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작심하고 전집 가운데 『브레히트 시집』을샀던 나는 그중에서도 브레히트가 망명생활 중에 쓴 시 「후손들에게」를 반복해서 읽었다.
너희들, 우리가 잠겨버린 밀물로부터
언젠가 떠오르게 될 너희들은
생각해다오.
우리의 허약함을 이야기할 때
이 시대의 암울함도,
너희들이 겪지 않았던 이 암울함까지도.
사실 우리는 신발보다 더 자주 나라를 바꿔가면서
절망적으로, 계급 간의 투쟁을 거쳐 왔던 게다.
불의만이 판을 치고, 반항은 사라졌을 바로 그때에.
그렇지만 우리는 물론 알게 되었단다.
증오는, 비천함에 대한 증오조차
표정을 일그러뜨린다는 것을
분노는, 불의에 대한 분노조차
목소리를 쉬게끔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우애의 터전을 준비하려고 했던 우리 자신조차
우애로만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단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언젠가 때가 오면,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손을 뻗는 그런 때가 오거든
생각해다오, 우리들을,
모쪼록 넓은 마음으로.

나는사춘기 때부터 늘 건강에 무신경한 면이 있었다. 차림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생활이나 몸가짐쪽에는 단정치 못하고 F는 규율과 훈련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글쟁이고, F는 음악가인 것이다.(이런 식으로 잘라 말해도 괜찮을까?) 조금은 불량한태도일지 모르겠지만, 무난하게 장수하는 삶에 지고한 가치를 두는 사고방식에는 공감이 되지 않는다.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한적도 없다. 그런 까닭에 매일 아침 규칙적으로 건강식을 챙겨먹는것과 같은 일을 나는잘해낼 수 없다. - P117
오페라의 배경이 되는 마하고니는 지명수배 중인 불량배 세사람이 황야에 건설한 도시로서 향락산업으로 크게 번영한다. 하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배금주의에 농락당하고 도시는 황폐해진다. 로열 오페라의 연출가이자 총감독인 카스퍼 홀텐 KasperHolten (1973~ )은 공연 프로그램 팸플릿에서 설명하기를, 이 이야기가 배경이 되었던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과 지금의 상황을견주어보면 더하면 더했지 뒤지지 않을뿐더러 오늘날의 런던을보여주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고 했다. 확실히 극장 밖을 나오니거리의 표정은 도쿄나 서울처럼 번잡하다. 마하고니를 덮친 허리케인처럼,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이 도시에도 불어닥치고 있는 것이다. - P129
어떤 일이든 내 능력 밖의 것까지 해내려고 애썼던 나는 바로그 두꺼운 책과 씨름했지만, 거의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다만 내가 이해했던 것은 L형이 나를 아이 취급하며 깔보지 않고 오히려대등한 어른처럼 대해주었다는 점, 그리고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고 또 ‘재현‘하기 위해서는 이런 난해한 책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덧붙여 ‘브레히트‘라는 인물은 어쨌건 그러한 분야에서 세상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다는사실이었다. - P137
생각해보면 그 무렵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지 거의 20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다. 20년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눈깜짝할사이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저 먼 나라의 시인이 부르는 소리를 다름아닌 ‘후대 사람‘의 위치에 서서 읽었던 것이다. ‘암울한 시대‘가 아직 지속되고 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내 뒤편에 놓여 있는 듯 생각했다. 그 시절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나버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암울한 시대‘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나의 앞쪽으로 끝도 없이 지금 나는 런던에서 브레히트의 목소리에 덧붙여 후대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심경으로, 이 시를 떠올리고 있는 셈이다. (2014년 5월에 일본 오사카에서 강연을 할 때, 청중 가운데 젊은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인용하며 낭독한적이 있다.) - P143
어느덧 대학 교수로서 살아가게 된 나는2005년 학생들을 인솔해서 베를리너 앙상블의 도쿄 공연을 보러 갔다. 상연작은 브레히트 원작, 하이너 뮐러 Heiner Müller (1929~1995) 연출의 아르투로 우이의 출세였다. 베를리너 앙상블은 브레히트가 중심이 되어 전후 동베를린에서 창설한 극단이며, 이 작품은 브레히트가 1941년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헬싱키에서 쓴 희곡이다. 히틀러가 자행한권력 탈취 과정을 시카고의 한 불량배가 갱단의 보스 자리에 오르는 상황으로 바꿔 풍자적으로 그렸다. 나치가 유럽을 모조리 정복할 듯한 기세를 과시하던 그 무렵, 브레히트는 이 연극 작품을통해 제3제국의 총통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것이다. - P145
브레히트는 제1차세계대전 당시 위생병으로 종군했고 전쟁이 끝나자 바이에른 혁명에 직접 참가했다. 히틀러 역시 하사신분으로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제대 후에도 패전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반유대주의와 배외주의를 부르짖으며 극우 군소정당의 일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두사람은 동시대를 살아간불구대천의 원수였다고 할수 있다. 브레히트가 각본을 맡고바일이 작곡한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는 1930년에 초연을 올렸는 - P145
데, 3년 후인 1933년에 히틀러가 수상자리를 거머쥐고 나치 정당이 정권을 탈취했다. 망명생활에 들어간 브레히트는 이후 15년 동안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소련, 프랑스, 영국, 그리고 미국을 전전했다. 놀라운 점은 브레히트가 이런 망명생활 중에도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내며 쉬지 않고 투쟁을 이어갔다는 사실이다. - P147
