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젊은 작가들이 미술계 전면에 등장한 것이었다. 미술계가 현대추상미술 계열과 상업화랑의 인기 구상회화로 양분되어 있던 상태에서젊은 작가들이 일으킨 조형적 반항은 아주 뜨거운 것이었다. 이런 새로운 미술운동에 앞장선 것은 1979년, 일군의 젊은 작가와 평론가 들이 결성한 ‘현실과발언‘이라는 미술 그룹이었다. 그해 대학로 미술회관에서 가진 창립전은 개막 당일 당국이 갑자기 전시를 불허하고전기를 차단하는 바람에 촛불을 켜고 보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동산방화랑이 이들을 초대해 이듬해 현실과발언은 제대로 된 창립전을 가질수 있었는데, 이들의 창립취지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다. - P258
돌아보건대 기존의 미술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이든, 유한층의 속물적인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혹은 밖으로부터 예술 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왔고 심지어는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조차 제대로 발견하지 못해왔습니다. - P259
현실과발언은 기폭제에 불과했다. 20대, 30대 젊은 작가들의 기존미술에 대한 조형적 반항이 곳곳에서 전시회로 나타났다. 1984년은 젊은 작가들의 뜨거운 열기가 한껏 고조된 시기였다. 그리고 이듬해인1985년 7월 박진화, 손기환, 박불똥 등이 기획한 ‘한국 미술 20대의 힘‘ 전에서는 젊은 작가의 조형적 반항이 가히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군사독재정권의 사찰 당국은 미술은 문학에 비해 그래도 ‘순수하다‘고 관망하다가 급기야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전시회를 봉쇄하고 출품 작가를 연행해 즉결심판에 회부하는 ‘전 사태‘가 발생했다. 이때부터 독재정권은 본격적인 미술 탄압을 시작하면서 젊은 작가들의작품 경향을 불온하다는 의미가 내포된 ‘민중미술‘로 규정하고 이들의전시장 대관을 막았다. - P260
이에 민중미술 계열의 미술인들은 1985년 손장섭 대표, 고 김용태 사무국장을 위시로 민족미술인협의회(민미협)를 결성했다. 그러나 중요한것은 전시공간의 확보였다. 이에 고 김용태, 화가 김정헌 그리고 나 셋이서 합심하여 그해 12월에 수도약국 골목 들머리에 있는 허름한 건물의35평 지하공간을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70만 원으로 세 얻었다. 미술운동에서 전시장을 확보해 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은 문학운동에서 잡지사를 갖고 있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전시장 이름엔 당연히 ‘민족‘이나 ‘민중‘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었지만 이는 불온의 상징이어서 정보기관의 사찰 대상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냥 ‘그림마당 민‘으로 정하고 민씨 성을 가진 대표를 내세워 위 - P261
장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민중예술가들과 두루 가까이 지내던 나의 미학과 동창인 고 민혜숙을 대표로 하고 나는 운영위원장을 맡으면서 그림마당 민이 탄생했다. 개막전은 1986년 2월 민중미술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40대의22인전‘이라는 아주 ‘부드러운‘ 제목으로 출발했다. 이렇게 그림마당 민은 민중미술가들의 기대와 축복 아래 개관전을 대성황리에 치렀다. 그리고 그해 6월 개관 첫 초대전으로 기획된 오윤의 ‘오윤판화전‘ 역시 대성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모두들 그의 뛰어난 예술성에 감동했다. 그림마당 민은 오윤의 판화집 『칼노래』도 출간했다. 그러나 오윤은 이 첫 개인전에 이은 부산 순회전을 마친 지 열흘 만에 간암으로세상을 떠났다. 오윤은 당시 간암 3기였다. 언제나 피곤한 얼굴로 까맣게 타들어갔 - P262
최대의 풍자화다. 그런 오윤이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부터 살색이 다시 희어지고 아품도 다 가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림마당 민을 위해 산속에 파묻혀 열성으로 작품을 제작해 개인전에 70점을 출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물주는 암 환자에게 마지막엔 편안히 쉴 수 있는 시간을 준다더니, 오윤은그 기간에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준비한 것이다. 오윤의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슬픔을 안겼는데 시인 정희성은 판화가 오윤을 생각하며」를 지어 장례식에서 조시로 바쳤다.
