마저도 모두 불가능하다. 또 이런 이유로 나의 글쓰기는 주로 일본인들의 눈에 띌 뿐이다. 요컨대 ‘나‘라는 존재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인 것이다. - P7

그 감옥 속에서 나는 더 너른 광장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조국의 동포들에게까지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처지가 특별하다거나 예외적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추방당하고 모어의 공동체에서 축출된 무수한 디아스포라diaspora들이 세계 곳곳에 생겨났다. 이들 디아스포라는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의 산물인 ‘영어의 감옥‘, ‘프랑스어의 감옥‘, ‘스페인어의 감옥‘ 그 외에 여러 다른 ‘언어의 감옥‘ 에 갇혀 있으며, 저마다 더 넓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그리하여 서로 만나고 싶다고몸부림치고 있다. 재일교포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러한 여러 디아스포라들중 하나이다. 이산의 비애, 모어 상실의 고통에서 여러 디아스포라와 연대하는일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보편적 인간‘에 다가서게 만드는 길이라고, 나는믿는다. - P8

의 독자들 가운데 이 ‘조선‘이라는 단어에 당혹하거나 주저하실 분이 계실지모르겠다. 일본에서 ‘조선‘이라는 말은 음습한 민족 차별 정서를 품은 부정적어감을 풍겨왔다. 또 ‘조선인‘이란 조총련계 인사의 어휘라며 오해할 분이 계실 법도 하다. 하지만 내 국적은 ‘대한민국‘이며, 나는 ‘한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대한민국‘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국가명일뿐, 재일교포를 아우르면서 민족 전체를 총칭할 경우에는 ‘조선‘이라는 말을쓰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내 부모님은 당신 스스로를 ‘조선사람‘이라고부르셨고, 이 말은 내 부모님이나 그 윗세대에게는 삶의 치열한 현장에 밀착된,
지극히 자연스런 호칭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잊고 싶지 않다. 뿐만 아니라 식민 지배와 민족 차별에 저항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 여기기 때문에 평소 ‘조선‘
이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4년 8월 15일
서경식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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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시인·극작가 스페인  
1898. 6.5~1936. 8. 19

시인이 총살당하는 시대

"이제 이 평원은 주검으로 가득 차게될거야…………." 친구에게이런 말을 남긴 채, 1936년 7월 13일 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는 고향 그라나다행 야간열차에 몸을실었다. 스페인 전역에 내전의 불길한 징후가 만연해 있었다. 친구들은 마드리드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충고했지만,
로르카는 끝내 그들의 말을 뿌리쳤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성페데리코 축일인 18일을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로 아버지와약속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 이유보다는 더 운명적인,
이를테면 ‘그라나다‘라는 땅 자체와 맺어진 무언가가 로르카를그곳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 P15

나는 우물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
그라나다의 벽을 기어오르고 싶어,
캄캄한 물의 송곳에 
뚫린 심장을 응시하기 위해서.
(.....)
나는 우물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
한 모금씩 음미해가면서 나의 죽음을 죽어가고 싶어,
나의 심장을 이끼로 가득 채우고 싶어
물에 상처 입은 아이를 바라보기 위해서.

- 「물에 상처 입은 아이의 카시다」 - P16

8월 16일 오후, 친구의 집에 은신하고 있던 로르카는 가톨릭계 극우정당스페인보자치연합CEDA의 의원 루이스 알론소Ruiz Alonso가 이끄는 부대에 체포당했다. 8월 19일 이른 아침 (일설에는 19일부터 20일 새벽 사이라고도 한다),
로르카는 그라나다에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비스나르로 호송된 후 ‘푸엔테 그란데" Fuente Grande(커다란 샘)라 불리는 곳에서 다른 세 명의 희생자들과 함께 총살되었다. "이 더러운 남창 자식!" 이라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으면서, 그의 유해는 그곳에 있는 올리브 나무 근처에 묻혔다고 한다. - P17

로르카를 암살한 파시스트들은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그의 죽음이 ‘적색분자들의 내부 분열‘이나 어둡고 복잡한 애정(동성애) 문제 때문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1975년까지 오랫동안 이어진 프랑코 정권 시대 스페인에서로르카의 시집은 금서가 되고 암살의 진상을 입에 올리는 일도 금기시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스페인어권의 수많은 사람들이 만감을 품으며 그의 시를읊었다. 그의 시는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많은 스페인 민중의 자산이었고, 그리하여 암살당한 시인은 인간성과 자유의 영원한 상징이 되었다. - P19

파블로 네루다
시인 ·외교관  칠레 
1904. 7. 12~1973. 9.23

독재에 맞서 삶을 긍정한 시인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 「한 여자의 육체」,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1924)

풍만한 여자, 살.사과, 뜨거운 달,
해초의 짙은 냄새, 가장한 진흙이며 빛,
어떤 은밀한 투명함이 당신의 원주들에 두루 열리는가?
그 어떤 옛 밤을 한 남자는 자기의 감각들로 느끼는가?
- 『100편의 사랑 소네트』(1959)

삶에 대한 긍정을 솔직하게 노래한 이런 시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군사독재와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정신적인 의지가 되고 있다. - P23

1934년, 네루다는 로르카가 있는 스페인으로 임지를 옮겼다. 하지만 "모든 것이 1936년 7월 19일 밤에 시작되었다". 프랑코의 반란과 스페인 시민전쟁의 발발, 그리고 로르카의 죽음. "스페인 전쟁은 나에게는 한 시인의 죽음을 통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내 시를 바꾸어놓았다.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총살된 것이 아니라 암살된 것이다. (………) 이토록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괴물이, 이 지상에, 그의 고향에 있으리라고 대체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네루다 회상록』) 분명 스페인 전쟁은 네루다의시를 바꾸고 인생을 바꾸었다.

그들은 죽지 않았다! 초연의 한가운데
그들은 서 있다.
타오르는 도화선처럼.
<전사한 의용병들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노래>, 「마음속의 스페인』(1937) - P25

1936년의 스페인과 1973년의 칠레, 이 두 쿠데타가 네루다의 생애에 짙은 명암을 드리우고 있다. 파시즘이라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괴물‘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생애. 그 밑바닥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에 대한 긍정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독재의 강압과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인간해방을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네루다의 시가 울려퍼질 것이다. - P27

잭 시라이
스페인 내전 의용군  일본 미국 
 1900?~1937. 7. 11-

스페인에서 전사한 비국민

잭 시라이의 시신은 밤이 이슥해진 뒤에야 다른 7명의 전사한 전우들과 함께 올리브나무 아래 매장되었다. 그 묘표에는 "잭 시라이, 일본인, 반파시스트,
그의 용기를 기리며" 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전 세계 55개국에서 약 4만 명에 이르는 청년들이반파시즘과 인간해방의 이상을 위해 국제여단으로 몰려들었다. 잭 시라이는 그들 가운데 유일한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본명과 출생지, 생년월일, 가족관계, 성장과정,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의 이력에관한 문헌이나 증언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전사했을 때의 나이가 서른일곱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마저도 추정에 불과하다. 시라이는 자신의 과거를 얘기하지 않는 남자였다.  - P31

