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로사의 자극적인 발언과 행사에서 만난 마리아로사 친구들의 초대 덕분에 예전에 시어머니가 내게 준 여성문제에 관한 소책자들을 다시 꺼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책자는 책 무더기 아래깔려 있었다. 나는 그 책자를 가방에 넣고 밖으로 나가 늦겨울 잿빛하늘 아래에서 바깥공기를 마시면서 책자를 읽었다. 나는 호기심을자극하는 제목에 이끌려 「헤겔에게 침을 뱉어라」라는 글부터 읽기시작했다. 글을 읽는 동안 엘사는 유모차에서 곤히 잠들었고 앙증맞은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울 모자를 쓴 데데는 자기 인형과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글에 사용된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에서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나는 수많은 문장에 힘주어 줄을 긋고 느낌표로 표시하고 문단 옆에 세로로 획을 그었다. - P393
헤겔에게 침을 뱉는 것은 남성 중심 문화에 침을 뱉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레닌에게 침을 뱉는 행위다. 유물론적 역사관과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과 남근 선망 사상에 침을 뱉는 것이며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도에 침을 뱉는 것이다. 나치즘과 스탈리니즘과 테러리즘에 침을 뱉는 것이다. 전쟁과 계급투쟁과 무산계급 독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침을 뱉는 것이다. 평등이라는 이름의 함정과 모든 가부장적 문화의 징후와 제도적 형태에 침을 뱉는 것이다. 여성의 지성이 허비되는 것을 막고 사회에서 남성 중심적인 문화의특성을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부장적인 문화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먼저 모성이라는개념을 없애야 한다. 그 누구에게도 아이를 낳아주어서는 안 된다. - P393
주인-노예 변증법 따위는 집어치우자. 머릿속에서 열등감을 깡그리 없애야 한다. 여성의 자아를 되찾아야 한다. 여성은 남성의 안티테제가 아니다. 여성의 ‘다름‘을 인정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한다. 대학은 여성을 해방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 억압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관문이다. 이는 현명하지 않은 일이다. 남성의 영역이 우주까지 확장되는 데 비해 지구상에서 여성의 삶은 아직 시작하지도않았다. 여성은 지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여성은 예측할 수 없는 주체다. 동시대,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부터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 P394
글의 저자는 카를라 론치였다.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여자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그동안 나는 수많은 책을 읽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껏 나는 그 힘든 과정을 견뎌냈을 뿐 책에서 습득한 지식을 제대로사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책에 쓰인 내용에 대해 한 번도 반문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생각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사유란 이런 것이다. 그렇게나 노력했지만 나는 제대로 생각할 줄도 모른다. 마리아로사도 마찬가지다. 마리아로사는 다독가인 데다 내용을솜씨 좋게 재구성해 그럴싸하게 소개하는 능력은 뛰어나다. 하지만그것뿐이다. 릴라는 다르다. 릴라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있다. 공부만계속했다면 릴라도 이 책의 저자처럼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은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즈음 어떤 책을 읽어도 이런저런 생각 끝에 결국에는 릴라가 떠올랐다. - P394
머릿속에 이상적인 여성상을 만들어냈는데 그 여성상은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면릴라에게서 내가 느껴왔던 것과 똑같은 열등감과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책을 읽을 때도 나는 릴라를 생각했다. 릴라의 삶에서 단편적인 사건을 떠올리고 릴라가 공감했을 법한 문장과싫어했을 법한 문장을 생각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 유의 책을 읽고 나면 책의 내용에 고무받아 자주 마리아로사의 친구들 모임에 합류했지만 막상 단체의 구성원들과 섞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데데는 끊임없이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징징댔고 엘사는 시도 때도 없이기쁨의 환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내가 힘들었던 것은 아이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곳에 모인 여자들이 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내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때문이었다. 토론은 대부분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조악하게요약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그때마다 나는 지루함을 느꼈다. - P395
요약하는 것나는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미 잘 알고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구태여 여성으로서 자의식을 찾는 데 힘들게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사회 계층과 연령에 상관없이 남자의 본성은 다 똑같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두가 듣는앞에서 피에트로나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에 대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에 동화되기 위해서 의식을 남성화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나처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그런 모임 때마다 생성되는 미묘한 긴장감이나 질투, 인정받기 위해서 일부러 권위주의적인 말투를 쓰거나 비굴하게 가녀린 목소리를 내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 P395