눈물이 나지 않는다 나이 사실에 세상을 뜨며 친구들이 둘러앉아 슬퍼하는 걸 저도 보고 싶진 않겠지 - P263
살 만한 터를 가려 몇 개의 주춧돌을 부려놓고 잠시 숨을 돌리며 여기다 씨 뿌리고 여기다 집을 짓고 여기다 큰 나라 세우자고 그가 웃으며 말하는 것처럼 아직도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는 바람처럼 갔으니까 언제고 바람처럼 다시 올 것이다 - P264
그림마당 민은 처음에는 그런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해 두해 지나면서 그림마당 민은 일주일단위로 전시회를 열면서 많은 젊은작가들의 개인전과 단체전, 그리고 기획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해가갈수록 운영에 차질이 생겨 매달 건물 임대료를 마련하는 데 민혜숙 대표와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물도 낡아서 비만 오면 전시장이 물바다가 되는 바람에 매번 그걸 닦고 치우는 게 일이었다. 홍선웅·곽대원·류연복·유은종·최석태 등이 정말로 고생들 많이 했다. 게다가 함께 사용하던 민미협 사무실이 따로 독립해 나가고부터는인건비 부담이 생겼다. 대관료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신촌 우리마당에서 하고 있던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강좌를 그림마당 민 - P265
으로 옮겨와 수강료를 받아 임대료를 내기도 했다. 게다가 당국의 감시와 탄압은 여전했다. 1987년 3월 민미협에서 기획한 ‘반(反) 고문전‘ 때의 일이다. 박불똥의 작품 <우리나라 대통령이 부(끄)럽다>는 전두환 대통령이 박종철 표찰을 달고 전경에게 끌려가는 희대의 풍자화였지만 전시회 주최 측은 자체 검열 결과 그림마당 민이 폐쇄될 수 있다고 판단되어 전시장이 아니라 사무실에 숨기듯 걸었다. 이작품은 그해 연말에 열린 박불똥의 개인전 ‘작전‘ 때 공개 전시됐다. 그런 탄압 속에서도 그림마당 민에선 정말로 많은 민중미술전이 열렸다. 해마다 열린 ‘통일전‘ 같은 전시에서는 고 이애주의 춤과 김남수의 굿이 더해져 열기가 뜨거웠다. 그림마당 민은 나중엔 화가 고문영태가 발 벗고 나서서 운영을 맡으면서 조금 사정이 좋아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렵기는 매일반이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그림마당 민은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 문을 닫았다. 민미협 회원들의 열띤 논쟁 끝에 그림마당 민이 문을 닫게될 때 나는 영남대 교수로 대구로 내려가게 되면서 그동안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던 인사동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림마당 민은 우리 민중미술운동사 내지는 20세기 한국현대미술사의 상징적 공간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 P266
영국 사람이 가야토기를 사가면 영국 토기가 되는 것이아니라 영국 사람도 가야토기를 통해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존경하게되는 것이다. 귀중한 유물은 당연히 반출이 금지되어야 하지만 민예품가게 진열장에 있는 평범한 것까지 규제하는 것은 우리 문화의 국제적홍보를 막는 행위이다. 나는 문화재청장 재임 때 이 모순된 규제를 고치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법률 개정권을 갖고 있는 국회의원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국민 여론의 합의가 더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하여 인사동에 온 외국인 관광객들은 한국이 문화적으로 대단히폐쇄적인 나라라는 인상을 갖게 되고 인사동에 들어와 있는 중국 유물들을 기념품으로 사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식민지배의 경험으로 인한문화재 약탈의 콤플렉스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자신있게 우리 문화재의 세계화를 추진해야 한다. 그것이 인사동 민예품 가게를 살리는 길이라서가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K-컬처의 뿌리를 자랑스럽게 알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 P270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인사동에 진출한 문인들은 대개 1930년대생으로 그때 그분들 나이 50대였다. 