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개인적으로 이 챕터에 울컥했다. 가끔 즐겨보는 프로그램인지라 뜨끔하기도 했고.

 

  연말 TV 예능 프로그램 시상식에서 아버지들이 아이를돌보는 리얼리티 쇼가 대상을 받았다고 한다. 출생률이 떨어지는 시대에 아이 돌보는 즐거움을 전파하는 것이 이 쇼가 상을 받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 쇼를 보지 않는다. 육아가 거의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떠맡겨지는현실에서 아버지가 아이를 돌본다는 이유만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는 게 불편하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그런데 그보다 큰 이유는 거기 나오는 집들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어린이들도 이 쇼를 본다. 세트장‘이 아닌, 유명 연예인의 실제 집과 거기 살고 있는 다른 어린이를 본다. 대수롭지않게 보아 넘기는 어린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어린이에게는 그 집이 꿈속의 것처럼 크게 보일 것이다. 그 어린이는 어떤 상황에서 TV를 보고 있을까? 누구와 볼까? 부모와 함께 볼까?? 혼자 볼까? 무엇을 하면서 볼까? TV가 놓인곳은 어디일까? 그 어린이는 화면 속 아이를 부러워할까?
  자기 현실과 너무 먼 일이라 아무 상관이 없을까? 만일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정말 아무 상관이 없을까? 그런 생각화면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어떤 어린이는 여전히 TV로 세상을 배운다. 주로 외로운어린이들이 그럴 것이다. 어린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모습을, 함께 노는 즐거움을, 다양한 가족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족이 아니어도 튼튼한 관계를, 강아지와 고양이를, 세상의 호의를 보여 주면좋겠다. 세상이 멋진 집이라고 어린이를 안심시키면 좋겠다.
  나도 TV가 환상을 판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화려한 것을보여 줘야 한다면 차라리 세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면 좋겠다. 어느 집 넓은 거실보다는 그쪽이 더 좋은 환상 아닐까. p101,102



어린이들과 글쓰기를 할 때, 집에 빗댄 설명을 종종 한다.
단어를 벽돌로, 문장을 벽으로, 문단을 방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하나의 문단에는 하나의 생각만 들어가야한다는 것을 잠자는 방, 부엌, 화장실을 구분하는 데 비유하면 설명하기가 좋다. 집의 크기나 식구 수에 따라 방의 개수가 달라지듯이, 글도 상황에 따라 단락 수가 달라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어린이들이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있게 내 경험을 덧붙인다.
"지금 우리 집에는 방이 세 개야. 그런데 선생님은 전에방이 한 개인 집에서도 살아 봤어. 모두 집이야.  - P97

"아니, 선생님이 어렸을 때는 네 식구가 방이 한 개인 집에서 살았어. 나중에는 혼자서 방이 한 개인 집에서 산 적도있고, 그런 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글도 비슷해, 한단락으로 쓰더라도 내용이 잘 정리되면 좋은 글이 돼."
짐짓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런 다음 주제를 설명하고 글쓰기를 시작하게 했다. 칠판에 그린집 그림을 지우고, 뒷짐을 딱 지고, 어린이들 주변을 한 바퀴돌았다. 나의 한 부분이 이제야 어른이 된 것 같았다.
- P103

5년은 어린이의 발달 단계에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를 만든다. 뭘 해도 언니가 더 잘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게다.
가 우리 언니는 워낙에 손이 야무져서 만들고 그리는 건 무엇이든 잘했고, 나는 그쪽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만들기 숙제를 할 때마다 언니 손을 빌리는 게 자존심 상했지만, 혼자힘으로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아 별수 없었다. 그럴 때 옆에서 얼쩡거리면 거치적거린다고 혼나고, 그러다 물도 쏟고종이도 찢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른들이 언니에게는참으라고 하고, 나에게는 말 잘 들으라고 하니 이만저만 속상한 게 아니었다. 나는 정말이지 은지가 너무나 이해가 간다. 은빈이는 너무한다!
- P107

