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이 짙어지기 시작할 무렵 찰리 매콜리는 그녀가 오기를기다리며 창가에서 바깥을 지켜보고 있었다. 쓰레기가 나뒹구는아름답지 않은 모텔 주차장이라도 나머지 세상과 당장 전쟁을치를 만큼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듯ㅡ혹은 그럴 가치가 있다는듯 꺼멓게 검댕이 묻은 주차장 벽 위쪽으로 가시철망이 둘둘감겨 있었다. 찰리에게는 그 모습이 조금 전 그가 피오리아에서반시간 떨어진 이곳, 그들이 함께 찾아낸 이 타운을 걷다가 백화점 유리창을 통해 본 진열된 꿈들의 덧없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제설기나 아내에게 줄 멋진 양모 드레스를 살 수도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것은, 사람들은 모두음식물을 찾으려고 쓰레기더미로 달려가는 쥐 같다는 사실이었 - P127

다. 어떤 쥐는 무거운 것을 날라 깨진 벽돌 틈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곳을 몹시 불쾌하고 더러운 장소로 만들 것이며, 세상에 기여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배설물을 보태는것뿐이리라.
하지만 창문 왼쪽으로 보이는 단풍나무 꼭대기에는 나뭇가지들이 분홍색이 감도는 노란 잎 두 장을 미안한 듯 조심스럽게 내밀고 있었다. 그것들은 어떻게 11월까지 붙어 있었을까? 찬란한하루의 마지막 햇살이 나무 바로 뒤에서 비치고 있었다. 탁 트인하늘을 배경으로 저무는 해의 다채로운 색깔이 위를 향해 부채처럼 펼쳐졌다. 찰리는 이런 가을 햇살 속에서 메릴린과 함께 작은 언덕 비탈에 쭈그리고 앉아 크로커스 구근을 심던 것을 떠올리며왜 지금 그때 일이 기억난 걸까? 자신의 큰 손을 얼굴1옆에 갖다댔다. 그들이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 P128

메릴린의열의에 찬 모습이 기억났다. 몰두한 그녀의 눈이 커다랬다. 그는크로커스 구근 심는 법을 전혀 몰랐고, 그녀 역시 흥분해서 가쁜숨을 몰아쉬며 자기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날오후 시내에서 모종삽을 하나 사서 기숙사 뒤의 작은 언덕을 올라 대학 숲 옆으로, 가을 풀밭으로 갔다. "그래, 여기로 해." 메릴린이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열여덟 살에 첫사랑인 그와 함께 처음으로 꽃을 심는 일, 그는 그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 - P128

지 알수 있었다. 긴 모직 코트로 몸을 단단히 감싼 채 그 일에 열중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감동받았었다. 그들은 구멍을 파서구근을 심었다. "안녕, 잘 가, 행운을 빌어." 그녀가 어느 구근에게 말했다. 그날, 가을 흙냄새가 모종삽을 든 채 무릎을 꿇고 있는 그를 가득 채울 때, 그의 마음에는 왈칵 사랑과 보호심이 일었고, 지금은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그것ㅡ그녀의 중심에자리한 순전한 어리석음, 쓸모없고 메스꺼운 다정함이 그를조용히 전율케 했었다. 넋을 잃고 그 일에 몰두해 있던 사랑스러운 메릴린, 그녀의 얼굴은 일을 끝냈다는 기쁨으로 빨갛게 달아올랐었다. "얘들이 싹을 틔울까?"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애처로운 사람, 늘 걱정만 한다. 그는 그럴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몇 개가 싹을 틔웠다. 하지만 그는 그 부분 또한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지금 이 순간까지 오래도록 잊고 있던 그것, 그들이 그저 어린아이였던 그 가을의 어느 순수했던 하루만 기억해낼 수 있을 뿐이었다. - P129

그는 침묵과 함께 방안에 홀로 남아. 앞서 중단된 그것, 지금그에게 다시 돌아온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거대한고요였다. 오래전 그는 그것에 자기만의 이름을 붙였다. 엄지 치기 이론 어린 시절 어느 여름에 할아버지 집 지붕 위에서 망치로타일을 세게 내려치다 알아낸 사실이었다. 실수로 엄지를 내려쳤을 때, 이것 봐, 그렇게 세게 쳤는데도 많이 아프진 않은데……하고 생각되는 찰나의 순간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어-어리둥절한 채 다행이라고 느끼며 안도하는 착각의 순간이 지난 뒤―살을 짓이기는 진짜 아픔이 몰려왔다. 전쟁에서도 이런 일이 수시로, 여러 형태로 일어났기에 그는 이따금 자신이 아주 똑똑하다고-그의 이론은 그만큼 잘 들어맞았다 생각하곤 했다. 전쟁에서 그는 많은 것을 배웠지만 메릴린이 지금 그가 참석중이라고 알고 있는 모임 시간에 그런 것을 언급하는 심리학자는 이제껏 한 명도 없었다. - P137

인격이 제단이고 그 앞에서 모든 품위가 절을 해야 할 것처럼여겨지던, 인격이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여겨지던 그 시절이 먼옛날 고대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과학에 의해 유전이 결정적인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 인격에 관련된 모든 것이 폭포로 내던져졌다. 불안은 본래부터 장착되어 있거나 혹은 트라우마 사건 이후 장착되고, 사람은 강하거나 약한 것이 아니라 그저특정한 방식으로 만들어질 뿐이라는 사실. 그랬다, 그에게는 인격이 빠져 있었다! 인격의 고상함. 그래, 그것은 종교의 밑바탕과 원시적인 측면에 맞닥뜨리면 종교를 버릴 수밖에 없게 되는것과 같았다. 가톨릭교회가 소아성애와 끝없는 은폐와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한패가 된 교황들의 온상이라는 사실을 목도하는 것과 같았다. - P149

그것은 고통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더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그는 다른 남자들에게서 그것을 보았다-눈 뒤의텅빈 공백, 그리고 그런 이들을 정의하는결핍.
그래서 찰리는 몸을 아주 조금 더 일으켜 앉았고, 텔레비전을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의 안에는 지금 크로커스 구근 같은 희망이 있었다. 그는 기다렸고, 그는 희망했고,
그는 정말로 기도했다. 오, 다정하신 예수님, 그것이 오게 해주십시오. 사랑이신 하느님, 제발 그래주실 수 있습니까? 제발 그것이 오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 P158

그는 영어를 할 줄 알았고, 그녀는 그의 나이에 대해 정말로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이십 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지만 그 기간이 오십 년처럼 느껴졌고, 당시에는 혼자였다. 그들은 둘 다 갈증을 느끼는 상태였다.
하지만 메리는 남편을, 그러니까 전남편을 떠올렸고, 요즘은더욱 자주 생각했다. 그가 걱정이 되었다. 누군가와 오십 년을살았다면 그 사람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이 그를그리워한다는 사실에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앤젤리나는 아직자신의 결혼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고, 메리는 정말로 염려하는 마음으로 앤젤리나가 그 이야기를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앤젤리나의 남편은 선량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누가 알겠는가. - P183

이 아이 - 어른이 그녀의 딸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자신은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것에 거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이 아이-지금껏사랑했던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ㅡ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삶이 그녀를 마모시키고 마멸시켜 그녀는 거의 죽을 준비가 되었으며, 아마 지금으로부터그리 멀지 않은 때에 죽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몇 년이라도 더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고, 메리는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혹은 정말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그랬다. 그녀는 지칠 대로 지친 느낌이었고 거의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지만, 이 아이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그녀 자신도 그 생각에 공포를 느꼈다.  - P198

비틀거리며 길을 건너고 있었다. 술 때문은 아닌 것 같았고 노환때문인 것 같았다. 어머니가 노인에게 얼마나 빠르게 다가가는지 앤젤리나는 깜짝 놀랐다. 앤젤리나는 가로등 불빛에 비친 노인의 얼굴을 보았는데, 단순히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웃는 방식뿐만이 아니라 그 표정에서 묻어나는 인간적인 느낌, 따스하고깊은 감사의 표시에 앤젤리나의 마음이 움직였다. 어머니가 그를 부축해 길을 건널 때 가로등 불빛에 잠시 어머니의 얼굴도 보였다. 어쩌면 빛의 각도 때문이었겠지만 어머니가 노인의 손을 잡을 때, 그리고 노인을 부축해 길을 건널 때 - 앤젤리나는 어머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길을 다 건넌 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고, 이어 어머니가보도를 걸어가는 노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 P204

이제 앤젤리나는 창문을 통해 바다를 응시했다. 바깥은 어두웠고 배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어머니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녀는, 앤젤리나는어머니가 불안정하게 길을 건너는 노인을 부축할 때 자신이 중요한 뭔가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잠시 천장이 훌쩍 높아졌다 하지만 그 순간은 말 그대로 잠시일 뿐이고, 자신은 영원히 아이일 거라는 사실을 앤젤리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길을 건너던 노인에게 재빨리 다가가 자애롭고 사랑스러운 모습을보여주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탈리아 어느 해안 마을의 길 위에서 본 개척자인 어머니의 모습을. - P206

피트 바턴은 동생 루시가 시카고로 북투어를 온다는 사실을알고 있었다. 그는 온라인에서 그녀의 활동을 챙겨보았다. 집에와이파이를 설치한 것은 겨우 몇 달 전이었고, 후에 자신이 쓸작은 노트북도 구입했다. 그가 가장 관심 있게 살펴본 것은 루시의 향후 계획이었다. 그는 루시가 지금의 그녀가 된 것에 경이를느꼈다. 그녀는 이 작은 집을, 이 작은 타운을, 그들이 견뎌낸 그가난을 뒤로하고 떠났다. 그 전부를 두고 뉴욕으로 가버렸고, 이제 그가 보기에 그녀는 유명했다. 그는 청중으로 가득찬 강당에서 그녀가 강연하는 모습을 컴퓨터로 지켜보며 조용한 전율을느꼈다. 그의 동생…… 그가 루시를 본 지도 십칠 년이 지났다.  - P207

"그 남자가 거기 주인이면 팁을 안 줘도 돼. 주인이 아니면 줘야 하고." 루시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걱정하지 마. 다시 가면 팁으로 몇 달러줘. 이제 걱정하지 마."
그는 그런 점 때문에 루시를 사랑했다. 그녀는 세상살이를 알았고, 그를 알았다. 그녀는 그가 그런 질문을 해도 당황스러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 그는 정말로 행복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진입로로 차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이유였을 것이다. 크게 문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는데, 그와 루시 둘 다 소스라치게놀랐다. 그는 그녀의 두려움을 보았다. 루시는 얼굴이 굳어지며똑바른 자세로 앉았다. 피트도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몸을 숙여 블라인드를 최대한 살짝아주아주 조심스럽게 들쳤다. "오." 그가 말했다. "오, 비키가왔어." - P220

"너도 대단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 난 루시가 그런 뜻으로 말한 거라고 생각해." 피트가 바닥에 나뒹구는 캔들을피해 발을 옮겼다.
그들은 침묵 속에 한참을 더 달렸다. 피트는 곁눈으로 동생을보았다. 그는 그녀가 운전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체격 좋은 몸이 좋았고, 차 안에 듬직하게 앉아 당당하게 운전하는모습이 좋았다. 그는 그녀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대단하다는 말 이상을 해주고 싶었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비키, 지금보면 우리가 그렇게 나쁘게 된 건 아니야, 너도 알겠지만."
그녀가 그를 흘끗 보고 눈을 흘겼다. "그래, 맞아."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뭐, 우리가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진 않지. 그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그녀가 내면 깊숙한곳에서 올라온 듯한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피트는 영원히 이렇게 달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이렇게 달리고 또 달리는 동안 그는 거기 동생 옆에 앉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246

특히 그들 가까이 걸려 있는도서관 사진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사진은 1940년의 도서관을 찍은 것으로, 벽돌 건물에 담쟁이덩굴이 자란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는데, 덕분에 도티는 대번에 그 여자-그리고 그녀의 남편!-에 대해 감을 잡았다. 당연히 도티는 이 업종에 종사하면서 사람들에 대해 대번에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따금 완전히 헛짚을 때도 있었지만 스몰 부부에 대해서는 틀리지않았다. 닥터 스몰은 여행가방을 올려두는 선반이 없다며 즉시방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고, 도티는 그것이 아내를 시켜 가장 값싼방을 예약할 때 생기는 일이라고는 당연히 말하지 않았다.  - P251

이런 비즈니스를 하다보면 이런저런 사실이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이런 비즈니스에서는 눈을 꾹감고있어도 눈에 띄는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도티가 생각하기로 닥터 스몰의 시대, 그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와 전문적인 이력의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그는 그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일 터였다. 그가 전산화된 기록과 병원 운영비와 자신이 더이상 예전만큼 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불평을 해댔을 거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뭐, 그렇다고 그녀가 그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 P253

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녀를 놀라게 했다.
스몰 씨와 스몰 부인 같은 부부를 보면 도티는 이따금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오래전에 겪었던 자신의 이혼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그 덕에 적어도 스몰 부인즉 불안해하고 약간 징징거리며 남편에게 무시당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더욱 안절부절못하는 여자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것은 늘 보였다. 그리고 도티는 그런 것을 볼 때마다 거의늘-이상하게도 그녀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남편이없는 자신이 더 강한 사람인 것 같다고 새삼 생각했다. 비록날마다 그를 그리워하긴 했지만. - P253

오전 중반에 그들 부부는 함께 집을 나섰다. 그들이 집에서 나갔고, 그것은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나가는 것. 도티는 사람들이 여기로 오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는 것을 늘 되새겼다. 아니면-스몰 부부의 경우처럼-자신들의 비즈니스 세계에 속해 있기 위해서. 더 빈번하게는 대학에 다니는 자식들을 보기 위해서. 어떤 연유에서건 그들은 일리노이주 제니스버그라는 작은 도시의 뭔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이 거리로 나설 때는 목적이 있었다. 큰 오크나무 문이 닫히면서 그 목적이 강조되는 것, 앞포치로 나가는 순간 그들 - P255

의 목소리가 작게 들리는 것, 속삭임을 동반하는 그런 불가피한버려짐의 순간음, 그것도 비즈니스의 일부였다. - P256

그녀는 요즘 이 나라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부분이 이 문화차이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계급이 포함된 문화. 하지만 물론 이나라의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도티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계급이 무엇인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도티와 그녀의 오빠가 어렸을 때 대형 쓰레기통에서 음식물을 꺼내 먹은 것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 P273

스몰 부부가 와서 묵기 전까지 도티가 깨닫지 못하고 있던 것은, 이 비즈니스에서 그녀가 접하게 되는 다양한 경험들 중에는사람들과 연결된다고 느껴지는 경험도 있고 사람들에게 이용당한다고 느껴지는 경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어느 밤 저녁식사 시간 무렵 어떤 매력적인 남자-나이가 그녀와 엇비슷하지만 약간 어린 듯했다가 민박집으로 들어와 방을 빌렸고,
그러더니 텔레비전을 보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와 같이 앉아 영국 코미디 한 편을 보았는데-오, 도티는그것이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그 남자가 웃지 않아서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어느 순간 그가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P276