본래 문인들은 떼거리로 잘 몰려다녔다. 1960년대에는 김관식, 김수영, 박인환, 이봉구 등이 명동을 누볐다. 1970년대에는 주로 관철동과 청진동에 진을 쳤다. 관철동은 한국기원이 있어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을 비롯해 바둑을 좋아하는 문인들이 모였다. 청진동에는 소설가 이문구가 편집장으로 있는 현대문학사와 민음사신구문화사 등이 있고 초창기 창작과비평사도 거기 있었기 때문에 ‘열차집‘ (서울시 미래유산)이나 가락지‘ 같은 술집이 항시 문인들로 북적였지방에서 올라온 문인들은 영남여관에서 묵어가곤 했다. - P286
이해림은 찾아오는 사람을 편안히 해주는 대단한 친화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이 든 손님들은 이해림을 여동생처럼 대했고, 젊은 패거리들은 이해림을 누나라고 불렀다. 그 이해림이 수운회관에서 결혼식을올릴 때 주례가 백기완 선생이었을 정도다. 그런 평화만들기였는데, 이해림은 좋지 않은 일로 문을 닫고 인사동을 떠났으며 이를 인수한 분이 수운회관 옆 골목으로 가게를 옮겼으나끝내는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그래서 이를 매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세월이 흘러 2014년 11월, 옥션 단 경매에는 평화만들기를 회상하게하는 한 ‘유물‘이 나왔다. 본래 평화만들기 한쪽 벽에는 1990년 무렵 시인 김지하가 이용악의 「그리움」이라는 시를 굵은 매직펜으로 호쾌하게쓴 글씨가 있었다. 평화만들기가 문을 닫고 다른 데로 이사 갈 때 떼어간 것인데 이것이 돌고 돌아 경매에 나온 것이다. - P292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험한 벼랑길 굽이 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검은지붕에/연달린 산과산사이/너를 두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어쩌자고 잠이 깨어/그리운 곳차마 그리운 곳//눈이 오는가/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P292
김지하가 만취한 상태에서 단숨에 써내려간 이 이용악의 시는 행이나 연 구분 등이 원문과는 약간 다르다. 이에 대해 김지하는 ‘내 글씨가아니라 분단의 아픔을 우아한 서정으로 노래한 이용악의 글을 봐달라‘ 고 했다는데, 나는 이를 보면서 이용악의 시보다도 오랜 기간 감옥 독방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정신병원까지 드나들며 말년에 이해하기 힘든 언행을 보여준 김지하가 아니라, 말술을 마시며 통을 하고서도 이용악의 시를 외워 쓰던 그 시절 ‘지하형‘의 웅혼한 호연지기를 보게 된다. - P293
주인장 염기정이 카페 소설을 열어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드는 또 하나의사랑방을 제공했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가수이자 그 자신이 엄청난 술꾼이기도 한 염기정은 1988년 이대 후문 쪽에서 연 카페 ‘시몽(是夢)‘을1991년 인사동 네거리 골목 안쪽으로 옮겨왔다. 카페 소설엔 황석영 · 김화영 · 김주영, 윤후명 등 40대 후반의 연장자들도 즐겨 드나들었지만 나를 기준으로 볼 때 김정환·성석제·은희경·신수정 등 비교적 젊은 층들이 많이 찾아왔다. 화가로는 김정헌·성완경·최민화 등이 단골이었고 건축가 조건영·김영준, 영화인 홍상수·이창동, 문화부 기자로는 박해현(조선) · 신준봉(중앙) 등이 자주 드나들었다. 대체로 카페 소설이 평화만들기보다 좀 젊은 편이고 또 상대적으로모던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순전히 내 느낌상 평화만들기가 창작과비평』 같다면 카페 소설은 『문학과지성』 같은 분위기였다. - P294
이런 인사동 사람들의 진면목을 보여준 이는 고 여운 화백이다. 인사동에서 여운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여운이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그는 인사동에서 살았다. 그는 인사동에서 하루에도 서너 팀을 만나고 다녔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김사인 시인은 <인사동 밤안개: 여운 화백> 이라는 시를 바쳤다. - P296