그곳 일본인 사회에서는 시라이가
조선인이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떠돌기도 했었다. 그가 말이 어눌한 데다 일본글자도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퍼졌을 테지만, 반전그룹인 일본인 노동자 클럽의 멤버조차도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대한 음습한 차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역시 시라이가 스페인에서 차별과 빈곤 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찾으려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 P33

시라이의 전사에 대해 뉴욕 주재 일본 영사관이 있을 수 없는 비국민"이라고 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잭 시라이는 과거 일본인 어느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택했고, 그리고 죽었다.
(………)한 조각의 영광도 없이, 조용히 살았던 것처럼 조용히 죽었다.(이시가키 아야코, 『스페인에서 싸운 일본인 戰¬六日本人)

가족, 고향, 국가로부터 끊임없이 버림받고 거부된 잭 시라이는, 바로 그때문에 더욱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는 꿈을 향해 자신의 몸을 내던질 수 있었던것이다. - P34

국제여단 International Brigades

2차대전의 전초전이자 파시즘과 진보적 민주주의의 국제전이던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공화파 국제의용군. 내전 발발 3개월 후인 1936년10월 14일 의용군 500명이 스페인 알바세테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국적과 언어를 넘어 총 4만여 명이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해 참가했다. 7개 여단으로 편성되어 코민테른의 지휘를 받던 이들은 프랑코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소련이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지원을 줄이면서 1938년에 해체되었다. 많은 작가와 지식인들도 참가해, 헤밍웨이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다큐멘터리 <스페인 땅>의 대본을 썼고, 앙드레 말로는 소설 『희망』을 발표했으며, 의용군으로 참전한 조지 오웰은 르포 『카탈루냐 찬가』를 썼다. 국제여단을 다룬 영화로는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1996)이 있다. 2006년 발표된 내전희생자 명예회복법안에는 국제여단으로 참가한 외국인들이 스페인 시민권을 쉽게 취득할 수 있게 하는 조치가 포함되었다. - P35

파블로 카잘스
첼로 연주가 지휘자  스페인  
1876. 12. 29~1973. 10. 22

첼로와 지휘봉을 무기로

‘황소 같은 체력‘이라는 평을 듣던 카잘스Pablo Casals도 1973년10월 22일, 끝내 만년의 망명지 푸에르토리코에서 심장 발작으로 영면에 들었다. 시신은 부인 마르타 카잘스Marta Casals 에의해 구리와 아연으로 만든 튼튼한 관에 안치되었다. 프랑코 정권이 쓰러지고 스페인에 민주주의와 카탈루냐 자치가 회복되면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유언이 실현될 날을 위해서였다.
"범인만이 인내를 모른다. 위대한 인간은 기다릴 줄안다" 라는 말은 카잘스의 좌우명이었다. 실제로 그는 고국 카탈루냐로 귀환할 그날을 96세를 넘길 때까지 끊임없이 기다렸다. 프랑코 역시 82세의 고령까지 끈질기게, 그러니까 카잘스가 죽은 2년 뒤까지 살아 있었던 탓에 결국 카잘스의 생환은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카잘스는 죽어서도 여전히 명예로운 귀향의 그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 P36

어느 날 프라드의 자택으로 독일군 장교가 찾아와 독일에서 연주를 하지 않는 까닭을 물었다. 카잘스는 "내가 스페인으로 가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 대답하며 히틀러가 통치하는 독일의 연주 요구를 거절했다. 나치 붕괴 후 카잘스를 찾은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은 유대인들을 보호했다고 변명했지만, 카잘스는음악적인 관점에서는 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인격의 가치가 크면 클수록 그 행위에 대한 책임도 그만큼 막중하다며 엄격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않았다. 후에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이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로 브람스의<더블 콘체르토>Double Concerto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협주곡)를 녹음하자고 제안했을 때도 2~3년을 미룬 끝에 거절했다. 메뉴인은 이를 카잘스의 ‘예술가로서의 독립의 한계‘를 드러내는 실망스러운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 P39

인류가 달 표면에 내려섰을 때, 카잘스는 그것이 "금방 잊히고 말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 말을 들은 어떤 이는 "카잘스는 운송기관이 말에서 우주선으로 진화하는 것을 보아왔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고 한다. 전세기 말에 스페인 왕실의 총애를 받던 카탈루냐의 한 음악가가 전쟁과 내란의 한 세기를 지나오면서 20세기의 "예술과 도덕의 흔들리지 않는 결합의 상징" (로맹 롤랑Romain Roland)으로 불리게 되기까지의 길은 ‘운송기관의 진화‘ 정도가 아니라 한편의 흥미진진한 대하역사소설이라 할 만한 것이다. - P40

카탈루냐 Catalua

스페인 북동부 자치지역. 바스크와 함께 대표적인 분리주의 운동 지역이다. 상공업이 발달한 경제 중심지로, 스페인어와 함께 공용어로 쓰이는 고유어를 가지고 있는 등독자성이 강하다. 12~15세기 지중해 무역을 통해 번성했으며, 1469년 아라곤 카스티야 합병 후 마드리드에 정치적 주도권을 내줬다. 1640∼1659년의 대규모 반란이실패하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5~1714)에 휘말리면서 1716 년 자치권을 잃었고,
19세기 후반부터 사회주의 · 아나키즘 운동과 자치독립운동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1931년 공화제 실시 후 다시 자치권을 획득했고, 내전에서 인민전선의 거점으로최후까지 프랑코에 저항했다. 내전 종식 후 프랑코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카탈루냐어 사용을 금지했다. 프랑코 사후 다시 자치권을 얻으면서 급진 민족주의자와 일부 좌파가 독립운동을 벌였다. 2006년에는 과세권, 사법권, 이민관할권 등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대폭 강화하는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화가 피카소, 달리, 미로와 건축가 가우디 등 많은 20세기 예술의 거장을 배출했다. - P41

사코와 반제티

니콜라 사코
구두 직공. 아나키스트 이탈리아-> 미국
1891. 4. 22~ 1927. 8. 23
바르톨로메오 반제티
생선 행상. 아나키스트 이탈리아-> 미국
1888. 6. 11~ 1927. 8. 23

21세기를 상징하는 사법 살인

그는 부르주아의 위치에서 드레퓌스Alfred Dreyfus를 옹호하는것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지만, ‘정의‘의 이름으로 사코를 옹호하는 것은 나자신을 적으로 삼아 파괴하려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파수견들』Les Chiens de garde)드레퓌스 사건과 사코 · 반제티 사건은 모두 세계적인 누명사건이지만, 특히 사코·반제티 사건은 가난한 이주노동자가 희생자였다는 점에서 계급 대립의 격화와 노동자계급의 조직화, 아울러 노동시장의 세계화라는 1920년대의 시대상황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 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 두 사람의 비극을 조명하면서 자신의 ‘정의‘의 내실을 되물었던 것이다. - P43