그리고 그는 그렇게 떠났다. 사람들은 늘 떠났다.
그녀는 어린아이가 특별한 날을 추억하기 위해 입장권 반쪽을기념품처럼 간직하듯 그의 숙박 기록을 간직했다. 그 모든 것이봄날에 졸졸 흘러가는 개울처럼 숨김이 없었다. 그녀는 결코 그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지 않았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찰리 매콜리였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지닌 찰리 매콜리. - P279

그녀가 느낀 창피함이 이 세상에서일어나고 있는 다른 일들을 고려하면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굶어죽는 사람들, 아무 이유 없이 폭발로 숨지는 사람들, 자신들의정부에 의해 독가스로 살해되는 사람들, 이들 중 누구와 비교해봐도 그랬다. 이런 이야기는 셸리 스몰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도티는 그녀의 작은-그렇다. 스몰 small 한-인간적 슬픔의순간들에 연민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셸리는 도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정도의 품위도 갖추지 못했다. 도티는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과연 누가 이런 걸 좋아하겠는가! - P281

그들이 예전에 살던 집은 흙길 위에 있었다. 그들은 그 길 끝에, 4번 도로에서 1마일쯤 떨어진 곳에 살았다. 그곳은 북쪽, 감자의 고장에 있었고, 애플비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겨울에 얼음이 얼고 눈이 잔뜩 쌓여 사람이 지나다닐 수 없을 만큼 길이좁아 보이는 시기도 있었다. 그 시절에 날씨는 지금과는 다르게피할 수 없는 식구처럼 받아들여졌다. 날씨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엘긴 애플비가 튼튼한 제설기를 그의 가장 튼튼한 트랙터에 매달면 대체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줄 만큼은 눈을 치울수 있었다. 엘긴은 농장이 있는 고장에서 자랐기에 날씨에 대해,감자에 대해 잘 알았고, 그 고장에서 누가 자루에 돌을 숨겨 무게를 속여 파는지도 알았다.  - P287

하지만 결국 햇볕 좋은 날에는 숲과 멀리 떨어져 지낼 수 없었다. 햇살이 아른거리는물리적 세상이 그녀의 첫 친구였고, 세상은 아름다운 자태로 두팔을 활짝 벌린 채 다른 무엇도 그녀의 마음에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설렘을 받아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생활 패턴, 즉 그들이 언제 어디 있는지를 파악한 뒤 타운 근처의 숲이나 학교 뒤에 있는 숲으로 몰래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노래를 부드럽고 풍부한 목소리로불렀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건 정말로 기쁜 일, 내가 살아 있다는건 정말로 아주 기쁜 일......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 - P298

"맞아." 아까 언니가 그게 사실이었다면 그들이 진작 알았을거라고 소리쳤을 때, 애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 애니가 말하지 않은 것은 뭔가를 알지 못하는 방법도 아주 많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녀가 지난 세월 겪어온 경험이 각기 다른 색깔-어떤색깔은 어두웠다-의 털실을 섞어 짠 뜨개질감처럼 펼쳐졌다.
이제 삼십대가 된 애니는 남자들을 사랑했고, 실연에 종종 가슴아파했다. 배반과 기만의 기류는 어디에나 있는 듯했다. 그리고그녀는 그것이 취하는 형태에 번번이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들 또한 그들 자신의 문제로 좌절했으며, 서로밤낮으로 위로하고 위로받았다. 애니는 연극의 세계가 컬트같다고 생각했다. 연극은 그것에 속한 개인에게는 상처를 주더라도 스스로는 철저히 보호한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에 이른바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었다.  - P306

아버지가 늘 앉아 있던 흔들의자, 지금은 속이 보일정도로 닳고 닳은 방석, 오랜 세월장작난로 위에 변함없이 놓여있는 찻주전자, 창문 위에 드리워진 커튼, 그리고 커튼과 유리창사이의 가는 거미줄, 애니는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가엾은 샬린처럼 매일매일 두려움을 느끼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늘 거기 있었다. 그들은 수치심을 먹고 자랐다.
그것이 그들의 토양을 만든 자양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그녀가 가장 잘 이해할 것 같은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리고 잠시애니는 놀라움을 느꼈다. 착하고 책임감 있고 품위 있고 바른 마음을 가진 오빠와 언니는 그저 그 시간 동안에는 지구를 뒤로하고 떠나온 듯 눈부시게 하얀 태양 가까이에 있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걸게 되는 열정을,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는모든 것을 무모한 위험에 빠뜨리게 되는 그런 열정을 한 번도 알았던 적이 없었으리라는 사실에 대해. - P310

지난해 루시 바턴이 북투어차 시카고에 왔을 때의 모습이 보였다. 루시 바턴, 어머니 사촌의 딸, 오, 그 불쌍한 아이.
그런데 그녀가 나이든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는 서점 안으로 들어가 책에 서명을 받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녀가에이블, 하고 말하면서 일어섰고, 눈물을 글썽였다. 잠에 빠져든다고 느끼는 순간에는 그 모든 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는데, 어느새 그는 버튼을 눌러도 서지 않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어머니를 찾고 있었고, 이어 좁은 복도에서 어머니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중에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감지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사라졌다. 깊은 꿈속이었지만 그는 패닉 상태와는전혀 다른, 채울 수 없는 오래된 갈망을 다시 느꼈다. 그는 관객석에서 숨소리가 터져나올 때 잠에서 깼다. - P319

에이블에게 좀더 기력이 있었다면 이 낯설고 고뇌하는 남자에게 자신은 오래전 록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록퍼드에서 어느 극장 안내원으로 일했고, 오늘밤 옆문으로 들어오면서 바로 그때의 냄새를, 극장의 그 은밀한 냄새를 맡았다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중에 그 일자리를 구했다. 열여섯살 때였다. 바로 그해에 6학년이던 어린 동생이 반 친구들 앞에불려나가 옷에 묻은 얼룩을 지적받으며 생리대를 살 돈도 없을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도티는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고, 에이블은 동생에게 뭔가를 약속했지만 그게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 P334

그것은 지독히 현실적인 문제라고, 그는 세월이한참 지난 뒤 아내에게 말했다. 이어 그녀의 공포가 제대로 숨겨지지 않은 채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창피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깨달음은 아주 즉각적으로, 심지어 그녀가 말하는 도중에 찾아왔다. 음, 그렇다면 당신은 한 번도 배고파본 적이 없었던 거군, 일레인. 그가 실제로 그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가 그에게 그런 질문을 했을 때 그는 창피함을 느꼈다. 그때 그는 분명 창피함을 느꼈다. 자식들에게는 아버지가 쓰레기통을 뒤져서 찾은 음식을 먹을 만큼 가난했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고, 그녀는 그에게 요구했다. - P336

그가 놀란 것은 죽음, 한 사람이 싹 지워지는 것, 그 남자가그렇게 간단히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서 느껴지는 어리둥절함과 관련이 있었다. 사라지는 것의 단순함은 에이블에게 익숙한것이었다. 그는 젊은 사람이 아닐뿐더러, 아버지가 사라진 것부터 시작하여 타인들의 죽음을 봐왔다. 하지만 그때 놀라움에 뒤따른 감정은 활활 타오르는 수치심이었다. 마치 지난 세월 키스에게 자신의 옷을 만들게 한 것이 뭔가 불미스러운 행동이었던것처럼. 그는 자신의 차에 탔을 때나 혼자 사무실에 있을 때, 혹은 아침에 옷을 입으면서 이 말을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오, 정말 미안해요." - P342

곧 구급차가 속도를 높이자 에이블은 공포가 아닌 묘하고 강렬한 기쁨을 느꼈다. 온갖 문제들이 그 껍질이벗겨진 채로, 혹은 지금도 계속 벗겨지면서 돌이킬 수 없이 그의통제를 벗어나는 데서 오는 지극한 행복감을 하지만 그의 손이닿을 수 없는 곳에서 불빛이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 거기 크리스마스 창문이 있는 것처럼, 다른 무언가가 기다란 흔적을 그리고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며 어리둥절해지기도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는데, 고단한 황홀경 상태에서 그것은 거의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링크 매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좋은 사람이에요." 에이블은 가슴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것 같았음에도 그 말을 들으니 미소가 지어졌다.  - P346

그래서 그는 어쩌면 그 미소가 그들에게는 고통에 찬 찡그림으로 보였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는 지금그들을 남겨둔 채 초록빛 콩밭을 지나며 아주 가볍게 훌훌―그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 날아가고 있었다. 그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더없이 아름다운 사실을 가슴속에 지닌 채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스노볼을 사랑하는 어여쁜소피아처럼 에이블에게도 친구가 생겼다고. 하지만 말할 필요가없었다. 그리고 그런 선물이 그런 시간에 그를 찾아올 수 있다면무엇이든………… 록퍼드에서 회의에 참석하려고 옷을 잘 차려입고온 그 사랑스러운 여자의 모습이 록강 위로 급물살처럼 흘러갔다…… 그가 눈을 떴고, 그래, 바로 거기 있었다. 온전한 깨달음이,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가능하다. - P347

잔잔하면서도 마음을 찌르고 들어오는 문장의 힘 앞에는 늘숙연해지고, 세상에서 떠받들듯 떠들어대는 긍정 이면에 존재하는 여리고 다치기 쉬운 인간의 마음을 더 다칠까 두 손으로 감싸 조심스럽게 내어놓는 하지만 그것을 데려가 보듬는 역할은독자에게 맡기는 그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에는 늘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들이 펼쳐지는 무대 앞에서 등장인물들의 들고 남을 바라볼 때는, 그 동선이나 움직임이나 말보다는 인물들의 마음의 결 마음의 행로, 마음의 흔적을더욱 뒤쫓게 된다. - P352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더욱 그렇다. 일리노이주 앰개시를 배경으로 하는 총 아홉 편의 이야기, 그 속에는 익숙하지만 낯선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있지 않지만, 나는 그들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것을 지켜본다. 그러다 어쩌다 그들의 시선이 흘끗 나를 향하는 그 한 번의 순간, 그 하나의 문장에서 나는 그들이 지닌 아픔과 그 견딤을 이해한다. 아마도 조금, 토미가 어린 루시를, 도티가 찰리 매콜리를 직감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비슷할까. 그리고 그들의 아픔과 견딤 이면에 존재하는 폭력과 수치심을 바라본다. - P352

먼저 폭력에 대해 생각해본다. 루시의 팔이나 목에 들어 있던멍처럼 물리적인 것인지, 아니면 심장에 생채기를 내는 언어적인 것인지. 전쟁처럼 큰 규모인지, 아니면 아주 작은 대화 중 오간 한마디인지.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도록 강요하는 더 악질적인 폭력인지 등. 그 형태는 여러 가지일지라도 모든 폭력은 결과적으로 인간 대 인간의 문제, 개개인의 문제가 되고 만다. 시대가 강요한 폭력이라 할지라도 폭력 이후의 감정을 질기게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것은 결국 개개인이다. - P253

또한 우리 모두 폭력의 피해자가, 혹은 가해자가 되는 것에서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생각 없이 던진 말 한마디의 날선 칼,
억제할 수 없었던 공격적인 감정의 분출, 아닌 줄 알면서도 외부의 힘에 굴복하여 하게 되는 잔인한 행위. 나는 그러지 않겠다는, 혹은 그 희생자가 되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이 무색해지는 순간들은 늘 존재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을 누구보다아프게 아는 도티마저 셸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한 ‘페니스‘ 이야기에 웃음이 터지려고 하지 않았는가 - P354

결국 누가 어떤 힘을 더 많이 가졌는지에 따라 계급이 나뉘는것일 텐데, 계급을 없애는 것이 인간사회에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계급에 내재된 힘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는 충분히 민감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부, 지식, 성의 차이가 만들어낸 힘의 강압적인 행사, 그 행위가 일어나는 순간이 우리가 가해자나피해자가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의 어느 시기에 그런 계급과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하나는 단연코 수치심일 것이다. 작가는 남을 무시하거나 아래로보면서 느끼는 우월감과 그 우월감의 대상이 되었을 때 느끼는수치심을 여러 상황과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인식의 순간은 주인공들의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다가온다. 우리가 충분히 민감하게 깨어 있지 않다면, 즉 현상을 사유하는 데서 오는 정신적 피로와 민감한 태도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이를 불가피한 당위로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계급과 폭력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 P355

폭력의 희생자들. 폭력의 질긴 시간성. 그것을 고통스럽게 견뎌낸, 그러나 아직 고통스러워하는 이들. 같이 쓰레기통을 뒤졌던 루시 바턴과 에이블 블레인은 이른바 사회적 계급이 올라갔지만 여전히 그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루시바턴은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에이블은 돈 많은 사업가가 되었다. 하지만누구보다 깊은 통찰력을 가진 듯한 루시도 어린 시절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아마도 큰 용기를 내어 그 공간으로 되돌아가지만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심리 상태에 빠져 언니 비키에게 "아니,
내가 돌아온 게 잘못이었어, 내가 떠난 게 잘못이었어, 전부 내잘못이야"라는 말만 반복한다. 에이블은 누구에게든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일상이 되어 "자신의 차에 탔을 때나 혼자 사무실에 있을 때, 혹은 아침에 옷을 입으면서도 미안하다고자꾸만 중얼거리는 사람이 되었다. - P352

이들의 마음을 좀더 들여다본다. 큰 아픔을 가지고 있으나 미안해할 줄 아는 사람들. 이제 그만 좀 미안해해, 그렇게까지 미안해할 것 없어, 미안해야 하는 건 고통에서 벗어난 사람이 아니라 우월감을 느끼려고 남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이지. 이제 좀 떨쳐내. 나는 속으로 외친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미안한 마음이 꼭 떨쳐내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 P356

그 미안한 마음은 이들을 힘들게 하면서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소중한 마음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초반에 이미 토미가 말했다. 그리고 자책한다는 것, 음, 자책하는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한 일에 대해미안해할 수 있다는 것그것이 우리를 계속 인간이게 해주지."
가해에 대해 자책할 수 있는 마음, 혼자 고통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미안해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를 계속 인간이게 해준다.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것이라면, 그리고 죄책감이나 미안함에 괴로워 미쳐버릴 만큼이 아니라면, 그것을 얼마간은 품은 채 뚜벅뚜벅 삶의 걸음을 옮기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자책과 미안함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연민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 P357

무엇이든 가능하다』의 아홉 편의 이야기. 몇 번을 다시 읽는동안에도 이 소설이 마치 폭력을 고발하고 있는 것처럼, 내 생각은 그 부분들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희망을 잘 보지 못했다. 하지만 옮긴이의 글을 쓰면서 또 한번 읽는 동안 각 이야기들의 마지막 부분에 홀린 듯 관심이 쏠렸고, 그러면서 이 소설『무엇이든 가능하다가 놀라울 만큼 따뜻하고 희망적인 회복을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폭력에 의한 아픔과 연민 사이를 섬세히 오가며 그려낸 이 소설 - P357

은 사랑과 희망을 품은 놀라울 만큼 회복적인 이야기였다. 사랑한다는 말만큼은 진심인 토미, 햇볕 속에 앉아 찰리의 팔을 잠시잡았다가 놓는 패티, 캐런-루시의 손을 잡고 뺨을 어루만지고싶어진 린다. 그리고 "그런 순간"에 친구가 생긴 에이블 블레인의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깨달음까지. 그 순간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벅차오른다. 처음에는 그저 담담한 진술이라고,
혹은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뒤집은, 사실상 동일한 의미일 거라고 짐작했었던 ‘무엇이든 가능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무엇‘의 자리에 희망과 회복을 넣고 싶다. 무엇이든 가능하니까. 그리고 찰리 매콜리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고통 또한 희망이 될 수있음을 깨닫는다. "크로커스 구근 같은 희망"이라도, - P358

「무엇이든 가능하다가 남긴 여운 역시 평생 이어질 것 같다.
살아 있는 한 우리의 이런 일상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자신도 어느 순간 인식하지 못한 채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고, 내 안에 연민이 있음을 내가 알기 때문이고, 그 연민은 타인을, 때로는 나 자신을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티에게연민은 혼란스러운 것이었지만, 도티 자신은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했지만, 그럼에도 도티 안에는 연민이 있었다. 도티의 말처럼 분명 혼란스러운 것임에도, 계급의 위아래 없이 수평 - P358

의 높이에서라면, 연민이란 어쩌면 이 각박하고 폭력적인 세상을 치유하는 아주 중요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간을 성장시키고 회복시키는 것은 평가나 판단이아니라 연민이라고 연민이 우리 인간을 구원한다고 연민은 인류에 대한 희망이자 사랑이라고.


