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왜 유희적이고 잉여적이란 말인가? 애타게 그리워하는 마음이 왜 센티멘털리즘이란말인가? 오히려 본질적인 것이 아닌가! 왜 아름다움에꼭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하나? 두길에게는 이데올로기보다 사랑이 더 중요했다. 시를 공부하는 그에게 사랑은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었다. 무심하게보이던 사물들이 사랑으로 해서 더 아름답고 의미심장하게 보이지 않았던가. 사랑에 빠진 지금의 그는 낭만주의가 좋았다. 센티멘털리즘도 좋았다. 나중에 사회주의자가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사랑에 열중하고 싶었다, 하이네가 그랬듯이. - P95

1945년 한해는 그렇게 지나갔다.
이제 제주도 인구는 대폭 늘어 이십이만 도민에서 이십칠만 도민이 되었다. 칠만 일본군이 떠난 자리에 귀환동포 오만명이 왈칵 담긴 것이다. 오사카 등지에서 노동품을 팔면서 빈민으로 생활하던 사람들이 그중 많았고,
나머지는 징용과 징병 삼년에서 용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청년들이었다. 해가 바뀐 뒤에도 조천 포구에 배가 들때마다 귀환자가 한두명씩 계속 나타났는데, 머나먼 남태평양의 섬들이나 인도차이나반도 같은 곳에 끌려갔던이들이었다. 거의 반년 동안 배편이 없어 거지 노릇을 하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창세는 포구에서 거지꼴을 한 채버마 전선으로부터 귀환한 한 청년이 두 팔을 벌리고 울부짖는 것을 보았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죽지 않고살아서 돌아왔다!" - P107

해방된 지 오개월쯤 된 시점에, 징용과 징병을 갔던 제주 청년들 중 어림잡아 절반이 죽고 절반만 살아 돌아온것으로 판명되었다. 조천리에서도 사십여명 중 생활한자는 스물댓명에 불과했다. 전사 혹은 사고사 소식이 잇따라 바다를 건너 들어오고, 더이상 귀환자가 나타날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포구에 나가 기다리는 사람은 현옥미의 모친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슬픔은 흥청거리는 집단적 열광 속에서 서서히 잊힐 수밖에 없었다. 해방의 기쁨과 생존자 귀환의 기쁨은 엄청난 열광의 도가니가 되어 죽은 자들에대한 슬픔을 자취 없이 삼켜버렸다. 그 열광의 도가니는전쟁터에서, 탄광 속에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 나머지잠자리에서 악몽을 꾸던 사람들의 후유증도 녹여버릴정도였다. 악몽 속에서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던 고승우도 이제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 P108

봄이 왔다.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그야말로 새봄이었다. 먼 땅에 끌려갔던 이들이 돌아왔고, 강남 갔던 제비들도 돌아오고 한라산 깊숙이 숨었던 노루들도 초원으로 돌아왔다. 전에는 흥이 나지 않아 부르지 않던 봄맞이노래가 여기저기서 즐겁게 울려퍼졌다. - P113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가혹한 시절이 끝나고 빼앗겼던 들판이 이제 다시 섬 주민들에게로 돌아왔다. 송진 채취 때문에 찍히고 벗겨진 소나무들의 상처에 새살이 돋도록 봄을 맞은 솔숲은 짙은송진 냄새를 풍겼다. 정두길이 자작시에서 찬양했듯이빼앗겼던 땅, 상처뿐이던 땅에 새살이 돋고, 사람들의 여윈 몸에도 새살이 차오르고 있었다. 창세에게도 봄이 그렇게 새롭고 아름답게 느껴지기는 난생처음이었다. - P114

온 들판에 덮였던 눈이 녹아 설선(雪)이 한라산 기슭으로 물러나자 목장의 묵은 풀을 태우는 들불 놓기, 화입(入) 행사가 중산간 지역의 마을별로 벌어졌다. 3월초에 벌어지는 화입은 목축이 주업인 중산간 주민들에게는 거를 수 없는 중요한 연중행사였는데, 그럼에도 지난 이년간은 일제에 의해 금지당해온 터였다. 화입은 불의 온기를 차가운 땅속에 스며들게 하여 목초의 발아와성장을 촉진해주는데, 묵은 풀이 불에 타 재가 되면 그재를 먹고 새 풀이 쑥쑥 기운차게 솟아올랐다. 화입은 마소를 괴롭히는 가시덤불, 진드기와 쇠파리, 말파리 알을 - P114

