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다. 말은 인격이다. 고사성어나 전문용어, 어휘를 많이 안다고 ‘사람으로서의 품격‘을 갖췄다 할 수 없다. 그건 그냥 유식하고 교양 있는 거다. 나는 소위 유식하고 교양 있다는 사람들이 인격을 갖추지 못한 경우를 너무많이 봤다. 인격은 기본적인 어휘를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상대에게 어떠한 의도로 쓰는지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사람을 물건이나 상품으로, 사람의 감정이나 마음을도구나 수단으로 취급하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의식조차 못 하는 이가 최악이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씨알머리가 없다. 도사리 같다. 말의 힘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으로 획득된다. 인격은 연출이 불가능하다. - P104

‘세상을 바꾼다 ‘고들 한다. 사회변혁이나 개혁을 의미한다. 나는 멀쩡하니까 세상만 바꾸면 좋아질 것 같은 뉘앙스가 없지 않다. 세상은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사회를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생각이 언어를 바꾸기도 하지만 언어도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어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졌다. 영혼을 베는 말과 일으키는 말,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생각이 언어를 오염시킨다면 언어도 생각을 오염시킬 수 있다." 조지 오웰이 한 말이다. 가격을 매길 수 있는 상품이나 가축 등에 쓸 어휘를 사람에게 쓰지 않는지, 사람이 - P106

하는 일을 도구나 수단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지, 늘 말본새를 점검해야 한다. 많은 속어나 욕설 등이 가축과 관련한 어휘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때는 가축이 흔했고 지금은 물건이 흔하다. 이 대목에서 "존중할 만해야 존중하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악머구리 끓듯 악한과 파렴치한이 적지 않으니 심정이야 이해하나 경계한다. 그 옛날 양반이 백정과 노비에게, 백인이 흑인에게, 남성이 여성에게, 부자가 빈자에게, 어른이 어린이에게 같은 말을 했다. - P107

‘사람에 대한 존중‘은 내가 옳다고 느끼면 옳은 것이라는 식으로 서로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상대주의가 아니라 절대적 가치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우선에 두는 것이 인격이며 인격은 타고 나는 게 아니라 - 타고 나는 것은 인성이다. - 배움과 습관을 통해 갖출 수 있다. 사람을 존중하는자세는 생각보다 훨씬 우리에게 배어 있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적절치 못한 어휘를 쓸 수 있다. 아직 배우지 못했거나 잘못 알아 그렇다. 문제는 다음이다. 모르거나 잘못 아는데 올바로 알려 하지 않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성별이나 출신, 외모, 나이 등을 차별하는 어휘가 아닌 - P107

지도 살펴야 한다. "여자가 할 수 있겠어?", "남자가 그것도못 해?", "뚱뚱해", "키가 작아", "어린 사람이 뭘 알아?", "나이가 있는데 할 수 있겠어요?" 등이 쉽게 떠오른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도 해당한다. "여자가 능력 있어",
"남자치고 세심하네", "가정교육을 잘 받았네", "좋은 대학나와서 스마트해", "예쁘게 생겼어", "키가 크고 날씬해서 뭘입어도 잘 어울려", "젊은 사람이 아주 예의바르고 겸손해",
등등.
"젊게 사시네요", "나이보다 훨씬 건강하고 젊어 보이세요" 등등. - P108

칭찬으로 들리는가? 고정관념에 기준한 수직적 평가다.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칭찬으로 착각하기 쉬운 이런발언은 부모 자식 간에도 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칭찬이랍시고 하면 칭찬이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으로성별이나 외모, 능력 등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고 남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게 된다.
평가가 해악인 이유는 사람을 물건이나 상품, 가축처럼 등급을 매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등급을 왜 매기겠는가? 물건이나 상품, 가축 등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비싼 값에 팔기위해서다. 무엇이 쓸모 있을지 계산하는 것이다. 평가는 필연적으로 차별로 이어진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 ‘관종‘이라는 말로 놀림 받지만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생존과 직결돼 - P108

있다. 그러나 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방법이 앞서의 조건들을 채워야 하는 거라 주장한다면 사람을 수단화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에 대한 존엄이라니, 턱도 없다.
사람을 평가하면서 세를 과시하는 어휘를 쓰지 않도록조심하자. 인간의 도구화를 피할 길 없는 세상이라지만 이것만 지켜도 영혼을 다치는 사람들이 한결 줄어들 것이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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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정언 "에서 ‘나의 세계‘는 사고뿐 아니라 국가와 자연 같은 물리적 환경도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자연 환경은 언어뿐 아니라 미술과 음악, 무용 등 모든 예술에 영향을 주고 같은 작품을 보고도 다른 것을 연상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말했다.
"월트 디즈니의 <판타지아>를 기억하세요? 한 섹션에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음악을 사용했죠. 하지만 디즈니 사람들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음악에 맞춰 공룡들이 쿵쾅거리는 장면을 만들었죠. 디즈니 사람들은 남부 캘리포니 - P86