나는 여자들이 자칫 불쾌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대립하는 것이 좋았다. 상대방에게 동의를 표하다가 이야기가 가십거리로 흐르는 것은 싫었다. 그런 식의 대화법은 어린 시절부터 능숙했다. 그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갈급함이 좋았다. 나는 한 번도 그런 갈급함을 느껴본 적이없었다. 아마도 타고난 성향 때문일 수도 있었다. 모임 중에 나는 그런 갈급함을 표출할 만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릴라와는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꼬일 대로 꼬인 우리의 복잡한 관계를 약간의 여지도 용납하지 않고 확실하게 되짚어보고 싶었다. 지금껏 침묵해온 것을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 실패작에 대해 말하다 릴라가 예기치 않게 울음을 터뜨린 일부터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좋을 것 같았다. - P396
각했다. 하지만 적임나는 먼저 내 자신을 이해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여성성을탐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너무 과하게 애를 썼다. 남성의 능력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뭐든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뭐든 다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실 정치나 투쟁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남자들에게잘 보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남자들보다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는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수준의 기준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비이성적인 남성의 이성? 유행하는 표현을 외우려고나는 얼마나 노력했던가.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 사고방식과 언어는 지금까지 내가 받은 교육에 의해 형성되었다. 남보다 뛰어나게되려고 나는 나 자신과 어떤 비밀스런 협상을 맺었던가. 배우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제 와서 배운 것 가운데 무엇을 잊으려 애써야 하나. 게다가 나는 릴라와 닮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살아왔다. - P397
나는 자꾸만 내 자신을 릴라와 일치시키려 했다. 릴라에게서 분리되려고 할 때마다 불구가 되는 것 같았다. 릴라가 없으면 생각조차제대로 할 수 없었다. 릴라 없이는 내 생각에 확신이 생기지 않았고어떠한 그림도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릴라와 분리된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 했다. 해답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물론 다시 글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실은 나에게는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저 해야 하는 과제를 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글쓰기마저 그만두어야 하나. 뭐든 다른 일을 찾아야 하나. 어머니 말처럼 사모님 노릇이나 하면서 살아야 하나. 식구들만 돌보면서. 그도 아니면 가정과 아이들과 남편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팽겨쳐야하나. - P398
피에트로는 제대로 쉬지 못해 신경이 날카로웠던 걸까. 아니면 지금껏 수많은 책과 예의범절 교육 뒤에 본성을 숨기고 있었던 걸까. 나는 다시 한번 내가 그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피에트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었다. 피에트로가 아르노 강에뛰어들었는지, 피렌체 어디선가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지 아니면어머니 품에 안겨 징징대며 위로받기 위해 제노바로 떠났는지 알 수없었다. ‘이제 그만‘ 나는 두려웠다.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이나 책에서 읽은 내용이 내 삶에서 그다지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아이가 둘인 마당에 경솔한 태도는 금물이었다. 피에트로는 새벽 5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니 너무나 안심이 되어 나는 그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피에트로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나를사랑하지 않아. 단 한번도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 그는 덧붙였다. "어찌 됐든 당신은 내게 과분해." - P400
실은 피에트로는 이미 자신의 일상 구석구석에 침투해버린 혼란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삶이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규칙적인 일과에 따라 진행되기를 바랐다. 공부를 하고, 강의를하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섹스를 하고, 매일 혼란스러운 이탈리아사회문제를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서 해결하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기를 바랐다. 그런 그의 소망과는 달리 피에트로는 매일 대학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시달렸다. 해외에서는 나날이 명성이 높아졌지만 동료 교수들은 그의 글을 평가절하했다. 그는 자신이 항상 무시당하고 위협받고있다고 생각했다. 내 불안한 성격 때문에 (불안한 성격이라니. 나처럼 무던한 여자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 가정이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 P401
