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즈음 나는 처음으로 릴라에게 자신의 행동반경에 대해 세운 엄격한 기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세월이 흐를수록 릴라는 고향밖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고향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유년시절을 함께한 사람들과 관련이 있을 때만 관심을 보였다. 내가알기로는 컴퓨터에 관한 일까지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관심을 가졌다. 엔초는 때때로 밀라노나 토리노까지 출장을 다니곤 했지만 릴 - P102
라는 달랐다. 릴라는 절대로 나폴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여행의 참맛에 눈뜬 이후부터 나는 릴라의 이러한 폐쇄성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그 시절 나는 기회만 있으면 해외로 나가려고 했다. 니노와 함께나갈 수 있을 때면 더 그랬다. 내 책을 출간한 소규모 독일 출판사가서독과 오스트리아 홍보 여행을 기획했을 때 니노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홍보 기간 내내 쾌활하고 말 잘 듣는 운전기사 역할을 해주었다. 우리는 보름 동안 서독과 오스트리아 방방곡곡을 누볐다. 지역마다 색다른 풍경이 눈부신 색채의 그림처럼 우리 곁에 펼쳐졌다. 이동 중 마주치는 산과 호수, 도시와 웅장한 건축물이 그 순간 오직 우리가 한 쌍의 연인으로 그곳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더욱 즐겁게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제 나름대로 우리의행복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다. 가끔 잔혹한 현실에 대한 감각이되돌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현실이 그 당시 내가 매일 저녁 극단적인 관중 앞에서 늘어놓던 암울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와 일치한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에 휩싸이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나중에는신나는 모험담처럼 서로의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P103
미지의 외국 도시에서 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면 마지막에는 언제나 그 당시 엄중했던 정치적 분위기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고나는 상식적인 대답으로 사태를 모면하곤했다. 내대답의 골자는거의 ‘탄압‘이었다. 나는 소설가라면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거대한 증기 롤러를 예로 들었다. 나는 어디든 예외는 없다고 말했다. 거대한 증기 롤러가 국경을 지나 모든 것을 정돈하며동쪽에서 서쪽으로 진격하는데 그것이 지나가고 나면 노동자는 일을 하고 실업자는 쇠약해지고 굶주린 자는 굶어죽고 지식인은 허풍 - P104
을 떨고 흑인은 흑인답게 행동하고 여자는 여자답게 행동하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때로는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더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럴 때면 나는 파스콸레 이야기를 했다. 나는 청중들에게 파스콸레가 유년시절부터도피생활을 선택하기까지 겪은 그의 비극적인 인생을 시기별로 들려주었다. 내게는 그보다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능력이 없었다. 내 어휘는 10년 전에 습득한 상태 그대로였고 그 표현들은 고향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과 연결될 때야 비로소 의미를 얻었다. 그렇지않을 때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하게 예측할 수 있는 진부한 표현으로 끝날 뿐이었다. - P105
순간 시어머니의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말을 잃었다. 시어머니는날카로운 표정으로 뻣뻣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거의 귓속말에 가까운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정말 못돼먹은여자라고 했다. 나 같은 사람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남의 비위를 잘 맞추고 유순해 보이는 내 겉모습 뒤에 뭐든 다 차지하려는 천박한 욕망을 감추고 있다고 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책을 많이 읽어도 그 천박한 욕망은 다스리지 못할 거라고 했다. 시어머니는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 P126
기차에 오르고 나서야 나는 내가 돌연히 목적지를 바꾼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내 마음은 여전히 니노를 사랑하는마음 때문에 괴로웠고 그렇기 때문에 니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었던 것이다. 여성의 독립에 대한 글을 쓰고 여기저기에이야기하고 다녔는데도, 나는 니노의 육체와 목소리와 지성 없이 살수 없었다. 인정하기는 끔찍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원했다. 나는내 자식보다 니노를 더 사랑했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그를 다시는보지 않을 생각에 나는 고통스럽게 시들어갔다. 교양 있고 자유로운여인은 꽃잎을 잃고 두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은 유부남의 정부인 여인에게서, 유부남의정부인 여인은 광분한 창녀에게서 멀어져갔다. 우리는 모두 다른 방향으로 뿔뿔이 흩날릴 참이었다 - P128
밀라노에 가까워질수록 릴라와 멀어진 지금,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의 기준이 될 사람은 니노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게는스스로 자신의 기준이 될 만한 능력이 없었다. 니노가 없으면 고향동네를 넘어 세계적으로 나의 역량을 뻗어나갈 수 있는 핵심마저 사라져버렸다. 니노가 없는 나는 그저 한 무더기의 쓰레기에 지나지않았다. 나는 지칠 대로 지치고 겁에 질려 마리아로사의 집에 도착했다. - P128
