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반이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계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세계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도반이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계와세계의 일어남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인도하는도 닦음을 천명하노라. - P7

걸어서는 결코 세계의 끝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세계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남도 없다네.
그러므로 세계를 알고 슬기롭고
세계의 끝에 도달했고 청정범행을 완성했고
모든 악을 가라앉힌 자는 이 세계의 끝을 알아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네. - P7

자신의 밖으로는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세계의 끝을 볼수 없다는 말은, 내게 바깥을 향해서는 아무리 외쳐도 대답을들을 수 없다는 말로 들렸다. 그러니 대답을 들으려면 세존의말씀대로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리라. 그 일이 내게는 글쓰기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 P7

없는 일들이 내게 혹은 이 세계에 일어났을 때, 내가 제일 먼저한 일은 뭔가를 끄적이는 일이었다. 이런 끄적임이 한 편의 글로 완성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게 어떤 글이든, 쉽게 쓰여지는 글은 없다. 이런 식이다. 문장을 하나 쓴다. 그다음에는 침묵이다. 그러다가 문장 하나를 더 쓴다. 그러고는 다시침묵이다. 문장을 쓸 때마다 만나는 이 침묵은 완전한 무無처럼느껴진다. 그때 나는 내 안의 가장 깊은 곳, 인식의 끝에서 더듬거리는 중이다.
그렇게 수백 번 혹은 수천 번의 무와 대면한 뒤에야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 지난 십 년간 내가 끄적였던 대부분의 글자들은 이렇게 무를 대면하는 일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졌다. 끝까지 쓴 글마저도 결국 질문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드물긴 했지만 마지막 문장을 쓰기도 전에 어떤 대답을 얻게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면 최초의 끄적임에서 완성된 글사이의 어딘가에서 나는 어떤 문장들이 저절로 쓰여지는 것을경험했다. 그 문장들이 대답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시인 백석이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쓴 것과 같이. - P8

오래전의 일이다. 대학에 입학하니 고교 시절과 달리 시간이 남아돌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곧 나는 해결책을찾았다. 공책에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작가가 되겠다는 목표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끄적이는 게 좋았다. 쓸게 있으면 그걸 쓰고, 쓸게 없으면 책에서 찾은 인상 깊은 구절을 옮겨적었다. 그렇게 자주 쓰다보니 어느 순간 나는 시를 쓰고 있었다. 시는 형편없었지만, 시를 쓰는 나는 근사했다. 눈에 띄는것을 적느라 자주 길에 멈춰 서야만 했다. 알고 보니 시를 쓴다는 건 책의 문장을 베껴쓰는 일과 비슷했다. 그제야 나는 이세계가 얼마나 정교한 곳인지 깨닫게 됐다. 나는 이 걸작의 세세한 부분을 제대로 베낄 수 없었다. - P15

요컨대 카프카에게 일기란 사전에 규정된 형식이 없는 글쓰기, 따라서 완벽하게 쓴다는 강박 없이 쓸 수 있는 글쓰기였다. 사전에서는 일기를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나라면 ‘읽는 사람이 없는, 매일의 글쓰기‘라고 말하겠다. 심지어는 자신조차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써야 일기가 된다. 일기를 쓰는가장 중요한 목적은 쓰는 행위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백년뒤에 누군가 읽는다고 생각했다면 카프카도 이처럼 두꺼운 일기를 쓰진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카프카 역시 자신의 일기를 지우곤 했는데, 그건 일기의 목적이 쓰는 행위에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 P17

그러나 도깨비도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두 번 이상 삶을살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실수투성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당연하다. 그렇다고 영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메모 앱인에버노트의 광고 카피는 ‘Second Brain‘이다.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나 해야 할 일 등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대신 에버노트에저장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기를 상품화하는 회사가 있다면, 그 광고 카피는 ‘Second Life‘ 가 될 것이다. 캐서린 맨스필드가 말한 자기이해란 바로 이런뜻이다. 우리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한 번 더 살 수 있다. - P20