우리가 조금씩 가까워진 건 언니가 결혼하고 조카들이 태어난 뒤의 일이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내 결혼을준비하면서였다. 언니는 내가 결혼할 때 혼자서 친정 역할을 다 해 주었다. 친척들에게 연락하고 잔치를 준비하는 일부터 시댁에 이것저것 챙기는 것까지, 나는 언니 손을 빌렸다. 어렸을 때처럼 별수 없었고, 어렸을 때와 다르게 조금도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었으니 이제 5년 차이는예전만큼 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지붕아래 나는 혼자 있지 않았다. 언니한테 미안하고 고마워서그때 나는 여러 날 잠을 설쳤다.
- P110

선생님은 어린이들이 가장 일상적으로 만나는 전문가이고, 때로는 유일하게 만나는 지식인이다. 어떤 어린이에게는 자기가 아는 가장 친절한 사람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선생님들은 밀려드는 크고 작은 업무 때문에 어떤 부분에는 소홀할 수 있다. 어린이와 밀착한 생활을 하는 만큼 사적으로 감수할 일이 많으니, 때로는 냉정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개인적인 한계로 어린이나 보호자를실망시킬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선생님들의 실수에 너무 엄혹한 것이 아닐까? 한 명의 노동자이기도 한
‘교사‘ 에게 ‘스승‘ 의 모습만을 요구하는 것 아닐까? 특히나특수학교 선생님들에 대해서는 그 길에 들어선 것 자체를
‘헌신에 대한 약속‘으로 여기고 그분들의 희생을 당연하게여기는 것은 아닐까?
- P118

그때 나는 『말하기 독서법, 원고의 개요를 잡고 작업 일정을 세운 참이었다. 독서교실 수업과 글쓰기를 나란히 하려니 ‘아이고, 당분간 큰일 났구나‘ 싶었다. 시간도 에너지도..
넉넉하게 필요했다. 그중 시간은 차라리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있었다. 엄청난 결단이 필요하지만, 노는 시간을 줄이고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면 될 것 같았다. 문제는 에너지, 생산적인 힘이었다. 글을 쓰다 막힐 때나 쓰기에 지쳤을 때 어떻게 창의성과 집중력을 유지할까.
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새로운 것을 배워 보기로 한것이다. 일이나 글쓰기 말고 완전히 몰두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 지금껏 매워 보지 못한 것. 읽고 쓰는 일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 피아노였다. 집 앞 피아노 학원 간판에 ‘성인 취미반‘ 이라고 적힌 것을 눈여겨보았던 터였다. 동네 사람으로서 선생님과 안면도 있었다.  - P130

"어린이들이 훨씬 유연하기는 해요. 대신에 어른은 음악을 조금 더 알아서 재미있게 배울 수 있어요. 이 곡이 어떤곡인지, 대강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니까요."
힘이 되는 말씀이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뒤로 피아노 연주곡을 듣는 일이 더 좋아졌고 귀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더 밝아졌다. 전에는 그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연주가이제는 ‘훌륭하다!‘ ‘황홀하다!‘ 하는 느낌까지 준다. 그래서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게 바로 문제예요, 선생님, 제 귀는 그걸 아는데 제 손이 그걸 몰라요. 그래서 손보다 귀가 더 괴로워요. ‘
그럴 때 선배님들의 조언을 다시 떠올린다.  - P137

나는 웬지 조마조마했다. 혹시 주이가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들은 게 이상하다거나 오히려 기분 나쁘다고각하면 어떡하나 하고,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어땠어?"
"뭐라고 해야 하지? 위로가 됐어요. 그런 날은 운이 좀 좋은 것 같아요."
"위로가 됐어요"라고 할 때 주이는 오른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그 장면이 이따금 생각난다. 평소 주이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린이에게는 어른들이 환경이고세계라는 사실을 그날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네 식당에서 어린이 둘과 함께 와서 식사하는 어머니에게 사장님이 "아기들 덜어 먹을 그릇 따로 드릴까요?"라고먼저 물어보시는 것을 보았을 때, 아파트 1층 현관으로 자전거를 끌고 다가오는 어린이를 보고는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가 자동문이 닫히지 않게 붙잡아 주시는 아랫집 할머니를보았을 때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어린이들에게 세상에대한 좋은 인상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보는 듯하다.
어린이도 어른에게 호의를 베푼다.  - P146