정연희 - P359

"그래, 바로 거기 있었다. 온전한 깨달음이.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가능하다."


살아간다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영원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알아나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은 그러나 그런 공허한 단정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이 그런 불완전함 속에서도 존재한다고, 더 나아가우리의 불완전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더 귀하고애처로울 만큼 소중한 것이라고 상처받은 마음으로도, 더는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고. 책장을 덮고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는 제목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그 안에서 상처를 아는 사람의 삶을 향한 작은 희망을 발견했다. 최은영(소설가)


상처받더라도 황홀한 무대 위의 순간과, 지극히 평온한 일상의 정원을 오가는 보통 사람들의 드라마.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세계는 우리 모두가 겪어본 흔들리는 우주에 불과할진대 왜 이다지도 강렬한 서스펜스를 남기는 것일까. 다시 한번.
소설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이야기. 어둡고 칙칙한 색깔의 털실이직조한 환하고 강한 스웨터, 올이 풀리지 않는 단단한 이야기. 박민정(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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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거프틸은 한때 낙농장을 소유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 낙농장은 일리노이주 앰개시 타운에서 2마일쯤 떨어져 있었다. 그 일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토미는 낙농장이 홀랑 불타버린 그날 밤 느꼈던 두려움에 휩싸인 채 한밤중에잠을 깨곤 했다. 집도 깡그리 불탔다. 바람이 헛간에서 멀지 않은 그의 집으로 불똥을 날려보냈다. 그것은 그의 실수였다-1는 늘 자신의 실수였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가 착유기 전원이꺼졌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고, 화재가 시작된 곳이 바로 거기였기 때문이다. 불길은 일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번져 그곳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들은 거실에 있던 황동거울틀만 빼고 모든것을 잃었는데, 그는 다음날 잿더미 속에서 그것을 찾아냈고, 발 - P9

견한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구호품을 보내주었다. 그가 정신을 수습하고, 자신이 가진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모을 때까지 그의 아이들은 꽤 오랫동안 반 친구들의 옷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그는 그 땅을 이웃 농부에게 팔았지만 큰돈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와 그의 아내인 키 작고 예쁜 셜리는 옷을 새로 샀고, 그는 집도 샀다. 셜리는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기운을 잃지 않고 감탄스러울 정도로 잘 버텨냈다. 그들은 쇠락한 타운인 앰개시에 집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농장이 칼라일과 앰개시 두 타운을 나누는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이전에는 칼라일에 있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앰개시 소재의 학교에 다녀야 했다.  - P10

거대한 불길이 밤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이어 소들이 죽어가며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을 들으면서 그는 느낀 것이 있었다. 여러 가지를 느꼈으나, 하느님의 현존이라고밖에 생각할 수없는 그것을 명백하게 느낀 것은 집의 지붕이 폭삭 주저앉아 바로 아래쪽, 아이들 사진과 그의 부모 사진이 있는 침실과 거실로 무너져내릴 때, 그 일이 벌어지는 것을 지켜볼 때였다. 그 순간 그는 천사들이 왜 늘 날개 달린 모습으로 그려지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의, 심지어 소리도 아닌 것의감각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하느님이, 얼굴은 없으나 하느님인 그분이 그에게 몸을 밀착시키고 무언으로 아주 간단하게, 그리고 아주 순식간에 괜찮다, 토미, 라고 그가 알아들은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곧 토미는 괜찮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후로도 줄곧 괜찮았다.  - P13

그럼에도 오늘 같은 봄날 아침에 흙내음을 맡으면 소들의 냄새가, 그것들의 축축한 콧구멍이, 그것들의 따뜻한 배가 그리고 그의 헛간-두 개였다-이 생각났고, 그러면 그는 마음이 자신을 찾아오는 장면 장면들로 자연스럽게 흘러다니도록 내버려두었다. 어쩌면 방금 바턴 씨네 집 쪽을 지났기 때문에 그 가난하고 슬픈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이따금 토미의 농장에서 일했던그 남자 켄 바턴이 그리고 대학에 가면서 집을 떠나 결국 뉴욕시티에 정착한 루시 그는 그 아이를 더 자주 생각했다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녀는 작가가 되었다.
루시 바턴. - P14

한번은 그들이 타운 여자들한 무리를 데리고 수용소를 돌아다니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었는데, 형 말로는 어떤 여자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어떤 여자들은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듯 턱에 힘을 주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고 했다. 그 이미지가늘 토미의 마음에 남아 있긴 했지만, 왜 하필 지금 떠올랐는지그는 궁금했다. 그는 차창을 끝까지 내렸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그는 이미 나이가 들었다 자신이 선과 악의 이 혼란스러운 다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어쩌면 인간은 애초에 이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 잘 알게 되었다. - P22

토미는 운전하면서 문득 루시가 중학생일 때 앉곤 하던 책상 근처에 자신이 1쿼터를 놓아두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애는 늘 헤일리 선생의교실을 이용했다. 그 선생은 일 년 동안 사회를 가르치다가 군에 입대했는데 아마 루시에게 잘해주었는지, 나중에 그 교실이과학실이 된 뒤에도 루시는 그곳을 자주 이용했다. 그래서 토미는 어느 날 루시가 즐겨 앉는 책상 근처에 1쿼터를 놓아두었다.
학교에 자동판매기가 막 들어온 시점이었고 1쿼터면 아이스크림 샌드위치를 사 먹을 수 있어서, 루시가 볼 수 있는 자리에 1쿼터를 놓아둔 것이었다. 그날 밤 루시가 집으로 돌아간 뒤 토미가교실로 가보니 1쿼터가 놓아둔 그 자리에 정확히 그대로 있었다. - P35

잠시 뒤 토미는 백미러를 흘끗 쳐다보았고, 피트 바턴이 간판을 망치로 때려부수는 장면을 보았다. 그것을 때려부수는 방식에 담긴 무언가ㅡ힘ㅡ때문에 토미는 운전하면서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가 지켜보니 그 아이ㅡ그 어른ㅡ는 간판을 내려치고 또 내려칠 때마다 점점 더 강한 힘을 싣는 것 같았다. 차가 살짝 내리막길을 지나며 그 모습이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을때, 토미는 이렇게 생각했다. 가만있어봐. 그리고 차가 다시 오르막을 오를 때 백미러를 보니, 거기 분노에 차 맹렬하게 간판을때려부수는 그 아이ㅡ어른이ㅡ다시 보였다. 그 남자가 간판을 두들기며 표출하는 분노가 토미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웠다. 토미는 자신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불온하게 느껴졌는데, 그 행동에서 엿보이는 걱정이 그 아이의 아버지가 그날 헛간 뒤에서 하고 있던 행동만큼이나 은밀한 느낌을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토미는 차를 몰면서 깨달았다. 오ㅡ문제는 어머니였어. 어머니가 문제였어. 그녀가 정말로 위험한인물이었던 거야. - P36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토미는 타이어 바람이 빠져버린 듯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지금까지―평생―지탱해오던 내부의 공기가 이제 완전히 빠져나간 것처럼. 그는 운전을 하면서 공포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던 것을 말해버린 것이다화재가 일어난 그날 밤 하느님이 그를 찾아왔다는 것을. 왜말했을까? 어머니의 간판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때려부수던 불쌍한 아이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 아이에게 그것을 말했다는 사실이 왜 문제가 되는가? 토미는 확실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토미는 자신에게 끼워져 있던 플러그를 쓰로 뽑아버린 기분이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한 그것을 말함으로써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스스로를 작은 사람으로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그에게 정말로 공포를 일으킨 것은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걸 믿으세요? 피트 바턴은 그렇게 말했다.
토미는 더이상 자신이 자신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 P43

패티는 마치 자신의 머리가 잘려나가 몸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로이상한 느낌이었지만, 그 느낌은 계속되었다. 그녀와 언니들은아버지가 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욕설을 내뱉고 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예전에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울지도 않았고 욕설을 내뱉지도 않았고 돌처럼무표정한 얼굴을 하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이 되었고, 가정-그전에는 그들 모두 호수 위의 보트 안에서 천진난만하게 앉아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은 사라져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뭔가로 변해버렸다. 타운 사람들의 쑥덕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 P73

루시 바턴의 회고록에서 루시는 사람들은 늘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게 느낄 방법을 찾는다고 썼는데, 패티는 그것이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밤 달은 거의 패티 뒤를 따라오다시피 했고, 그녀는 백미러를 쳐다보며 달에게 윙크했다. 그녀의 마음에 언니 린다가 떠올랐다. 린다는 패티가 어떻게 청소년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었다. 패티는 운전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린다는 결코 모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배스천 말고는어느 누구도 결코 모를 것이었다. 시비가 죽은 뒤 패티는 심리치료사를 찾아갔다. 그 여자에게 다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 P79

하지만감청색 블레이저를 입은 그 여자는 커다란 책상 뒤에 앉아 부모의 이혼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패티에게 물었다. 기분이 안 좋았죠, 패티가 말했다. 패티는 이 심리치료사와의 상담을 어떻게그만둘지 방법을 궁리하다가 결국 비용을 더 감당할 수 없다고거짓말을 했다.
진입로로 접어들던 패티는 나갈 때 켜두었던 불빛을 보았고,
그 순간 루시 바턴의 책이 패티를 이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다. 책이 그녀를 이해한 것이었다. 입안에 노란 캔디의 달콤한맛이 남아 있었다. 루시 바턴에게는 자신만의 수치심이 있었다.
오, 세상에, 그녀는 정말로 자신만의 수치심을 가지고 있었다. - P79

"너는 열다섯 살이야. 나는 어른이고 잘못한 사람은 나여야 해."
패티는 소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놀랐고, 소녀는 손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냥 피곤해서요." 라일라가 말했다. "그냥 너무 피곤해서요."
패티가 일어서서 상담실 문을 닫았다. "얘야." 그녀가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얘야. 내가 너를 위해 뭔가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너를 대학에 보내줄 수 있다고. 돈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아까 말했듯이 네 등급은 훌륭해. 나는 네 등급을 보고깜짝 놀랐고, 네 성적은 정말로 뛰어나. 나는 너만큼 등급이 좋지 않았어. 그런데도 내가 대학에 간 건 우리 부모님이 나를 대 - P82

학에 보내줄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네가 대학에 가게 해줄 수 있고, 그러면 너는 가는 거야."
소녀가 패티의 책상에 올려놓은 자기 팔에 머리를 내려놓았다.
소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잠시 뒤 소녀가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누군가가 저한테 잘해주면…………오 이런, 그러면 마음이 미칠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아." 패티가 말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소녀가 다시 울었고, 계속 소리를내어 훌쩍였다. "오 이런 "소녀가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패티가 화장지를 건넸다. "괜찮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다괜찮아질 거야." - P83

그날 오후 패티가 우체국 계단을 올라가는데 환한 햇살이 그위로 쏟아져내렸다. 우체국 안에 찰리 매콜리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패티." 그가 말하고 고개를 까딱했다.
"찰리 매콜리" 패티가 말했다. "요즘 어딜 가나 만나네요. 어떻게 지내세요?"
"살아내는 중이죠." 그는 문으로 걸어가던 길이었다. - P83

나중에, 앞으로 다가올 세월 동안 패티는 그들이 계단에 앉아있던 것과, 그것이 시간의 바깥에서 일어난 듯 느껴졌던 것을 되돌아볼 것이었다. 길 건너 철물점이 있었고, 더 멀리로는 오후햇살을 받아 건물 측면이 환히 빛나는 파란 집이 있었다. 패티의마음에 키 큰 하얀 풍차들이 떠올랐다. 그 길고 가는 팔들은 일제히 빙글빙글 돌고 있었지만, 이따금 풍차 두 개의 팔이 동시에돌며 하늘을 배경으로 같은 위치에 놓일 때를 빼고는 결코 똑같이 돌지 않았다.
마침내 찰리가 말했다. "요즘 잘 지내는 거죠, 패티?"
그녀가 말했다.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러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그 속으로 영원히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그만큼깊었다. - P84

잠시 뒤 찰리가 말했다. "중서부 출신이로군요. 괜찮다고 하는걸 보면요. 하지만 늘 괜찮지는 않을 텐데요."
그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울대 바로 위에는 면도하는 것을 잊은 듯 흰 수염 몇 가닥이 남아 있었다.
"물론 뭐가 괜찮지 않은지 내게 말할 필요는 없어요." 그가 이제 앞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도 물어볼 생각이 전혀 없고요.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건 가끔은 "그가 그녀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고, 그녀는 그의 눈동자가 옅은 푸른색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끔은 그렇게 괜찮지는 않다는 거예요. 절대로 그렇지 않죠. 늘 괜찮은 건 아니에요."
오, 그녀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고,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없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 그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사실을 그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P85