1920년 4월 15일, 매사추세츠 주 사우스브레인트리에서 제화회사의 회계부주임과 경비원이 피살되고 약 1만 6,000달러의 급료가 강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5월 5일, 사코와 반제티가 이 사건의 범인으로 기소되었다. 재판은 증언이나 증거 모두 근거가 빈약했고 배심원단의 구성 등 소송 절차 면에서도 문제가 많았으며, 무엇보다 피고가 아나키스트였다는 점 때문에 일종의사상재판 같은 양상을 띠게 되었다.
검사는 피고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병역을 기피한 점을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 "병역거부를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라는 등의 질문을 반복했다. 이에 대해 사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P44

나는 이 나라에 와서 열심히 일했다. 13 년 동안이나 일했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은행에 저축도 할 수 없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도 없다. 나는 인간이 인간답게 생활하는 것이야말로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인간이 자연이 준 모든 것을 누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노동하며 매일 좀더 나은 생활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 전쟁 - P44

이란 무엇인가? 전쟁이란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부자들을 위한것이다. 과연 서로를 죽일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 나는 아일랜드 사람을 위해서 일했다. 또 독일인 친구들과 함께 일했고, 프랑스인이나 그밖의 다른 나라 사람들과도함께 일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이들을 좋아한다. 왜 내가 이런 사람들을죽이러 가야 한단 말인가? 나는 전쟁을 믿지 않는다. 내가 사회주의자를 좋아하는 까닭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 P45

이처럼 반공과 배외주의라는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사코와 반제티의 재판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1927년 6월 1일, 두 사람은 유죄 선고를 받는다. 변호사 측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매사추세츠 주지사에게 청원하려 했지만, 사코는 "아무 죄도 없는 내가 왜 ‘간청을 해야만 하는가?"라며 서명을 거부했고, 결국 반제티만이 청원서에 서명했다. 주지사는 자문위원회에 재조사를명했으나, 재판이 정당했다는 위원회의 보고서를 근거로 청원은 각하되었다.
그리고 8월 23일, 마침내 전기의자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집행 하루 전날, 반제티는 사코의 아들 단테에게 "네 아버지의 무고함을 잊지말거라. 아버지의의연하고 고결한 태도를 배워라" 라는 편지를 남겼다. 형 집행에서 반세기가 흐른 1977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공식 성명을 통해 두 사람의 무죄를 인정했다고 한다. - P46

에른스트 톨러
극작가 독일  
1893. 12. 1~1939. 5. 22

바이에른 혁명의 한 줄기 빛

1914년 7월,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 유학 중에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을 들은 톨러는 급히 귀국하여 자원 종군했다. 동시대의 독일 청년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애국주의의 열광과 완전한 독일인이 되겠다는 감춰진 꿈이 그를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베르됭 전선에서 그는 어떤 계시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참호를 파던 중, 땅속에 묻혀 있던 인간의 내장이 그의 곡괭이 끝에 걸렸던것이다.

그러자 돌연 어둠과 빛이, 말과 의미가 분리되고 나는 인간이라는 간단한 진실을 파악한다.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나의 내부에 묻혀 있던 진실이다. 오직 하나의 모든 것을 이어주는 공통성이다.
죽은 인간,
죽은 프랑스인이 아니다.
죽은 독일인이 아니다.
죽은 인간 - P49

망명의 나날 속에서도 톨러는 투쟁을 계속했다. "타인의 고통에 민ㄱ궁지에 몰린 이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이르는 곳마다 고통이 강요되던 이 시대에 실로 다망했다."(노무라 오사무) 1937년경부터 건강이쇠약해지고 불면으로 고통을 겪으며 경제적으로 궁핍했지만, 그는 내전의 한복판에 있는 스페인을 위한 원조활동으로 늘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1939년 1월 바르셀로나가 함락되고, 2월 말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프랑코 정권을 승인한다. 마드리드 역시 3월 말에 항복해, 인민전선은 패배하고 만다. 파시즘의 발호에 이어 세계대전으로 돌입해가는 세계의 움직임은 이제 더 이상뒤집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 P52

꿈을 꿀 수 없는 사람에게는 살아갈 힘이 없다.

지난날 자신의 작품 속에 이렇게 썼던 에른스트 톨러는 1939년 5월 22일뉴욕의 어느 호텔 방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오랜 세월 자유를 위해 싸웠던 전사는 그저 잠들고 싶었을 뿐이다. 이 지상에서는 단하룻밤도 주어지지 않았던 그 잠을 다가올 밤도, 다가올 밤도 망각은 주어지지 않고, 추억만이 되살아온다. 1919년, 1920년의 뮌헨, 레테공화국을, 활동하던 날들을, 청춘을, 넘쳐흐르던 신념을. (클라우스 만Klaus Mann) - P53

카임 수틴
화가 러시아 출신→ 프랑스에서 사망 
1893~1943.8.9

뿌리 뽑힌 자의 불안

수틴Chaim Soutine의 이름인 ‘카임‘은 히브리어로 ‘생명‘이라는의미가 있다. 하지만 파리 몽파르나스에 있는 수틴의 묘비에는 ‘CHAIME‘로 잘못 새겨져 있고, 태어난 해 역시 1894년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의 연인이었던 게르다 그로트Gerda Groth는 수틴의 과거가 희뿌연 안개 저편에 가려져 있었다고 말한다. 게르다 역시수틴과 같은 유대인으로, 독일에서 망명한 인물이었다. - P55

고발이듬해인 1940년 5월 10일 나치 독일은 프랑스에 총공격을 개시하고, ‘독일인 게르다는 프랑스 정부에 의해 프랑스 남부 피레네에 있는 캠프에 수용되고 만다. 게르다와 헤어지게 된 수틴은 새로운 연인과 함께 나치의 추적에 떨며프랑스 중부지방의 여러 마을을 전전하다가 1943년 8월 9일 천공성 궤양으로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사망일시는 그의 이력 가운데 유일하게 확실한 날짜이다.
포그롬의 기억에서 도망치려 했던 그는 나치즘의 악몽에 쫓기며 세상을떠났다. 그의 작품에는 20세기의 뿌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절규가 격렬한 색채로 그려져 있다. - P59

바실리 칸딘스키
화가 러시아->프랑스  
1866. 12, 4~1944. 12. 13

대상이 나를 방해한다

1993년 여름, 나는 뮌헨 교외의 무르나우를 찾아갔다. 1909년에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ünter가 구입해 1914년까지 5년 동안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와 생활했던 집이 그녀의 유언에 따라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 집에서 보낸무르나우 시대는 칸딘스키 개인의 삶보다도 인류 회화의 역사그 자체에 결정적인 의의를 지닌다.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와
‘청기사‘ blaue Reiter를 결성한 것이나, "물질적인 것과 추상Der적인 것 속에 존재하는 정신적인 것을 체험하는 능력을 자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Überdas Geistige in der Kunst(1912)를 집필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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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내가 써온 책의 주제는 다양하게 나눌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중요한줄기 가운데 하나는 미술이다. 미술을 보는 관점이나 이야기하는 위치는 정통 미술평론이나 미술사 서술과는 조금 다르며, 코리안 디아스포라로서 나 자신이 서 있는 자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조선 민족은 19세기 이래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민족 분단이라는 역사의 과정에서 많은사람들이 헤어지고 흩어졌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중에서 일본에 살고 있는 나 같은 존재를
‘재일조선인‘이라고 부른다. - P163