태워 없애는 효과도 있었다.
들불은 자칫 크게 번져 재난이 될 수 있으므로 화입하기 좋은 날을 골라야 했다. 바람의 방향이 한결같아야 좋은데, 그것을 잘 맞히는 전문가가 마을마다 한두 사람씩은 있게 마련이었다. 구름의 종류와 흐르는 방향을 살펴서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다가 어느 쪽으로 바뀔지를예측하여 불을 놓았다. 온 마을 남정네들이 동원되는 그행사는 아침에 시작해 이튿날 아침까지 스물네시간 계속되었다. 불이 너무 커지지 않도록 방화선을 만들면서밤을 지새웠는데, 해변 마을에서 볼 때면 어둠 속에 긴띠를 이루어 붉게 타고 있는 들불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듯두려운 느낌마저 주는 아름다움이었다. - P115

창세는 비석거리에 구경 나온 몇몇 사람들 틈에 끼어그 들불을 보았다. 특히 외갓집이 있는 와흘 마을의 상뒷동산과 주변 목장을 태우는 불은 4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이라 두려움이 더했다. 불빛이 밤하늘에 뜬 연기와 구름에 번져 불이 더욱 커 보였고, 불빛은해변까지 밀려와 구경꾼들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모두들 두려움이 섞인 야릇한 감동에 사로잡힌 채 그 불을바라보는데, 이민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P115

"묵은 풀은 불에 타 재가 되고, 그 재를 먹고 새 풀이자란다. 그것이 혁명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는 꽃샘추위가 여러날 계속되기마련이었다. 이때는 검정 암소 뿔도 오그라든다는 말이생길 정도로 바람살이 여간 맵차지 않은데, 그 바람을 사람들은 영등바람이라고 불렀다. 풍신(風神) 영등할망이그 바람을 타고 제주섬에 들어오면 해촌마다, 포구마다영등굿이 벌어졌다. 새콧알할망당에 심방이 수십명의해녀들을 모아놓고 징 소리 북소리 울리는 가운데 축원을 올렸다.  - P116

"영등할마님이 오시는구나, 흰구름에 싸여오시는가, 바람 등 타고 오시는가. 우리 제주 산천구경오시는데, 산 구경 물 구경 오시는데, 어서 청하여 맞아들이자 천리 보고 만리 보는 할마님아, 우리 불쌍한 백성들, 축원을 여쭙니다, 축원을 여쭙니다. 우리 모두 할마님 자손 아닙니까. 부디 할마님이 도와주십서. 오곡씨주고 갑서, 미역씨, 소라씨, 전복씨도 주고 갑서. 고깃배, 화물선 타는 자손들, 모진 풍파 막아줍서. 우마 번식시켜줍서. 자손 만발하게 해줍서, 대대손손 칡넝쿨처럼 뻗어나가게 해줍서."
구름은 높이 떠 움직이지 않는데 영등바람은 티끌과 - P116

검불을 날리면서 낮게 불었다. 바람에 날린 티끌이 눈에들어가 창세는 몇번이나 눈을 비벼야 했다. 바람은 서서히 온기를 얻으면서 대지 위로낮게불어한뼘자란 보리밭을 흔들어 깨우고, 안뜰의 복숭아나무를 흔들어 꽃봉오리를 만들고, 마당의 빨랫줄에 널린 흰 빨래들을 깃발처럼 펄럭였다. 두말치물과 장수물의 빨래터는 겨우묵혀두었던 빨랫감을 빠는 아낙네들로 붐비고, 떠드는 말소리, 깔깔대는 웃음소리, 방망이질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 P117

봄볕은 나날이 짜랑짜랑영글어맨드라미같이생긴수탉의 벗이 더욱 탐스럽게 붉어졌다. 수탉은 벌레 잡고암탉을 부르고, 암탉은 알을 낳으려 꼭꼭거리고, 병아리는 지렁이 물고 달아나고, 대숲에는 죽순들이 뾰족뾰족지각을 뚫고 나오느라고 맨땅이 들썩거렸다. 갯가의 파래와 톳도 빛깔이 고와지고, 겨울 추위를 견뎌낸 보리밭도 푸른빛이 짙어졌다. 농사철이 시작되었다. 농사철을맞아 박털보의 대장간도호미, 낫, 괭이,쇠스랑, 삽따위를 만드느라 바빠졌다. 착착찰그랑 툭탁, 쇠 때리는 소리가 쉴 새 없었다. - P117

해변에서 시작된 초록빛이 목장으로 올라가 번지는중이었다. 들불이 검게 태운 들판에서 이제 그것은 초록의 들불이었다. 그 무렵이면 언제나 그렇듯이 목장에는아침 안개가 자주 끼었다. 연둣빛 어린 봄풀들이 묵은 풀태운 재를 먹고, 촉촉한 안개를 먹고, 바람과 햇빛을 들이마시면서 쏙쏙 자라났다.
3월 중순이 되자 마소 방목이 시작되었다.  - P118

