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내가 써온 책의 주제는 다양하게 나눌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중요한줄기 가운데 하나는 미술이다. 미술을 보는 관점이나 이야기하는 위치는 정통 미술평론이나 미술사 서술과는 조금 다르며, 코리안 디아스포라로서 나 자신이 서 있는 자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조선 민족은 19세기 이래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민족 분단이라는 역사의 과정에서 많은사람들이 헤어지고 흩어졌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중에서 일본에 살고 있는 나 같은 존재를
‘재일조선인‘이라고 부른다. - P163

2014년 한국에서 출간된 졸저 나의 조선미술순례는 "조선‘이란 무엇이며, ‘미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란 누구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을 다시 한번 던져보려는 시도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이라는 호칭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선도 한국도 모두 영어로는 (고려가 어원인) 코리아 Korea 로번역되기 때문에 영어로 코리아 또는 코리안 아트로 표기해버리면 그 속에 잠재된 문제를 놓치게 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역사적, 정치적 이유에서 최근까지 ‘조선‘을 민족의 호칭으로 사용하는 일이 반쯤은 터부시되어 왔다. 한편 북한은 정식 국가명으로
‘조선‘을 사용한다. 민족의 호칭을 둘러싼 이 같은 혼란은 사실이용어가 식민지 피지배와 민족 분단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 P167

나는 나의 조선미술순례에서 의도적으로 ‘조선미술‘이라는 호칭을 썼다. 현재 한국의 많은 독자가 이 용어를 듣고 직감적으로 ‘조선왕조 시대의 미술‘ 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미술‘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조선미술‘의 함의를 그렇게 닫아두지 않았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좀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본 민족의 총칭으로서 ‘조선‘이라는 말을썼기 때문이다. - P167

‘한국미술‘이라는 호칭을 굳이 쓰지 않은 이유는 ‘한국‘이 가리키는 범위가 민족 전체를 나타내기에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전 세계로 널리 퍼져나가 살고 있는 조선 민족 가운데 일부를 구성하는 국가의 호칭이며, 여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물론이거니와 재일조선인 및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포괄할 수 없다.
내가 ‘조선‘이라는 호칭을 고른 또 다른 이유는 ‘학대‘를 당한말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하나의 민족을 일컫는 호칭이었지만,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민족 차별적 부담을 지게 되었고, 민족 분단과정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짐을 지게 되었다.  - P169

일본에서 ‘조선‘이라는 말은 ‘열등한 것‘, ‘후진적인 것‘을 가리키는 차별어의 뉘앙스가담겨 있으며, 한국에서는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북쪽 나라를 떠올리게 한다고 금기시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조선‘이라는말을 입에 담을 때 긴장과 불안, 때때로 공포마저 느끼곤 했다. 그렇기에 더욱 나는 어떤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이 말을 쓰고 있는셈이다.
‘나의 조선미술순례』는 내가 조선 민족의 미술가들과 만나고 나누었던 대화를 소재로 삼아 묶어낸 미술 순례의 기록이다.
책에서 다뤘던 신경호, 윤석남, 이쾌대 등 여덟 명의 미술가 중에 - P169

는 정통파적 ‘한국미술사‘ 서술로부터 주변화되거나 또는 완전히무시되어왔던 인물도 포함되어 있다. 내가 나서서 이런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이유는 ‘우리미술‘이라는 기성 개념 안에 틈을 만들어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우리미술‘이라고 말할 때는 단지 ‘조선‘이라는 장소에서 만들어진 미술을 가리키는 것 이상으로, ‘우리‘라고 하는 어떤 민족적, 국민적 본질을 가진 미적 정수 같은 것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래서 ‘우리‘라는 상상이 본질화되고 강화되는 경향이 생겨나는 듯하다.  - P171