아에 너무 오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들은북유럽이나 러시아 같은 곳에서 겨울이 지나면 모든 것들이 땅을 뚫고 힘차게 솟아오른다는 것을 잊은 겁니다.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힘찬 소리는 공룡이 땅을 내리찍는 소리가 아니라 자연이 솟아오르는 소리인 거죠." (70체험한 낱말과 체험하지 못한 낱말은 자연이 솟아오르는 소리와 공룡이 땅을 내리찍는 소리만큼이나 간극이 크다. 자신이 몸과 정신으로 체험한 낱말을 사용해야 오해의소지를 줄일 수 있고 자유자재로 문장을 구성할 수 있다.
가끔 멋 부리고 싶어서 체험하지 못한 낱말을 쓸 때가 있는데 여지없이 체하거나 탈나서 뱉어내야 한다.
체험한 낱말의 개수가 살아온 나날만큼 늘 수 있기를바란다. 동시에 체험하고 싶은 낱말을 수집하는 것은 매우설레는 일이다. 우리 십대 시절에 ‘사랑‘이 꼭 그러했던 것처럼. 그런데 당신에게 사랑은 체험한 낱말인가, 체험하고싶은 낱말인가. 체험해서 잘 아는 것인가, 아직 체험하지 못해 잘 모르는 것인가. 세상엔 이처럼 알쏭달쏭한 낱말도 적지 않다. 인간뿐 아니라 낱말 하나도 소우주다. - P87

그렇다 해도 여전히 변함없는 사실 하나. ‘나무가 말을한다.‘는 문장을 예로 든다면 ‘나무‘와 ‘말‘이 어떤 뜻이냐에대해서는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실제로 낱말은 배우고 외워야 한다. 또 ‘말을 한다‘라고 하지, ‘말이 한다‘라거나 ‘한다 말을‘이라고 하지 않는 등의 문법과 형식에 대해서도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이 또한 물리적으로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러나 ‘나무가 말을 한다.‘는 문장이 어떻게 뜻을 가질수 있느냐 묻는다면 이에 대해 가르칠 수 없고 배울 수 없다. 이는 언어적 직관으로 스스로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 언어적 직관이 부족한 사람에게 시적 상상력, 은유, 함축, 의인화 운운해봐야 난해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언어적 직관이 통한다는 의미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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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이 물리적으로 지나치게 빈약한 환경은 사고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떨어뜨린다.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이며 제한적이고 시종 감정적인, 언어로 발화된다.

언어는 나다.
나의 세상은 언어의 한계만큼 작거나 크다.
나, 그리고 대상.
세상은 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나를 제외한 전부가 대상이다.
- P46

대상은 내가될 수 없지만
나는 모든 대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따금 내가 나에게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상의 명명(命名)은 이러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국어사전에 등재된 50만여 개, 세계 최대 백과사전인 브리태니커 전자사전에 등재된 5,500만여 개.
우리는 그 낱말들로 대상과 사물을 가리켜 묘사하거나설명하고, 생각과 느낌 등을 표현해 상호작용하며 성장한다. 0어휘력은 낱말에 대한 지식의 총합을 일컫는다.
달리 말해 세상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것들을 불러내나와 대상에 일어나는 현상을 구조화하며 의식세계를 확대하고 심화하는 재량이다. - P47

‘산말(실감 나도록 꼭 알맞게 표현한 말)‘, ‘산소리(어려운가운데서도 속은 살아서 남에게 굽히지 않으려고 하는 말)‘는 있어도 ‘죽은 말‘, ‘죽은 소리‘는 없다. 대신 ‘거짓말(사실이 아닌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미는 말)‘, ‘신소리 (상대편의 말을 슬쩍 받아 엉뚱한 말로 재치 있게 넘기는 말)‘, ‘허튼소리(함부로 지껄이는 말)‘, ‘헛소리(실속이 없고 미덥지 아니한 말)‘ 등이 있다.
접히고 구겨지고 꼬부라지고 늘어지고 너절해지는 한이 있어도 죽지 않으며 하거나 듣거나 못하거나 많거나 적을 수 있을 뿐이다. 나거나 굳거나 떨어지거나 뜨거나 되거아닐 수 있을 뿐이다. 죽이려 한 권력자는 많았으나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말을 죽일 수는 없다. - P48