우선 나는 먼지가 쌓이고 지저분하고 잡동사니가 가득한 방을 정리해보려 했다. 나와 아이들을 위한 잠자리를 준비하고 필요한 물품목록을 만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뭔가 정리해보려는의욕을 잃고 말았다. 정신이 산만한 데다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처음 며칠 동안은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니노가 너무나 그리워서 나는 밀라노에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연락을 하고 말았다. 니노는 마리아로사의 전화번호를 물었고 그 후로는 끈질기게전화를 걸어왔다. 니노와의 통화는 언제나 다툼으로 끝났다. 처음 니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너무 기뻤다. 가끔은 못 이기는 척 그의 말을 따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나도 예전에 피렌체에 있을 때 피에트로가 집으로돌아와 그와 같은 지붕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니노에게 숨겼지 않은가‘ - P130
나는 자기모멸감으로 가득 찬 나날을 보냈다. 머리에서 니노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글을 쓰고 책임감 때문에 어쩔수 없이 출장을 떠났다가 어쩔 수 없이 돌아오고 혼자 절망하고 망가져갔다. 나는 릴라가 옳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내 아이들을 잊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었다. 데데와 엘사는 새로운 환경에 빠져들었다. 아이들은 자기들 고모를 잘 몰랐지만 마리아로사가 분출하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동경했다. 산탐브로지오 가에 있는 마리아로사의 집은 항구처럼 붐볐다. 마리아로사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수녀나 친자매 같은 태도로 집에 찾아온 모든 사람을 받아주었다. 지저분하거나 정신병이 있거나범죄를 저질렀거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도 개의치 않았다. 특별히 할일이 없었던 아이들은 늦은 밤까지 호기심 어린 태도로 집안 곳곳을 누볐다. - P131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그때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이제 나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만큼 사랑과 섹스는 비이성적이고잔혹한 것이니까.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그런 니노의 고백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엘레오노라가 임신 7개월이라는 사실은 니노가 나에 대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실수처럼 느껴졌다. 문득 릴라가 떠올랐다. 릴라가 마치 내게 해야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카르멘과 불안한 시선을 주고받던 순간이 생각났다. 안토니오는엘레오노라의 임신을 알고 있었던 걸까. 릴라와 카르멘도 이미 그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릴라는 왜 내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던 걸까. 자기에게 감히 내 고통의 강약을 조절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걸까. - P139
가슴속에서 뭔가 뚝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니노가 불안에 떨면서 엘레오노라가 임신한 덕분에 그녀가 안정을 되찾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와 헤어지기가 더 힘들어졌다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변명을 늘어놓는 동안 나는 너무나 괴로워서 팔짱을 낀채몸을 앞으로 굽혔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말을 할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때 아파트에는 프랑코밖에 없었다. 정신 나간 여자도, 비탄에 빠진 여자도, 노래를 흥얼거리는 여자도, 병든 여자도 없었다. 마리아로사는 내가 니노와 편히 이야기할 수있게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나는 방문을 열고 가냘픈 소리로 피사 대학 시절 내 남자 친구를 불렀다. 프랑코는 즉시 내게달려왔고 나는 손으로 니노를 가리켰다.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말했다. - P139
내가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주 후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그때 마리아로사는 보르도에 일정이 있어 얼마간 집을 비우게 됐다. 떠나기 전에 마리아로사는 나를 따로 불러 프랑코에 대한 이야기를 다소 혼란스럽게 늘어놓았다. 마리아로사는 내게 자기가 없는 동안 프랑코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마리아로사는 프랑코가 몹시 우울한 상태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지금껏 때때로 느낌이왔다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잊어버리곤 했던 일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마리아로사는 프랑코와의 관계에서만큼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듯이 착한 사마리아인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리아로사는 진심으로 프랑코를 사랑했다. 마리아로사는 그의 어머니이자 누나이자연인이었다. 힘들어 보이는 마리아로사의 표정과 야윈 몸은 프랑코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너무 약해져언젠가는 부서져버릴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 P144
밀라노 출판사와 맺은 새로운 계약과 계약을 지키기 위해 써야 할새 책에 대한 고민이며 나폴리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과 니노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았다. 프랑코는 내 문제를 일반화하거나 피상적인 말로 위로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직설적으로 말했다. "니노가 네 자신보다 소중하다면 말이야." 유난히도 멍해 보이던 어느 날 저녁 프랑코가 말했다. 있는 그대로 그를 받아들여 유부남에 애까지 딸린 데다 평생 여기저기 씨를 뿌리고 돌아다니겠지만 말이야. 비열한 인간인 데다 앞으로 얼마나 더 비열한 짓을 저지를지 모르지만 있는 그대로 그를받아들이도록 해. 아! 레나, 레누차・・・ - P145
받아프랑코는 다정스레 속삭이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갑자기웃음을 터뜨리더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프랑코는 암울한 목소리로 자기는 사랑이란 아무런 두려움이나 혐오감 없이 제정신으로돌아올 수 있게 될 때야 비로소 완전히 끝나는 거라고 생각한다고했다. 그러고는 마치 발밑에 바닥이 진짜로 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하고 싶은 것처럼 발을 질질 끌면서 방에서 나갔다. 그 순간 왜 파스콸레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사회적 배경으로 보나 문화적 배경으로 보나 정치적 성향으로 보나 프랑코와 닮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잠시 내 소꿉친구가 그를 집어삼킨 어둠에서 다시 솟아난다면 꼭 지금의 프랑코처럼 걸어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 - P145