그러니 ‘작가선언 6.9‘가 아니었다면 나는 끝내 용산을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늘 도망만다녔던 사람이니까.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려운이들이 철거민만 있는 것도 아니고 철거민들이 용산에만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용산‘에만 집중하는 것은 그곳에서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이는 결국 또 다른방식으로 우리의 비정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어설픈 자의식, 모든 ‘현장‘에 다 참여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용산에 한번 가봤네 자위하는 것으로 끝날 거라면 차라리 안 가는 게 낫다는 설익은 합리화. 내가 용산에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겠나, 한두 명 더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만성화된 패배의식과 습관화된 무관심...... 더 나열할 수도 있지만, 실은 단한마디로 정리할 수도 있다. 타인에 대한 윤리의 부재. 이는 물론 "내 집, 내 가족, 내 돈과 내 일이 아니면 어디에도 마음 쓸 시간을 내지 못하게 하는"(이명원) 우리 사회의 구조에서 비롯하는 측면이 크지만 우리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 P46

여기에는 분노도 기쁨도 없으니 「홍염」과 비교하면 의심의 여지없이 충분한 애도에 실패한 문장들이다. 자신에게 찾아온 밤의 그림자에서 이들은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이들의 삶과 죽음을 지켜본 작가도 독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김동인은 「감자」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 그게 그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그게 우리의 운명이다. 타자의 고통 앞에서 문학은 충분히 애도할 수 없다. 검은 그림자는 찌꺼기처럼 마음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애도를속히 완결지으려는 욕망을 버리고 해석이 불가능해 떨쳐버릴수 없는 이 모호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게 문학의 일이다. 그러므로 영구히 다시 쓰고 읽어야 한다. 날마다 노동자와 일꾼과농부처럼, 우리에게 다시 밤이 찾아올 때까지. - P49

그게 소설이든 시든, 어떤 젊은이가 갑자기 책상 앞에 앉아서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면, 그건 지금 그의 내면에서 불길이일어났다는 뜻이다. 불은 결코 홀로 타오르는 법이 없다. 그러니 그 불은 바깥 어딘가에서 그의 내면으로 번졌으리라. 하지만그 불이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불은 어디에서든 옮겨붙을 수 있으니까. 불은 바로 옆에 앉은 사람에게서도, 수천 년전에 죽은 사람에게서도 전해질 수 있다.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와 수천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도 그 불은 원래의 열기를 고스란히 보존한 채 순식간에 번져간다. 그게 불의 속성이다.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쓰기 시작하는 젊은이의 가슴속에서 이는 불 역시 마찬가지다. 순식간에 타오르고, 그는 이 열기에 놀란다. - P50

그러나 이 불은 곧 찾아들 것이다. 그것 역시 불의 속성이다. 순식간에 타오르고, 또 그만큼 빨리 꺼진다. 그러므로 모든소설가들의 데뷔작은 검정색이어야 한다. 그건 어떤 불이 타오르고 남은 그을림의 흔적이니까. 예민한 작가라면 첫 작품을 다쓰자마자 그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늦더라도 두번째 책을 펴낼 즈음이면 누구라도 자신의 데뷔작이 검게 그을렸다는 사실을, 하지만 두번째 책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시인과 소설가의 길은 갈라진다. 시인은 계속 불을 찾아나설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에게는 이제 불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필요한데, 예컨대 건강이나 체력 같은것이다. 마라톤을 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무라카미 하루키가 "긴 소설을 쓰는 것은 서바이벌 훈련과 비슷해요. 신체적인강함이 예술적인 감수성만큼이나 중요하거든요"라고 말한다면놀랄 사람이 많지 않겠지.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마르케스의 말을들을 때도 과연 그럴까?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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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석조전


그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밤의 석조전.

낮에는 가본 적 있다. 모든 것이 매끄럽고 선명했다. 기둥의 수, 창문의 투명도, 호위무사처럼 서 있는 나무의 위치까지도.
낮엔 다 볼 수 있었다. 돌인지 자갈인지 모래인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밤이어야만 했다. 백 년 전의 사람들, 백 년 전의비, 백년 전의 쇠락 앞으로 나를 데려간다면

모든 돌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고, 나는 이 거대한 돌이 말하게 하고 싶었다.