사람에게 났으나 사람보다 오래도록 존속하다 깊숙히 묻힐 것이다. 지구에서 태어나 가장 멀리 날아갔다. 얼마나멀리 갔느냐 하면 지구로부터 무려 210억 킬로미터 이상이다. 참고로 지구 한 바퀴는 고작 4만 킬로미터다.
나는 사람들이 꼴보기싫어지거나 사는 게 힘에 부칠때면 보이저 1호를 떠올린다. 지구의 자연과 인류에 대한정보를 담은 ‘골든 레코드‘를 싣고 1977년에 우주로 날아간그는 44 년째 춥고 어둡고 하염없는 고해를 홀로 헤쳐 가고있으며, 2030년이면 지구와의 교신마저 완전히 끊긴다. 그의 목표는 다른 생명체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려면 4만 년을 더 가야 하고 그 즈음이면 지구의 현 인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4만 년 후, 보이저 1호가 다른별의 생명체에 건네는 지구의 골든 레코드, 지구의 말과 글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 P49

다음은 ‘말‘에 대한 관용구했다.
말(을) 내다; 남이 모르고 있던 일을 이야기하여 소문을 내다
말(을) 듣다; 남이 시키는 대로 하다. 꾸지람이나 나무람을 당하다. 기계 따위가 마음대로 잘 다루어지다.
말(을) 못 하다: 말로써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다.
말(이) 굳다; 말할 때 더듬거려 말이 부드럽지 못하다.
말(이) 나다; 남이 모르고 있던 일이 알려지게 되다. 말이 이야깃거리로 나오게 되다.
말(이) 되다; 하는 말이 이치에 맞다. 어떤 일에 대하여서로의 사이에 약속이 이루어지다.
말(이) 떨어지다; 명령이나 승낙 따위의 말이 나오다.
말(이) 뜨다; 말이 술술 나오지 않고 자꾸 막히거나 굼뜨다.
말(이) 많다. 말수가 많다. 수다스럽다. 말썽이 끊이지아니하다.
말(이) 아니다: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지가 매우 딱하다.
- P50

표정으로 떠오른 마음은 진심이었고 그 덕에 나는 한번도 실감한 적 없는 한국어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한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고유의 언어를 가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역사가 깊고 문화적인 나라일 거라 추측했고 종이를 내밀며 "네 이름을 네 나라 글자로 써달라" 하더니 내가 써준 한글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며칠 후 다시 그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또 내게 물었다.
"선경, 너의 나라에도 바다가 있니?"
얼른 바다가 있다고, 삼면이 바다라고 자랑했다.
"멋지구나. 그런데 너의 나라 바다는 무슨 색이니?" - P55

우리나라에선 웬만한 자연 풍경의 색을 ‘푸르다‘로 두루뭉술하게 통칭한다. 하늘도 푸르고, 강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나뭇잎도, 풀도, 산도 푸르다. 눈으로 그것들의 색이 뻔히 다른 걸 보면서도 ‘푸르다‘로 통칭한다. 파란색을 푸르다고도 하지만 연두색도 초록색도 푸르다 하고 물색까지 푸르다 하는 셈이다. ‘빛깔이 밝고 선명하다, 싱싱하다‘는 뜻으로 푸르다고 할 수는 있으나 색깔을 묻는데 하늘도, 강도, 바다도, 나뭇잎도, 풀도, 산도 푸르다 하면 틀린 말은 아니나 옳은 말도 아니며파랑인지 초록인지는 순전히 듣는 사람이 알아서 알아들어야 한다.
나는 대한민국 삼면의 바다 색깔이 모두 다르고 무엇보다 블루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무 살이나 먹고 대한민국삼면의 바다가 없는 독일에서 알아차렸다. 5분도 안 되는사이에 벌어진 이 날의 대화는 내게 중대한 인식의 전환점이었다. 사물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보지 못하 - P57

고 있었다. 남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말과 글의 관성에갇혀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처럼 타성적으로 표현하고있었다.
관성이나 타성은 건성이나 비슷한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반대말은 ‘관심‘ 42이다. 나는 사람이 제일 가지기 45힘든 것이 관심이라 여긴다. 강퍅할 때는 온통 자기만으로가득 차 깃털 한 개조차 꽂을 데 없는 것이 마음이다. 그 안에 다른 무엇을 들이는 게 쉽겠는가. 대수롭지 않은 주변과일상이라면 더욱 데면데면하다. 옆에 있어도 옆에 없고봐도 본 게 아니며 들어도 들은 적 없다. - P58

어휘력은 문장을낱말로, 서술을 명사나 형용사로 줄이는 기술이기도하다. 세상의 사물과 현상은 저마다 명칭을 가졌고 이 장에 소개한 것처럼 소소해 보이는 것들마저가지고 있다. 심지어 사전에 실린 풀이는 평소 말로 풀어서술한 내용보다 두루뭉술하지 않고 명확하다.
맞춤한 낱말을 구사하면 불필요한 곁가지 서술을 줄여효율적일 뿐 아니라 그 낱말을 디딤돌 삼아 하려는 이야기를 자신감 있게, 자유자재로 발전시킬 수 있다. 사람에 대해서는 이름을 안다고 다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사물과 현상은맞춤한 이름을 알면 거의 아는 것이다. 단순히 이름만 아는게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아는 것이다. - P75