어나는 불을 켰다. 베개와 침대 시트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거대한 검붉은 얼룩이프랑코의 발까지 길게 내려왔다. 죽음이란 이토록 혐오스러운 것이다. 여기서는 그저 내가 그토록 속속들이 알고 있던 그 육체가, 한때행복과 생기가 넘치던 그 육체가 그토록 많은 책을 읽고 그토록 많은 경험을 했던 그 육체가 생명력을 잃고 쓰러져 있는 광경에 연민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꼈다고만 해두자. 프랑코는 정치적 소양이 풍부하고 이타적인 취지와 희망을 가졌으며 언제나 정중했던 살아 숨 쉬는 생명체였다. 그랬던 그가 이토록 끔찍한 장면을 연출하게 된 것이었다. 프랑코는 자기 자신과 자신을 감싸고 있는 피부와 감정, 말과 생각 그리고 엉망이 되어버린 주변 세상을 증오했음이 분명했다. - P146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 모든 추억과 언어,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그토록 잔혹한 방식으로 제거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 후 며칠 동안 파스콸레와 카르멘의 어머니 주세피나 아주머니 생각이 났다. 주세피나 아주머니도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했다. 자기 몫으로 남은 보잘것없는 삶의 파편을 견디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주세피나 아주머니만 해도 우리보다 전 세대에 속했다. 프랑코는 달랐다. 그는 나와 동시대를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러한 지친 퇴장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정도가 아니라 나를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메모를생각했다. 그 글은 내게 남긴 것이었다. 프랑코는 아이들이 자신의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바꾸어말하면 나는 방에 들어와도 되고 자신의 모습을 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직도 나는 그가 남긴 중의적 명령에 대해 생각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명확한 명령이었고 다른 하나는 함축적인 명령이었다. - P147
한 무리의 열혈 활동가들이 힘없는 주먹을 쥐고 참석했던 장례식이 끝난 후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코는 존경받는 유명 인사였다) 나는 마리아로사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녀 곁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프랑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리아로사는 내가 다가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리아로사는 갈수록 기력이 쇠해졌다. 병적인 불신의 흔적이 외모에도 영향을 미쳐 생기 넘치던 눈빛마저 흐려졌다. 마리아로사의 집은 서서히 텅 비어갔다. 마리아로사는 이제 나를친동생처럼 대하지 않았고 갈수록 나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 P147
하지만 나는 매일 온갖 어려움에 만신창이가 됐고 마음속 균열은커져만 갔다. 그동안 나폴리의 상황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이도시의 고질병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타소 가는 살기 불편했다. 니노는 내게 하얀색 중고 르노4를 마련해주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차가 마음에 들었지만 초반에는 교통체증 때문에 운전하고 다니기가 어려웠다. 나폴리에서는 수 없이 많은 일상적인 일을 처리하기가피렌체나 제노바, 밀라노에서보다 훨씬 힘들었다. 데데는 수업 첫날부터 담임선생님과 학급 친구들을 증오했고 그새 초등학교 1학년이된 엘사는 매일 붉게 충혈된 눈으로 슬픔에 잠겨 집으로 돌아오곤했다. 엘사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식용나는 두 아이를 야단쳤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려움을 이겨낼 줄도, 자기주장을 관철할 줄도 모르는 데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제대로 못한다고 야단치면서 어떻게 해서든 배워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 P150
엔초는 회사의 최대 주주이자 경영자였다. 하지만 엔초는 릴라를가리키면서 회사의 영혼은 회사의 진짜 영혼은 릴라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로고 좀 봐." 엔초가 말했다. "이것도 릴라가 디자인한 거야." 나는 로고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세로로 그은 획 주위에 소용돌이모양의 무늬가 그 려져 있었다. 로고를 바라보고 있자니 새삼 감정이복받쳐 올랐다. 통제할 수 없는 릴라의 머리에서 나온 새로운 결과물이었다. 나는 지금껏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쳤을까. 나는 예전에 릴라와 즐거웠던 순간이 그리워졌다. 릴라는 뭐든 새로운 것을 배웠다가 익힌 것을 뒤로하고 다시 새로운 것을 배웠다. 절대로 멈추거나 후퇴하지 않았다. 컴퓨터도 마찬가지였다. 34시스템과 5120모델, 베이직과 베이직 사이트 그리고 로고 디자인까지. - P166
모두들 내가 자신들과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모두 넉넉한 마음으로 나를 자신들의 삶에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엔초는 사업이 잘되고 있지만 자신은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특유의 건조한 화법으로 공장을 전전하면서 목격한 일을들려주었다. 엔초는 사람들이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끔찍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더러운 착취의 흔적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가끔 수치심을 느낄 때도 있다고 했다. 릴라는 이른바 업주라 불리는 작자들이 겉보기에만 깔끔한 외형을 갖추기 위해 자신들이 저질러 놓은 쓰레기 같은 짓거리를 보여주었다고 했다. 릴라는 잘 정돈된 회계 장부 뒤에 감추어진 거짓말과속임수와 사기 행각에 대해 비아냥댔다. - P167