돌려서 말하려고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그대로 쓰기로 했다. 이상하게 들릴 것 같지만 할 수 없다. 나는 어린이를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쓰고 나니 후련하다.
그렇다고 누군가 나더러 각박하다고 한다면 다른 어떤 오해를 받을 때보다도 억울할 것 같다. 나는 마음이 아주 헤프다. 누구든 무엇이든 좋아하기를 잘하고, 그러기 시작하면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채로 한정 없이 마음을 준다.
그 마음을 늘 돌려받는 것도, 애초에 그러기를 바라고 주는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상처도 받지만 그럴 때 상대를 원망하지 않는 것이 나의 덕이라면 덕이다.  - P149

어린이는 이성으로 가르친다! 이것이 나 자신의 사훈이다. 어린이 한 명 한 명을 존중하고, 그들의 지적 정서적성장을 돕고, 좋을 때 좋게 헤어지는 것. 직업 윤리와 진실한자세만 있다면, 굳이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고도 성과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어린이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를생각하지 않는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생각하지 않으려고노력한다. ‘사랑‘이란 내가 다루기에 너무 크고 어렵고 조심스러운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마음이 드러날지도 모르니 늘 조심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 P151

삶이나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나에게는 주제넘는 일로 느껴진다. 신성하게 여긴다거나 금기시한다거나 해서는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더 많이 알거나, 차라리 더 적게 알아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며칠 동안 그 생각을 하지않으려고 노력했다. 걷고, 영화를 보고, 반찬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또 걷고, 씻고, 음악을 듣고, 걸었다.
그런데 무엇을 하든 계속 눈물이 나왔다. 그래서 써 보기로했다. 이 글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누군가에게 보여 줄 수는있을지, 다 모르는 채로,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죽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 P158

 힘들었던 어느 시기를 뭉뚱그려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마음이 물러서 그런 건지, 실제로 그럴 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삼십 대의 나는 힘 쓸 일, 감정 쓸 일이 많았다. 내내 퍼석한 얼굴로 사는 나를 보다 못한 선배 언니가 밥을 사주다가 드라마 대사를 빌려서 물어 주었다. 너도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지? 그랬다. 무딘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잠자리에 들면서 아침에는 죽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죽고 싶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죽겠다는 것은,
- P159

가해자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일을 범행을 정당화하는 데소비하는 것은 학대 피해 생존자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학대 대물림‘은 범죄자의 변명에 확성기를 대 주는 낡은 프레임이다. 힘껏 새로운 삶을 꾸려 가는 피해자들을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예비 범죄자‘로 보게 하는 나쁜 언어다. 가정에서 아이를 학대해선 안 되는 이유는 아이를 아프게 하고, 존엄을 무너뜨리고,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이유는 충분하다. 가해자의 잔인한 범행을 나는 ‘악‘이라는 개념 말고 다른 것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악행의 기승전결은 전혀 알고 싶지 않고, 합당한 벌을 받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러니까 칼국수를 먹다가, 빨래를널다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가 갑자기 생각하는 것은, 다섯 살 어린이의 삶이다.
모든 인간이 소중하다거나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인간은 소중한지 아닌지 따질 수 없는 존재라고 배웠다.
- P162

내가 아는 삶은 그런 게 아니다. 삶의 순간순간은 새싹이 나고 봉우리가 맺히고 꽃이 피고 시드는 식으로진행되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그런 단계를 가졌을지 몰라도 살아 있는 한 모든 순간은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 내 말은다섯 살 어린이도 나와 같은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다섯 살 어린이의 이름은 무엇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목소리는 어떨까. 자꾸 그런 생각이 난다. 그 어린이의 삶을 떠올리려면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무슨 만화를 좋아하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생각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에게 그런 것이 존재했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 차마 혼자서라도 궁금해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감히. 또 생각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살고 싶었을까, 죽고 싶었을까..
혼자 밤 산책을 하면서 어찌할 도리가 없이 울었다. 우는것도 자기만족인 것 같아서 참으려고 걷기 시작한 건데 소용이 없었다. 세상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 P163

