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젊은 작가들이 미술계 전면에 등장한 것이었다. 미술계가 현대추상미술 계열과 상업화랑의 인기 구상회화로 양분되어 있던 상태에서젊은 작가들이 일으킨 조형적 반항은 아주 뜨거운 것이었다.
이런 새로운 미술운동에 앞장선 것은 1979년, 일군의 젊은 작가와 평론가 들이 결성한 ‘현실과발언‘이라는 미술 그룹이었다. 그해 대학로 미술회관에서 가진 창립전은 개막 당일 당국이 갑자기 전시를 불허하고전기를 차단하는 바람에 촛불을 켜고 보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동산방화랑이 이들을 초대해 이듬해 현실과발언은 제대로 된 창립전을 가질수 있었는데, 이들의 창립취지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다. - P258

돌아보건대 기존의 미술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이든, 유한층의 속물적인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혹은 밖으로부터 예술 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왔고 심지어는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조차 제대로 발견하지 못해왔습니다. - P259

현실과발언은 기폭제에 불과했다. 20대, 30대 젊은 작가들의 기존미술에 대한 조형적 반항이 곳곳에서 전시회로 나타났다. 1984년은 젊은 작가들의 뜨거운 열기가 한껏 고조된 시기였다. 그리고 이듬해인1985년 7월 박진화, 손기환, 박불똥 등이 기획한 ‘한국 미술 20대의 힘‘
전에서는 젊은 작가의 조형적 반항이 가히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군사독재정권의 사찰 당국은 미술은 문학에 비해 그래도 ‘순수하다‘고 관망하다가 급기야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전시회를 봉쇄하고 출품 작가를 연행해 즉결심판에 회부하는 ‘전 사태‘가 발생했다.
이때부터 독재정권은 본격적인 미술 탄압을 시작하면서 젊은 작가들의작품 경향을 불온하다는 의미가 내포된 ‘민중미술‘로 규정하고 이들의전시장 대관을 막았다. - P260

이에 민중미술 계열의 미술인들은 1985년 손장섭 대표, 고 김용태 사무국장을 위시로 민족미술인협의회(민미협)를 결성했다. 그러나 중요한것은 전시공간의 확보였다. 이에 고 김용태, 화가 김정헌 그리고 나 셋이서 합심하여 그해 12월에 수도약국 골목 들머리에 있는 허름한 건물의35평 지하공간을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70만 원으로 세 얻었다. 미술운동에서 전시장을 확보해 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은 문학운동에서 잡지사를 갖고 있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전시장 이름엔 당연히 ‘민족‘이나 ‘민중‘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었지만 이는 불온의 상징이어서 정보기관의 사찰 대상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냥 ‘그림마당 민‘으로 정하고 민씨 성을 가진 대표를 내세워 위 - P261

장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민중예술가들과 두루 가까이 지내던 나의 미학과 동창인 고 민혜숙을 대표로 하고 나는 운영위원장을 맡으면서 그림마당 민이 탄생했다.
개막전은 1986년 2월 민중미술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40대의22인전‘이라는 아주 ‘부드러운‘ 제목으로 출발했다. 이렇게 그림마당 민은 민중미술가들의 기대와 축복 아래 개관전을 대성황리에 치렀다. 그리고 그해 6월 개관 첫 초대전으로 기획된 오윤의 ‘오윤판화전‘ 역시 대성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모두들 그의 뛰어난 예술성에 감동했다. 그림마당 민은 오윤의 판화집 『칼노래』도 출간했다. 그러나 오윤은 이 첫 개인전에 이은 부산 순회전을 마친 지 열흘 만에 간암으로세상을 떠났다.
오윤은 당시 간암 3기였다. 언제나 피곤한 얼굴로 까맣게 타들어갔 - P262

최대의 풍자화다. 그런 오윤이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부터 살색이 다시 희어지고 아품도 다 가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림마당 민을 위해 산속에 파묻혀 열성으로 작품을 제작해 개인전에 70점을 출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물주는 암 환자에게 마지막엔 편안히 쉴 수 있는 시간을 준다더니, 오윤은그 기간에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준비한 것이다. 오윤의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슬픔을 안겼는데 시인 정희성은 판화가 오윤을 생각하며」를 지어 장례식에서 조시로 바쳤다.

눈물이 나지 않는다
나이 사실에 세상을 뜨며
친구들이 둘러앉아 슬퍼하는 걸
저도 보고 싶진 않겠지 - P263

살 만한 터를 가려
몇 개의 주춧돌을 부려놓고
잠시 숨을 돌리며
여기다 씨 뿌리고
여기다 집을 짓고
여기다 큰 나라 세우자고
그가 웃으며 말하는 것처럼
아직도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는 바람처럼 갔으니까
언제고 바람처럼 다시 올 것이다 - P264

그림마당 민은 처음에는 그런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해 두해 지나면서 그림마당 민은 일주일단위로 전시회를 열면서 많은 젊은작가들의 개인전과 단체전, 그리고 기획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해가갈수록 운영에 차질이 생겨 매달 건물 임대료를 마련하는 데 민혜숙 대표와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물도 낡아서 비만 오면 전시장이 물바다가 되는 바람에 매번 그걸 닦고 치우는 게 일이었다.
홍선웅·곽대원·류연복·유은종·최석태 등이 정말로 고생들 많이 했다.
게다가 함께 사용하던 민미협 사무실이 따로 독립해 나가고부터는인건비 부담이 생겼다. 대관료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신촌 우리마당에서 하고 있던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강좌를 그림마당 민 - P265

으로 옮겨와 수강료를 받아 임대료를 내기도 했다.
게다가 당국의 감시와 탄압은 여전했다. 1987년 3월 민미협에서 기획한 ‘반(反) 고문전‘ 때의 일이다. 박불똥의 작품 <우리나라 대통령이 부(끄)럽다>는 전두환 대통령이 박종철 표찰을 달고 전경에게 끌려가는 희대의 풍자화였지만 전시회 주최 측은 자체 검열 결과 그림마당 민이 폐쇄될 수 있다고 판단되어 전시장이 아니라 사무실에 숨기듯 걸었다. 이작품은 그해 연말에 열린 박불똥의 개인전 ‘작전‘ 때 공개 전시됐다.
그런 탄압 속에서도 그림마당 민에선 정말로 많은 민중미술전이 열렸다. 해마다 열린 ‘통일전‘ 같은 전시에서는 고 이애주의 춤과 김남수의 굿이 더해져 열기가 뜨거웠다. 그림마당 민은 나중엔 화가 고문영태가 발 벗고 나서서 운영을 맡으면서 조금 사정이 좋아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렵기는 매일반이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그림마당 민은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 문을 닫았다. 민미협 회원들의 열띤 논쟁 끝에 그림마당 민이 문을 닫게될 때 나는 영남대 교수로 대구로 내려가게 되면서 그동안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던 인사동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림마당 민은 우리 민중미술운동사 내지는 20세기 한국현대미술사의 상징적 공간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 P266

 영국 사람이 가야토기를 사가면 영국 토기가 되는 것이아니라 영국 사람도 가야토기를 통해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존경하게되는 것이다. 귀중한 유물은 당연히 반출이 금지되어야 하지만 민예품가게 진열장에 있는 평범한 것까지 규제하는 것은 우리 문화의 국제적홍보를 막는 행위이다.
나는 문화재청장 재임 때 이 모순된 규제를 고치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법률 개정권을 갖고 있는 국회의원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국민 여론의 합의가 더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하여 인사동에 온 외국인 관광객들은 한국이 문화적으로 대단히폐쇄적인 나라라는 인상을 갖게 되고 인사동에 들어와 있는 중국 유물들을 기념품으로 사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식민지배의 경험으로 인한문화재 약탈의 콤플렉스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자신있게 우리 문화재의 세계화를 추진해야 한다. 그것이 인사동 민예품 가게를 살리는 길이라서가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K-컬처의 뿌리를 자랑스럽게 알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 P270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인사동에 진출한 문인들은 대개 1930년대생으로 그때 그분들 나이 50대였다. 본래 문인들은 떼거리로 잘 몰려다녔다. 1960년대에는 김관식, 김수영, 박인환, 이봉구 등이 명동을 누볐다.
1970년대에는 주로 관철동과 청진동에 진을 쳤다. 관철동은 한국기원이 있어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을 비롯해 바둑을 좋아하는 문인들이 모였다.
청진동에는 소설가 이문구가 편집장으로 있는 현대문학사와 민음사신구문화사 등이 있고 초창기 창작과비평사도 거기 있었기 때문에 ‘열차집‘ (서울시 미래유산)이나 가락지‘ 같은 술집이 항시 문인들로 북적였지방에서 올라온 문인들은 영남여관에서 묵어가곤 했다. - P286