카르멘도 이에 지지 않고 정유업계의 비리를 이야기했다. 그 바닥도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카르멘은 파스콸레 이야기를 꺼냈다. 카르멘은 파스콸레가 잘못된 선택을 하기는 했지만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카르멘은 우리의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의 동네를 추억했다. 그날 카르멘은 처음으로 자신과 오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카르멘은 아버지가 자기들에게돈 아킬레가 이끄는 파시스트 일당의 만행을 조목조목 들려주었다고 했다. 카르멘은 아버지가 터널 입구에서 파시스트에게 뭇매를 맞기도 했고 무솔리니의 사진에 입을 맞추라는 강요를 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때 주세페 아저씨는 사진에 입을 맞추는 대신 침을 뱉었는데 그 일 때문에 살해당하거나 다른 공산당원들처럼 행방불명되지 않은 것은 목공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그가 동네에서 꽤 명망이높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사라지면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 P167
파스콸레는 건강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멀끔한 데다 세련된 옷차림 덕분에 겉보기에 외과 의사처럼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몹시 우울한 상태였다. 그의 사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의 감정 상태는 슬프고 슬프고 또 슬펐다. 파스콸레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자신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떠나기 전에 파스콸레는 잠든 조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카들 이름도 몰랐다. 이 말을 하면서 카르멘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쫓아오지 않도록 숨죽여 흐느꼈다. 우리는 모두 파스콸레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이탈리아와 세계 전역을 휩쓸고 있는 피비린내 나는 혼란에 혐오감을 느꼈다. 하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는 파스콸레가 우리와 똑같다고 믿었다. 신문에서 떠들어대는 수많은 끔찍한 일 가운데 그가 실제로저지른 일이 무엇이든 우리는 결코 파스콸레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각각 컴퓨터, 주유소, 라틴어와 그리스어, 책에 파묻혀 각자 - P168
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결코 파스콸레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 그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카르멘이었다. 카르멘은 나나 릴라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말했다. 릴라는 말을 아꼈고 엔초는 고개만끄덕이는 정도였다. - P169
릴라로 말하자면 릴라는 성공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다. 미켈레는 오래전부터 그런 릴라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엘리사가 릴라에게 그토록 적대적인 것은 마르첼로와의 마찰 때문만은 아니었다. 릴라가 또 한 번 솔라라 형제에게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실컷 우려먹은 후 혼자서 잘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베이직 사이트 덕분에 릴라는 날이 갈수록 변화에 발 빠르고 이재에 밝다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릴라는 어려서부터 상대방의 머리와가슴속의 혼란을 끄집어내 잘 정돈해주었다. 만약 상대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반대로 생각을 더 혼란스럽게 해 결국에는 상대방을 비참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특출난 소녀였다. 그런데 이제는그 정도가 아니었다. 릴라는 새로운 일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상징했다. 아무도 릴라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어찌 됐든 릴라는 이윤을 창출하고 있었다. - P172
하지만 아무리 똑똑한 엔초가누구였던가. 엔초는 릴라에게 종속적인 존재였다. 정말로 사업체를움직이는 것은, 모든 것을 만들고 해체하는 것은 릴라였다. 약간 과장하면 얼마 안 되는 사이 고향사람들은 마르첼로와 미켈레처럼 사는 법을 배우든가 아니면 릴라처럼 사는 법을 배우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내 집착 때문일 수는 있지만 적어도 그 시기에는 릴라와 가까웠거나 여전히 가까운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릴라의 모습이 보였다. 한번은 스테파노를 만났는데 그는 그새 살이 많이 찐 데다 안색이 누리끼리했고 옷차림도 형편없었다. 돈은 말할 것도 없고릴라와결혼했던 시절 젊은 사업가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그런데도 대화를 몇 마디 나누는 동안 나는 스테파노가 릴라와 상당히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다도 마찬가지였다. - P173
마음만 먹으면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도 있었다. 사실 그러고 싶기도 했다. 릴라네 집에 들르거나 전화기만 들면 되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 번은 길을 가다 우연히 릴라와 마주쳤는데 릴라는 마지못해 멈추어 섰다. 릴라는 내가 틀린 전화번호를알려주고 젠나로의 공부를 도와준다고 해놓고 사라져버린 데다 자기는 나와 화해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나는 몸을 사렸기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릴라는 급한 일이 있다면서 내게 사투리로 물었다. "여전히 타소가에서 사는 거야?" "응." "불편할 텐데." "그 대신 바다가 보여." "그 먼 곳에서 바다가 보여봤자 얼마나 보인다고. 푸른색이 조금보일 정도지. 바다를 보려면 가까이에서 봐야지. 그래야 그 바다가쓰레기투성이에 흙탕물같이 더러운 오염된 오줌 물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너희 같은 식자들은 진실보다 거짓을 더 선호하지." - P174