학생들에게 제일 인기 있는 수업은 역사 시간이었다. 망각을 강요당했던 제 나라 역사를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역사 선생은 이웃 마을 신촌리의 청년이덕구였는데, 학병 장교 출신인그는 조천면 치안대 대장이기도 했다. 어릴 적 마마를 앓은 탓에 자국이 남아 얼굴이 유자 껍질처럼 우툴두툴했다. 그는 첫 수업 시간에 자기를 소개하면서 박박 얽은얼굴을 신화에 빗대어 농담할 정도로 소탈한 인물이었다. 마마신이 강풍을 타고 빗발같이 화살을 쏘아대면 그화살을 맞고 아이들이 죽거나 곰보가 된다고, 제주도의돌이 우툴두툴 구멍이 팬 것도 마마신이 쏜 화살을 맞아서 그렇다고 그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육성 마이크‘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수업할 때 목소리가 유별나게 우렁우렁했다. - P125

해방 후 맞는 첫 봄, 신생의 기운이 제주섬 도처에서샘솟듯 기운차게 솟아나고 있었다. 새봄, 새학교, 새일꾼, 새 나라, 새 희망! 그 모든 것이 청년들, 소년들의 것처럼 생각되었다. 꽃들도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면서해방의 노래를 부르고, 침울했던 청년들의 가슴도 꽃망울 터지듯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렸다. 해방 직후 시작된집단적 열광에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전장과 탄광 등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살아 돌아온 귀환 청년들이었다. 그들이 겪은 지독한 절망감이 이제 급격하게 강력한 에너지로 바뀌어 그들을 추동했다. 그들은 생각했다.
지금은 귀향민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상태라 취직난이 극심하지만 친일파들이 물러나면 자리가 생기리라고. 그러한 집단적 열광은 곳곳에 신설 중학원이 등장함으로써 더욱 증폭되었다. - P131

밝은 미래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이제 그 미래를 향한행동만이 남은 듯이 여겨졌다. 지금이 바로 그 미래, 새나라, 새 시대의 위대한 전야였다. 식민지생활 속에서애국심이 뭔지 몰랐던 그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온몸으로 깨달았다. 자기 나라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몸 바쳐 사랑할 나라를 갖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선생이 학생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말했다.
"일제의 노예 경험이 너의 마음에 무엇을 가르쳐주었는지 생각해보아라. 무엇을 가르쳐주었는가? 그렇다, 내나라, 내 땅을 다시는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점거하여 신탁통치운운하면서 남북분단을 획책하고 있지만, 그것은 열화같이 일어난 거족적 반대 투쟁에 의해 반드시 분쇄될 것이다." - P133

해변 길을 달려간다. 신흥을 거쳐 함덕까지 가야 한다.
사흘에 한번꼴로 하는 마라톤이다. 보폭이 일정하게, 규칙적인 리듬에 맞춰 달린다. 턱턱턱턱, 메마른 땅에 부딪는 발자국 소리. 팔과 옆구리가 맞비벼지는 마찰의 감촉.
십분쯤 달려 연대 앞을 지나칠 즈음엔 몸이 달리기에 익숙해져 가뿐해진다. 앙가슴에 바람을 안고서 달려간다.
푸른 보리밭은 해풍에 물결치고, 검은 현무암의 해변에부서지는 파도는 하얗게 눈부시다. 그 풍경이 손뼉 치며달리는 창세를 격려하는 것 같다. 달릴수록 몸이 더 가벼워지는 것 같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점점 발바닥의 감촉도, 팔다리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달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 무아지경에 가까워진다.  - P136

해방 후 일년이었지만 나아진 것 하나 없이 도리어 모진 흉년을 만나 굶주리게 되었다. 모두 해방이 곧 밥 먹여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오직 허기진 입들만 뻥하니 뚫려 있었다. 먹자고 벌린 입은 너무 많고먹을 것은 너무 부족했다. 해방과 더불어 섬에 왈칵 담긴오만 귀향민까지 허기진 입을 벌리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와 오랜만에 지은 보리농사가 쭉정이가 되어버렸으니앞으로 먹고살 일이 막막했다. 농사 외에는 일거리가 없었다. 공장이 없는 곳이라 노동 품을 팔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일본 노동판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 P186

가매장 터는 마을 밖 일주도로 곁에 있는 갑송네밭이었다. 땅을 얕게 파서 시신을 누이고 흙을 한꺼풀 덮는 것이 가매장이었다. 지게송장 뒤로 좀 떨어져서 가족들이 비척거리면서 따라갔다. 호열자의 위력에 주눅 든그들은 여전히 아이고아이고 곡소리를 내지 못했고, 좀전에 크게 울음을 터뜨렸던 갑송도 고개를 숙인 채 훌쩍훌쩍 흐느끼기만 할 따름이었다. 망인은 집안의 존경받는 가장이 아니라 무서운 호열자 보균자일 뿐이었다. 호열자에 대한 공포가 슬픔을 짓눌러 슬퍼도 진정으로 울수 없었다. 눈물도, 통곡도, 한숨도 뒷날로 미루어졌다.
두려움 때문에 사랑과 공경의 마음이 뭉개지고 인륜이 끊어지는 아픔을 가족들은 느껴야 했다. - P205