이해림은 찾아오는 사람을 편안히 해주는 대단한 친화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이 든 손님들은 이해림을 여동생처럼 대했고, 젊은 패거리들은 이해림을 누나라고 불렀다. 그 이해림이 수운회관에서 결혼식을올릴 때 주례가 백기완 선생이었을 정도다.
그런 평화만들기였는데, 이해림은 좋지 않은 일로 문을 닫고 인사동을 떠났으며 이를 인수한 분이 수운회관 옆 골목으로 가게를 옮겼으나끝내는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그래서 이를 매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세월이 흘러 2014년 11월, 옥션 단 경매에는 평화만들기를 회상하게하는 한 ‘유물‘이 나왔다. 본래 평화만들기 한쪽 벽에는 1990년 무렵 시인 김지하가 이용악의 「그리움」이라는 시를 굵은 매직펜으로 호쾌하게쓴 글씨가 있었다. 평화만들기가 문을 닫고 다른 데로 이사 갈 때 떼어간 것인데 이것이 돌고 돌아 경매에 나온 것이다. - P292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험한 벼랑길 굽이 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검은지붕에/연달린 산과산사이/너를 두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어쩌자고 잠이 깨어/그리운 곳차마 그리운 곳//눈이 오는가/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P292

김지하가 만취한 상태에서 단숨에 써내려간 이 이용악의 시는 행이나 연 구분 등이 원문과는 약간 다르다. 이에 대해 김지하는 ‘내 글씨가아니라 분단의 아픔을 우아한 서정으로 노래한 이용악의 글을 봐달라‘
고 했다는데, 나는 이를 보면서 이용악의 시보다도 오랜 기간 감옥 독방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정신병원까지 드나들며 말년에 이해하기 힘든 언행을 보여준 김지하가 아니라, 말술을 마시며 통을 하고서도 이용악의 시를 외워 쓰던 그 시절 ‘지하형‘의 웅혼한 호연지기를 보게 된다. - P293

주인장 염기정이 카페 소설을 열어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드는 또 하나의사랑방을 제공했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가수이자 그 자신이 엄청난 술꾼이기도 한 염기정은 1988년 이대 후문 쪽에서 연 카페 ‘시몽(是夢)‘을1991년 인사동 네거리 골목 안쪽으로 옮겨왔다.
카페 소설엔 황석영 · 김화영 · 김주영, 윤후명 등 40대 후반의 연장자들도 즐겨 드나들었지만 나를 기준으로 볼 때 김정환·성석제·은희경·신수정 등 비교적 젊은 층들이 많이 찾아왔다. 화가로는 김정헌·성완경·최민화 등이 단골이었고 건축가 조건영·김영준, 영화인 홍상수·이창동, 문화부 기자로는 박해현(조선) · 신준봉(중앙) 등이 자주 드나들었다.
대체로 카페 소설이 평화만들기보다 좀 젊은 편이고 또 상대적으로모던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순전히 내 느낌상 평화만들기가 창작과비평』 같다면 카페 소설은 『문학과지성』 같은 분위기였다.  - P294

이런 인사동 사람들의 진면목을 보여준 이는 고 여운 화백이다. 인사동에서 여운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여운이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그는 인사동에서 살았다. 그는 인사동에서 하루에도 서너 팀을 만나고 다녔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김사인 시인은  <인사동 밤안개: 여운 화백> 이라는 시를 바쳤다. - P296

키만 훌쩍 컸지./뒷 사연 쓸쓸한거야/인생 칠십의 빌어먹을 한다반사//바바리는 걸치고서/인걸들 하나둘 저물어가는/인사동 고샅을/밤마다 순찰 돌았네/그래도 혹시나 하고/수몰 앞둔 시골 면소/충직한 총무계장처럼.//한사코 집으로/안 가려 했네./탑골에 이모집에 있으려 했네./볼가에서 소담에서 버티려 했네./깰까 두려워/자꾸 마셨네. (...) 바바리는 걸치고서//돌아가는 새벽 뒷모습이/알 슬은 방아깨비 같았네./물그릇 엎고 꾸중들은 워리 같았네/식은 땀만흘렀네. - P297

조문호 사진집 『인사동 이야기에는 100여 명의 인사동 사람의 사진과 수십 명의 글이 실려 있어 인사동 전성시대 30년을 증언하고 있다.
그중 나의 체험적 인사동 답사기에서 언급하지 못한 인사동 사람들을조문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사동에는 미국에서 ‘서울로 서울로‘를 노래 부른 최정자 시인,
적음이란 법명을 가진 땡초시인 최영해, 
‘실종‘ 소설로 실종된 소설가 구중관,
인사동에 재산 다 털어넣은 김명성 시인,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
소설 폐업한다며 ‘작가폐업‘ 술집 낸 배평모, 술값 내는 물주 사진기자 김종구,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화가 이청운, 별을 그리다 별이 된 화가강용대,
히말라야 산맥 기 받은 화가 강찬모, 노동자 시인 김신용, - P300

바람개비 작가로 알려진 설치미술가 김언경, 사마귀 그림으로 알려진 전강호,
막사발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도예가 김용문, 시와 도자가 하나인 신동여,
아직까지 대위로 불리는 공윤희, 홍대미대 나와 술장사하는 전철,
목련이 뚝뚝 떨어지는 노래로 애간장을 녹였던 임춘원 시인,
‘갈까보다‘ 판소리로 휘어잡은 ‘레테‘ 주인 이점숙 - P301

건축가 민현식은 『건축에게 시대를 묻다』(돌베개 2006) 라는 의의 저서에서 한국 현대건축에서 예민한 감성과 날카로운 지성과 건강한윤리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새로운 건축물 19채를 했다. 쌈지길을그중 하나로 꼽으며 글머리를 이렇게 시작했다.


통로, 이것은 인간에게는 숙명적이면서도 멈추게 할 도리가 없는시간의 경과를 건축적인 구조로서 공간화하려는 가장 위대하고 일관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 P304

민현식은 이 점에 입각하여, 최문규의 ‘쌈지길‘은 아름다운 공간을 디자인하지 않고 마당과 길을 만들었고, 나아가 길을 건축화했다기보다는건축을 길로 구축하고 있다고 평했다. 도로에 면한 건물의 길이는 50미터에 불과하지만 이 집이 품고 있는 500미터는 이곳을 채울 사람들을위한 장치일 뿐이라는 것에 건축적 특징과 자랑이 있다고 했다. 따라서이 건축은 여기서 만들어지는 사람들의 족적에 의해 그 가치가 드러나게 된다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쌈지길은 (공간의 건축이 아니라) 시간의 건축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건축이 나이 들어가면서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기억이 되고 이들 기억들이 쌓여 일상이 될 때 이 건축은 
(...) 근사하게 자리 잡게 될것이라 기대해도 좋다. - P305

사라진 것은 아쉽고 그립기 마련이다. 이런 변화는 어차피 일어날 세대교체였다. 그러나 인사동은 여전히 나의 사랑이다. 나는 인사동의 저력을 믿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인사동은 지난 100년간 몇 차례 큰 자기변신을 이루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어쩔 수없는 세월의 흐름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 P306

인사동이 이렇게 다 망가졌다고 말할 정도로 변했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은 사람의 살내음이 느껴지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인사동길의 인간적 체취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인사동 공간 구조의대에서 나온다. 완만한 S자 곡선으로 휘어 있는 인사동길 700미터에실핏줄처럼 수없이 뻗어 있는 골목길은 그 자체가 휴먼 스케일이다.
인사동 큰길이 이처럼 가볍게 휘어 있는 것은 안국동천(安國洞川)이라는 개천을 복개했기 때문이다. 물길 따라 도로를 냈기 때문에 이처럼편안한 것이다. 만약에 이 길이 도시계획에 의한 일직선이었다면 이런인간미 넘치는 편안한 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인사동길은 끝과 끝이 드러나지 않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서히 다른 장면이 나타난다. 그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기에 인사동을 찾아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던 부산식당의 조성민, 선천집의 박영주, 귀천의 목순옥, 카페 소설의 염기정, 두레의 이숙희, 유목민의 전환철 같은 투철한 직업의식을 갖고 있는 분들이 보여준인사동 전통을 잊지 않고 이어간다면 인사동은 변함없이 인간적 체취가느껴지는 공간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 P307

북한산(北漢山)은 서울의 진산(鎭山)이다. 산맥의 흐름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해 한반도를 휘감아 내려오는 백두대간 중간지점의 금강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광주산맥)이 내려오다가 솟구쳐 오른 것이 북한산이고 그 여백이 문득 멈춘 것이 북악산이다. 그래서 서울의 주산(主山)은 북악산이고 조산(祖山)은 북한산이다.
북한산은 최고봉인 백운대(白雲臺)를 중심으로 북쪽에 인수봉峯), 남쪽에 만경대(景臺)가 있어 삼각산(三角山)이라고도 불려왔다.
최고봉의 높이 836.5미터, 면적은 약 30만평(77만 제곱킬로미터)으로 도봉산과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서울특별시 도봉구·강북구 서대문구 종로구 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 · 양주시 · 의정부시 지 - P311

