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책들 가운데, 아직까지 내 기억 속에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남아 있는 책이 바로 데라다 도라히코‘가 쓴 수필집이다. 내 독서인생 최초의 책다운 책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이와나미 문고판으로 읽은것도 아니었다. 며칠 전 벽장 안 구석구석을 이 잡듯 뒤져보았더니 어지간히 버리기 아까웠던지, 용케 그 수필집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30년 만에 손에들고 보니 아동용 책답게 한자 옆에 일본어 독음이며 삽화까지 곁들여져 있었고 『데라다 도라히코 작품집』寺田集이라는 서명이 붙어 있었다. 출간한 곳은포플러 출판사. 초판은 1959년에 발간되었는데 내 책은 그 이듬해에 나온제2판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총 스무 권짜리 시리즈 중 둘째 권으로, 책 뒤에 달린 광고를 보면 첫째 권에는 요시노 겐자부로源三郞,
셋째 권 이하로는 다니가와 테츠조 아마노 데이유, 가메이 가츠,
이치로井勝一郎, 고이즈미 신조2가 갖고 있던 책은 달랑 데라다 도라히코 작품집』 한 권뿐이었다. - P20

가뜩이나 무보다 문을 숭상하는 전통적 가치관을 지닌 조선인들에게
‘독서‘나 ‘지식‘이라는 말이 지닌 가치는 단연 막중한 것이었다. "아무개는 지식인이다"라는 평판은 최상의 찬사였고, 동시에 ‘무식한 놈‘이라는 말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최악의 모욕이었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지금도 여전히 민족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는데, 그가 뤼순 감옥에서 남긴 수많은 글 중 저 유명한 "一日不讀書, 口中生荊" 이라는 말이 있다. 형 집행을 기다리면서도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것 같아 참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는 단순히 만용을 부린 사람이 아니라 지성인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그의 모습이 조선 민중의 심금을 울렸으리라. - P21

"아아,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하며 이 대목에서 나는 긴 한숨을내쉬곤 했다. 작가는 홀로 남겨진 꼬마가 도토리를 주우며 즐거워하는 모습을바라보면서 "처음과 마지막이 비참했던 어미의 운명만큼은 이 아이에게 반복시키고 싶지 않다"고 글을 맺는다.
어디고 흠잡을 데 없는 문장이었다.
기승전결의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기는 했지만, 물론 어린아이인 내가 그런 것까지 이해했을 턱이 없다. 다만 ‘형식‘이 가져다주는 유려한 문장 흐름과좋은 어조가 전해주는 율동감의 매력을 그때 처음으로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 P27

1992년 여름, 나는 중국 지란의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방문했다. 지난날
‘간도‘로 불리던 이 지역은 조선반도의 민주, 러시아의 국정을 취하고 있어서 20세기 초엽부터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조선인들이 많이 아주했던 곳이다. 그 때문에 이 지방은 일본의 중국 침략 교두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일투쟁의 상품이 되기도 했다. - P61

왜 다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또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소년 아라이의 불행에 생각이 이르자, ‘부조리‘를 느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 테지만 거의 그와 비슷한, 왠지 더이상 감당하기 힘든 감상에 빠졌다. 단한방에 상대를 녹아웃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막내형이 우울해했던 것 역시, 아마도 그 같은 아라이의 현실을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들 "어린 시절은 참으로 좋았다. 가능한 일이라면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나 역시 그 같은 마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지난 시간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하나하나 꼼꼼히 되짚어보면, 그리움이나 즐거움과 마찬가지로 어린아이 나름의 슬픔과 괴로움이 마음속 저편에서 되살아온다. - P81

에리히 케스트너가 국외로 망명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나치스의 폭정이 장기간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신념 때문이었을 테다. 하지만 노모老母 곁을 떠나고싶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 세상에 마마보이가 많다지만 케스트너처럼 용기 있고 훌륭한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사실 『하늘을 나는 교실」에서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글은 제2서문이다. 이 서문에서 케스트너는 "시종일관 재미있는 이야기만 만들면서 아이들을기만하고, 재미로 아이들 정신을 홀리려 애쓰는 아동서 작가들에게 분개하며이렇게 충고한다. - P84

어째서 어른들은 자기가 어렸을 때의 일들을 그렇게도 새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아이들도 때로는 지극히 애처로운, 가엾고 불행한 존재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변해버리는 것일까요? (……) 아이들의 눈물은 결코 어른들의 눈물보다 가볍지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 무거울 수도 있다는 말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 P85

어른의 눈물을 아는 자가 아이의 눈물을 안다. 아이의 눈물을 이해하는 자가 어른의 눈물까지 이해하는 것이다. - P85

나는 마음속으로 고상한 중산층 속으로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나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들을 나몰라라 배신하지는 않을까? 아니, 나는 벌써 그들을 배신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자문을 내가 수없이 반복하게 된 것은, 위태로울 정도로 예민해져가는 소년기의 자의식과 불균형한 자기애의 양상을 이 작품이그만큼 능숙하게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이 글을 접한 이후로 나는 오랫동안 다자이 오사무를 싫어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거의 자기혐오와 같은 감정이었다. - P121

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
기차는 열풍 속을 뚫고 지나가리라
기적소리 어두움 속에 울부짖듯 외치고
불꽃은 평야를 밝게 비추는데
아직, 조슈의 산은 보이지 않누나.