그런데 이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아있는 어린이들이 있지 않나. 대체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거야나 하나가 경멸해도, 나 하나가 사랑해도 세상은 그대로 있고 누군가는 살아 있다.
다섯 살 어린이에게는 삶이나 죽음을 선택할 기회가 없었다. 그 어린이는 다른 사람의 의지로 인해 죽었다. 나는 삶을선택할 수 있었다. 문제 해결은 여전히 요원하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날마다 살기로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나처럼 선택의 순간을 가졌는 아니든 간에,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 어떻게든 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삶을 선택한다는 건 나아가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니까. 나아가려면 외면할 수 없으니까, 나아가려면 맞서야 하니까. 삶을 선택한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어린이의 명복을 빈다. 떠나던 순간에 인간은 상상할 수없는 자비로운 손길이 함께했기를 마음 깊이 빈다. 천국이꼭 있었으면 좋겠다. 그곳에서는 어린이가 좋은 음식을 먹고 마음껏 뛰놀며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 있으면 좋겠다.
- P164

나는 ‘남의 집 애‘라는 말이 좋았다. 그러면 나는 ‘남의 집엄마‘ ‘남의 집 아빠‘ ‘남의 집 이모 삼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가까이에서 보고 배우고 좋아하고 샘내고 안심하고 걱정하면서 ‘남의 집 애를 같이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어떤 어린이의 ‘남의 집 할머니‘도 될 수 있다. 어린이의초콜릿을 지퍼백에 넣어 주고, 어머니에게 어깨를 빌려 드리면서 나도 한몫을 할 수 있다. 양육자가 아니어도 ‘남의 집어른‘은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엄마가 된 친구와 나는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살아간다. 부모가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나는 끝까지 제대로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친구 역시 아이 없이 나이 들어가는나의 삶을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우리 자리가 떨어져 있다는 것이 예전처럼 서운하지 않다.
언제든지 손 내밀 수 있는 자리에, 잘 보이는 곳에 내가 가있겠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내가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있다 해도 상관없다. 어른은 그런 데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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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회도로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들 



  채 여물지 못한 달빛이 모슬포 골목마다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오늘은 칠월 칠석

  길의 끝에서 혹은 시작되는 곳에서
  덩굴손이 깍지 끼어 부여잡은 푯말 하나
  백조일손묘역 3.3km
  양민학살터 3.8km
  동서남북 불어온 바람이 달빛에 부서지다 다시 돌아와
  그 언저리를 서성거린다

  빛이 보이는 부분을 오늘이라, 하면
  희미한 윤곽만으로 모양새를 갖춘 삭은, 어제였나
  사람의 나이로 치자면 육십갑자의 끄트머리
  어둠 속 내버려진 영혼들이 웅크려 있다
   남루한 형색의 눈이 퀭한 사내들
  우회도로도 없는 흙먼짓길을
  겉옷 하나 달랑 걸쳐 입은 몸으로 
  맨발 끌며 또 끌었으리 

  오작교도 없었던 반백년의 시간 동안
  내버려진 채 웅크린 그들의 그림자는 어디,   
  오늘 같은 날 달이 만든 내 그림자를 보며
  달의 뒤편을 생각하는 것은 서늘한 일이다

정군칠 시집[물집]중에서


4.3의 아침, 오랜만에 [물집]을 읽는다.
모슬포의 거친 바람이 바다를 거쳐 섯알오름을 휘돌 듯 가슴에도 지나간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격벽들이 세상과 제주 사이에 있다. 세상의 모든 ‘갈라치기‘에 있다. 분노의 표적이 필요한 이들에게 먹잇감을 던져주는 우리안에 갇히고 오래 굶은 사자떼와 함성으로 즐기는 무리를 보고 있는 세상, [갈라치기]가 존재하는 한 4.3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은 허방이다.
연두, 연두. 이 아름다운 봄날, 진달래꽃빛도 설운 핏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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뜯어지지 않는 과자 봉지를 흔들어 대며 "이거 너무 안 잘라져요!" 하고 화를 내는 어린이들 중 그 누구도 내가 가위로 잘라 준다고 할 때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 할 수 있다고
끝끝내 씨름을 한다. 유자청이 든 유리병 뚜껑이 열리지 않아서 내가 공공대면 너도나도 나서서 자기들이 열겠다고 한다. "옛날에 엄마가 딸기잼 못 열 때도 제가 해 줬어요" 같은전적도 꼭 자랑한다.
새로 배운 어려운 말을 꼭 써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전형적인 허세 중 하나다. 아홉 살 다은이는 할머니 생신 잔치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성수신찬이었어요"라고 해서나를 당황하게 했다. 진수성찬이라고 하고 싶었겠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삐삐 롱스타킹‘ 시리즈에 푹 빠졌을 때는 삐삐가 말걀광이"라고 하기도 했다. 다은이에게는 말괄량이 삐삐가 ‘미치광이‘ 같은 느낌이었을까?
어려운 말 쓰기 좋아하는 건 예지도 마찬가지다. 예지가피규어를 사느라 "용돈을 탈진했어요"라고 했을 때는 말투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바로잡아 주지 못했다. - P25

