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즈음 나는 처음으로 릴라에게 자신의 행동반경에 대해 세운 엄격한 기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세월이 흐를수록 릴라는 고향밖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고향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유년시절을 함께한 사람들과 관련이 있을 때만 관심을 보였다. 내가알기로는 컴퓨터에 관한 일까지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관심을 가졌다. 엔초는 때때로 밀라노나 토리노까지 출장을 다니곤 했지만 릴 - P102

라는 달랐다. 릴라는 절대로 나폴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여행의 참맛에 눈뜬 이후부터 나는 릴라의 이러한 폐쇄성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그 시절 나는 기회만 있으면 해외로 나가려고 했다. 니노와 함께나갈 수 있을 때면 더 그랬다. 내 책을 출간한 소규모 독일 출판사가서독과 오스트리아 홍보 여행을 기획했을 때 니노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홍보 기간 내내 쾌활하고 말 잘 듣는 운전기사 역할을 해주었다. 우리는 보름 동안 서독과 오스트리아 방방곡곡을 누볐다. 지역마다 색다른 풍경이 눈부신 색채의 그림처럼 우리 곁에 펼쳐졌다. 이동 중 마주치는 산과 호수, 도시와 웅장한 건축물이 그 순간 오직 우리가 한 쌍의 연인으로 그곳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더욱 즐겁게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제 나름대로 우리의행복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다. 가끔 잔혹한 현실에 대한 감각이되돌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현실이 그 당시 내가 매일 저녁 극단적인 관중 앞에서 늘어놓던 암울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와 일치한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에 휩싸이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나중에는신나는 모험담처럼 서로의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P103

미지의 외국 도시에서 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면 마지막에는 언제나 그 당시 엄중했던 정치적 분위기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고나는 상식적인 대답으로 사태를 모면하곤했다. 내대답의 골자는거의 ‘탄압‘이었다. 나는 소설가라면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거대한 증기 롤러를 예로 들었다. 나는 어디든 예외는 없다고 말했다. 거대한 증기 롤러가 국경을 지나 모든 것을 정돈하며동쪽에서 서쪽으로 진격하는데 그것이 지나가고 나면 노동자는 일을 하고 실업자는 쇠약해지고 굶주린 자는 굶어죽고 지식인은 허풍 - P104

을 떨고 흑인은 흑인답게 행동하고 여자는 여자답게 행동하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때로는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더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럴 때면 나는 파스콸레 이야기를 했다. 나는 청중들에게 파스콸레가 유년시절부터도피생활을 선택하기까지 겪은 그의 비극적인 인생을 시기별로 들려주었다. 내게는 그보다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능력이 없었다.
내 어휘는 10년 전에 습득한 상태 그대로였고 그 표현들은 고향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과 연결될 때야 비로소 의미를 얻었다. 그렇지않을 때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하게 예측할 수 있는 진부한 표현으로 끝날 뿐이었다. - P105

순간 시어머니의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말을 잃었다. 시어머니는날카로운 표정으로 뻣뻣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거의 귓속말에 가까운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정말 못돼먹은여자라고 했다. 나 같은 사람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남의 비위를 잘 맞추고 유순해 보이는 내 겉모습 뒤에 뭐든 다 차지하려는 천박한 욕망을 감추고 있다고 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책을 많이 읽어도 그 천박한 욕망은 다스리지 못할 거라고 했다. 시어머니는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 P126

기차에 오르고 나서야 나는 내가 돌연히 목적지를 바꾼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내 마음은 여전히 니노를 사랑하는마음 때문에 괴로웠고 그렇기 때문에 니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었던 것이다. 여성의 독립에 대한 글을 쓰고 여기저기에이야기하고 다녔는데도, 나는 니노의 육체와 목소리와 지성 없이 살수 없었다. 인정하기는 끔찍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원했다. 나는내 자식보다 니노를 더 사랑했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그를 다시는보지 않을 생각에 나는 고통스럽게 시들어갔다. 교양 있고 자유로운여인은 꽃잎을 잃고 두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은 유부남의 정부인 여인에게서, 유부남의정부인 여인은 광분한 창녀에게서 멀어져갔다. 우리는 모두 다른 방향으로 뿔뿔이 흩날릴 참이었다 - P128

밀라노에 가까워질수록 릴라와 멀어진 지금,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의 기준이 될 사람은 니노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게는스스로 자신의 기준이 될 만한 능력이 없었다. 니노가 없으면 고향동네를 넘어 세계적으로 나의 역량을 뻗어나갈 수 있는 핵심마저 사라져버렸다. 니노가 없는 나는 그저 한 무더기의 쓰레기에 지나지않았다.
나는 지칠 대로 지치고 겁에 질려 마리아로사의 집에 도착했다. - P128

우선 나는 먼지가 쌓이고 지저분하고 잡동사니가 가득한 방을 정리해보려 했다. 나와 아이들을 위한 잠자리를 준비하고 필요한 물품목록을 만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뭔가 정리해보려는의욕을 잃고 말았다. 정신이 산만한 데다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처음 며칠 동안은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니노가 너무나 그리워서 나는 밀라노에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연락을 하고 말았다. 니노는 마리아로사의 전화번호를 물었고 그 후로는 끈질기게전화를 걸어왔다. 니노와의 통화는 언제나 다툼으로 끝났다.
처음 니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너무 기뻤다. 가끔은 못 이기는 척 그의 말을 따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나도 예전에 피렌체에 있을 때 피에트로가 집으로돌아와 그와 같은 지붕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니노에게 숨겼지 않은가‘ - P130

나는 자기모멸감으로 가득 찬 나날을 보냈다. 머리에서 니노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글을 쓰고 책임감 때문에 어쩔수 없이 출장을 떠났다가 어쩔 수 없이 돌아오고 혼자 절망하고 망가져갔다.
나는 릴라가 옳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내 아이들을 잊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었다.
데데와 엘사는 새로운 환경에 빠져들었다. 아이들은 자기들 고모를 잘 몰랐지만 마리아로사가 분출하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동경했다.
산탐브로지오 가에 있는 마리아로사의 집은 항구처럼 붐볐다. 마리아로사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수녀나 친자매 같은 태도로 집에 찾아온 모든 사람을 받아주었다. 지저분하거나 정신병이 있거나범죄를 저질렀거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도 개의치 않았다. 특별히 할일이 없었던 아이들은 늦은 밤까지 호기심 어린 태도로 집안 곳곳을 누볐다. - P131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그때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이제 나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만큼 사랑과 섹스는 비이성적이고잔혹한 것이니까.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그런 니노의 고백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엘레오노라가 임신 7개월이라는 사실은 니노가 나에 대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실수처럼 느껴졌다.
문득 릴라가 떠올랐다. 릴라가 마치 내게 해야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카르멘과 불안한 시선을 주고받던 순간이 생각났다. 안토니오는엘레오노라의 임신을 알고 있었던 걸까. 릴라와 카르멘도 이미 그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릴라는 왜 내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던 걸까. 자기에게 감히 내 고통의 강약을 조절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걸까. - P139

가슴속에서 뭔가 뚝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니노가 불안에 떨면서 엘레오노라가 임신한 덕분에 그녀가 안정을 되찾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와 헤어지기가 더 힘들어졌다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변명을 늘어놓는 동안 나는 너무나 괴로워서 팔짱을 낀채몸을 앞으로 굽혔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말을 할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때 아파트에는 프랑코밖에 없었다.
정신 나간 여자도, 비탄에 빠진 여자도, 노래를 흥얼거리는 여자도,
병든 여자도 없었다. 마리아로사는 내가 니노와 편히 이야기할 수있게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나는 방문을 열고 가냘픈 소리로 피사 대학 시절 내 남자 친구를 불렀다. 프랑코는 즉시 내게달려왔고 나는 손으로 니노를 가리켰다.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말했다. - P139

내가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주 후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그때 마리아로사는 보르도에 일정이 있어 얼마간 집을 비우게 됐다. 떠나기 전에 마리아로사는 나를 따로 불러 프랑코에 대한 이야기를 다소 혼란스럽게 늘어놓았다. 마리아로사는 내게 자기가 없는 동안 프랑코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마리아로사는 프랑코가 몹시 우울한 상태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지금껏 때때로 느낌이왔다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잊어버리곤 했던 일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마리아로사는 프랑코와의 관계에서만큼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듯이 착한 사마리아인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리아로사는 진심으로 프랑코를 사랑했다. 마리아로사는 그의 어머니이자 누나이자연인이었다. 힘들어 보이는 마리아로사의 표정과 야윈 몸은 프랑코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너무 약해져언젠가는 부서져버릴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 P144

밀라노 출판사와 맺은 새로운 계약과 계약을 지키기 위해 써야 할새 책에 대한 고민이며 나폴리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과 니노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았다. 프랑코는 내 문제를 일반화하거나 피상적인 말로 위로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직설적으로 말했다.
"니노가 네 자신보다 소중하다면 말이야."
유난히도 멍해 보이던 어느 날 저녁 프랑코가 말했다.
있는 그대로 그를 받아들여 유부남에 애까지 딸린 데다 평생 여기저기 씨를 뿌리고 돌아다니겠지만 말이야. 비열한 인간인 데다 앞으로 얼마나 더 비열한 짓을 저지를지 모르지만 있는 그대로 그를받아들이도록 해. 아! 레나, 레누차・・・ - P145

받아프랑코는 다정스레 속삭이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갑자기웃음을 터뜨리더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프랑코는 암울한 목소리로 자기는 사랑이란 아무런 두려움이나 혐오감 없이 제정신으로돌아올 수 있게 될 때야 비로소 완전히 끝나는 거라고 생각한다고했다. 그러고는 마치 발밑에 바닥이 진짜로 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하고 싶은 것처럼 발을 질질 끌면서 방에서 나갔다. 그 순간 왜 파스콸레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사회적 배경으로 보나 문화적 배경으로 보나 정치적 성향으로 보나 프랑코와 닮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잠시 내 소꿉친구가 그를 집어삼킨 어둠에서 다시 솟아난다면 꼭 지금의 프랑코처럼 걸어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 - P145

어나는 불을 켰다.
베개와 침대 시트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거대한 검붉은 얼룩이프랑코의 발까지 길게 내려왔다. 죽음이란 이토록 혐오스러운 것이다. 여기서는 그저 내가 그토록 속속들이 알고 있던 그 육체가, 한때행복과 생기가 넘치던 그 육체가 그토록 많은 책을 읽고 그토록 많은 경험을 했던 그 육체가 생명력을 잃고 쓰러져 있는 광경에 연민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꼈다고만 해두자.
프랑코는 정치적 소양이 풍부하고 이타적인 취지와 희망을 가졌으며 언제나 정중했던 살아 숨 쉬는 생명체였다. 그랬던 그가 이토록 끔찍한 장면을 연출하게 된 것이었다. 프랑코는 자기 자신과 자신을 감싸고 있는 피부와 감정, 말과 생각 그리고 엉망이 되어버린 주변 세상을 증오했음이 분명했다. - P146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 모든 추억과 언어,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그토록 잔혹한 방식으로 제거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 후 며칠 동안 파스콸레와 카르멘의 어머니 주세피나 아주머니 생각이 났다. 주세피나 아주머니도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했다. 자기 몫으로 남은 보잘것없는 삶의 파편을 견디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주세피나 아주머니만 해도 우리보다 전 세대에 속했다.
프랑코는 달랐다. 그는 나와 동시대를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러한 지친 퇴장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정도가 아니라 나를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메모를생각했다. 그 글은 내게 남긴 것이었다. 프랑코는 아이들이 자신의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바꾸어말하면 나는 방에 들어와도 되고 자신의 모습을 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직도 나는 그가 남긴 중의적 명령에 대해 생각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명확한 명령이었고 다른 하나는 함축적인 명령이었다. - P147

한 무리의 열혈 활동가들이 힘없는 주먹을 쥐고 참석했던 장례식이 끝난 후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코는 존경받는 유명 인사였다) 나는 마리아로사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녀 곁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프랑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리아로사는 내가 다가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리아로사는 갈수록 기력이 쇠해졌다. 병적인 불신의 흔적이 외모에도 영향을 미쳐 생기 넘치던 눈빛마저 흐려졌다.
마리아로사의 집은 서서히 텅 비어갔다. 마리아로사는 이제 나를친동생처럼 대하지 않았고 갈수록 나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 P147

하지만 나는 매일 온갖 어려움에 만신창이가 됐고 마음속 균열은커져만 갔다. 그동안 나폴리의 상황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이도시의 고질병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타소 가는 살기 불편했다.
니노는 내게 하얀색 중고 르노4를 마련해주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차가 마음에 들었지만 초반에는 교통체증 때문에 운전하고 다니기가 어려웠다. 나폴리에서는 수 없이 많은 일상적인 일을 처리하기가피렌체나 제노바, 밀라노에서보다 훨씬 힘들었다. 데데는 수업 첫날부터 담임선생님과 학급 친구들을 증오했고 그새 초등학교 1학년이된 엘사는 매일 붉게 충혈된 눈으로 슬픔에 잠겨 집으로 돌아오곤했다. 엘사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식용나는 두 아이를 야단쳤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려움을 이겨낼 줄도, 자기주장을 관철할 줄도 모르는 데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제대로 못한다고 야단치면서 어떻게 해서든 배워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 P150

엔초는 회사의 최대 주주이자 경영자였다. 하지만 엔초는 릴라를가리키면서 회사의 영혼은 회사의 진짜 영혼은 릴라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로고 좀 봐."
엔초가 말했다.
"이것도 릴라가 디자인한 거야."
나는 로고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세로로 그은 획 주위에 소용돌이모양의 무늬가 그
려져 있었다. 로고를 바라보고 있자니 새삼 감정이복받쳐 올랐다. 통제할 수 없는 릴라의 머리에서 나온 새로운 결과물이었다. 나는 지금껏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쳤을까.
나는 예전에 릴라와 즐거웠던 순간이 그리워졌다. 릴라는 뭐든 새로운 것을 배웠다가 익힌 것을 뒤로하고 다시 새로운 것을 배웠다.
절대로 멈추거나 후퇴하지 않았다. 컴퓨터도 마찬가지였다. 34시스템과 5120모델, 베이직과 베이직 사이트 그리고 로고 디자인까지. - P166

모두들 내가 자신들과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모두 넉넉한 마음으로 나를 자신들의 삶에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엔초는 사업이 잘되고 있지만 자신은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특유의 건조한 화법으로 공장을 전전하면서 목격한 일을들려주었다. 엔초는 사람들이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끔찍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더러운 착취의 흔적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가끔 수치심을 느낄 때도 있다고 했다. 릴라는 이른바 업주라 불리는 작자들이 겉보기에만 깔끔한 외형을 갖추기 위해 자신들이 저질러 놓은 쓰레기 같은 짓거리를 보여주었다고 했다. 릴라는 잘 정돈된 회계 장부 뒤에 감추어진 거짓말과속임수와 사기 행각에 대해 비아냥댔다. - P167

카르멘도 이에 지지 않고 정유업계의 비리를 이야기했다. 그 바닥도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카르멘은 파스콸레 이야기를 꺼냈다. 카르멘은 파스콸레가 잘못된 선택을 하기는 했지만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카르멘은 우리의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의 동네를 추억했다. 그날 카르멘은 처음으로 자신과 오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카르멘은 아버지가 자기들에게돈 아킬레가 이끄는 파시스트 일당의 만행을 조목조목 들려주었다고 했다. 카르멘은 아버지가 터널 입구에서 파시스트에게 뭇매를 맞기도 했고 무솔리니의 사진에 입을 맞추라는 강요를 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때 주세페 아저씨는 사진에 입을 맞추는 대신 침을 뱉었는데 그 일 때문에 살해당하거나 다른 공산당원들처럼 행방불명되지 않은 것은 목공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그가 동네에서 꽤 명망이높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사라지면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 P167