2014년 한국에서 출간된 졸저 나의 조선미술순례는 "조선‘이란 무엇이며, ‘미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란 누구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을 다시 한번 던져보려는 시도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이라는 호칭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선도 한국도 모두 영어로는 (고려가 어원인) 코리아 Korea 로번역되기 때문에 영어로 코리아 또는 코리안 아트로 표기해버리면 그 속에 잠재된 문제를 놓치게 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역사적, 정치적 이유에서 최근까지 ‘조선‘을 민족의 호칭으로 사용하는 일이 반쯤은 터부시되어 왔다. 한편 북한은 정식 국가명으로
‘조선‘을 사용한다. 민족의 호칭을 둘러싼 이 같은 혼란은 사실이용어가 식민지 피지배와 민족 분단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 P167

나는 나의 조선미술순례에서 의도적으로 ‘조선미술‘이라는 호칭을 썼다. 현재 한국의 많은 독자가 이 용어를 듣고 직감적으로 ‘조선왕조 시대의 미술‘ 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미술‘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조선미술‘의 함의를 그렇게 닫아두지 않았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좀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본 민족의 총칭으로서 ‘조선‘이라는 말을썼기 때문이다. - P167

‘한국미술‘이라는 호칭을 굳이 쓰지 않은 이유는 ‘한국‘이 가리키는 범위가 민족 전체를 나타내기에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전 세계로 널리 퍼져나가 살고 있는 조선 민족 가운데 일부를 구성하는 국가의 호칭이며, 여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물론이거니와 재일조선인 및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포괄할 수 없다.
내가 ‘조선‘이라는 호칭을 고른 또 다른 이유는 ‘학대‘를 당한말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하나의 민족을 일컫는 호칭이었지만,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민족 차별적 부담을 지게 되었고, 민족 분단과정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짐을 지게 되었다.  - P169

일본에서 ‘조선‘이라는 말은 ‘열등한 것‘, ‘후진적인 것‘을 가리키는 차별어의 뉘앙스가담겨 있으며, 한국에서는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북쪽 나라를 떠올리게 한다고 금기시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조선‘이라는말을 입에 담을 때 긴장과 불안, 때때로 공포마저 느끼곤 했다. 그렇기에 더욱 나는 어떤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이 말을 쓰고 있는셈이다.
‘나의 조선미술순례』는 내가 조선 민족의 미술가들과 만나고 나누었던 대화를 소재로 삼아 묶어낸 미술 순례의 기록이다.
책에서 다뤘던 신경호, 윤석남, 이쾌대 등 여덟 명의 미술가 중에 - P169

는 정통파적 ‘한국미술사‘ 서술로부터 주변화되거나 또는 완전히무시되어왔던 인물도 포함되어 있다. 내가 나서서 이런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이유는 ‘우리미술‘이라는 기성 개념 안에 틈을 만들어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우리미술‘이라고 말할 때는 단지 ‘조선‘이라는 장소에서 만들어진 미술을 가리키는 것 이상으로, ‘우리‘라고 하는 어떤 민족적, 국민적 본질을 가진 미적 정수 같은 것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래서 ‘우리‘라는 상상이 본질화되고 강화되는 경향이 생겨나는 듯하다.  - P171

 ‘우리‘라는 말을 의문의 여지없는 하나의 전제로 사용한다면, ‘우리‘의 개념을 점유하고(즉 자신들만이 ‘우리‘라고 주장하고) 타자를 배제하게 된다. 언어를 예로 들어보면, 어떤 언어를 자유롭게 쓰는 자만이 ‘우리‘에 속하며, ‘우리‘란 바로 그 특정한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순환논법에 따라 배타적인 자의식을 강고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뜻이다. 여기서 ‘언어‘를 ‘미식‘으로 치환해보면, ‘우리미술‘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을 이해할수 있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어떤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인여러 조건으로 규정된 ‘콘텍스트(맥락)‘로서 이해해야만 한다고 - P171

주장한다는 편이 맞겠다. 우리는 언어나 미의식, 나아가 ‘혈통의공통성‘과 같은 상상으로 지탱되는 ‘우리‘가 아니라, 근대사의 과정에서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고, 지금까지도 분단과 이산이라는현실을 체험하고 있는 그런 ‘우리‘인 셈이다. - P173

원래 영어로는 ‘조선‘도 ‘한국‘도 모두 ‘KOREA‘다. 일본인이 멸시적으로 사용한 ‘조선‘이라는 일본어 어감마저 이곳 청중에게 전달되었던 걸까.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가며 답하려고노력했다. "나는 ‘조선‘이라는 말을 학대에서 구해내고 싶습니다.
식민지 지배자가 멸시적으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 말을 기피한다면 학대에서 구출할 수가 없으며, 오히려 그 학대를 추인하는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던 그때 내 뇌리에는 돌아가신 지 한참 지난어머니가 떠올랐다.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나는 일본 아이들로부터자주 "조선!"이라고 불리며 괴롭힘을 당했다. 집으로 돌아와의기소침해 있는 모습을 보고서 어머니는 나를 꼭 안으며 "조센은 조금도 나쁜 게 아니야. 나쁜게 아니야."라고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여주었다. 학교도 다닌 적이 없고 오랫동안 글도 읽지 못했던 어머니의 따뜻한숨결. - P175

"미술대학에 다니던 무렵은 매우 정치적인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진행 중이었던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와관련된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가 내게 ‘왜 아프리카에 관한작품을 하지 않지? 정통 아프리카의 미술 말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매우 서구적이고 현대식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정통 아프리카의 미술‘이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나는 런던의 어느시장에서 아프리카 천을 취급하는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내가 아프리카산이라고 생각했던 직물이 실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영국에서 만든 제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아프리카의 아이덴티티가 식민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된 것이죠." - P187

쇼니바레는 교수가 바라는 식으로 ‘아프리카적‘인 미술을 제작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아프리카적‘인 것을 거부하고 ‘영국적인 것에 동화되지도 않았다. "아프리카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아이덴티티 자체에 대한 질문을 작품화한 셈이다. 물론 뒤집어생각해보면 "과연 ‘영국적‘이란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영국 보수당의 최초 여성 당수로서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마거릿 대처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수상자리에있었다. 쇼니바레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대치는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그 시대로 되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무척 재미나죠." - P189