린다 피터슨-코넬은 이번 한 주 동안 그들의 집에 묵기로 한여자를 보면서 생각했다. 오, 이 여자가 되겠군. 여자의 이름은이본 터틀로, 사진 페스티벌에 참가한 또다른 여자인 캐런-루시토스의 소개로 그들의 집에 오게 되었다. 캐런-루시는 린다가이본을 맞이할 때 이본 옆에 말없이 서 있었다. 이본은 키가 매우 컸고 약간 굽슬굽슬한 머리칼이 어깨까지 내려왔는데, 십년전에는 상당히 예뻤을 것 같았다. 지금은 눈 밑에 주름살이 생겨 파란 눈빛이 주는 강렬함이 약해졌고, 분명 마흔을 넘겼을 나이치고 화장이 너무 진했다. 린다는 쉰다섯 살이었다. 이본의 샌들은 높은 코르크 웨지 굽이어서 그녀의 키를 더욱 커 보이게 했다. 린다는 그 구두를 보고 이본이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 - P89

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눈치챘다. 늘 구두가 단서였다.
린다와 제이 피터슨-코넬의 집 정원에는 알렉산더 콜더의 조각상 두 점이 있었는데, 두 작품 다 크고 눈부시게 푸른 수영장한편에 있었다. 집안 거실 벽에는 피카소 그림 두 점과 에드워드호퍼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손님들이 사용하는 구역으로 이어지는 경사진 복도 끝에는 필립 거스턴의 초기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 P90

연중 이맘때에는 집집마다 포치에 제라늄과 페튜니아가 심긴 큰 화분들이 가득했다. 타운에는 키 큰 오크나무와 검은호두나무가 심겨 있었고, 쥐엄나무와 초크체리 가지들은 출렁출렁 늘어져 공원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없으면 나무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끔은 물푸레나무의 잎들이 살랑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꽤오래전 파산해 결국 문을 닫아야 했던 사립 고등학교 교실-그일부-이 아직 사진 페스티벌 강의실로 쓰였다. 그 건물로 가려면 무성한 덤불과 나뭇가지를 헤치고 나아가야 했기 때문에, 타운의 집들은 지나는 길에 흘끗 쳐다볼 수 있을 뿐이었다. 거의동화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타운 자체가 그랬다. 이본 터틀이캐런-루시 토스에게 그렇게 말하자 캐런-루시는 자기도 그렇게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환영회가 열리고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 P93

그것은 그녀의 부모와 형제들이 견뎌야 하는 절망과 공포를 더욱 가중시켰다.
이 년 동안 타운은 그런 식으로 돌아갔다.
그 기간 동안 린다 피터슨-코넬은 가슴속 깊은 곳에 어두운 혼돈의 원판 같은 것을 지닌 채 살아갔고, 남편이 신문기사를 읽고텔레비전으로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는 모습을 보면서 종종 진땀을 흘렸다. 그녀는 자신이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몸이왜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지, 마음이 왜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지못하는지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종결되었을 때, 마침내, 마침내 종결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그런 식으로 느꼈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가끔 기억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실제로 겪었던 신체 증상이 다시 나타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기억날 때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어리석은 여자야. 나는 불평할 게 아무것도 없어, 정말로, 그렇겐 못하지, 오맙소사. - P99

린다는 일어서서 거실로 들어가 카우치 한쪽 끝에 앉았다. 그녀는 영혼이 얼마간 육체에서 빠져나온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다시 어려져 이른 여름 어느 저녁, 학교의 여자 친구들과 길을걸으면서 옥수수밭을, 또 옥수수밭을 지나고 이어 콩밭을 지나는 느낌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새생명의 연초록빛으로 가득했고, 해가 넘어가면서 온 하늘이 찬란한 축하의 색깔을 입었다. 맨팔에 닿던 공기도 떠올랐고, 그 모든 자유, 그 모든순수함, 그 웃음도...… - P117

"오, 차일드, 당연히 그렇겠네요. 정말 미안해요." 그녀가 시선을 린다에게로 돌렸지만 초점은 여전히 먼 곳에 닿아 있는 듯 보였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당신 남편이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 입장은 아니네요. 내가 유리로만들어진 집에 돌을 던졌어요." 미안해요."


그것은 거의 언제나 놀라운 일이다. 예전에는 영원히 닫힌 장소로 보이던 곳으로 들어가도록 허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고그것이 놀라서 멍해 있던 린다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린다는 그날 콘칩 봉지들 위로 햇살이 쏟아지는 편의점 안에 서서 그 같은동정의 말-캐런-루시는 자신의 남편이 어떤 마음 상태였는지몰랐던 반면, 린다는 남편의 마음 상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을 들으면서 그 일의 결말이 결 - P124

국 어떻게 될지 감지했다. 이본 터틀과 캐런-루시는 이 타운에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재판은 열리지 않을 것이며, 카메라에 대한 언급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린다가 남편과 함께 밤에뉴스를 보거나 전원을 산책하거나 레스토랑에 앉아 담소를 나눌때, 그는 자신이 궁지에서 벗어난 것이 아마도 혹은 부분적으로아내의 신중함 덕분이라는 것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을 것이기에, 그리고 그뒤로 더이상 다른 여자는 없을 것이기에, 게스트룸은 아마 누구도 들어가지 않고 벽에 캐런-루시의 금 간 접시 사진이 걸려 있는 햇볕 잘 드는 서재가 될 것이기에, 린다는 자유의 상태에서 남편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 P125

의 상태에서린다는 그날 그 사건의 본질을 느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고 그 여자의 눈을 깊이 바라보았다. 린다는 그녀의 손을 잡고싶어졌다. 심지어갑작스럽고 놀랍고 다급하게-그녀의 뺨을어루만지고 싶어졌다. 캐런-루시가, 자신이 줄곧 중요하고 사랑받는 존재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사라진 것을 알고 뒤통수를 맞은 듯 괴로워하던 그 프리티 나이슬리 걸인 것처럼.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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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에는 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풀이 길가 콘크리트의 틈을 뚫고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제한속도 75MPH*라고 되어 있는 표지판 옆을 지나갔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오렌지빛이감도는 붉은색의 잎이 달린 나무 꼭대기가 보였고, 더 달리자 나뭇잎은 노란색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줄지어 선 모든 나무들 사이 작은 선홍색 나무가 한 그루 보였다. 길가의 풀은 색깔이 좀바래 있었다. 풍부한 녹색이 빠지니 완연한 8월의 풍경처럼 보였다. 그곳을 지나자 키 큰 나무들이 서 있었다. - P138

그와 함께 차를 타고 달리면서 나는 어떤 익숙한 감각을 의식했는데, 그 감각은 전날 밤 공항이 너무 초현실적이라는 거의공항 같지 않다는 느낌과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내가 의식한 것은 이것이었다.
내가 겁을 먹었다는 것.
나무들은 점점 땅딸해졌고, 몸통이 굵은 소나무들이 줄지어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왼쪽으로 비쩍 마른 자작나무 들판이나타났다. 그걸 제외하면 탁 트인 넓은 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표지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차들도, 지나가는 한두 대 말고는 없었다. - P139

나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뉴욕은 내가 오래 살아온 곳이고, 익숙한 곳이다. 내 아파트, 내 친구들, 경비원,
정류장마다 한숨을 토하는 도시 버스들, 내 딸들…… 그 모든 것이 익숙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있는 곳은 익숙하지 않았고,
그래서 무서웠다.
나는 그게 몹시 무서웠다.
하지만 윌리엄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는데, 겁이 난다고말할 만큼 내가 그를 충분히 잘 아는 건 아니라고 문득 느꼈기때문이다. - P140

이들은 나와 같은 족속이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어느 집단에 소속감을 가져본 적이 결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순간 여기 메인주 시골에 있었고, 방금 내게 일어난 일은 그 집들, 우리가 지나쳐 간 몇 채의 집과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이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같다-이해였다. 그건 이상한 감정이지만 진짜였고, 잠시 나는 이렇게 느꼈다. 내가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겠다고. 그리고 심지어, 그 몇 채의 집에실제로 살고 있고 집 앞에 트럭을 세워놓은 그 사람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사랑한다고. 거의 그렇게 느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 P149

나는 잔해만 남은 콘크리트를 보았고, 녹색 잎이 콘크리트를뒤덮으며 자라고 있었다. 그 자리에 햇빛이 비쳐 녹색 잎이 반짝거리는데,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뭔가가 덜컹했고, 나는 랠프가말하는 모든 것이 내가 그의 입에서 나오리라 이미 예상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어떤 단어가 그의 입을 통해나오기 직전에 그게 어떤 단어일지 내가 알았다는 뜻이다. 중요한 말은 아니었고, 그저 그곳이 어떻게 지어졌고 단열재로는 무엇을 사용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다만 내 머릿속에서 랠프가얘기하는 내용을 정확히 미리 말해준 것은 어떤 여인의 목소리였다. 정말로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데자뷰인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데자뷰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고, 아주 기이한 순간이었다. 혹은 일련의 순간들. - P158

내가 자란 곳에서도 사방에 하늘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하늘에는 해가 찬란했지만, 또한 군데군데 퀼트처럼 아주 낮게 구름이 드리워 있었고, 해는 구름 안을들락거리며 녹색 목초지에 환한 빛을 쏟아냈다. 그리고 우리는드넓은 해바라기 들판을 지나갔다. 우리는 또한 토양에 영양분을 주려고 간작으로 클로버를 심은 들판도 지나갔는데, 내 어린시절 경험으로는 봄이 되면 그것을 갈아엎을 터였다. 거의 익숙하다고 할 수 있는 그 풍경을 보고 작은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
그날 아침의 고립감이 이런 감정으로 변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는 행복을 느꼈다. 그게 내가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나는 어린아이인 내가 트럭을 모는 아버지 옆에 타고가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 P163

나중에 내가 그를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윌리엄은 울었지만결코 내게 그런 식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워, 루시." 나는 기다렸지만, 그가 "제발 떠나지 마, 왜냐하면 당신은 루시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듣지 못했다.
윌리엄을 떠난 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한 적이 한 번있었다. 우리가 정말로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할까? 그러자 그가말했다. 당신이 우리 결혼에 뭔가 다른 요소를 가져올 수 없다면.
내가 가진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결혼에새롭게 가져올 다른 요소를 전혀 생각해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 P167

권위에 대해.
나는 작문을 가르칠 때 그 일을 오래 했다-권위에 대해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글을 쓸 때 권위를 가지는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헬름 게르하르트의 사진을 봤을 때 나는생각했다. 오, 권위가 느껴지는데, 나는 캐서린이 왜 그와 사랑에 빠졌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단지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의 외모가 풍기는 인상, 보이는 방식 때문이었다. 그는 명령에 따르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영혼까지 소유할 수는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리고 문밖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 P168

그리고 나는ㅡ천천히ㅡ이것을 깨달았다. 이 권위가 바로 내가 윌리엄을사랑하게 된 이유임을 우리는 권위를 갈망한다. 
진실로 그렇다.
누가 뭐라고 말하건 우리는 권위라는 감각을 갈망한다. 혹은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힘든 일‘ㅡ나는 그걸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을 겪으면서도 윌리엄은 이 권위를 결코 잃지 않았다. 우리가 숲속에서 길을 잃은 헨젤과 그레텔이라고 느껴질 때조차 나는 늘 그의 - P168

존재 안에서 안전함을 느꼈다. 한 사람에 대해 이런 식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와 결혼한뒤에도, 심지어 우리가 ‘힘든 일‘을 경험하는 와중에도 나는 월리엄에 대해 여전히 그렇게 느꼈다. 그와 결혼하고 처음에, 그리고 (앞서 말했듯) 우리에게 곧바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을 때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내가 빙빙 돌며 헤엄치다가 이 바위에 부딪힌 물고기처럼 느껴져." - P169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문득 윌리엄과 함께 살던 시절에 결혼이라는 것이 내게 종종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생생히 떠올랐다. 방안 가득 익숙함이 짙어지고, 상대에 대해 알게 된 사실들로 목구멍이 거의 꽉 막혀 실제로 콧구멍까지 밀고 올라온 것같은 느낌상대의 생각이 내뿜는 냄새, 입 밖으로 나온 한마디한 마디에서 느껴지는 자의식,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가면서 약간 씰룩이는 모습. 거의 알아차릴 수 없게 살짝 기울어지는 턱,
상대 말고는 아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들, 그런 걸 느끼고 살면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친밀함은 그렇게 지긋지긋한 것이 되었다. - P177

캐서린은 밤에 내 딸들을 돌봐줄 사람을 고용했다. 내기억에 한 번의 예외ㅡ우리가 그녀의 병에 대해 알게 됐을 때,캐서린이 병에 대해 알리려고 뉴욕에 왔을 때, 그녀는 몸을 떨고있었고, 그렇게 떠는 모습을 보니 우리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를 ㅡ제외하면 그녀는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고,대부분의 시간 동안ㅡ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ㅡ우리는 어떤면에서, 그냥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 그때를 생각해보면 그녀가 곧 죽으리란 걸 내가 정말로 믿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캐서린도 정말로 그걸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치료를 받았고, 우리는 그것도 충실히 해나갔다.
치료가 끝나고 한 시간 뒤면 후유증이 나타나리란 걸 알아서, 우리는 치료가 끝나면 같이 식당으로 가서 머핀을 먹었는데, 캐서린이 머핀을 먹고 커피를 마셨던 모습이 기억난다.  - P180

그리고 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윌리엄이 내가 집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딸들을 가사도우미에게 맡기고 다시 나왔던게 기억난다. 내 기억에 그는 별말 없이 다정하게, 정말로 다정하게 나를 대했다.
윌리엄은 집안에 들어와서 어머니의 방에 잠시 들어갔다 나오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누구도 면회는 안 돼." 그리고 나는 윌리엄이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쓰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의 부고를 쓰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 여인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윌리엄은 부고를 쓰고 있었고, 왠지 모르지만 그후로 내내나는 윌리엄의 그런 행동을존경했다.
앞서 말한 권위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겠다. - P184

나는 내 어둑한 호텔방 의자에 돌처럼 가만히 앉아 그 일을 생각했다. 크리시가 그만큼 아팠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고, 어떤면에서는 그게 내 잘못이었음을 처음으로 이해했던-마음속에서 조금도 축소하지 않고 완전히 이해했다는 말이다―것 같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 나였으니까. - P188

내가 아무리 마음속 깊이 그렇다고 느껴도 나는 투명인간이아니다. - P189

신기하게도, 그날 그 순간 뭔가가 분명해졌다ㅡ그리고 메인주의 어두워지는 호텔방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또 한번 분명해졌다. 내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가 그 한순간에 분명해졌다. 나는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다시는 잊지않았다.
하지만 윌리엄에게 또 그렇게 하고 말았다. 그가 내게 리처드백스터에 대해, 그의 연구에 대해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그 말을 곧장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의 지적이 절대적으로 옳 - P191

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방에 앉아 있었고, 가슴속에 아주 생생한 고통이-육체적인 통증을 느꼈다는 말이다-작은 파도가자꾸만 출렁이는 것처럼 존재했다. 날이 완전히 컴컴해졌을 때나는 천장등을 켜고 방으로 치즈버거를 갖다달라고 주문했다. - P192