티켓을 끊고 들어간 밤의 석조전은 인공적인 빛에 휩싸여있었다. 야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밤의 석조전이 감추고 있는 밤의 석조전으로 들어가려면.

눈은 들여다볼 수 있을 뿐 열지 못한다. 닫을 수 있을 뿐이다.

여러 겹의 달빛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한 사람이 눈을감았다 뜨는 소리는 몇 데시벨일까. 꽃병 속에서 줄기가 짓 - P42

무르는 소리는?

몇 걸음 못 가 돌아봤을 때, 아닌 척 눈을 부릅뜨는 밤이보였다. 실핏줄이 드러나 피곤해 보이는 눈이었다. - P43

자귀


오늘부로 너의 모든 계절을 만났어

신비로운 꽃을 피우고
고개를 떨군 채 차곡차곡 말라가고
앙상한 가지 위에 흰 눈을 받아 안는 너의 모든 계절을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내 안에서 이야기가 될 수 있게
기다렸어

한 존재를 안다고 말하기까지
매일매일 건너왔고

건너왔다는 건
두 번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일 거야

내가 볼 때
너도 보았겠지

너는 걷거나 말할 수는 없지만
시간의 목격자가 될 수 있고

내가 어떤 표정으로 네 앞에 서 있었는지는 - P56

오직 너만이 알 테니까

살아 있다는 이유로 우리가 나눠 가진 것
동심원을 그리며 가라앉은 것

죽지 마 살아 있어줘
조약돌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거울이 되어주는 풍경들
가라앉은 말이 더 낮게 가라앉는 동안

새잎은 말려 있다
말려 있다가 피어난다
아침, 노트를 펼쳐
펼쳐지는 영혼이라 적을 때

멀리서 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겪고 있다
잎이 떨어지는 순간마다 귀가 아프다 - P57

청귤


오늘 당신은
청귤의 모습으로 오는군요

설익은 것처럼 보이지만
제법 달다고
그 푸르뎅뎅함이 바로 나라고

청귤은 내게 일렁이는 무늬로 말하네요
당신은 나를 제단 위에 올릴 수 있고
구둣발로 짓이길 수도 있지만
나는 어디서든 떳떳하고 공평하다고

나에게서 지옥을 본다면 그건 당신의 지옥이라고
물이면 물, 불이면 불이라는 표정을 짓는군요

흰 천으로 잠시 덮어두었습니다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새를 향해 다가가는 걸음이 새를 쫓는 걸음이기도 하기에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창밖을 보려면 창문에 비친 나부터 보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 P68

놓여 있는 모양 그대로
바라보기
조각내지 않기

보여줘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게

흰 천을 걷자 청귤이 있습니다
당신은 내게 사랑의 모습으로 오는군요

청귤을 보는데 심장에 화살을 꽂고 걸어오는 맹수가 보여요
어린 나를 물고 한 발 한 발 오고 있어요
구해달라는 말인 것 같아요 - P69

기록기


나는 심전도 그래프의 바늘,
당신의 숨을 대신해서 적고 있습니다

당신은 바다에 도착해 있군요 언젠가 당신은 흰수염고래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지요 현존하는 짐승 가운데서 가장 큰 짐승, 무리를 이루지 않고 단독 혹은 두세 마리만 산다는, 심장의 질량은 일톤에 달하며 몸 뒷부분엔 흰색 반점이 많다는 이야기. 왜 하필 지금 그 기억이 당신을 이끌었는지 알 수 없지만 흰수염고래를 바라보는 당신의 숨은 고요한 궤적을 그리는군요 흰수염고래는 집을 향해 헤엄쳐가고있네요 내가 있는 세계에서는 가랑비에도 발이 퉁퉁 붓곤하는데 이곳에선 온몸을 흠뻑 담가도 소매끝조차 젖지 않네요 당신은 망설임 없이 흰수염고래 등에 올라타는군요 가라앉았다 솟구쳐 오르기를 반복하며 파도를 일으키는군요 멀어져가는군요 자유롭다고 살아 있다고 느끼나요 그런데 왜눈시울이 붉어질까요 왜 자꾸 창백한 창틀과 바람에 흔들리는 흰 커튼이 떠오를까요 나는 다 기억합니다 우리 함께 지나온 청보리밭 넘실대던 길, 나무둥치에 앉아 숲의 비밀을듣던 시간, 타닥타닥 타오르던 모닥불소리, 담요의 촉감과, 흰모래사장에 들개처럼 서서 바라보던 석양까지도...... 당신의 감은 눈 속에 이렇게 넓은 세상이 들어 있을 줄 몰랐어요 이 모든 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보고 싶었던 걸 보았을까요 찾았을까요 - P84