독일』, 과연 절묘한 표현이다. 그런사람이 아니었다면 15년이나 되는 힘든 망명생활속에서 끝까지 싸워내지 못했으리라. 또한 그랬기에 아르투로 우이의 출세」와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 같은전대미문의 명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브레히트가 머물던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영화계와 연극계에 휘몰아쳤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했던 브레히트는 1947년 스위스로 탈출하여 1948년말에 동베를린으로 귀국했고, 1956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르투로 우이의 출세」는 브레히트가 죽은 후 1958년에 처음 무대에 올랐다. 연극의 에필로그에는 "이 괴물을 낳은 자궁은 여전히 건재하다."라는 유명한 경구가 등장한다. 아우슈비츠의 생환자인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도 자신의 저서 『이것이 인간인가의 1972년 개정판 서문 「젊은이들에게」에서 이 말을 인용한바 있다. - P149
서로 친밀해 보이는 사람들은 세련된 카페나 펍으로 몰려갔다. 경쾌하고 절묘한 기지, 신랄한 풍자, 압도적인 무대미술, 일류 예술가들이 펼쳐낸 노래와 춤…. 나 역시 물론 만족스러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이곳에서 나는 ‘브레히트‘라는 키워드를 통해 열두 살 이후 반세기에 걸쳐 지나온 나의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펼쳐진 나치즘의 흥망, 제2차세계대전에서 시작하여 사회주의권의 붕괴를거친 지금까지의 인류사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과연 나는 제대로살아가고 있다고 말할수 있을까. 인류사회는 나아지고 있다고 말할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 괴물을 낳은 자궁"은 이제 사라졌다고말할수있을까. - P151
스위스에서는 강연 일정 외에도 몇몇 미술관을 다시 가보고유서 깊은 한 호텔도 찾아갔다. 예전에 파울첼란 Paul Celan (1920~1970)과 넬리 작스 Nelly Sachs (1891~1970)가 만났다는 호텔이다. 지인인 독문학자 기타 아키라씨가 그곳에 대한 정보를 귀띔해주었다. 취리히 호수에서 흘러들어온 물길이 좁아지는 곳인 그로스뮌스터 대성당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주변은 휴양을 하러 온 사람들과 관광객으로 북적거렸다. 첼란은 1920년 동유럽 부코비나 지방의 체르노비츠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18세기 후반까지는 터키 제국의 영토였고, 그이후로는 합스부르크 제국령이었으며,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루 - P153
마니아의 차지였다.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유대인, 독일인, 폴란드인, 헝가리인 등이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 지역이었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가 이곳을 양분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시기에 이곳에는 소련군과, 이에 대항하는루마니아와 나치독일 연합과의 전선이 형성되었다. 충돌 과정에서 유대인 주민은 소련군에 의해 시베리아로 강제 이송되거나 독일군에게 조직적으로 학살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첼란의 부모는독일군의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당했고 첼란도 강제 노동을 당했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아 종전을 맞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첼란은 빈을 거쳐 파리에서 거주하면서 적의 언어인 독일어로시를 써내려갔다. - P155
넬리 작스는 1891년 베를린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시를 발표했는데 나치 정권이 수립되어 압박을 받자 1940년에 늙은 어머니와 함께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그의 약혼자는 나치에게 생명을 잃고 말았다. 이후 작스는 생계를꾸려가기 위해 스웨덴 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자신의 시를 썼고 1966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의 현대음악가 윤이상 역시 한국 군사정권에 의한 탄압 - P155
의 희생자였다. 그리고 결국 망명지 베를린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는 1980년 5월, 계엄군이 많은 시민을 살육했던 광주의 소식을 접하고 넬리 작스의 시를 이용하여 실내악 작품 「밤이여 나뉘어라」(1980)를 작곡했다.
밤이여 나뉘어라 너의 빛나는 두 날개는 전율하고 나는 이제 떠나려 한다 피투성이의 밤을 되돌려 주려기에. - P157
첼란은 파리에서, 작스는 스톡홀름에서 정신이상으로 괴로워하면서 망명생활을 했다. 두 시인의 편지 왕래는 1954년 무렵부터 시작되어 16년에 걸쳐 이어졌다. 그동안 두 사람은 실제로 두번 만났는데, 그중 첫번째 만남이 1960년 5월 취리히의 스토르혜 Storchen (황새)‘ 호텔에서였다.(‘파울첼란과 넬리 작스의 왕복 서한1996)고립과 외로움의 극치를 표상했던 두 명의 유대인 시인, 첼란은 1970년 파리에서 센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고, 같은 해 작스 역 - P157
시 스톡홀름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두사람 모두 ‘피해망상증‘이라 불리는 정신질환으로 삶을 마칠 때까지 괴로움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을 병자로 분류하고 증상에 따라 병명을 붙이는 일에 저항감을 느낀다. 두 사람은 나치즘이라는 인류의 질환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언제든 그것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예감에 끊임없이 위협을 느꼈다. 둔감한 사람들 대신 민감한 안테나로 위기의조짐을 지속적으로 감지했다. 진정 병든 자는 누구인가? 지금 일본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각지에서 차별과 배제를 부르짖는 거친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 P159
취리히의 평온한 오후, 나는 두 시인이 만났던 호텔을 찾아갔다. 그 장소에 갔다고 해서 특별한 뭔가가 있을 리는 없다. 다만 여행을 할 때마다 항상 그래 왔듯, 나는 죽은자들이 내는 기척에 귀를 기울여보고 싶을 뿐이다. 관광객이 오가는 밝은 야외로부터단절되어, 이제는 꽤 쇠락한 분위기가 감도는 차분한 카페에서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첼란이 앉았던 곳은 어느 의자일까?‘라고 잠시 부질없는 생각에 몸을 맡겨볼 따름이다. 취리히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끝이 없지만 이제 다시런던으로 돌아가야만한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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