윌리엄은 고단해 보였고, 손을 들어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반사적으로 콧수염을 쓸어내리고 일어서서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나를 떠나기로 선택했다고?" 윌리엄이 나를 돌아보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선택이라고, 루시? 사람이 살면서 정말로뭔가를 선택하는 일이 몇 번이나 될까? 말해봐. 당신이 정말 가족을 떠나기로 선택했어? 아니,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당신은.…… 당신은 그냥 떠났어. 그래야만 해서 그러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그런 불륜을 저지르기로 선택한 건가? 오, 알아. 안다고. 책임이라는 거―심리치료사를 찾아갔었어. 혹시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할까봐 말하는 건데, 조앤과 같이 찾아간 그 심리치료사를 계속 만났어. 한동안 혼자 찾아갔고, 그 사람이 책임에 대해 말하더군.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봤어, 루시.
그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고, 알고 싶어 정말로 알고 싶어-사람이 뭐든 실제로 선택하는 건 언제인가? 당신이 말해봐."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 P194

이제 내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러면 당신도 비열한 말을하겠다고 선택한 게 아닌 거네, 윌리엄."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가 대답했다.
내가 말했다. "나도 그건 알아!" 그리고 덧붙였다. "내 머릿속은 정말로 비열해서, 당신은 내가 얼마나 비열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믿지 못할걸."
윌리엄이 한 손을 들고 말했다. "루시, 누구든 머릿속은 다 비열해. 맙소사."
"그래?" 내가 물었다.
그러자 윌리엄이 어정쩡하게 웃었는데, 그렇지만 기분좋은 웃음이었다. "그래, 루시, 다들 머릿속은 비열해. 혼자 하는 생각말이야. 그런 건 흔히 비열한 생각이야. 당신은 아는 줄 알았는데, 작가잖아. 오 맙소사, 루시." - P196

나는 결코 나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엄마다. 내가투명인간이라고 느끼지만, 나는 엄마다.
어린 시절 나의 어머니는 자살하겠다는 협박을 하곤 했다. 이렇게 말했다. "어디 먼 데로 차를 몰고 가서 나무를 찾아 목을 매달거다." 나는 어머니가 진짜로 그렇게 할까봐 잔뜩 겁을 먹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나는없을 거다." 나는 매일 겁에 질려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매일 그대로 있었다. 그뒤로 나는 수업이 끝난 후에 학교에 남기시작했는데, 매일 수업이 끝난 후 학교에 남았고 그렇게 하기 시작한 건 따뜻하게 있고 싶어서였고-우리집은 너무 추웠고, 나는 추운 게 늘 싫었다-거기 남아 숙제를 할 수 있는 게 안심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따금 어머니에 대해, 할 거면 해버려요! 하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자살할 거면 해버려요! 이런 뜻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정말로 그렇게 하면 그 작은 타운에서이미 이상할 대로 이상한 우리가 더욱 이상해 보일까봐 걱정이되었다. - P205

"그만하자." 내가 말했다. "중요하지 않아." 그 일은 더이상내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말을 할때 내 안에서 물이 찰랑이는 듯한 작은 감각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그가 조앤하고 결혼해서 살 때도 그랬고,
에스텔하고 결혼해서 살 때도 그랬다면, 그를 그렇게 만든 건 내가 아니었던 거네? 그러니까 나 때문이 아니었던 거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전날 밤 선택에 대해서 말한 것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그런 면에 대해 아마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것이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모른다. - P208

그러자 로이스가 슬픈, 거의 닫힌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그녀가 그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로이스가 말했다. "미안해요.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나는 이제 젊지 않아요. 당신과 이야기하는 건 충분히 즐거웠지만, 그를 만나보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알겠어요." 내가 말했다. 내가 떠나려는 동작을 하자 그녀가일어섰고, 그래서 나는 우리 대화가 끝난 것을 알았다.
그녀는 현관까지 나를 배웅해주었고, 문을 당겨 열었다. 문은자주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열릴 때 좀 뻑뻑했다. 그리고 나는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에 그 문을 통과해 들어와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을 캐서린을 상상했다. - P235

나는 로이스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손을 들어올려 아주 살짝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책을 읽었을 때 회고록말이에요-나는 거기 감자 농부, 내 아버지가 나온 걸 보고 깜짝놀랐어요! 그리고 계속 생각했죠. 내 이야기도 나오겠지, 그 농부의 아내가 아기인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도 나올거야. 하지만 전혀 나오지 않았어요."
"첫 남편을 떠난 건 알았지만 남기고 온 다른 존재에 대해선몰랐으니까요." 내가 말했다.
"음, 이제는 알겠어요. 하지만 그때는 몰랐어요. 그리고 그거 - P235

알아요? 바보 같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어요. 캐서린을 향해 다시 분노가 일었죠. 그리고 당신에게도 화가났어요- 내가 그 책에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오, 로이스." 나는 묘한 비현실감을 느꼈고, 머리가 제대로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뭔가를 먹어야 할 때처럼. 다만 그보다 더 심하게.
"음." 그녀가 작게 웃었다. "이걸로 책을 쓴다면, 나도 등장하고 싶어요."
"오, 그럼요, 물론이죠." 내가 말했다.
그러자 로이스는 다시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를 좋게 그려준다는 조건으로요."
돌아보는데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고, 그 순간나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피곤한 표정을 보면서 우리 대화가그녀에게 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었고, 나는 미안했다. - P236

로이스의 말처럼 여기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기차역으로 들어갔고 다른 차는한 대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도 누구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거기 앉아 캐서린이 눈 내리는 11월 저녁에 기차역을 향해 반쯤 뛰고 반쯤 걸었을 그 길을 바라보았다. 기차역은 작고 물막이 판자로 지은 것이었다. 기차역이라기보단 정거장이었다.
오, 나는 젊은 날의 캐서린이 바람 부는 11월의 어두운 거리를반쯤 뛰고 반쯤 걷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는데, 부츠도 신지않고 땅에는 그저 그녀의 신발과 눈뿐, 들키지 않으려고 진짜 코트도 걸치지 않은 채 짙은 색 옷을 입고, 스카프로 머리를 꼭대기까지 덮어 가리고서, 반쯤 뛰고 반쯤 걸어 기차역에 도착해 기다리는 모습을, 아주 겁먹은, 아주 많이 겁먹은ㅡ어쩌면 아버지손에 오랫동안 학대를 당해서 늘 겁을 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P240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얼마간 알고 있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다.
입학처의 그 남자는 내가 자기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걸, 타이거라는 단어를 듣고 무언가 다른 단어로 그를 불러줄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그 컵 홀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서 다시 연락이 오지않았지만 슬프진 않았고, 무엇보다 애초에 그가 나를 좋아했던게 늘 신기했다. 하지만 다시 말하면, 내 요점은 이것이다! 윌리엄이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어떤 점과 내가 윌리엄에 대해 알고있는 어떤 점이 우리를 결혼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것. - P243

 "그리고 나는 여전히 당신이 어떻게 그걸 해냈는지 모르겠어. 당신은 독특한 사람이야, 루시, 당신은 특별한 영혼이야. 그날 막사에 갔을 때 당신이 두 개의 우주인지 어딘지 사이를 오갔다고 했던 거, 나는 믿어, 루시, 당신은 특별한 영혼이니까.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은 결코 있었던 적이 없어." 잠시 뒤그가 덧붙였다. "당신은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 루시"
윌리엄은 다시 차를 몰고 도로로 나갔다.
나는 그의 말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그 옛날 내시 선생님의 차에 탔을 때도 이런 행복감이 단번에 나를 휘감았었다는 생각이들었다. "오 필리." 나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 P249

나는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ㅡ그리고 그 남자가 어떤 기분인지 알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모른다.)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투명인간이라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게어떤 기분인지 알기 때문이다. 다만 내 경우에는 사람들이 겉모습을 보고는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만 달랐다. 하지만 나는 그 뚱뚱한 남자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에대해.

공항 창가에서 나는 아주 넓은 주차장을 돌고 있는 윌리엄을보았다. 그는 내 시야에서 거의 벗어날 만큼 한쪽 끝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서서 반대쪽으로 걸었다. 나는 계속 지켜보았고그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서서 고개를 자꾸 내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 윌리엄, 나는 생각했다.
오 윌리엄! - P254

내가 얼마나 끔찍한 행동을 했던가.
지금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남편에게 나를 위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오, 그건 말할 수 없이 끔찍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삶이 흘러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너무 늦을때까지 모른다는 것. - P257

나는 로이스 부바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가 건강해 보였다는생각을 했다. 앞서 말했듯, 그녀가 편안한 방식으로 자기 세계안에 있는 것 같았다는 뜻이다. 그녀의 집에는 가족사진이 많았고, 그곳은 원래 그녀의 어머니 집이었다. 나는 그녀가 어머니가자란 집에서 살고 할머니의 장미 관목을 돌본다는 사실에 속으로 조용히 놀랐다. 하지만 그게 왜 나를 놀라게 하는 걸까? 그건그녀가 가지고 있는 집에 대한 느낌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그집에 대한 느낌은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사랑했다고, 로이스는 계속 말했다. 물론 그 어머니란매릴린 스미스, 그녀의 아버지와 결혼한 그 여인을 말한 것이다. - P272

하지만 로이스 부바가 생의 첫해를 방치된 채 보낸 것 같지는 않았다. 캐서린은 분명 그녀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녀를 안고 보듬어주었을 것이고, 처음 열이 났을 때 걱정했을 것이고, 그녀가아기 침대에서 처음으로 몸을 일으켜 일어선 것을 보고 속으로조용히 전율했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 생각이계속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어머니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불한 대가를 알고, 그게 오빠와 언니가 지불한 대가에는거의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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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남편 윌리엄에 대해 몇 가지 말하고 싶다.


윌리엄은 최근에 몹시 슬픈 일을 몇 차례 겪었고ㅡ많은 사람이그런 일을 겪었다-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래야 한다고 거의 강박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일흔한 살이다.
두번째 남편 데이비드는 작년에 죽었는데,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과정에서 나는 윌리엄에 대해서도 슬픔을 느꼈다. 슬픔이란 정말로-오, 그건 정말로 고독한 일이다. 그것이 슬픔이 무서운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슬픔은 당신이 유리로 된 아주 높은 건물의 긴 외벽을 미끄러져 내려오는데 당신을 보는 사람이아무도 없는 것과 같다. - P9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사람은 윌리엄이다.

*

그의 이름은 윌리엄 게르하르트, 당시 유행과는 맞지 않았지만, 나는 그와 결혼하면서 내 이름에 그의 성을 붙였다. 그때 내대학교 룸메이트는 말했다. "루시, 그의 성을 쓰겠다고? 난 네가페미니스트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더이상 내가 되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당시 나는 내가 나인 것에 지쳐 있었고, 이미 내 인생 전체를 나로 살고 싶지 않다는 소망에 바쳤던 터라ㅡ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그의 성을 따랐고 십일 년 동안 루시 게르하르트가 되었지만, 한 번도 그 이름이 내게 맞는다고 느낀 적이없었다.  - P10

그래서 윌리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운전면허증에 다시 내 원래 이름을 넣으려고 차량관리국을 찾아갔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절차가 훨씬 번거로워서, 다시 법원에 가서 무슨서류를 준비해 와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 오그리고 나는 다시 루시 바턴이 되었다.
우리는 결혼해서 거의 이십 년을 같이 살았고, 그런 뒤에 내가그를 떠났고, 우리에겐 딸이 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오랜 세 - P10

월 친하게 지내왔다ㅡ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그건 정확히 모르겠다. 이혼에 대해서라면 끔찍한 이야기가 많지만, 헤어짐 자체를 제외하면 우리 이혼은 그렇지 않았다. 이따금 나는 헤어짐의 고통과 그것이 내 딸들에게 일으킨 고통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죽지 않았고, 지금 여기 살아 있으며, 윌리엄도 그렇다.


나는 소설가라서 이 이야기를 거의 소설처럼 써야 하지만, 이건 진실이다ㅡ내가 써낼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실이다. 그리고 나는 말하고 싶다ㅡ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윌리엄에 대해 뭔가를 이야기한다면, 그가 내게 말해줬거나 내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 P11

나는 윌리엄이 아인슈타인처럼 생겼다고는 전혀 생각하지않지만, 그 젊은 여자가 말하는 게 뭔지는 알 것 같다. 윌리엄의콧수염은 회색이 섞인 흰색으로 풍성하지만 잘 손질되어 있고,머리칼도 숱이 많고 흰색이다. 커트를 했는데, 일부 머리칼은 삐죽삐죽 뻗쳤다. 그는 키가 크고 옷을 아주 잘 입는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아인슈타인은 묘하게 광적인 인상을 풍기지만 윌리엄은 그렇지 않다. 윌리엄의 얼굴에는 보통 유쾌한 표정이 고집스럽고 폐쇄적으로 떠올라 있지만, 아주 드물게 한 번씩은 고개를뒤로 젖히고 진짜로 껄껄 웃는다. 나는 그런 모습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그의 눈은 갈색이고 한결같이 크다. 모든 사람이 나이를 먹은 뒤에도 큰 눈을 유지하지는 않지만, 윌리엄은 그렇다. - P12

한 가지 더. 이것은 죽음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떠나는 느낌과 관련이 있어서, 자신이 거의 세상을 떠나고 있다고 느꼈지만, 그는 어떤 사후 세계도 믿지 않았기에, 어떤 밤에는 그로 인해 내면에 일종의 공포가 차올랐다. 이런 때는 대체로 계속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있었지만, 가끔은 일어나 거실로 가서 창가의커다란 적갈색 의자에 앉아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을 때까지책ㅡ그는 전기를 좋아했다—을 읽었다. - P20

그 시기에 윌리엄은 자신의 실험실로 출근해서 연구를 했다.
그는 기생충학자였고, 뉴욕대학교에서 오랫동안 미생물학을 가르쳤다. 학교에서는 그가 계속 연구실을 쓸 수 있게 해주었고,조교도 한 명 붙여주었다. 수업은 더이상 하지 않는다. 학생들을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그는 자신이 그 일을 아쉬워하지않는다는 사실에 놀랐고ㅡ최근에 내게 해준 이야기다ㅡ생각해보니 자신은 학생들 앞에 설 때마다 두려움을 느꼈는데, 가르치기를 그만둔 뒤에야 자신이 정말로 그랬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왜 이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가? 그건 내가 결코 몰랐기때문일 테고, 윌리엄 역시 전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매일 아침 열시에 학교로 가서 오후 네시까지 근무하면서, 논문을 쓰거나 연구를 하거나 실험실에서 일하는 조교를 지도했다. 이따금ㅡ일 년에 두 번이었을 것이다ㅡ학술 대회에 참가했고, 같은 분야의 다른 과학자들 앞에서 논문을발표했다. - P24