앞서 내 동생도 세상에 태어난 지 5년이나 됐는데 내말에 대응하지 못했잖은가. 나 역시 세상 산 지 7년이나 됐어도 중학생과 말다툼을 벌이면 턱없이 밀렸을 것이다. 혹여 이겨도 중학생 언니나 오빠의 분노를 유발해 꿀밤 맞았을지 모른다. 그러면 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을 거다.
울고싶지만 울지 않고, 꿀밤 때리고 싶지만 때리지 않고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감정을 품위 있게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표시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파악하고 최종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아퀴지을 지성을 갖췄다는 뜻이다. 이과정은 언어라는 체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뇌속에 수많은낱말들이 혼잡스럽게 뛰어다니느라 다소 골치 아플 수 있지만 활용 능력치가 커질수록 앞서의 과정을 명확하게 진행시켜 세상살이를 한결 수월하게 만들 수 있다. 언어와 의식은 함께 성장하며 총본산이 문학이고 인문학이다. - P81

어른이라고 올 일 없으랴. 목 놓아 펑펑 울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 저마다 가슴 열어젖히면 눈물이 그득히 쏟아져 온 땅이 물에 잠길 것이다. 그러나 그뿐, 눈물은나를 변화시키지도 상황을 바꾸지도 못한다. 말 안 하면 왜우는지 남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울지 마라, 소리 내 말하라, 글을 쓰라.
그래야 내가 변할 수 있고 상황을 바꿀 수 있다. 내 속을 풀어내는 것도 타인을 설득하는 것도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설령 말 때문에 사달 68 날 위험이크다 해도 결국 말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은 타인과의상호작용에 의해 규정되며 이런 상호작용은 주로 말을 통해 확립된다." 장 폴 사르트르가 한 말이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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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경

세상에 태어나 가장 많이 한 것은 상상, 공상, 망상. 일곱 살 때부터 멈춘 적 없는 것은 책 읽기와 글쓰기, 세상 구경. 그것은 작가가 떠나지 않고 작가를 떠나지 않은 유일한 꿈, 위로, 그리고 감옥이었다.
30년 넘게 매일 글을 쓰고 있으며, 1993년부터 라디오방송에서 글을 썼다. 일주일에 5권 이상 책을 읽는 다독가이기도 하다. 그렇게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사람을만나면서 어휘력 부족이 단순히 국어능력 문제가 아니며 얼마나 일상에 커다란 불편을 가져오는지 깨닫는다.
지금 우리에겐 ‘어른다운‘ 어휘력이 필요하다. 작가는어휘력의 쓸모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 책에 담았다.
<월간 미술>에 유선경의 곁을 보는 시선들‘이라는 글을연재했으며, 또 다른 책으로는 《문득, 묻다》, 《꽃이 없어서 이것으로 대신합니다》, 《소심해서 그렇습니다》,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 등이 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못하는 홍길동이 적지않다. 허균의 홍길동처럼 서자라서가 아니다. 마땅한 어휘를 떠올리지 못해서다.
아버지가 아버지고 형이 형인 것처럼 세상의 대상과사물, 현상 등에는 알맞은 어휘가 있는데 딱 짚어 부르질못 한다. 머릿속에 형체는 있으나 명칭이나 이름이 바로 나오질 않는다. 누가 머릿속 연상을 찍는 카메라는 발명 안하나 싶다. 자신이 느낀 기분이나 감상 등을 표현하고 싶지만 어떻게 옮겨야 할지 갈팡질팡한다. 체온기처럼 기분이나 감상을 감지해 알려주는 기기는 누가 발명 안 하나 싶다. 아직 그런 기기가 없어 대충 이 두 가지 말을 가지고 돌려막는다. - P5

"하! 이놈의 건망증!"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 책은 일 년 전 한모씨가 내게 이렇게 말했을 때 시작되었다.
"낱말이 떠오르지 않는 걸 두고 사람들이 자꾸 나이 들어 생긴 건망증이라고 하는데 저는 건망증이 아니라 어휘력 부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견해가 맞는지 틀리는지 구태여따지지말자. 건망증이라고 하면 외워야 한다 할 것이고 어휘력 부족이라고하면 어휘력을 키우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 P5