이렇게 시작하는 「귀향」은 곧바로 암기해버렸다.
이 시에 등장하는 "모래자갈 같은 인생이런가"라는 구절이 아직 열두 살도안 된, 인생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는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뒤로 얼마동안 잊고 지냈는데, 십여 년 세월이 흘러 옥중에 갇힌 작은형에게 반입할 생각에 홋타 요시에 젊은 시인들의 초상의사서詩人肖像(1968)을읽어보니, 주인공이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가나자와로 귀향할 때마다 이 시를 머릿속에 떠올렸다는 대목이 나와서,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때야 비로소 "모래자갈 같은 인생" 이라는 시구에 대해 나도 아주 조금은실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던 것이다. - P128

하기와라 사쿠타로에 마음이 이끌린 뒤부터 나는 한 권 두 권 시집을 사고,
시인 흉내도 내면서 시 비슷한 글들을 끄적이게 되었다. 따로 공책을 마련해선마음에 드는 시구들이나 경구, 혹은 자작시 비슷한 글귀들을 적어두었다. 이 공책만큼은 절대로 형들에게 발각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숨겨둘 장소를 물색하느라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시절 나는 이미 형들에게
‘시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시인의 이미지란 베레모에 루바스카 차림을 한 ‘문약한 무리‘, 비위를 거스르는 ‘뇌꼴스러운 놈들‘, 꼴사납게 ‘잘난 체하는 배부른 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행여 형들이 내 기록들을 훔쳐보고 비웃기라도 한다면 가출하는 길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고지식한 생각을 하며 괴로워했다. - P129

1970년대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서재나 연구실에서 씌어진 말이 아니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징벌‘
이라 부르던, 수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서 금지처분을 당하던 상황에서 써 보낸편지였다.
나는 곧바로 형의 이 말을 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항변1의 여지가 없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독서.
으로서의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그 같은 절실함이 내게는 결여돼 있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읽지 않은 채,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시시각각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P146

또다른 하나는 ‘사춘기의 교양 콤플렉스‘ 라고 불러야 마땅할 방향에서 시작되었다. 이 분야에도 꼭 읽어야 할 책들이 숨이 막힐 정도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을 읽는다는 말은 적어도 내게는, 자기를연마하고 인격을 도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도 특정 부류에 편입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과 동일한 의미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로 그런 생각은 감당할 수없이 비대해져 강박관념이 되기도 했다. ‘특정 부류‘라고 막연하게 표현해까닭은, 우뚝 솟은 산 정상을 우러러볼 때 그럴 수 있듯이, 참된 지식의 거인을향한 동경과 단순한 ‘문화적 특권 계급‘에 대한 선망이라는 본디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아직 미숙한 내 머리에서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 P152

에리히 케스트너나 쥘 베른에 정신이 팔려 있던 시절부터 가지이 모토지로梶井基永郞"의『레몬』, 구라타 햐쿠조출가와 그 제자의弟子,
또는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곡』La symphonie pastorale 등을 읽게 될 때까지 불과 2~3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죽음‘과 ‘성‘이라는 인간의 두 가지 근본문제가 불현듯 내 머리를 온통 뒤덮게 되었던 것이다. 그 즈음에는 1년 사이에 내키가 10여 센티미터나 자랐던 터이므로 그런 일쯤이야 별로 이상할 것 없다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사춘기‘ 라는 극히 짧은기간 동안 너무나도 급격한 정신적 성장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잔혹할 정도의 경험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나와 여전히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는 나 사이의, 그 버거운 불균형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했던 것이다. - P153

이 말을 들은 나는 완전히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경멸당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기 때문이다. ‘읽었다‘고그녀가 자만해주었더라면 나로서도 그럭저럭 참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그녀는 그 책만큼은 읽을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 만큼은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책을 많이 읽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당장 현관 서가에 꽂힌 문학전집쯤은 거의 독파했을 게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와 재빨리 형이 읽던 ‘마의 산을 손에 쥐었다. "넌 이 책 읽을마음이 없다지만, 여차여차하고 이러저러해서 난 재미있게 읽었단다." 이 말을꼭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죽고 싶을 정도로지루해져버려, 곧바로 내팽개치고 말았다. - P160

몇 년 전 스위스의 세간티니미술관Segantini Museum을 방문하는 도중에 다보스Davos를 지나치게 되었다.
‘다보스?‘ 그때 갑자기 다보스라는 지명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왜일까?
불현듯 다보스가 ‘마의 산의 무대였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내가 이 장소를 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다보스에 와 있는 것이다. 작가 토마스 만은 요양소에 입원한 아내의 수발을 들면서, 이곳에 3주 동안 머물며 「마의 산』을 착상하고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12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눈 깜짝하는 사이 다보스를 뒤로하고, 냉랭한 고원의 대기를 헤치고 생모리2츠St. Moritz를 향해 급히 차를 모는 동안 "나・・・・・・ 그 책만큼은, 읽고 싶은 마음이영 들지 않아" 라던 소녀의 말이 귓전에 다시 울렸고, 그때 그녀의 표정까지도바로 어제의 일처럼 떠올랐다. - P162

그 시절의 나는 왜 모든 일에 그렇게도 과도한 의식으로 대했던 것이며, 또사사건건 거북살스러워했던 것일까? 도대체 왜 자신의 친근한 감정과 그리워하는 감정에 자연스러울 수 없었던 것일까?
눈 깜짝할 사이 저 답답하고 안타깝던 지난날에서 어느덧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의 사춘기는 벌써 저 멀리 떠나간 것이다. 그러나 마의 산을 정복하지 않는 한, 나는 언제까지고 사춘기 때의 번민을 떨쳐버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마의 산은 사춘기 콤플렉스의 상징이요 끝까지 등정할 수 없었던, 영원한 미답의 봉우리와도 같은 존재이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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