파스콸레는 건강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멀끔한 데다 세련된 옷차림 덕분에 겉보기에 외과 의사처럼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몹시 우울한 상태였다. 그의 사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의 감정 상태는 슬프고 슬프고 또 슬펐다. 파스콸레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자신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떠나기 전에 파스콸레는 잠든 조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카들 이름도 몰랐다. 이 말을 하면서 카르멘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쫓아오지 않도록 숨죽여 흐느꼈다.
우리는 모두 파스콸레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이탈리아와 세계 전역을 휩쓸고 있는 피비린내 나는 혼란에 혐오감을 느꼈다. 하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는 파스콸레가 우리와 똑같다고 믿었다. 신문에서 떠들어대는 수많은 끔찍한 일 가운데 그가 실제로저지른 일이 무엇이든 우리는 결코 파스콸레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각각 컴퓨터, 주유소, 라틴어와 그리스어, 책에 파묻혀 각자 - P168

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결코 파스콸레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 그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카르멘이었다. 카르멘은 나나 릴라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말했다. 릴라는 말을 아꼈고 엔초는 고개만끄덕이는 정도였다. - P169

릴라로 말하자면 릴라는 성공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다. 미켈레는 오래전부터 그런 릴라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엘리사가 릴라에게 그토록 적대적인 것은 마르첼로와의 마찰 때문만은 아니었다. 릴라가 또 한 번 솔라라 형제에게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실컷 우려먹은 후 혼자서 잘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베이직 사이트 덕분에 릴라는 날이 갈수록 변화에 발 빠르고 이재에 밝다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릴라는 어려서부터 상대방의 머리와가슴속의 혼란을 끄집어내 잘 정돈해주었다. 만약 상대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반대로 생각을 더 혼란스럽게 해 결국에는 상대방을 비참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특출난 소녀였다. 그런데 이제는그 정도가 아니었다. 릴라는 새로운 일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상징했다. 아무도 릴라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어찌 됐든 릴라는 이윤을 창출하고 있었다. - P172

하지만 아무리 똑똑한 엔초가누구였던가. 엔초는 릴라에게 종속적인 존재였다. 정말로 사업체를움직이는 것은, 모든 것을 만들고 해체하는 것은 릴라였다. 약간 과장하면 얼마 안 되는 사이 고향사람들은 마르첼로와 미켈레처럼 사는 법을 배우든가 아니면 릴라처럼 사는 법을 배우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내 집착 때문일 수는 있지만 적어도 그 시기에는 릴라와 가까웠거나 여전히 가까운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릴라의 모습이 보였다. 한번은 스테파노를 만났는데 그는 그새 살이 많이 찐 데다 안색이 누리끼리했고 옷차림도 형편없었다. 돈은 말할 것도 없고릴라와결혼했던 시절 젊은 사업가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그런데도 대화를 몇 마디 나누는 동안 나는 스테파노가 릴라와 상당히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다도 마찬가지였다. - P173

마음만 먹으면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도 있었다. 사실 그러고 싶기도 했다. 릴라네 집에 들르거나 전화기만 들면 되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 번은 길을 가다 우연히 릴라와 마주쳤는데 릴라는 마지못해 멈추어 섰다. 릴라는 내가 틀린 전화번호를알려주고 젠나로의 공부를 도와준다고 해놓고 사라져버린 데다 자기는 나와 화해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나는 몸을 사렸기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릴라는 급한 일이 있다면서 내게 사투리로 물었다.
"여전히 타소가에서 사는 거야?"
"응."
"불편할 텐데."
"그 대신 바다가 보여."
"그 먼 곳에서 바다가 보여봤자 얼마나 보인다고. 푸른색이 조금보일 정도지. 바다를 보려면 가까이에서 봐야지. 그래야 그 바다가쓰레기투성이에 흙탕물같이 더러운 오염된 오줌 물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너희 같은 식자들은 진실보다 거짓을 더 선호하지." - P174

가장 피상적인 내 자아는 릴라가 바쁜 상황에서아이들을 맡아준다고 해도 데데와 엘사를 까탈스럽고 요구사항 많은 인형 취급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릴라가 아이들을 괴롭히고 젠나로의 손에 방치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숨겨진내 다른 자아는 릴라야말로 아이들이 잘 지내도록 최선을 다해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사실 릴라야말로 유일하게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믿는 내 자신이더 싫었다. 뭐든 해결방안을 찾아야 했기에 급한 마음에 결국 릴라에게 연락했다. 내가 몇 번이나 도중에 말을 끊어가면서 빙빙 돌려부탁하자 릴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네 아이들은 내 아이들보다 더 소중해. 언제든 데려와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가져."
나는 언제나처럼 그런 릴라에게 놀랐다.
내가 니노와 함께 떠난다는 말을 했는데도 릴라는 니노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수많은 주의사항을 늘어놓으며 아이들을 맡기러 갔을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1980년 5월 불안감에 지칠 대로지쳤지만 부푼 가슴을 안고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여행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또 한 번 한계를 넘어선 - P176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서양을 날아 내 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할 수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나 흥분해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물론 2주 내내 일정에 쫓긴 데다 경비도 많이 들었다. 내 책을 출간한 여자들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잘 해주려고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런데도 내 개인적인 지출이 꽤 컸다.
니노의 경우에는 비행기 티켓 비용을 돌려받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 적어도 나는 그때처럼 행복했던 적이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가 임신했다고 확신했다. 미국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몸 상태가 조금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니노에게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여행 내내 나는 혼자서 무책임한 만족감을 느끼며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행복감을 음미했다. 아이들을 데리러 갔을 때즈음에는 임신을 완전히 확신했고 너무 기뻐서 그 사실을 릴라에게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포기하고 말았다. - P177

나는 얼버무리며 대답을 피했다. 하지만 그 대화로 기분이 한결좋아졌다. 그날을 기점으로 새로운 시기가 시작된 것 같았다. 나는릴라가 들려준 진짜 아빠와 가짜 아빠 이야기와 과거의 이름과 새로운 이름에 대한 이야기 덕분에 데데와 엘사가 나 때문에 자신들이처하게 된 상황을 받아들이게 됐을 뿐 아니라 흥미롭게 느끼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그때부터 아이들은 기적적으로 제 할머니와 마리아로사 고모를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피렌체에서 돌아올 때마다 아빠와 도리아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툴툴댔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베이비시터인 미렐라를 원수 취급하며 말썽을 피우지도 않았다. 학교와 선생님과 학교 친구들 그리고 나폴리 자체를거부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은 니노가 나와 한 침대에서 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 P183

한마디로 둘 다 온순해졌다. 나는 그런 아이들의 변화에 안도감을느꼈다. 릴라가 내 딸들의 인생에 들어와 딸들과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거슬리기도 했다. 하지만 릴라가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고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보살펴주고 아이들의 불안감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릴라야말로 내가 사랑하는 릴라였다. 때때로 못돼먹은 평소의 릴라에게서 불쑥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하는 또 다른 릴라였다.
갑자기 릴라에게서 받은 모욕감이 희미해졌다.
‘릴라는 못됐어. 언제나 그랬지. 하지만 릴라에게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 그렇기 때문에 힘들어도 릴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거야‘ - P183

"나는 행복한데 내 배 속에 들어 있는 이 녀석은 아닌가봐. 나한테심술이 난 것 같아."
엔초는 릴라의 말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이 녀석이야말로 가장 행복할거야."
릴라는 엔초를 놀렸다. 릴라 말에 따르면 엔초의 진의는 이러했다.
"내가 네 배 속에 넣은 아이니 믿어봐. 내가 들어가서 직접 본 바로는 아주 착한 녀석이야. 걱정하지 마."
엔초를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그가 더 좋아지고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원래 릴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는데 릴라가 임신한 후에는자랑거리가 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결과 엔초는 전보다 백 배는 더 열심히 일했다. 또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길에서 자신의동반자를 보이는 위험과 보이지 않는 위험을 막론하고 모든 위험에서 지켜주고 그녀의 모든 욕망을 미리 채워주려는 의지로 불탔다.
엔초는 자기가 직접 나서서 릴라의 임신 소식을 스테파노에게 전했다. 스테파노는 릴라의 임신 소식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P185

잔인하고 직선적인 말이었다. 릴라는 내게 숨기는 것이 많았지만니노와 나의 관계에 대한 반감만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이나쁘지 않았다. 아니, 릴라가 그렇게 확실하게 말해준 것이 다행이었다. 릴라는 결국 내가 차마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을, 그러니까 니노의 반응이야말로 우리 관계가 얼마나 견고한지 가늠해볼 수 있는증거라는 사실을 말해준 셈이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
잠시 후에 카르멘이 아들들과 함께 도착하자 릴라는 카르멘도 우리 대화에 끌어들였다. 그날 오후 우리는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 것같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음모를 꾸미고 계획을세웠다. 카르멘은 미리 화부터 내면서 만약 니노가 못마땅해하면 자기가 직접 가서 몇 마디 해줘야겠다고 했다. 카르멘이 말했다.
"너처럼 수준 높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굴욕을 참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내 상황과 내 동거인을 변호했다.  - P189

나는 니노를 집에서 쫓아냈다가 다시 받아들였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내 모습을 깨달았다. 나는 니노가 원하는 것이라면 언제나 뭐든지 하는 니노의 몸종이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기위해 너무 나서지 않으려고 애썼다. 니노를 위해 요리하고 그가 벗어놓고 간 더러운 옷을 빨고 학교일에 대한 푸념과 그가 맡은 수많은 일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처갓집의권력과 주변 사람들의 호의 덕분에 니노는 날이 갈수록 많은 일을맡게 되었다.
나는 니노를 언제나 기쁘게 맞이했다. 나는 니노가 엘레오노라 집보다 우리 집에서 더 편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내 집에서 안식을 취하고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바랐다. 일 때문에 항상 지쳐 있는니노가 안쓰러웠다. - P193

걱정이 태산이었는데도 나의 임신 기간은 빠르게 지나갔고릴라의 임신 기간은 한없이 느리게 지나갔다. 우리는 둘 다 똑같이 출산을 기다리면서도 각자 받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종종 깨닫곤 했다. 내가 "벌써 임신 4개월째네"라고 말하면 릴라는 "이제 겨우 4개월이네"라고 말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릴라는 안색도나아지고 얼굴선도 다시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과정은 똑같은데도릴라와 나의 신체 기관은 임신 기간에 따라 반응하는 방식이 전혀달랐다. 내 몸은 임신을 아주 잘 받아들이는 데 비해 릴라의 몸은 무기력한 체념 상태에 가까웠다. 우리를 둘 다 아는 사람들은 빨리 흘러가는 내 시간과 더디게 흘러가는 릴라의 시간에 놀라곤 했다.
어느 일요일 릴라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톨레도 가를 걷던 중질리올라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 일은 꽤나 중요한 사건이었다.
질리올라와의 만남은 내 마음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그날의 만남으로 릴라가 정말로 미켈레의 미친 짓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P207

정말 그랬다. 릴라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변한 것이 하나도없었다. 릴라는 언제나 그랬듯 지금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불안한 영혼의 소유자였고 그 매력은 릴라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임신에 대한 반응이든, 미켈레에게 한 일이든, 미켈레를 제압한 것과 고향에서 권위를 떨치게 된 일까지 릴라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우리가 하는 일보다 밀도 있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래서 릴라의 시간이 더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 P210

나는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고향 동네에 올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릴라와 더 자주 만났다. 이제는 우리 사이에 새로운 균형점이 생겼다. 내가 공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간 수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인지 나는 릴라보다도 내가 더 성숙해졌다고느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제 괴로워하지 않고릴라의 매력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갈수록 릴라를 있는 그대로 내 삶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 시절 나는 헉헉대며 정신없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느라 도시를 가로지를 때도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웠다.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으면카르멘에게 부탁하거나 가끔 알폰소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알폰소는 몇 번이나 전화를 해 내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신뢰하고 무엇보다도 데데와 엘사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릴라였다. 릴라는 항상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고 임신 때문에 지쳐있었다. 날이 갈수록 내 배와 릴라의 배는 확연히 달라졌다.  - P211

숨이 막혔다. 잠시 동안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커피 잔이 찻잔 받침 위에서 흔들렸고 식탁 다리가 내 무릎에부딪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릴라도 긴장했는지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순간 의자가 릴라 뒤쪽으로 기울어졌다. 릴라는 의자를 붙잡으려 했지만 동작이 너무 느렸다. 릴라는 구부정한자세로 한쪽 손은 나를 향해 앞쪽으로 뻗었고 다른 한 손은 의자 등받이를 향해 내뻗었다. 어떤 일에 반응을 나타내기 전에 집중할 때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는 동안 건물 아래에서 계속 천둥이 쳤고 지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보이지 않는 바다처럼 벽을 향해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전등이 분홍색 유리 전등갓과 함께 요동치고 있었다.
"지진이야!" - P231

나는 릴라를 거칠게 잡아당기고 밀치고 애원하며 밖으로 이끌었다. 우리를 마비시킨 진동에 이어 그보다 더 끔찍하고 치명적인 지진이 뒤따를까봐 두려웠다. 모든 것이 우리 위로 무너져 내릴까봐두려웠다. 나는 릴라를 질책하고릴라에게 애원했다. 배 속에 있는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겁에 질린 고함소리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미쳐 날뛰는 사람들과 갈수록 커지는 아우성이 뒤섞여 도심과 고향 동네의 중심부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뜰로 나오자마자 릴라는 토했고나는 배를 쥐어짜는 듯한 구역질을 애써 참아냈다.
1980년 11월 23일에 발생한 지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파멸과 함께 우리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지진은 일상의 견고함과안정감을 앗아갔고 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라는 확신을 없애버렸다. 익숙한 소리와 행동,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사라졌다. 모든 확신에 의심이 스며들었다. 모든 불운을 예고하는 예언이신빙성을 얻고 사람들은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징조에 불안한 관심을 쏟게 되었다. 통제력을 되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 P233

그때 릴라는 분명 ‘경계의 해체‘라는 표현을 썼다. 릴라가 그 표현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릴라는 힘겹게 그 말의 뜻을 설명했다. 릴라는 내가 ‘경계의 해체‘가 무엇인지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아주기를 바랐다. 릴라는 숨을 헐떡이면서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릴라는 사물과 사람의 경계는 섬세해서 무명실처럼 잘 끊어진다고 말했다. 릴라는 자기는 항상 어떠한사물이나 사람의 경계가 해체되어 그 내용물이 다른 대상 위로 쏟아지는 모습을 봐왔다고 했다. 이질적인 물질이 녹아 서로 합쳐지고뒤섞이는 모습을 목격해 왔다고 했다. 릴라는 평생 삶의 경계가 단단하다고 믿으려고 애써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우리의 삶이 상처나 충격에 내구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 P238

릴라는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과장된 표현을 마구내쏟았다. 릴라 입에서는 사투리가 뒤범벅된 문장이 튀어나오기도했고 어린 시절 다독가다운 표현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릴라는 자기는 절대로 정신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거칠고 고통스럽게 뒤틀린 사물의 본모습 때문에 두려워진다고 했다.
릴라는 사물의 거짓된 모습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잘 정돈됐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마음을 안정시킨다고 했다. 그런 사물의 거짓된모습을 사물의 본모습이 밀쳐내 버리면 자기는 혼란스럽고 끈적거리는 현실의 나락으로 떨어져 감정에 뚜렷한 경계를 그을 수 있는능력을 상실한다고 했다. 촉각이 시각으로, 시각이 후각으로 녹아내린다고 했다.
"아! 세상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지금 너도 봤잖아, 레누. 확실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런 건 아무것도 없어."
릴라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신경 쓰지 않으면, 사물의 경계에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응고된 생리 혈과 악성 종양과누런 섬유질이 되어 흘러가버리는거라고 말했다. - P239