쇼니바레가 이 작품에서 그려낸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말도 안 되는 세상"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저렇게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지닌 아프리카 남성은 존재할수 없었다.
‘아프리카‘는 빅토리아 왕조 상류계급의 살롱을 장식한 호화로운 물건들에 새겨져 있었다. 비단과 면직물, 붉고 화려한 고급염료는 식민지가 없었다면 손에 넣기 힘든 물건이었다. 상류층이누리는 쾌적함은 빅토리아 시대의 노동계급이나 아프리카와 아시아 같은 식민지에서 착취한 부를 통해 얻은 소산이었다. 그러나쇼니바레는 그런 사실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결코 훈계하듯 말하지 않는 것이다. - P193

요컨대 그는 의도적인 전략을 가지고 이 MBE라는 칭호와 놀고, 또 놀리고 있는 셈이다. 물론 제국 측의 입장에서도 이른바 ‘넓은아량‘을 과시하며 작가와 작품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교묘한 전략이 있을 터다. 그렇기에 쇼니바레의 유리병 속 넬슨 제독의 배가 국립 해양박물관에 상설 전시되기도 하는 것이다. 잉카쇼니바레의 전략에 대해 성급한 평가를 내리는 일은 신중해야하겠지만, 이 작가가 숙고한 끝에 펼쳐낸 전략을 무기 삼아 제국과 격투하고 있다는 점만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프리카 천을 소재로 사용한 그의 작품은 귀여우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 분명 유명 패션 브랜드로부터 유혹의 손길이뻗쳐왔을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돌아왔다. "제 작품에는 이중성이 있어서 항상 어두운 측면이 내재합니다. 그렇지만 ‘베네통‘에는 그런 면이 없지요." - P201

그 점에서 쇼니바레는, 예를 들자면 1953년 가이아나 조지타운 출생의 여성 아티스트 잉그리드폴라드 Ingrid Pollard (1953~ )와는다르다. 나는 폴라드가 쇼니바레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갖고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 지금 시점에서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폴라드의 작업에는 쇼니바레와 공통점을 보이면서도 명확한 차이점이 있다. 그녀가 카리브해 지역(가이아나)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여성이라는 사실과도 큰 관계가 있을 것이다. 폴라드는 아래의 글을 통해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노예들의 후예라는사실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 P207

조개껍데기를 찾고 있었다. 장화를 신은 내 발밑에 파도가 밀려온다. 파도가 실어다준 것은 뱃머리로부터 떠밀렸던내 형제자매들의 잃어버린 혼이다. (하기와라 히로코, 『블랙』, 마이니치신문사,2002년) - P207

일반적인 백인 남성은 느낄 수 없는 감각일 것이다. ‘전형적인영국의 풍경, 그 속에 몸을 두는 행위 자체가 ‘노예 출신의 여성‘
에게는 강한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뜻이다. 그들, 백인은폴라드의 선조를 사냥감으로 취급하며 몰이를 했고 반항하면 채찍질을, 때때로 강간도 서슴지 않았으며, 결국 죽으면 대서양에 내던져버리던 자들이었기에 백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목가적인풍경조차 그런 불안과 공포를 불러와 그녀의 마음속을 휘저어 놓았던 셈이다. 백인 주류 계층은 폴라드의 작품을 통해 그런 감각을 아주 일부만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 P211

‘포스트콜로니얼‘ 시대의 미술은 우리에게 이러한 시점, 다름 아닌 ‘타자의 시점‘을 요구한다. 무척이나 힘겹지만 우리의 시야를 확실하게 넓혀주는 요구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 남성인 나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찾아갔던 과거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괜찮은 걸까? 이렇게 말하는 나는 과연 누구인 걸까?
잉그리드 폴라드의 작품을 알게 된 후, 스스로에 대한 그런 의문들이 복잡하게 뒤얽히고 있다. - P211

결국 1821년 로마에서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과 등졌고 그곳 신교도 묘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Herelies one whose name was writ in water.(여기 물 위에 이름을 새긴 자가잠들어 있노라.)"라는 글귀가 있다.


우수는 미와 함께 산다, 죽어야만 하는 미와 함께,
그리고 작별을 고하느라 항상 그 입술에 손을 대고 있는기쁨과, 그리고 꿀벌의 입이 빨고 있는 사이에도
독으로 변해버리는, 쑤시는 듯한 쾌락 가까이서.
아, 바로 환희의 신전에
베일 쓴 우수는 그녀의 성단을 갖고 있어
정력적인 혀로 기쁨의 포도를 그 예민한 입천장에 대고
터트릴 수 있는 자 외에 누구도 그것을 볼 수가 없다.
그 영혼은 우수의 강력한 슬픔을 맛볼 것이고,
그녀의 구름 낀 트로피들 사이에 매달려 있게 될 것이다.
-존 키츠, <우수에 부치는 송시> 제3연 - P227

햄스테드에 있는 키츠 기념관은 소박하고 얌전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정원 가득한 장미가 옅은 향기를 풍겼다. 키츠가 병든 몸을 뉘었던 침대가 남아 있으며 데스마스크도 전시하고 있었다. F와 나는 이렇게 고요한 공간에 몸을 두는 것을 좋아한다. 지나가버린 한 시대의 공기가 그곳에 그대로 남아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재능에 기대어 ‘낮은 신분‘을 극복하고 이뤄낸 입신양명, 비극적인 상황마저 작품으로 전환하여 창조했던 열정, 당시에는 불치로 여겼던 결핵과의 투병, 고전과 고대를 상징하는 이탈리아를 향한 동경, 결실을 맺지 못했던 사랑, 그리고 비통하고도감미로운 죽음………. 키츠에게 해당하는 이 모든 것이 낭만주의자를 구성하는 요소다. 이러한 면에서는 터너와 공통점이 있다. 다만 터너는 오래 살았다. - P229

영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풍경화가 터너와 컨스터블은 거의동시대를 살았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작품이 주는 인상은 전혀다르다. 컨스터블을 정, 평화, 조화라고 한다면, 터너는 동動, 투쟁, 혼돈이다. 전자를 삶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죽음이다. 어째서이렇게까지 대조적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에게 컨스터블이 ‘마음에 드는‘ 화가라면, 터너는 ‘마음을 술렁이게 하는 화가다 그래서 더욱 터너에게 끌린다. - P233

어떤 울분과 야망이 터너를 그토록 밀어붙였던 걸까? 내상상은 그의 성장 배경,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로 향한다. 터너는 코번트가든에 있는 이발소 집 아들이었다. 결코 상류계급이나 부유층 시민이 아니었다. 이러한 출신 배경을 지닌 이들 가운데 예외적인 재능을 부여받은 자만이 ‘출세‘를 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아로열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당시는 견고한 신분사회가동요하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아주 적은 가능성이 싹트던 시대였을것이다. 마부의 아들이었던 키츠도사정은 다를바 없었다.
터너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차리고 출세를 응원했다. 아들 역시 기대에 부응하고자 부단히 솜씨를 연마했다. 하지만 터너의 어머니는 정신질환을 앓던 사람이었다. "그의 모친은 무척 신경이 날카로운 사람이었는데 정도가 너무나 심했기에 결국 (1800년) 병원으로 이송될 수밖에 없었다.  - P249

