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과 함께 걷는 길


말타기와 사냥을 즐겼던 안중근의 변화는 어디에서 온 걸까? 천주교입교는 안중근을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바꿔놓았다.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그의 가두선교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안중근의 두 번째 변화는 한반도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의 을사늑약이다. 북간도와 상하이를 다녀온 안중근은 연해주로 망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시종 한반도의 독립과 아시아 평화를주창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한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한반도에초대 통감부로 부임한 이토를 제거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해보였다.
역사는 때로 강물의 걸음걸이로 흐른다 했던가. 어떤 것들은 사라지고 어떤 것들은 여전히 그곳에 맴돈다. 한 그루 나무가 숲을 이뤄가듯 그 생명력 또한 무한하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찬란한 숲을 볼 수있다. - P6

안중근과 함께 걷는 첫 번째 여정은 단지동맹비가 세워진 크라스키노에서 시작되었다. 안중근의 손도장 기념비는 장엄했다. 왼손 무명지가 잘린 손도장에서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강한 의지가 읽혔다. 반면크라스키노는 의병 전투에서 패한 안중근에게 우울한 망명지였다. ‘다시는 크라스키노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그의 선언이 절명처럼 들렸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날아온 한 장의 전보가 없었다면 하얼빈 역거사도 어려운 일이었다.
안중근이 기선을 타고 떠난 포시에트 항구를 빠져나와 빨치산스크(수정)로 향했다. 연해주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뻗은, 시보데알린 산맥에 위치한 빨치산스크는 안중근에게 매우 각별한 장소다. 의병모집 연설에 감동한 백여 명의 청년들이 ‘수청파‘를 결성했고, 한인동포들은 6000루블의 군자금을 내놓았다. 의병 모집 연설에서 안중근은 ‘의‘와 ‘단합‘을 강조하는데,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겨눈 총구만큼이나 이천만 동포에게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분열은 곧 패망을 의미했다. - P7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동공보》 신문사를 찾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포그라니치나야 거리(개척)에 언덕을 지칭하는 웅덩마퇴와 둔덕마퇴가 백 년 전 흑백사진의 기억을 어렴풋이 되살려주었다. 여섯발의 총성으로 막을 내린 하얼빈 거시는 치밀하게 진행되었고, 경비와총기를 제공한 곳도 《대동공보》였다. 블라디보스토크 하얼빈행 기차에 오르기 전 안중근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번 길에 꼭 총소리를 내리다.‘
안중근과 함께 걷는 길에서 잠깐 다녀올 곳이 있었다. 최재형과 이 - P7

상설이 잠든 우수리스크다. 페치카 최재형은 안중근의 소리 없는 후원자로 헤이그 밀사 이상설은 안중근이 가장 존경한 인물로 생을 마감했다. 또한 우수리스크는 안중근 가족이 이주해 살 때 두 동생(정근, 공근)이 최초로 벼농사를 성공시켰던 곳이다.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국경에선 신경이 곤두섰다. 무장한러시아 군인과 감시 카메라가 그라데코보 역 주변을 에워쌌다. 용기를낼 수 있었던 건 안중근을 믿었기 때문이다. 들불처럼 번지는 번뇌 속에서도 안중근의 과녁은 흔들림이 없었다. 국경역 사진은 간절한 기도의 선물이었다.
연해주 벌판을 거슬러 오른 두 번째 여정은 쑤이펀허, 무링, 하얼빈,
차이자거우, 창춘, 북간도, 뤼순, 상하이로 이어졌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안중근의 아내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였던 김아려의 심정을 헤아려보았다. 신부가 되길 바랐던 장남 분도를 무링에서 잃고 만 것이다.
- P8

안중근이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임무를 마친 하얼빈 역은 역사에 안중근 기념관이 들어서면서 사람들로 붐볐다. 중국 학생들의 단체관람이 이채로웠다. 베이징대학 천두슈 교수는 하얼빈 거사를 지켜보며 흥미로운 말을 남겼다.
"나는 (중국) 청년들이 톨스토이나 타고르가 되기보다 콜럼버스와안중근이 되길 원한다."
첫 번째 거사 장소로 삼았던 차이자거우와 안중근 일행이 하룻밤을 보낸 창춘의 관동군 헌병대도 빠트릴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뤼순행 기차에 오른 안중근의 망명 생활도 만주 벌판을 가로지르는 기적소리와 함께 저물어가고 있었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 - P8

으니 외로운 길만은 아니었으리라. 안중근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천명으로 받아들였다.
안중근과 함께 걷는 길도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사형 집행을당한 뤼순감옥에서 크라스키노를 바라보니 아득하게 느껴졌다. 날짜도 구월에서 시월로 바뀐 지 오래다. 평일인데도 뤼순감옥은 하얼빈역 기념관보다 붐볐다. 누군가의 죽음이 훗날 기념이 될 수 있다는 건신념을 굽히지 않은 의사의 삶을 살았다는 증거 아닐까? 안중근과같은 장소에서 순국한 신채호, 이회영과의 해후도 여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뤼순에서 상하이는 기차로 꼬박 스물다섯 시간을 달려야 하는 먼여정이다. 안중근사형 후 가족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크라스키노 무링, 우수리스크를 거쳐 상하이에 정착하는데 그들의 소식이 궁금했다.
안중근과 함께 걷는 길에서 성찰의 시간도 주어졌다. 하루하루 기도하는 삶이다. 먼 여정의 길잡이가 되어준 안중근 의사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 P9

과거 한인들은 크라스키노를 ‘연주‘라고 불렀다. 연주에 관한 설명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읽을 수 있다. 조선을 네 차례 여행한 비숍은 1894년 가을, 연추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평평한 평지의 농촌 지역은 깊고 기름진 검은 땅 위에 곡류와 근채채소들이 거의 다 자란 상태였다. 이미 곡식의 수확이 끝난 뒤라 땅은깔끔하게 갈아엎어져 있었다. 조선의 농촌 마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더 좋은 집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중략) 노보키예프스키에서 조금 더 가니 안지혜 (연)라 불리는 큰 마을이 나타났는데, 이곳에는 러시아 학생들과 한인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는 깔끔한 학교가 있었으며, 내부 장식이 두드러지게 화려하고 사제의 사택이 붙어 있는 러시아정교 교회가 있었다. 안지혜는 매우 부유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과 부근 지역에서 모두 400명의 한인들이 러시아정교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나는 사제에게 한인들의 삶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배울것이 많고 다음 세대에 보다 많은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 P15

안중근은 그보다 조금 늦은, 1909년 연추에서 단지동맹을 결행했다.


1909년 2월 나는 연주 방면으로 돌아왔다. 열두 명의 동지와 상의 끝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동안 아무 일도 이룬 것이 없으니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뿐만 아니라, 특별한 단체가 없으면 어떤 일이고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손가락을 끊어 맹세함으로써 한마음으로 단체를 이루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목적을달성하는 것이 어떻소?"
모두가 따르겠다고 했다. 이에 열두 명은 각각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써 태극기 앞면에 ‘大韓獨立(대한독립)‘ 네 글자를 크게 썼다. 쓰기를 마친 우린 ‘대한독립 만세‘를 삼창하였고, 하늘과 땅에 맹세한 다음 흩어졌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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