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폴리에 다시 정착한 것은 1979년이었다. 1976년 10월부터 1979년 나폴리로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릴라와 자주 연락하는일을 되도록 피했다. 쉽지는 않았다. 릴라는 언제든 억지로라도 내인생에 끼어들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런 릴라를 무시하기도하고 참기도 하고 견뎌보기도 했다. 릴라는 가장 힘든 순간 내 곁에있어주고 싶은 것처럼 행동했지만 나는 나를 경멸하던 릴라의 태도를 잊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릴라가 내게 퍼부었던 모욕적인 말 때문에상처받은 것은 아니었다. 릴라에게 전화로 나와 니노의 관계를 이야기했을 때 릴라는 내게 바보 멍청이라면서 악을 썼다. 그때까지 릴라가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은 한 번도,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말 때문에만 상처받은 것이었다면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을 가라앉혔을 것이다. 내가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릴라 입에서 데데와 엘사 이름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릴라는 아이들 생각을 하라고 나를 질책했었다. 그때는 릴라의 말을 흘려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릴라의 말이 심각하게 느껴졌고 자주 뇌리에 맴돌았다. 이때껏 릴라는 한 번도 데데나 엘사에게 관심 - P15

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아이들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가끔 통화하다 내가 아이들이 재치 있게 했던 말을 들려주려고 하면릴라는 내 말을 싹둑 자르고 화제를 돌렸다. 마르첼로 집에서 데데와 엘사를 처음 봤을 때도 릴라는 아이들을 건성으로 흘낏 바라보고성의 없이 몇 마디 했을 뿐이었다. 내 딸들이 얼마나 예쁜 옷을 잘 차려 입고 머리를 단정히 빗고 나이가 어린데도 의사 표현을 잘하는지에 대해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이들이었는데 말이다. 릴라의 평생 친구인 내가 낳아 키운 내 몸의 일부 같은 아이들이었는데도 말이다. 릴라는 내게 조금이라도 엄마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어야 했다. 나에 대한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예의상으로라도 그렇게 했어야했다. - P16

하지만 릴라는 가벼운 농담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랬던 릴라가 지금에 와서 내 아이들을 기억해내고 내가 엄마로서 최악이라고 나를 비난하는 것이다. 내가 내 한 몸행복하자고 아이들을 불행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 니노를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에 질투심에 사로잡힌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는 릴라는스테파노를 떠났을 때 젠나로 생각을 했었던가. 공장에서 일해야 한다는 이유로 젠나로를 이웃집에 내버려둘 때 젠나로 생각을 했었던가. 물건 버리듯 젠나로를 내게 보냈을 때 젠나로 생각을 했었던가.
물론 나에게도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히 나는 릴라보다는 좋은 엄마였다. - P16

나는 습관처럼 그런 생각에 빠지곤 했다. 데데와 엘사를 위해 특별히 해준 것도 없으면서 잔인한 말 한마디로 릴라는 데데와 엘사의권리를 지켜주는 변호사가 된 것 같았다. 그 후 내 일에 바빠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할 때마다 나는 릴라가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것은 우울한 마음이 만들어낸 속삭임일 뿐이었다. 사실나는 아직도 릴라가 나를 엄마로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말을 해줄 사람은 릴라밖에 없다. 그러려면 릴라가 정말로 길고긴 이 언어의 사슬에 손을 대야 한다. 교묘한 솜씨로 빠진 사슬을 끼워 넣고 필요 없는 사슬은 슬쩍 빼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원하는 것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어야 한다. - P17

주어야 한다.
나는 진정 릴라가 내 이야기에 끼어들기를 바란다. 우리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나는 릴라가 그렇게 해주기를 간절히원해왔다. 하지만 릴라가 정말로 내 이야기에 끼어들었는지 확인하러면 우선 이 이야기의 끝에 도달해야 한다. 지금 당장 확인하려 한다면 시작하자마자 막힐 것이다.
글을 너무 오래 쓴 탓에 피곤하다. 몇 년 동안 계속된 혼란과 크고작은 사건, 변화하는 감정 속에서 이야기의 가닥을 유지하기가 점점버거워진다. 릴라와 릴라에게 얽힌 복잡한 일을 회상하다보면 자꾸만 내 이야기를 건너뛰게 된다. 그보다 심한 경우 쉽게 써내려갈 수있다는 이유만으로 내 이야기만 늘어놓게 된다.
이제 이 갈림길에서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 첫 번째 길로 갈 수는 없다. - P18