릴라는 한참 동안 말을 이었다. 그날 릴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내게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설명해주었다. 이제부터 하는 말은 릴라가 한 말을 지금 내 나름대로 요약한것이다.
"이제껏 나는 그런 힘든 순간이 일종의 성장통처럼 스쳐가는 건줄 알았어. 예전에 내가 말한 터진 구리 냄비 이야기를 기억해? 솔 - P239

라라 형제가 우리에게 총을 쐈던 1958년 섣달 그믐날 밤을 기억해? 그날 나는 총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 아니었어. 내가 두려웠던 건불꽃 색깔이 너무 예리해 보였기 때문이었어. 특히 녹색과 보라색이 너무나도 날카로워 보였어. 그 불빛에 난도질당할 것 같았어. 폭죽이 지나가면서 남긴 비행운이 물건을 가는 데 쓰는 줄처럼 리노를 쓸고 지나가 리노의 살이 찢어져 그 안에서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리노의 다른 모습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어. 그 순간 바로 원래 몸속으로 그것을 집어넣지 않으면 그것이 덤벼들어 나를 해칠 것만 같았어.
레누, 나는 평생 그런 순간에 저항해왔어. 마르첼로가 두려우면스테파노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보호했고 스테파노가 두려우면 미켈레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보호했어. 미켈레가 두려우면 니노를 이용해서, 니노가 두려우면 엔초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보호해왔어.
사실 보호라는 말 한마디로는 부족해. 내가 몸을 감추기 위해 지금껏 꾸며낸 크고 작은 일을 네게 일일이 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거야. 결국은 하나도 소용이 없었지만. - P240

이스키아 섬에서 내가 얼마나 밤하늘을 두려워했었는지 기억해?
너희들은 모두 밤하늘이 아름답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달걀 껍질과 흰자 속에 갇힌 녹색빛이 감도는 상한 노른자 맛이 입 안에 느껴지는 것 같았어. 깨져서속이 드러나 보이는 삶은 달걀말이야. 입 속에 독이 든 달걀 같은 별을 머금은 느낌이었어. 고무 같은 질감의 하얀 별빛이 새까만 아교같은 밤하늘과 함께 이빨에 쩍쩍 들러붙는 것 같았어. 구역질을 참으면서 그걸 잘게 부수면 입 속에서 모래알 부서지는 느낌이 났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제대로 설명하는 건가? 이스키아 - P240

섬에서 한창 사랑에 빠져 행복했었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 그래봤자 소용없었던 거야. 내 머리는 언제나 틈새를 찾아내거든. 사방팔방에서 현실 너머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곳이 보이는 틈새를 찾아내고 말지.
예를 들면 브루노의 공장에서 일할 때 동물 뼈를 손가락으로 스치기만 해도 거기서 악취 나는 골수가 흘러나오곤 했어. 그때 나는 너무 혐오스러워서 내가 병들었다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나는 그때 정말 병들었던 것일까? 정말 심잡음 증세가 있었나? 아니 내 유일한문제는 항상 불안한 마음이었어. 나는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해. 항상 무엇인가를 하거나 다시 시작하지. 진실을 감추기도 하고 밝혀내기도 하고 뭐든 튼튼하게 만들었다가 갑자기 파괴하거나 부서뜨려버리지. - P241

알폰소만 해도 그래. 알폰소는 어렸을 때부터 나를 불안하게 했어. 그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는 무명실이 끊어질 것만 같았거든. 미켈레는 또 어떻고.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굴지만 경계를 구성하는 선을 찾아내 당기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하하하. 그래. 나는 그의 실을 끊어버렸어. 그러고는 알폰소의 실과 엉클어 놓았지. 사내의 물질을 다른 사내의 물질 속에 뒤섞어 놓은 거야. 낮에 짜놓은 직물이 밤새 풀려버린 거야. 내 머리가 그렇게 만들어놓은거지.
하지만 그래도 소용없어.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거든. 두려움은 정상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있는 틈 속에 언제나 존재해. 그곳에서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레누. 언제나 그럴 거라고 의심해 왔었는데 오늘 저녁 확신을 가지게 됐어. 네 배 속에 있는 생명체도 오래갈 것 같지만 그러 - P241

지 못할 거야.
‘내가 스테파노와 결혼했을 때를 기억해? 동네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싶어 했던 것을 기억해? 과거의 추악한 일이 더는 반복되지 않게하고 싶었어. 좋은 것만 남기고 싶었지. 하지만 그 상태가 얼마나갔지? 좋은 감정은 연약한 거야. 내게는 사랑조차 오래가지 못해. 남자에 대한 사랑도 자식에 대한 사랑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구멍이 나버려. 구멍을 들여다보면 선의로 형성된 성운이 악의로 형성된 성운과 뒤섞이는 것이 보이지. 젠나로를 보면 죄책감이 들어. 배 속에 있는 이 작은 것은 나를 베고 할퀴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존재야. 사랑은 언제나 증오를 동반해. 나는 선의에 집중할 수가 없어. 그럴 능력이 없어.
다올리비에로 선생님이 옳았어. 나라는 사람은 못 돼먹었어. 우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지. 너는 정말 친절해, 레누. 항상 인내심을 가지고 나를 대해주었지. 하지만 오늘 저녁 나는 확실히 깨달았어. 어디건용매 작용을 하는 것이 있어. 굳이 지진이 나지 않아도 따스한 열로 서서히 모든 것을 파괴하지. 그러니 부탁이야. 나 때문에 기분이상하거나 내가 안 좋은 말을 하면 귀를 막아버려. 내가 하고 싶어서그러는 게 아니야. 제발 부탁이니 지금 나를 떠나지 말아줘. 네가 떠나버리면 나는 추락하고 말 거야." - P242

가끔 경미한 여진이 다시 느껴지기도 했다. 자동차 안에서 공포에 질려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배 속에서 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릴라의 배를만져보니 릴라의 아이도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면 아래에서 흐르는 화염의 바다도 용광로처럼 일렁이는 별빛도 행성도 우주도 암흑 속의 빛과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 속의 침묵까지도나는 여전히 릴라가 겁에 질려 쏟아낸 파도 같은 말을 떠올리며생각에 잠겼다. 두려움은 내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용암도, 모든 것을 녹여버리고 지구 내부에서 흐르는 상상 속의 불타는 강물마저도 나를 두렵게 하지 못했다. 모든 두려움은 내 머릿속에서 정돈된 문장과 조화로운 이미지로 정리되어 나폴리의 길처럼 까만돌로포장된 도로가 되었다. 그 도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나였다.  - P243

한마디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공부든 책이든프랑코는 피에트로는 아이들이든 니노든 지진이든 그 무엇이 내게부딪혀 올지라도 결국 다 지나갈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늘어나는나의 수많은 자아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터였다.
나는 연필심이 원을 그리는 동안 움직이지 않는 컴퍼스의 고정된 축이었다.
그런 나에 비해 릴라는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야그런 사실에 확신이 생겼고 뿌듯했다. 그 덕분에 침착할 수 있었고릴라가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릴라는 도무지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릴라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믿음도 없었다.  - P243

나는 릴라가 지진이 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릴라는 지진으로 인한 충격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것이 아니었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한 기준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릴라에게 지진에 대해 말했다.
릴라가 자기 통제력을 찾아갈수록 이탈리아 남부 전체를 휩쓸고간 파멸과 죽음의 흔적이 뚜렷해졌다. 릴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민망해하지 않고도 지진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나는 그제야 안심했다. 하지만 뭐라고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흔적이아직도 릴라에게 남아 있었다. 릴라의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졌고목소리에서도 불안감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지진에 대한 기억은 오래갔다. 나폴리는 지진의 기억을 간직했다.
안개처럼 희뿌연 숨결 같은 더위만이 굼뜨고 거친 도시의 생명과 육체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 P246

릴라는 솔라라 형제의 불법거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릴라는 컴퓨터에 입력하기 위해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그들의 사업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릴라는 그들이 마약으로 벌어들이는수입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첼로가 릴라를 증오하고 내 동생 엘리사가 릴라를 미워하는 것이다. 릴라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릴라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이유는 생물이든 사물이든 상관없이 모든 것에 대한 순수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릴리는 니노의 악행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릴라가 멀리서 내게 말하는 것같았다.
‘그만둬. 그 자식이 자기 가족만 챙겨서 안전한 곳으로 도망간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잖아. 네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말이야.‘ - P2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나폴리에 다시 정착한 것은 1979년이었다. 1976년 10월부터 1979년 나폴리로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릴라와 자주 연락하는일을 되도록 피했다. 쉽지는 않았다. 릴라는 언제든 억지로라도 내인생에 끼어들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런 릴라를 무시하기도하고 참기도 하고 견뎌보기도 했다. 릴라는 가장 힘든 순간 내 곁에있어주고 싶은 것처럼 행동했지만 나는 나를 경멸하던 릴라의 태도를 잊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릴라가 내게 퍼부었던 모욕적인 말 때문에상처받은 것은 아니었다. 릴라에게 전화로 나와 니노의 관계를 이야기했을 때 릴라는 내게 바보 멍청이라면서 악을 썼다. 그때까지 릴라가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은 한 번도,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말 때문에만 상처받은 것이었다면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을 가라앉혔을 것이다. 내가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릴라 입에서 데데와 엘사 이름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릴라는 아이들 생각을 하라고 나를 질책했었다. 그때는 릴라의 말을 흘려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릴라의 말이 심각하게 느껴졌고 자주 뇌리에 맴돌았다. 이때껏 릴라는 한 번도 데데나 엘사에게 관심 - P15

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아이들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가끔 통화하다 내가 아이들이 재치 있게 했던 말을 들려주려고 하면릴라는 내 말을 싹둑 자르고 화제를 돌렸다. 마르첼로 집에서 데데와 엘사를 처음 봤을 때도 릴라는 아이들을 건성으로 흘낏 바라보고성의 없이 몇 마디 했을 뿐이었다. 내 딸들이 얼마나 예쁜 옷을 잘 차려 입고 머리를 단정히 빗고 나이가 어린데도 의사 표현을 잘하는지에 대해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이들이었는데 말이다. 릴라의 평생 친구인 내가 낳아 키운 내 몸의 일부 같은 아이들이었는데도 말이다. 릴라는 내게 조금이라도 엄마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어야 했다. 나에 대한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예의상으로라도 그렇게 했어야했다. - P16

하지만 릴라는 가벼운 농담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랬던 릴라가 지금에 와서 내 아이들을 기억해내고 내가 엄마로서 최악이라고 나를 비난하는 것이다. 내가 내 한 몸행복하자고 아이들을 불행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 니노를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에 질투심에 사로잡힌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는 릴라는스테파노를 떠났을 때 젠나로 생각을 했었던가. 공장에서 일해야 한다는 이유로 젠나로를 이웃집에 내버려둘 때 젠나로 생각을 했었던가. 물건 버리듯 젠나로를 내게 보냈을 때 젠나로 생각을 했었던가.
물론 나에게도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히 나는 릴라보다는 좋은 엄마였다. - P16

나는 습관처럼 그런 생각에 빠지곤 했다. 데데와 엘사를 위해 특별히 해준 것도 없으면서 잔인한 말 한마디로 릴라는 데데와 엘사의권리를 지켜주는 변호사가 된 것 같았다. 그 후 내 일에 바빠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할 때마다 나는 릴라가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것은 우울한 마음이 만들어낸 속삭임일 뿐이었다. 사실나는 아직도 릴라가 나를 엄마로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말을 해줄 사람은 릴라밖에 없다. 그러려면 릴라가 정말로 길고긴 이 언어의 사슬에 손을 대야 한다. 교묘한 솜씨로 빠진 사슬을 끼워 넣고 필요 없는 사슬은 슬쩍 빼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원하는 것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어야 한다. - P17

주어야 한다.
나는 진정 릴라가 내 이야기에 끼어들기를 바란다. 우리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나는 릴라가 그렇게 해주기를 간절히원해왔다. 하지만 릴라가 정말로 내 이야기에 끼어들었는지 확인하러면 우선 이 이야기의 끝에 도달해야 한다. 지금 당장 확인하려 한다면 시작하자마자 막힐 것이다.
글을 너무 오래 쓴 탓에 피곤하다. 몇 년 동안 계속된 혼란과 크고작은 사건, 변화하는 감정 속에서 이야기의 가닥을 유지하기가 점점버거워진다. 릴라와 릴라에게 얽힌 복잡한 일을 회상하다보면 자꾸만 내 이야기를 건너뛰게 된다. 그보다 심한 경우 쉽게 써내려갈 수있다는 이유만으로 내 이야기만 늘어놓게 된다.
이제 이 갈림길에서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 첫 번째 길로 갈 수는 없다. - P18

우리 관계의 성격상 나를 통해야만 릴라에게 닿을 수 있으므로 나를 이 이야기에서 제외한다면 릴라의 흔적은 갈수록 찾기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두 번째 길로 갈 수도 없다. 내가 내이야기나 자세히 늘어놓는 것이야말로 분명 릴라가 원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릴라는 말할 것이다.
‘그래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줘. 나 같은 사람의 인생에 누가 관심을 가지겠어. 사실 너부터 그렇잖아. 솔직히 말해봐.‘
릴라는 이렇게 결론지을 것이다.
‘내 이야기는 낙서 위에 덧쓴 낙서일 뿐이야. 네 책에 적합하지 않아. 그러니 나를 내버려둬, 레누. 사람들은 소멸에 관한 이야기 같은것은 하지 않아‘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에도 릴라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몸을 숨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을받아들여야 하나. 나이가 들수록 릴라를 잘 모르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나.
오늘 아침 나는 피곤함을 이겨내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우리둘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적어도 이 글에서만큼은 나와 릴라 사이의 균형을 찾고 싶다. 평생나 자신과의 관계에서조차 찾지 못했던 균형을 말이다. - P18

내게 몽펠리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와 별다를 바가 없다. 호텔과 니노가 참석한 학회가 열렸던 거대한 강당 이외에 지금 내 눈앞에 떠오르는 장면은 바람이 세차게 불던 가을 전경과 새하얀 구름 위에 몸을 기댄 푸른 하늘뿐이다. 그런데도 내게 몽펠리에라는 지명은 여러 가지 이유로 도피의 상징처럼각인되었다.
그전에도 프랑코와 함께 파리에 가느라 이탈리아를 떠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내 과감함에 짜릿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나의 세계는 아직 고향 동네와 나폴리에 국한되었고 앞으로도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고향 동네나 나폴리가아닌 다른 장소에 있을 때면 잠시 소풍을 나온 것 같았다. 일상에서벗어났다는 생각 때문에 평소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 P19

몽펠리에는 파리보다 짜릿함은 덜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나아가기존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내 영역이 확장된 것 같았다. 몽펠리에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고향 동네와 나폴리,
피사와 피렌체와 밀라노, 아니 이탈리아 전체가 드넓은 세상 속 작은 조각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조각에 만족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몽펠리에에 가서야 내 비좁은 시야와 지금껏 말하고써온 내 언어의 한계를 실감했다. 나는 32세의 나이에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몽펠리에에서 확실히 깨달았다.
니노와의 사랑으로 충만했던 며칠 동안 나는 생전 처음으로 그동안 나를 옭아맨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태생에 대한속박, 학문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속박, 살아오면서 내가 내린 수 - P20

많은 선택, 그중에서도 결혼이라는 선택 때문에 생긴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나는 내 첫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되었을때 왜 그토록 기뻤는지 알았다. 해외에서는 큰 반향이 없었다는 소식에 왜 그토록 속상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껏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가치가 국경을 넘어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는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멋진일이었다. 몽펠리에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릴라가 평생 나폴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 릴라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 릴라는 나폴리를 떠나기는커녕 산 조반니 아 테두초로 거처를 옮기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나는 선택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어쨌든 결과적으로 릴라는 항상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어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릴라가 나폴리를 떠나지 않은 이유가 단순히 사고의 한계 때문이라는생각이 들었다. 나는 릴라가 나를 비난했을 때와 똑같은 논리를 릴라에게 적용해보았다. - P20

