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피에트로는 나를 위로해주지 않았다. 그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다시 책과 씨름했다. 몇 주가 지난 다음에야 피에트로는 내게 그동안 사복 차림을 한경찰이 두어 번 자기를 찾아와 몇몇 학생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보를물었다고 했다. 처음에 피에트로는 이들을 예의 바르게 맞이했지만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은 채 예의 바르게 돌려보냈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이 두 번째로 피에트로를 찾아왔을 때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학생들이 범죄를 저질렀나요?" "아직은 아니죠."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학생들인데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죠?" 피에트로는 예의를 갖추어 최대한 노골적으로 경멸감을 드러내며 경찰들을 문까지 바래다주었다. - P501
몇 달 동안 릴라는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나는 릴라가 필요했지만 내가 먼저 릴라에게 연락하지는 않았다.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나는 마리아로사와 가깝게 지내려했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장애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그새 프랑코가 나의 시누이 집에 아예 눌러앉았다. 피에트로는 내가 자기 누나와 너무 가까워지는 것도 싫어했고 내 옛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내가 밀라노에 있는 마리아로사의 집에 하루 이상 머무르면 피에트로는 기분 나빠했다. 상상속의 증상이 도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프랑코도 내가 찾아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이들이시끄럽게 재잘거리는 소리를 견딜 수 없어했다. 그 무렵 프랑코는정기적인 치료를 위해 병원을 방문할 때 빼고는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우리가 갈 때면 가끔 아무 말 없이 집에서 사라져 마리아로사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 P502
마리아로사는 마리아로사대로 너무 바빴다. 그녀는 항상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마리아로사의 집은 일종의 집회소 같았다. 여성 지식인에서부터 중산층 기혼녀, 폭력을 휘두르는 동거인을 피해 도망친 여성 노동자, 가출소녀까지 가리지 않고 집에 들였다. 그러다보니 내게 신경 쓸 여유가 거의 없었다. 만인의 친구 같은 마리아로사의 태도를 보면 우리 관계가 과연 특별한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아로사의 집에 머무르다보면 며칠 동안이나마 공부하고싶은 욕망이 되살아났다. 가끔은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게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P502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모임이있는 날이면 프랑코는 외출하거나 자기 방에 틀어박혀 아예 나오지않았기 때문에 집 안에는 여자들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여자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여성의 모든 행동과생각과 논의와 꿈을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결국은 그 무엇도 우리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심오한 통찰은 정신력이 가장 약한 여성들을 지치게 했다. 이들은 과도한 자아성찰을 견디지 못하고 여성해방을 달성하려면 그저 남성을 자신의 삶에서 내쫓기만 하면 된다, 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요동치는 불안정한 시기였다. 우리들 대부분은 평온하지만 무미건조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워 극단적인 명제에 매달렸다. 파도의 물마루에 모여 두려움과 분노로 가득 차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 P503
모든 것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요동치는 불안정한 시기였다. 우리들 대부분은 평온하지만 무미건조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워 극단적인 명제에 매달렸다. 파도의 물마루에 모여 두려움과 분노로 가득 차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급진 좌익 단체 ‘로타 콘티누아‘가 분리주의 여성운동 시위대를공격하라는 지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우리는 너무나 실망했다. 우리 가운데 가장 극성스러운 참가자 중에는 마리아로사의 집에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격렬한 말싸움을 벌이고 마리아로사와 관계를 단절하는 사람도 생겼다. 마리아로사는 프랑코의 존재를 먼저 알리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런 상황이 싫었다. 건설적인 자극을 받고 싶었지 갈등을원한 것이 아니었다. 연구를 위한 가정을 세우고 싶은 것이지 독단적인 교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가끔 마리아로사에게 이런 내 의견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마리아로사는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 P503
"내 생각에는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같아. 그때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나를 변화시키려는 프랑코의욕망이 사실은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것을 깨닫지 못했어. 그는 내가 다른 사람이기를 원했던 거야.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단순히 여자를 원한 게 아니었어. 자기가 만약 여자라면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여성을 원했던거야. 프랑코에게 나는 자신을 여성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어. 여성성을 취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고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던 거야. 자신이 남성으로서뿐 아니라여성으로서도 완벽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존재였던 거야. 지금은 내가 자신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때 나는 정확히 이런 말을 했고 마리아로사는 진심으로 관심을보였다. 평소에 모든 사람에게 관심 있는 척하는 태도와는 달랐다. "지금 한 이야기를 글로 한번 써봐." - P504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리아로사의 칭찬에 기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다소 황망히 피에트로와의 관계에 대해 몇 마디 덧붙였다. 나는 그가 자꾸만 내게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려 한다고 했다. 마리아로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지했던 분위기가 변했다. 프랑코와 피에트로를 비교하는 거야? 지금 농담해?" 마리아로사가 말했다. "남성성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워하는 아이인데 자신의 여성적인감성을 네게 강요할 만한 힘이 어디 있어? 비밀 하나 알려줄까? 나는 네가 피에트로와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줄 알았어. 결혼한다 해도일년이 못 되어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어.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조심할 거라고 생각했어. 아직도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보면 기적 같아. 불쌍한 레누.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 P505