역에 걸쳐 있다.
북한산은 지질학적으로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과 절리현상으로 형성된 많은 화강암 준봉들로 이뤄져 있다. 삼각산세 봉우리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상장봉(上將峯), 남쪽으로는 석가봉(釋迦峯)·보현봉(普賢峯) ·문수봉(峯) 등이 있고 문수봉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나한봉(羅漢)비봉(碑峰)의 줄기가 백운대 서쪽 줄기인 원효봉(元曉) 줄기와 만난다. 도봉산은 주봉인 자운봉(紫雲峰 740미터)에서 남쪽으로 만장봉峰)·선인봉(仙人峰)이 있고, 서쪽으로 오봉(五峰)이 있으며, 우이령(牛耳嶺)을 경계로 북한산과 접하고 있다. - P312

이를 오늘의 도선사로 일으킨 것은 청담(潭, 1902~71) 스님이었다.
스님이 15년간 주석하면서 도선사는 현대 불교의 조계종 명찰로 다시태어났다. 그래서 도선사에는 청담대종사의 석상, 승탑, 탑비가 장대하게 조성되어 있다. 1970년대 정서로는 웅장하게 세운 것인데 오늘의 정서에서 보면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인상을 주어 청담 스님의 품격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화계사는 수유리 북한산 초엽에 위치하여 오늘날 민가와 가까이 있게 되었지만 원래는 계곡가의 그윽한 절이었다. 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가 불교를 중흥하던 시절인 중종 17년(1522) 신월(月) 스님이 왕가의지원을 받아 인근에 있던 고려 때 사찰인 보덕암을 옮겨와 중창한 절이다. 이후 흥선대원군과 조대비의 시주를 받아 사찰의 규모가 커지고 상궁들의 왕래가 잦아 ‘궁(宮)절‘로 불리기도 했다. - P318

북한산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은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羅眞興王巡狩碑, 북한산 순수비, 국보 제3호)이다. 이 비가 있기에 북한산은 한반도에 있는 어느 산 못지않은 높은 역사성을 지니게 됐다. 이 진흥왕순수비가 지닌 역사적 의의는 고구려 광개토왕비에 버금가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기념비다. 이에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순수비 답사기는 진흥왕이 전국에 순수비·척경비·진휼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세월의 흐름 속에 잊힌 비석들이 다시 발견되는 과정의 시말기로 이 유적의 가치와 존엄성에 값하고자 한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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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은 오늘날 전통 한옥이 밀집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북촌이 이렇게 명소로 부각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동안 이 일대를 개발규제 구역으로 묶어놓았던 것을 20여년 전부터 한옥보존지구로 지정하고 적극적으로 재정비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관광객들의 소음으로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하는 부작용과급격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원래의 분위기가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를말하기도 하지만, 관광객들이 북촌을 거닐면서 즐기는 것을 보면 마치잃어버린 전통마을을 찾아온 듯한 기쁨이 스며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많이 찾아와 우리 전통문화의 체취를 느끼는 모습에서 나는 기특함과 뿌듯함을 느낀다. - P151

 ‘북촌 8경‘


북촌 1경 창덕궁 전경: 돌담 너머로 창덕궁의 전경이 잘 보인다.
북촌 2경 원서동공방길: 창덕궁 돌담길 따라 빨래터까지 올라가는 길.
북촌 3경 가회동 11번지: 한옥들과 전통문화 체험 공방이 있다.
북촌 4경 가회동 31번지 언덕: 기와지붕들 너머의 북촌 조망.
북촌 5경 가회동 골목길(내리막) : 한옥들이 맞대어 빼곡히 늘어서 있다.
북촌 6경 가회동 골목길(오르막) : 한옥 돌담들이 길게 뻗어 있다.
북촌 7경 가회동 31번지: 1930년대에 지은 한옥밀집지구이다.
북촌 8경 삼청동 돌계단길: 경복궁·인왕산이 조망되는 돌층계길. - P152

북촌 답사를 백송에서 시작하는 것은 백송 자체도 자체려니와 개화파의 스승인 환재(齋) 박규수(朴珪壽, 1807~76)의 집이 여기 있었기 때문이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실학사상에 젖어 있어 16세 때 벌써 ‘태양, 지구, 달‘에 대해 읊은 시가 남아 있다.
18세 때 효명세자의 벗이 되어 1827년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뒤에는 세자의 명으로 『연암집(燕巖集)』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1830년 효명세자가 요절하자 박규수는 세자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며 18년간 은거에 들어갔다.
42세 때인 헌종 14년(1848)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로 있던 54세 때 (1860), 청나라 함풍제가 영.
불 연합군의 북경 점령으로 열하(熱河)로 피신하여 조선 조정에서 문안사(問安使)를 보낼 때 자원하여 할아버지가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쓴그곳을 다녀왔고, 청나라가 아편전쟁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서세동점의추세에 대한 넓은 안목을 갖추게 되었다. - P158

박규수의 재동 백송나무 집의 사랑방에는 북촌에 사는 똑똑한 양반 자제들이 모여들어 그의 훈도를 받았다. 유길준은 ‘어렸을 적 한시를 지어 박규수 대감에게 보여드렸더니 재주가 이토록 뛰어난데 왜 시무(時務)의 학문을 하지 않는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박영효는1931년 이광수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화파의 신사상은 모두 내 일가인 박규수 대감 집 사랑방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나의 형 박영교가 모두 재동 박규수 대감 집 사랑에서 모였지요. - P159

박규수는 예술을 보는 안목도 높아서 타계하는 바로 그해 가을에 작자 미상의 <죽석송월도(竹石松月圖)〉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기도했다.


무릇 그림은 예술의 하나로서 학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그림을 홀대함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형상이 아니라 뜻을 추구하는) 사의 화법이 유행하면서 대상을 정확히 그리는 것을 폐기했기 때문이다. 정밀하게 그리는 공부가 부족하고 그 번거로움을참지 못하여 단지 물줄기와 바위를 소략하게 그리고 적당히 수묵번지기에 그치면서 그것을 예스러운 간략함이라고 자처하고 있다. 이것이 고매한 선비가 여가로 그린 것이라면 소중히 여길 만하지만 사람마다 이와 같이 하여 심지어 직업화가인 화원들까지 기법과 힘쓰는바가 여기에 그친다면 그림의 세계는 망하고 말 것이다.


문인화풍의 유행이 지나쳐 그림의 본도를 잃음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만보자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2권에서 말한 바 있듯이박규수는 이처럼 세계를 보는 눈이 넓었고, 현실을 보는 눈은 깊었으며,
예술을 보는 눈은 높았다. - P161

광혜원은 2주 만에 이름을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으로 바꾸었고, 1904년 미국 클리블랜드의 실업가 세브란스(L. H.
Severance)의 재정 지원으로 남대문 밖 복숭아골(桃洞)에 현대식 병원을 지어 옮기면서 기부자의 이름을 따 세브란스병원이라고 했다.
그렇게 제중원이 남대문 밖으로 이사 간 뒤, 이 자리에는 1908년 순종의 칙령으로 공조(工曹) 뒤뜰(현 종로구 도렴동)에 설립된 관립한성고등여학교가 1922년에 새 교사를 짓고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 이 학교가 경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그리고 1945년 경성여보가 정동으로 이사 가면서 이 자리에는1941년에 개교한 경성제3공립고등여학교가 창덕여자중(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들어왔고, 창덕여중·고가 1989년 방이동으로 이사 간 뒤1993년에 지금의 헌법재판소가 들어섰다. 이 땅에 서린 역사가 이렇게길다 보니 만보자의 발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다. - P163

다시 발길을 옮겨 비탈길을 올라가면 고갯마루에 중앙고등학교 후문이 나오고 길 건너 감사원이 보인다.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면서 북악산자락에 감싸인 삼청동 골짜기가 내려다보인다. 옛 사람이 이렇게 전망좋은 곳에 정자 하나 마련하지 않았을 리 없는데 여기엔 여흥 민씨의 세도가 민태호가 1870년대 중반에 지은 ‘취운정(雲亭)‘이 있었다.
민태호가 갑신정변 때에 개화파에 의해 참살당한 뒤에는 그의 아들로 민승호(명성황후의 오빠에게 입양된 민영익의 차지가 되었는데 이곳은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한 곳이어서 더욱 유명해졌다.
유길준은 1881년 박규수의 권유로 어윤중의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참가해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 이때 일본의 문명개화 - P178