그러자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고, 나는 베카를 끌어안았다. 크리시가 다가왔고, 딸들은ㅡ내 생각에ㅡ거의 늘 그렇듯 서로를 다정하게 대했다. 두 아이는 항상ㅡ내가보기엔ㅡ거의 부자연스러울 만큼 가깝게 지냈다. 그애들은브루클린에서 서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산다. 나는 그애들의 남편들과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크리시의 남편은 금융계에서 일하는데, 윌리엄과 내게는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는 분야이지만, 그건 단지 윌리엄은 과학자고 나는 작가라 우리가 그쪽 세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영민한 사람이라는 건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한편 베카의 남편은 시인인데,
오 맙소사 가여운 사람, 내 생각에 그는 자기중심적이다. 그 순간윌리엄이 다가왔고, 우리는 누군가가 그를 부르기 전까지 한동안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리를 뜨기 전에 그가 허리를숙이고 말했다. "와줘서 고마워, 루시. 당신이 와줘서 좋았어." - P36

유쾌한 거리감과 온화한 표정을 지닌 그는, 가슴속에 묵직한두려움 덩어리를 지닌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실상은 그보다 더 나빴다. 그의 고양된 유쾌함 이면에는 청소년이나 할 법한 불평불만이 깔려 있었고, 영혼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번뜩였다. 아랫입술을 쑥 내밀고 이 사람 저 사람을 탓하는ㅡ그는 나를 탓했고, 나는 종종 그것을 느꼈다―퉁퉁한 소년같았다. 우리의 현재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뭔가로 나를 비난했고, 나를 "여보"라고 부르면서 커피를 내려ㅡ당시에 그는 커피를 전혀 마시지 않았음에도 매일 아침 나를 위해 한 잔을 만들었다ㅡ내 앞에 순교자처럼 내려놓으면서도 나를 비난했다.
그 바보 같은 커피는 그만 됐어, 나는 이따금 외치고 싶었다.
내 커피는 내가 만들어 마실 테니. 하지만 나는 윌리엄이 내민커피를 받고 그의 손을 만지면서 "고마워, 여보" 하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하루를 시작했다. - P37

불빛을 보고 대학 입학 첫날에 나를 태워다준 진로 상담 교사,내시 선생님을 떠올렸다ㅡ오 나는 그녀를 정말로 사랑했다! 그날 선생님은 나를 태우고 달리다가 갑자기 고속도로에서 차를돌려 쇼핑몰로 들어가더니 내 팔을 톡톡 치며 "내려, 내리자" 하고 말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쇼핑몰로 들어갔고, 그녀는 한손을 내 어깨에 올리고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십 년 뒤에갚으면 돼, 루시, 알겠지?" 그러고는 내게 옷을 몇 벌 사주었다.
긴소매 티셔츠를 색깔별로 여러 벌 사주고 스커트 두 벌, 블라우스 두 벌을 사주었는데, 그중 한 벌은 예쁜 페전트블라우스였다.
하지만 기억에 가장 많이 남은 것은 선생님이 사준 옷이었고,그것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 P40

내가 그때까지 본것 중 가장 예쁜 작은 속옷 뭉치. 그리고 선생님은 내 몸에 맞는청바지도 사주었다. 그리고 여행용 가방도 사주었다! 베이지색바탕에 붉은색 테두리가 둘린 것이었는데, 차로 돌아갔을 때 그녀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 있어. 여기 안에 전부 담자." 그러더니 차 트렁크 안에 가방을 넣고 연 다음, 옷의 가격표를 하나하나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나는 난생처음 보는 아주 작은 가위 -나중에 그게 손톱 손질용 가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로 잘라냈다. 그리고 우리는 여행 가방 안에 내 물건을 전부 담았다. 그녀가 그렇게 해준 것이다. 내시 선생님이 선생님은 그로부터 십 - P40

년이 안 돼 돌아가셨다. 자동차 사고가 죽음의 원인이었고, 그래서 나는 은혜를 갚을 기회를 잃었으며, 그뒤로 한 번도 그녀를잊은 적이 없다. (캐서린과 함께 쇼핑하러 갈 때마다 나는 내시선생님과의 그날을 생각했다.) 그날 우리가 대학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시 선생님에게 농담처럼 "선생님이 제 엄마인 것처럼 해도 돼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말했다. "그럼, 그래도 되지, 루시!" 내가 선생님을 엄마라고 부르진 않았지만, 그녀가 나와 함께 기숙사로 들어갔을 때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해주었으니, 사람들은 선생님이 내 엄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늘-오, 늘! - 나는 늘 그 여인을 사랑할 것이다. - P41

우리는 캐서린을 사랑했다. 오, 우리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우리 결혼생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캐서린은 활기가 넘쳤다. 얼굴은 종종 빛으로 가득했다. 내 대학 친구는 그녀를 처음 만난 뒤 내게 말했다. "캐서린은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빨리 호감을 느꼈던 사람이야."
나는 그녀의 집이 놀랄 만큼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 집은 매사추세츠주 뉴턴의, 나무가 줄지어 심긴 거리에 있었고 근처에는다른 집들도 있었다. 내가 그곳에 처음 갔을 때 햇빛이 부엌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하얀 식탁이 놓인 커다란 부엌은 반짝반짝 윤이 나고 깨끗했다.  - P53

조리대는 하얀색이고, 큰 아프리카제비꽃 한송이가 개수대 위쪽 창가 선반에 놓여 있었다.
개수대 위에 아치형으로 돌출된 수도꼭지는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나는 천국에 들어온줄알았다. 캐서린의 집 전체가 깨끗했다. 거실의 나무 바닥은 광채가 흐르는 벌꿀색이었고, 침실에 달린 흰색 커튼은 풀을 먹인 듯했다.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은 아예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그걸 잊을수가 없었다. - P53

그러니 캐서린은 가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러 갔을때 나는 그 집의 우아한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나는 그녀가 사회 계급에서 제법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나는 미국에서의 계급이라는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완전히 이해한 적이 없었다. 그건 내가 밑바닥 출신이고, 그렇게 태어나면그 사실은 절대 당신을 진정으로 떠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건내가 정말로 그것을, 내 출신을, 가난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는뜻이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 같다. - P54

예전에 한번은 캐서린이ㅡ윌리엄과 내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을 때였다ㅡ내게 우리 가족에 대해 물어보았고, 나는 입을 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내가 "말을 못하겠어요" 하고 말하자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귤색 카우치의 내 옆자리에 앉아 두 팔로 나를 안으며 말했다. "오루시." 캐서린은내 팔과 등을 어루만지며 계속 그 말만 했고, 내 얼굴을 자기 목에 갖다댔다. "오 루시." 그날 캐서린은 내게 말했다. "나도 우울해질 때가 있어." 그래서 나는 놀랐다. 내가 아는 누구도, 어떤 어른도 그런 말을 해준적이 없었고 게다가 그녀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캐서린은 나를 다시 안아주었다. 나는 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그런 다정함이 있었다.
- P59

"나는 크리시의 눈물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베카의 눈물에대해서도내가 아이였을 때 부모님은 오빠나 언니나 내가 울면 무조건몹시 화를 냈다.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우리가 울지 않을 때도자주 화를 냈고, 우리 중 하나가 울면 두 분 다 우리에게 거의 미친 사람처럼 화를 냈다. 전에도 이 이야기를 썼지만 여기서 다시언급하는 건 몇 년 전 내가 아는 한 여자가 해준 이야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느 수녀가 자기에게 ‘눈물을 흘리는 재능‘이 있다고 말해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건 베카도 가진 재능이다. 심지어 크리시도 필요할 때는 그 재능을 보인다. 내게 운다는 건 대체로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하려는 말은, 나도 울지만 울면서아주 많이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윌리엄은 그걸 잘 받아주었다.
내가 정말로 서럽게 울면, 데이비드라면 겁을 먹었겠지만 윌리엄은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비드와 살 때는 한 번도 첫 결혼에서처럼 그렇게 울지는 않았다. 아이처럼 서럽게 흐느끼지는않았다.  - P64

그해에 윌리엄이 내게 책을 읽어주던 게 기억난다. 어린이용책이었지만,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아이들을 위한 책이었고, 그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책이었다 스스로 자기 삶을 개척한 소년에 대한 내용이었다. 매일 밤 우리가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그가 몇 페이지씩 읽어주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다른 무엇보다 윌리엄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불을 끄고내 몸에 손을 뻗지 않으면-대부분의 밤에 손을 뻗었다-공포와 상실감을 느꼈다. 나는 그 정도로 그를 원했다. - P72

우리는 윌리엄의 어머니가 회원인 어느 컨트리클럽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의 대학 친구 몇 명과 그의 어머니의 친구들이참석한 아주 작은 결혼식이었고, 결혼식이 시작되기 한 시간쯤전에 클럽 위층 어느 방에서 드레스를 입던 중에ㅡ내 부모님과언니 오빠는 참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한 뒤로 내게 무언가를 보내지도 편지를 쓰지도 않았다ㅡ나는좀 야릇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설명하기 아주 까다로운데,
이 모든 상황이 완전히 현실 같지는 않다는 그런 느낌과 비슷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윌리엄 옆에 서서 치안판사를 앞에 두고결혼 서약을 할 때는 거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윌리엄은 내가결혼식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도와주려는 듯 큰 사랑과 다정함 - P72

을 담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느낌은 사라지지않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뒤돌아섰을 때 나는 그의 어머니가 몹시 기뻐하며 손뼉을 치는 것을 보았고, 아마ㅡ확실하지는 않지만ㅡ그 순간 내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줄곧 어머니를 보고 싶어했을 수도 있지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방금 묘사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혼식이 끝나고 열린 조촐한 피로연에서도 내가 정말로 거기 존재한다는 느낌은 들지않았다. 내가 그 자리로부터 제거된 것처럼, 모든 것이 조금 멀리 있는 듯 느껴졌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호텔에서는 평소처럼 남편에게 나를 자유롭게 맡길 수 없었다.
그 느낌이 여전히 내게 머물러 있었다. - P73

진실은 이것이다. 그 느낌은 영영 사라지지 않았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와의 결혼생활 내내 나는 그것을 느꼈고밀물과 썰물처럼 오갔다―그 느낌은 정말 끔찍했다. 윌리엄에게,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내 옆에 종종 머물러 있는 은밀하고 조용한 공포였고, 밤에그와 함께 침대에 있을 때도 나는 예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윌리엄이 그걸 알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지만 그는 당연히 알았고, 결혼하기 전 그가 내게 손을 뻗지 않은 밤에 느꼈던 - P73

절망감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결혼해서 살 때 그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수치스럽고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볼 방법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윌리엄이 행복을 덜 느끼게 되고 작은 일에서 마음의 문을닫아버렸기 때문이다. 내 눈앞에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은 덮어둔 채 우리의 삶을 살았다. - P74

어린 시절 나는 언니든 오빠는 거짓말을 하면, 심지어 하지 않았더라도 부모님이 우리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입안을 비누로 씻어야 했다. 그것이 그 집에서 우리에게 일어난최악의 일은 아니었고, 그래서 지금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하려고한다. 우리는 작은 거실의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고, 거짓말을한 사람이 누구건 간에 예를 들어 언니 비키가 거짓말을 했다고 치면-나머지 두 아이, 오빠와 나 중 하나는 언니의 팔을 잡아 누르고 나머지 하나는 언니의 다리를 잡아 눌러야 했다. 그러고 나면 어머니는 부엌에서 접시 닦는 행주를 가져다가, 욕실로가서 그것에 비누를 묻힌 다음 비키가 혀를 내밀면 입안에 행주를 쑤셔넣은 뒤 구역질을 할 때까지 계속 문질렀다.
나이를 먹고 생각하니, 부모님이 이 행위에 나머지 아이들을개입시킨 것은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아주 잘 쓴 것 같다. 그 집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그랬듯, 그게 우리를 갈라놓았다. - P81

이걸 한번 이해하려고 해보라.
대형 코르크판이 있고 그 판에 지금껏 살아온 모든 사람의 핀이 꽂혀 있다면, 거기 내 편은 없을 거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나는 내가 투명인간이라고 느낀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하지만 가장 깊은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설명하기가 아주어렵다. 그리고 설명하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정으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내가 하려는 말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건 내가자랄 때 우리집에는 욕실 세면대 위에 높이 걸려 있던 아주 작은거울 말고는 거울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처럼 단순한 이야기일수 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아주적인 수준에서 나를 투명인간으로 느낀다는 말 외에는. - P82

그러고도 조앤에 대해서는 그뒤로 석 달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조앤에 대해 말했을 때, 나는 내가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자들에 대해 들을 때도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이미 했었다. 하지만 이 조앤이라는 여자는 수도 없이 우리집에 찾아왔고, 어느 여름 내가 아파서 병원에입원했을 때 내 딸들을 병실로 데려오기도 했으며, 예전부터 남편의 친구이자 내 친구였다.


내 안에서 튤립 줄기가 툭 꺾였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튤립은 꺾인 채로 내 안에 남았고, 결코 다시 자라지 않았다.


나는 그후로 좀더 진실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 P98

데이비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 이야기를읽는 당신도 이 사실은 알아야 할 것 같아 말하려 한다.
윌리엄 말고는 내게 집이 없었다고 말할 때 그건 사실이다. 데이비드는 이 얘기는 이미 했지만 하시드파 유대인이었고,
시카고 근교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하지만 그는 열아홉살 때 그공동체를 떠났고 추방된 채 살았으며, 거의 사십 년 뒤 누이가연락해올 때까지 가족과 아무런 접촉이 없었다. 당신이 알아야할 것은,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이 그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둘다 자라면서 바깥세상의 문화를 접하지못했다. 우리 둘 다 자랄 때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다.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도 모호하게만 알다가 나중에 스스로 깨우쳤다. 우리가 성장한 시기에 유행한 노래를 알았던 적도 없었고ㅡ들어 - P100

본 적이 없었으므로ㅡ더 자랄 때까지는 영화를 본 적도 없었으며, 일반적으로 쓰이는 관용구를 알았던 적도 없었다. 그렇게 바깥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자란다는 게 어떤 것인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집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ㅡ둘 다 그렇게 느꼈다ㅡ스스로가 뉴욕시티의 전화선 위에 내려앉은 새들 같다고 느꼈다.
이 남자에 대해 한 가지만 더 말하겠다!
데이비드는 키가 작았고, 어린 시절 사고로 한쪽 골반이 반대쪽보다 더 올라가 있어서 심하게 절뚝거렸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그는ㅡ키가 크지 않았기에ㅡ약간 과체중이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가 윌리엄과는 ㅡ거의ㅡ이보다 더 다를 수는 없다 싶을 만큼 딴판으로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윌리엄과결혼했을 때 내게 일어난 반응이 데이비드와는 전혀 일어나지않았다. 내가 하려는 말은 데이비드의 몸이 늘 내게 엄청난 위로가 되어주었다는 말이다. 맙소사, 그 남자는 내게 위로의 존재였다. - P101

내 어머니와 관련된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에 대한 글은 이미 썼고, 어머니에 대해서라면 정말로뭐든 더는 쓰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읽으려면 몇 가지 알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몇 가지란 이것이다.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폭력 이외의 방식으로 접촉한 기억은 전혀 없다. 어머니가 사랑한다. 루시, 하고 말한 것을 들은 기억도 없다.  - P105