전국적으로 민중이 그렇게 기근과 역병, 두 재앙을 만나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느라 경황이 없는 동안, 미군정은 이때가 호기라고 생각했던지 한반도 분단 프로젝트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럼에도 민중의 반응은 무기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굶주림과 죽음의 역병에 시달리고 있는 터에 무슨 기력이 있어 일어나 외칠 것이며,
방역한다고 도로마다 차단되고 마을과 마을, 집과 집, 사람과 사람 사이가 가로막힌 터에 어떻게 모여들어 군중을 이룰 수 있겠는가. 지난 일년 동안 끓어올랐던 청년들의 열정과 열광은 차갑게 시들었고, 눈치를 보면서 힘을쓰지 못하던 경찰은 미군정의 강경 정책에 따라 차츰 두려운 존재로 변모하고 있었다.
조천면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시범이 면장 지위마저박탈당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 P2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가의 몸속에 들어와 자리 잡은 채 강하게 요구하는 강력한 무언가가 이 소설을쓰게 했을 것이다. 그 비참하고 끔찍한 죽음에 대해서 쓰지 않고는 다른 글을쓸 수 없게 하는 막막함, 절박함, 사무침, 애통함, 몸속에 갇혀 있던 그런 것들이눈물처럼 반짝거리면서 줄줄이 흘러나와 이 소설을 쓰게 했을 것이다. 빙의라고해도 좋고, 아룬다티 로이의 어법으로 표현하자면 현기영이 4·3을 소설로 쓴것이 아니라 4.3 으로 죽어간 참혹한 영혼들이 현기영을 선택해 제주도우를쓰게 한 것이다. 자기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하게 한 것이다. 

도종환 시인

4.3 의 역사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아시아를 살고 있는 우리들 삶의일부였다. 아름다운 바다 함덕을 품은 조천리에서 일본 군국주의 전쟁 말기제주도를 향한 미군기의 폭격으로부터 해방정국의 흉년과 콜레라, 그리고강제공출과 양과자 강매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생한이야기가 이 작품에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 야학에서 배운 노래에는 "피도 조선, 뼈도 조선/이 피 이 뼈는 조선 것이네/살아 조선, 죽어 조선, 조선뿐이네"라는가사가 있었고, 해방 이후 귀국한 강제징용자들은 "북조선도 남조선도 아니고제주도"라고 외쳐야 했다. 4·3은 그 과정에서 왔고 그렇게 지나갔지만,
『제주도우다』는 이 역사가 잊힐 수 없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4·3은 지금도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그러한 분위기에서 목청껏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웅변은 인기가 좋았다. 자신의 주장을 소리 높여 호소하고 정당하게 분노를 터뜨리는 정열적인 연설이 웅변이라고이민하는 말했다. 웅변 원고를 쓰고 외우는 일은 어떤 것보다 공부가 되었다. 웅변 공부가 곧 표준어 공부였고,
조선 역사, 인민정치학의 복습이었다. 워낙 무뚝뚝하고필요한 말만 하는 섬사람들은 일제의 억압으로 더욱 입이 무거워졌었는데, 이제 갑자기 입이 트였다. 물렸던 재갈이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혀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새 세상에 나가려면 무엇보다 말을잘해야 하고, 그것도 표준어라야 했다. - P15

미군정이 충격적인 명령을 내린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공식 출범한 미군정이 인민위원회 해체를 명령했던 것이다. 미군정이 삼팔선 이남 조선에서 유일한 정부라고 했다. 인민위원회 체제가 미군정의 행정체계에 반영되기를 원했던 도민들에게 그것은 크나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해방의 기쁨과 열광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도민의 의견을 받아들여 인민위원회 간부들 중에서미군정에 발탁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대개는 친일파의 재등용이었다. 일제의 착취 기구에 종사했던 자들이미군정의 부름을 받고 그 자리로 복귀하다니, 하급 관리들은 그만두더라도 친일파의 고위직 재등용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면서기를 하던 자들이 버젓이 면장으로 승진하여 복직하기도 하고, 순사 노릇 하던 자들이경찰서장, 지서 주임이 되었다.  - P26