론자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경영하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한동안수학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민영익이 미국으로 가는 보빙사(使)의 단장을 맡으면서 수행원으로 참가할 것을 권유하자 이듬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그때 유길준의 나이 27세로 일행 중 유일하게 영어와 일어를 쓰고 말할 줄 알았다. 사절단 업무가 종료된 후에 유길준은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머물며 수학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되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이 해야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변의 위협을 감내하고 1885년12월에 귀국했다. 유길준은 여지없이 갑신정변 개화파 일당으로 몰려체포되었다. 다행히 그의 재능을 아끼던 한규설의 도움으로 극형을 면 - P179

할 수 있었고 한규설은 자신의 집에 그를 머물게 했다. 그러자 보빙사로함께 갔던 민영익이 유길준에게 자신의 취운정에서 연금생활을 하는 편의를 제공했다. 그 기간이 무려 6년이나 되었다. 이때 유길준은 그동안메모해온 것을 바탕으로 『서유견문』을 집필해 1895년에 출간했다. 이책은 우리나라 최초로 국한문혼용체를 구사하여 서양 근대문명을 소개한 유길준의 ‘나의 서양문화답사기‘였다. - P180

이재완의 맹현 집에는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함께 살아 이 저택을맹현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들은 이달용, 이규용이고 손자는 사진작가 이해선(李海善, 1905~83)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를 지낸 이해영(李海英, 1925~79)이다. 이 맹현댁은 1930년대 토지 분할 매각으로 점점 축소되다가 한국전쟁 후 안국동, 계동으로 흩어져 살고 결국은 대저택이사라졌다.
2019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북촌: 열한 집의 오래된 기억」이라는대규모 전시회가 열렸는데 그중 한 파트인 ‘왕실종친의 삶‘에는 이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복식·가구·식기 등이 마치 고궁박물관 유물처럼 전시되었다. 더욱이 며느리 안동 김씨와 풍산홍씨는 궁중요리의 맥 - P186

을 이어 서울의 전통 음식: 북촌 맹현 음식물을 중심으로」(이귀주 지음, 고려대출판부 2012)에 구절판·냉채·메밀국수 등이 소개될 정도다.
나는 누구나 그렇듯 왕손이니 귀족이니 하며 능력이 아니라 신분으로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것은 사라져야 밝고 건강한 민주사회가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유산의 관점에서 볼 때 왕족과 귀족이 누린 고급문화 자체는 귀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거의 독점적인 세련된 문화 형식을 나 같은 서민도 누릴 수 있게 확산되는것이 사회가 발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 P187

이러한 나의 주장에는 얼마든지 반론이 있을 수 있고, 또 오해의 소지도 많다. 그러나 북촌 열한 집의 오래된 기억에서 맹현대의 생활문화가 빠졌다면 그것은 평범한 민속이거나 가난한 문화의 나열이 될 수도있었던 것이다. 내가 북촌의 한옥마을 대갓집을 보면서 한옥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맹현댁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는 이유도 그런 생각에서나온 것이다. 이는 유럽의 왕족과 귀족문화가 시민문화로 확산되어가는과정에서도 그대로 보이는 바다.
각설하고 맹현은 진짜 고개다운 고개여서 여기는 가회동과 삼청동을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 맹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대단히 아름다워 북촌 8경 중에서 4경부터 8경까지가 모두 이 주위에 모여 있다. 만보자는 이제 그 한옥마을의 진수를 보기 위해 한옥 지붕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는 고샅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P187

이렇게 일본인들이 북촌으로 진출하려던 추세에 정세권은 도시형 개량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함으로써 조선인의 주거지역을 확보해 오늘날북촌 한옥마을을 지켜낸 것이다. 그는 부동산 개발로 자수성가한 식민지 민족자본가이자 민족운동가였다.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일제에 맞서 신간회 · 조선물산장려운동·조선어학회 등에 참여하며 언론인안재홍, 국어학자 이극로 등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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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산장려운동은 명망가들의 계몽운동 차원에서 일어났지만 정세권의 참여로 실천력을 가진 운동으로 발전했다. 정세권은 낙원동300번지에 조선물산장려회관을 지어 기증했고 재정을 담당했다. 또 이극로의 열정적 국어운동에 감명받아 화동 129번지에 조선어학회관을지어주고 역시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 P197

이처럼 민족운동을 지원하면서 일제의 탄압으로 구금되어 고문을 받기도 하고 뚝섬의 토지 3만 5천여 평을 강탈당하기도 하면서 정세권의주택사업은 자연히 쇠락의 길에 빠졌다. 8·15해방 이후에는 행당동에거주했는데 한국전쟁 중인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 때 비행기 폭격으로 다리를 크게 다쳤다. 그리고 1950년대 말 고향 고성으로 낙향하여지내다가 1965년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금년(2022) 5월 3일 경남고성군은 정세권의 생가를 정비한 준공식과 함께 전시회를 열어 그의위업을 기렸다. - P197

계동에 있는 북촌문화센터는 ‘계동마님댁‘이라는 번듯한 한옥을매입해 사용하고 있다.
그 결과 북촌은 최근 20년 사이에 전통이 있는 한옥마을로 새로 태어나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전통 한옥마을로서 북촌이 이룩한 명성을 유지하고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관(官)이 주도하는 것보다북촌 사람들이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 희망적인 사실은 그사이 아름다운 한옥들이 북촌에 재탄생했다는 점이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21세기 들어와 신축하거나 리모델링한 시내 한옥 중 우수한 것을 골라 ‘서울 우수 한옥 인증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첫해에 가회동의 채연당·지우헌·가회동성당, 계동의 한옥 게스트하우스인 락고재 등 14곳이 선정되었다. - P198

한옥의 현대적 계승에 전념하고 있는 건축가들의 의미있는 성취가가회동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2007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아름다운한옥‘으로 선정했고 디자이너 양태오가 사무실과 살림집으로 쓰고 있는능소헌과 청송재는 건축가 김영섭의 작품이다. 서울산업대 나성숙 교수의 봉산재, 건축가 최욱이 지은 가회동 오설록 티하우스, 건축가 황두진의 무무헌 등이 있다.
이 아름다운 한옥을 내부까지 구경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다. 이에 잡지 『행복이 가득한 집』은 2016년부터 ‘행복작당‘이라는 오픈하우스 행사를 진행했다. 행복이 가득한 집』 발행인의 가옥인 지우헌에서 출발해, 건축가들이 지은 한옥을 중심으로 하여 취죽당, 이음 더 플레이스 박실 작가의 한옥인 시리재, 한옥 호텔인 자명서실, 노스텔지어서울(히든재, 블루재, 힐로재) 등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다. 이 행복작당은큰 호응을 얻어 지금도 해마다 열리고 있다.
이렇게 북촌 한옥은 자기 변신을 이루며 한옥마을의 전통을 한편으로는 지키면서 한편으로는 재창조해나가고 있다. 이리하여 만보자는북촌 답사의 소감을 이렇게 말한다.

"아! 아름다워라. 우리 한옥이여!" - P199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는 인사동(仁寺洞)이다. 세계의 수도에는 한결같이 연륜을 자랑하는 독특한 문화예술거리가 있다. 베이징의 류리창(琉璃)은 고미술품 상가로, 도쿄의 간다(神) 고서점거리로, 뉴욕의 소호(SoHo)는 화랑가로,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Saint-Germain-des-Prés)는 문학인들이 드나들던 카페로, 모스크바의 구(舊)아르바트(Arbat)는 유서 깊은 건물에 기념품 가게가 가득한 차 없는 거리로 유명하다. 이에 비할 때 서울의 인사동은 그 모두가 한곳에 모여있는 전통문화거리다. - P201

이처럼 인사동 거리에는 항시 문예의 향기와 인간적 체취가 넘쳐난다. 인사동 거리의 이런 모습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하나씩 하나씩 쌓이고 쌓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인사동에 있던 고서점들이 문을 닫고 화랑들이 떠난 자리에 카페와 관광상품 가게들이 들어서는 급격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문기(文氣)가 없어져가고 있음을 아쉬워하나, 젊은이들은 오히려어르신들이 만들어놓은 문예의 향기 속에서 자신들을 맞이해주는 공간으로 이곳을 즐기고 있다. 이처럼 인사동은 세대에 세대를 거치면서 변하고 변하면서 오늘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가히 서울답사일번지로삼을 만하다. - P203

태화관

일제강점기 초기 인사동의 가장 큰 명소는 태화관泰和館)이었다. 태화관은 인사동 네거리를 동서로 관통하는 인사동5길의 서쪽 들머리에있는 태화빌딩 자리에 있었다. 태화관은 대한제국 시절에 궁내부 전선사장(司長)으로 궁중음식과 왕실 잔치를 도맡았던 안순환(安連煥,
1871~1942)이 운영한 요릿집이었다.
안순환은 1910년 강제 한일합병으로 조선왕조가 멸망해 궁에서 나오게 되자 지금의 동아일보사 자리에 2층 양옥을 짓고 명월관(明月館)이라는 국내 최초의 유흥 음식점을 차렸다. 대단한 호황을 누리던 중 명월관이 불타면서 1918년에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본래 이 집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가 헌종 사후궁에서 나와 살면서 순화궁(順和宮)으로 불리던 곳으로 1907년 경빈 김씨 사후 흥선대원군의 사위이자 이완용의 형인 이윤용이 한동안 살았다. 그러다 1911년이완용이 매입하여 살다가 1913년 옥인동 저택이 완공되어 그리로 이 - P208

사하면서 세놓은 것을 1918년에 안순환이 들어와 태화관을 차린 것이었다. 전하기로는 이완용은 집에 벼락이 떨어져 놀라서 급히 이사했다고 한다.

