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이 물리적으로 지나치게 빈약한 환경은 사고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떨어뜨린다.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이며 제한적이고 시종 감정적인, 언어로 발화된다.
언어는 나다. 나의 세상은 언어의 한계만큼 작거나 크다. 나, 그리고 대상. 세상은 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나를 제외한 전부가 대상이다. - P46
대상은 내가될 수 없지만 나는 모든 대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따금 내가 나에게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상의 명명(命名)은 이러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국어사전에 등재된 50만여 개, 세계 최대 백과사전인 브리태니커 전자사전에 등재된 5,500만여 개. 우리는 그 낱말들로 대상과 사물을 가리켜 묘사하거나설명하고, 생각과 느낌 등을 표현해 상호작용하며 성장한다. 0어휘력은 낱말에 대한 지식의 총합을 일컫는다. 달리 말해 세상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것들을 불러내나와 대상에 일어나는 현상을 구조화하며 의식세계를 확대하고 심화하는 재량이다. - P47
‘산말(실감 나도록 꼭 알맞게 표현한 말)‘, ‘산소리(어려운가운데서도 속은 살아서 남에게 굽히지 않으려고 하는 말)‘는 있어도 ‘죽은 말‘, ‘죽은 소리‘는 없다. 대신 ‘거짓말(사실이 아닌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미는 말)‘, ‘신소리 (상대편의 말을 슬쩍 받아 엉뚱한 말로 재치 있게 넘기는 말)‘, ‘허튼소리(함부로 지껄이는 말)‘, ‘헛소리(실속이 없고 미덥지 아니한 말)‘ 등이 있다. 접히고 구겨지고 꼬부라지고 늘어지고 너절해지는 한이 있어도 죽지 않으며 하거나 듣거나 못하거나 많거나 적을 수 있을 뿐이다. 나거나 굳거나 떨어지거나 뜨거나 되거아닐 수 있을 뿐이다. 죽이려 한 권력자는 많았으나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말을 죽일 수는 없다. - P48
사람에게 났으나 사람보다 오래도록 존속하다 깊숙히 묻힐 것이다. 지구에서 태어나 가장 멀리 날아갔다. 얼마나멀리 갔느냐 하면 지구로부터 무려 210억 킬로미터 이상이다. 참고로 지구 한 바퀴는 고작 4만 킬로미터다. 나는 사람들이 꼴보기싫어지거나 사는 게 힘에 부칠때면 보이저 1호를 떠올린다. 지구의 자연과 인류에 대한정보를 담은 ‘골든 레코드‘를 싣고 1977년에 우주로 날아간그는 44 년째 춥고 어둡고 하염없는 고해를 홀로 헤쳐 가고있으며, 2030년이면 지구와의 교신마저 완전히 끊긴다. 그의 목표는 다른 생명체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려면 4만 년을 더 가야 하고 그 즈음이면 지구의 현 인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4만 년 후, 보이저 1호가 다른별의 생명체에 건네는 지구의 골든 레코드, 지구의 말과 글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 P49
다음은 ‘말‘에 대한 관용구했다. 말(을) 내다; 남이 모르고 있던 일을 이야기하여 소문을 내다 말(을) 듣다; 남이 시키는 대로 하다. 꾸지람이나 나무람을 당하다. 기계 따위가 마음대로 잘 다루어지다. 말(을) 못 하다: 말로써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다. 말(이) 굳다; 말할 때 더듬거려 말이 부드럽지 못하다. 말(이) 나다; 남이 모르고 있던 일이 알려지게 되다. 말이 이야깃거리로 나오게 되다. 말(이) 되다; 하는 말이 이치에 맞다. 어떤 일에 대하여서로의 사이에 약속이 이루어지다. 말(이) 떨어지다; 명령이나 승낙 따위의 말이 나오다. 말(이) 뜨다; 말이 술술 나오지 않고 자꾸 막히거나 굼뜨다. 말(이) 많다. 말수가 많다. 수다스럽다. 말썽이 끊이지아니하다. 말(이) 아니다: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지가 매우 딱하다. - P50
표정으로 떠오른 마음은 진심이었고 그 덕에 나는 한번도 실감한 적 없는 한국어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한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고유의 언어를 가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역사가 깊고 문화적인 나라일 거라 추측했고 종이를 내밀며 "네 이름을 네 나라 글자로 써달라" 하더니 내가 써준 한글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며칠 후 다시 그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또 내게 물었다. "선경, 너의 나라에도 바다가 있니?" 얼른 바다가 있다고, 삼면이 바다라고 자랑했다. "멋지구나. 그런데 너의 나라 바다는 무슨 색이니?" - P55
