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에는 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풀이 길가 콘크리트의 틈을 뚫고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제한속도 75MPH*라고 되어 있는 표지판 옆을 지나갔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오렌지빛이감도는 붉은색의 잎이 달린 나무 꼭대기가 보였고, 더 달리자 나뭇잎은 노란색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줄지어 선 모든 나무들 사이 작은 선홍색 나무가 한 그루 보였다. 길가의 풀은 색깔이 좀바래 있었다. 풍부한 녹색이 빠지니 완연한 8월의 풍경처럼 보였다. 그곳을 지나자 키 큰 나무들이 서 있었다. - P138
그와 함께 차를 타고 달리면서 나는 어떤 익숙한 감각을 의식했는데, 그 감각은 전날 밤 공항이 너무 초현실적이라는 거의공항 같지 않다는 느낌과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내가 의식한 것은 이것이었다. 내가 겁을 먹었다는 것. 나무들은 점점 땅딸해졌고, 몸통이 굵은 소나무들이 줄지어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왼쪽으로 비쩍 마른 자작나무 들판이나타났다. 그걸 제외하면 탁 트인 넓은 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표지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차들도, 지나가는 한두 대 말고는 없었다. - P139
나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뉴욕은 내가 오래 살아온 곳이고, 익숙한 곳이다. 내 아파트, 내 친구들, 경비원, 정류장마다 한숨을 토하는 도시 버스들, 내 딸들…… 그 모든 것이 익숙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있는 곳은 익숙하지 않았고, 그래서 무서웠다. 나는 그게 몹시 무서웠다. 하지만 윌리엄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는데, 겁이 난다고말할 만큼 내가 그를 충분히 잘 아는 건 아니라고 문득 느꼈기때문이다. - P140
이들은 나와 같은 족속이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어느 집단에 소속감을 가져본 적이 결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순간 여기 메인주 시골에 있었고, 방금 내게 일어난 일은 그 집들, 우리가 지나쳐 간 몇 채의 집과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이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같다-이해였다. 그건 이상한 감정이지만 진짜였고, 잠시 나는 이렇게 느꼈다. 내가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겠다고. 그리고 심지어, 그 몇 채의 집에실제로 살고 있고 집 앞에 트럭을 세워놓은 그 사람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사랑한다고. 거의 그렇게 느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 P149
나는 잔해만 남은 콘크리트를 보았고, 녹색 잎이 콘크리트를뒤덮으며 자라고 있었다. 그 자리에 햇빛이 비쳐 녹색 잎이 반짝거리는데,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뭔가가 덜컹했고, 나는 랠프가말하는 모든 것이 내가 그의 입에서 나오리라 이미 예상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어떤 단어가 그의 입을 통해나오기 직전에 그게 어떤 단어일지 내가 알았다는 뜻이다. 중요한 말은 아니었고, 그저 그곳이 어떻게 지어졌고 단열재로는 무엇을 사용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다만 내 머릿속에서 랠프가얘기하는 내용을 정확히 미리 말해준 것은 어떤 여인의 목소리였다. 정말로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데자뷰인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데자뷰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고, 아주 기이한 순간이었다. 혹은 일련의 순간들. - P158
내가 자란 곳에서도 사방에 하늘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하늘에는 해가 찬란했지만, 또한 군데군데 퀼트처럼 아주 낮게 구름이 드리워 있었고, 해는 구름 안을들락거리며 녹색 목초지에 환한 빛을 쏟아냈다. 그리고 우리는드넓은 해바라기 들판을 지나갔다. 우리는 또한 토양에 영양분을 주려고 간작으로 클로버를 심은 들판도 지나갔는데, 내 어린시절 경험으로는 봄이 되면 그것을 갈아엎을 터였다. 거의 익숙하다고 할 수 있는 그 풍경을 보고 작은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 그날 아침의 고립감이 이런 감정으로 변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는 행복을 느꼈다. 그게 내가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나는 어린아이인 내가 트럭을 모는 아버지 옆에 타고가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 P163
나중에 내가 그를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윌리엄은 울었지만결코 내게 그런 식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워, 루시." 나는 기다렸지만, 그가 "제발 떠나지 마, 왜냐하면 당신은 루시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듣지 못했다. 윌리엄을 떠난 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한 적이 한 번있었다. 우리가 정말로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할까? 그러자 그가말했다. 당신이 우리 결혼에 뭔가 다른 요소를 가져올 수 없다면. 내가 가진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결혼에새롭게 가져올 다른 요소를 전혀 생각해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 P167