태화관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33인(지방에 있는 4인은 불참)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기념비적인 장소이다. 이날 태화관을예약한 것은 손병희(孫秉熙, 1861~1922)였다. 손병희에게는 몇 해 전에 후처로 들인 기생 출신 주옥경(卿, 1894~1982)이 있었는데 그녀는 14세에 평양기생학교에 들어가 기예를 배우고 19세에 서울로 올라와 명월관에서 근무했다. 기명은 산월山月)이었다. - P209

주옥경은 마음씨가 곱고 노래와 서화에 능해 손님들의 귀염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기둥서방이 없는 기생 모임으로 무부기(無夫妓) 조합을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21세 되는 1914년에 손병희와 결혼해 명월관을 떠났지만 그런 인연으로 손병희는 태화관 사교1호실을 무리 없이 집결 장소로 잡은 것이다.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가까워지자 손병희는 태화관이 일본경찰에게 피해를 입지 않도록 최린(崔麟)을 시켜 안순환이 직접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고 고발하게 했다. 그리고 오후 2시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의 선언서 낭독에 이어 손병희의 선창으로 "대한독립 - P210

만세"를 제창했다. 그리고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온 80여 명의 일본 경찰에게 모두 연행되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35,000부를 찍었는데 첫 문장 "오등(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에서 조선(朝鮮)이 ‘선조(朝)‘로 잘못 인쇄되어 재판(再版) 때는 이를 바로잡았다. 현재 기미독립선언서 초판 원본은 몇 부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가 자필로 다음과 같이 쓴 부전지가붙어 있는 것이 유명하다.

이 독립선언문은 기미년 3월 1일 하오 2시 탑동공원 안에서 각 학 - P211

교 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한 후 이 선언서를 뿌렸다. 나는 그때 뿌리고난 선언서 한 장을 보존하여 후손에 전한다. 나는 그때 휘문의숙 4년생으로 연령이 19세였다. 월탄 박종화


태화관 건물은 3·1운동 2개월 뒤인 5월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어서6월에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普成社, 조계사 극락전 앞마당 회화나무부근)도 화재로 불타버렸다. 일본경찰은 실화라고 발표했지만 그걸 믿는사람은 없었고 모두 일제의 방화에 의한 것으로 의심했다. 보성사터 인근 수송공원에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손에 쥐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 P212

고서점과 헌책방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농부 철학자 윤구병(尹九炳)은 9형제 중 막내로 형님이 일병이부터 팔병이까지 있는데, 바로 위 윤팔병(尹八炳, 1941~2018)은 본래 밑바닥 인생을 전전한 넝마주이의 왕초이자 빈민운동의 대부였다. 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한문과일어를 익혔고 사회과학서도 많이 독파해 인생관과 사회관이 뚜렷했다.
그리고 학생운동 하다 수배당해 도망다니는 속칭 ‘도발‘들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용돈도 준 의리로 유명하다.
윤팔병은 1985년 넝마주이 70여 명을 데리고 강남의 10여개 아파트단지에서 나오는 재활용품을 모으는 넝마공동체 작업장을 열었다. 어느날 그가 그림마당 민으로 나를 찾아왔다. 넝마를 인간 취급하지 않아 - P226

마』라는 잡지를 내려고 하는데 표지화 좀 추천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중미술 그림 중 강렬한 이미지를 하나 골라주었더니 즉각
‘그림에 서정성이 없다‘고 싫다며 컬러가 있는 걸 원했다. 그래서 박불똥의 컬러 사진 작품을 보여주었더니 "불똥이는 좀 관념적이구먼" 하고또 거절했다. 그래서 결국 이철수를 추천해 그가 그린 <거인의 아침>이라는 채색 목판화가 ‘넝마』 창간호를 장식했다.
확실히 철학과 인생이 있는 분이었다. 이후 나는 그를 ‘팔병이형‘이라고 불렀는데 1990년대 어느 날 강남의 영동고등학교 앞을 지나다가 고서집‘이라는 서점이 있어 들어가보았더니 팔병이 형이 주인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반갑게 인사하고 무슨 책이라도 하나 사드리고 싶었지만 참고서, 잡지, 싸구려 소설들로 꽉 차 있고 내가 볼 책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인사 - P227

만 드리고 가려는데 팔병이형 뒤쪽 책꽂이에 서울대 도서관에서 규장각 소장본을 영인본으로 펴낸 두툼한 장정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3책이 꽂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형님, 저 책이나 내가 사드리고 싶은데요" 하니 정색을하고 안 판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값을 후하게 쳐드릴 건데요" 했더니 팔병이형은 찬찬히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가 보다시피 여기 있는 책들은 수준이 낮아요. 그래서손님이 잘 보이는 내 머리 위에 이 거룩한 책을 꽂아둔 거예요. 이게 있으면 ‘고서점‘이고 이게 없으면 ‘헌책방‘이 되는 거야. 뭘 좀 알고나 산다고 해."


윤팔병 형의 생애 마지막 직함은 ‘아름다운 가게 이사‘였다. - P228

통문관에는 ‘적서승금(積書勝金)‘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책을 쌓아두는 것이 금보다 낫다는 뜻이다. 이렇듯 선생은 누구 못지않은 애서가이자 훌륭한 서지학자, 국학자셨다. 2006년 10월 15일, 향년 97세로세상을 떠나시며 선생은 유언으로 수목장을 해달라고 하셨다. 진실로인생을 잘 사신 인사동의 큰 어른이셨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2015년 11월 어느 날이었다. 당시 나는 화요일 저녁마다 조계사 문화관에서 ‘화인열전‘을 주제로 공개 강좌를 열고 있었는데, 미소를 머금은 동안(童顔)과 걸음걸이가 이겸로 선생을 빼닮은 백발 어른이 내게로 다가와서는 "내가 통문관 셋째요"라는 것이었다. 고려대 중문과의 이동향 명예교수였다. 이교수는 요즘 선친 유품을 정리하다 이게 나왔다며 얇은 서첩 두 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표지를 보니 한 권은 이직이라는 문인이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 대해 쓴 『단원화평(檀園畵)이고, 또 하나는 그림과 글씨의 기원에 관해 - P232

쓴 『서화연원(書畵淵遠)』이라는 필사본이었다. 책장을 넘기자 표지 안쪽에는 안국동 우체국 수령증이 붙어 있는데 놀랍게도 ‘수취인 유홍준‘으로 쓰여 있었다. 깜박 잊고 부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 책갈피에는 이동향 교수가 내게 쓴 한문 편지가 들어 있었다. 번역하면 이렇다.


물각유주(物各有主, 모든 물건에는 주인이 있는 법)인데, 이제 이 소책자가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또한 선친의 뜻입니다. 청컨대 웃으면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지금 이겸로 선생을 기리는 ‘산기문화재단‘의 이사직을 맡아 한국학저술상을 후원하고 고문서학을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오늘날 인사동의 고서점들은 모두 폐업하고 떠났지만 오직 통문관만이 손자인 이종운 씨가 가업을 이어받아 남아 있다.  - P233

통인가게는 『인간문화재』(어문각 1963)의 저자인 예용해 선생과 잡지『뿌리 깊은 나무』의 한창기 선생 등 안목 높은 고미술 애호가들의 단골이었다. 통인가게라는 이름도 한창기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통인가게에서 민예품을 많이 구입한 예용해의 컬렉션은 국립민속박물관과 서울공예박물관 두 곳에 기증되었고, 한창기 컬렉션은 고향인 순천시에 기증되어 낙안읍성의 ‘뿌리 깊은 나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본래 건물 앞에는 작은 마당이 있어 보기에도 아늑했는데 인사동길이 관광 거리가 되면서 지금 그 자리엔 승효상이 병산서원 만대루을 본받아 설계한 한옥 누대 건물에 제과점 태극당이 들어와 있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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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토박이

1993년, 서울시는 정도(定都) 600년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토박이‘를조사했다. 선정 기준을 ‘선조가 1910년 이전의 한성부에 정착한 이후, 현서울시 행정구역 내에 계속 거주해오고 있는 시민‘으로 확정해 조사한바, 서울시민 1,100만명 중에서 해당자는 오직 3,564가구, 1만 3,583 명에 불과했다.
나는 그중 한 명인 서울토박이다. 내가 중학생이던 1960년대에도 사대문 안 서울 알토박이를 조사한다며 윤보선 대통령도 했고 누구도 했으니 해당되는 사람은 신고하라고 했다. 그때 큰아버지께 우리 집안도 신고하자고 했더니 "그런 거 신고하면 주민세만 더 내라고 할지 모르니 쓸데없이 신고할 생각하지 마라" 하셔서 못했다.  - P59