나는 성숙이란 결국 삶의 굴곡을 호들갑 떨지 않고 있는 그대로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상적인 삶과 이론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변화를 기다리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데데는 이미 읽고쓰기가능숙한 상태에서 남들보다 조금 먼저 초등학교 입학했다. 엘사는 아침 내내 조용한 집에서 나를 독차지하게 되자 너무 기뻐했다. 남편은 대학가에서 가장 고리타분한 교수인데도 드디어 두 번째저서의 집필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번 책은 첫 번째 책보다 학술적으로 더 중요한 저서가 될 것 같았다. - P506
나는 아이로타 부인이었다. 엘레나 아이로타 나는 그동안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생활 때문에 비탄에 잠겨 있었지만 이제는 시누이에게 고무되어, 그리고 나 스스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막아보고자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여성상을 주제로 고대사와 현대사를 넘나드는 연구를 남몰래 시작했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리아로사와 시어머니, 지인들에게 뭔가를 하고 있다고말할 수 있는 명분을 찾으려고 했을 뿐이었다. 나는 내 이론을 성경의 아담과 이브의 창조에서 시작해 대니얼 디포의 플랜더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톨스토이의 카레니나, 프랑스 유행잡지 최신 유행』, 마르셀 뒤샹의 로즈 세라비뿐 아니라 그이후의 시대까지 밀어붙여서 이 모든 것을 바탕으로 놀라운 사실을밝혀냈다. 나는 서서히 만족감을 느꼈다. 어디에서든 남성에 의해 - P506
주조된 꼭두각시 같은 여성상의 흔적이 보였다. 진정 여성적인 것은 없었다. 조금이나마 뭔가 나타날 만하면 이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남성들이 여성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쓰였다. 피에트로는 직장에 가고 데데는 학교에 가고 엘사는 내 책상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놀고 있을 때면 그제야 나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함축된 의미를 파헤치며 살아 있음을 느꼈다. 가끔은 릴라와 내가 함께 중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교까지 졸업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 빠지곤 했다.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찰떡궁합을 자랑하면서 학교에 다녔으면 어땠을까. 우리는 정말 완벽한 짝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서로의 지성을 합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각자 이해한 내용과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기뻐했을 텐데, 함께 글도 쓰고 공동저자로 이름을 알리고 서로의 존재에 힘을 얻고 그 누구도 감히 우리 둘만의 것을 흉내 내지 못하도록 함께 싸웠을 것이다. - P507
여성의 고독은 슬픈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름의 문화나 전통을 만들어낼 기회도 없이 그런 식으로 자기 인생에서 상대방을 쫓아내버리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때면 생각이 중간에서 멈추는 것 같았다. 그 생각은 매력적이지만 결함이 많아서 당장 확인이 필요하고 더 발전시켜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 생각에 자신감도 믿음도 없었다. 그럴 때면 다시 릴라에게 전화해서 내 생각을 말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내 생각 좀 들어봐. 같이 이야기하자. 네 의견을 말해줘. 지난번네가 해줬던 알폰소 이야기를 기억해?‘ 하지만 이제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 P507
우리는 십수 년 전부터 이미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어느 날이었다.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들렸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피에트로가 데데를 데리고 점심식사를하러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책과 공책을 덮었다. 데데는 벌써거실로 뛰어들었고 엘사는 그런 언니를 반갑게 맞았다. 데데는 배가많이 고픈 것이다. ‘엄마, 오늘 점심은 뭐예요?‘ 나는 데데가 이렇게 말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가방을 미처 내려놓기도 전에 데데가 외쳤다. "아빠 친구가 왔어요. 우리랑 함께 점심을 먹는대요." 나는 아직도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1976년 3월 9일이었다. 나는 기분이 가라앉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데가 내 손을 잡고 복도 쪽으로 이끌었다. 모르는 사람이 집에 왔다는 언니의 말에 엘사는 벌써 조심스럽게 내 치마에 꼭 달라붙었다. - P508
니노는 정말 박학다식했다.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그랬다. 그는모든 일에 호기심을 가졌다. 니노가 장자크 루소와 버나드 쇼 이야기를 꺼내기에 나도 끼어들어 내 의견을 말했다. 니노는 내 이야기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아이들이 튀김을 더 달라면서 나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내 신경이 날카로워지자 니노는 식당 주인에게 튀김을 한 접시 더 준비해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니노가 피에트로에게 말했다. "엘레나에게 시간을 더 마련해줘야 해." "지금도 하루 온종일 마음껏 시간을 쓰고 있는걸." "농담이 아니야. 엘레나를 배려하지 않는 것은 인류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죄악이야." "죄악이라니?" "지성을 허비하는 죄악이지. 육아와 가사에 온 힘을 쏟도록 강요함으로써 여성의 지성을 억압하는 사회는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격이야. 다만 이를 깨닫지 못할 뿐이지." - P518