조천소학교에 전교생을 대상으로 학년별자치회가 생겼는데, 상급생들 중에 열명이 뽑혀 새로 생긴 인민위원회 소년부로 들어갔다. 지도 교원은 정두길이었다. 소년부의 별칭은 샛별소년대로 구성원은 나이 제한을 두어열세살부터 열다섯살까지였다. 창세도 대원이 되었다.
샛별소년대는 일요일 새벽마다 조기회를 열었다. 십여명의 소년들이 정두길의 지도 아래 어슴푸레 동녘이밝아올 무렵 비석거리에 모여 빗자루를 들고 마을 길을청소하다가,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우르르 바닷가로달려갔다. 수평선 위로 미끈하게 솟아오르는 태양!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던 일출의 광경이 이제는 창세에게도 사뭇 달리 보였다. 찬란하게 퍼져가는 햇빛을 가리키면서 정두길은 희망의 빛, 해방의 빛, 승리의 빛이라고 말했다.  - P49

추석 명절을 지내자 곧 추수철이 왔다. 모처럼 장모가찾아와도 굽힌 몸 펼틈이 없어 엉덩이로 인사한다는 바쁜 나날이었다. 마을마다 사람들이 목장에 올라가 월동용 건초를 장만했고, 이어서 서리 내릴 무렵에는 조를 추수했다. 풍년은 아니었어도 추수의 육할 이상을 빼앗아가던 공출이 사라지자 집집마다 어느 정도 곳간을 채울수 있었다. 점심은 굶고 저녁에는 톳나물죽을 끓여 먹기일쑤이던 그 지긋지긋한 시절이 이제는 끝이 났다. 추수를 마친 마을 전체가 흐뭇하게 배불러 보였다. 가을철 최상의 먹을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향기롭고 빛깔 고운 노랑 햇쌀밥에 살진 갈칫국인데, 사람들은 참으로 오랜만에 그것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즐거워했다. - P61

배낭 속에는 신문 외에 다른 물건이 들어 있기도 했다.
작은할아버지의 건재한약을 고객에게 배달할 때도 있었고, 보름에 한번꼴로 작은할아버지와 함덕리의 송장의 어른이 주고받는 한시를 배달하기도 했다. 창세는 배달할 때 말고도 어지간한 거리는 뛰어다녔다. 전에는 어디에 걸터앉으면 한쪽 다리를 덜덜 떠는 버릇이 있어 어머니로부터 복 털어낸다고 야단을 맞곤 했는데, 달리기를 시작하자 희한하게도 그 버릇이 없어졌다.
발목이 잘록하게 가는 말 다리여서 그랬을까, 창세는말처럼 달리기가 좋았다. 지난번 마라톤 경기에서 일주도로를 가득 메운 아이들을 하나하나 따돌리면서 내달 - P63

릴 때의 그 쾌감이라니! 난생처음 느껴본 짜릿한 감각이었다. 저번에 이등을 했으니 다음번에는 꼭 우승을 하고싶은 마음도 생겼다. 그렇다고 마라톤 선수가 되고 싶은것은 아니었고 그냥 달리기가 좋았을 뿐이다. 두길 선생처럼 시를 좋아하는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그날 마라톤 출발에 앞서 두길 선생이 아이들을격려하던 말이 생각났다. 인생은 장거리 경주와 같은 것이니 쉬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서두르지도 말고 침착하게 달려라. 창세는 자신의 삶이 이제 막 출발선을 벗어난마라톤과 같다고 생각했다. - P64

창세는 누나 만옥과 함께 상뒷동산 풀밭에 앉아 눈앞에 넓게 펼쳐진 초원을 바라보았다. 지대가 높은 곳이라 광활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북쪽 멀리 일주도로에 회오리바람이 일어 먼지기둥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일주도로 건너편에 조천리가 있고, 그 너머로 푸른바다가 넓게 펼쳐졌다. 상뒷동산 아래 사방으로 초원 지대가 질펀하고, 한라산 쪽으로 새미오름, 당오름, 바농오름과 지그리오름, 아래쪽엔 기시네(구그네)오름이 보였다. 드넓은 초원 여기저기에 수백마리의 소와 말이 끼리끼리 무리 지어 풀을 뜯는 풍경이 평화로웠다. 말들이 풀을 뜯다 말고 서로 주둥이로 갈기를 다듬어주고, 벌렁 드러누워 네 발로 허공을 차며 요동질하면서 흙목욕하는장면도 눈에 들어왔다. 소똥, 말똥 무더기에 까마귀들이날아들어 헤집으며 먹을 것을 찾았고, 거기서 알싸한 냄새가 풍겨왔다. - P70