오히려 한양의 서쪽인 서소문 정동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서촌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북촌의 가회동 한옥마을이요즘 말로 ‘핫플레이스‘로 떠오르자 여기에도 한옥마을이 있다는 것을내세우기 위해 서촌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후가 분명하다. 더 정확히는 북촌의 지가가 올라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생기고 들어갈 여지가 좁아지자골목골목 전통마을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이쪽으로눈길을 돌리면서부터 생긴 이름이다.
이에 종로구에서는 바야흐로 주목받는 이 동네 이미지를 부각하기위해 새로운 이름 짓기를 시도하여 세종대왕이 통인동에서 태어났다는것을 내세워 세종마을이라고 명명했고 ‘사단법인 세종마을 가꾸기회도생겨났다. 또 청계천 상류인 이곳 일대를 상촌(上村), 웃대라고 불렀다며새로 지은 한옥문화공간의 이름을 ‘상촌재(上村齋)‘라고 했다. - P61

그러나 세종마을은 동네 이미지에 맞지 않고, 웃대는 어색하여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다. 아무리 관(官)이 강조한다고 해도 민(民)이받아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다. 새 시대 사람들이 새롭게 주목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이름이 서촌이니 민의 흐름에 따라 그냥 서촌이라고 부르는 게 차라리 낫겠다.
조선시대 한양의 행정구역은 국초부터 5부(部) 52방(坊)으로 구분했다. 서촌 지역은 북부(北部) 관할이었고, 이 지역엔 북부의 10개 방중 준수방(俊秀坊), 순화방(順化坊), 의통방(義通坊)이 있었고 나중에 적선방(積善坊)이 추가된 것으로 나온다. 행정구역과는 별도로 경복궁 서쪽 지역은 통상 장의동(壯洞), 줄여서 장동(壯洞)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는 필운대 · 옥류동·청풍계·백운동까지 북악산과 인왕산 일대 명이 다 들어 있다. 그러니까 서촌의옛 이름은 장동인 셈이다. - P61

이 통의동 길가에는 녹지공간으로 통의동 마을마당이 조성되어 있고,
진화랑, 아트스페이스 화랑이 있고, 조금 더 가면 문화재단인 아름지기가 나온다. 아름지기 건물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김종규 교수가 설계한현대식 건물과 그 2층에 김봉렬 교수가 설계한 한옥이 잘 어우러져 건축학도들이 많이 찾아간다. 아름지기 안쪽에는 젊은 관람객들이 많이찾는 대림미술관이 있다.
길가를 길게 차지하고 있는 코오롱빌딩을 지나 고궁박물관과 마주한곳에는 항시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들어서는 금융감독원 연수원이 나오고, 적선골 음식문화거리로 안내하는 골목길을 지나면 이내 광화문에서 사직단으로 뻗어 있는 율곡로와 만나게 된다. - P71

영조는 즉위 전 연잉군 시절 창의궁에서 9년간 살았고 왕이 된 뒤에도자주 찾아왔다. 창의궁은 규모가 아주 컸고 한때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사당이 설치되어 있었다. 1908년 창의궁은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어갔는데 1917년 기록에 의하면 전체(통의동 35번지)가 2만 1,094제곱미터(약 6,380평)였다. 이후 ‘동척 사택 단지‘로개발되면서 2층 양옥들로 가득해 나 어릴 때는 부자 동네로 통했다.
월성위궁은 창의궁 바로 남쪽 적선동에 있었다(적선동 8-4번지). 월성위궁에는 1758년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죽은 뒤 사당이 설치되었고 이후아들 김이주, 손자 김노영, 증손자 김정희까지 약 80년간 경주 김씨 월성위의 후손들이 여기 살았다. 그래서 추사가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냈던 것인데, 1840년 추사가 제주로 유배된 뒤 이 집은 몰수됐다. 이에 월성위궁 터에는 ‘김정희 본가터‘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 P75

겸재 정선은 여기에서 52세까지 살다가 지금의옥인동 군인아파트가 있는 인왕산 아래 인곡정사로 이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산수화를 ‘진경산수‘라는 하나의 장르로 완성한 겸재는 사실천분이 뛰어난 화가는 아니었다. 몰락했어도 양반 출신이었기 때문에도화서 화원이 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훌륭한 스승과 뛰어난 벗들이 있었다. 장동 김씨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 밑에는 겸재를 비롯해 사천 이병연, 담헌 이하곤, 이의현, 신정하 같은 제자들이 있었다.
또 관아재 조영석 같은 문인화가와 이웃에 살면서 학문과 예술을 교감했다. 그뿐 아니라 지수재 유척기 같은 노론의 대신도 가까이 살았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이들이 일으킨 문풍(文風)을 백악사단(白岳詞壇)이라고 했다. - P96

겸재가 진경산수를 개척한 결정적인 계기는 35세 때인 1711년(신묘년)금강산 기행이었다. 이때 벗 이병연이 마침 금강산 초입의 금화현감에재직하고 있어서 스승 김창흡, 벗 정동후와 김시보 등 다섯이서 금강산을 유람했고, 그때 받은 자연에 대한 감동을 화폭에 담아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牒)〉을 그린 것이 겸재가 진경산수화가로 나아가는첫 출발이었다.
이후 조영석의 증언대로 그는 그림을 그릴 때면 백악산과 인왕산을바라보며 우리 산천의 생김새를 탐구했고, 그가 그리면서 쓴 붓을 내다쌓으면 무덤이 된다고 할 정도로 끊임없는 수련과 연찬을 통해 이루어낸 것이 겸재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겸재 예술의 자산은 좋은 스승,
벗들과의 어울림, 학문·문학과 미술의 만남, 그리고 여행이었다고 할 수 - P96

있다. 만 권의 책을 읽고 천 리를 여행하는 것이 문인의 길이라는 것을몸소 실천한 결과였다. - P97

서촌의 공간적 가치는 길에 있고 그 길 중간중간에는 작은 한옥들이담장을 맞대고 있는 골목이 있고 그 골목엔 역사 인물의 자취가 있고 길끝에는 유적지가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인왕산이라는 아름답고 듬직한 산이 받쳐주고 조금만 올라가도 명승이 나온다는 점에서 매력과 가치가 더해진다. - P106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1950년대에 우리는 언커크가 무얼 하는 기관인지도 모르고 유솜(USOM, 미국 원조단)은 또 무엇인지 모르면서 미국에서 원조 물자로 보내주는 밀가루와 분유와 우리가 ‘빠다‘라고 부른 마가린을 배급받았다. 아무 반찬이 없어도 밥에 빠다와 간장을 넣어 비벼 먹으면 고소했다. 학교에서 겨울이면 조개탄 난로 위에 큰 양은주전자로물을 끓여 석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분유덩이를 풀어 마셨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각설탕이 있어 부잣집 아이는 그걸 까서 타 마셨다.
미국은 1956년부터 잉여 농산물을 한국에 무상 원조했다. 미국은1948년 이후 잉여 농산물이 계속 쌓여 미국 농업에 짐이 되었는데 이를바다에 버리느니 원조해주었던 것이다. 이게 더 싸게 먹혔다고도 한다.
결국 이 식량 원조는 전후 한국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주었다. 밀가루 대량 원조는 쌀 위주의 우리 식생활도 바꾸어 밀가루 음식들이 발전했는데, 자장면이 큰 인기를 얻게 된 것도 이 영향이었다고한다. - P133

원조 자체는 무상이었지만 그 내용은 사실 공짜가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원조 물자를 팔아서 마련한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결정하는 권한은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미합동경제위원회에 있어 원조 물자판매 대금의 상당 부분은 미국산 무기와 제품을 사는 데 쓰였다.
게다가 1958년에는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 농민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주요 원인은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잉여 농산물이 들어와 곡물가격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밀과 원이 대량으로 들어온 후 농촌에서는 목화밭과 밀밭이 사라져갔다.
이에 반해 면방직·제당·제분의 이른바 ‘삼백(三白)‘ 산업의 기업은 재벌로 성장해갔다. 기업이 원조 물자와 원조자금을 배정받는 것은 큰 이권이었기 때문에 정경유착도 관행처럼 이뤄졌고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 P133

극에 달하면서 결국 1960년 4·19혁명의 한 이유가 되었다.
화재 후 다른 곳으로 옮겨간 언커크는 1973년 12월 제28차 유엔 총회에서 만장일치 결의로 해체됐다. 벽수산장에 화재 잔재가 완전히 철거된 것은 1973년 6월이었다고 한다. - P134