새로운 방문객의 등장에 실비아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는 서둘러 엘사를 품에 꼭 껴안고 엘사에게 가볍게입을 맞추며 한쪽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는 동안 지난날 스테파노가 릴라에게 저질렀던 만행과 실비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상했던 장면이 함께 떠올랐다. 릴라와 실비아의 이야기가 공포에 질린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느껴졌다. 불현듯 나는 데데를 찾아 나섰다. 데데는 미르코와 함께 복도에서인형을 가지고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자기들은 엄마 아빠 역할을, 인형에게는 아이 역할을 시킨 듯했다. 그런데 평온한 일상이 아니라 부부싸움을 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서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데데가 미르코에게 지침을 내리고 있었다. "이제 내 뺨을 때려봐. 알았지?" 풋풋한 어린 생명체가 나이 든 생명체를 장난삼아 흉내 내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모두 똑같이 사랑과 증오와 욕망과 폭력이라는 짐을 지고 무대에 오르는 그림자 인형일 뿐이었다. 나는 데데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피에트로와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미르코는 니노와 똑같았다. - P411
"리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거예요." 나는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 엔초의 모습도 혼란스러웠다. 엔초는 릴라에 대한 자신의 헌신적인 사랑을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표현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특별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스스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피에트로와는 달랐다. 나는 피에트로가 나를 칭찬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나는 그저 자기 딸자식들의 어머니일 뿐이었다. 피에트로는 내가 제대로 교육을 받았음에도 나에게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있는 능력이 없기를 바랐다. 내가 읽는 책, 나의 관심사, 나의 이야기를 무시함으로써 내게 굴욕감을 주었다. 그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나 스스로 끊임없이 내 무능함을 증명해야만 할 것 같았다. - P421
비아냥대는 릴라의 목소리와 무례할 정도로 뭐든 하찮게 취급하는 말투는 엔초가 들려준 이야기를 별일 아닌 것처럼 만들었다. 그바람에 그 무렵 내가 읽고 있던 책과 피렌체 여성들, 마리아로사에게 배운 용어들 그리고 나 스스로 해답을 찾으려 애쓰던 문제들을릴라와 함께 논의할 기회도 사라져버렸다. 릴라에게 기본적인 개념만 알려주면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 됐어. ‘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내 일을, 너는 네 일을 하는 거야. 성장하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해. 내일모레면 이제 서른 살이 될 텐데 그렇게 동네 뜰에서 소꿉장난이나 하고 있으라고. 이제 나도 신경 쓰지 않을 테야. 나는 해변에나 가야겠어? 그리고 나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 P432
나는 어떻게 해서든 내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애쓰는 데 반해 릴라는 스스로에게조차 자기감정을 감추려 애쓰는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릴라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 모든 것을 명확하게 밝히려는 내 욕망에끌어들이려 하면 할수록 릴라는 자꾸만 그늘 속으로 몸을 숨기려 했다. 숲속 너머로 몸을 숨겨 나뭇가지로 얼굴을 가린 보름달 같았다. 나는 9월 초에 피렌체로 돌아갔다. 하지만 릴라에 대한 좋지 않은생각은 흐려지기는커녕 갈수록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피에트로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그는 나와 아이들이 돌아온 것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다. 원고 마감이 늦은 데다 학기가 시작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걸핏하면 화를 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식사를 하다가 데데와 젠나로가 별것 아닌 일로 싸우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동작이 어찌나 거칠었던지 부엌문 유리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 P441
릴라는 상상력이 뛰어나고 용감무쌍하니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릴라는 거사를 치른 후에 찬란한 승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위대한 업적으로 찬양받는 혁명지도자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때가 되면 릴라는 내게 말할 것이다. ‘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지.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등장인물로 삼고 실제 피를 잉크삼아 현실을 소설로 만들어냈어." 밤이 되면 수많은 상상이 실제로 일어났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릴라가 걱정됐다. 혼란에 빠진 다른 수많은 사람처럼 릴라가 쫓기고 있는 모습이나 부상을 당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그런 릴라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릴라가 부럽기도 했다. 어린 시절 릴라가 놀라운 일을 해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굳은믿음이 점점 확고해졌다. 나는 나폴리에서 도망쳐 나온 것을 후회했다. 릴라에게서 멀어진 것을 후회했다. 다시 릴라 곁으로 돌아가야할 것만 같았다. - P445
릴라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릴라는 왜 내게 묻지도 않고 혼자 그런 선택을 한 걸까. 내가 그 정도 수준도 안 된다고 생각한 걸까. 나도 자본주의나 착취,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 릴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데, 릴라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나 자신이 불행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머니이자유부녀인 현재 나 자신의 상황에 불만이 가득 차 침대에 누워 괴로워했다. 죽을 때까지 부엌데기처럼 매일 똑같은 집안일을 하고 침대에서 부부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시들어갈 거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아침이 오면 정신이 맑아져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나는 치밀하게주변 사람들의 증오심을 자극하다 점점 더 폭력적인 일에 연루되어가는 변덕스러운 릴라의 모습을 상상했다. 릴라는 원래 과감한 면이있었다. 한번 마음먹으면 정당한 이유를 가진 자 특유의 관대한 잔혹함으로 결연하게 일을 밀어붙였다. - P446