키만 훌쩍 컸지./뒷 사연 쓸쓸한거야/인생 칠십의 빌어먹을 한다반사//바바리는 걸치고서/인걸들 하나둘 저물어가는/인사동 고샅을/밤마다 순찰 돌았네/그래도 혹시나 하고/수몰 앞둔 시골 면소/충직한 총무계장처럼.//한사코 집으로/안 가려 했네./탑골에 이모집에 있으려 했네./볼가에서 소담에서 버티려 했네./깰까 두려워/자꾸 마셨네. (...) 바바리는 걸치고서//돌아가는 새벽 뒷모습이/알 슬은 방아깨비 같았네./물그릇 엎고 꾸중들은 워리 같았네/식은 땀만흘렀네. - P297
조문호 사진집 『인사동 이야기에는 100여 명의 인사동 사람의 사진과 수십 명의 글이 실려 있어 인사동 전성시대 30년을 증언하고 있다. 그중 나의 체험적 인사동 답사기에서 언급하지 못한 인사동 사람들을조문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사동에는 미국에서 ‘서울로 서울로‘를 노래 부른 최정자 시인, 적음이란 법명을 가진 땡초시인 최영해, ‘실종‘ 소설로 실종된 소설가 구중관, 인사동에 재산 다 털어넣은 김명성 시인,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 소설 폐업한다며 ‘작가폐업‘ 술집 낸 배평모, 술값 내는 물주 사진기자 김종구,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화가 이청운, 별을 그리다 별이 된 화가강용대, 히말라야 산맥 기 받은 화가 강찬모, 노동자 시인 김신용, - P300
바람개비 작가로 알려진 설치미술가 김언경, 사마귀 그림으로 알려진 전강호, 막사발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도예가 김용문, 시와 도자가 하나인 신동여, 아직까지 대위로 불리는 공윤희, 홍대미대 나와 술장사하는 전철, 목련이 뚝뚝 떨어지는 노래로 애간장을 녹였던 임춘원 시인, ‘갈까보다‘ 판소리로 휘어잡은 ‘레테‘ 주인 이점숙 - P301
건축가 민현식은 『건축에게 시대를 묻다』(돌베개 2006) 라는 의의 저서에서 한국 현대건축에서 예민한 감성과 날카로운 지성과 건강한윤리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새로운 건축물 19채를 했다. 쌈지길을그중 하나로 꼽으며 글머리를 이렇게 시작했다.
통로, 이것은 인간에게는 숙명적이면서도 멈추게 할 도리가 없는시간의 경과를 건축적인 구조로서 공간화하려는 가장 위대하고 일관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 P304
민현식은 이 점에 입각하여, 최문규의 ‘쌈지길‘은 아름다운 공간을 디자인하지 않고 마당과 길을 만들었고, 나아가 길을 건축화했다기보다는건축을 길로 구축하고 있다고 평했다. 도로에 면한 건물의 길이는 50미터에 불과하지만 이 집이 품고 있는 500미터는 이곳을 채울 사람들을위한 장치일 뿐이라는 것에 건축적 특징과 자랑이 있다고 했다. 따라서이 건축은 여기서 만들어지는 사람들의 족적에 의해 그 가치가 드러나게 된다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쌈지길은 (공간의 건축이 아니라) 시간의 건축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건축이 나이 들어가면서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기억이 되고 이들 기억들이 쌓여 일상이 될 때 이 건축은 (...) 근사하게 자리 잡게 될것이라 기대해도 좋다. - P305
사라진 것은 아쉽고 그립기 마련이다. 이런 변화는 어차피 일어날 세대교체였다. 그러나 인사동은 여전히 나의 사랑이다. 나는 인사동의 저력을 믿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인사동은 지난 100년간 몇 차례 큰 자기변신을 이루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어쩔 수없는 세월의 흐름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 P306
인사동이 이렇게 다 망가졌다고 말할 정도로 변했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은 사람의 살내음이 느껴지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인사동길의 인간적 체취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인사동 공간 구조의대에서 나온다. 완만한 S자 곡선으로 휘어 있는 인사동길 700미터에실핏줄처럼 수없이 뻗어 있는 골목길은 그 자체가 휴먼 스케일이다. 인사동 큰길이 이처럼 가볍게 휘어 있는 것은 안국동천(安國洞川)이라는 개천을 복개했기 때문이다. 물길 따라 도로를 냈기 때문에 이처럼편안한 것이다. 