터너의 가족사는 밤바다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는 작은 조각배를 연상케 한다. 강풍과 거친 파도는 어머니를 비유한 것이리라. 이는 저항하기 힘든 인간의 운명이자 "결국 패배로 끝나버릴
‘덧없이 반복되는 희망‘에 불과한 싸움"인 셈이었다. 다만 순수하게 화업을 연마하는 일만이 터너가 손에 움켜쥘 수 있는 생명의끈이 아니었을까. 그 생명선은 결국 지위와 큰 부를 안겨줬지만 만년의 터너는 재산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후진 양성에 뜻을 두었고 자신의 작품을 정리하여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하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터너가 죽은 뒤 으레 벌어지는 유산상속분쟁으로 인해 번거로운 절차와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점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 P251

‘도의적 책임‘에 관해서는 애매하고 넌지시 언급하지만 법적책임이나 공식 사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거부한다. 이것이 현시점에서 전 세계 옛 식민지 종주국이 견지하고 있는 공통된 태도다. 아시아 침략에 대한 일본의 자세 역시 마찬가지다. 블레어 정권은 "영국은 노예무역에 대해 깊은 비통함과 유감의 뜻을 표명‘
한다."라고 성명을 발표했지만 공식적으로 ‘사죄‘한다는 언명은없었다. "완전하고도 공식적인 사과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영국 국교회 지도부와 아프리카계 영국인 일부로부터 제기됐다. 여러 인권 단체 사이에서도 일련의 200주년 기념행사는 기만적이라고 강한 불만이 오갔다. 백인의 공적에 초점을 맞추면서 노예제에 저항했던 흑인의 역할을 경시했으며, 왕실 역시 오랜 시간에 걸쳐 노예무역을 비호했다는 비판이었다. 기념 의전에서 1인 시위를 통해 항의했던 그 사람도 아마 이러한 점을 호소했을 것이다. - P259

제작 동기는 인도주의였을까, 아니면 화가로서 지닌 욕망이었을까. 어느 쪽이라고 여기서 확정할 수는 없지만, 내 개인적인견해는 후자 쪽으로 기운다. 그렇다고 터너를 비난하려는 의미는아니다. 정치적 신조는 어찌 되었든 그는 예술가로서 단호히 행동했다. 좋건 나쁘건 ‘뼛속까지 화가‘였다.
터너의 작품을 가장 풍부하게, 그리고 가장 체계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곳이 테이트브리튼이다. 이 미술관은 설탕 정제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리버풀의 부호 헨리 테이트 경이 자신의 회화 컬렉션을 1889년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이렇게 풍요로운 컬렉션과 미술관도 근원을 밝혀보면 노예제와결부된 대서양 삼각무역이 가져다준 결실인 셈이다. 역설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야말로 영국적‘이라고 해야 할까. - P261

영국 기행을 시작하면서부터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특히 그녀의 죽음과 관련하여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케임브리지의 교외 그랜트체스터를 방문했을 때 그 생각은 점점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버지니아울프의 죽음을 쓰기 위해서는 그녀가 몸을 던져 스스로 삶을 마감했던 우즈강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곳인 서섹스 주 로드멜마을을 찾아가 버지니아와 레너드의 자택 몽크스하우스를 보고싶다는 마음도 점점 간절해졌다. 일정상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영국에 도착하니 출발전 예정에는 없었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취재와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주제는 ‘동아시아 국제 관계와 역사 문제.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내가 맡아야 하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어 취재에 응했고 서섹스행은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 다큐멘터리는 방송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말하면 방영되었는지 어땠는지 연락조차 받지 못했다. - P271

버지니아 울프는 1941년 3월 28일 금요일, 자택 근처의 우즈강에 빠져 자살했다. 59세였다. 내가 읽은 버지니아 울프에 관한몇 권의 책 가운데 가장 생동감이 넘치는 서술은 나이젤 니콜슨Nigel Nicolson의 「버지니아 울프: 시대를 앞서간 불온한 매력』, 푸른숲,2006년)이다. 저자는 버지니아의 친구이자 애인이었던 여성 저술가 겸 원예가 비타 색빌 웨스트Vita Sackville-West의 아들이다. 그는어려서부터 버지니아의 가족과 친교를 맺었던 사람이기도하다.
나이젤에 의하면 3세기에 걸친 시간과 남녀의 성을 초월한주인공의 이야기 『올랜도』는 버지니아가 비타 색빌 웨스트에게바친 문학사상 가장 길고도 매력적인 러브레터다. 블룸즈버리 그룹은 남녀를 불문하고 성에 대해 진보적이었고 동성애적 관계라도 친밀한 우정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고 있었기에 버지니아와 비타의 관계도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룹의 일원으로 경제학자였던 케인스 역시 동성애자였다. - P275

버지니아는 3월 18일에 처음으로 자살을 기도했다. 그때 남편 레너드에게 남긴 유서는 "사랑하는 당신에게. 내가 다시 미쳐가고있다는 걸 느껴요."라고 시작한다. "나는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어요. 내가 당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걸 잘 알아요."라고 한뒤 "세상 누구도 우리 두사람만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끝맺는다. 유명한 유서다.
다만 이때 버지니아는 자살에 실패하고 흠뻑 젖은 채집으로돌아와 실수로 웅덩이에 빠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후 열흘이지난 3월 28일 정오 무렵, 집에서 반 마일 떨어진 우즈강까지 걸어가 "모피 코트 주머니에 돌덩이를 쑤셔넣고 물속으로 향했다. 수영을 할 줄 알았지만 물에서 떠오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분명 끔직한 죽음이었을 것이다."(나이젤 니콜슨, 앞의 책)276 - P277

내 마음을 끌어당겼던 자살자들은, 예를 들면 토리노의 자택 아파트 4층에서 몸을 던진 아우슈비츠의 생환 작가 프리모 레비, 파리 센강 미라보 다리에서 삶을 마감한파울첼란, 망명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교외에서 약물로 목숨을 끊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1881~1942) 같은 이들이다. 앞의 두 사람이 생을 마감한 현장에는 직접 가봤지만 브라질까지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나는 이들이 패배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의 자살은 생물학적인 생명 이상의 무언가에 이를 ‘이상‘이나 ‘주의‘라고 하든, 혹은 ‘미학‘이라 부르든) 충실하고자 했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P279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서"
라고 일컬어지는 버지니아의 마지막 글도 조금은 복잡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나는 오히려 레너드라는 인물에게 끌린다. 재능 있는 작가이기도 했던 그는 제1차세계대전을 계기로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노동당에서 국제 제국주의 문제에 정통한서기 직책을 맡았다. 이후 국제연맹헌장의 초안을 쓰고제언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정신적으로 병을 앓아 자살미수를 거듭하는 아내에게 마지막까지 충실했던 삶이었다. 처절하다고까지 말할 법한 ‘사랑‘의 형태라고 할까. - P283