우리 관계의 성격상 나를 통해야만 릴라에게 닿을 수 있으므로 나를 이 이야기에서 제외한다면 릴라의 흔적은 갈수록 찾기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두 번째 길로 갈 수도 없다. 내가 내이야기나 자세히 늘어놓는 것이야말로 분명 릴라가 원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릴라는 말할 것이다.
‘그래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줘. 나 같은 사람의 인생에 누가 관심을 가지겠어. 사실 너부터 그렇잖아. 솔직히 말해봐.‘
릴라는 이렇게 결론지을 것이다.
‘내 이야기는 낙서 위에 덧쓴 낙서일 뿐이야. 네 책에 적합하지 않아. 그러니 나를 내버려둬, 레누. 사람들은 소멸에 관한 이야기 같은것은 하지 않아‘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에도 릴라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몸을 숨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을받아들여야 하나. 나이가 들수록 릴라를 잘 모르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나.
오늘 아침 나는 피곤함을 이겨내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우리둘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적어도 이 글에서만큼은 나와 릴라 사이의 균형을 찾고 싶다. 평생나 자신과의 관계에서조차 찾지 못했던 균형을 말이다. - P18

내게 몽펠리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와 별다를 바가 없다. 호텔과 니노가 참석한 학회가 열렸던 거대한 강당 이외에 지금 내 눈앞에 떠오르는 장면은 바람이 세차게 불던 가을 전경과 새하얀 구름 위에 몸을 기댄 푸른 하늘뿐이다. 그런데도 내게 몽펠리에라는 지명은 여러 가지 이유로 도피의 상징처럼각인되었다.
그전에도 프랑코와 함께 파리에 가느라 이탈리아를 떠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내 과감함에 짜릿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나의 세계는 아직 고향 동네와 나폴리에 국한되었고 앞으로도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고향 동네나 나폴리가아닌 다른 장소에 있을 때면 잠시 소풍을 나온 것 같았다. 일상에서벗어났다는 생각 때문에 평소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 P19

몽펠리에는 파리보다 짜릿함은 덜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나아가기존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내 영역이 확장된 것 같았다. 몽펠리에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고향 동네와 나폴리,
피사와 피렌체와 밀라노, 아니 이탈리아 전체가 드넓은 세상 속 작은 조각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조각에 만족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몽펠리에에 가서야 내 비좁은 시야와 지금껏 말하고써온 내 언어의 한계를 실감했다. 나는 32세의 나이에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몽펠리에에서 확실히 깨달았다.
니노와의 사랑으로 충만했던 며칠 동안 나는 생전 처음으로 그동안 나를 옭아맨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태생에 대한속박, 학문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속박, 살아오면서 내가 내린 수 - P20

많은 선택, 그중에서도 결혼이라는 선택 때문에 생긴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나는 내 첫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되었을때 왜 그토록 기뻤는지 알았다. 해외에서는 큰 반향이 없었다는 소식에 왜 그토록 속상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껏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가치가 국경을 넘어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는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멋진일이었다. 몽펠리에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릴라가 평생 나폴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 릴라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 릴라는 나폴리를 떠나기는커녕 산 조반니 아 테두초로 거처를 옮기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나는 선택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어쨌든 결과적으로 릴라는 항상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어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릴라가 나폴리를 떠나지 않은 이유가 단순히 사고의 한계 때문이라는생각이 들었다. 나는 릴라가 나를 비난했을 때와 똑같은 논리를 릴라에게 적용해보았다. - P20

우리는 긴 여행을 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가끔 비가 오기도 했다. 주변 풍경은 두텁게 녹이 슨 것처럼 창백했지만 가끔 하늘이 열리면 빗방울은 물론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눈부시게 빛났다. 나는여행하는 내내 니노 곁에 꼭 붙어 있었다. 가끔 그의 어깨에 기대어잠이 들곤 했다. 또다시 내 한계를 뛰어넘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차 안에 퍼지는 낯선 언어의 울림도 좋았다. 내 책이 마리아로사 덕분에 이탈리아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먼저 출간된다는 것도, 우리가바로 그 책을 향해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좋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내겐 정말 경이로운 일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곧 출간될 내 책은 속도와 궤도를 예측할 수 없는 돌멩이 같았다. 어린 시절 릴라와 함께 사내아이 무리를 향해 던졌던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돌멩이 같았다 - P30