나도 그간 어린이들에게 배운 바가 있으니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고마워. 아무튼 나도 이제 아람이처럼 농구인이야."
그러자 아람이는 조심스럽게 선을 그있다.
"삼일 차 농구인이시죠."
이날 아람이와 헤어질 때, 나는 장난스럽게 경례를 붙였다. 농구 선배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도 아람이는 웃지 않고 내 경례를 경례로 받았다. 나는 아람이의 뒷모습이 충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다음, 삼 일 차 농구인"
이라는 말을 되뇌고는 혼자 소리 내어 웃었다. 도무지 나는어린이를 당해 낼 수가 없다.
- P29

착하다‘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어린이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어린이를 상대로 한 범죄는 어린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시작될 때가 많다. 잃어버린 강아지 찾는 걸 도와 달라거나 짐 옮기는 걸 도와 달라는 식으로, 어린이의 착한 마음을이용해서 어린이를 유인하는 범죄 이야기를 들으면 머리에불이 붙는 것 같다. 슬프고 두려운 일이지만, 가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착한 어린이가 되려고 애쓰다 멍드는 어린이가 어딘가에 늘 있다.
- P33

"나눠줘요"는 ‘곱고 바른 말이고, "같이 놀자" "반겨 주자"는 ‘상냥한 마음씨‘다. 사전 뜻 그대로다. 어린이는 착하다. 착한 마음에는아무런 잘못이 없다. 어른인 내가 할 일은 ‘착한 어린이 가마음 놓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나쁜 어른을 응징하는 착한 어른이 되겠다. 머리에 불이 붙고 속이 시커메질지라도 포기하지 않겠다. 이상한 일이다. 책은 내가 어린이보다 많이 읽었을 텐데, 어떻게 된 게 매번 어린이한테 배운다.
- P37

어딘가 좀 할머니 같은 말이지만,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안하무인으로 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물론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외투 입는 계절에만 제공하는 서비스 하나 가지고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린이들은 그저 좀 독특한 순간으로만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이를 대하는 내 마음을 다잡는 데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의식이다.  - P41

"아유, 귀여워 몇 살이야? 아빠 드려야지." 사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돈을 내는 것은 아빠니까아빠 편을 드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어린이도 자기를 어르는 말에 넘어갔을지 모르고, 아마 그런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점의 정중한 손님 대접이 어린이에게 얼마나 기억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이라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그렇게 하는 사장님의 모습에도 품위가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서점에서 받은 좋은 인상이 더 확실해졌고, 입구의 어린이 코너조차 친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싶다. 어린이 앞에서만 그러면 연기가 들통나기 쉬우니까평소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감사를 자주 표현하고, 사려 깊은 말을 하고, 사회 예절을 지키는 사람, 세상이 혼란하고 떠들썩할 때일수록 더 많이,  - P45