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캐서린은 내게 뭘 갖고 싶은지물었다. 나는 서점 상품권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서점으로 가서책을 몇 권 산다고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들떴다.
내 생일에 그녀는 나를 바깥 차고로 데려가 골프채가 들어 있는가방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생일 축하한다." 그녀가 두 손을 마주치며 말했다. "네 골프 세트야." - P109

그때 이후로 나는 내 일 때문에 세상을 돌아다녔고ㅡ책이 출간되자 외국 출판사들이 나를 초대했고 세상 곳곳에서 페스티벌이열렸다 그러니까 그때 이후 아주 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비행기일등석에 탔는데, 그 자리에 앉으면 칫솔과 치약과 안대가 들어있는 작은 키트를 준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을 숱하게 경험했다.
삶이란 얼마나 신기한가. - P117

우리 사회에는 이럴 때 엄마들이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의사누구? 엄마가 같이 갈까? 정확히 문제가 뭔데? 하고 말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 문화에선 그렇지 않다. 나는청교도 가정에서 자랐고, 부모님 두분 다 청교도 집안 출신이며ㅡ그분들은 그걸 자랑스러워했다ㅡ우리는 서로 그런 식으로대화하지 않았다. 내가 어린 시절에 살던 집에서는 대화 자체가많지 않았다.
하지만 헤어질 때 나는 늘 그러듯 딸들에게 키스했고, 아이들과 헤어질 때는 매번 정말 마음이 아프다. 이번에는 심장이 약간더 많이 아팠다.
행운을 빌어요! 행운을 빌어요!" 아이들이 길 건너 계단을 내려가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면서 내게 소리쳤다. "연락 주세요.
소식 알려주세요! 안녕, 엄마! 안녕, 엄마!" - P119

나는 윌리엄과 라과디아공항에서 만났는데, 멀리서부터 그를알아보았고, 그의 카키 바지가 너무 짧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에마음이 조금 아팠다. 그는 로퍼를 신었고, 양말은 파란색으로진청도 아니고 연청도 아니었는데, 바지 밑단 아래로 몇 인치가드러나 보였다. 오 윌리엄, 나는 생각했다. 오윌리엄!
그는 몹시 지쳐 보였다. 눈 주위에 다크서클이 드리워 있었다.
그가 말했다. "안녕, 버튼." 그러더니 내옆에 앉았다. 바퀴 달린작은 여행용 가방을 가지고 왔는데, 두 가지 색조의 짙은 갈색이었다. 내가 알기로 비싼 것이었다. 그는 나의 바퀴 달린 강렬한보라색 가방을 쳐다보았고, 이어 말했다. "정말로 이런 걸?"
"오 그만." 내가 말했다. "이건 결코 잃어버릴 일이 없어."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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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내 침대 발치에 앉은 지 사흘째가 되던 날, 나는 엄마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엄마가 가지않기를 바랐지만, 엄마는 간이침대를 가져다주겠다는 간호사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고, 나는 엄마가 곧 떠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종종 그러듯 나는 미리부터 그 순간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내 기억에 미리부터 두려움을 느낀 첫번째 사건은 어린 시절 치과에 갔던 일과 관련이 있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치과 치료를 거의 받지 못했고, 우리의 치아는 유전적으로
‘충치가 잘 생기는 이‘로 여겨져, 당연하게도 치과에 가는 것은두려움 가득한 일이 되었다. 치과의사는 무료로 치료해주었지만 시간이나 태도 면에서 다 인색했고 우리라는 존재자체를 싫 - P89

어하는 것 같아서, 나는 치과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는 그 순간부터 내내 걱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내가 치과에 자주 간 건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일찌감치 이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을 두배로 겪는 건 시간 낭비라는 것.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오로지, 마음은 원해도 의지로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 P90

나는 애써 울음을 참느라 한동안 간호사실 쪽에 있는 의자에앉아 있어야 했다. 치통이 옆에서 나를 감싸안아주었고, 그렇게해준 그녀를 나는 지금도 사랑한다. 가끔 나는 테네시 윌리엄스가 블랑시 뒤부아의 이런 대사를 썼다는 사실에 슬퍼진다. "나는늘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하며 살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낯선 사람들의 친절을 통해 여러 번 구원을 받지만, 시간이 지나면그것도 범퍼스티커처럼 진부해진다. 나는 그 사실이 슬프다. 아름답고 진실한 표현도 너무 자주 쓰면 범퍼스티커처럼 피상적으로 들린다는 사실이. - P98

나는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은 지치게 마련이라는 것을. 마음, 영혼, 혹은 몸이 아닌 뭔가에 우리가 어떤 다른 이름을 붙이건 그것은 지치게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것이야말로 대체로, 일반적으로ㅡ자연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내생각에 잘은 모르지만 그 또한 지쳐가고 있었다. - P100

뉴욕의 피프스 애비뉴에는 많은 계단과 함께 큼직하게 자리잡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있고, 그 1층에는 조각공원이라고 부르는 공간이 있는데, 나는 이곳에 설치된 이 특별한 조각상을 남편과 함께, 그리고 아이들이 커가면서는 아이들과 함께 숱하게지나쳤을 것이다. 나는 오로지 아이들에게 뭘 먹지만 생각했고, 볼거리가 이렇게 많은 이런 성격의 미술관에서 다른 사람은뭘 하는지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조각상을 본 것은 한창 이런 필요와 걱정에 빠져 지내던 동안이었다. 그러니 내가 걸음을 멈추고 그 조각상을 쳐다보며 오, 하는 소리를 내뱉은 것은 최근-지난 몇 년 동안-그조각상에 찬란한 빛의 조명이 쏟아졌을 때였다. - P102

그 조각상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한 남자 주변에 그의아이들이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절박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이들은 그의 발치에서 그를 붙잡고 애원하는 것 같았고, 그는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양옆으로 잡아당기며 고뇌의 표정을 지은 채 세상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아이들은 그만 쳐다보고있었다. 드디어 이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 순간 나는 오, 하고 속으로 외쳤다.
설명을 읽으니, 그는 감옥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고, 아이들은아버지에게 자기들을 먹어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아버지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뿐이었다. 아이들은 그에게ㅡ오, 행복하게, 행복하게 자기들을 먹으라고 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도 알고 있겠구나, 하고.
그 조각가 말이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조각상이 표현한 것을 글로 쓴 그 시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 P103

불쌍한 인간.
그 말은 나중에야, 안내원이 그 조각상이 위층에 있다고 말해주었을 때 내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보았을 때에야 떠올랐다. 불쌍한 인간.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작게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불쌍한 인간-그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맴돌았다ㅡ우린 모두 불쌍한 인간이다. - P104

앞에서도 한 말이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보다스스로를 더 우월하게 느끼기 위해 어떤방법을 찾아내는지가내게는 흥미롭다. 그런 일은 어디에서나 언제나 일어난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건, 나는 그것이 내리누를 다른 누군가를 찾아야하는 이런 필요성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저속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P111

우리는 언덕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건물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날씨는 따뜻했고 창문은 열려 있었다. 세라 페인은 거의 시작하자마자 바로 지치는 것 같았다. 피로한 기색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그녀의 얼굴은 공기가 충분히 차갑지 않아 모양이 망가진 흰색 점토처럼 허물어져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피로 때문에 이상한 모양으로 일그러졌고, 세 시간이 다 끝나갈 즈음에는 더욱 심해져 하얀 점토 얼굴은 거의 파르르 떨리는 듯 보였다. 그 강의가 그녀의 진을 완전히 빼놓은것 같았다는 게, 내가 하려는 이야기다. 그녀의 얼굴이 피로로유린되었다. 날마다 그녀는 조금 반짝거리는 얼굴로 수업을 시작했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피로가 그녀를 엄습했다. 나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피곤한 기색이 그토록 역력히 드러난 얼굴은본 적이 없는 것 같다. - P121

그리고 그런 순간이 내가 또 한번 그때는 왜 엄마한테 말하지못했지? 하고 생각하게 이걸 기록하면서 되는 순간이다. 엄마. 내가 배워야 할 단어는 우리가 집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거지 같은 차고에서 다 배웠어요. 왜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던 걸까? 그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 그게 내가 평생 해왔던방식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가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한채 스스로 망신거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실수를 덮어주는 것.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 생각에, 많은 순간에 그런 사람이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도 나 스스로 망신거리가되었음이 희미하게 인식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어린 시절의 그느낌이 되살아난다. 다른 것으로는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이 세상에 대한 앎을 구성하는 엄청나게 큰 조각들이 빠져 있는 느낌.
하지만 어쨌거나ㅡ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주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내게 그렇게 해준다고 느낄 때에도 그렇게 한다. 그러니 그날 엄마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일어나 앉아, 엄마, 정말 기억 안 나요? 하고 말하지 않았을까? - P129

고양이 때문에 깜짝 놀란 세라 페인에게 비열한 말을한 그 여자 같은 몰인정한 사람들 말고. 그들의 대답은 사려 깊고, 거의 항상 똑같았다. 당신의 어머니가 어떤 기억을 가지고있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나는 이런 전문가들이 좋다. 그들은예의를 아는 사람들이고, 나도 이제는 진실한 말을 들으면 그렇다는 것을 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엄마가 어떤 기억을 지니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도 엄마가 어떤 기억을 지니고 있었는지 모른다. - P130

세라 페인이 우리에게 평가 없이 빈 종이와 마주하라고 말했던 그날, 그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절대 알 수 없을 것임을 단순한 생각같지만,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녀가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것을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생각한다. 늘 생각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얕보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 자신을 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를. 그날 밤 방금 서술한 내용보다 이 부분이 더 잘 기억난다-어둠속에서 아빠가 오빠 옆에 누워 오빠를 아기 안듯 안아주었다고,
오빠를 무릎에 올리고 가만가만 흔들어주었다고 나는 말하려 한 - P138

다. 나는 어느 눈물이 누구의 것이고 어느 중얼거림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 P139

세라 페인이 말했다. 자신의 글에 약점이 보이면 독자가 알아내기 전에 정면으로 맞서서 결연히 고쳐야 해요. 자신의 권위가서는 게 그 지점이에요. 가르친다는 행위에서 오는 피로가 얼굴에 가득 내려앉았던 그 강의시간 중 하나에서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은 우리 엄마가 사랑한다는 말을 절대 할 수 없을 거라는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 P157

그때 이런 일이 있었다. 내 침대가 세워진 곳에서 복도 건너편 병실이바라보였는데, 조금 열린 문에 그 끔찍한 노란 스티커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칼의 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고, 내 느낌에 그는 내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죽어간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졌고, 그렇게 죽어가는 건 끔찍한 죽음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죽는 게 두려웠지만, 나는 그가 걸린 병에 걸리지 않았고, 그 사실은 그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그 병에 걸린 환자였다면 병원에서 나를 그렇게 오래 복도에 방치해두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남자의 시선에서 내게 뭔가를 간절히 부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시선을 돌려서 그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려했지만 내가 힐끔 쳐다볼 때마다 그는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가끔 침대에 누워 있던 그 얼굴의 검은 눈동자를 생각한다. 내 기억에는 그 눈동자가 절망의 눈빛으로 뭔가 - P162

를 간청하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내게도 임종을 앞둔 사람들의 곁을 지킨 순간들이 있었고-나이가 들면 자연스러운 일이다-나는 육신의 최후의 빛이 꺼져갈 때 눈동자가 불붙듯 타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그 남자가 그날 내게 도움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말했다.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을 거야. 나는 그가 죽음이, 엄마가 나를 떠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절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 P163

그는 우리가 이렇게 같이 있는 게 참 좋아 보인다는 그 비슷한 말을 했고, 이유는 몰랐지만 나는 그 말이 내 머릿속에서팅 소리를 내며 튕겨나가는 느낌이 들었던 게 기억난다. 어느 누구도 시간이 더 지나기 전까지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남편이 그날 말고도 나를 보러 왔었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내가 기억하는 건 그날이라 내가 쓰는 것도 그날에 대해서다. 이건 내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야기는 할 수가 없다.
우리를 지나쳤던 숱한지와풀밭과 신선한 공기와 눅눅한 공기. 나는 그런 순간들을 쥐고 있을 수도 없지만 다른 사람들 보라고 펼쳐 보일 수도 없다. 하지만 이 말은 할 수 있다. 엄마가 옳았다. 내 결혼에 문제가 생겼다. 내 딸들이 각각 열아홉,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아이들의 아버지를 떠났고, 우리는 둘 다 재혼했다. 우리가 결혼해서 같이 살 때보다 내가 그를 더 사랑한다. - P171

어쩌나, 제러미 얘길 들었군요. 그녀는 그것이 남자들에게 일어나는 아주 나쁘고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도요, 하고 덧붙였다. 그녀는 내가 우는 동안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본 그 남자에 대해 자주ㅡ정말로 자주ㅡ생각한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간 그날, 내가 누운 침대가 그 남자의 병실 밖 복도에 세워져 있던 그날, 문에 노란 스티커가 붙은 병실에 누워 있던 그 남자. 그가 애원하듯, 절망의 눈빛으로, 갈망하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던 것을. 내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하면서. 그 남자가 제러미였을 수도 있었다. 나는 여러 번 생각했다. 찾아볼 거라고. 공식 기록 어딘가에 틀림없이 남아 있을거라고, 그가 죽은 날짜와 죽은 장소가. 하지만 정말로 찾아본적은 없었다. - P178

세라 페인이 신의 마음처럼 활짝 열린 마음으로 빈 종이와 마주하는 것에 대해 말한 건 아마 그다음날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내 첫 책이 출판된 뒤에 나는 어느 의사를 찾아갔는데, 그녀는 내가 만나본 의사 중에서 가장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나는 종이에 그때 그 수강생이 뉴햄프셔 출신의 재니 탬플턴이라는 사람에 대해 말했던 것을 썼다.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에서 일어났던 일을 썼다. 내 결혼생활에서 알게 된 것을 썼다. 내가 말로는 할 수 없었던 것을 썼다. 그녀는 그걸 전부 읽은뒤 말했다. 고마워요, 루시. 괜찮을 거예요. - P187

내 책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나는 갑자기 돌아다닐 일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말했다. 얼마나 굉장한 일이에요-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진 거잖아요! 나는 전국방송 아침 뉴스에도 나왔다.
내 홍보 담당자가 말했다.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해요. 당신은 출근하려고 옷을 차려입어야 하는 여자들이 되고 싶어하는 그런사람이니 그 프로그램에 나가면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해요. 나는 그 홍보 담당자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그녀에게는 권위가 있었다. 그 뉴스는 뉴욕에서 촬영했고, 나는 사람들이 내가그럴 거라고 예상했던 것만큼 겁을 먹지 않았다. 두려움이란 건참 재미있는 것이다. 나는 옷깃에 마이크를 달고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노란 택시가 보였고, 그래서 생각했다. 나는지금 뉴욕에 있어, 나는 뉴욕을 사랑해, 여긴 내 집이야. 하지만나는 다른 도시들에도 가야 했는데, 그때는 거의 항상 겁을 먹었다. 호텔방은 외로운 장소다. 오, 제길, 거긴 외로운 장소다. - P195