하지만 나는 생각만 할 뿐 실제로 릴라에게 전화하지는 않았다. 릴라도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전화로만 서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우리 관계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끈을 놓지는 않았지만 우리 관계는 갈수록 예전만 못했다. 우리는서로에게 추상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릴라를컴퓨터 전문가인 동시에 완강하고 인정사정없는 도시의 게릴라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릴라는 릴라대로 나를 전형적으로 성공한 지식인이자 머릿속에는 온통 아이들과 책 생각밖에 없고 학구적인 남편과 해박한 대화나나누는 교양 있고 부유한 사모님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생각하고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실체감을 회복해야 했지만 너무나멀어져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 P447
뭐라고 반박해야 하나, 대화를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때도 이렇게 말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경험해볼 게 뭐 있겠니, 엘리사. 내겐 빤히 보여, 마르첼로는 네몸을 취하고 네 육체에 익숙해지면 너를 버릴 거야." 하지만 막상 입에 담기에는 너무 구닥다리 표현 같았다. 어머니도그 정도로는 말을 못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나는 집을 떠났고 엘리사는 남았다. 내가 나폴리에 있었다면 나는어떻게 됐을까.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보면 나부터도 어린 시절 솔라라 형제를 좋아하지 않았나. 나폴리를 떠난 대신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내 여동생의 신세를 망치지 않기 위한 현명한 조언조차 못하고 있지 않나. - P461
한참을 오가던 공허한 대화와 거친 바다에 이는 파도를 따라 떠밀리듯 들려오던 목소리가 한순간 멈췄다. 릴라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깡말랐지만 강단 있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굽 낮은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도 평소보다 키가 커보였다. 입가와 눈가에는 주름이 깊게 파였지만 얼굴은 하였고 이마와 광대뼈 주위 피부는 팽팽했다. 머리는 포니테일로 묶었는데 귓불이 거의 없는 귀 위로 새치가 보였다. 나를 보자마자 릴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너무 놀라서 미소에 응답하지도 릴라에게 인사를 하지도 못했다. 그때 우리는 둘 다 서른이었는데 릴라는 나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고나보다 더 지쳐 보였다. - P468
이 연극의 연출자는 대체 누구인가. 각기 다른 목적을 갖고 있는이 사람들을 도대체 누가 한자리에 모아놓은 걸까. 물론 표면적으로는 엘리사가 나선 것이지만 엘리사 뒤에 누가 있는 걸까. 마르첼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르첼로는 대부분 미켈레의 말을 따른다. 미켈레는 내 옆에 앉아서 속편하게 먹고 마시면서 자기 부인과 자식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심술궂은 눈빛으로 릴라에게 이끌리는 듯한 내 남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켈레는 대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곳이 솔라라 집안의 영토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아무리 도망쳐봤자 나도결국에는 그곳에, 그들에게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의 감정과 말과 관습을 총동원해서 내게 뭐든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걸까.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걸까. 자신은 필요에 따라 아름다운것을 추하게 만들 수도 있고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다는것을 보여주려는 걸까. - P470
미켈레는 주위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리나의 머릿속에는 살아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죠. 그건 엄청나게 강해서 어디로 튀어 나갈지 알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어요. 의사들에게도 보이지 않죠. 내 생각에는리나 자신도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으면서 말이지요. 리나는 그 존재에 대해서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지금도 저 못된 표정을 좀 보세요. 리나의 머릿속에 있는 그것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문제를 일으키지만 일단 마음을 먹으면 정말 놀라운 일을 해내죠. 나는 오래전부터 리나의 재능을 사고 싶었어요. 그래요, 말 그대로 사고 싶었어요. 나쁠 것도 없잖아요. 진주나 다이아몬드를 사는 것처럼 사고 싶었던 거지요. 불행히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이제 드디어 첫걸음을 내디뎠고 오늘 밤 그 작은 도약을 축하하고싶군요. 나는 여기 체룰로 부인을 아체라에 세운 데이터 프로세싱센터장으로 채용했어요. 엄청나게 현대적인 시설이죠. 레누, 너와 교수님이 관심 있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보여줄게. 꼭 내일이 아니더라도 떠나기 전에 말이야. 어때, 리나?" - P476
하지만 일은 지루해. 처음에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느려서 많은 시간을 허비해. 빨리 새 기계가 도착했으면 좋겠어. 새 기계는 속도가 훨씬 빠르대. 아니야. 차라리 이대로가 좋을지도 몰라. 속도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거든. 사진이 흔들릴 때처럼 말이야. 알폰소가 했던 말인데, 알폰소는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흔들리게 나왔다고 웃으면서 말했어. 그래서 윤곽이 모호하다고 말이야. 요즘들어 알폰소는 내게 친한 척해 나랑 친해지고 싶대, 복사지로 베낀 것처럼 나랑 똑같아지고 싶대. 자기가 여자라면 나처럼 되고 싶대. 그래서 내가 똑바로 말해줬어. ‘여자라니. 너는 사내야, 알폰소 너는 내가 어떤지 몰라. 우리가 아무리 친해도, 네가 아무리 나를 관찰하고 훔쳐보고 흉내 내려 해도 너는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끝까지 모를거야‘라고 말이야. 알폰소는 내 말에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어. 알폰소는 ‘그럼 어떻게 해. 나는 지금 내 모습대로 살아가는 게 너무 괴로워‘라고 했어. - P492