아무리 어린 사람이라도 악몽은 자기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모든 어린이가 안쓰럽기도하고, 새삼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무서운 것들이 어린이의 어떤 면을 자라게 한다는것을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하고, 무서운 것을 마주하면서 용기를 키우고, 무서운 것을 이겨 내면서 새로운 자신이 된다는 것을. 그런 식의 성장은 우리가 어른이된 뒤에도 계속된다. 그러니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해 줄 일은 무서운 대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할 힘을키워 주는 것 아닐까.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을 응원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다독이면서.
하지만 모든 무서운 일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청소년이, 어른이 ‘여성‘ 이기 때문에 무서워하게 되는 그 많은 일들이 모두 그렇다. 그런 무서움은 아무런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세상을 좀먹고 무너뜨린다. 우리는어린이가, 여성이 안전을 위협받는 세상에서 살게 할 수 없다. 수수를, 보리를, 검은콩이를 불안하고 신뢰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할 수 없다. 피해자가 고발하고 여성들이 파헤 - P53

쳐야 겨우 끔찍한 범죄가 드러나는 세상에서, 죄 지은 자들이 처벌 받으리라 확신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래서 매번
‘청원‘을 넣어야 하는 세상에서 살게 할 수 없다. 둥글레가강낭콩이가 이것을 반복하게 할 수 없다.
이 무가치한 두려움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성범죄에 대한관용 없는 판결과 완전한 법 집행뿐이다. 단 한 명의 성범죄자도 빠짐없이 죗값을 치러야 한다. 가해자는 어떤 요행도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곳곳에서 날마다 확인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어린이를 피해자로도 가해자로도 키우지 않을 수 있다. 지금껏 해결하지 못한 많은 성범죄 사건들의 연장선 위에 n번방 사건‘이 있다. 마지막 기회인데도 해결이 지지부진해서 나는 두렵다. 지금 우리는 굴다리를 지나는 걸까, 동굴에 갇힌 걸까.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들고 출구를 내야 할 때다.
- P54

읽기는 쓰기와 나란히 간다. 읽기 시작한 어린이가 힘껏글자를 쓰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대견하다. ‘ㄹ‘을 그리다가언제 끝낼지 몰라 본의 아니게 한자 ‘‘을 쓰기도 하고, ‘ㄹ‘
에 익숙해질 무렵 잘 쓰던 ‘ㄷ‘이 갑자기 그이 되는 때도 있지만 결국 해낸다. 나는 어린이가 글을 쓰다가 모르는 글자를 물어보면 되도록 책에서 찾아서 가르쳐 준다. 책에는 뭐가 많이 있다‘ ‘선생님도 책을 보고 알게 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한번은 규민이가 뾰족뾰족‘을 어떻게 쓰냐고 물어봤다. 내가 종이에 쓰려고 하자 규민이는 가만히 내팔을 붙들었다.
"뾰족뾰족은 책에 없어요?"
- P69

자람이가 가고 보니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 책이 선생님한테 있잖아요? 하지만 다 똑같은 책이어도 이 책안 제 마음이 있어요."
이 책앤 자람이의 마음이 담겨 있다. 나도 마음을 담아읽을 것이다. 그러니 똑같아 보여도 다 다른 책이다. 자람이말이 완전히 맞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코로나 사태에 어쩔 수 없이 조금씩마음이 어둡고 무거워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그래서겠지만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말과 글에 소스라칠 때가자꾸 생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책 『핑크트헨과 안톤을펼치면서 나는 읽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글은 똑같은 글인데 읽는 사람에게 그려지는 세계는 모두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좋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다. 얼마 전에 만난 친구는 글이 무거워요. 한 글자 한 글자가 무거운 거예요"라고 했다. 글자를 익히고, 글을 읽어 내 것으로 만들고,
어려운 글자를 써서 연습했던 나는 지금 글을 무겁게 귀하 - P72

게 여기고 있을까? 읽고 쓰기를 배우던 시절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핑크트헨과 안톤』을 다시 읽을 생각이다.
- P73

길어야 3, 4년 전의 일을 두고 힘주어 "예엣날"이라고 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정말 까마득한 옛날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흔 살의 3년 전과 열 살의 3년 전은 똑같은 기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살아온 날들에 대한 비율로 따져 보니 열 살이 회상하는 ‘일곱 살 때‘는 마흔 살에게는 이십 대 후반이된다. 그런 만큼 어린이에게 어른은 엄청나게 오래 산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할 것 같다.
- P77