권위에 대해. 나는 작문을 가르칠 때 그 일을 오래 했다-권위에 대해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글을 쓸 때 권위를 가지는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헬름 게르하르트의 사진을 봤을 때 나는생각했다. 오, 권위가 느껴지는데, 나는 캐서린이 왜 그와 사랑에 빠졌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단지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의 외모가 풍기는 인상, 보이는 방식 때문이었다. 그는 명령에 따르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영혼까지 소유할 수는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리고 문밖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 P168
그리고 나는ㅡ천천히ㅡ이것을 깨달았다. 이 권위가 바로 내가 윌리엄을사랑하게 된 이유임을 우리는 권위를 갈망한다. 진실로 그렇다. 누가 뭐라고 말하건 우리는 권위라는 감각을 갈망한다. 혹은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힘든 일‘ㅡ나는 그걸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을 겪으면서도 윌리엄은 이 권위를 결코 잃지 않았다. 우리가 숲속에서 길을 잃은 헨젤과 그레텔이라고 느껴질 때조차 나는 늘 그의 - P168
존재 안에서 안전함을 느꼈다. 한 사람에 대해 이런 식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와 결혼한뒤에도, 심지어 우리가 ‘힘든 일‘을 경험하는 와중에도 나는 월리엄에 대해 여전히 그렇게 느꼈다. 그와 결혼하고 처음에, 그리고 (앞서 말했듯) 우리에게 곧바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을 때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내가 빙빙 돌며 헤엄치다가 이 바위에 부딪힌 물고기처럼 느껴져." - P169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문득 윌리엄과 함께 살던 시절에 결혼이라는 것이 내게 종종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생생히 떠올랐다. 방안 가득 익숙함이 짙어지고, 상대에 대해 알게 된 사실들로 목구멍이 거의 꽉 막혀 실제로 콧구멍까지 밀고 올라온 것같은 느낌상대의 생각이 내뿜는 냄새, 입 밖으로 나온 한마디한 마디에서 느껴지는 자의식,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가면서 약간 씰룩이는 모습. 거의 알아차릴 수 없게 살짝 기울어지는 턱, 상대 말고는 아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들, 그런 걸 느끼고 살면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친밀함은 그렇게 지긋지긋한 것이 되었다. - P177
캐서린은 밤에 내 딸들을 돌봐줄 사람을 고용했다. 내기억에 한 번의 예외ㅡ우리가 그녀의 병에 대해 알게 됐을 때,캐서린이 병에 대해 알리려고 뉴욕에 왔을 때, 그녀는 몸을 떨고있었고, 그렇게 떠는 모습을 보니 우리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를 ㅡ제외하면 그녀는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고,대부분의 시간 동안ㅡ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ㅡ우리는 어떤면에서, 그냥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 그때를 생각해보면 그녀가 곧 죽으리란 걸 내가 정말로 믿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캐서린도 정말로 그걸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치료를 받았고, 우리는 그것도 충실히 해나갔다. 치료가 끝나고 한 시간 뒤면 후유증이 나타나리란 걸 알아서, 우리는 치료가 끝나면 같이 식당으로 가서 머핀을 먹었는데, 캐서린이 머핀을 먹고 커피를 마셨던 모습이 기억난다. - P180
그리고 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윌리엄이 내가 집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딸들을 가사도우미에게 맡기고 다시 나왔던게 기억난다. 내 기억에 그는 별말 없이 다정하게, 정말로 다정하게 나를 대했다. 윌리엄은 집안에 들어와서 어머니의 방에 잠시 들어갔다 나오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누구도 면회는 안 돼." 그리고 나는 윌리엄이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쓰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의 부고를 쓰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 여인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윌리엄은 부고를 쓰고 있었고, 왠지 모르지만 그후로 내내나는 윌리엄의 그런 행동을존경했다. 앞서 말한 권위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겠다. - P184
나는 내 어둑한 호텔방 의자에 돌처럼 가만히 앉아 그 일을 생각했다. 크리시가 그만큼 아팠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고, 어떤면에서는 그게 내 잘못이었음을 처음으로 이해했던-마음속에서 조금도 축소하지 않고 완전히 이해했다는 말이다―것 같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 나였으니까. - P188
내가 아무리 마음속 깊이 그렇다고 느껴도 나는 투명인간이아니다. - P189
신기하게도, 그날 그 순간 뭔가가 분명해졌다ㅡ그리고 메인주의 어두워지는 호텔방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또 한번 분명해졌다. 내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가 그 한순간에 분명해졌다. 나는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다시는 잊지않았다. 하지만 윌리엄에게 또 그렇게 하고 말았다. 그가 내게 리처드백스터에 대해, 그의 연구에 대해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그 말을 곧장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의 지적이 절대적으로 옳 - P191