 ‘우리‘라는 말을 의문의 여지없는 하나의 전제로 사용한다면, ‘우리‘의 개념을 점유하고(즉 자신들만이 ‘우리‘라고 주장하고) 타자를 배제하게 된다. 언어를 예로 들어보면, 어떤 언어를 자유롭게 쓰는 자만이 ‘우리‘에 속하며, ‘우리‘란 바로 그 특정한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순환논법에 따라 배타적인 자의식을 강고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뜻이다. 여기서 ‘언어‘를 ‘미식‘으로 치환해보면, ‘우리미술‘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을 이해할수 있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어떤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인여러 조건으로 규정된 ‘콘텍스트(맥락)‘로서 이해해야만 한다고 - P171

주장한다는 편이 맞겠다. 우리는 언어나 미의식, 나아가 ‘혈통의공통성‘과 같은 상상으로 지탱되는 ‘우리‘가 아니라, 근대사의 과정에서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고, 지금까지도 분단과 이산이라는현실을 체험하고 있는 그런 ‘우리‘인 셈이다. - P173

원래 영어로는 ‘조선‘도 ‘한국‘도 모두 ‘KOREA‘다. 일본인이 멸시적으로 사용한 ‘조선‘이라는 일본어 어감마저 이곳 청중에게 전달되었던 걸까.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가며 답하려고노력했다. "나는 ‘조선‘이라는 말을 학대에서 구해내고 싶습니다.
식민지 지배자가 멸시적으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 말을 기피한다면 학대에서 구출할 수가 없으며, 오히려 그 학대를 추인하는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던 그때 내 뇌리에는 돌아가신 지 한참 지난어머니가 떠올랐다.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나는 일본 아이들로부터자주 "조선!"이라고 불리며 괴롭힘을 당했다. 집으로 돌아와의기소침해 있는 모습을 보고서 어머니는 나를 꼭 안으며 "조센은 조금도 나쁜 게 아니야. 나쁜게 아니야."라고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여주었다. 학교도 다닌 적이 없고 오랫동안 글도 읽지 못했던 어머니의 따뜻한숨결. - P175

"미술대학에 다니던 무렵은 매우 정치적인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진행 중이었던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와관련된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가 내게 ‘왜 아프리카에 관한작품을 하지 않지? 정통 아프리카의 미술 말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매우 서구적이고 현대식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정통 아프리카의 미술‘이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나는 런던의 어느시장에서 아프리카 천을 취급하는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내가 아프리카산이라고 생각했던 직물이 실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영국에서 만든 제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아프리카의 아이덴티티가 식민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된 것이죠." - P187

쇼니바레는 교수가 바라는 식으로 ‘아프리카적‘인 미술을 제작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아프리카적‘인 것을 거부하고 ‘영국적인 것에 동화되지도 않았다. "아프리카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아이덴티티 자체에 대한 질문을 작품화한 셈이다. 물론 뒤집어생각해보면 "과연 ‘영국적‘이란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영국 보수당의 최초 여성 당수로서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마거릿 대처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수상자리에있었다. 쇼니바레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대치는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그 시대로 되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무척 재미나죠." - P189

쇼니바레가 이 작품에서 그려낸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말도 안 되는 세상"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저렇게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지닌 아프리카 남성은 존재할수 없었다.
‘아프리카‘는 빅토리아 왕조 상류계급의 살롱을 장식한 호화로운 물건들에 새겨져 있었다. 비단과 면직물, 붉고 화려한 고급염료는 식민지가 없었다면 손에 넣기 힘든 물건이었다. 상류층이누리는 쾌적함은 빅토리아 시대의 노동계급이나 아프리카와 아시아 같은 식민지에서 착취한 부를 통해 얻은 소산이었다. 그러나쇼니바레는 그런 사실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결코 훈계하듯 말하지 않는 것이다. - P193