"만옥아, 잘 들어라이. 말을 이기려고 하면 안 된다. 잘 사귀어야지 이기려고 하면 안 되여. 탈 나고 말아. 말은 사람에 의해 길들여지지만, 사람 또한 말에 의해 길들여지는 것이다. 농사짓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라 농사라는 거는 사람과 땅이 서로 의좋게 사귀는 일이여. 땅은 사람에 의해 길들여지고, 사람 또한 땅에 의해 길들여져지는 거주. 알았주이, 만옥아?"
만옥이 그 말에 감복하여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예, 알았수다!"
"자, 게민 다시 못에 가서 말에게 물 먹영 오라. 기를 팍 꺾어놨으니 이젠 그렇게 날뛰지 않을 거다. 그래도 이 말을 완전히 느 말로 만들려면 앞으로 보름동안 매일 두시간 이상 가르쳐야 될 거여." - P82

칠만명 일본군의 취사용 숯을 마련하기 위해 수없이벌목된 잡목숲도, 항공유용 송진 채취로 도끼에 찍히고톱으로 잘린 소나무숲도 이제 그 상처를 아물리는 중이었다. 일본인의 건착선, 잡수기선 들이 싹쓸이하던 제주바다도 해방을 맞아 갈치, 고등어, 소라, 전복 등이 살찌고 있었고, 온갖 노역에 시달리던 말들도 목장으로 돌아와 건강을 회복하는 중이었고, 날마다 백여마리씩 도살당해 그 수가 확 줄어든 소들도 다시 불어날 터였다. 전쟁 전에 제주 산야에는 소 삼만마리, 말 이만마리가 방목되었다. - P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가 현기영은 「순이 삼촌」 한편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움직일 수 없는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장편소설 『제주도우다』를 펴냄으로써 마침내이것이 4·3의 진실이고 이것이 어처구니없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순박하기그지없는 민초들이 겪은 아픔과 슬픔이고 이것이 제주의 현대사임을 증언하는우뚝한 거봉(巨峯)으로 불쑥 솟아올랐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읽는 내내 숨이 뜨거워지면서 거장의 숨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분명 소설을읽고 있음에도 눈앞에 스크린이 펼쳐진 것처럼 생생한 영상이 떠오른다.
그러나 압도적인 역사의 장면을 냉정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동시에그 역사를 만들어내는 수많은 개인들의 삶과 목소리와 내면을 담아내는섬세하고 인간적인 시선은 오히려 영상의 한계를 넘어선다. 4·3을 이토록장대하면서도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것이다. 정치권력에 의해 노골적인 역사 부정과 기만과 왜곡이 자행되는 오늘, 현기영의 ‘제주도우다』는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거대한 진실의 암각화를새겨놓았다. 

이창동 영화감독

사람보다 더 잔인한 동물이 있을까? 없다. 이 질문과 답에 이의를 제기할 수없도록 만드는 고통스러운 역사 제주 4·3. 너무나도 아프기에 마주하기 두려운역사. 
그러나 이 책은 내 안의 아픈 역사 역시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역사라고 조곤조곤 알려주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마침내, 남도 북도 아닌 ‘제주도‘가 보인다. 

최태성 역사 강사, 작가

무엇보다 감동적인 장면은 귀향민들이 배에서 막 내렸을 때였다. 고향 땅을 오래 떠나 있던 그들은 너나 할것 없이 털썩 무릎을 꿇고 엎드려 흙냄새를 맡았다. 아예큰대자로 몸을 던지거나 두 팔로 땅바닥을 안는 시늉을하기도 했다. 고향의 바다냄새, 그 달콤한 갯비린내가, 향긋한 건초 냄새가, 우람한 팽나무와 검디검은 현무암이, 그리고 어머니 한라산이 그들을 고향으로 이끌었던것이다. 떠난 자들이 꿈에도 그리는 한라산, 떠났던 자들이 반드시 돌아오는 곳, 그들은 이 땅은 바로 나 자신이다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겹겹이둘러싸인 그들이 사뭇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 P295

남조선으로 가겠느냐고. 허 참! 북조선, 남조선이라니, 난생처음 듣는 말 아니우꽈? 그래서 물어십주. 거 무슨말이냐고, 북조선은 뭐고 남조선은 뭐냐고하니까 삼팔선이 그어졌다는 거라예. 허, 그것참!"
"그래서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해십주, ‘우린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니고, 제주도로 가겠다!‘ 하고."
통쾌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자 마중 나왔던 사람들이 감격해서 환성을 질렀다.
"맞아, 맞아, 우린 북조선도 남조선도 아니고 제주도란 말이여!"
"하하하, 우린 북도 아니고 남도 아니고, 제주도다!" - P296