실제로 레너드와 버지니아는 나치가 영국 점령 후에 구속할대상자 리스트에 올라있었다고 한다. 표면상어떠했건, 이러한 긴장감과 버지니아의 자살이 관계없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버지니아의 집안에는 정신병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고 어린시절에는 배다른 오빠들에게 성적 학대를 받아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기도 했다. 그녀는 문학적으로 특이한 재능을 가졌으며매우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였다. 블룸즈버리라는 지식인 모임에서 여신처럼 숭배를 받았고 작가가 된 후는 기이할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집필에 몰두했다. 버지니아울프의 자살은 가슴 아프지 - P285

만, 세상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살이라는 사건 옆으로 여성차별과 인종차별, 게다가 파시즘의 위협이라는 보조선을 그어보면, 근대라는 시대에 ‘개인의 존엄‘ (그리고 이에기초한 ‘자유‘와 ‘우애‘)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야비한 폭력에 의해 압살을 당해온 역사가 한눈에 떠오른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까. 미국과 유럽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목소리 높여 배외주의를 외치는 세력이 늘어가고 있다. 지금과 1930년대는 서로 닮았다. ‘이 시대의 버지니아들은 여기저기의 절망속에서 생명을 끊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과거로부터는 배울 수 없는 존재일까.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이 어려운 질문을 우즈강변에서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 바람은 이루지 못했다. - P289

사랑하는 당신에게

내가 다시 미쳐가고 있다는 걸 느껴요. 우리는 다시 그 끔찍한 순간을 극복해나갈 우 없겠지요. 그리고 이번에는회복될 수 없을 것 같아요. 귓가에는 환청이 들리기 시작하고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어요. 그렇기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최선의 일을 하려고 해요.
당신은 내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을 선사해주었지요. 당신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우리 두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을 누렸어요. 이 끔찍한 병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나는 더 이상 싸울 수 없어요. 내가 당신의삶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걸 잘 알아요. 내가 없어야 당신도 당신 자신의 일을 해나갈 수 있어요. 당신은 할 수 있을 거예요. 난 지금 이것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잖아요. 읽을 수도없어요. 다만 내가 말해두고 싶은 것은 내 인생의 모든 행복은 당신 덕분이라는 거예요. 당신은 한결같이 인내해주었고믿을 수 없을 만큼 내게 따뜻했어요. 다른 모든 사람들도 잘알거예요. 만약 누군가 나를 구할 수 있었다면 그건 당신이었을 거예요. 나에겐 지금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당신의 따뜻함만은 지금도 확신하고 있어요. 이제 더는 당신의 인생을망치고 싶지 않아요. 세상 누구도 우리 두 사람만큼 행복할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버지니아,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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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작심하고 전집 가운데 『브레히트 시집』을샀던 나는 그중에서도 브레히트가 망명생활 중에 쓴 시 「후손들에게」를 반복해서 읽었다.


너희들, 우리가 잠겨버린 밀물로부터
언젠가 떠오르게 될 너희들은
생각해다오.

우리의 허약함을 이야기할 때
이 시대의 암울함도,
너희들이 겪지 않았던 이 암울함까지도.
사실 우리는 신발보다 더 자주 나라를 바꿔가면서
절망적으로, 계급 간의 투쟁을 거쳐 왔던 게다.
불의만이 판을 치고, 반항은 사라졌을 바로 그때에.

그렇지만 우리는 물론 알게 되었단다.
증오는, 비천함에 대한 증오조차
표정을 일그러뜨린다는 것을
분노는, 불의에 대한 분노조차
목소리를 쉬게끔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우애의 터전을 준비하려고 했던 우리 자신조차
우애로만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단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언젠가 때가 오면,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손을 뻗는 그런 때가 오거든
생각해다오, 우리들을,
모쪼록 넓은 마음으로.


나는사춘기 때부터 늘 건강에 무신경한 면이 있었다. 차림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생활이나 몸가짐쪽에는 단정치 못하고 F는 규율과 훈련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글쟁이고, F는 음악가인 것이다.(이런 식으로 잘라 말해도 괜찮을까?) 조금은 불량한태도일지 모르겠지만, 무난하게 장수하는 삶에 지고한 가치를 두는 사고방식에는 공감이 되지 않는다.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한적도 없다. 그런 까닭에 매일 아침 규칙적으로 건강식을 챙겨먹는것과 같은 일을 나는잘해낼 수 없다. - P117

오페라의 배경이 되는 마하고니는 지명수배 중인 불량배 세사람이 황야에 건설한 도시로서 향락산업으로 크게 번영한다.
하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배금주의에 농락당하고 도시는 황폐해진다.
로열 오페라의 연출가이자 총감독인 카스퍼 홀텐 KasperHolten (1973~ )은 공연 프로그램 팸플릿에서 설명하기를, 이 이야기가 배경이 되었던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과 지금의 상황을견주어보면 더하면 더했지 뒤지지 않을뿐더러 오늘날의 런던을보여주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고 했다. 확실히 극장 밖을 나오니거리의 표정은 도쿄나 서울처럼 번잡하다. 마하고니를 덮친 허리케인처럼,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이 도시에도 불어닥치고 있는 것이다. - P129

어떤 일이든 내 능력 밖의 것까지 해내려고 애썼던 나는 바로그 두꺼운 책과 씨름했지만, 거의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다만 내가 이해했던 것은 L형이 나를 아이 취급하며 깔보지 않고 오히려대등한 어른처럼 대해주었다는 점, 그리고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고 또 ‘재현‘하기 위해서는 이런 난해한 책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덧붙여 ‘브레히트‘라는 인물은 어쨌건 그러한 분야에서 세상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다는사실이었다. - P137

생각해보면 그 무렵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지 거의 20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다. 20년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눈깜짝할사이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저 먼 나라의 시인이 부르는 소리를 다름아닌 ‘후대 사람‘의 위치에 서서 읽었던 것이다.
‘암울한 시대‘가 아직 지속되고 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내 뒤편에 놓여 있는 듯 생각했다. 그 시절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나버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암울한 시대‘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나의 앞쪽으로 끝도 없이 지금 나는 런던에서 브레히트의 목소리에 덧붙여 후대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심경으로, 이 시를 떠올리고 있는 셈이다. (2014년 5월에 일본 오사카에서 강연을 할 때, 청중 가운데 젊은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인용하며 낭독한적이 있다.) - P143

어느덧 대학 교수로서 살아가게 된 나는2005년 학생들을 인솔해서 베를리너 앙상블의 도쿄 공연을 보러 갔다. 상연작은 브레히트 원작, 하이너 뮐러 Heiner Müller (1929~1995) 연출의 아르투로 우이의 출세였다. 베를리너 앙상블은 브레히트가 중심이 되어 전후 동베를린에서 창설한 극단이며, 이 작품은 브레히트가 1941년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헬싱키에서 쓴 희곡이다. 히틀러가 자행한권력 탈취 과정을 시카고의 한 불량배가 갱단의 보스 자리에 오르는 상황으로 바꿔 풍자적으로 그렸다. 나치가 유럽을 모조리 정복할 듯한 기세를 과시하던 그 무렵, 브레히트는 이 연극 작품을통해 제3제국의 총통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것이다. - P145

