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소년의 눈물은 특히나 애착이 많이 가는 책이다. 그것은 작품에대한 애착이라기보다는 소년 시절에 대한 애착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내 책 중 몇 권이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은 이 소년의눈물이야말로 조국의 독자들이 읽어주었으면 하고 내가 진작부터 소망해온책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곧 그런 바람이 무리이겠다 싶어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기도 했다.
내가 이렇듯 체념했던 것은, 우선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일본 작가들의 이름이며 이들의 작품, 또 그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지명 등등을 한국어로 번역해내기가 녹록지 않기도 하거니와, 한국 독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이들이친숙하지 않은 만큼 그에 관한 정보가 도리어 번거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60년대 재일교포들이 살아온 삶의 현장이며, 일본사회의 주류를 향해 소수자들이 품고 있을 굴절된 심정, 또 흡사 짝사랑과도 같은,
조국을 향한 그 복잡다단한 애증의 추억들을 한국의 독자들이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 P5

일제가 조선을 식민 지배한 결과 나는 일본 땅에서 태어났고, 그들의 민족차별정책 때문에 충분한 ‘우리말‘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 민족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일본어를 모어 사용하는 인간이되고 말았다. 그 같은 역사가 나의 ‘빼어난 일본어 표현‘을 가능케 해주었고 끝내 이런 상까지 안겨준 것이라 할진대, 내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 상을 받을수 있었을까?
에세이스트클럽상 수상 인사말에서 나는 자신을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으로 표현했다. "나는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를 반대한다.
그 연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정책을 반대한다.
식민지배의 죄과를 부인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의 사상을 반대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일본어로 사고하고 일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어를 거치지 않는다면 나의 사고며 표현 행위마저도 모두 불가능하다. 또 이런 이유로 나의 글쓰기는 주로 일본인들의 눈에 띌 뿐이다. 요컨대 ‘나‘라는 존재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인 것이다. - P7

그 감옥 속에서 나는 더 너른 광장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조국의 동포들에게까지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처지가 특별하다거나 예외적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추방당하고 모어의 공동체에서 축출된 무수한 디아스포라diaspora들이 세계 곳곳에 생겨났다. 이들 디아스포라는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의 산물인 ‘영어의 감옥‘, ‘프랑스어의 감옥‘, ‘스페인어의 감옥‘ 그 외에 여러 다른 ‘언어의 감옥‘ 에 갇혀 있으며, 저마다 더 넓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그리하여 서로 만나고 싶다고몸부림치고 있다. 재일교포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러한 여러 디아스포라들중 하나이다. 이산의 비애, 모어 상실의 고통에서 여러 디아스포라와 연대하는일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보편적 인간‘에 다가서게 만드는 길이라고, 나는믿는다. - P8

의 독자들 가운데 이 ‘조선‘이라는 단어에 당혹하거나 주저하실 분이 계실지모르겠다. 일본에서 ‘조선‘이라는 말은 음습한 민족 차별 정서를 품은 부정적어감을 풍겨왔다. 또 ‘조선인‘이란 조총련계 인사의 어휘라며 오해할 분이 계실 법도 하다. 하지만 내 국적은 ‘대한민국‘이며, 나는 ‘한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대한민국‘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국가명일뿐, 재일교포를 아우르면서 민족 전체를 총칭할 경우에는 ‘조선‘이라는 말을쓰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내 부모님은 당신 스스로를 ‘조선사람‘이라고부르셨고, 이 말은 내 부모님이나 그 윗세대에게는 삶의 치열한 현장에 밀착된,
지극히 자연스런 호칭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잊고 싶지 않다. 뿐만 아니라 식민 지배와 민족 차별에 저항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 여기기 때문에 평소 ‘조선‘
이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4년 8월 15일
서경식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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