내게는 일상의 소소한 일을 자연스럽게 공적인 사유의 소재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매일 즉흥적으로 내 사적인 경험을 소재삼아 모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세계의 빈곤과 비참한 환경, 분노에 찬 남성과 여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카르멘 이야기도 했다. 카르멘과 오빠파스콸레와의 유대 관계, 파스콸레가 저질렀을 리 없는 폭력 행위에대한 카르멘의 변명을 이야기했다. 나는 청중 앞에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어머니를 비롯한 고향 동네 여자들에게서 가정생활과 모성애, 남성을 받들며 사는 삶의 가장 비참한 면모를 봐왔다고 했다.
나는 여자들이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 때문에 다른 여자나 자기가낳은 자식들에게까지 어떤 파렴치한 짓을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 P64

나는 얼마 전 솔라라 구둣가게에서 30분 남짓 시간을 보낼 때 일어난 일에서 많은 소재를 얻었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 지나고 나서였다. 아마 그 무렵 릴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아서였던 것같다. 청중 앞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그렇게 많았는데도 왠지 모르게나는 한 번도 우리 둘의 우정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릴라는 자기 자신과 유년 시절 친구들의 거친 욕망의 바닷속으로 나를 잡아끌기는 했어도 그로 인해 내가 목격한 광경의 의미를 해석할 능력은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우리 우정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같다.
예컨대 릴라도 내가 알폰소를 보자마자 알아챈 것을 알았을까.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을까.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릴라는 동네의 흙탕물 속에 가라앉았고 그곳에 안주했다. 반면,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시절, 나에게는 혼돈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그속에서 어떠한 법칙을 구분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느꼈다.  - P65

그러한 확신은 내가 쓴 짧은 책이 다소 성공함으로써 더욱 확고해졌다. 그 덕분에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있었다. 말이나 글을 이치에 맞게 할 수 있으면 실제 상황도 그렇게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생각했다.
‘부부도, 가정도, 문화라는 이름의 틀도, 모든 사회 민주주의적 합의도 결국은 다 무너지는 거야.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은 격렬하게, 지금까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를 취하려 하지. 나와니노, 내 아이들과 그의 아이들, 노동 계급의 패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무엇보다도 예측할 수 없는 주체인 여성과 나 자신도 말이야.‘
나는 매일 저녁 총체적인 분열과 새로운 재구성이라는 매혹적인생각에 내 상황을 대입하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프랑스 일정을 소화하는 도중 때때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데데와 엘사와 통화할 때면 아이들은언제나 내 질문에 "네, 아니요"라는 단답형으로 대답하거나 노래의후렴구처럼 "엄마, 언제 와요?"라고 묻곤 했다. - P66

물론 나는 저항했다. 화가나서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려는 생각을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피렌체든 밀라노든 나폴리든 상관 없었다. 단 일 분이라도 아이들을 시댁에 더 머무르지 않게 할 수있다면 어디든 괜찮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나는 계속해서출발을 미뤘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 예컨대 니노가전화하면 나는 참지 못하고 그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게다가 이제는 이탈리아에서도 내 책이 작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시작했다. 주요 언론사 측에는 무시당했지만 나름대로 독자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책과 관련된 행사에 나갈 때는 일부러 거기에서 니노와 만날 일을 만들었기 때문에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 P93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은 매번 힘들었다. 나를 원망하는 듯한 아이들의 시선이 온몸에 느껴져 괴로웠다. 하지만 기차에 올라 책을 읽고 공식 석상에서 할 토론을 준비하고 니노와 해후할 상상을 하면어느새 마음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끓어올랐다. 얼마 지나지않아나는 내가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느끼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상태가 내 삶의 피할 수 없는 새로운 규율이 된 것 같았다.
제노바로 돌아갈 때면 나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데데와 엘사는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집을 편하게 생각했다. 내가 없어도 아이들은 그곳에서 학교도 다니고 친구들도 있는 데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할 수 있었다.
일단 제노바를 떠나고 나면 아이들에 대한 나의 죄책감은 그저 귀찮은 장애물 같았고 자연스럽게 희미해졌다.  - P93