브레히트는 제1차세계대전 당시 위생병으로 종군했고 전쟁이 끝나자 바이에른 혁명에 직접 참가했다. 히틀러 역시 하사신분으로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제대 후에도 패전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반유대주의와 배외주의를 부르짖으며 극우 군소정당의 일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두사람은 동시대를 살아간불구대천의 원수였다고 할수 있다. 브레히트가 각본을 맡고바일이 작곡한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는 1930년에 초연을 올렸는 - P145

데, 3년 후인 1933년에 히틀러가 수상자리를 거머쥐고 나치 정당이 정권을 탈취했다. 망명생활에 들어간 브레히트는 이후 15년 동안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소련, 프랑스, 영국, 그리고 미국을 전전했다. 놀라운 점은 브레히트가 이런 망명생활 중에도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내며 쉬지 않고 투쟁을 이어갔다는 사실이다. - P147

독일』,
과연 절묘한 표현이다. 그런사람이 아니었다면 15년이나 되는 힘든 망명생활속에서 끝까지 싸워내지 못했으리라. 또한 그랬기에 아르투로 우이의 출세」와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 같은전대미문의 명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브레히트가 머물던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영화계와 연극계에 휘몰아쳤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했던 브레히트는 1947년 스위스로 탈출하여 1948년말에 동베를린으로 귀국했고, 1956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르투로 우이의 출세」는 브레히트가 죽은 후 1958년에 처음 무대에 올랐다. 연극의 에필로그에는 "이 괴물을 낳은 자궁은 여전히 건재하다."라는 유명한 경구가 등장한다. 아우슈비츠의 생환자인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도 자신의 저서 『이것이 인간인가의 1972년 개정판 서문 「젊은이들에게」에서 이 말을 인용한바 있다. - P149

서로 친밀해 보이는 사람들은 세련된 카페나 펍으로 몰려갔다. 경쾌하고 절묘한 기지, 신랄한 풍자, 압도적인 무대미술, 일류 예술가들이 펼쳐낸 노래와 춤…. 나 역시 물론 만족스러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이곳에서 나는 ‘브레히트‘라는 키워드를 통해 열두 살 이후 반세기에 걸쳐 지나온 나의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펼쳐진 나치즘의 흥망, 제2차세계대전에서 시작하여 사회주의권의 붕괴를거친 지금까지의 인류사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과연 나는 제대로살아가고 있다고 말할수 있을까. 인류사회는 나아지고 있다고 말할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 괴물을 낳은 자궁"은 이제 사라졌다고말할수있을까. - P151

스위스에서는 강연 일정 외에도 몇몇 미술관을 다시 가보고유서 깊은 한 호텔도 찾아갔다. 예전에 파울첼란 Paul Celan (1920~1970)과 넬리 작스 Nelly Sachs (1891~1970)가 만났다는 호텔이다. 지인인 독문학자 기타 아키라씨가 그곳에 대한 정보를 귀띔해주었다.
취리히 호수에서 흘러들어온 물길이 좁아지는 곳인 그로스뮌스터 대성당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주변은 휴양을 하러 온 사람들과 관광객으로 북적거렸다.
첼란은 1920년 동유럽 부코비나 지방의 체르노비츠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18세기 후반까지는 터키 제국의 영토였고, 그이후로는 합스부르크 제국령이었으며,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루 - P153

마니아의 차지였다.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유대인, 독일인,
폴란드인, 헝가리인 등이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 지역이었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가 이곳을 양분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시기에 이곳에는 소련군과, 이에 대항하는루마니아와 나치독일 연합과의 전선이 형성되었다. 충돌 과정에서 유대인 주민은 소련군에 의해 시베리아로 강제 이송되거나 독일군에게 조직적으로 학살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첼란의 부모는독일군의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당했고 첼란도 강제 노동을 당했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아 종전을 맞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첼란은 빈을 거쳐 파리에서 거주하면서 적의 언어인 독일어로시를 써내려갔다. - P155

넬리 작스는 1891년 베를린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시를 발표했는데 나치 정권이 수립되어 압박을 받자 1940년에 늙은 어머니와 함께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그의 약혼자는 나치에게 생명을 잃고 말았다. 이후 작스는 생계를꾸려가기 위해 스웨덴 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자신의 시를 썼고 1966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의 현대음악가 윤이상 역시 한국 군사정권에 의한 탄압 - P155

의 희생자였다. 그리고 결국 망명지 베를린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는 1980년 5월, 계엄군이 많은 시민을 살육했던 광주의 소식을 접하고 넬리 작스의 시를 이용하여 실내악 작품 「밤이여 나뉘어라」(1980)를 작곡했다.


밤이여 나뉘어라
너의 빛나는 두 날개는 전율하고
나는 이제 떠나려 한다
피투성이의 밤을
되돌려 주려기에. - P157

첼란은 파리에서, 작스는 스톡홀름에서 정신이상으로 괴로워하면서 망명생활을 했다. 두 시인의 편지 왕래는 1954년 무렵부터 시작되어 16년에 걸쳐 이어졌다. 그동안 두 사람은 실제로 두번 만났는데, 그중 첫번째 만남이 1960년 5월 취리히의 스토르혜 Storchen (황새)‘ 호텔에서였다.(‘파울첼란과 넬리 작스의 왕복 서한1996)고립과 외로움의 극치를 표상했던 두 명의 유대인 시인, 첼란은 1970년 파리에서 센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고, 같은 해 작스 역 - P157

시 스톡홀름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두사람 모두 ‘피해망상증‘이라 불리는 정신질환으로 삶을 마칠 때까지 괴로움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을 병자로 분류하고 증상에 따라 병명을 붙이는 일에 저항감을 느낀다. 두 사람은 나치즘이라는 인류의 질환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언제든 그것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예감에 끊임없이 위협을 느꼈다. 둔감한 사람들 대신 민감한 안테나로 위기의조짐을 지속적으로 감지했다. 진정 병든 자는 누구인가? 지금 일본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각지에서 차별과 배제를 부르짖는 거친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 P159

취리히의 평온한 오후, 나는 두 시인이 만났던 호텔을 찾아갔다. 그 장소에 갔다고 해서 특별한 뭔가가 있을 리는 없다. 다만 여행을 할 때마다 항상 그래 왔듯, 나는 죽은자들이 내는 기척에 귀를 기울여보고 싶을 뿐이다. 관광객이 오가는 밝은 야외로부터단절되어, 이제는 꽤 쇠락한 분위기가 감도는 차분한 카페에서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첼란이 앉았던 곳은 어느 의자일까?‘라고 잠시 부질없는 생각에 몸을 맡겨볼 따름이다.
취리히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끝이 없지만 이제 다시런던으로 돌아가야만한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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