요컨대 그는 의도적인 전략을 가지고 이 MBE라는 칭호와 놀고, 또 놀리고 있는 셈이다. 물론 제국 측의 입장에서도 이른바 ‘넓은아량‘을 과시하며 작가와 작품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교묘한 전략이 있을 터다. 그렇기에 쇼니바레의 유리병 속 넬슨 제독의 배가 국립 해양박물관에 상설 전시되기도 하는 것이다. 잉카쇼니바레의 전략에 대해 성급한 평가를 내리는 일은 신중해야하겠지만, 이 작가가 숙고한 끝에 펼쳐낸 전략을 무기 삼아 제국과 격투하고 있다는 점만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프리카 천을 소재로 사용한 그의 작품은 귀여우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 분명 유명 패션 브랜드로부터 유혹의 손길이뻗쳐왔을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돌아왔다. "제 작품에는 이중성이 있어서 항상 어두운 측면이 내재합니다. 그렇지만 ‘베네통‘에는 그런 면이 없지요." - P201

그 점에서 쇼니바레는, 예를 들자면 1953년 가이아나 조지타운 출생의 여성 아티스트 잉그리드폴라드 Ingrid Pollard (1953~ )와는다르다. 나는 폴라드가 쇼니바레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갖고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 지금 시점에서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폴라드의 작업에는 쇼니바레와 공통점을 보이면서도 명확한 차이점이 있다. 그녀가 카리브해 지역(가이아나)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여성이라는 사실과도 큰 관계가 있을 것이다. 폴라드는 아래의 글을 통해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노예들의 후예라는사실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 P207

조개껍데기를 찾고 있었다. 장화를 신은 내 발밑에 파도가 밀려온다. 파도가 실어다준 것은 뱃머리로부터 떠밀렸던내 형제자매들의 잃어버린 혼이다. (하기와라 히로코, 『블랙』, 마이니치신문사,2002년) - P207

일반적인 백인 남성은 느낄 수 없는 감각일 것이다. ‘전형적인영국의 풍경, 그 속에 몸을 두는 행위 자체가 ‘노예 출신의 여성‘
에게는 강한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뜻이다. 그들, 백인은폴라드의 선조를 사냥감으로 취급하며 몰이를 했고 반항하면 채찍질을, 때때로 강간도 서슴지 않았으며, 결국 죽으면 대서양에 내던져버리던 자들이었기에 백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목가적인풍경조차 그런 불안과 공포를 불러와 그녀의 마음속을 휘저어 놓았던 셈이다. 백인 주류 계층은 폴라드의 작품을 통해 그런 감각을 아주 일부만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 P211

‘포스트콜로니얼‘ 시대의 미술은 우리에게 이러한 시점, 다름 아닌 ‘타자의 시점‘을 요구한다. 무척이나 힘겹지만 우리의 시야를 확실하게 넓혀주는 요구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 남성인 나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찾아갔던 과거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괜찮은 걸까? 이렇게 말하는 나는 과연 누구인 걸까?
잉그리드 폴라드의 작품을 알게 된 후, 스스로에 대한 그런 의문들이 복잡하게 뒤얽히고 있다. - P211

결국 1821년 로마에서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과 등졌고 그곳 신교도 묘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Herelies one whose name was writ in water.(여기 물 위에 이름을 새긴 자가잠들어 있노라.)"라는 글귀가 있다.


우수는 미와 함께 산다, 죽어야만 하는 미와 함께,
그리고 작별을 고하느라 항상 그 입술에 손을 대고 있는기쁨과, 그리고 꿀벌의 입이 빨고 있는 사이에도
독으로 변해버리는, 쑤시는 듯한 쾌락 가까이서.
아, 바로 환희의 신전에
베일 쓴 우수는 그녀의 성단을 갖고 있어
정력적인 혀로 기쁨의 포도를 그 예민한 입천장에 대고
터트릴 수 있는 자 외에 누구도 그것을 볼 수가 없다.
그 영혼은 우수의 강력한 슬픔을 맛볼 것이고,
그녀의 구름 낀 트로피들 사이에 매달려 있게 될 것이다.
-존 키츠, <우수에 부치는 송시> 제3연 - P227