가장 피상적인 내 자아는 릴라가 바쁜 상황에서아이들을 맡아준다고 해도 데데와 엘사를 까탈스럽고 요구사항 많은 인형 취급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릴라가 아이들을 괴롭히고 젠나로의 손에 방치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숨겨진내 다른 자아는 릴라야말로 아이들이 잘 지내도록 최선을 다해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사실 릴라야말로 유일하게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믿는 내 자신이더 싫었다. 뭐든 해결방안을 찾아야 했기에 급한 마음에 결국 릴라에게 연락했다. 내가 몇 번이나 도중에 말을 끊어가면서 빙빙 돌려부탁하자 릴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네 아이들은 내 아이들보다 더 소중해. 언제든 데려와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가져." 나는 언제나처럼 그런 릴라에게 놀랐다. 내가 니노와 함께 떠난다는 말을 했는데도 릴라는 니노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수많은 주의사항을 늘어놓으며 아이들을 맡기러 갔을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1980년 5월 불안감에 지칠 대로지쳤지만 부푼 가슴을 안고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여행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또 한 번 한계를 넘어선 - P176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서양을 날아 내 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할 수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나 흥분해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물론 2주 내내 일정에 쫓긴 데다 경비도 많이 들었다. 내 책을 출간한 여자들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잘 해주려고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런데도 내 개인적인 지출이 꽤 컸다. 니노의 경우에는 비행기 티켓 비용을 돌려받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 적어도 나는 그때처럼 행복했던 적이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가 임신했다고 확신했다. 미국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몸 상태가 조금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니노에게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여행 내내 나는 혼자서 무책임한 만족감을 느끼며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행복감을 음미했다. 아이들을 데리러 갔을 때즈음에는 임신을 완전히 확신했고 너무 기뻐서 그 사실을 릴라에게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포기하고 말았다. - P177
나는 얼버무리며 대답을 피했다. 하지만 그 대화로 기분이 한결좋아졌다. 그날을 기점으로 새로운 시기가 시작된 것 같았다. 나는릴라가 들려준 진짜 아빠와 가짜 아빠 이야기와 과거의 이름과 새로운 이름에 대한 이야기 덕분에 데데와 엘사가 나 때문에 자신들이처하게 된 상황을 받아들이게 됐을 뿐 아니라 흥미롭게 느끼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그때부터 아이들은 기적적으로 제 할머니와 마리아로사 고모를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피렌체에서 돌아올 때마다 아빠와 도리아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툴툴댔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베이비시터인 미렐라를 원수 취급하며 말썽을 피우지도 않았다. 학교와 선생님과 학교 친구들 그리고 나폴리 자체를거부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은 니노가 나와 한 침대에서 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 P183
한마디로 둘 다 온순해졌다. 나는 그런 아이들의 변화에 안도감을느꼈다. 릴라가 내 딸들의 인생에 들어와 딸들과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거슬리기도 했다. 하지만 릴라가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고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보살펴주고 아이들의 불안감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릴라야말로 내가 사랑하는 릴라였다. 때때로 못돼먹은 평소의 릴라에게서 불쑥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하는 또 다른 릴라였다. 갑자기 릴라에게서 받은 모욕감이 희미해졌다. ‘릴라는 못됐어. 언제나 그랬지. 하지만 릴라에게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 그렇기 때문에 힘들어도 릴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거야‘ - P183
"나는 행복한데 내 배 속에 들어 있는 이 녀석은 아닌가봐. 나한테심술이 난 것 같아." 엔초는 릴라의 말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이 녀석이야말로 가장 행복할거야." 릴라는 엔초를 놀렸다. 릴라 말에 따르면 엔초의 진의는 이러했다. "내가 네 배 속에 넣은 아이니 믿어봐. 내가 들어가서 직접 본 바로는 아주 착한 녀석이야. 걱정하지 마." 엔초를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그가 더 좋아지고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원래 릴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는데 릴라가 임신한 후에는자랑거리가 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결과 엔초는 전보다 백 배는 더 열심히 일했다. 또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길에서 자신의동반자를 보이는 위험과 보이지 않는 위험을 막론하고 모든 위험에서 지켜주고 그녀의 모든 욕망을 미리 채워주려는 의지로 불탔다. 엔초는 자기가 직접 나서서 릴라의 임신 소식을 스테파노에게 전했다. 스테파노는 릴라의 임신 소식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P185
잔인하고 직선적인 말이었다. 릴라는 내게 숨기는 것이 많았지만니노와 나의 관계에 대한 반감만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이나쁘지 않았다. 아니, 릴라가 그렇게 확실하게 말해준 것이 다행이었다. 릴라는 결국 내가 차마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을, 그러니까 니노의 반응이야말로 우리 관계가 얼마나 견고한지 가늠해볼 수 있는증거라는 사실을 말해준 셈이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 잠시 후에 카르멘이 아들들과 함께 도착하자 릴라는 카르멘도 우리 대화에 끌어들였다. 그날 오후 우리는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 것같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음모를 꾸미고 계획을세웠다. 카르멘은 미리 화부터 내면서 만약 니노가 못마땅해하면 자기가 직접 가서 몇 마디 해줘야겠다고 했다. 카르멘이 말했다. "너처럼 수준 높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굴욕을 참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내 상황과 내 동거인을 변호했다. - P189