대한민국의 어른은 대체로 수능을 치르고 나면 따로어휘를 외운다든가, 어휘력을 키우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매일 보고 듣고 읽고 쓰고 말하는 모국어 아닌가. 그래서일상에서 겪는 불편이 설마 모국어의 어휘력 부족 때문인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가장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불편이 글과 말귀가 어두워지는 것이다. 학습 능력은 둘째치고 소통에 상당한 불편을 겪는다.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과 말귀 못 알아듣게 말하는 사람이 만나 말해봐야 복장 터질 일밖에 없다. 어휘력이 부족해서일 뿐인데 ‘그 인간 문제있다‘로 비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 물론 어휘력과 인격은 밀접하게 연관돼있다. 이 경우 어휘력 ‘부족‘보다 ‘잘못‘에 가깝다.
일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자신의이런생각과 감정, 느낌 등을 표현하는 데 자신감을 잃는다.  - P6

어휘로 생각하고 정리해 표현하지 않는 게 일상이되면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자기가 파악할 줄 모른다. 자신(自身)의 생각에 대해서 자신(自信)이 없다. 간혹 성격에 따라 미운 일곱살처럼 공격적이 되는 수도 있다.
어휘력은 말발 센 게 아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어휘를 마음대로 부리어 쓸 수 있는 능력‘이라고 풀이하는데 그러려면 낱말을 양적으로 ‘많이‘ 아는 것이 필요하긴해도 낱말에 대해 ‘잘‘ 알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이 더 - P6

효과적이다. 여기서 ‘잘‘이란 다른 낱말과 함께 배치했을 때의미나 어감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섬세하게 파악한다는 뜻이다.
뒤집어 얘기해서 어떤 말이나 글의 의미나 어감을 쉽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눈치‘가 부족하다기보다 ‘어휘력‘
이 부족한 탓이 크다. 말인즉슨 맞는데 묘하게 거슬리는 말도 ‘인간미‘가 부족하다기보다 ‘어휘력‘이 부족해서일 수 있다. 어휘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힘이자 대상과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며 어휘력을 키운다는 것은 이러한힘과 시각을 기르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말이 상대의 감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야 ‘어른‘다운 어휘력이다. 이 책의 제목을 《어른의 어휘력》으로 삼은 배경이다. - P7

"책을 읽고 싶어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아서 읽기 힘들어."

초등학생이라면 영락없이 책 읽기 싫어 둘러대는 핑계라 하겠지만 10여년전부터 친구들에게 꾸준히 듣고 있는말이다.
마흔 넘으면 ‘내가 왜이럴까‘ 싶은 게 도대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변화라곤 나이 먹은 거밖에 없으니 부정적인변화의 원인을 나이 탓으로 모집었다.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나중에 기억나지 않는 것도 나이 먹어 그런 거라 무감하게 대꾸했다. 책을 펼치고 딴생각으로 빠지기는 모든 세대에 공통이나 중년에 접어들면 딴생각의범위가 광활해진 의무와 책임만큼이나 공활해진다. 나이탓이 영 허튼소리는 아니다.
그렇게 10여 년 살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내게 확실하게벌어질 일은 ‘더 나이 먹고 늙어 죽는 것뿐이라는 진실을깨우쳤다. 속절없는 나이 타령만 하다간 될 일도 안 되겠다017 - P17

싶기도 했다. 안 되는 일을 죄다 나이에 책임을 떠넘기는스스로가 좀 뻔뻔한 듯도 싶었다. 10년 전에 책 읽기 힘들다던 친구는 서서히 책 읽기를 포기하고 있고, 내가 제사날로 찾은 원인은 이러했다.

"어휘력이 부족해서 그래."

친구는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대학나와 30여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휘력 부족이라는 소견‘ 따위나 듣다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휘력이 부족하면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고, 내용을 이해하기 힘드니까 책장이 넘어가질않고, 책장이 넘어가질 않으니까 졸린다.  - P18

원시인류는 사냥, 수렵, 채집 등으로 먹을거리를 구하고 맹수 등의 공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하고 관찰하고 경계해야했다. 눈 두 개가 가운데 몰려 있어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데 적합하지 않으니 고개나 몸의 방향을 쉴 새 없이 바꿔가며 두리번거렸으리라. 
그 초원이 오늘날에는 인터넷에 있다. 눈 두개가 가운데 몰려 있어 휴대전화의 좁은 화면을 보는 데 적합하니 고개와 몸의 방향은 절로 고정된다. 먹잇감을 찾아 손가락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눈동자가 두 발인 양 쫓아간다. 그때는 실재였고 현재는 가상이지만 뇌는 실재와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며, 인간의 뇌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우 산만하다.
인류는 먹고 사는 데 노력을 소진하느라 책 읽는 데 쓸노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책과 무관하게 살았으며 현재도 대체로 그러하다.  - P20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는 지금 이 순간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한다. 담을 수 있을 만큼만 담을 수 있는 그릇과 같다. 자신의 그릇이 작아 상대의 말을 제대로 주워 담지 못한 채 흘려버리거나 심지어 제멋대로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진심이나 진실을 깨달았을 때면 이미 늦어 과거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밉다.