우리나라에선 웬만한 자연 풍경의 색을 ‘푸르다‘로 두루뭉술하게 통칭한다. 하늘도 푸르고, 강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나뭇잎도, 풀도, 산도 푸르다. 눈으로 그것들의 색이 뻔히 다른 걸 보면서도 ‘푸르다‘로 통칭한다. 파란색을 푸르다고도 하지만 연두색도 초록색도 푸르다 하고 물색까지 푸르다 하는 셈이다. ‘빛깔이 밝고 선명하다, 싱싱하다‘는 뜻으로 푸르다고 할 수는 있으나 색깔을 묻는데 하늘도, 강도, 바다도, 나뭇잎도, 풀도, 산도 푸르다 하면 틀린 말은 아니나 옳은 말도 아니며파랑인지 초록인지는 순전히 듣는 사람이 알아서 알아들어야 한다. 나는 대한민국 삼면의 바다 색깔이 모두 다르고 무엇보다 블루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무 살이나 먹고 대한민국삼면의 바다가 없는 독일에서 알아차렸다. 5분도 안 되는사이에 벌어진 이 날의 대화는 내게 중대한 인식의 전환점이었다. 사물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보지 못하 - P57
고 있었다. 남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말과 글의 관성에갇혀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처럼 타성적으로 표현하고있었다. 관성이나 타성은 건성이나 비슷한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반대말은 ‘관심‘ 42이다. 나는 사람이 제일 가지기 45힘든 것이 관심이라 여긴다. 강퍅할 때는 온통 자기만으로가득 차 깃털 한 개조차 꽂을 데 없는 것이 마음이다. 그 안에 다른 무엇을 들이는 게 쉽겠는가. 대수롭지 않은 주변과일상이라면 더욱 데면데면하다. 옆에 있어도 옆에 없고봐도 본 게 아니며 들어도 들은 적 없다. - P58
어휘력은 문장을낱말로, 서술을 명사나 형용사로 줄이는 기술이기도하다. 세상의 사물과 현상은 저마다 명칭을 가졌고 이 장에 소개한 것처럼 소소해 보이는 것들마저가지고 있다. 심지어 사전에 실린 풀이는 평소 말로 풀어서술한 내용보다 두루뭉술하지 않고 명확하다. 맞춤한 낱말을 구사하면 불필요한 곁가지 서술을 줄여효율적일 뿐 아니라 그 낱말을 디딤돌 삼아 하려는 이야기를 자신감 있게, 자유자재로 발전시킬 수 있다. 사람에 대해서는 이름을 안다고 다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사물과 현상은맞춤한 이름을 알면 거의 아는 것이다. 단순히 이름만 아는게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아는 것이다. - P75
앞서 내 동생도 세상에 태어난 지 5년이나 됐는데 내말에 대응하지 못했잖은가. 나 역시 세상 산 지 7년이나 됐어도 중학생과 말다툼을 벌이면 턱없이 밀렸을 것이다. 혹여 이겨도 중학생 언니나 오빠의 분노를 유발해 꿀밤 맞았을지 모른다. 그러면 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을 거다. 울고싶지만 울지 않고, 꿀밤 때리고 싶지만 때리지 않고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감정을 품위 있게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표시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파악하고 최종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아퀴지을 지성을 갖췄다는 뜻이다. 이과정은 언어라는 체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뇌속에 수많은낱말들이 혼잡스럽게 뛰어다니느라 다소 골치 아플 수 있지만 활용 능력치가 커질수록 앞서의 과정을 명확하게 진행시켜 세상살이를 한결 수월하게 만들 수 있다. 언어와 의식은 함께 성장하며 총본산이 문학이고 인문학이다. - P81
어른이라고 올 일 없으랴. 목 놓아 펑펑 울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 저마다 가슴 열어젖히면 눈물이 그득히 쏟아져 온 땅이 물에 잠길 것이다. 그러나 그뿐, 눈물은나를 변화시키지도 상황을 바꾸지도 못한다. 말 안 하면 왜우는지 남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울지 마라, 소리 내 말하라, 글을 쓰라. 그래야 내가 변할 수 있고 상황을 바꿀 수 있다. 내 속을 풀어내는 것도 타인을 설득하는 것도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설령 말 때문에 사달 68 날 위험이크다 해도 결국 말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은 타인과의상호작용에 의해 규정되며 이런 상호작용은 주로 말을 통해 확립된다." 장 폴 사르트르가 한 말이다. - P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