나는 니노를 집에서 쫓아냈다가 다시 받아들였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내 모습을 깨달았다. 나는 니노가 원하는 것이라면 언제나 뭐든지 하는 니노의 몸종이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기위해 너무 나서지 않으려고 애썼다. 니노를 위해 요리하고 그가 벗어놓고 간 더러운 옷을 빨고 학교일에 대한 푸념과 그가 맡은 수많은 일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처갓집의권력과 주변 사람들의 호의 덕분에 니노는 날이 갈수록 많은 일을맡게 되었다. 나는 니노를 언제나 기쁘게 맞이했다. 나는 니노가 엘레오노라 집보다 우리 집에서 더 편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내 집에서 안식을 취하고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바랐다. 일 때문에 항상 지쳐 있는니노가 안쓰러웠다. - P193
걱정이 태산이었는데도 나의 임신 기간은 빠르게 지나갔고릴라의 임신 기간은 한없이 느리게 지나갔다. 우리는 둘 다 똑같이 출산을 기다리면서도 각자 받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종종 깨닫곤 했다. 내가 "벌써 임신 4개월째네"라고 말하면 릴라는 "이제 겨우 4개월이네"라고 말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릴라는 안색도나아지고 얼굴선도 다시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과정은 똑같은데도릴라와 나의 신체 기관은 임신 기간에 따라 반응하는 방식이 전혀달랐다. 내 몸은 임신을 아주 잘 받아들이는 데 비해 릴라의 몸은 무기력한 체념 상태에 가까웠다. 우리를 둘 다 아는 사람들은 빨리 흘러가는 내 시간과 더디게 흘러가는 릴라의 시간에 놀라곤 했다. 어느 일요일 릴라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톨레도 가를 걷던 중질리올라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 일은 꽤나 중요한 사건이었다. 질리올라와의 만남은 내 마음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그날의 만남으로 릴라가 정말로 미켈레의 미친 짓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P207
정말 그랬다. 릴라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변한 것이 하나도없었다. 릴라는 언제나 그랬듯 지금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불안한 영혼의 소유자였고 그 매력은 릴라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임신에 대한 반응이든, 미켈레에게 한 일이든, 미켈레를 제압한 것과 고향에서 권위를 떨치게 된 일까지 릴라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우리가 하는 일보다 밀도 있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래서 릴라의 시간이 더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 P210
나는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고향 동네에 올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릴라와 더 자주 만났다. 이제는 우리 사이에 새로운 균형점이 생겼다. 내가 공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간 수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인지 나는 릴라보다도 내가 더 성숙해졌다고느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제 괴로워하지 않고릴라의 매력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갈수록 릴라를 있는 그대로 내 삶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 시절 나는 헉헉대며 정신없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느라 도시를 가로지를 때도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웠다.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으면카르멘에게 부탁하거나 가끔 알폰소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알폰소는 몇 번이나 전화를 해 내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신뢰하고 무엇보다도 데데와 엘사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릴라였다. 릴라는 항상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고 임신 때문에 지쳐있었다. 날이 갈수록 내 배와 릴라의 배는 확연히 달라졌다. - P211
숨이 막혔다. 잠시 동안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커피 잔이 찻잔 받침 위에서 흔들렸고 식탁 다리가 내 무릎에부딪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릴라도 긴장했는지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순간 의자가 릴라 뒤쪽으로 기울어졌다. 릴라는 의자를 붙잡으려 했지만 동작이 너무 느렸다. 릴라는 구부정한자세로 한쪽 손은 나를 향해 앞쪽으로 뻗었고 다른 한 손은 의자 등받이를 향해 내뻗었다. 어떤 일에 반응을 나타내기 전에 집중할 때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는 동안 건물 아래에서 계속 천둥이 쳤고 지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보이지 않는 바다처럼 벽을 향해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전등이 분홍색 유리 전등갓과 함께 요동치고 있었다. "지진이야!" - P231
나는 릴라를 거칠게 잡아당기고 밀치고 애원하며 밖으로 이끌었다. 우리를 마비시킨 진동에 이어 그보다 더 끔찍하고 치명적인 지진이 뒤따를까봐 두려웠다. 모든 것이 우리 위로 무너져 내릴까봐두려웠다. 나는 릴라를 질책하고릴라에게 애원했다. 배 속에 있는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겁에 질린 고함소리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미쳐 날뛰는 사람들과 갈수록 커지는 아우성이 뒤섞여 도심과 고향 동네의 중심부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뜰로 나오자마자 릴라는 토했고나는 배를 쥐어짜는 듯한 구역질을 애써 참아냈다. 1980년 11월 23일에 발생한 지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파멸과 함께 우리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지진은 일상의 견고함과안정감을 앗아갔고 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라는 확신을 없애버렸다. 익숙한 소리와 행동,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사라졌다. 모든 확신에 의심이 스며들었다. 모든 불운을 예고하는 예언이신빙성을 얻고 사람들은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징조에 불안한 관심을 쏟게 되었다. 통제력을 되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 P233