재갈 물랐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진 통쾌한 언어들, 그 언어들이 잠들어 있던 그들의 정신을 후려갈겼던 것이다. 지난날 자신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초라하고 비굴한 존재었는지 그제야 절절하게 깨달았다. 그 언어들이 가슴속에 켜켜이 쌓인 노예의 비굴과 치욕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듯했다. 무병을 앓던 자가 내림굿을 받은 것처럼 그들은 생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고, 모호하던 것들이명백해지고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한꺼번에 깨달아진듯이 느꼈다. 그들은 환호했고, 그 열광 속에서 고동치는자신의 핏줄을, 자신의 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땅임에도 살얼음 밟듯 살금살금 다니던 지난 세월을 벗어나이제는 발을 구르며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그것은 지금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존재감이었다.
‘청년의 시대‘라고 했다. 이제 모든 것이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다. - P3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릇을 하고 있었다. 마을에 할당된 공출량 중에 제일 많은 양을 살기가 좀 나은 편인 그가 맡아주었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고마워했다. 그는 서른마리 넘게 말을 키웠는데, 그 때문에 마당이 다른 집보다 두배나 넓고 마구간도 남쪽 울담을 전부 차지할 정도로 컸다. 그많던말이지금은 강제공에 빼앗겨 열다섯마리만 남았다. 열두마리는 징용당한 청년들과 함께 홋카이도 탄광과 규슈탄광에 끌려가 있었고, 나머지 세마리는 한라산 아래 부대오름의 진지동굴 파는 현장에서 청년들이 곡괭이로파낸 흙과 돌을 날랐다. 급박해진 정세에 따라 진지동굴작업을 단기간에 끝내야 했으므로 사람과 말이 함께 채찍을 맞으면서 혹독한 노동에 허덕였다.  - P213

그래서 창세의 외삼촌은 부대오름의 진지동굴과 와흘 마을 사이를 오르내리면서 말들이 과로로 쓰러지지 않도록 방목중인 다른 말들을 이끌고 가서 교대해주곤 했다. 말은 일단 과로로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수가 많았다.
외갓집에 간 이튿날 창세는 노역으로 골병든 말 두마리가 외삼촌과 함께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망가진 몰골이 너무도 애처로웠다. 혹사당한 끝에 빈사상태에 이른말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먹지 못해 골병든 사람들 얘기를 하면서 외삼촌의 구둣솔처럼 짙고 억센 눈썹이 분노 - P2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물세살 동갑내기 단짝친구인 정두길과 부대림은이른 아침에 연대 밑 바닷가에서 만나 바닷바람을 쐬곤했다. 식민지 청년의 울울한 가슴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바다밖에 없다는 듯이 그들은 거의 매일 일출을 보러새벽 바다로 갔다. 어둠에서 깨어나 붉은 노을을 날개처럼 펼치면서 솟아오르는 태양은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었다. 거침없이 쑥쑥 솟는 태양을 보고 있으면 이 고난의세월도 언젠가는 끝나고 모든 것이 잘될 것 같은 생각이들었다. 시를 좋아하는 두길은 그런 마음을 잘 나타낸 시를 어떤 번역시집에서 발견하여 읊어주었다. 영국 시인하우스먼의 시였다. - P115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6월 초보리 베기 철이 왔다. 그야말로 죽은 송장까지도, 부엌의 부지깽이까지도일을 돕겠다고 꿈지럭거려야 할 정도로 일손이 바쁠 때였다. 보리가 익어 쓰러지기 전에 수확해야 하므로 진뜨르 노역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일시 중단이아니라 완전 중단이었다.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었다.
떼까지 입히다가 중단된 활주로 공사는 비행기 한대 앉아보지 못한 채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다.  - P130

일요일 오후는 창세에게 아주 귀한 시간이었다. 일요일에는 오전에만 들녘에 나가 송진 채취 일을 하고 정오이후에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오후 시간이 주는조그만 행복, 창세에게 그것은 바다였다. 바다에는 고픈배를 다소라도 달래줄 물고기와 소라, 게, 보말들이 있었고, 짙푸른 바다와 작열하는 태양, 시원한 물속과 뜨거운 햇볕 속에서 느끼는 벗은 살과 뼈의 행복이 있었다. - P131

어느 일요일 오후, 모처럼 찾아온 휴식의 시간. 모처럼바람이 없어 주위는 고요하다. 바람이 많은 고장이라 잠시라도 바람이 자면 주위의 정적이 낯설게 느껴진다. 정적 속에서 타타타타 어머니의 미싱 바늘 박는 소리가 도드라지고, 멀리 떠났던 파도소리도 다시 들려오고, 바다냄새도 짙게 맡아진다. 정적 속에서는 사람 부르는 소리또한 멀리 가고 크게 들린다. 햇빛이 짜랑짜랑한 한낮, 골목길을 걸어오면서 어깨가 넓고 몸통이 굵어 ‘왕돌‘이 별명인 행필이 창세를 소리쳐 부른다. "야, 눈큰볼락, 왕눈아, 바당에 고기 쏘러 가자!" - P131