책을 읽는 행위란 나에게, 내가 사랑하거나 사랑할 이들에게 당도할 시간으로 미리 가 잠깐 사는 것이다. 아직 살아 - P25

보지 않은 시간이라 당장 이해하기 힘들어도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는 모양이군.‘ 하는 식의 감(感)을 얻는다. 신비로운 일이다.
정신 밭에 뿌려둔 감(感)이라는 씨앗은 여하튼 어떻게든 자란다. 그러다 문득 내게 당도해버린 시간을 통과할 적에 떠오른다. 처음이지만 처음이 아니고 혼자지만 혼자가아닌 것 같은 기분, 서툴게 더듬어 찾아가면 오래 전 내정신 밭에 뿌려둔 씨앗 자리에 뼈가 자라고 살이 붙어 서있는 형상과 마주한다. - P26

내게는 열아홉에 읽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그러했다. 모르는 낱말로 가득해 나름 자부한 독해력에 혐의를 두게 했다. 정신에 균열이 가 불편했을 뿐 아니라 가뜩이나 허무한 아이가 더 허무해져버렸다. 이상하리만치 잊히지 않았다. 흡사 나쁜 남자에게 매혹당한 순진한 소녀 같았다.
다시 읽지 않았다. 그저 한 선배에게 "사람은 행복해지려고 사는 것 같지 않다."는 소감을 남기며 열아홉 살답게 겁도 없이 헌법이 모든 국민에게 가지라고 선포한 ‘행복을추구할 권리‘ 를 무시했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200년 - P26

넘게 절절이 그리는 심정을 말로 표현하라면 ‘행복추구권‘이 아닐까. 우리가 왜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지, 왜 아직도 추구해야 하는지, 맘껏 누리는 것도 아닌 고작 추구 따위가 왜 권리인지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분통이 터졌다.
이러구러 세월이 흘렀다. 내 인생의 표석이 십대의끝자락에 이해하지 못한 채 읽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말했다》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최근의 일이다.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 했으나 이것이 삶의 진실일지 모른다는 감(感)을 모태삼아 뼈가 자라고 살이 붙은 어떠한 형상이 돼 묵직한 무게감으로 내 삶을 밀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에게서 왔으나 이해하지 못했기에 딱히차라투스트라라고 하기 힘든 그 형상은 내가 인생 자락의고비에 놓일 때마다 뜨거운 회초리를 휘두르고 있었다. - P27

하이패스 단말기가 없으면 고속도로나 유료도로의 톨게이트마다 정차해야 하는 것처럼 어휘력이 부족하면 말이나 글에 지체구간이 생기고 늘어진다. 표현하고 싶은 용어나 낱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것을 설명하느라 정작 하려던말이나 글을 중단하고 곁가지 서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말이나 글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이미용어나 낱말을 아는 사람에게는 쓸데없고 지루하다.
정확한 어휘를 구사해야 하는 이유는 해석의 여지를줄이기 위해서다. 시나 소설 등의 문학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쓴 애매모호한 표현은 여운과 사유로 이어질 수 있다.
그 모호함에서 비롯된 해석이 제각각 달라 벌어지는 논의 - P35

조차 의미 있다. 그러나 언론기사나 논문, 논술이나 프레젠테이션, 자기소개서 등 정보나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글에서 해석의 여지가 많은 어휘와 표현을 써서 읽거나 듣는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한다면 존재의 이유를 묻지 않을수 없다.
글쓰기가 업(業)인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해석의 여지가없을 정도로 정확한 어휘와 표현을 찾는 것이 목표다. 이룰수 없는 목표를 바라보고 하염없이 헤맨다. 뜻이 통하면 됐지 구태여 그런 수고까지 할 필요 있느냐 묻는다면, 이과정에서 겪은 기적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바로, 찾아 헤매는 동안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점점 더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마치 생각만 어휘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어휘도생각을 찾아와 중간 어디쯤에서 극적으로 만나 부둥켜안는것 같다. 분명 내 자아에 줄 수 있는 선물이 있다. - P36