우리는 긴 여행을 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가끔 비가 오기도 했다. 주변 풍경은 두텁게 녹이 슨 것처럼 창백했지만 가끔 하늘이 열리면 빗방울은 물론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눈부시게 빛났다. 나는여행하는 내내 니노 곁에 꼭 붙어 있었다. 가끔 그의 어깨에 기대어잠이 들곤 했다. 또다시 내 한계를 뛰어넘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차 안에 퍼지는 낯선 언어의 울림도 좋았다. 내 책이 마리아로사 덕분에 이탈리아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먼저 출간된다는 것도, 우리가바로 그 책을 향해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좋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내겐 정말 경이로운 일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곧 출간될 내 책은 속도와 궤도를 예측할 수 없는 돌멩이 같았다. 어린 시절 릴라와 함께 사내아이 무리를 향해 던졌던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돌멩이 같았다 - P30

내게는 일상의 소소한 일을 자연스럽게 공적인 사유의 소재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매일 즉흥적으로 내 사적인 경험을 소재삼아 모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세계의 빈곤과 비참한 환경, 분노에 찬 남성과 여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카르멘 이야기도 했다. 카르멘과 오빠파스콸레와의 유대 관계, 파스콸레가 저질렀을 리 없는 폭력 행위에대한 카르멘의 변명을 이야기했다. 나는 청중 앞에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어머니를 비롯한 고향 동네 여자들에게서 가정생활과 모성애, 남성을 받들며 사는 삶의 가장 비참한 면모를 봐왔다고 했다.
나는 여자들이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 때문에 다른 여자나 자기가낳은 자식들에게까지 어떤 파렴치한 짓을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 P64

나는 얼마 전 솔라라 구둣가게에서 30분 남짓 시간을 보낼 때 일어난 일에서 많은 소재를 얻었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 지나고 나서였다. 아마 그 무렵 릴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아서였던 것같다. 청중 앞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그렇게 많았는데도 왠지 모르게나는 한 번도 우리 둘의 우정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릴라는 자기 자신과 유년 시절 친구들의 거친 욕망의 바닷속으로 나를 잡아끌기는 했어도 그로 인해 내가 목격한 광경의 의미를 해석할 능력은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우리 우정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같다.
예컨대 릴라도 내가 알폰소를 보자마자 알아챈 것을 알았을까.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을까.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릴라는 동네의 흙탕물 속에 가라앉았고 그곳에 안주했다. 반면,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시절, 나에게는 혼돈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그속에서 어떠한 법칙을 구분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느꼈다.  - P65

그러한 확신은 내가 쓴 짧은 책이 다소 성공함으로써 더욱 확고해졌다. 그 덕분에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있었다. 말이나 글을 이치에 맞게 할 수 있으면 실제 상황도 그렇게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생각했다.
‘부부도, 가정도, 문화라는 이름의 틀도, 모든 사회 민주주의적 합의도 결국은 다 무너지는 거야.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은 격렬하게, 지금까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를 취하려 하지. 나와니노, 내 아이들과 그의 아이들, 노동 계급의 패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무엇보다도 예측할 수 없는 주체인 여성과 나 자신도 말이야.‘
나는 매일 저녁 총체적인 분열과 새로운 재구성이라는 매혹적인생각에 내 상황을 대입하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프랑스 일정을 소화하는 도중 때때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데데와 엘사와 통화할 때면 아이들은언제나 내 질문에 "네, 아니요"라는 단답형으로 대답하거나 노래의후렴구처럼 "엄마, 언제 와요?"라고 묻곤 했다. - P66

물론 나는 저항했다. 화가나서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려는 생각을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피렌체든 밀라노든 나폴리든 상관 없었다. 단 일 분이라도 아이들을 시댁에 더 머무르지 않게 할 수있다면 어디든 괜찮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나는 계속해서출발을 미뤘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 예컨대 니노가전화하면 나는 참지 못하고 그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게다가 이제는 이탈리아에서도 내 책이 작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시작했다. 주요 언론사 측에는 무시당했지만 나름대로 독자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책과 관련된 행사에 나갈 때는 일부러 거기에서 니노와 만날 일을 만들었기 때문에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 P93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은 매번 힘들었다. 나를 원망하는 듯한 아이들의 시선이 온몸에 느껴져 괴로웠다. 하지만 기차에 올라 책을 읽고 공식 석상에서 할 토론을 준비하고 니노와 해후할 상상을 하면어느새 마음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끓어올랐다. 얼마 지나지않아나는 내가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느끼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상태가 내 삶의 피할 수 없는 새로운 규율이 된 것 같았다.
제노바로 돌아갈 때면 나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데데와 엘사는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집을 편하게 생각했다. 내가 없어도 아이들은 그곳에서 학교도 다니고 친구들도 있는 데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할 수 있었다.
일단 제노바를 떠나고 나면 아이들에 대한 나의 죄책감은 그저 귀찮은 장애물 같았고 자연스럽게 희미해졌다.  - P93

나는 그런 내 감정 변화 때문에 비참했다. 약간의 명성과 니노를 향한 사랑 때문에 데데와 엘사를 등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굴욕적이었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받을지 생각해봐."
릴라의 말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비문이 되어 나를 불행으로 이끌었다. 여행이 잦다보니 잠자리가 자주 바뀌어서 제대로 자지 못할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어머니가 내게 퍼부었던 악담이 생각났다.
어머니의 말이 릴라의 말과 한데 뒤섞였다. 평생 동전의 양면 같던어머니와 릴라가 그럴 때면 동일인물처럼 느껴졌다. 둘 다 내 새로운 삶에 적대적이었다. 둘 다 내 새로운 삶과는 관계가 없었다. 나는한편으로는 드디어 내가 독립적인 개체가 된 것 같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로웠다. 나 홀로 속수무책의 상태로 난관에 봉착한 것 같았다. - P94

나는 마리아로사와 다시 가깝게 지내려고 했다. 시누이는 언제나처럼 호의적이었다. 그녀는 밀라노의 한 서점에서 나를 위한 독자토론회를 기획해주었다. 행사 참가자들은 주로 여성이었다. 그날 나는 성향이 완전히 다른 두 그룹의 참가자들에게 거센 비난을 받기도하고 격찬을 듣기도 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마리아로사가 무게있게 중재에 나서주었다.
그날 나는 찬성과 반대 의견을 요약해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는데 의외로 재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다. "제가 의도한 바는 그게 아니에요"라고 내가 말하면 사람들은 내 말을 꽤나설득력 있게 받아들였다. 행사가 끝날 즈음에는 참석자 모두에게, 특히 마리아로사에게 칭찬을 받았다. - P94

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삶인가. 우리 몸은 폭발이 일어나 수많은파편으로 조각난 것처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그로 인해 밀라노에는 미르코가, 제노바에는 내 딸들이, 나폴리에는 알베르티노가있게 된 것이다. 나는 참지 못하고 실비아, 마리아로사, 프랑코와 함께 환멸에 빠진 논리학자 같은 태도로 이러한 흩어짐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실 나는 내 전 남자 친구가 언제나처럼 대화를 주도하기를바랐다. 현재를 정리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현란한 논증법으로 우리를 안심시켜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날 프랑코는 의외의 태도를 보였다.
‘프랑코는 ‘객관적으로‘ 혁명적이었던 시대의 종말이 가까이 다가왔다고 했다. 프랑코는 ‘객관적‘이라는 수사를 냉소적으로 사용했다. 혁명의 종말과 함께 지금껏 나침반 역할을 하던 모든 계급이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 P95

무엇이 데데와 엘사에게 이롭고 무엇이 해로울까. 내게 이로운 일과해로운 일은 무엇이며 그것은 내 딸들에게 이로운 일과 해로운 일과일치할까 아니면 그렇지 않을까. 그날 밤 내 마음속에서 니노는 주변부로 밀려나고릴라가 다시 등장했다. 릴라는 어머니의 도움 없이혼자 힘으로 내 마음을 차지했다. 나는 릴라와 싸우고 싶은 욕구를느꼈다. 릴라에게 악을 쓰고 싶었다.
"그렇게 잔소리만 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책임지고 말해보란 말이야!"
나는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나는 제노바로 돌아가 시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밑도 끝도 없이 데데와 엘사에게 물었다.
"얘들아. 요즘 엄마가 너무 바쁘단다. 며칠 후면 또다시 떠나야하고 그 후로도 마찬가지일 거야. 엄마와 함께 갈래, 아니면 여기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있을래?"
이런 질문을 한 것에 대해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처음에는 데데가 다음에는 엘사가 입을 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랑 있을래요. 그 대신 돌아올 때 꼭 선물 사다주세요" - P98

쓴 10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책이 얼마지나지 않아 독일어와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10년 전에 출간됐던 내 첫 소설도 재조명을 받았고 나는 다시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과 얼굴은 나름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나는 한때 그랬던 것처럼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 꽤나 공신력 있는 사람들이 내게 호기심을 가졌고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결정적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것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게 호의적이었던 밀라노 출판사의 편집장이 털어놓은 내 책의출간과 관련된 일화 덕분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그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출판계에서의 내 미래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내심 이번 기회에 니노의 에세이집 출간을 제안해보려는 속셈도 있었다. 그날 저녁 편집장은 내게 시어머니가 지난해 크리스마스 즈음 내 책이출간되는 것을 막으려고 출판사에 압력을 넣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 P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만 피에트로는 나를 위로해주지 않았다. 그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다시 책과 씨름했다.
몇 주가 지난 다음에야 피에트로는 내게 그동안 사복 차림을 한경찰이 두어 번 자기를 찾아와 몇몇 학생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보를물었다고 했다. 처음에 피에트로는 이들을 예의 바르게 맞이했지만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은 채 예의 바르게 돌려보냈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이 두 번째로 피에트로를 찾아왔을 때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학생들이 범죄를 저질렀나요?"
"아직은 아니죠."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학생들인데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죠?"
피에트로는 예의를 갖추어 최대한 노골적으로 경멸감을 드러내며 경찰들을 문까지 바래다주었다. - P501

몇 달 동안 릴라는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나는 릴라가 필요했지만 내가 먼저 릴라에게 연락하지는 않았다.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나는 마리아로사와 가깝게 지내려했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장애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그새 프랑코가 나의 시누이 집에 아예 눌러앉았다. 피에트로는 내가 자기 누나와 너무 가까워지는 것도 싫어했고 내 옛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내가 밀라노에 있는 마리아로사의 집에 하루 이상 머무르면 피에트로는 기분 나빠했다. 상상속의 증상이 도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프랑코도 내가 찾아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이들이시끄럽게 재잘거리는 소리를 견딜 수 없어했다. 그 무렵 프랑코는정기적인 치료를 위해 병원을 방문할 때 빼고는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우리가 갈 때면 가끔 아무 말 없이 집에서 사라져 마리아로사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 P502

마리아로사는 마리아로사대로 너무 바빴다. 그녀는 항상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마리아로사의 집은 일종의 집회소 같았다.
여성 지식인에서부터 중산층 기혼녀, 폭력을 휘두르는 동거인을 피해 도망친 여성 노동자, 가출소녀까지 가리지 않고 집에 들였다. 그러다보니 내게 신경 쓸 여유가 거의 없었다. 만인의 친구 같은 마리아로사의 태도를 보면 우리 관계가 과연 특별한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아로사의 집에 머무르다보면 며칠 동안이나마 공부하고싶은 욕망이 되살아났다. 가끔은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게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P502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모임이있는 날이면 프랑코는 외출하거나 자기 방에 틀어박혀 아예 나오지않았기 때문에 집 안에는 여자들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여자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여성의 모든 행동과생각과 논의와 꿈을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결국은 그 무엇도 우리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심오한 통찰은 정신력이 가장 약한 여성들을 지치게 했다. 이들은 과도한 자아성찰을 견디지 못하고 여성해방을 달성하려면 그저 남성을 자신의 삶에서 내쫓기만 하면 된다, 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요동치는 불안정한 시기였다. 우리들 대부분은 평온하지만 무미건조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워 극단적인 명제에 매달렸다. 파도의 물마루에 모여 두려움과 분노로 가득 차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 P503

모든 것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요동치는 불안정한 시기였다. 우리들 대부분은 평온하지만 무미건조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워 극단적인 명제에 매달렸다. 파도의 물마루에 모여 두려움과 분노로 가득 차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급진 좌익 단체 ‘로타 콘티누아‘가 분리주의 여성운동 시위대를공격하라는 지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우리는 너무나 실망했다. 우리 가운데 가장 극성스러운 참가자 중에는 마리아로사의 집에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격렬한 말싸움을 벌이고 마리아로사와 관계를 단절하는 사람도 생겼다. 마리아로사는 프랑코의 존재를 먼저 알리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런 상황이 싫었다. 건설적인 자극을 받고 싶었지 갈등을원한 것이 아니었다. 연구를 위한 가정을 세우고 싶은 것이지 독단적인 교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가끔 마리아로사에게 이런 내 의견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마리아로사는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 P503

"내 생각에는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같아. 그때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나를 변화시키려는 프랑코의욕망이 사실은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것을 깨닫지 못했어. 그는 내가 다른 사람이기를 원했던 거야.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단순히 여자를 원한 게 아니었어. 자기가 만약 여자라면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여성을 원했던거야. 프랑코에게 나는 자신을 여성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어. 여성성을 취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고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던 거야. 자신이 남성으로서뿐 아니라여성으로서도 완벽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존재였던 거야. 지금은 내가 자신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때 나는 정확히 이런 말을 했고 마리아로사는 진심으로 관심을보였다. 평소에 모든 사람에게 관심 있는 척하는 태도와는 달랐다.
"지금 한 이야기를 글로 한번 써봐." - P504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리아로사의 칭찬에 기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다소 황망히 피에트로와의 관계에 대해 몇 마디 덧붙였다. 나는 그가 자꾸만 내게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려 한다고 했다.
마리아로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지했던 분위기가 변했다.
프랑코와 피에트로를 비교하는 거야? 지금 농담해?"
마리아로사가 말했다.
"남성성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워하는 아이인데 자신의 여성적인감성을 네게 강요할 만한 힘이 어디 있어? 비밀 하나 알려줄까? 나는 네가 피에트로와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줄 알았어. 결혼한다 해도일년이 못 되어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어.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조심할 거라고 생각했어. 아직도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보면 기적 같아. 불쌍한 레누.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 P505

나는 성숙이란 결국 삶의 굴곡을 호들갑 떨지 않고 있는 그대로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상적인 삶과 이론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변화를 기다리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데데는 이미 읽고쓰기가능숙한 상태에서 남들보다 조금 먼저 초등학교 입학했다. 엘사는 아침 내내 조용한 집에서 나를 독차지하게 되자 너무 기뻐했다. 남편은 대학가에서 가장 고리타분한 교수인데도 드디어 두 번째저서의 집필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번 책은 첫 번째 책보다 학술적으로 더 중요한 저서가 될 것 같았다. - P506

나는 아이로타 부인이었다. 엘레나 아이로타 나는 그동안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생활 때문에 비탄에 잠겨 있었지만 이제는 시누이에게 고무되어, 그리고 나 스스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막아보고자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여성상을 주제로 고대사와 현대사를 넘나드는 연구를 남몰래 시작했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리아로사와 시어머니, 지인들에게 뭔가를 하고 있다고말할 수 있는 명분을 찾으려고 했을 뿐이었다.
나는 내 이론을 성경의 아담과 이브의 창조에서 시작해 대니얼 디포의 플랜더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톨스토이의 카레니나, 프랑스 유행잡지 최신 유행』, 마르셀 뒤샹의 로즈 세라비뿐 아니라 그이후의 시대까지 밀어붙여서 이 모든 것을 바탕으로 놀라운 사실을밝혀냈다. 나는 서서히 만족감을 느꼈다. 어디에서든 남성에 의해 - P506