‘학자 나무‘라고 불리는 그 회화나무는 조천리 김해김씨의 먼 조상이 육지로부터 들여와 심은 것인데, 그 덕분인지 구한말에 그 문중에서 학자와 벼슬아치가 여럿나왔다. 그래서 그 나무는 한때 번성했던 그 문중의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물은 구한말의 그들이 아니라 일제와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그들의 자식, 손자 들이다. 특히 김명식, 김문준, 김시범,
김시용 같은 청년 지식분자들은 거의 절대적 흠모의 대상이다. 대의를 위해 몸 바친다는 것, 목숨 바쳐 싸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가혹한 탄압에 몸도정신도 무너지고 집안도 몰락하고 말았는데...... - P138

검은 현무암의 해변에서 바위를 달군 열기가 해풍에밀려오는데, 그 속에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실려 있다. 해초를 햇볕에 말릴 때 생기는 요오드 냄새는 갯냄새 중에가장 향기롭다. 기포 구멍이 숭숭 뚫린 널찍한 현무암 암반과 풀밭에 해녀들이 채취한 미역과 감태가 널려 햇볕에 꾸들꾸들 말라간다. 달구어진 바위와 돌이 창세의 맨발바닥을 뜨겁게 지져댄다. 뜨거운 줄도 모르고 바위에찰싹 붙어 뻗어 있는 흰 돌찔레(돌가시나무)꽃이 신기하다.
현무암 지대가 끝나고 모래 둔덕이 나타난다. 그 위로 순비기나무들이 뱀떼처럼 얽히고설켜 기어가고 있다 - P170

문득 눈앞에 사방이 탁 트인 푸른공간이 펼쳐진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만들어내는 광활한 공간이다. 비상경계령이 삼엄하게 내려진 바다는 잠수기선과 화물을나르는 10톤짜리 조그만 발동선 하나와 감물 들인 갈색돛을 세운 돛단배 하나만 가까이에 보일 뿐 휑하니 비어 있다. 그러나 바닷속에는 귀신고래보다 더 크다는 미군 잠수함들이 잠행하고 있고, 먼 수평선 위 뭉게구름 속에는 구라망 전투기들이 숨어 있고, 더 높은 구름 속에는 B29가 숨어 있다. 그래서 육지 바다에 진출하는 해녀들의 원정 물질이 몇달째 끊겼고, 앞바다의 물질도 멀리나가지 못하고 해변 가까운 데서 한다. 그것도 돈이 되는소라, 전복은 잠수기를 사용하는 잠수부들이 싹쓸이해버리고 해녀들은 공출용감태채취에 내몰려 그것들을캘 여유도 없다. - P171

숨이 참을 수 없이 가빠졌다. 아뿔싸! 자칫숨이 막혀 죽을 판, 손목에 감은 끈을 풀어 전복에 물린빗창을 내버린 채 황망히 물 위로 떠올랐다. 떠오르다가더이상 숨을 참지 못해 울컥 물을 삼키고 말았다. 그와동시에 물안경에 틈이 벌어져 물이 왈칵 들어오고 머릿수건이 벗겨졌다. 허파가 찢어지는 듯, 눈알이 튀어나오는 듯한 고통! 허겁지겁 솟구쳐올라 수면을 터뜨리는 순간, 손을 뻗어 간신히 테왁을 붙잡고 그 옆의 듬북떼 위에 널브러졌다. 눈앞 풍경이 벌겋게 변하면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 정신은 금방 돌아왔다. 아득히 멀어져가던 정신이 다시 돌아오는 그사이에 노란 놋잔 한개가 번쩍거리며 나타났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만옥은 테왁을 그러안고 두려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숨을 몰아쉬었다. 물 아래 들어가서 너무 욕심을 부리면 죽을 수도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 P175

대공습에 공장이 여지없이 파괴되어 일자리가 사라지고 자칫 폭탄에 맞아 죽을지 모르게 되자 죽어도 고향에서 죽자 하여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고향의 흙냄새를어서 맡고 싶어 갈급증이 난 그들은 서둘러 상륙했으나땅에 발을 딛자마자 땅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것 같아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렸고, 그것을 본 아이들이 재미있다고 깔깔 웃어댔다. 휘청거리던 그들이 털썩 무릎을 꿇고 엎드려 흙냄새를 맡았다. 아예 맨땅에 몸을 던져흙에 얼굴을 비비면서 냄새를 맡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흐르는 눈물로 번들거렸다. 고향의 흙냄새였다. 키우던 말과 소가 아무리 멀고 낯선 곳에 홀로 남겨져도, 그게 깜깜한 밤중일지라도 태어난 외양간을 찾아오는 것이 본능이듯이, 머나먼 객지의 그들 역시 고향의 흙냄새에 이끌렸던 것이다. - P2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