베아트리스는 맛이 궁금해 안달하고 마침내 버질이 소개한다. "배를 작게 잘라내면 속살은 새하얗지. 안에 전등이켜진 것처럼 하얗게 빛난다고. 그래서 과도 하나와 배 하나만 있으면 어둠이 무섭지 않아." "배를 씹을 때 입 안에서 느껴지는 느낌이나 감각도 정말로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어. 어떤 배는 아삭아삭하기도 해." 베아트리스가 배 맛을 상상하기 위해 묻는다. "사과처럼?"
당신이 배맛을 안다면 손사래를 치며 부정할 것이다.
"아니라니까. 사과하고는 완전히 다르다니까!" 버질도 그랬다. 앞서 배의 모양을 설명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배의 맛에대해 찬찬히 알려준다. - P39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끝내 묻고 만다. "그럼 배맛은 뭐랑 비교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팽팽하게 쌓아올린 배에 대한 설명은 이 지점에서 와르르 무너진다. ‘우리는 이미 반쯤 아는 것을 듣고 이해한다.‘고 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은 과연 진실일 수밖에 없을까. 결국 버질도 포기한다. "배 맛은 뭐랑 비슷하냐면, 뭐하고 비교할 수 있냐면…… 모르겠어. 말로는 표현할수가 없어. 배 맛은 배 맛 그 자체야. 어떤 맛으로도 비교할수 없어." 베아트리스는 안타깝다. "너한테 배가 있으면 좋을 텐데." 버질도 같은 심정이다. "그래, 나한테 지금 배가 있다면 당장 너한테 맛을 보여주었을 거야." 둘은 침묵한다. - P40

버질은 베아트리스가 알고 있는 것에 기대어 한참 설명했지만 자신이 경험한 것을 끝내 알릴 수 없었다. 베아트리스는 버질의 이야기에 푹 빠져 머릿속에 온갖 형상을 열심히 그려봤지만 최종적으로 몰랐다. 언어의 한계다. 상상의 한계다. 인식의 한계다. 이 한계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가 되어 상대가 전하는 의미를 두드려 펴 늘이거나 - P40

머리 혹은 사지를 가차 없이 잘라낸다.
흔하디흔한 과일 하나 설명하기도 이렇게나 힘든데 나는 알고 당신은 모르고, 나는 겪고 당신이 겪지 않은 일에대해서라면 오죽할까. 그래서 대화가 각자 말을 하거나, 그저 그런 진부한 언어의 나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그럼에도 나만 겪은 일을 당신에게 알리고, 당신이 겪은 일을 내가 알 길은 언어밖에 없다. 언어는 강철보다 견고한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두드려 금 가게 하고, 틈이 생기게 하고, 마침내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언어의 한계를 서로 달리 살아온 삶의 경험과환경에서 비롯된 거라 믿어 소통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어휘를 선택할 때 조금은 더 친절해질 수 있다. 상대의 처지에 적절한 낱말을 찾게 된다.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대화에 등장하는 ‘배‘가 상징한것은 ‘홀로코스트‘ 였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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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과 함께 걷는 길


말타기와 사냥을 즐겼던 안중근의 변화는 어디에서 온 걸까? 천주교입교는 안중근을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바꿔놓았다.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그의 가두선교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안중근의 두 번째 변화는 한반도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의 을사늑약이다. 북간도와 상하이를 다녀온 안중근은 연해주로 망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시종 한반도의 독립과 아시아 평화를주창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한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한반도에초대 통감부로 부임한 이토를 제거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해보였다.
역사는 때로 강물의 걸음걸이로 흐른다 했던가. 어떤 것들은 사라지고 어떤 것들은 여전히 그곳에 맴돈다. 한 그루 나무가 숲을 이뤄가듯 그 생명력 또한 무한하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찬란한 숲을 볼 수있다. - P6

안중근과 함께 걷는 첫 번째 여정은 단지동맹비가 세워진 크라스키노에서 시작되었다. 안중근의 손도장 기념비는 장엄했다. 왼손 무명지가 잘린 손도장에서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강한 의지가 읽혔다. 반면크라스키노는 의병 전투에서 패한 안중근에게 우울한 망명지였다. ‘다시는 크라스키노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그의 선언이 절명처럼 들렸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날아온 한 장의 전보가 없었다면 하얼빈 역거사도 어려운 일이었다.
안중근이 기선을 타고 떠난 포시에트 항구를 빠져나와 빨치산스크(수정)로 향했다. 연해주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뻗은, 시보데알린 산맥에 위치한 빨치산스크는 안중근에게 매우 각별한 장소다. 의병모집 연설에 감동한 백여 명의 청년들이 ‘수청파‘를 결성했고, 한인동포들은 6000루블의 군자금을 내놓았다. 의병 모집 연설에서 안중근은 ‘의‘와 ‘단합‘을 강조하는데,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겨눈 총구만큼이나 이천만 동포에게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분열은 곧 패망을 의미했다. - P7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동공보》 신문사를 찾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포그라니치나야 거리(개척)에 언덕을 지칭하는 웅덩마퇴와 둔덕마퇴가 백 년 전 흑백사진의 기억을 어렴풋이 되살려주었다. 여섯발의 총성으로 막을 내린 하얼빈 거시는 치밀하게 진행되었고, 경비와총기를 제공한 곳도 《대동공보》였다. 블라디보스토크 하얼빈행 기차에 오르기 전 안중근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번 길에 꼭 총소리를 내리다.‘
안중근과 함께 걷는 길에서 잠깐 다녀올 곳이 있었다. 최재형과 이 - P7