알폰소는 예전부터 미켈레를 사랑했다는 거야. 그래 맞아. 미켈레솔라라 말이야. 미켈레가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자기도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니?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겠어? 우리 몸에 든 게 너무 많아서 몸이 부풀어 오르다가그만 터져버리는 거야. 나는 알폰소에게 말했어. ‘좋아. 그럼 우리 친구가 되자. 하지만 나처럼 진짜 여자가 되겠다는 생각일랑은 버려. 너는 기껏해야 너희사내들의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여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니까. 아무리 나를 따라하고 내 모습과 완벽하게 똑같은 초상화를 그린다 해도내 망할 자아는 내 것이고 네 망할 자아는 네 것이니 말이야‘라고 말이야. - P493
아! 레누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우리는모두 동파된 수도관 같아.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는 머리를 가진다는것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야. 내가 신부복을 입고 찍었던 사진을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 나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싶어. 언젠가 내 몸마저 도식화되어버릴 날이 올 거야. 구멍 뚫린 컴퓨터용 카드가 되어서 나를 다시는 찾지 못할 날이 올 거야." 그게 다였다. 말을 마친 릴라는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복도에서 나눈 대화에서 나는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친밀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우리는 그저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한 짤막한 소식이나 주고받고,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을 쏘아붙이고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제 릴라는 더 이상나에게만 속마음이나 중요한 일을 털어놓지 않았다. 릴라의 인생은릴라의 것일 뿐이었다. 릴라는 누구와도 자기 삶을 공유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 P493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릴라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에 대해 쓰기에는 나에게 정보가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차를 타고 피렌체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발전과 낙후가 혼재하는 나폴리에서 사는 릴라가나보다 말할 거리가 훨씬 많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뭔가대단한 삶을 살고픈 생각에 나폴리를 떠남으로써 나는 얼마나 많은걸 잃었는가. 나와는 달리 나폴리에 머문 릴라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돈도 많이 버는 데다 남들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자기만의계획에 따라 완벽하게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 P494
릴라는 자기 아들을 아낀다. 아이가 어렸을 때 아이를 돌보는 데많은 시간을 바쳤고 지금도 아이에게 정성이다. 하지만 원하면 언제든 아이에게서조차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처럼 자식 일로 불안해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친정 식구들과 연을 끊었다가도필요하면 항상 가족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했다. 불행한 처지에있는 스테파노를 도와주면서도 관계를 회복하지는 않았다. 솔라라형제를 증오하면서도 그들에게 복종했다. 알폰소를 비꼬면서도 그 - P494
와 친했다. 다시는 니노를 보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릴라는 분명 니노와 다시 만날 것이다. 릴라의 삶은 동적인 데 비해 나의 삶은 정적이다. 피에트로가 말없이 운전을 하고 아이들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나는 한참을 릴라와니노에 대해 생각했다. 둘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상상했다. 나는 릴라가 다시 니노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다시 만나 언제나처럼 니노를 조종해 그의 아내와 아들에게서 멀어지게 할 것이다. 결국에는 상대를 알 수 없는 자신의 전쟁에 니노를끌어들여 그의 아내와 이혼하게 만들 것이다. 돈을 빼앗을 만큼 빼앗은 다음에는 미켈레에게서도 빠져나올 것이고 엔초와도 헤어질 것이다. 결국에는 스테파노와도 이혼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니노와 결혼할지도 모르겠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둘이 자신들의 지능을 합할 거라는 사실이다. 그렇게되면 둘이 함께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되겠지. - P495
무엇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어린 시절부터 나를 사로잡았지만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원했다. 그 무엇인가가 뭔지는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물론 그동안 무엇인가가 되기는 했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뚜렷한 대상도, 진정한 열정도, 확실한 야망도 없이 말이다. 릴라는 중요한 사람이 되는데 나만 혼자 뒤처질까봐 무엇인가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뭐라도 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바랐지만 릴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제 나는 다시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오직 나를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릴라에게서 벗어나 성숙한 인격체로서 말이다. - P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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