주조된 꼭두각시 같은 여성상의 흔적이 보였다.
진정 여성적인 것은 없었다. 조금이나마 뭔가 나타날 만하면 이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남성들이 여성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쓰였다.
피에트로는 직장에 가고 데데는 학교에 가고 엘사는 내 책상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놀고 있을 때면 그제야 나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함축된 의미를 파헤치며 살아 있음을 느꼈다. 가끔은 릴라와 내가 함께 중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교까지 졸업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 빠지곤 했다.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찰떡궁합을 자랑하면서 학교에 다녔으면 어땠을까.
우리는 정말 완벽한 짝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서로의 지성을 합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각자 이해한 내용과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기뻐했을 텐데, 함께 글도 쓰고 공동저자로 이름을 알리고 서로의 존재에 힘을 얻고 그 누구도 감히 우리 둘만의 것을 흉내 내지 못하도록 함께 싸웠을 것이다. - P507

여성의 고독은 슬픈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름의 문화나 전통을 만들어낼 기회도 없이 그런 식으로 자기 인생에서 상대방을 쫓아내버리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때면 생각이 중간에서 멈추는 것 같았다. 그 생각은 매력적이지만 결함이 많아서 당장 확인이 필요하고 더 발전시켜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 생각에 자신감도 믿음도 없었다. 그럴 때면 다시 릴라에게 전화해서 내 생각을 말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내 생각 좀 들어봐. 같이 이야기하자. 네 의견을 말해줘. 지난번네가 해줬던 알폰소 이야기를 기억해?‘
하지만 이제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 P507

우리는 십수 년 전부터 이미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어느 날이었다.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들렸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피에트로가 데데를 데리고 점심식사를하러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책과 공책을 덮었다. 데데는 벌써거실로 뛰어들었고 엘사는 그런 언니를 반갑게 맞았다. 데데는 배가많이 고픈 것이다.
‘엄마, 오늘 점심은 뭐예요?‘
나는 데데가 이렇게 말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가방을 미처 내려놓기도 전에 데데가 외쳤다.
"아빠 친구가 왔어요. 우리랑 함께 점심을 먹는대요."
나는 아직도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1976년 3월 9일이었다. 나는 기분이 가라앉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데가 내 손을 잡고 복도 쪽으로 이끌었다. 모르는 사람이 집에 왔다는 언니의 말에 엘사는 벌써 조심스럽게 내 치마에 꼭 달라붙었다. - P508

니노는 정말 박학다식했다.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그랬다. 그는모든 일에 호기심을 가졌다. 니노가 장자크 루소와 버나드 쇼 이야기를 꺼내기에 나도 끼어들어 내 의견을 말했다. 니노는 내 이야기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아이들이 튀김을 더 달라면서 나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내 신경이 날카로워지자 니노는 식당 주인에게 튀김을 한 접시 더 준비해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니노가 피에트로에게 말했다.
"엘레나에게 시간을 더 마련해줘야 해."
"지금도 하루 온종일 마음껏 시간을 쓰고 있는걸."
"농담이 아니야. 엘레나를 배려하지 않는 것은 인류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죄악이야."
"죄악이라니?"
"지성을 허비하는 죄악이지. 육아와 가사에 온 힘을 쏟도록 강요함으로써 여성의 지성을 억압하는 사회는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격이야. 다만 이를 깨닫지 못할 뿐이지." - P518

"지금 내 남편은 내게 진정한 열정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순간 침묵이 흘렀다. 니노가 물었다.
"정말 그래?"
나는 니노에게 잘 모르겠다고 충동적으로 대답해버렸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수치심과 분노심에 말하는 내내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튀김은 그만들 먹어."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감정이 아이들을 향한 말에 묻어 나왔다.
니노가 나를 위해 나섰다.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아저씨는 하나만 더 먹을게. 엄마도, 아빠도 하나씩만 더 먹을거야. 너희들은 두 개씩 더 먹자.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란다." - P519

가끔은 피에트로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다. 피에트로는 나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경솔하거나 논리가 빈약하거나바보같은 글을 쓰지 않게 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백과사전 같은 그의 지식 때문에 주눅 들고 싶지는않았다. 그때 나는 특히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창조와 두 번째 창조에 집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 두 사건을 순서대로 배치했다. 나는 첫 번째 창조인 아담의 창조를 신의 창조 행위의 종합체로두 번째 창조인 이브의 창조를 이보다 더 확장된 이야기로 간주했다. 나는 이를 바탕으로 꽤나 생생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글을 쓰면서도 내 글이 경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 글의 요지는 대충 이러했다. - P521

형과 여성형을 만들어낸다. 어떻게 만들었냐고? 신은 먼저 흙으로Ish‘ 의 형태를 만든 다음 콧구멍으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런 다음 가공되지 않은 원자재 상태가 아니라 이미 형상을 갖추고생명을 얻은 남성을 재료로 Ishah, 즉 여성을 만든다. 신은 남성의옆구리에서 여성을 취한 다음 즉시 살로 상처를 아물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Ish는 여성을 두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모든 창조물과는 달리 나와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내 살의 살이며 내 뼈의 뼈다. 신께서 나로부터 만드신 것이다. 내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다음 그녀를 내 몸에서 뽑아내신 것이다.
나는 Ish이고 그녀는 Isah‘h이다. 여자를 부르는 명칭에서부터 그녀가 신성한 영혼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나에게서 유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여자는 내 어근에붙은 접미사일 뿐이며 오직 내 언어 속에서만 스스로를 표현할 수있다." - P522

나는 엘레오노라가 니노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생각하고 싶었다. 그녀는 격정적으로 살아가는 니노의 삶에서 작은조각 가운데 하나일 뿐 그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니노는그녀에게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제 갈길을 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마음이 편해졌다. 특히 내 팔찌를 알아봤다는 뜻으로 니노가 내 손목에 잠시 손을 갖다 대며 살짝 쓰다듬었을 때는 더 그랬다. 피에트로에게 그동안 나를 위한 시간을 조금마련해주었느냐고 놀리듯 묻고 나서 나에게 작업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 P529

했지만 결국에는 솔라라 집안사람들의 돈과 다를바 없이 불법적인거래나 파괴 행위를 통해 얻은 것이다. 이 중에서 몇 푼 안 되는 돈은우리 아버지의 팁이 되어 내 교육비에 보탬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더러운 돈과 깨끗한 돈의 경계는 어디일까. 엘레오노라가 피렌체의 무더위 속에서 하루 종일 마음껏 뿌린 돈은 과연 얼마나 깨끗할까. 내가 선물로 받아 집으로 가져가는 이 물건들을 사기 위해 사용된 수표가 미켈레가 릴라의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표와다를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나는 아이들과 오후 내내 선물받은 옷을 입고 거울에 비춰보며 시간을 보냈다. 다 맵시 있고 화사한 고급 제품이었다. 그중에 40년대스타일의 톤 다운된 적색 드레스가 있었는데 내게 특히 잘 어울렸다. 그 옷을 입은 내 모습을 니노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 P536

세상일은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내 자아가 내 안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가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자 유일하게 투쟁할만한 가치가 있는 내 육신 속으로 한없이 꺼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내 이성과 혼란을 목격했던 피에트로가 등 뒤로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자 나는 안도했다. 그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입술이
키스로 얼얼하다는 것을 알아챌 것만 같았다. 지난밤 일 때문에 피곤하다는 것을 눈치챌 것만 같았다. 불에 덴 것처럼 민감하기 그지없는 내 몸 상태를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혼자 남게 되자 나는 다시는 니노를 보지도 못하고 연락도 할 수없을 것이라고 또 한 번 확신했다. 이와 동시에 다른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제는 피에트로와 함께 살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와같은 침대를 쓸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 P559

그래도 나는 낙담하지 않았다. 기분이 너무 고조되어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고통받고 내가 그들에게서 공격당하고 치욕을 겪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힘겨운 과정을 겪으면서 드디어 내가 만족할 만한 그 무엇인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는 지금 고통받고 있는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엘레오노라는 결국 사랑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떠나려는 사람에게 남아달라는 말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피에트로는 이론상으로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이를 받아들이고 지혜로 승화해 관용을 실행에 옮길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 P5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리아로사의 자극적인 발언과 행사에서 만난 마리아로사 친구들의 초대 덕분에 예전에 시어머니가 내게 준 여성문제에 관한 소책자들을 다시 꺼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책자는 책 무더기 아래깔려 있었다. 나는 그 책자를 가방에 넣고 밖으로 나가 늦겨울 잿빛하늘 아래에서 바깥공기를 마시면서 책자를 읽었다. 나는 호기심을자극하는 제목에 이끌려 「헤겔에게 침을 뱉어라」라는 글부터 읽기시작했다. 글을 읽는 동안 엘사는 유모차에서 곤히 잠들었고 앙증맞은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울 모자를 쓴 데데는 자기 인형과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글에 사용된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에서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나는 수많은 문장에 힘주어 줄을 긋고 느낌표로 표시하고 문단 옆에 세로로 획을 그었다. - P393

헤겔에게 침을 뱉는 것은 남성 중심 문화에 침을 뱉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레닌에게 침을 뱉는 행위다. 유물론적 역사관과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과 남근 선망 사상에 침을 뱉는 것이며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도에 침을 뱉는 것이다. 나치즘과 스탈리니즘과 테러리즘에 침을 뱉는 것이다. 전쟁과 계급투쟁과 무산계급 독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침을 뱉는 것이다. 평등이라는 이름의 함정과 모든 가부장적 문화의 징후와 제도적 형태에 침을 뱉는 것이다.
여성의 지성이 허비되는 것을 막고 사회에서 남성 중심적인 문화의특성을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부장적인 문화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먼저 모성이라는개념을 없애야 한다. 그 누구에게도 아이를 낳아주어서는 안 된다. - P393

주인-노예 변증법 따위는 집어치우자. 머릿속에서 열등감을 깡그리 없애야 한다. 여성의 자아를 되찾아야 한다. 여성은 남성의 안티테제가 아니다. 여성의 ‘다름‘을 인정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한다.
대학은 여성을 해방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 억압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관문이다. 이는 현명하지 않은 일이다. 남성의 영역이 우주까지 확장되는 데 비해 지구상에서 여성의 삶은 아직 시작하지도않았다. 여성은 지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여성은 예측할 수 없는 주체다. 동시대,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부터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 P394

글의 저자는 카를라 론치였다.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여자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그동안 나는 수많은 책을 읽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껏 나는 그 힘든 과정을 견뎌냈을 뿐 책에서 습득한 지식을 제대로사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책에 쓰인 내용에 대해 한 번도 반문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생각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사유란 이런 것이다. 그렇게나 노력했지만 나는 제대로 생각할 줄도 모른다.
마리아로사도 마찬가지다. 마리아로사는 다독가인 데다 내용을솜씨 좋게 재구성해 그럴싸하게 소개하는 능력은 뛰어나다. 하지만그것뿐이다. 릴라는 다르다. 릴라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있다. 공부만계속했다면 릴라도 이 책의 저자처럼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은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즈음 어떤 책을 읽어도 이런저런 생각 끝에 결국에는 릴라가 떠올랐다.  - P394

머릿속에 이상적인 여성상을 만들어냈는데 그 여성상은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면릴라에게서 내가 느껴왔던 것과 똑같은 열등감과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책을 읽을 때도 나는 릴라를 생각했다. 릴라의 삶에서 단편적인 사건을 떠올리고 릴라가 공감했을 법한 문장과싫어했을 법한 문장을 생각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 유의 책을 읽고 나면 책의 내용에 고무받아 자주 마리아로사의 친구들 모임에 합류했지만 막상 단체의 구성원들과 섞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데데는 끊임없이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징징댔고 엘사는 시도 때도 없이기쁨의 환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내가 힘들었던 것은 아이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곳에 모인 여자들이 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내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때문이었다. 토론은 대부분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조악하게요약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그때마다 나는 지루함을 느꼈다. - P395

요약하는 것나는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미 잘 알고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구태여 여성으로서 자의식을 찾는 데 힘들게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사회 계층과 연령에 상관없이 남자의 본성은 다 똑같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두가 듣는앞에서 피에트로나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에 대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에 동화되기 위해서 의식을 남성화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나처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그런 모임 때마다 생성되는 미묘한 긴장감이나 질투, 인정받기 위해서 일부러 권위주의적인 말투를 쓰거나 비굴하게 가녀린 목소리를 내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 P395

나는 여자들이 자칫 불쾌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대립하는 것이 좋았다. 상대방에게 동의를 표하다가 이야기가 가십거리로 흐르는 것은 싫었다. 그런 식의 대화법은 어린 시절부터 능숙했다. 그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갈급함이 좋았다. 나는 한 번도 그런 갈급함을 느껴본 적이없었다. 아마도 타고난 성향 때문일 수도 있었다. 모임 중에 나는 그런 갈급함을 표출할 만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릴라와는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꼬일 대로 꼬인 우리의 복잡한 관계를 약간의 여지도 용납하지 않고 확실하게 되짚어보고 싶었다. 지금껏 침묵해온 것을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 실패작에 대해 말하다 릴라가 예기치 않게 울음을 터뜨린 일부터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좋을 것 같았다. - P396

각했다. 하지만 적임나는 먼저 내 자신을 이해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여성성을탐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너무 과하게 애를 썼다. 남성의 능력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뭐든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뭐든 다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실 정치나 투쟁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남자들에게잘 보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남자들보다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는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수준의 기준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비이성적인 남성의 이성? 유행하는 표현을 외우려고나는 얼마나 노력했던가.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 사고방식과 언어는 지금까지 내가 받은 교육에 의해 형성되었다. 남보다 뛰어나게되려고 나는 나 자신과 어떤 비밀스런 협상을 맺었던가. 배우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제 와서 배운 것 가운데 무엇을 잊으려 애써야 하나. 게다가 나는 릴라와 닮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살아왔다. - P397

나는 자꾸만 내 자신을 릴라와 일치시키려 했다. 릴라에게서 분리되려고 할 때마다 불구가 되는 것 같았다. 릴라가 없으면 생각조차제대로 할 수 없었다. 릴라 없이는 내 생각에 확신이 생기지 않았고어떠한 그림도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릴라와 분리된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 했다. 해답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물론 다시 글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실은 나에게는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저 해야 하는 과제를 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글쓰기마저 그만두어야 하나. 뭐든 다른 일을 찾아야 하나. 어머니 말처럼 사모님 노릇이나 하면서 살아야 하나. 식구들만 돌보면서. 그도 아니면 가정과 아이들과 남편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팽겨쳐야하나. - P398

피에트로는 제대로 쉬지 못해 신경이 날카로웠던 걸까. 아니면 지금껏 수많은 책과 예의범절 교육 뒤에 본성을 숨기고 있었던 걸까.
나는 다시 한번 내가 그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피에트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었다. 피에트로가 아르노 강에뛰어들었는지, 피렌체 어디선가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지 아니면어머니 품에 안겨 징징대며 위로받기 위해 제노바로 떠났는지 알 수없었다.
‘이제 그만‘
나는 두려웠다.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이나 책에서 읽은 내용이 내 삶에서 그다지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아이가 둘인 마당에 경솔한 태도는 금물이었다.
피에트로는 새벽 5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니 너무나 안심이 되어 나는 그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피에트로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나를사랑하지 않아. 단 한번도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
그는 덧붙였다.
"어찌 됐든 당신은 내게 과분해." - P400