햄스테드에 있는 키츠 기념관은 소박하고 얌전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정원 가득한 장미가 옅은 향기를 풍겼다. 키츠가 병든 몸을 뉘었던 침대가 남아 있으며 데스마스크도 전시하고 있었다. F와 나는 이렇게 고요한 공간에 몸을 두는 것을 좋아한다. 지나가버린 한 시대의 공기가 그곳에 그대로 남아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재능에 기대어 ‘낮은 신분‘을 극복하고 이뤄낸 입신양명, 비극적인 상황마저 작품으로 전환하여 창조했던 열정, 당시에는 불치로 여겼던 결핵과의 투병, 고전과 고대를 상징하는 이탈리아를 향한 동경, 결실을 맺지 못했던 사랑, 그리고 비통하고도감미로운 죽음………. 키츠에게 해당하는 이 모든 것이 낭만주의자를 구성하는 요소다. 이러한 면에서는 터너와 공통점이 있다. 다만 터너는 오래 살았다. - P229

영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풍경화가 터너와 컨스터블은 거의동시대를 살았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작품이 주는 인상은 전혀다르다. 컨스터블을 정, 평화, 조화라고 한다면, 터너는 동動, 투쟁, 혼돈이다. 전자를 삶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죽음이다. 어째서이렇게까지 대조적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에게 컨스터블이 ‘마음에 드는‘ 화가라면, 터너는 ‘마음을 술렁이게 하는 화가다 그래서 더욱 터너에게 끌린다. - P233

어떤 울분과 야망이 터너를 그토록 밀어붙였던 걸까? 내상상은 그의 성장 배경,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로 향한다. 터너는 코번트가든에 있는 이발소 집 아들이었다. 결코 상류계급이나 부유층 시민이 아니었다. 이러한 출신 배경을 지닌 이들 가운데 예외적인 재능을 부여받은 자만이 ‘출세‘를 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아로열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당시는 견고한 신분사회가동요하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아주 적은 가능성이 싹트던 시대였을것이다. 마부의 아들이었던 키츠도사정은 다를바 없었다.
터너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차리고 출세를 응원했다. 아들 역시 기대에 부응하고자 부단히 솜씨를 연마했다. 하지만 터너의 어머니는 정신질환을 앓던 사람이었다. "그의 모친은 무척 신경이 날카로운 사람이었는데 정도가 너무나 심했기에 결국 (1800년) 병원으로 이송될 수밖에 없었다.  - P249

터너의 가족사는 밤바다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는 작은 조각배를 연상케 한다. 강풍과 거친 파도는 어머니를 비유한 것이리라. 이는 저항하기 힘든 인간의 운명이자 "결국 패배로 끝나버릴
‘덧없이 반복되는 희망‘에 불과한 싸움"인 셈이었다. 다만 순수하게 화업을 연마하는 일만이 터너가 손에 움켜쥘 수 있는 생명의끈이 아니었을까. 그 생명선은 결국 지위와 큰 부를 안겨줬지만 만년의 터너는 재산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후진 양성에 뜻을 두었고 자신의 작품을 정리하여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하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터너가 죽은 뒤 으레 벌어지는 유산상속분쟁으로 인해 번거로운 절차와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점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 P251

‘도의적 책임‘에 관해서는 애매하고 넌지시 언급하지만 법적책임이나 공식 사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거부한다. 이것이 현시점에서 전 세계 옛 식민지 종주국이 견지하고 있는 공통된 태도다. 아시아 침략에 대한 일본의 자세 역시 마찬가지다. 블레어 정권은 "영국은 노예무역에 대해 깊은 비통함과 유감의 뜻을 표명‘
한다."라고 성명을 발표했지만 공식적으로 ‘사죄‘한다는 언명은없었다. "완전하고도 공식적인 사과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영국 국교회 지도부와 아프리카계 영국인 일부로부터 제기됐다. 여러 인권 단체 사이에서도 일련의 200주년 기념행사는 기만적이라고 강한 불만이 오갔다. 백인의 공적에 초점을 맞추면서 노예제에 저항했던 흑인의 역할을 경시했으며, 왕실 역시 오랜 시간에 걸쳐 노예무역을 비호했다는 비판이었다. 기념 의전에서 1인 시위를 통해 항의했던 그 사람도 아마 이러한 점을 호소했을 것이다. - P259