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방에 앉아 있었고, 가슴속에 아주 생생한 고통이-육체적인 통증을 느꼈다는 말이다-작은 파도가자꾸만 출렁이는 것처럼 존재했다. 날이 완전히 컴컴해졌을 때나는 천장등을 켜고 방으로 치즈버거를 갖다달라고 주문했다. - P192
윌리엄은 고단해 보였고, 손을 들어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반사적으로 콧수염을 쓸어내리고 일어서서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나를 떠나기로 선택했다고?" 윌리엄이 나를 돌아보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선택이라고, 루시? 사람이 살면서 정말로뭔가를 선택하는 일이 몇 번이나 될까? 말해봐. 당신이 정말 가족을 떠나기로 선택했어? 아니,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당신은.…… 당신은 그냥 떠났어. 그래야만 해서 그러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그런 불륜을 저지르기로 선택한 건가? 오, 알아. 안다고. 책임이라는 거―심리치료사를 찾아갔었어. 혹시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할까봐 말하는 건데, 조앤과 같이 찾아간 그 심리치료사를 계속 만났어. 한동안 혼자 찾아갔고, 그 사람이 책임에 대해 말하더군.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봤어, 루시. 그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고, 알고 싶어 정말로 알고 싶어-사람이 뭐든 실제로 선택하는 건 언제인가? 당신이 말해봐."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 P194
이제 내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러면 당신도 비열한 말을하겠다고 선택한 게 아닌 거네, 윌리엄."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가 대답했다. 내가 말했다. "나도 그건 알아!" 그리고 덧붙였다. "내 머릿속은 정말로 비열해서, 당신은 내가 얼마나 비열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믿지 못할걸." 윌리엄이 한 손을 들고 말했다. "루시, 누구든 머릿속은 다 비열해. 맙소사." "그래?" 내가 물었다. 그러자 윌리엄이 어정쩡하게 웃었는데, 그렇지만 기분좋은 웃음이었다. "그래, 루시, 다들 머릿속은 비열해. 혼자 하는 생각말이야. 그런 건 흔히 비열한 생각이야. 당신은 아는 줄 알았는데, 작가잖아. 오 맙소사, 루시." - P196
나는 결코 나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엄마다. 내가투명인간이라고 느끼지만, 나는 엄마다. 어린 시절 나의 어머니는 자살하겠다는 협박을 하곤 했다. 이렇게 말했다. "어디 먼 데로 차를 몰고 가서 나무를 찾아 목을 매달거다." 나는 어머니가 진짜로 그렇게 할까봐 잔뜩 겁을 먹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나는없을 거다." 나는 매일 겁에 질려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매일 그대로 있었다. 그뒤로 나는 수업이 끝난 후에 학교에 남기시작했는데, 매일 수업이 끝난 후 학교에 남았고 그렇게 하기 시작한 건 따뜻하게 있고 싶어서였고-우리집은 너무 추웠고, 나는 추운 게 늘 싫었다-거기 남아 숙제를 할 수 있는 게 안심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따금 어머니에 대해, 할 거면 해버려요! 하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자살할 거면 해버려요! 이런 뜻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정말로 그렇게 하면 그 작은 타운에서이미 이상할 대로 이상한 우리가 더욱 이상해 보일까봐 걱정이되었다. - P205
"그만하자." 내가 말했다. "중요하지 않아." 그 일은 더이상내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말을 할때 내 안에서 물이 찰랑이는 듯한 작은 감각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그가 조앤하고 결혼해서 살 때도 그랬고, 에스텔하고 결혼해서 살 때도 그랬다면, 그를 그렇게 만든 건 내가 아니었던 거네? 그러니까 나 때문이 아니었던 거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전날 밤 선택에 대해서 말한 것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그런 면에 대해 아마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것이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모른다. - P208
그러자 로이스가 슬픈, 거의 닫힌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그녀가 그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로이스가 말했다. "미안해요.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나는 이제 젊지 않아요. 당신과 이야기하는 건 충분히 즐거웠지만, 그를 만나보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알겠어요." 내가 말했다. 내가 떠나려는 동작을 하자 그녀가일어섰고, 그래서 나는 우리 대화가 끝난 것을 알았다. 그녀는 현관까지 나를 배웅해주었고, 문을 당겨 열었다. 문은자주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열릴 때 좀 뻑뻑했다. 그리고 나는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에 그 문을 통과해 들어와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을 캐서린을 상상했다. - P235
나는 로이스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손을 들어올려 아주 살짝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책을 읽었을 때 회고록말이에요-나는 거기 감자 농부, 내 아버지가 나온 걸 보고 깜짝놀랐어요! 그리고 계속 생각했죠. 내 이야기도 나오겠지, 그 농부의 아내가 아기인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도 나올거야. 하지만 전혀 나오지 않았어요." "첫 남편을 떠난 건 알았지만 남기고 온 다른 존재에 대해선몰랐으니까요." 내가 말했다. "음, 이제는 알겠어요. 하지만 그때는 몰랐어요. 그리고 그거 - P235