실은 피에트로는 이미 자신의 일상 구석구석에 침투해버린 혼란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삶이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규칙적인 일과에 따라 진행되기를 바랐다. 공부를 하고, 강의를하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섹스를 하고, 매일 혼란스러운 이탈리아사회문제를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서 해결하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기를 바랐다.
그런 그의 소망과는 달리 피에트로는 매일 대학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시달렸다. 해외에서는 나날이 명성이 높아졌지만 동료 교수들은 그의 글을 평가절하했다. 그는 자신이 항상 무시당하고 위협받고있다고 생각했다. 내 불안한 성격 때문에 (불안한 성격이라니. 나처럼 무던한 여자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 가정이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 P401

새로운 방문객의 등장에 실비아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는 서둘러 엘사를 품에 꼭 껴안고 엘사에게 가볍게입을 맞추며 한쪽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는 동안 지난날 스테파노가 릴라에게 저질렀던 만행과 실비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상했던 장면이 함께 떠올랐다. 릴라와 실비아의 이야기가 공포에 질린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느껴졌다.
불현듯 나는 데데를 찾아 나섰다. 데데는 미르코와 함께 복도에서인형을 가지고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자기들은 엄마 아빠 역할을, 인형에게는 아이 역할을 시킨 듯했다. 그런데 평온한 일상이 아니라 부부싸움을 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서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데데가 미르코에게 지침을 내리고 있었다.
"이제 내 뺨을 때려봐. 알았지?"
풋풋한 어린 생명체가 나이 든 생명체를 장난삼아 흉내 내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모두 똑같이 사랑과 증오와 욕망과 폭력이라는 짐을 지고 무대에 오르는 그림자 인형일 뿐이었다. 나는 데데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피에트로와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미르코는 니노와 똑같았다. - P411

"리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거예요."
나는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 엔초의 모습도 혼란스러웠다. 엔초는 릴라에 대한 자신의 헌신적인 사랑을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표현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특별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스스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피에트로와는 달랐다.
나는 피에트로가 나를 칭찬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나는 그저 자기 딸자식들의 어머니일 뿐이었다. 피에트로는 내가 제대로 교육을 받았음에도 나에게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있는 능력이 없기를 바랐다. 내가 읽는 책, 나의 관심사, 나의 이야기를 무시함으로써 내게 굴욕감을 주었다. 그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나 스스로 끊임없이 내 무능함을 증명해야만 할 것 같았다. - P421

비아냥대는 릴라의 목소리와 무례할 정도로 뭐든 하찮게 취급하는 말투는 엔초가 들려준 이야기를 별일 아닌 것처럼 만들었다. 그바람에 그 무렵 내가 읽고 있던 책과 피렌체 여성들, 마리아로사에게 배운 용어들 그리고 나 스스로 해답을 찾으려 애쓰던 문제들을릴라와 함께 논의할 기회도 사라져버렸다. 릴라에게 기본적인 개념만 알려주면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 됐어. ‘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내 일을, 너는 네 일을 하는 거야. 성장하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해. 내일모레면 이제 서른 살이 될 텐데 그렇게 동네 뜰에서 소꿉장난이나 하고 있으라고. 이제 나도 신경 쓰지 않을 테야. 나는 해변에나 가야겠어?
그리고 나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 P432

나는 어떻게 해서든 내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애쓰는 데 반해 릴라는 스스로에게조차 자기감정을 감추려 애쓰는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릴라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 모든 것을 명확하게 밝히려는 내 욕망에끌어들이려 하면 할수록 릴라는 자꾸만 그늘 속으로 몸을 숨기려 했다. 숲속 너머로 몸을 숨겨 나뭇가지로 얼굴을 가린 보름달 같았다.
나는 9월 초에 피렌체로 돌아갔다. 하지만 릴라에 대한 좋지 않은생각은 흐려지기는커녕 갈수록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피에트로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그는 나와 아이들이 돌아온 것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다. 원고 마감이 늦은 데다 학기가 시작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걸핏하면 화를 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식사를 하다가 데데와 젠나로가 별것 아닌 일로 싸우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동작이 어찌나 거칠었던지 부엌문 유리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 P441

릴라는 상상력이 뛰어나고 용감무쌍하니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릴라는 거사를 치른 후에 찬란한 승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위대한 업적으로 찬양받는 혁명지도자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때가 되면 릴라는 내게 말할 것이다.
‘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지.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등장인물로 삼고 실제 피를 잉크삼아 현실을 소설로 만들어냈어."
밤이 되면 수많은 상상이 실제로 일어났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릴라가 걱정됐다. 혼란에 빠진 다른 수많은 사람처럼 릴라가 쫓기고 있는 모습이나 부상을 당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그런 릴라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릴라가 부럽기도 했다.
어린 시절 릴라가 놀라운 일을 해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굳은믿음이 점점 확고해졌다. 나는 나폴리에서 도망쳐 나온 것을 후회했다. 릴라에게서 멀어진 것을 후회했다. 다시 릴라 곁으로 돌아가야할 것만 같았다. - P445

릴라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릴라는 왜 내게 묻지도 않고 혼자 그런 선택을 한 걸까. 내가 그 정도 수준도 안 된다고 생각한 걸까. 나도 자본주의나 착취,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 릴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데, 릴라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나 자신이 불행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머니이자유부녀인 현재 나 자신의 상황에 불만이 가득 차 침대에 누워 괴로워했다. 죽을 때까지 부엌데기처럼 매일 똑같은 집안일을 하고 침대에서 부부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시들어갈 거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아침이 오면 정신이 맑아져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나는 치밀하게주변 사람들의 증오심을 자극하다 점점 더 폭력적인 일에 연루되어가는 변덕스러운 릴라의 모습을 상상했다. 릴라는 원래 과감한 면이있었다. 한번 마음먹으면 정당한 이유를 가진 자 특유의 관대한 잔혹함으로 결연하게 일을 밀어붙였다.  - P446

하지만 나는 생각만 할 뿐 실제로 릴라에게 전화하지는 않았다.
릴라도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전화로만 서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우리 관계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끈을 놓지는 않았지만 우리 관계는 갈수록 예전만 못했다. 우리는서로에게 추상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릴라를컴퓨터 전문가인 동시에 완강하고 인정사정없는 도시의 게릴라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릴라는 릴라대로 나를 전형적으로 성공한 지식인이자 머릿속에는 온통 아이들과 책 생각밖에 없고 학구적인 남편과 해박한 대화나나누는 교양 있고 부유한 사모님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생각하고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실체감을 회복해야 했지만 너무나멀어져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 P447

뭐라고 반박해야 하나, 대화를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때도 이렇게 말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경험해볼 게 뭐 있겠니, 엘리사. 내겐 빤히 보여, 마르첼로는 네몸을 취하고 네 육체에 익숙해지면 너를 버릴 거야."
하지만 막상 입에 담기에는 너무 구닥다리 표현 같았다. 어머니도그 정도로는 말을 못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나는 집을 떠났고 엘리사는 남았다. 내가 나폴리에 있었다면 나는어떻게 됐을까.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보면 나부터도 어린 시절 솔라라 형제를 좋아하지 않았나. 나폴리를 떠난 대신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내 여동생의 신세를 망치지 않기 위한 현명한 조언조차 못하고 있지 않나. - P461

한참을 오가던 공허한 대화와 거친 바다에 이는 파도를 따라 떠밀리듯 들려오던 목소리가 한순간 멈췄다. 릴라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깡말랐지만 강단 있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굽 낮은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도 평소보다 키가 커보였다.
입가와 눈가에는 주름이 깊게 파였지만 얼굴은 하였고 이마와 광대뼈 주위 피부는 팽팽했다.
머리는 포니테일로 묶었는데 귓불이 거의 없는 귀 위로 새치가 보였다. 나를 보자마자 릴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너무 놀라서 미소에 응답하지도 릴라에게 인사를 하지도 못했다. 그때 우리는 둘 다 서른이었는데 릴라는 나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고나보다 더 지쳐 보였다.  - P468

이 연극의 연출자는 대체 누구인가. 각기 다른 목적을 갖고 있는이 사람들을 도대체 누가 한자리에 모아놓은 걸까. 물론 표면적으로는 엘리사가 나선 것이지만 엘리사 뒤에 누가 있는 걸까. 마르첼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르첼로는 대부분 미켈레의 말을 따른다. 미켈레는 내 옆에 앉아서 속편하게 먹고 마시면서 자기 부인과 자식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심술궂은 눈빛으로 릴라에게 이끌리는 듯한 내 남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켈레는 대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곳이 솔라라 집안의 영토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아무리 도망쳐봤자 나도결국에는 그곳에, 그들에게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의 감정과 말과 관습을 총동원해서 내게 뭐든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걸까.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걸까. 자신은 필요에 따라 아름다운것을 추하게 만들 수도 있고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다는것을 보여주려는 걸까.  - P470

미켈레는 주위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리나의 머릿속에는 살아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죠. 그건 엄청나게 강해서 어디로 튀어 나갈지 알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어요. 의사들에게도 보이지 않죠. 내 생각에는리나 자신도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으면서 말이지요. 리나는 그 존재에 대해서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지금도 저 못된 표정을 좀 보세요.
리나의 머릿속에 있는 그것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문제를 일으키지만 일단 마음을 먹으면 정말 놀라운 일을 해내죠. 나는 오래전부터 리나의 재능을 사고 싶었어요. 그래요, 말 그대로 사고 싶었어요. 나쁠 것도 없잖아요. 진주나 다이아몬드를 사는 것처럼 사고 싶었던 거지요. 불행히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이제 드디어 첫걸음을 내디뎠고 오늘 밤 그 작은 도약을 축하하고싶군요. 나는 여기 체룰로 부인을 아체라에 세운 데이터 프로세싱센터장으로 채용했어요. 엄청나게 현대적인 시설이죠. 레누, 너와 교수님이 관심 있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보여줄게. 꼭 내일이 아니더라도 떠나기 전에 말이야. 어때, 리나?" - P476

하지만 일은 지루해. 처음에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느려서 많은 시간을 허비해. 빨리 새 기계가 도착했으면 좋겠어. 새 기계는 속도가 훨씬 빠르대. 아니야. 차라리 이대로가 좋을지도 몰라. 속도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거든. 사진이 흔들릴 때처럼 말이야. 알폰소가 했던 말인데, 알폰소는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흔들리게 나왔다고 웃으면서 말했어. 그래서 윤곽이 모호하다고 말이야.
요즘들어 알폰소는 내게 친한 척해 나랑 친해지고 싶대, 복사지로 베낀 것처럼 나랑 똑같아지고 싶대. 자기가 여자라면 나처럼 되고 싶대. 그래서 내가 똑바로 말해줬어. ‘여자라니. 너는 사내야, 알폰소 너는 내가 어떤지 몰라. 우리가 아무리 친해도, 네가 아무리 나를 관찰하고 훔쳐보고 흉내 내려 해도 너는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끝까지 모를거야‘라고 말이야.
알폰소는 내 말에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어. 알폰소는 ‘그럼 어떻게 해. 나는 지금 내 모습대로 살아가는 게 너무 괴로워‘라고 했어. - P492

알폰소는 예전부터 미켈레를 사랑했다는 거야. 그래 맞아. 미켈레솔라라 말이야. 미켈레가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자기도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니?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겠어? 우리 몸에 든 게 너무 많아서 몸이 부풀어 오르다가그만 터져버리는 거야.
나는 알폰소에게 말했어. ‘좋아. 그럼 우리 친구가 되자. 하지만 나처럼 진짜 여자가 되겠다는 생각일랑은 버려. 너는 기껏해야 너희사내들의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여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니까. 아무리 나를 따라하고 내 모습과 완벽하게 똑같은 초상화를 그린다 해도내 망할 자아는 내 것이고 네 망할 자아는 네 것이니 말이야‘라고 말이야. - P493

아! 레누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우리는모두 동파된 수도관 같아.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는 머리를 가진다는것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야. 내가 신부복을 입고 찍었던 사진을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 나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싶어. 언젠가 내 몸마저 도식화되어버릴 날이 올 거야. 구멍 뚫린 컴퓨터용 카드가 되어서 나를 다시는 찾지 못할 날이 올 거야."
그게 다였다. 말을 마친 릴라는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복도에서 나눈 대화에서 나는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친밀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우리는 그저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한 짤막한 소식이나 주고받고,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을 쏘아붙이고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제 릴라는 더 이상나에게만 속마음이나 중요한 일을 털어놓지 않았다. 릴라의 인생은릴라의 것일 뿐이었다. 릴라는 누구와도 자기 삶을 공유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 P493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릴라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에 대해 쓰기에는 나에게 정보가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차를 타고 피렌체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발전과 낙후가 혼재하는 나폴리에서 사는 릴라가나보다 말할 거리가 훨씬 많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뭔가대단한 삶을 살고픈 생각에 나폴리를 떠남으로써 나는 얼마나 많은걸 잃었는가. 나와는 달리 나폴리에 머문 릴라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돈도 많이 버는 데다 남들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자기만의계획에 따라 완벽하게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 P494

릴라는 자기 아들을 아낀다. 아이가 어렸을 때 아이를 돌보는 데많은 시간을 바쳤고 지금도 아이에게 정성이다. 하지만 원하면 언제든 아이에게서조차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처럼 자식 일로 불안해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친정 식구들과 연을 끊었다가도필요하면 항상 가족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했다. 불행한 처지에있는 스테파노를 도와주면서도 관계를 회복하지는 않았다. 솔라라형제를 증오하면서도 그들에게 복종했다. 알폰소를 비꼬면서도 그 - P494

와 친했다. 다시는 니노를 보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릴라는 분명 니노와 다시 만날 것이다.
릴라의 삶은 동적인 데 비해 나의 삶은 정적이다. 피에트로가 말없이 운전을 하고 아이들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나는 한참을 릴라와니노에 대해 생각했다. 둘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상상했다. 나는 릴라가 다시 니노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다시 만나 언제나처럼 니노를 조종해 그의 아내와 아들에게서 멀어지게 할 것이다. 결국에는 상대를 알 수 없는 자신의 전쟁에 니노를끌어들여 그의 아내와 이혼하게 만들 것이다.
돈을 빼앗을 만큼 빼앗은 다음에는 미켈레에게서도 빠져나올 것이고 엔초와도 헤어질 것이다. 결국에는 스테파노와도 이혼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니노와 결혼할지도 모르겠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둘이 자신들의 지능을 합할 거라는 사실이다. 그렇게되면 둘이 함께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되겠지. - P495

무엇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어린 시절부터 나를 사로잡았지만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원했다. 그 무엇인가가 뭔지는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물론 그동안 무엇인가가 되기는 했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뚜렷한 대상도, 진정한 열정도, 확실한 야망도 없이 말이다. 릴라는 중요한 사람이 되는데 나만 혼자 뒤처질까봐 무엇인가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뭐라도 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바랐지만 릴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제 나는 다시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오직 나를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릴라에게서 벗어나 성숙한 인격체로서 말이다. - P4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릴라는 엔초에게서 무엇을 본 걸까. 나는 릴라가 엔초에게 본 것이 그녀가 지난날 스테파노나 니노에게서 본 것과 별반 다를 것이없다고 생각한다. 릴라는 엔초를 통해 모든 것을 바로잡기를 원했다. 스테파노의 경우에는 일단 돈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자 실체 없1 - P136

고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났었다. 니노의 경우에는 지성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자 릴라에게 아픔만 남기고 시꺼먼 연기처럼 증발해버렸다. 지금 이 순간엔초만큼은 릴라에게 예기치 못한 아픔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릴라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엔초를 존중했다. 그런 그가 이제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내적으로 단단하고, 모든 일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릴라에게는 너무나 온순하면서 매사에 속이꽉 찬 남성으로 성장한 것이다. 릴라는 이런 엔초가 스테파노나 니노처럼 갑자기 망가져버리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물론 둘은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릴라가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밤이면 둘은 각자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릴라는 벽 너머로 엔초가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주변이 잠잠해져 집과 건물과거리에서 나는 소리만 들릴 때까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몹시 피곤했지만 릴라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어둠 속에 누워 있다 보면조심스러운 마음에 일부러 정의내리지 않은 허다한 불행의 이유가뒤섞여 생각이 젠나로에게 집중되었다 릴라는 생각에 잠겼다. - P137