하지만 너무 오래 물속에 있는 건 좋지 않아요 이제 그만나와 함께 뭍으로 가요 혼자 있고 싶은 거라면 아무에게도방해받지 않을 오두막을 지어줄게요

뭍에도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어요 곧 가로등에 불이켜질 시간이에요

그만 깨어나주세요

자꾸 그렇게 자신을 잊으려 하지 말아요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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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밭 걷기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모두 나의 땅이라 했다. 이렇게큰 땅은 가져본 적이 없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뜬다. 있다.

무엇을 심어볼까. 그게 뭐든 무해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뜨면, 무언가 자라기 시작하고. 나는 기르는 사람이 된다.


주황은 난색(色)이에요. 약동과 활력을 주는 색. 그는 머잖아 내가 당근을 수확하게 될 거라 했다. 나는 내가 바라온 것이 당근이었는지 생각하느라 잠시 휘청했으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쏟아짐이라 믿었다.

하지만 당근은 보고 있었네. 나의 눈빛. 번뜩이며 나를 가르고 간 것.

나의 당근들, 흙을 파고 두더지를 들였다. 눈을 가졌다.

자루를 나눠드릴게요. 원하는 만큼 담아 가셔도 좋아요. 혼자 먹기 아까운 당근들,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떠나보낸 땅 위에서

이제 내가 마주하는 것은 - P34

두더지의 눈

나는 있다

달빛 아래 펼쳐지는
당근밭

짧은 이야기가 끝난 뒤
비로소 시작되는 긴 이야기로서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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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나는 너의 왼팔을 가져다 엉터리 한의사처럼 진맥을 짚는다. 나는 이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 같아. 이 소리는 후시녹음도 할 수없거든. 그러니까 계속 걷자. 당근의 비밀을 함께 듣자. 펼쳐진 것과 펼쳐질 것들 사이에서, 물잔을 건네는 마음으로.

2024년 6월
안희연

밤 가위


가위는 가로지르는 도구다. 가위는 하나였던 세계를 둘로 나누고 영원한 밤의 골짜기를 만들고 한 사람을 절벽에 세워두고 목소리를 듣게 한다. 발아래, 당신의 발아래 내가 있으니 그냥 돌아가지 말아요.

절벽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가위는 있다. 그는 밤가위로 밤을 깎는다. 밤의 껍질은 보기보다 단단하다. 밤으로부터 밤을 구하려면 밤도 감수해야 한다. 피부가 사라지는 고통을, 그래도 조각나지는 않는다. 밤 가위는 밤의 둘레를 천천히 걸어 하나의 접시에 당도한다. 당신 앞에 생밤의 시간이 열릴 때까지.

당신 발밑으로 이유 없이 새 한 마리가 떨어진다면 제가 보낸 슬픔인 줄 아세요. 저는 아직 절벽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 P14

발광체


발밑으로 돌이 굴러온다. 어디서 굴러온 돌일까. 쥐어보니 온기가 남아 있다. 가엾은 돌이라고 생각하며

걷다보니 또 돌이 굴러온다. 하나가 아니라면. 거듭해서 말해져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나는 간곡한 돌을 쥐고 있다. 바닥을 살피며 걷는 버릇이 생겼다.

돌이 온다 또 돌이 온다. 주머니는 금세 불룩해진다. 더는 주워 담을 수 없는데 계속해서 굴러오는 돌이 있어서. 나는 돌의 배후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무거운 돌은 무서운 돌이 된다.