어린이를 만드는 건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어린이의 것이다. 남과 다른 점뿐 아니라 남과 비슷한 점도, 심지어 남과 똑같은 점도 어린이 고유의 것이다. 개성을 고유성‘으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나는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 순간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간다.
고 할 때, 다양하다‘는 사실상 ‘무한하다‘에 가깝다고도 할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메리 올리버의 문장들이 떠오른다.
"우주가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아름다운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그러면서도 우주는 활기차고 사무적이다."(『완벽한 날들』 중에서) - P91

키우는 강아지가 언니하고만 친해서 강아지를 원망하는 어린이도, 노래는 잘하지만 남들 앞에 서는 게 싫어서 음악 시간에 빠지고 싶은 어린이도 있었겠지. 지금도 어딘가에 비슷한 고민을 하는 전혀 다른 어린이와 어른이 있겠지.
사람들이 각자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주는 활기차다.
서로 달라서 생기는 들쭉날쭉함이야말로 사무적으로 보일만큼 안정적인 질서다. 그런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나는 안심이 된다. 우주가 우리 모두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넓다
는 사실도.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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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이가 새 신발을 신고 왔다. 생긴 건 축구화 같아도
‘풋살화 라고 했다. 내가 잘 못 할아들으니까 또박또박 "풋,
살, 화, 풋살화예요. 축구화 아니고"라고 강조했다. 풋살화는축구화랑 바닥이 다르고, 그냥 운동화보다 발등 부분이 납작해서 공 차기가 좋다고 했다. 아버지랑 같이 인터넷 쇼핑몰을 둘러보며 골랐고, 자기는 3학년치고는 발이 작아서 치수를 정할 때 좀 고민했고, 지난주에 주문했는데 어제야 도착했기 때문에 오늘 처음 신었으며, 이걸 신었더니 잘 뛰어지는 것 같았고, 그런데 생각만큼 그렇게 잘 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야기를 계속하려는 현성이를 간신히 말렸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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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하루를 넘긴데다 출산 후에도 출혈이 심한 난산이었다. 출혈이 그치고서도 증조모는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음식이 역하게 느껴져서 묽은 미음도 넘기지 못했다.
어쩌면 친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비 아주머니는 진땀을흘리듯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그동안 그녀에게 얼마나 의지했는지, 그녀와 주고받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지 이해했다. 살아나게 된다면, 새비 아주머니는 생각했다. 삼천이가 살아나게 된다.
면 하늘 아래 부끄러울 것 없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하늘에 빌었다.
새비 아주머니는 고봉으로 푼 밥을 챙겨 증조모에게 갔다. 그러고는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증조모에게 밥을 입에 넣고 씹어서 사발에뱉으라고 말했다. 증조모는 그녀의 말대로 했다. 밥을 씹어 뱉고, 다시 씹어 뱉었다. 며칠을 계속 그렇게 하니 기운이 조금 돌아왔다. 밥알을 삼키지는 못했지만, 밥을 씹는 동안 나온 밥물이 목에 조금씩 넘어간 것이었다. 그다음은 묽은 미음. 그다음에는 조금 덜 묽은 미음,
다음에는 죽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증조모는 살아났다.
- P73

"아저씨가 일본 가서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없었어. 그런 건 철저히 숨겼던 거야."
그 말을 하고서 할머니는 한동안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봤다.
마치 그 자리에 할머니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듯, 방심한 것처럼 보였다. 아저씨의 사진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새비 아주머니가 그린 그림은 있었어. 연필로 그린 그림이었는데 서툰 솜씨였지만 누가 봐도 아저씨였어. 그 그림도 없어져버렸지만.....… 그래도 네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니까, 새비 아저씨는 그만큼더 사는 거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도 모르는 새비 아저씨를 나도 그려볼수 있었으니까. 키가 크고, 목이 길고, 생전 본 적도 없던 백정의 집 - P81

에 가서 간병을 하고, 그 누구의 위에도 서려고 하지 않고,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그러다 혼자 일본으로 떠난, 지금의 나보다 한참은 어린이십대 초반의 남자를 그려볼 수 있었으니까. 그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는 자신이 죽고 나서 태어난 어느 사람에게 이렇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 P82