제작 동기는 인도주의였을까, 아니면 화가로서 지닌 욕망이었을까. 어느 쪽이라고 여기서 확정할 수는 없지만, 내 개인적인견해는 후자 쪽으로 기운다. 그렇다고 터너를 비난하려는 의미는아니다. 정치적 신조는 어찌 되었든 그는 예술가로서 단호히 행동했다. 좋건 나쁘건 ‘뼛속까지 화가‘였다.
터너의 작품을 가장 풍부하게, 그리고 가장 체계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곳이 테이트브리튼이다. 이 미술관은 설탕 정제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리버풀의 부호 헨리 테이트 경이 자신의 회화 컬렉션을 1889년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이렇게 풍요로운 컬렉션과 미술관도 근원을 밝혀보면 노예제와결부된 대서양 삼각무역이 가져다준 결실인 셈이다. 역설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야말로 영국적‘이라고 해야 할까. - P261

영국 기행을 시작하면서부터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특히 그녀의 죽음과 관련하여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케임브리지의 교외 그랜트체스터를 방문했을 때 그 생각은 점점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버지니아울프의 죽음을 쓰기 위해서는 그녀가 몸을 던져 스스로 삶을 마감했던 우즈강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곳인 서섹스 주 로드멜마을을 찾아가 버지니아와 레너드의 자택 몽크스하우스를 보고싶다는 마음도 점점 간절해졌다. 일정상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영국에 도착하니 출발전 예정에는 없었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취재와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주제는 ‘동아시아 국제 관계와 역사 문제.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내가 맡아야 하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어 취재에 응했고 서섹스행은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 다큐멘터리는 방송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말하면 방영되었는지 어땠는지 연락조차 받지 못했다. - P271

버지니아 울프는 1941년 3월 28일 금요일, 자택 근처의 우즈강에 빠져 자살했다. 59세였다. 내가 읽은 버지니아 울프에 관한몇 권의 책 가운데 가장 생동감이 넘치는 서술은 나이젤 니콜슨Nigel Nicolson의 「버지니아 울프: 시대를 앞서간 불온한 매력』, 푸른숲,2006년)이다. 저자는 버지니아의 친구이자 애인이었던 여성 저술가 겸 원예가 비타 색빌 웨스트Vita Sackville-West의 아들이다. 그는어려서부터 버지니아의 가족과 친교를 맺었던 사람이기도하다.
나이젤에 의하면 3세기에 걸친 시간과 남녀의 성을 초월한주인공의 이야기 『올랜도』는 버지니아가 비타 색빌 웨스트에게바친 문학사상 가장 길고도 매력적인 러브레터다. 블룸즈버리 그룹은 남녀를 불문하고 성에 대해 진보적이었고 동성애적 관계라도 친밀한 우정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고 있었기에 버지니아와 비타의 관계도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룹의 일원으로 경제학자였던 케인스 역시 동성애자였다. - P275

버지니아는 3월 18일에 처음으로 자살을 기도했다. 그때 남편 레너드에게 남긴 유서는 "사랑하는 당신에게. 내가 다시 미쳐가고있다는 걸 느껴요."라고 시작한다. "나는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어요. 내가 당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걸 잘 알아요."라고 한뒤 "세상 누구도 우리 두사람만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끝맺는다. 유명한 유서다.
다만 이때 버지니아는 자살에 실패하고 흠뻑 젖은 채집으로돌아와 실수로 웅덩이에 빠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후 열흘이지난 3월 28일 정오 무렵, 집에서 반 마일 떨어진 우즈강까지 걸어가 "모피 코트 주머니에 돌덩이를 쑤셔넣고 물속으로 향했다. 수영을 할 줄 알았지만 물에서 떠오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분명 끔직한 죽음이었을 것이다."(나이젤 니콜슨, 앞의 책)276 - P277