사방에서 돌들이 굴러온다. 굉음을 내며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모르는 돌은 무한한 돌.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돌의 의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 P15

갈망


그것은 사람처럼 걷고 있었다

마음이 어두울 땐 환해지고
환할 땐 희미해졌다

당신은 오래 알던 친구 같군요
무심히 말을 걸어본 적 있지만
대답을 들어본 적은 없다
의자를 내어주어도 앉지 않는다

그것은 오인될 때가 많다
비가 오지 않을 때조차 비를 맞고 있다
독성이 있는 사과일 거라고
심장을 옭아매는 밧줄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것은 다만 기다리고 있다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는 풍경을 골똘히 바라볼 뿐이다

수많은 이유로 아침을 사랑하고
그보다 더 사소한 이유로 여름을 증오하는 것처럼

숲이 거기 있다는 이유로
숲을 불태우러 오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 P18

그것은 조용히 타오른다

까맣게 탄 몸으로 그것은 걷는다
빗방울의 언어가 얼룩으로만 쓰여지듯
흰종이가 흰 종이인 채로 남아 있더라도
말해진 것이 있다고

발도 없이 문턱을 넘는다
귓바퀴에 고이는 이름이 된다
익숙한 침묵이 낯선 침묵이 되어 걸어나오는 동안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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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


깜짝 놀란다
내가 내 웃음소리를 듣고서
이건 누구의 것일까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그 정체를 헤아리듯이
웃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살핀다

어두워 여긴 너무 어둡고 고요해

병원이니까 아무래도,
이건 누구의 대답일까

웃음은 멈추지 않는다

바로 앞에 병상이 펼쳐져 있고
거기 한 사람이 누워 있다

웃음소리를 듣고서 - P108

지연이냐? 지연이구나!
나를 부른다
나는 지연이가 아니지만

나를 알지 못한다

나는 누구의 것일까

생각에 잠긴 척 고개를 숙인 웃음이
병원 밖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병원 밖에서 나를 데리고 온다 - P109

시인의 말



내 시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물 수(水)에 구슬 옥(玉)을 써야지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눈물은 나의 어머니, 나의 집.
나를 기른 단 하나의 빛.

멋대로 가져와 붙인 이 이름이 나를 모조리 삼키기를 바란다.
나를 삼키고 새로 태어나기를.
원 없이 살아가기를.

수옥, 수옥만을 나는 바란다.

2024년 6월
박소란

그럴 때면 시인의 시집을 꺼낸다. "몇몇은 울고/몇몇은 아주취해버린 것 같았던 소란 속에서 침묵을 지키다 돌아올 때면, 병원 복도에 홀로 앉아 호명되기를 기다릴 때면, 봉분 앞바래버린 조화를 새것으로 바꿔놓을 때면, 알 수 없는 허기에 식당을 찾아 어두운 골목을 헤맬 때면, 미래라는 것이 "너무 어렵고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래서 "머리말에 쏟아져 질벅이는 슬픔을 가만히 문지르는 새벽이 찾아올 때면.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 사람은 "불행, 힘내"라고 속으로 웅얼거리고 "말갛게 떨어진 잎사귀를 가만히 주워 들어 "서랍 깊숙이 약처럼 넣어둔다". "눈물이라는 재료를 수집해 접고 오리고 붙이는 데 긴긴 하루를쓰는 그 사람은 "소용을 다한 마음 따위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며 생기로 가득한 여름 속에서도 오래전 뙤약볕 아래 녹아버린 사람들을 기억한다. 라면을 먹다 울고 있는 이의 곁에서 "팅팅 부어오른 용기 속 뜨거운" 눈물을 얻어 마시고 행인의 욕설에서도 노래를 발견하고야 마는 그 사람은 막차를 타고 낡은 방으로 돌아온다. 길 위에서 "느닷없이 찾아들 어떤 물음들을 기다리던 그 사람은 결국에는 기어코 "한다발 눈물처럼 일렁이는" 강에서 "물 수(水) 구슬 옥(玉)" 사람의, 아니 사랑의 이름을 길어내고야 만다. 찰랑거리도록 채워 "슬픔에 잠긴 여행자에게" 건넨다. 오늘도 꺼내 마신다. "목구멍 깊숙이 들이쉴 한번의 숨을 위해서다. 아껴 마신다. 조금 더 살기 위해서다.

정선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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