나는 그런 내 감정 변화 때문에 비참했다. 약간의 명성과 니노를 향한 사랑 때문에 데데와 엘사를 등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굴욕적이었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받을지 생각해봐."
릴라의 말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비문이 되어 나를 불행으로 이끌었다. 여행이 잦다보니 잠자리가 자주 바뀌어서 제대로 자지 못할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어머니가 내게 퍼부었던 악담이 생각났다.
어머니의 말이 릴라의 말과 한데 뒤섞였다. 평생 동전의 양면 같던어머니와 릴라가 그럴 때면 동일인물처럼 느껴졌다. 둘 다 내 새로운 삶에 적대적이었다. 둘 다 내 새로운 삶과는 관계가 없었다. 나는한편으로는 드디어 내가 독립적인 개체가 된 것 같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로웠다. 나 홀로 속수무책의 상태로 난관에 봉착한 것 같았다. - P94

나는 마리아로사와 다시 가깝게 지내려고 했다. 시누이는 언제나처럼 호의적이었다. 그녀는 밀라노의 한 서점에서 나를 위한 독자토론회를 기획해주었다. 행사 참가자들은 주로 여성이었다. 그날 나는 성향이 완전히 다른 두 그룹의 참가자들에게 거센 비난을 받기도하고 격찬을 듣기도 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마리아로사가 무게있게 중재에 나서주었다.
그날 나는 찬성과 반대 의견을 요약해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는데 의외로 재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다. "제가 의도한 바는 그게 아니에요"라고 내가 말하면 사람들은 내 말을 꽤나설득력 있게 받아들였다. 행사가 끝날 즈음에는 참석자 모두에게, 특히 마리아로사에게 칭찬을 받았다. - P94

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삶인가. 우리 몸은 폭발이 일어나 수많은파편으로 조각난 것처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그로 인해 밀라노에는 미르코가, 제노바에는 내 딸들이, 나폴리에는 알베르티노가있게 된 것이다. 나는 참지 못하고 실비아, 마리아로사, 프랑코와 함께 환멸에 빠진 논리학자 같은 태도로 이러한 흩어짐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실 나는 내 전 남자 친구가 언제나처럼 대화를 주도하기를바랐다. 현재를 정리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현란한 논증법으로 우리를 안심시켜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날 프랑코는 의외의 태도를 보였다.
‘프랑코는 ‘객관적으로‘ 혁명적이었던 시대의 종말이 가까이 다가왔다고 했다. 프랑코는 ‘객관적‘이라는 수사를 냉소적으로 사용했다. 혁명의 종말과 함께 지금껏 나침반 역할을 하던 모든 계급이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 P95

무엇이 데데와 엘사에게 이롭고 무엇이 해로울까. 내게 이로운 일과해로운 일은 무엇이며 그것은 내 딸들에게 이로운 일과 해로운 일과일치할까 아니면 그렇지 않을까. 그날 밤 내 마음속에서 니노는 주변부로 밀려나고릴라가 다시 등장했다. 릴라는 어머니의 도움 없이혼자 힘으로 내 마음을 차지했다. 나는 릴라와 싸우고 싶은 욕구를느꼈다. 릴라에게 악을 쓰고 싶었다.
"그렇게 잔소리만 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책임지고 말해보란 말이야!"
나는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나는 제노바로 돌아가 시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밑도 끝도 없이 데데와 엘사에게 물었다.
"얘들아. 요즘 엄마가 너무 바쁘단다. 며칠 후면 또다시 떠나야하고 그 후로도 마찬가지일 거야. 엄마와 함께 갈래, 아니면 여기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있을래?"
이런 질문을 한 것에 대해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처음에는 데데가 다음에는 엘사가 입을 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랑 있을래요. 그 대신 돌아올 때 꼭 선물 사다주세요" - P98

쓴 10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책이 얼마지나지 않아 독일어와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10년 전에 출간됐던 내 첫 소설도 재조명을 받았고 나는 다시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과 얼굴은 나름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나는 한때 그랬던 것처럼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 꽤나 공신력 있는 사람들이 내게 호기심을 가졌고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결정적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것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게 호의적이었던 밀라노 출판사의 편집장이 털어놓은 내 책의출간과 관련된 일화 덕분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그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출판계에서의 내 미래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내심 이번 기회에 니노의 에세이집 출간을 제안해보려는 속셈도 있었다. 그날 저녁 편집장은 내게 시어머니가 지난해 크리스마스 즈음 내 책이출간되는 것을 막으려고 출판사에 압력을 넣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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