"지금 내 남편은 내게 진정한 열정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순간 침묵이 흘렀다. 니노가 물었다. "정말 그래?" 나는 니노에게 잘 모르겠다고 충동적으로 대답해버렸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수치심과 분노심에 말하는 내내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튀김은 그만들 먹어."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감정이 아이들을 향한 말에 묻어 나왔다. 니노가 나를 위해 나섰다.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아저씨는 하나만 더 먹을게. 엄마도, 아빠도 하나씩만 더 먹을거야. 너희들은 두 개씩 더 먹자.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란다." - P519
가끔은 피에트로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다. 피에트로는 나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경솔하거나 논리가 빈약하거나바보같은 글을 쓰지 않게 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백과사전 같은 그의 지식 때문에 주눅 들고 싶지는않았다. 그때 나는 특히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창조와 두 번째 창조에 집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 두 사건을 순서대로 배치했다. 나는 첫 번째 창조인 아담의 창조를 신의 창조 행위의 종합체로두 번째 창조인 이브의 창조를 이보다 더 확장된 이야기로 간주했다. 나는 이를 바탕으로 꽤나 생생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글을 쓰면서도 내 글이 경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 글의 요지는 대충 이러했다. - P521
형과 여성형을 만들어낸다. 어떻게 만들었냐고? 신은 먼저 흙으로Ish‘ 의 형태를 만든 다음 콧구멍으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런 다음 가공되지 않은 원자재 상태가 아니라 이미 형상을 갖추고생명을 얻은 남성을 재료로 Ishah, 즉 여성을 만든다. 신은 남성의옆구리에서 여성을 취한 다음 즉시 살로 상처를 아물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Ish는 여성을 두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모든 창조물과는 달리 나와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내 살의 살이며 내 뼈의 뼈다. 신께서 나로부터 만드신 것이다. 내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다음 그녀를 내 몸에서 뽑아내신 것이다. 나는 Ish이고 그녀는 Isah‘h이다. 여자를 부르는 명칭에서부터 그녀가 신성한 영혼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나에게서 유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여자는 내 어근에붙은 접미사일 뿐이며 오직 내 언어 속에서만 스스로를 표현할 수있다." - P522
나는 엘레오노라가 니노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생각하고 싶었다. 그녀는 격정적으로 살아가는 니노의 삶에서 작은조각 가운데 하나일 뿐 그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니노는그녀에게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제 갈길을 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마음이 편해졌다. 특히 내 팔찌를 알아봤다는 뜻으로 니노가 내 손목에 잠시 손을 갖다 대며 살짝 쓰다듬었을 때는 더 그랬다. 피에트로에게 그동안 나를 위한 시간을 조금마련해주었느냐고 놀리듯 묻고 나서 나에게 작업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 P529
했지만 결국에는 솔라라 집안사람들의 돈과 다를바 없이 불법적인거래나 파괴 행위를 통해 얻은 것이다. 이 중에서 몇 푼 안 되는 돈은우리 아버지의 팁이 되어 내 교육비에 보탬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더러운 돈과 깨끗한 돈의 경계는 어디일까. 엘레오노라가 피렌체의 무더위 속에서 하루 종일 마음껏 뿌린 돈은 과연 얼마나 깨끗할까. 내가 선물로 받아 집으로 가져가는 이 물건들을 사기 위해 사용된 수표가 미켈레가 릴라의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표와다를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나는 아이들과 오후 내내 선물받은 옷을 입고 거울에 비춰보며 시간을 보냈다. 다 맵시 있고 화사한 고급 제품이었다. 그중에 40년대스타일의 톤 다운된 적색 드레스가 있었는데 내게 특히 잘 어울렸다. 그 옷을 입은 내 모습을 니노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 P536
세상일은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내 자아가 내 안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가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자 유일하게 투쟁할만한 가치가 있는 내 육신 속으로 한없이 꺼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내 이성과 혼란을 목격했던 피에트로가 등 뒤로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자 나는 안도했다. 그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입술이 키스로 얼얼하다는 것을 알아챌 것만 같았다. 지난밤 일 때문에 피곤하다는 것을 눈치챌 것만 같았다. 불에 덴 것처럼 민감하기 그지없는 내 몸 상태를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혼자 남게 되자 나는 다시는 니노를 보지도 못하고 연락도 할 수없을 것이라고 또 한 번 확신했다. 이와 동시에 다른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제는 피에트로와 함께 살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와같은 침대를 쓸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 P559
그래도 나는 낙담하지 않았다. 기분이 너무 고조되어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고통받고 내가 그들에게서 공격당하고 치욕을 겪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힘겨운 과정을 겪으면서 드디어 내가 만족할 만한 그 무엇인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는 지금 고통받고 있는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엘레오노라는 결국 사랑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떠나려는 사람에게 남아달라는 말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피에트로는 이론상으로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이를 받아들이고 지혜로 승화해 관용을 실행에 옮길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 P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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