새비가할머니는 반듯이 누운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며 편지 낭독을 들었다. 그러다가도 가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했고, 두 손을 마주잡기도 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곁눈질로 보면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육십칠 년 전에 쓰인 편지가 남아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편지에서 새비 아주머니의 목소리와 손길이 그대로 느껴지는 게 더 놀라웠다. 마치 새비 아주머니가 내 속으로 들어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 편지를 받아 읽었을 증조할머니의 마음도 내 안에서살아났다. 참 희한하지 않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하는 증조할머니의 모습이 내 눈에도 보였다. 나는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 P121

조선인들이 많이 죽었을 거라고 했어. 그즈음 히로시마에는 조선인들이 많았다구, 희자 아바이처럼 제 발로 간 사람은 드물고 끌려간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됐다. 나도 희자 아이가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몰랐어. 화천 사람들이 많았더라. 주소라도 받아놓았더라면 편지라도 부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고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다고 인타까워했어. 그 말을 하면서 회자 아바이가 얼마나 울던지…… 그 얼굴을 내 똑바로 처다보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죽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회자 아바이가 말했어, 조선 사람이고 일본 사람이고 중국 사람이고 간에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사람은 세삼천지 어디에도 없다고,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희자 아바이는 내 손을 붙잡고서 그 말을 및 번이고 반복했어.
회자 아바이가 어떤 사림이었나. 범시에 감사해하고, 매일 주어지는삶에 감사해하고 ...… 심천아, 우리가 새미에서 예전에 그렇게 굶을 때두, 목숨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한 사람이 희자 아바이었다. 처음엔 이런 미친 아바이가 있나 싶기도 했는데, 그게 회자 아바이 천성이었더랬어. 나두 집안이 온통 천주교 도여서 세례를 받았지만 믿음이라는것이 없었다. 그런데 회자 아바이는 달랐어.
- P123

기억하갔시오. 기래 내답했지. 그게 내가 희자 아바이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인 것만 같아서.
삼천아. 내 너한테 허풍을 떨었다. 희자 아바이가 곁에 있는 시간이어도 괜찮다고 했지. 아예 다시 보지도 못하고 헤어지는 것보다 낫다면서, 그런데 아니야. 희자 아바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거이 내가할 짓이 아니구나, 지옥이 있대두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기야, 삼천아.
내가 허풍을 떨어도 심하게 떨었어. 난 이걸 버틸 수가 없다. 버틸 수가없어.
삼천아, 희자 아바이를 기억해줘. 그게 회자 아바이 유언이다. 희자아바이를 기억해줘, 삼천아.
- P125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 P130

그뒤로 언니가 다시 내 옆에 올 때면 나는 언니를 밀어냈다. 가까이 오지 마. 언니는 슬퍼 보였고 그런 언니를 보는 내 마음도 그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는 나의 세계에서 사라졌다. 가끔은 언니가 해싶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떠올렸고, 언니와 함께 놀 때의 감각을 떠을리기도 했지만 모든 것은 낮잠을 자다 꿨던 꿈처럼 실감을 잃어갔다.
나는 학교에 들어갔고 한글과 숫자를 배웠고 시계를 읽는 법을 배원고 죽은 사람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거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배웠다. 나는 엄마에게 죽은 언니와 놀았다고 말하던 날을 떠올렸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을 떠벌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엄마의 고통 앞에서 나의 진실은 가치가 없었다. 어떤경우에도 엄마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견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잘 자고 잘 먹고 있다.
고, 문제가 없다고, 나는 언제나 잘 웃는 아이였고, 자라서는 잘 웃는어른이 됐다. 마음속으로 울고 있을 때도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P171

할머니는 희자야, 라고 말하지도 못한 채로 자리에 주저앉아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반가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치받치던 두러몸이 그제야 몸밖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이란 신기한 감이었다. 사라지는 순간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니까. 할머니는 자신이 단 한 번도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가 대구까지 무사히 왔으리라고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희망이 꺾였을 때의 충격을 감당할수 없을 것 같아서 작은 희망까지도 모두 버린 채로 피난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할머니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다가 일어나서회자를 끌어안았다. 할머니의 품에 안긴 희자도 울기 시작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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