그때 릴라는 분명 ‘경계의 해체‘라는 표현을 썼다. 릴라가 그 표현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릴라는 힘겹게 그 말의 뜻을 설명했다. 릴라는 내가 ‘경계의 해체‘가 무엇인지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아주기를 바랐다. 릴라는 숨을 헐떡이면서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릴라는 사물과 사람의 경계는 섬세해서 무명실처럼 잘 끊어진다고 말했다. 릴라는 자기는 항상 어떠한사물이나 사람의 경계가 해체되어 그 내용물이 다른 대상 위로 쏟아지는 모습을 봐왔다고 했다. 이질적인 물질이 녹아 서로 합쳐지고뒤섞이는 모습을 목격해 왔다고 했다. 릴라는 평생 삶의 경계가 단단하다고 믿으려고 애써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우리의 삶이 상처나 충격에 내구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 P238
릴라는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과장된 표현을 마구내쏟았다. 릴라 입에서는 사투리가 뒤범벅된 문장이 튀어나오기도했고 어린 시절 다독가다운 표현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릴라는 자기는 절대로 정신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거칠고 고통스럽게 뒤틀린 사물의 본모습 때문에 두려워진다고 했다. 릴라는 사물의 거짓된 모습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잘 정돈됐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마음을 안정시킨다고 했다. 그런 사물의 거짓된모습을 사물의 본모습이 밀쳐내 버리면 자기는 혼란스럽고 끈적거리는 현실의 나락으로 떨어져 감정에 뚜렷한 경계를 그을 수 있는능력을 상실한다고 했다. 촉각이 시각으로, 시각이 후각으로 녹아내린다고 했다. "아! 세상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지금 너도 봤잖아, 레누. 확실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런 건 아무것도 없어." 릴라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신경 쓰지 않으면, 사물의 경계에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응고된 생리 혈과 악성 종양과누런 섬유질이 되어 흘러가버리는거라고 말했다. - P239
릴라는 한참 동안 말을 이었다. 그날 릴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내게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설명해주었다. 이제부터 하는 말은 릴라가 한 말을 지금 내 나름대로 요약한것이다. "이제껏 나는 그런 힘든 순간이 일종의 성장통처럼 스쳐가는 건줄 알았어. 예전에 내가 말한 터진 구리 냄비 이야기를 기억해? 솔 - P239
라라 형제가 우리에게 총을 쐈던 1958년 섣달 그믐날 밤을 기억해? 그날 나는 총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 아니었어. 내가 두려웠던 건불꽃 색깔이 너무 예리해 보였기 때문이었어. 특히 녹색과 보라색이 너무나도 날카로워 보였어. 그 불빛에 난도질당할 것 같았어. 폭죽이 지나가면서 남긴 비행운이 물건을 가는 데 쓰는 줄처럼 리노를 쓸고 지나가 리노의 살이 찢어져 그 안에서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리노의 다른 모습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어. 그 순간 바로 원래 몸속으로 그것을 집어넣지 않으면 그것이 덤벼들어 나를 해칠 것만 같았어. 레누, 나는 평생 그런 순간에 저항해왔어. 마르첼로가 두려우면스테파노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보호했고 스테파노가 두려우면 미켈레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보호했어. 미켈레가 두려우면 니노를 이용해서, 니노가 두려우면 엔초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보호해왔어. 사실 보호라는 말 한마디로는 부족해. 내가 몸을 감추기 위해 지금껏 꾸며낸 크고 작은 일을 네게 일일이 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거야. 결국은 하나도 소용이 없었지만. - P240
이스키아 섬에서 내가 얼마나 밤하늘을 두려워했었는지 기억해? 너희들은 모두 밤하늘이 아름답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달걀 껍질과 흰자 속에 갇힌 녹색빛이 감도는 상한 노른자 맛이 입 안에 느껴지는 것 같았어. 깨져서속이 드러나 보이는 삶은 달걀말이야. 입 속에 독이 든 달걀 같은 별을 머금은 느낌이었어. 고무 같은 질감의 하얀 별빛이 새까만 아교같은 밤하늘과 함께 이빨에 쩍쩍 들러붙는 것 같았어. 구역질을 참으면서 그걸 잘게 부수면 입 속에서 모래알 부서지는 느낌이 났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제대로 설명하는 건가? 이스키아 - P240
섬에서 한창 사랑에 빠져 행복했었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 그래봤자 소용없었던 거야. 내 머리는 언제나 틈새를 찾아내거든. 사방팔방에서 현실 너머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곳이 보이는 틈새를 찾아내고 말지. 예를 들면 브루노의 공장에서 일할 때 동물 뼈를 손가락으로 스치기만 해도 거기서 악취 나는 골수가 흘러나오곤 했어. 그때 나는 너무 혐오스러워서 내가 병들었다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나는 그때 정말 병들었던 것일까? 정말 심잡음 증세가 있었나? 아니 내 유일한문제는 항상 불안한 마음이었어. 나는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해. 항상 무엇인가를 하거나 다시 시작하지. 진실을 감추기도 하고 밝혀내기도 하고 뭐든 튼튼하게 만들었다가 갑자기 파괴하거나 부서뜨려버리지. - P241