남편과 헤어지고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나는 72번가를 걸어 이스트 강까지 산책을 하러 다녔다. 그 길을 따라가면 이스트 강이 바로 나오는데, 나는 거기서 그 강을 바라보며 오래전에 우리가 함께 구경하러 간 야구 경기를 떠올렸고, 내 결혼생활의 다른기억들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종류의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그런 행복한 기억들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하지만 양키스 경기에 대한 기억은 그렇지 않았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전남편과 뉴욕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부푼다. 나는 지금도 양키스의 팬이지만, 내가 야구장에 다시 갈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삶이었다. - P203

나는 작가가 되려면 냉혹해야 한다는 제러미의 말에 대해 생각한다. 또한 내가 늘 글을 쓰고 있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며오빠나 언니, 부모님을 만나러 가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하지만 가고 싶지 않아 안 간 것이기도 했다.) 시간은 늘충분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내가 결혼생활에 안주하면 또다른책,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책은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일리노이 주 앰개시에는 가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하지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 - P204

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 라고. 이것이 그 냉혹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엄마는 그날 병원에서 내가 오빠나 언니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지금 네 인생을 봐. 너는 묵묵히 네 길을 가서………… 원하는걸 이뤘잖아." 그 말은 아마 내가 이미 냉혹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 말은 아마 진심이었겠지만, 엄마가 진짜 무슨 뜻으로한 말인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 P205

아무도 너희를 돌봐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내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어!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하지 않는다. 해서도 안 된다. 내가 아이들의 아버지를 떠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당시에는 남편만 떠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아이들을 떠난 것이기도 했고, 집을 떠난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내 것이 되었다. 혹은 남편이 아닌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되었다. 나는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사람이었고, 움직였다. - P211

그 시절에 내 딸들이 느꼈을 분노란! 잊으려고 애쓰는 순간도있지만,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이 결코 잊지 못할그것이 무엇인지가 걱정된다. - P212

그 시절에 마음이 더 여린 딸 베카가 내게 말했다. "엄마, 엄마가 소설을 쓸 때는 그 내용을 다시 쓸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와이십 년을 살았다면, 그리고 그것도 소설이라면, 그 소설은 다른사람과 절대 다시 쓸 수 없어요!"
그애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는? 그토록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애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베카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그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네 말이 맞아." - P213

또 가끔 생각하는 건, 내가 세라 페인을 옷가게에서 만났을 때그녀가 자기 이름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그녀가 아직 뉴욕에 사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뒤로 그녀는 새 책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몹시지쳐가던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야기는 하나뿐이라던 그녀의 말을 생각하지만, 나는 아직 그녀의 이야기가무엇이었는지 혹은 무엇인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가쓴 책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녀가 뭔가를 피해 비켜서 있다는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 P215

나는 요즘 혼자 집에 있을 때,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조용히소리 내어 말해본다. "엄마!" 그게 뭔지 나는 모른다 내가 내엄마를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날 두번째 비행기가 두번째 빌딩을 들이받는 것을 본 베카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인지. 내 생각엔 둘 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내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이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몰라의 이야기이자 내 대학 룸메이트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프리티 나이슬리 걸즈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엄마. 엄마!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이름은 루시 바턴이다. - P216

얼마 전에 크리시가 내 지금의 남편에 대해 말했다. "아저씨가좋아요, 엄마. 하지만 아저씨가 잠을 자다 죽고 새엄마도 죽어서엄마와 아빠가 다시 합치면 좋겠어요." 나는 아이의 정수리에 키스한 뒤 생각했다. 내가 내 아이에게 이런 짓을 했구나.
내가 내 아이들이 느끼는 상처를 아느냐고? 나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우리가 아이였을 때 품게 되는 아픔에 대해, 그 아픔이 우리를평생 따라다니며 너무 커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그런 갈망을남겨놓는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꼭 끌어안는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끌어안는다.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 P217

요즘 나는 가을에 우리의 작은 집을 둘러싼 농장에서 해가 지던 장면을 이따금 떠올린다. 어디를 봐도 지평선이 보여, 내가한 바퀴 빙 돌면 지평선도 한 바퀴 원을 그렸다. 해는 등뒤에서지고, 눈앞에 펼쳐진 하늘은 그 아름다운 변신을 멈출 수 없다는듯 은은한 분홍빛을 자아내다 슬며시 푸른 기운을 띤다. 이윽고지는 해에 가장 가까운 땅이 한 줄 오렌지색 선을 그리는 지평선을 배경으로 어두워지다 거의 컴컴해진다. 하지만 돌아서면 땅은 여전히 부드러운 형체를 희미하게 드러내며 몇 그루 나무와,
흙을 갈아엎고 간작 식물을 심은 고요한 들판을 보여주고, 하늘 - P218

은 머뭇거리다, 머뭇거리다 마침내 완전히 어두워진다. 그런 순간에는 영혼도 조용히 지켜볼 것만 같다.
모든 생은 내게 감동을 준다. - P219

기억의 자리들, 공백의 자리들

옮긴이의 말


기억은 자유의지를 가졌다. 순서를 바꾸고 덧칠을 한다. 가끔견딜 수 없는 것은 망각 속으로 보내버린다. 일부러인 듯 흐릿하게 만들어버려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의 상황을 놓고도 나와 당신의 기억은 다르다. 완성하지 않고 결론 내지 않아 영원히미완의 미결의 상태로 남겨버린다.
기억은 고집스럽다. 사건 자체는 희미해져도, 그 사건들이 남긴 감정은 고집스럽다. 예컨대 어머니가 실제로 내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는지 해주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나를 줄곧 붙들고 있는 감정은 ‘어머니가 한 번도 키스해주지 않은 것‘에서 비롯한그 결핍의 감정이다.
기억은 성장한다. 기억은 시간의 세례를 거친 나의 눈으로 시 - P223

간의 변화를 겪은 당사자들을 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그때 그런 것은 아, 그래서 그랬겠구나. 하지만 그 성장은 거의 혼자 크는 성장이라, ‘그랬겠다는 것은 나의 관점이지 우리의, 혹은 그들의 관점은 아니다.
그래서 기억은 매혹적이면서도 참 이기적이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그러저러한 이유로 ‘기억‘이라는 단어에 천착하는 편이고 ‘기억‘에 바탕을 둔 문학작품이나 영화들에 늘 끌렸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번역을 맡으면서 더 마음이 갔던 것도 이 소설이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꽤 지난 일이 되었지만, 내가 구 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 P224

첫 문장부터 이 이야기는 ‘기억‘의 조각들을 모은 것임을 선언한다. 이어지는 닷새 동안 어머니와 딸의 대화는 그 기억에서도 더 지난 과거의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하긴 우리의 현재는 찰나의 순간에 과거가 되어버리니 우리의삶은 기억 안에 기억, 그 기억 안에 또다른 기억, 그 또다른 기억안에 또다른 기억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기억, 그런불확실한 과거는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짓기 어려운 우리의 시간 안에 도사린 채 우리를 끊임없이 흔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이 다섯번째 소설은 전작들과는 달 - P224

리 일인칭 시점의 글이다. 문학작품들을 읽다보면 어떤 작가들은 삼인칭으로 출발한 뒤에야 일인칭으로 옮겨갈 수 있게 되는것 같고, 어떤 작가들(예컨대 무라카미 하루키)은 일인칭으로 출발한 뒤에야 삼인칭으로 옮겨갈 수 있게 되는 것 같은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삼인칭 시점에서 출발한 작가다.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 작품을 쓸 때 자기 마음을 "너는 지금일인칭으로 쓰고 있어. 그것도 작가로 만들어서"라고 표현했다.
‘기억‘을 가장 섬세하고 유려하게 다루는 방법, 기억에 의한 우리의 흔들림을 가장 잘 담아내는 방법은 어쩌면 일인칭 시점, 그리고 작가가 주인공일 때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 P225

그 기억의 파편들을 모으면 뭐가 될까.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크다‘는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기억의 합이 기억 그자체보다 얼마나 더 큰 것이 될 수 있는지를 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삶이 되고, 한세대, 여러 세대의 삶이 되고, 한 사회의 역사가 된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그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수증기를 모은 듯 마르지 않았으면서 흠뻑 젖지도 않은, 감정이 부각되지 않아 더더욱 아련한 느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 짧은 분량의 소설에서 다루는 이야기 전체는 그 기억들뿐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이 개입되는 공백의 자리들을 포함하여, 그리고그 각각을 잇는 선들을 아울러서 참으로 큰 것이 된다. 덧붙이면 - P225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려내는 선들이 굉장히 섬세해서 언뜻 개인적인 이야기로 읽히기 쉽지만, 그 섬세한 선들에는 역사와 변화하는 사회와 그 사회 속에서의 관계들이 무수히 잇닿아있어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보게 되는 풍경 역시 무한히 넓어진다.
이 작품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려낸 선들 중 그 출발점이자 가장 자세히 들춰지는 관계는 엄마와 딸의 관계인 것같다. 하지만 그야말로 출발점이지 전체는 아니다. 루시 바턴의 선은 아버지에게도, 거의 연락을 끊고 지냈지만 마지막 순간에 오히려 조금은 더 가까워진 오빠와 언니에게도 닿아 있다.  - P226

그렇게 한 가족의 이야기가 된다. 입원한 딸에게 안부를 전했을지조차 알 수 없는, 자신의 불안함을 끊임없이 가족들에게 풀어냈을 것으로 짐작되는 독자들이 그 마지막 임종의 순간까지 지켜보게 되는 아버지의 비중이 지면상으로는 그리 크지 않지만 더없이 무겁다. 어려서나 나이들어서나 결코 가깝다 말할 수 없는언니와 오빠의 무게 또한 마찬가지로 무겁다. 루시 바턴은 그들의 존재, 그들과 함께 보낸 과거의 시간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다섯 식구가 정말로 건강하지 않은 가족으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우리의 뿌리가 서로의 가슴을 얼마나 끈질기게 칭칭 감고 있는지 알 - P226

게 되었다. 남편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가족들을 좋아하지도않았잖아.‘ 그뒤로 나는 더더욱 두려워졌다."
한편 작가로 성공한 루시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뉴욕을 사랑해, 여긴 내 집이야. 하지만 나는 다른 도시들에도 가야 했는데, 그때는 거의 항상 겁을 먹었다. 호텔방은 외로운 장소다. 오,
제길, 거긴 외로운 장소다." 그러니 가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절대적으로 부담스러운 것이다. 절대적으로 떠나고 싶은 것이지만, 절대적으로 그리운 것이다. 루시 바턴은 책과 숙제를통해 이뤄낸 성과들을 통해) 떠날 수 있었기에 떠났지만, 떠남은달아남이 되기도 버려짐이 되기도 한다. - P227

이런 양가적인 상태. 그런 상태가 만들어내는 양가의 감정들.
떠나 있지만 떠나 있지 않은 상태(루시는 가족을 머리 위에 떠있는 구조물로 느꼈다. 속마음을 솔직히 말할 수도 말하지 않을수도 없는 상태("엄마, 내가 단편 두 편을 발표했어요‘에 이어지는 모녀의 대화). 내 욕구를, 내 감정을 드러낼 수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입원한 엄마에게서 이제 그만 돌아가달라는부탁을 받았을 때 보인 루시의 반응). 물어보지 않아 서운해하면서도 물어보지 않은 것을 친절하게 느끼는 상태(이건 때로 나조정말 그렇지 않은가. 개방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밖에 없는상태(모든 자기 노출의 글 이면에는 이런 마음이 있지 않을까). - P227

심지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이런지 저런지 잘 모르는 상태("엄마!"는 나의 외침이었을까 딸의 외침이었을까. 이런 마음의 상태들은 없어지지 않고 우리의 기억이 된다. 그리고 그런 기억의방문을 받을 때 우리는, 이를테면 옷가게에 들어가 옷을 입어보고 낯선 사람에게 말을 붙인다.
한편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보며 그에 대한 어떤 평가 혹은 판단을 내리는 것, 그것도 결국은 미완의 것, 미결의 과제라고 볼수 있다. 영원한 미완, 미결의 기억들. 제러미에 대해 우리는 루시의 세 가지 기억을 바탕으로 추리할 수 있을 뿐이며, 루시와어머니는 그런 잡지를 읽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고,  - P228

세라 페인(아마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은 "다른 사람을 완전히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절대 알 수 없을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우리가누군가를 평가한다면, 더욱이 그것이 누군가를 얕잡아보는 평가라면, 단편적인 것들에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일이 될것인가. 이 소설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그것에 대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저속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외국의 서평들에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작품들을 ‘사회적 계급‘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글이 더러 있다.
기억이 미완의 것이고, 우리가 늘 양가적인 상태에 있고, 우리 - P228

삶이 늘 흔들린다 하더라도 내가 발 디딜 자리는 있다. "하지만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 이름은 루시바턴이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분명한 한가지일 것이다.
작가가 ‘내 이름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다‘라고 선언하는모습을 잠시 상상해본다(내 이름을 넣어 나도 한번 해보았는데,
생각만 했을 때와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은 그 울림의 파급력이 상당히 다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열여섯 살 때부터 문예지에 단편을 써 보내기 시작해 스물여섯 살에 첫 단편이 실렸고,
그 이후로 글쓰기를 중단한 적이 없다. 하지만 1956년생인 그녀가 1998년에야 어렵사리 데뷔 소설 『에이미와 이저벨』을 발표할수 있었으니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고 작품으로 자신을 단단히다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많이 걸린 셈이다.  - P229

그녀도 루시 바턴처럼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특히 소설책이 꽂혀 있는 서가 근처를 서성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여름에는 바깥에 나가 놀았지만 혼자 놀았던 적이 더 많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나도 글을 쓰겠다!" 작가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를 사람들을 돕기 위한 노력으로 생각했어요. (…) 누군가의 시야를 잠시조금이라도 더 열어주려고 애쓰는 것. 물론 ‘그건 어리석은 일이야 하고 생각할 때도 더러 있지만 이 일이 세상을 도우려는 다 - P229

른 노력보다 더 어리석은 것 같지는 않아요." 작가가 만들어내는등장인물들에는 어쨌거나 작가 자신의 조각들이 조금씩 스며들게 마련인 것 같다. 어쩌면 작가가 된 루시 바턴에게도, 루시 바턴에게 ‘냉혹하라‘는 조언을 해주는 작가 세라 페인에게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조각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루시의 이야기가 이러했다면, 루시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기억으로 남았을까? 루시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앰개시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루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실제로 그들은 어떻게그 시간들을 보냈을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다음 책이 그에 관한 것이라고 하니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쉽게 마음에서떠나보내서는 안 될 것 같다. 기억처럼, 삶처럼, 모든 문학작품도 우리 안에 살아 있는 한 영원히 미완인지 모르겠다.

정연희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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