상설이 잠든 우수리스크다. 페치카 최재형은 안중근의 소리 없는 후원자로 헤이그 밀사 이상설은 안중근이 가장 존경한 인물로 생을 마감했다. 또한 우수리스크는 안중근 가족이 이주해 살 때 두 동생(정근, 공근)이 최초로 벼농사를 성공시켰던 곳이다.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국경에선 신경이 곤두섰다. 무장한러시아 군인과 감시 카메라가 그라데코보 역 주변을 에워쌌다. 용기를낼 수 있었던 건 안중근을 믿었기 때문이다. 들불처럼 번지는 번뇌 속에서도 안중근의 과녁은 흔들림이 없었다. 국경역 사진은 간절한 기도의 선물이었다.
연해주 벌판을 거슬러 오른 두 번째 여정은 쑤이펀허, 무링, 하얼빈,
차이자거우, 창춘, 북간도, 뤼순, 상하이로 이어졌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안중근의 아내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였던 김아려의 심정을 헤아려보았다. 신부가 되길 바랐던 장남 분도를 무링에서 잃고 만 것이다.
- P8

안중근이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임무를 마친 하얼빈 역은 역사에 안중근 기념관이 들어서면서 사람들로 붐볐다. 중국 학생들의 단체관람이 이채로웠다. 베이징대학 천두슈 교수는 하얼빈 거사를 지켜보며 흥미로운 말을 남겼다.
"나는 (중국) 청년들이 톨스토이나 타고르가 되기보다 콜럼버스와안중근이 되길 원한다."
첫 번째 거사 장소로 삼았던 차이자거우와 안중근 일행이 하룻밤을 보낸 창춘의 관동군 헌병대도 빠트릴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뤼순행 기차에 오른 안중근의 망명 생활도 만주 벌판을 가로지르는 기적소리와 함께 저물어가고 있었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 - P8

으니 외로운 길만은 아니었으리라. 안중근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천명으로 받아들였다.
안중근과 함께 걷는 길도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사형 집행을당한 뤼순감옥에서 크라스키노를 바라보니 아득하게 느껴졌다. 날짜도 구월에서 시월로 바뀐 지 오래다. 평일인데도 뤼순감옥은 하얼빈역 기념관보다 붐볐다. 누군가의 죽음이 훗날 기념이 될 수 있다는 건신념을 굽히지 않은 의사의 삶을 살았다는 증거 아닐까? 안중근과같은 장소에서 순국한 신채호, 이회영과의 해후도 여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뤼순에서 상하이는 기차로 꼬박 스물다섯 시간을 달려야 하는 먼여정이다. 안중근사형 후 가족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크라스키노 무링, 우수리스크를 거쳐 상하이에 정착하는데 그들의 소식이 궁금했다.
안중근과 함께 걷는 길에서 성찰의 시간도 주어졌다. 하루하루 기도하는 삶이다. 먼 여정의 길잡이가 되어준 안중근 의사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 P9

과거 한인들은 크라스키노를 ‘연주‘라고 불렀다. 연주에 관한 설명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읽을 수 있다. 조선을 네 차례 여행한 비숍은 1894년 가을, 연추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평평한 평지의 농촌 지역은 깊고 기름진 검은 땅 위에 곡류와 근채채소들이 거의 다 자란 상태였다. 이미 곡식의 수확이 끝난 뒤라 땅은깔끔하게 갈아엎어져 있었다. 조선의 농촌 마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더 좋은 집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중략) 노보키예프스키에서 조금 더 가니 안지혜 (연)라 불리는 큰 마을이 나타났는데, 이곳에는 러시아 학생들과 한인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는 깔끔한 학교가 있었으며, 내부 장식이 두드러지게 화려하고 사제의 사택이 붙어 있는 러시아정교 교회가 있었다. 안지혜는 매우 부유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과 부근 지역에서 모두 400명의 한인들이 러시아정교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나는 사제에게 한인들의 삶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배울것이 많고 다음 세대에 보다 많은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 P15

안중근은 그보다 조금 늦은, 1909년 연추에서 단지동맹을 결행했다.


1909년 2월 나는 연주 방면으로 돌아왔다. 열두 명의 동지와 상의 끝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동안 아무 일도 이룬 것이 없으니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뿐만 아니라, 특별한 단체가 없으면 어떤 일이고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손가락을 끊어 맹세함으로써 한마음으로 단체를 이루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목적을달성하는 것이 어떻소?"
모두가 따르겠다고 했다. 이에 열두 명은 각각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써 태극기 앞면에 ‘大韓獨立(대한독립)‘ 네 글자를 크게 썼다. 쓰기를 마친 우린 ‘대한독립 만세‘를 삼창하였고, 하늘과 땅에 맹세한 다음 흩어졌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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