릴라는 엔초가 다른 여자에게 반해서 자신을 쫓아낼까봐 두려웠다. 살 곳이 없어지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당장은 햄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꼈다. 놀랍게도 예전에 스테파노와 결혼해 수중에 돈은 많았지만 그에게 종속되어 있을 때보다 더 강하다고 느꼈다. 그보다는 엔초의 상냥함을 잃을까봐 두려웠다. 자신의 모든 걱정에 대한 엔초의 관심과 그가 발산하는 평온한 기운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다. 릴라는 그런 엔초 덕분에 니노의 부재와 스테파노의 존재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엔초는 릴라에게 위안을 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엔초는 여전히 릴라가 놀랍도록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 P139

"독일어잖아, 엔초 난 독일어는 몰라."
"하지만 너라면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엔초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릴라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엔초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목표를 이루어낸 후에도 초등학교 5학년의 학력이 전부인 릴라가 자기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엔초는 릴라에게 어떤 과목이든 빨리 배울수 있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선가접하게 된 빈약한 정보를 바탕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에 인류의 미래가 있을 뿐 아니라 먼저 그 언어를 정복하는 새로운 엘리트층이야말로 미래 사회에서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한 엔초는 즉시 릴라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를 좀 도와줘."
"난 지금 정말 피곤해."
"리나, 지금 우리의 삶은 형편없어. 변화가 필요해."
- P140

엔초는 그러는 동안 서서히 릴라를 공부에 동참하도록 유도했고 릴라는 릴라대로 엔초를 돕기 위해 애썼다. 이번에 릴라의 태도는니노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자기가 모든 면에서 니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강박관념 때문에 오히려 그를 힘들게 했다. 이에 비해 엔초와 공부할 때 릴라는 평안했다. 애써 그를 압도하려 하지도 않았다. 저녁 공부는 엔초에게는 노고였지만 릴라에게는 안정제 같았다. 그랬기 때문에 엔초가 늦게 돌아와 릴라를찾지 않을 때마다 릴라는 불안감에 잠 못 이루고 화장실 물소리에귀를 기울인 것일지도 모른다. 엔초가 애인의 흔적을 몸에서 지워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 P141

공장의 과다한 노동은 직장 내에서 성욕을 자극했다. 직원들은 퇴근 후 지칠 대로 지쳐서 이미 욕구를 상실한 채 자기 집에서 부인이나 남편과 섹스를 하기보다는 오전이나 오후에 공장에서 관계를 맺고 싶어 했다.
릴라는 공장에서 근무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러한 사실을바로 눈치챘다. 사내들은 틈만 나면 여자들에게 손을 뻗쳤고 여자가옆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음탕한 제안을 했다. 그러면 여공들, 그중에서도 특히 나이 든 여자들은 사내들의 제안에 웃음을 터뜨리면서거대한 가슴을 사내들에게 비벼대고는 곧 사랑에 빠졌다. 사랑은 힘겨운 노동과 작업의 무료함을 잊게 해주는 힘겨운 일상의 활력소였 - P141

다. 그들은 사랑을 나눌 때만큼은 정말 살아있음을 느꼈다.
릴라가 출근한지 며칠 되지 않아 사내들은 릴라의 체취라도 맡고싶은 것처럼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려 했다. 릴라가 밀어내면 사내들은 낄낄거리면서 가사가 추잡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멀어져 갔다.
어느 날 아침 릴라는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녀 옆을 지나가면서 음탕한 말을 던지며 목 뒤에 입맞춤을 한 사내의 귀를 거의 뜯어내다시피 했다. 그는 에도라는 이름의 잘생긴 축에 속하는 40대 사내였다. 에도는 공장의 모든 여자를 은근하게 유혹했고 야한 농담을 곧잘 했다.
릴라는 한 손으로 손톱이 살점을 파고들도록 사내의 귀를 세게 움켜잡고 비틀며 온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에도가 릴라의 발차기를막아보려고 애쓰면서 비명을 질렀지만 릴라는 끝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런 다음 릴라는 길길이 날뛰며 브루노의 사무실로 항의하러갔다. - P142

브루노가 취직을 시켜주기는 했지만 사실 그 후로 릴라는 그를 거의 보지 못했다. 몇 번인가 마주쳤을 때에도 릴라는 그에게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급히 지나쳤다. 그렇기 때문에 릴라는 그제야 비로소 브루노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브루노는 릴라가 들어오자책상 뒤에서 일어섰다. 여성을 맞이하는 신사다운 태도였다. 하지만릴라는 브루노의 외모에 놀랐다. 얼굴은 부어 있었고 부유한 생활때문인지 눈빛은 흐릿했다. 가슴이 답답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마그마같이 시뻘건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가뜩이나 까만 머리와 늑대처럼 길고 뾰족하고 하얀 이빨 때문에 빨갛게 상기된 안색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릴라는 생각했다.
‘여기 이 사람이 과거 니노의 친구였던 법대생과 같은 사람인가?‘ - P142

릴라는 이스키아섬에서 보낸 시간과 현재의 햄 공장 사이에 연속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빈 공간밖에 없었다. 릴라는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뛰어 넘어오는 과정에서 브루노가 망가져버렸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그의 아버지가병들어 회사에 대한 부담이 그의 어깨에 고스란히 지워졌기 때문일수도 있었다. 공장에 빚이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릴라가 브루노에게 자신이 화가 난 이유를 설명하자 브루노는 코웃음을 쳤다.
"이봐, 리나."
브루노가 책망하는 투로 말했다.
"난 네 부탁을 들어준 거야. 은혜를 말썽으로 갚으면 안 되지. 여기서는 모두 힘겹게 일하고 있어. 그렇게 잔뜩 곤두서 있지 좀 마. 가끔은 직원들의 긴장을 풀어주기도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진단 말이야."
"긴장을 풀려면 너희들끼리나 풀어." - P143

브루노는 갑자기 릴라의 허리를 잡고 입술로 릴라의 긴 목을 훑었다. 동시에 재빨리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손이 백 개는 되는 것 같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놀라운 속도로 앞치마를 헤집고 치마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인의 몸을 침범해야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릴라는 햄에서 나는 악취에서부터 브루노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스테파노의 폭력을 떠올렸다. 순간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살해당할까봐 두려웠다. 그것도 잠시일 뿐 격렬한 분노가 릴라를 덮쳤다. 그녀는 브루노의 얼굴을 때리고 다리 사이를 발로 차면서 소리 질렀다.
"쓰레기 같은 자식! 아랫도리에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이리 와!
네 물건을 꺼내 보라고, 내가 당장 잡아 뜯어줄 테니 말이야. 이 나쁜자식아!"
브루노는 릴라를 놔주고 뒤로 물러섰다. 피가 흐르는 입술을 손으로 만졌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키득거리다 중얼거렸다.
"미안해. 나는 그래도 네가 내게 조금은 고마워할 줄 알았어." - P145

릴라는 브루노의 속삭임을 뒤로하고 숙성고에서 나왔다.
릴라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릴라는 그때 수증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수영장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작업을 보조해주는 역할로 바닥이 물에 젖지 않게 틈틈이 닦아야 했다. 아무리해도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릴라에게 거의 귀를 잡아 뜯길 법했던 에도라는 사내가 릴라를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일하던 이들모두 릴라가 화를 내면서 숙성고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릴라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릴라는 걸레를 집어 벽돌바닥에 거칠게 내리친 다음 질척한 바닥을 닦으면서 위협적으로 크게 외쳤다.
"또 어떤 개새끼가 나를 건드리는지 두고보자고."
이 말에 릴라의 동료들은 모두 일에 열중했다. - P146

릴라는 엔초에게 동료의 귀를 거의 잡아 뜯을 뻔했다는 이야기도브루노의 추행도 매일같이 당하는 고약한 장난과 고생에 대해서도말하지 않았다. 엔초가 햄 공장일이 어떤지 물으면 릴라는 비꼬듯이 그러는 너는 왜 네 직장이야기는 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엔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릴라는 그를 조금 놀리다가 함께통신 교육 과정에서 보내준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둘이 현실에서도피라도 하듯 교육 과정에 열중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가장 큰 이유는 둘의 미래에 의구심을 갖지 않기 위해서였다.
72.17그들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가. 엔초는 왜 릴라와 젠나로를 돌보고 있는 것인가. 릴라는 왜 그런 엔초를 받아들이는 것인가. 오래전부터 같은 집에 살면서 엔초는 왜 매일 밤 그녀가 자기 옆에 와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것인가. 왜 침대에서 뒤척이다 물을마신다는 핑계로 부엌에 가서 릴라가 아직 불을 끄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윗부분이 반투명 유리로 된 릴라의 방문을 향해 시선을던지고 그녀의 움직임을 훔쳐보는 것인가.
그럴 때면 침묵 속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 P147

둘은 아주 간단한 행동에서 복잡한 행동으로 서서히 연습 문제의 난이도를 높였다. 함께 머리를 짜내 일상의 모든 동작을 도식화했다. 취리히 통신 교육 과정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엔초가 그러자고 한 것이 아니었다. 늘 그랬듯이 마뜩잖게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열정을 불태우는 릴라의 생각이었다. 이제 릴라는 밤이 되면얼어붙을 듯 추운 집에서 비참한 현실을 오직 0과 1로만 구성된 세계로 전환하는 데 열중했다. 릴리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선형성을 추구했다. 그것은 모든 추상적 관념의 기원이 되는 절대적인 추상성이었다. 릴라는 0과 1이라는 숫자 외에는 그 어떤 진실도 허용치 않는 완벽한 선형적 세계 안에서 평온함을 찾으려했다. - P148

이미 아슬아슬하던 둘 사이의 균형은 파스콸레의 등장으로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 무렵 파스콸레는 산 조반니 아 테두초 근처에 있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마침 지역 정당 모임 참석차산 조반니 아 테두초에 왔다가 길에서 우연히 엔초와 마주치게 된것이었다. 둘은 금방 예전의 신뢰를 회복했다.
둘은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의 불만에 공감했다. 처음에는 비교적 신중한 태도를 보인 엔초에 비해 파스콸레는 가장 신중해야 하는 동네 공산당위원회 서기관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수정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당과 그러한 당의 태도를 눈감아주는 노동조합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엔초와 파스콸레가 급속도로 우정을회복하는 바람에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릴라는 파스콸레를 보고서둘러 그의 몫의 식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 P149

하지만 가끔 파스콸레의 장광설을 듣고 있다 보면 어린 시절의 기억에 사로잡혀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어서 힘들었다. 그 시절 잔혹했던 동네의 기억과 돈 아킬레 그리고 그의 살해사건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릴라는 돈 아킬레의 살해 장면을 자주 이야기하고 다녔다. 상상력을 발휘해 얼마나 세밀히 묘사했던지, 아직까지도 직접 그 광경을 목격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스콸레 아버지가 체포되는 장면으로까지 이어졌다. 목수아저씨는 고래고래 악을 써댔었다. 주세피나 아주머니와 카르멘도 마찬가지였다.
릴라는 그런 기억이 싫었다. 실제 기억과 허구가 뒤섞여 폭력이 난무하고 선혈이 낭자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럴 때면 고개를 내젓고 회한에 찬 파스콸레의 넋두리에서 벗어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써 파스콸레에게 가족과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에 대한 이야기, 주세피나 아주머니가 해준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켰다. - P153

릴라는 일행과 함께 비록낡았지만 장엄함이 느껴지는 계단을 올라갔다. 장소에 비해 참가 인원은 많지 않았다. 릴라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도부와 평당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언변이 화려한 지도부와는 달리 평당원들은 떠듬떠듬 말을 늘어놓았다.
릴라는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학생들의 주장은 릴라에게 위선적으로 들렸다. 그들의 현학적인 표현과 주눅든 태도가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그들의 주장은 천편일률적이었다. 당신네 노동자들에게 배우기 위해 모임에 나왔다는 똑같은 말을 노래의 후렴구처럼되풀이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저 자본주의, 노동 착취, 사회민주주의 배신, 계급투쟁 방식 등에 대한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그들의 지식을 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릴라는 모임에 참석한 얼마 안 되는 여자들이한마디 발언도 하지 않으면서 엔초와 파스콸레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157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릴라는 자리로 돌아갔다. 자신이 나디아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발언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릴라가 돌아갔을 때는 마침 곱슬머리 청년이 이탈시데르 화학사의 도급 계약에 대해 상당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릴라는 청년이 말을 끝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의아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엔초를 무시하고 발언권을 요청했다. 젠나로가 품 안에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데도 릴라는 꽤나 오랫동안 표준어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조용히 이야기하다 나중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주변이 조용한 데 비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소리를 높였다. 릴라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자기는 노동계급이니 뭐니 하는 것은 잘 모른다고 했다. 자기는 지금 일하고 있는 공장의 노 - P159

동자들밖에 모르며 이들에게서 배울 것은 빈곤함 빼고는 아무것도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청중에게 물었다.
"하루 여덟 시간을 모르타델라 햄을 익히는 물속에서 허리까지몸을 담그고 일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상상이 되나요? 동물 뼈에서살점을 발라내느라 손이 상처투성이가 되는 느낌을 아나요? 한 시간에 고작 10리라를 더 받겠다고 영하 20도의 냉동고를 들락거리는 게 어떤 일인지 상상이 되나요? 그래요. 10 리라 때문에 말이에요. 상상이 간다고요? 그렇다면 대체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뭘배우겠다는 거죠?
우리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은 공장장이나 남자 동료들이 엉덩이를 주물럭대도 찍소리도 못해요. 사장이란 작자가 원하면 그를 따라 숙성고로 가야 하죠.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대부터 그래왔겠죠. 그 자식은 여공의 몸을 덮치기 전에 숙성고에서 나는 햄냄새가 얼마나 짜릿한지 모른다는 일장 연설까지 늘어놓죠. - P160

게다가 남자든 여자든 언제든 몸을 수색당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공장 출구에는 탐지기가 있거든요. 이 앞을 지나갈 때 녹색 대신적색 불이 들어오면 살라미나 모르타델라 햄을 훔쳐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 기기는 사장의 첩자 노릇을 하는 수위가 조절하는데 이첩자 놈은 햄을 훔쳐갈 만한 사람이 지나갈 때만 불을 켜는 게 아니에요. 수줍고 예쁘장한아가씨들이나 골치 아픈 말썽꾼이 지나갈 때면 으레 적색불을 켜지요.
이것이 내가 일하는 공장의 현실이에요. 노조는 이곳에 발을 디뎌본 적도 없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위협에 시달리는 불쌍한 사람들이죠. 이들에게는 사장의 말이 법이에요. 사장은돈을 준다는 명목하에 노동자들을 자기 소유물처럼 대하죠. 그들의 - P160

삶도 가족도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굴어요. 자기 말대로 하지 않으면 무참히 박살내버리겠다는 심보예요."
릴라가 말을 마치자 잠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릴라의 뒤를이어 발언한 사람들은 모두 릴라의 이야기에 감동받았다고 했다. 모임이 끝나자 나디아는 릴라에게 다가가 릴라를 껴안더니 칭찬을 늘어놓았다. - P161