영화 「건축학개론] 촬영장인 손호연 시인의 한옥은 긴 미음자 집으로아주 단아한 구조인데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오는 툇마루에 앉아 잠시 쉬어가고 싶게 하는 집이다. 필운동 홍건익가옥은 1935년 무렵에 세워진홍건익이라는 상인의 부잣집 한옥이다. 300평 가까운 대지에 일각문·대문채· 행랑채·사랑채·안채·별채 등 한옥의 제 요소가 언덕자락 경사면을 타고 배치되어 대갓집 한옥의 그윽한 멋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성격이 다른 세 채의 한옥을 비교해본다는 것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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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그러니까 시는


우리가 절망의 아교로 밤하늘에 붙인 별
그래, 죽은 아이들 얼굴
우수수 떨어졌다
어머니의 심장에 단 하나의 검은 섬에

그러니까 시는
제법 볼륨이 있는 분노, 그게 나다! 수백 겹의 종이 호랑이가
레몬 한 조각에 젖는다
성냥개비들, 불꽃 한 점에 날뛴다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시는
여기 있다

유리빌딩 그림자와
노란 타워크레인에서 추락하는 그림자 사이에
도서관에 놓인 시들어가는 스킨답서스 잎들읽다가 덮은 책들 사이에
빛나는 기요틴처럼 닫힌 면접장 문틈에

잘려 나간 그림자에 뒤덮여서
돋아나는 버섯의 부드러운 얼굴

그러니까 시는
돌들의 동그란 무릎,
죽어가는 사람 옆에 고요히 모여 앉은

한밤중 쏟아지는
폐병쟁이 별들의 기침
언어의 벌집에서 붕붕대는 침묵의 말벌들

이 슬픔의 앙상한 다리는 어느 꽃술 위에 내려앉았나

내 속에 매달린
영원히 익지 않는 검은 열매 하나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나는 오늘 밤 잠든 당신의 등 위로
달팽이들을 모두 풀어놓을 거예요

술집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창백한 담쟁이 잎이
창문 틈의 웅성거림을 따라와
우리의 붉은 잔 속에 마른 가지 끝을 넣어봅니다
이 앞을 오가면서도 당신은 아무것도 얻어 마시질 못했죠
아버지를 부르러 수없이 드나든 이곳의 문을 열고 맡던 냄새와 표정과 무늬들
그 여름 당신은 마당 가운데 고무 목욕통의 저수지에
익사할 뻔한 작은 아이였어요
아 저 문방구 앞, 떡갈나무 아래, 거기가
당신이 열매를 줍거나 유리구슬 몇 개를 따기 위해
처음으로 희고 부드러운 무릎을 꿇었던 곳이군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나의 손을 잡고
어린 시절이 숨어 있던 은유의 커다란 옷장에서
나를 꺼내 데려가주세요
얇은 잠옷 차림으로 창문 너머 별을 타고 야반도주하

는 연인들처럼 가볍게
들판의 귀리 싹이 몇 인치의 초록으로 땅을 들어 올리듯
차력사인 봄을 불러다 주세요.
붉은 담쟁이 잎이 잔 속에서 피어나고 흰 양털 장화 속이 축축해지도록 눈 내립니다
별과 알코올을 태운 젖은 재들 휘날립니다

내가 고백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술냄새로 문패를 달았던 파란 대문, 욕설에 떨어져 나간 문고리와 골목길
널, 죽일 거야 낙서로 가득했던 담벼락들과 집고양이,
길고양이, 모든 울음을 불러주세요
당신이 손을 잡았던 어린 시절의 여자아이, 남자아이들의 두근거리는 심장,
잃어버린 장갑과 우산, 죽은 딱정벌레들, 부러진 작은나뭇가지와 다 써버린 산수 공책
마을 전체를 불러다 줘요

다리 잘린 그들의
기다란 목과
두 팔과
눈 내리는 언덕처럼 새하얀 등 위로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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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9~10권으로 서울편을 두 권 펴낸 뒤 여타서울 답사기를 어떻게 쓸 것인가 많은 고민이 있었다. 사실 이미 펴낸서울편은 창덕궁을 비롯한 5대 궁궐과 한양도성, 성균관, 동관왕묘 등조선왕조의 왕실 유적들만을 답사한 것이다. 그러니 이를 진정한 서울답사기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양 정도(定都) 600년의 역사가 남긴 문화유산 이야기는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서울의 문화유산은 개화기와 근대를 거치면서 많이 사라지고변질되어 의연히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현재의 삶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말하자면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현재진행형인 것이니 이제까지의 답사 유적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버릴 생각도 했다.
그러다 5년 전, 서울편 출간 기념으로 서울시에서 ‘유홍준과 함께하는 서울 답사‘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몇 차례에 걸쳐 사대문 안 곳곳을시민들과 함께 다니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 P4

나는 서울 서촌에서 태어나 거기에 살면서 초·중·고·대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는 인왕산 밑에 있었고, 중학교는 북악산 밑에 있었다. 인사동은 미술계에 입문한 후 이날 이때까지 나의 사회생활이 이루어지는내 인생의 사랑방 같은 곳이다.
이때 북촌, 서촌, 인사동 등을 답사하면서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이야기를 곁들여주면 답사객들은 문화재에 대한 해설보다도 나의 지난날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듣는 것이었다.
특히 엄마 손을 잡고 따라온 한 중학생이 내게 바짝 붙어 다니면서 마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듣듯 재미있어하는 것이었다. 인왕산 수성동계곡에서 잠시 쉬어 갈 때도 내 곁에 붙어 앉아서는 무슨 얘기라도 해주려나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스스로도멋쩍었던지 손에 든 귤을 까서 권하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근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선생님 어렸을 때 얘기가요."
"실례지만 몇 살이세요?"
"선생님과 띠동갑이에요." - P5

이리하여 나의 체험적 서울 답사기로 서촌·북촌· 인사동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데 막상 글을 써내려가자니 이제까지 답사기 형식과는 전혀다르게 되어 어색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나의 이런 개인적 증언이 독자들에게, 또는 답사기로서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주저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애초 마음먹은 대로 나의 체험적 이야기로 서울 사대문 안 답사기를 써내려간 데에는 두 가지가 힘이 되었다.
하나는 『천변풍경』의 박태원이 소설 기법으로 받아들였다는 고현학(考現學, modern-ology)이다. 고현학은 과거의 유물을 연구하는 고고학(考古學, archae-ology)의 방법론을 현대 생활사에 적용하는 민속학적 방법론으로 일본의 곤 와지로(今和次郞)가 관동대지진(1923) 이후 도쿄의 주거생활을 연구하면서 내건 개념이다. 이런 고현학의 입장에서 본다면울 묵은 동네에 대한 나의 기억과 서술은 그 나름의 의의를 지닐 수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6

북악산(山명승 제67호)은 높이 342미터의 화강암골산으로 서울의주산(主山)이다.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불리며 전체 면적은 약 360만제곱미터(약 110만평)이다. 산줄기의 흐름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의 중간지점에 있는 금강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광주산맥)이 북한산을 거쳐 북악산에서 문득 멈추고 양팔을 벌린 형상이다.
북악산 서쪽으로는 인왕산(仁王山, 338미터), 동쪽으로는 낙산(山125미터)이 있고 남쪽으로는 남산(南山 262미터) 너머로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있다. 이들이 서울의 내사산(四山)으로 아늑한 분지를 이룬다. 북악산의 형국을 자세히 보면 마치 벌이 엎드려 숨을 쉬는 듯한 모습이어서 어느 풍수가는 여기서 나오는 기가 서울을 600년 넘게 한반도의 수 - P11

장 밖 북악산 지역은 한양의 지세를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 출입을 금지시켰다. 수도 한양의 방위체제상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과 북소문인 창의문은 평소에는 닫아두고 필요할 때, 이를테면 창의문은 군사 이동이 있을 때, 숙정문은 가뭄이 심해 기우제를 지낼 때만 열어두었다. 당시 한양의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기 때문에 공간 운영에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간혹 고려시대 남경의 터가 경복궁 후원(현 청와대) 자리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최종현이 『오래된 서울』(동하 2013)에서 고증한 바대로 경복궁 안 서북쪽 모서리(향원정과 태원전 사이)의 빈터라는 설이 훨씬 설득력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그 옛날에 비스듬한 평지를 놔두고 가파른 산을 어렵게 깎아 행궁을 지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경복궁 뒤 북악산은 자연산림 그대로였다. - P14

내가 지금 북악산과 청와대 답사기를 쓰고 있지만 사실 청와대는 금단의 구역이고 비공개 사항이 많기 때문에 자료 수집에 한계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통령경호실에서 2007년에 발간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이 있어 어려움 없이 답사기를 쓰고 있다. 이 - P44