내 마음을 끌어당겼던 자살자들은, 예를 들면 토리노의 자택 아파트 4층에서 몸을 던진 아우슈비츠의 생환 작가 프리모 레비, 파리 센강 미라보 다리에서 삶을 마감한파울첼란, 망명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교외에서 약물로 목숨을 끊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1881~1942) 같은 이들이다. 앞의 두 사람이 생을 마감한 현장에는 직접 가봤지만 브라질까지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나는 이들이 패배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의 자살은 생물학적인 생명 이상의 무언가에 이를 ‘이상‘이나 ‘주의‘라고 하든, 혹은 ‘미학‘이라 부르든) 충실하고자 했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P279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서"
라고 일컬어지는 버지니아의 마지막 글도 조금은 복잡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나는 오히려 레너드라는 인물에게 끌린다. 재능 있는 작가이기도 했던 그는 제1차세계대전을 계기로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노동당에서 국제 제국주의 문제에 정통한서기 직책을 맡았다. 이후 국제연맹헌장의 초안을 쓰고제언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정신적으로 병을 앓아 자살미수를 거듭하는 아내에게 마지막까지 충실했던 삶이었다. 처절하다고까지 말할 법한 ‘사랑‘의 형태라고 할까. - P283

실제로 레너드와 버지니아는 나치가 영국 점령 후에 구속할대상자 리스트에 올라있었다고 한다. 표면상어떠했건, 이러한 긴장감과 버지니아의 자살이 관계없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버지니아의 집안에는 정신병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고 어린시절에는 배다른 오빠들에게 성적 학대를 받아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기도 했다. 그녀는 문학적으로 특이한 재능을 가졌으며매우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였다. 블룸즈버리라는 지식인 모임에서 여신처럼 숭배를 받았고 작가가 된 후는 기이할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집필에 몰두했다. 버지니아울프의 자살은 가슴 아프지 - P285

만, 세상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살이라는 사건 옆으로 여성차별과 인종차별, 게다가 파시즘의 위협이라는 보조선을 그어보면, 근대라는 시대에 ‘개인의 존엄‘ (그리고 이에기초한 ‘자유‘와 ‘우애‘)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야비한 폭력에 의해 압살을 당해온 역사가 한눈에 떠오른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까. 미국과 유럽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목소리 높여 배외주의를 외치는 세력이 늘어가고 있다. 지금과 1930년대는 서로 닮았다. ‘이 시대의 버지니아들은 여기저기의 절망속에서 생명을 끊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과거로부터는 배울 수 없는 존재일까.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이 어려운 질문을 우즈강변에서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 바람은 이루지 못했다. - P289

사랑하는 당신에게

내가 다시 미쳐가고 있다는 걸 느껴요. 우리는 다시 그 끔찍한 순간을 극복해나갈 우 없겠지요. 그리고 이번에는회복될 수 없을 것 같아요. 귓가에는 환청이 들리기 시작하고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어요. 그렇기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최선의 일을 하려고 해요.
당신은 내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을 선사해주었지요. 당신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우리 두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을 누렸어요. 이 끔찍한 병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나는 더 이상 싸울 수 없어요. 내가 당신의삶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걸 잘 알아요. 내가 없어야 당신도 당신 자신의 일을 해나갈 수 있어요. 당신은 할 수 있을 거예요. 난 지금 이것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잖아요. 읽을 수도없어요. 다만 내가 말해두고 싶은 것은 내 인생의 모든 행복은 당신 덕분이라는 거예요. 당신은 한결같이 인내해주었고믿을 수 없을 만큼 내게 따뜻했어요. 다른 모든 사람들도 잘알거예요. 만약 누군가 나를 구할 수 있었다면 그건 당신이었을 거예요. 나에겐 지금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당신의 따뜻함만은 지금도 확신하고 있어요. 이제 더는 당신의 인생을망치고 싶지 않아요. 세상 누구도 우리 두 사람만큼 행복할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버지니아,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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