만약에 이 길이 도시계획에 의한 일직선이었다면 이런인간미 넘치는 편안한 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인사동길은 끝과 끝이 드러나지 않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서히 다른 장면이 나타난다. 그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기에 인사동을 찾아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던 부산식당의 조성민, 선천집의 박영주, 귀천의 목순옥, 카페 소설의 염기정, 두레의 이숙희, 유목민의 전환철 같은 투철한 직업의식을 갖고 있는 분들이 보여준인사동 전통을 잊지 않고 이어간다면 인사동은 변함없이 인간적 체취가느껴지는 공간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 P307
북한산(北漢山)은 서울의 진산(鎭山)이다. 산맥의 흐름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해 한반도를 휘감아 내려오는 백두대간 중간지점의 금강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광주산맥)이 내려오다가 솟구쳐 오른 것이 북한산이고 그 여백이 문득 멈춘 것이 북악산이다. 그래서 서울의 주산(主山)은 북악산이고 조산(祖山)은 북한산이다. 북한산은 최고봉인 백운대(白雲臺)를 중심으로 북쪽에 인수봉峯), 남쪽에 만경대(景臺)가 있어 삼각산(三角山)이라고도 불려왔다. 최고봉의 높이 836.5미터, 면적은 약 30만평(77만 제곱킬로미터)으로 도봉산과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서울특별시 도봉구·강북구 서대문구 종로구 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 · 양주시 · 의정부시 지 - P311
역에 걸쳐 있다. 북한산은 지질학적으로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과 절리현상으로 형성된 많은 화강암 준봉들로 이뤄져 있다. 삼각산세 봉우리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상장봉(上將峯), 남쪽으로는 석가봉(釋迦峯)·보현봉(普賢峯) ·문수봉(峯) 등이 있고 문수봉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나한봉(羅漢)비봉(碑峰)의 줄기가 백운대 서쪽 줄기인 원효봉(元曉) 줄기와 만난다. 도봉산은 주봉인 자운봉(紫雲峰 740미터)에서 남쪽으로 만장봉峰)·선인봉(仙人峰)이 있고, 서쪽으로 오봉(五峰)이 있으며, 우이령(牛耳嶺)을 경계로 북한산과 접하고 있다. - P312
이를 오늘의 도선사로 일으킨 것은 청담(潭, 1902~71) 스님이었다. 스님이 15년간 주석하면서 도선사는 현대 불교의 조계종 명찰로 다시태어났다. 그래서 도선사에는 청담대종사의 석상, 승탑, 탑비가 장대하게 조성되어 있다. 1970년대 정서로는 웅장하게 세운 것인데 오늘의 정서에서 보면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인상을 주어 청담 스님의 품격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화계사는 수유리 북한산 초엽에 위치하여 오늘날 민가와 가까이 있게 되었지만 원래는 계곡가의 그윽한 절이었다. 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가 불교를 중흥하던 시절인 중종 17년(1522) 신월(月) 스님이 왕가의지원을 받아 인근에 있던 고려 때 사찰인 보덕암을 옮겨와 중창한 절이다. 이후 흥선대원군과 조대비의 시주를 받아 사찰의 규모가 커지고 상궁들의 왕래가 잦아 ‘궁(宮)절‘로 불리기도 했다. - P318
북한산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은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羅眞興王巡狩碑, 북한산 순수비, 국보 제3호)이다. 이 비가 있기에 북한산은 한반도에 있는 어느 산 못지않은 높은 역사성을 지니게 됐다. 이 진흥왕순수비가 지닌 역사적 의의는 고구려 광개토왕비에 버금가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기념비다. 이에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순수비 답사기는 진흥왕이 전국에 순수비·척경비·진휼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세월의 흐름 속에 잊힌 비석들이 다시 발견되는 과정의 시말기로 이 유적의 가치와 존엄성에 값하고자 한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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