책은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한 이성우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이재직 시절 심혈을 기울여 거의 완벽하게 펴낸 자료집이다.
내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2007년 염상국 대통령경호실장이 어느 날 내게 전화해 ‘청와대의 역사유적을 소개하는 책을 준비해왔는데 한번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나는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라는 마음으로 흔쾌히 응했다.
이리하여 이성우 본부장이 가편집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을 가져왔는데 이를 보면서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약 500면에달하는 이 책은 북악산과 청와대 주변의 문화유산에 대한 실록, 지도, 옛사진, 신문 기사, 청와대 내부 문서 등의 관계 자료를 현장 사진과 함께총망라했다. 그뿐 아니라 낱낱 유적의 역사적 사실을 입체적으로 고증했다. 그때 나는 이건 학술조사가 아니라 수사관의 현장검증 보고서 같 - P45

다는 감동을 받았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宮)가 말하기를 서화를 보는 눈은 ‘금강안(金剛眼) 혹리(酷吏手)‘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즉, 금강역사처럼 부릅뜬눈으로 보고, 혹독한 관리가 세금을 메기는 손끝처럼 치밀하게 따져야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책이야말로 ‘혹리수‘가 펴낸 책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나는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만 재확인을 해주고 기꺼이 추천사를 써주었다. 그리고 그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시상식 때이성우 본부장에게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수여했다. 이 책은 2019년에개정판이 발간되었다. - P46

그런데 이 뛰어난 베테랑 ‘문화재 수사관‘도 확인되지 않는다며 미제처리한 유적이 몇 있다. 대표적인 유적이 관저 옆에 있는 침류각(枕流閣) 건물이다. 이 건물은 기역자 형 한옥으로 세벌대 기단 위에 사각주추를 얹어 기둥을 올렸으며, 대들보가 5개인 5량집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거기에다 오른쪽 한 칸은 높은 장초석(礎石)위에 누마루를 설치해 기품이 당당하다. 전후면 중앙에불발기창(실내를 밝히는창)을 두고 아래위로 띠살과 교살로 구성한 창호들도 아주 품격이 높다.
목재를 보면 1900년 전후에 지어진 왕가의 건축인 것이 분명한데 <북궐도형〉을 비롯한 모든 자료를 찾아보아도 침류각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이 건물은 1989년에 관저를 신축할 때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추정컨대 원 건물의 위치는 물길이 흐르는 곁에 있었을 것이분명하다. 우선 건물 이름이 ‘계곡을 베개로 삼는다‘고 ‘침류‘라 했기 때 - P46

문이다. 또 2019년 상춘재 앞으로 옮겨놓은 천록(天祿)이라는 돌조각상은 처음에 침류각의 기단 앞에 있었다고 하는데, 천록상은 보통 물가에놓이는 조각상으로 이것은 창경궁에 있었던 천록상(국립고궁박물관 소장)과 한쌍으로 보인다. 거기에다 괴석받침과 드므까지 갖추고 있었다는것을 보면 궁궐 건축임이 분명한데 어디서 옮겨온 것인지 더욱 궁금하기만 하다. 아무튼 청와대 안에서 가장 볼 만한, 어떤 면에서는 유일하게아름다운 건물이 침류각이다.
고건축은 그 유래가 분명해야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은 워낙에 아름다워 유래가 불분명함에도 1997년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 P47

또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건물은 오운정(五雲亭)이라는 정자다. 청와대 관람은 관저 뒤편의 산으로 올라가는 길까지 개방되어 있다. 이 길을따라 올라가면 ‘미남불‘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그리고 ‘천하제일복지‘ 암각글씨가 나오는데 그곳에 이르는중간에 아름다운 오운정이 나온다.
이 오운정은 현재 청와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정자로 아주 멋진 건축이다. 사방 한 칸에 난간이 둘러 있는 단순한 구조지만 푸른색의 네짝여닫이 분합문(分關門) 창살의 가는 살대가 가지런하고, 우진각지붕이겹처마로 길게 뻗어 있어 단아한 가운데 무게감이 있다. 단청도 아름답다. 여기에다 멋들어진 초서로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 글씨로 우남(雲南)이라는 호와 ‘이승만 인(印)‘이라는 도장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오운정 또한 제자리가 아니다. 대통령 관저 자리에 있던 것을1989년 관저 신축 매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 P48

궁궐지」를 보면 북쪽에는 오운각(閣) 10칸, 동쪽에는 옥련정(亭) 1칸, 서쪽 가에는 벽화실(室) 9칸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북궐도형>에 그려진 옥련정의 평면도를 보면 이 오운정과 일치한다. 그래서나 혼자 생각에 혹시 세월이 많이 흘러 이승만 대통령 시절엔 옥련정과오운각을 혼동한 것이 아닐까 의심해보게 된다. - P49

오운정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미남불이라 불리우는 경주 방형대좌석조여래좌상이 나온다. 이 불상은 본래 경주 어딘가에 있던 것을1912년 데라우치 총독이 가져와 당시 남산 왜성대에 있던 총독부 건물에모셨다가 1939년 조선총독 관저가 청와대 자리에 신축될 때 옮겨왔다.
처음에는 저 아래쪽 ‘천하제일복지천‘이라는 샘터 뒤쪽으로 모셔졌는데1989년 관저를 신축하면서 지금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본래대좌가 상중하 3단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나 지금은 상단만 남아 있고 팔과 어깨, 등허리에 파손된 부위가 있어 2007년에 보존 처리했다고 한다.
이 불상의 원위치는 그동안 경주 남산 불상 계곡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초대관장을 지낸 모로가 히사오의『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1916)에서 경주 도지리(道只里) 이거사(車寺) 터를 말하면서 "과거에 완전한 석불좌상 1구가 엄존했는데, 지난 다이쇼(大正) 2년(1913) 중에 총독 관저로 옮겼다"고 언급한 것이 최근에알려져 현재 이 절터에 온 것이라는 설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불교미술사가 중에는 아직 단정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이론을 제기하기도 하니 이거사 터의 발굴 등을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 P51

이 불상은 조형적으로 뛰어나 1917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도 실려 있다. 이 도록에서는 소장처를 왜성대라고 했다. 이불상은 상호(얼굴)가 미남형이어서 일찍부터 미남불이라는 애칭을 갖고있었던 듯하다. 1934년 3월 29일자 『매일신보』에서는 이 석불을 취재하면서 "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 오래전 자취를 감췄던 경주의 보물"이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이 불상은 774년에 완공된 석굴암 본존불 양식을 이어받은 전형적인 - P51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으로 대개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견편단에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는 늠름한 자세에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후덕한 인간미를 풍긴다. 어깨와 가슴에는 볼륨감이 나타나 있고 옷주름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목에는 삼도가뚜렷이 나타나 있다. 과연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불상의 이미지를 탁월하게 나타낸 미남불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하여 이 불상은 2018년 보물 제1977호로 지정되었고, 유물 명칭은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慶州方形臺座石造如來坐像)〉으로 명명됐다. - P53

윤석열정부가 들어서고 대통령 집무실은 용산 국방부 건물로, 관저는한남동으로 옮겨가면서 청와대는 대통령 취임식 당일인 5월 10일부터일반인에게 전면 개방되고 있다. 예상한 대로 많은 인파가 몰려 오랫동 - P55

안 금단의 지역으로 있으면서 전 대통령들이 근무하고 기거하던 청와대를 구경하고 있다. 어차피 대통령이 떠난 곳을 국민에게 개방한다는 데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문부터 열고 보았기 때문에 많은 잡음이 일고 있다. 혹은 청와대 구관을 복원 또는 축소 복원하겠다고 했다가 국민적 반발에부딪혔고, 미술관으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운을 띄우기도 했지만 그 미술관의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최근에는 패션잡지의 화보 촬영 장소로 제공되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문화재청장과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장을 지낸 나로서는 청와대 개방 문제에 대해 개인 의견을 내는 것에 신중할 수밖에 없어 그동안 언급을 자제해왔지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로서 한마디 의견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P56

56현실적으로 이미 개방된 청와대의 문을 다시 닫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나아가서는 최종적인 개방 형태에 대해서는 명확한그림을 제시해야 한다. 청와대라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을 앞으로어떻게 사용할 것이라는 마스터플랜을 제시해야 하는데, 이는 대통령혹은 문화부장관이나 문화재청장 개인의 상식적인 소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단편적이고 아이디어제공이라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건축설계 경기‘를 여는 것이다. 그리고이것은 세기적인 설계 경기로 국제적으로도 크게 주목받을 것이다. 이때 반드시 커미셔너나 코디네이터 주도하에 추진해야 한다. 지금 정부에서 해야 할 일은 뛰어난 건축가에게 이 책임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그 설계 경기는 국내외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세계적인 프로젝트로 진행해야 좋은 마스터플랜도 구할 수 있고 더불어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 - P56

을 일으키며 국가 홍보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런 방향에서 청와대가 재정비되어 우리 시대의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간절하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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