이불을 덮었는데도 몸이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아 일어나서 잠옷 위에 울 스웨터를 껴입었다. 다시 침대에 누우려는데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자기 심장이 목에서 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세차게 뛰는지 자기 심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심장 같았다.
이미 익숙한 증상이었다. 그로부터 11년 후, 그러니까 1980년에릴라 스스로 이른바 ‘경계의 해체‘라고 정의 내린 바로 그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하지만 그날처럼 격렬했던 적은없었다. 혼자 있을 때 그런 증상이 나타난 것도 처음이었다. 평소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경계의 해체 현상을 유발하는 사람들이 항상 주변에 있었다.
릴라는 불현듯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혼란에 빠진 릴라의 머리에서 그날 만났던 사람들의 형상과 목소리가 빠져나와 공중에 떠다니기 시작했다. 위원회 소속의 두 청년과수위, 직장 동료들, 숙성고에 있던 브루노, 나디아의 형상이 눈앞에나타나 무성영화 배우들처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짧은 간격으로 번쩍이는 공장 탐색기의 적색 불과 자신을 위협하면서 손에서 소시지를 빼앗아 드는 필리포의 모습도 나타났다. - P169

‘상상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야. 방에는 젠나로밖에 없는걸‘
젠나로는 릴라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침대에서 고르게 숨쉬며 자고있었다. 실제로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움만 커져갔다.
거센 심장 박동 때문에 단단하게 맞물린 사물의 견고한 이음새마저 끊어질 것 같았다. 사방의 벽을 굳게 지탱하고 있던 힘이 느슨해지고 목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박동에 침대가 흔들거리고 회벽에 금이 가고 두개골 윗부분이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이대로 가다가는젠나로마저 부서질 것 같았다. 그렇다. 젠나로는 셀룰로이드로 만든인형처럼 망가져버릴 것이다. 격렬한 진동에 젠나로의 가슴과 배와머리가 갈라져 장기가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 P170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을까. 전에도 사내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압력을 가하거나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을 다루듯 그들을 자신이 원하는방향으로 유도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스테파노, 니노, 솔라라 형제 그리고 엔초에게도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 그때는 자기가 그런 태도를 취하고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혼자 힘으로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갈 것이다. 수위에게도, 직장 동료에게도, 위원회의 학생들에게도, 브루노에게도 혼자 힘으로 맞설 것이다. 모든 사물과 사람들과의 거듭되는 충돌에지칠 대로 지쳐 무너져 내리면서도 도무지 포기할 줄 모르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도 혼자 감내할 것이다. - P172

릴라는 니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를 간절히 원했었다. 그의마음에 들기 바랐기에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었다.
스테파노에게는 맞아 죽지 않기 위해서 혐오감을 억누르며 마지못해 해주던 짓도 니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했다.
하지만 남성이 여성의 몸에 들어올 때 응당 느껴야 할 쾌락을 릴라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스테파노와의관계에서만이 아니었다. 니노와 사랑을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내들은 자기 물건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여자들이 자기 물건을 자신들보다 더 소중히 여길 거라고 굳게 믿었다. 젠나로마저 자그마한 고추를 가지고 손장난을 치곤 했다. 어찌나 손으로 조몰락대고 당겨대는지 가끔은 쳐다보기 민망했다. 릴라는 그러다 아이가 다칠까봐 두려웠다.  - P196

릴라는 투덜거리는 사람들에게 맞장구를 쳐주었고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한다는 듯한 태도를보였다. 또 사장의 횡포에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에게는 동의를 표했다. 릴라는 그런 식으로 개개인의 불만을 이끌어내 현란한 말솜씨로다양한 불만을 하나로 연결했다.
그 후 며칠 동안 릴라는 누구보다도 에도와 테레사를 중심으로 모인 소수의 무리가 마음껏 의견을 표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덕분에 점심시간마다 비밀집회가 열렸다. 릴라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직접 앞으로 나서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여론을 형성할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릴라 주위에는 어느새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껏 입에 달고 살던 불평불만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정당한 문제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했다. 릴라는 고깃살을 제거하는 작업장과 고기 저장고와 고기를 거대한 물통에 담그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규합했다.
그러는 동안 어느 한 작업장의 문제점이 다른 작업장의 문제로 이어지며 결국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는 거대한 착취구조를 완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릴라 스스로도 놀랐다. - P204

릴라가 말했다.
"침묵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엿 먹어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들이야."
카포네의 말이 옳았다. 나디아와 아르만도도 옳았다. 그들의 계획은 아직 취약했다. 억지로 단행하기에는 아직 무리였다. 릴라는 맹렬히 고기를 썰었다. 누구라도 걸리면 상처를 주고 싶었다. 자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칼로 손을 찌르고 싶었다. 지금 당장 저 죽은 짐승의 고기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자신의 살덩이에 칼날을 찔러넣고 싶었다.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모두에게 욕설을 퍼붓고 싶었다. 도무지 균형을 잡을 줄 모르는 자신을 자극한 대가를 그들에게치르게 하고 싶었다. - P220

‘아, 리나 체룰로. 너는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대체 왜 그 목록을적은 거지? 착취당하고 싶지 않아서? 너 자신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근무 조건을 향상시키려고? 지금 투쟁을 시작하면 전 세계프롤레타리아 승리의 행진에 합류라도 하게 될 것 같아?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는 주제에? 저기 저 사람들을 데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엇이 되기 위한 행진인데? 앞으로도 계속 노동자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어라 일만 하는 노동자의 손에 권력을 쥐어주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쓰디쓴 노동의 노고를 감내하게 하려고 만들어낸 흰소리일 뿐이다. 끔찍한 실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나. 이끔찍한 실태를 나아지게 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완전히 해결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오지 않았나. 상황을나아지게 한다는 것이 가능한일인가? 우리는 더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네 자신은 예전보다 나아졌어? 나디아나 이사벨라처럼 됐다고 - P220

생각해? 네 오빠가 아르만도 같은 사람이 되었어? 네 아들은 마르코처럼 되었어? 아니. 우리는 우리고 그들은 그들이야. 그런데도 너는대체 왜 포기하지 않는거야?
끊임없이 뭔가를 해보려는 통에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하는 머리탓이야. 구두를 디자인하고 구두공장을 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니노의 기사를 다시 쓰고 네 말대로 할 때까지 그를 몰아붙였어. 엔초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야. 너는 취리히의 통신 교육 과정을 네 마음대로 이용하고 있어. 그리고 이제는 나디아가 혁명가라면 너는 그녀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거야.
맞아. 모든 악의 근원은 네 머리에 있어. 머리가 만족하지 못해 몸까지 병드는 거야. 이런 자신이 지긋지긋해. 모든 것이 넌덜머리가나. 젠나로도 마찬가지야. 그 아이도 결국 잘 돼봤자 이런 곳에서 일하면서 고작 5리라 더 벌어보겠다고 사장 앞에서 설설 기겠지. - P221

그렇다면? 그래, 리나 체룰로. 그렇다면 이제 책임을 지고 생각했던 바를 실행하자. 브루노 자식을 위협하는 거야. 숙성고에서 여공들을 따먹는 그 못된 버릇을 고쳐놓는 거야. 그 옛날 늑대같이 생긴대학생에게 능력을 보여주는 거야. 이스키아 섬에서 보낸 그해 여름브루노가 사주던 음료며 포리오 가에 있던 그의 별장, 니노와 함께사랑을 나누었던 호사스러운 침대는 모두 여기에서 쥐어짜낸 돈에서 나온 것들이야.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이 더럽고 냄새나는 곳에서 일하며 흘리는 땀에서 나온 것이야.
지금 내가 뭘 자른 거지? 걸쭉한 누런 액체가 사방에 튀네. 역겨워라. 그래. 그래도 다행이야. 지구는 돌지만 돌다가 떨어지면 부서져버릴 테니 말이야.‘ - P221

미켈레는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릴라를 원했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풍부한 릴라 본연의 모습을 원했다. 릴라를 망가뜨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릴라를 가능한 오래도록 간직하기를 원했다. 성적인 이유로 릴라를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미켈레는 릴라를 섹스에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미켈레가 릴라를 원하는 이유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그녀를 쓰다듬어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릴라가 자신을 어루만져주고 도와주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때로는 명령을 내려주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릴라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늙어 가는지 곁에서 지켜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함께 생각하고 릴라에게서 영감을 받고 싶기 때문이었다.
- P286

끝내 비는 오지 않았지만 종일 어두웠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그날 일어난 일 때문에 겉보기에는 회복기에 접어들었던 릴라와 나의 관계가 갑작스럽게 국면 전환을 맞게 됐다. 그날 이후 나는 릴라일에 나서기를 그만두고 내 삶에 집중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사실 자각하지 못했을 뿐 그전에 일어난 이런저런 소소한 일로 조금씩상처를 받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런 일들이 쌓이고 싸여 표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의 탐방은 나름대로 유용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나는 불만으로 가득했다. 내가 알폰소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고있으면서도 이토록 오랫동안 내게 입 한 번 벙끗하지 않은 릴라를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을까. 릴라는 자신이 미켈레에게 절대적인존재라는 사실을 정말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나름의 이유 때문에 내게 숨기려 한 것일까. 따지고보면 나는 나대로 얼마나 많은일을 릴라에게 감추었던가. - P293

나는 릴라가 내게 정말로 사과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을 감추기 위해 거짓된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게영원히 결별을 선언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릴라가 본심을 감추고 있으며 내게 전혀 고마워하지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변화가 많았는데도 내가 여전히 릴라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평생 그 열등감에서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순간 나는 진심으로 심장전문의의 진단이 오진이기를 바랐다. 아르만도가 옳았기를 바랐다. 릴라가 정말로 병들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바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몇 년 동안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전화로만 소식을 주고받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못한 채 음성의 조각들로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릴라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욕망은 내 맘 한구석에 뿌리를 내려 내가 아무리 쫓아버리려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 P314

심란한 마음에 급기야 나는 평생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저질렀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동이 트기도 전에 혼자 집을 나선 것이다. 나는 몹시 우울했다.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잘못된 행동과 못된 생각에 대해 벌 받기를 바랐다. 내게 나쁜일이 생겨서 결과적으로 릴라도 벌 받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인적 없는 길을 따라 홀로 걸었다. 사람이 많을 때보다 훨씬안전한 것 같았다. 그새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어갔다. 해변에 도착하니 아침 햇살에 테두리가 분홍빛으로 물든 구름이 드문드문 떠다니고 있었고 아직은 창백해 보이는 하늘 아래로는 바다가 잿빛 종이처럼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오보성의 윤곽이 빛 때문에 둘로 선명하게 나뉘어 보였다. 베수비오 화산과 가까운 부분은 저 멀리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황톳빛 윤곽이 찬란히 빛났고 메르겔리나나포실리포와 가까운 부분은 아직도 어슴푸레 어둠에 잠겨 어두운 밤색 얼룩처럼 보였다. - P315

해변을 따라 이어진 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는 고요했지만 강한 체취를 내뿜었다. 매일아침 우리 동네가 아니라 저 멀리 해안 근처에 들어선 건물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면 나폴리에 대한 내 감정이 지금과는 달라졌을까.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내 출생성분을 바꾸기라도 하려는 건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태생도바꾸려는 건가. 빈곤과 탐욕 때문에 괴로워해본 적도 없고 원한과분노를 알지도 못하는 시민들로 이 황량한 도시를 다시 채우고 싶은건가. 태초에 이 땅에 거주하던 신처럼 이 황홀한 풍경을 있는 그대로 즐길 줄 아는 그런 사람들로 이 도시를 다시 채우고 싶은 건가. 내안에 있는 악마를 만족시키고 악마에게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행 - P315

복해지기를 바라는건가.
내가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대대로 투쟁해왔고 파스콸레나릴라 같은 서민을 위해 애써온 아이로타 집안의 힘을 빌린 것은 사회의 위악을 바로잡는다는 거창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 것 같아서였다. 그런 내 판단이 잘못되었나. 곤경에 처한 릴라를 내버려두었어야 했을까. 이제부터는 절대로, 다시는 타인을 위해 애쓰지 않을 것이다.
다음 날 나는 결혼식을 위해 나폴리를 떠났다. - P316

나는 속이 상했다. 화가 났다. 나는 그의 반응이 성당에서 식을 올리기를 거부한 젊은 지식인답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을 여과 없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심하게 다퉜다. 결혼식 당일까지 화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혼식 내내 피에트로는 벙어리마냥 입을 꾹다물고 있었다. 나 역시 싸늘한 태도로 일관했다.
결혼식에 관해 아직도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일이 또 하나있다. 예상치 못했던 결혼 피로연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시청에서식을 올리고 가족들과 인사를 한 뒤 따로 피로연 없이 바로 집으로돌아오기로 했었다. 이는 피에트로의 금욕적인 성향과 이제 더 이상어머니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내 성향에 따라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방침은 시어머니의 은밀한계획 때문에 실행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 P317

그 무렵 내 마음은 시작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으로 엉켜버린 실뭉치 같았다. 오래되어 색이 바랜 실과 막 자아낸 새로운 실,
현란한 색상의 실과 무채색 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가는 실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릴라의 예상에서 벗어났다고 안도하는 순간 나의 평온함도 끝이 났다.
아이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이었다. 무심결에 실뭉치를 잘못 건드려 뒤엉킨 부분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부분이 표면으로 올라온것 같았다. 병원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아이는 별다른 문제없이 젖을 잘 빨았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후부터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더이상 나를 원하지 않았다. 겨우 몇 초쯤 젖을 빨다가도 화난 작은 짐승처럼 악을 써댔다.
나는 심신이 약해져 오래된 미신에 빠져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일어난 걸까. 내 젖꼭지가 너무 작아서 자꾸 놓치는 걸까. 내 몸에서나오는 젖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 멀리서 아이가 엄마인 나를 미워하도록 사악한 주술이라도 건걸까 - P330

우연히 니노가 쓴 글을 두세 번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글을읽어도 전처럼 니노의 모습과 목소리와 사유를 상상하며 즐거워할수 없었다. 물론 나는 니노의 성공이 기뻤다. 니노의 기고문이 실린다는 것은 그가 잘 지낸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어디선가 누군가와함께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했으니까. 나는 니노의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몇 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하얀 종이에 검은색으로 인쇄된 그의 글을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현재 내 신세가더 견딜 수 없어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외모에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사실 외모를 가꿔봤자 볼 사람도 없었다. 그즈음 나는 피에트로 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겉보기에 피에트로는 나를 예의 바르게대했지만 실은 그에게 나는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 P337

먼저 이번 글의내 생각은 대략 이랬다.
‘이야기의 맥락이 끊긴 것 같은 느낌이야. 너에게서 흘러나오던일종의 흐름 같은 것이, 내게 항상 긍정적인 영향을 주던 그 흐름이멈춰버린 것 같아. 이젠 정말 혼자가 된 것 같아.‘
하지만 나는 릴라에게 내 본심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자조적인말투로 그 글을 그토록 힘겹게 쓴 이유는 고향 동네와 관계를 마무리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고 했다. 우리 동네가 지금 주변에서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기때문이라고 했다. 돈 아킬레와 솔라라 형제 어머니에 대해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영감이 되었다고 했다. 내 말에 릴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릴라는 사물의 추악한 민낯만으로는 소설을 쓸 수 없다고했다.
"상상력이 더해지지 않으면 현실은 진짜 얼굴이 아니라 가면처럼보일 뿐이거든." - P384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그날 흐느끼며 울음을 터뜨렸던 덕분에 릴라는 내게 이의를 제기할 기회도 주지 않고 내 글을 신랄하게 평할수 있었고 내 원망을 피할 수 있었으며 무려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라는 높은 목표를 설정할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다시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싹 사라질 만큼이나 어려운 목표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날 대화의 의미를 아무리 분석해봐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대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알수 없다. 그때가 우리 우정사에서 최상의 순간이었는지 아니면 최악의 순간이었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나의 무능력함을인정하는 데릴라가 예전보다 더 확실하게 거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내 실패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사실이다. 나는 릴라의 의견이 시어머니의 의견보다 훨씬 권위 있게 느껴졌다.
더 납득할 만하고 더 애정 어린 의견이라고 생각했다. - P3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