알폰소만 해도 그래. 알폰소는 어렸을 때부터 나를 불안하게 했어. 그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는 무명실이 끊어질 것만 같았거든. 미켈레는 또 어떻고.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굴지만 경계를 구성하는 선을 찾아내 당기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하하하. 그래. 나는 그의 실을 끊어버렸어. 그러고는 알폰소의 실과 엉클어 놓았지. 사내의 물질을 다른 사내의 물질 속에 뒤섞어 놓은 거야. 낮에 짜놓은 직물이 밤새 풀려버린 거야. 내 머리가 그렇게 만들어놓은거지. 하지만 그래도 소용없어.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거든. 두려움은 정상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있는 틈 속에 언제나 존재해. 그곳에서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레누. 언제나 그럴 거라고 의심해 왔었는데 오늘 저녁 확신을 가지게 됐어. 네 배 속에 있는 생명체도 오래갈 것 같지만 그러 - P241
지 못할 거야. ‘내가 스테파노와 결혼했을 때를 기억해? 동네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싶어 했던 것을 기억해? 과거의 추악한 일이 더는 반복되지 않게하고 싶었어. 좋은 것만 남기고 싶었지. 하지만 그 상태가 얼마나갔지? 좋은 감정은 연약한 거야. 내게는 사랑조차 오래가지 못해. 남자에 대한 사랑도 자식에 대한 사랑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구멍이 나버려. 구멍을 들여다보면 선의로 형성된 성운이 악의로 형성된 성운과 뒤섞이는 것이 보이지. 젠나로를 보면 죄책감이 들어. 배 속에 있는 이 작은 것은 나를 베고 할퀴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존재야. 사랑은 언제나 증오를 동반해. 나는 선의에 집중할 수가 없어. 그럴 능력이 없어. 다올리비에로 선생님이 옳았어. 나라는 사람은 못 돼먹었어. 우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지. 너는 정말 친절해, 레누. 항상 인내심을 가지고 나를 대해주었지. 하지만 오늘 저녁 나는 확실히 깨달았어. 어디건용매 작용을 하는 것이 있어. 굳이 지진이 나지 않아도 따스한 열로 서서히 모든 것을 파괴하지. 그러니 부탁이야. 나 때문에 기분이상하거나 내가 안 좋은 말을 하면 귀를 막아버려. 내가 하고 싶어서그러는 게 아니야. 제발 부탁이니 지금 나를 떠나지 말아줘. 네가 떠나버리면 나는 추락하고 말 거야." - P242
가끔 경미한 여진이 다시 느껴지기도 했다. 자동차 안에서 공포에 질려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배 속에서 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릴라의 배를만져보니 릴라의 아이도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면 아래에서 흐르는 화염의 바다도 용광로처럼 일렁이는 별빛도 행성도 우주도 암흑 속의 빛과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 속의 침묵까지도나는 여전히 릴라가 겁에 질려 쏟아낸 파도 같은 말을 떠올리며생각에 잠겼다. 두려움은 내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용암도, 모든 것을 녹여버리고 지구 내부에서 흐르는 상상 속의 불타는 강물마저도 나를 두렵게 하지 못했다. 모든 두려움은 내 머릿속에서 정돈된 문장과 조화로운 이미지로 정리되어 나폴리의 길처럼 까만돌로포장된 도로가 되었다. 그 도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나였다. - P243
한마디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공부든 책이든프랑코는 피에트로는 아이들이든 니노든 지진이든 그 무엇이 내게부딪혀 올지라도 결국 다 지나갈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늘어나는나의 수많은 자아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터였다. 나는 연필심이 원을 그리는 동안 움직이지 않는 컴퍼스의 고정된 축이었다. 그런 나에 비해 릴라는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야그런 사실에 확신이 생겼고 뿌듯했다. 그 덕분에 침착할 수 있었고릴라가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릴라는 도무지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릴라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믿음도 없었다. - P243
나는 릴라가 지진이 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릴라는 지진으로 인한 충격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것이 아니었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한 기준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릴라에게 지진에 대해 말했다. 릴라가 자기 통제력을 찾아갈수록 이탈리아 남부 전체를 휩쓸고간 파멸과 죽음의 흔적이 뚜렷해졌다. 릴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민망해하지 않고도 지진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나는 그제야 안심했다. 하지만 뭐라고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흔적이아직도 릴라에게 남아 있었다. 릴라의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졌고목소리에서도 불안감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지진에 대한 기억은 오래갔다. 나폴리는 지진의 기억을 간직했다. 안개처럼 희뿌연 숨결 같은 더위만이 굼뜨고 거친 도시의 생명과 육체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 P246
릴라는 솔라라 형제의 불법거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릴라는 컴퓨터에 입력하기 위해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그들의 사업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릴라는 그들이 마약으로 벌어들이는수입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첼로가 릴라를 증오하고 내 동생 엘리사가 릴라를 미워하는 것이다. 릴라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릴라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이유는 생물이든 사물이든 상관없이 모든 것에 대한 순수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릴리는 니노의 악행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릴라가 멀리서 내게 말하는 것같았다. ‘그만둬. 그 자식이 자기 가족만 챙겨서 안전한 곳으로 도망간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잖아. 네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말이야.‘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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