알아요? 바보 같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어요. 캐서린을 향해 다시 분노가 일었죠. 그리고 당신에게도 화가났어요- 내가 그 책에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오, 로이스." 나는 묘한 비현실감을 느꼈고, 머리가 제대로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뭔가를 먹어야 할 때처럼. 다만 그보다 더 심하게. "음." 그녀가 작게 웃었다. "이걸로 책을 쓴다면, 나도 등장하고 싶어요." "오, 그럼요, 물론이죠." 내가 말했다. 그러자 로이스는 다시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를 좋게 그려준다는 조건으로요." 돌아보는데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고, 그 순간나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피곤한 표정을 보면서 우리 대화가그녀에게 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었고, 나는 미안했다. - P236
로이스의 말처럼 여기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기차역으로 들어갔고 다른 차는한 대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도 누구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거기 앉아 캐서린이 눈 내리는 11월 저녁에 기차역을 향해 반쯤 뛰고 반쯤 걸었을 그 길을 바라보았다. 기차역은 작고 물막이 판자로 지은 것이었다. 기차역이라기보단 정거장이었다. 오, 나는 젊은 날의 캐서린이 바람 부는 11월의 어두운 거리를반쯤 뛰고 반쯤 걷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는데, 부츠도 신지않고 땅에는 그저 그녀의 신발과 눈뿐, 들키지 않으려고 진짜 코트도 걸치지 않은 채 짙은 색 옷을 입고, 스카프로 머리를 꼭대기까지 덮어 가리고서, 반쯤 뛰고 반쯤 걸어 기차역에 도착해 기다리는 모습을, 아주 겁먹은, 아주 많이 겁먹은ㅡ어쩌면 아버지손에 오랫동안 학대를 당해서 늘 겁을 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P240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얼마간 알고 있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다. 입학처의 그 남자는 내가 자기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걸, 타이거라는 단어를 듣고 무언가 다른 단어로 그를 불러줄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그 컵 홀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서 다시 연락이 오지않았지만 슬프진 않았고, 무엇보다 애초에 그가 나를 좋아했던게 늘 신기했다. 하지만 다시 말하면, 내 요점은 이것이다! 윌리엄이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어떤 점과 내가 윌리엄에 대해 알고있는 어떤 점이 우리를 결혼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것. - P243
"그리고 나는 여전히 당신이 어떻게 그걸 해냈는지 모르겠어. 당신은 독특한 사람이야, 루시, 당신은 특별한 영혼이야. 그날 막사에 갔을 때 당신이 두 개의 우주인지 어딘지 사이를 오갔다고 했던 거, 나는 믿어, 루시, 당신은 특별한 영혼이니까.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은 결코 있었던 적이 없어." 잠시 뒤그가 덧붙였다. "당신은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 루시" 윌리엄은 다시 차를 몰고 도로로 나갔다. 나는 그의 말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그 옛날 내시 선생님의 차에 탔을 때도 이런 행복감이 단번에 나를 휘감았었다는 생각이들었다. "오 필리." 나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 P249
나는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ㅡ그리고 그 남자가 어떤 기분인지 알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모른다.)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투명인간이라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게어떤 기분인지 알기 때문이다. 다만 내 경우에는 사람들이 겉모습을 보고는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만 달랐다. 하지만 나는 그 뚱뚱한 남자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에대해.
공항 창가에서 나는 아주 넓은 주차장을 돌고 있는 윌리엄을보았다. 그는 내 시야에서 거의 벗어날 만큼 한쪽 끝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서서 반대쪽으로 걸었다. 나는 계속 지켜보았고그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서서 고개를 자꾸 내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 윌리엄, 나는 생각했다. 오 윌리엄! - P254
내가 얼마나 끔찍한 행동을 했던가. 지금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남편에게 나를 위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오, 그건 말할 수 없이 끔찍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삶이 흘러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너무 늦을때까지 모른다는 것. - P257
나는 로이스 부바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가 건강해 보였다는생각을 했다. 앞서 말했듯, 그녀가 편안한 방식으로 자기 세계안에 있는 것 같았다는 뜻이다. 그녀의 집에는 가족사진이 많았고, 그곳은 원래 그녀의 어머니 집이었다. 나는 그녀가 어머니가자란 집에서 살고 할머니의 장미 관목을 돌본다는 사실에 속으로 조용히 놀랐다. 하지만 그게 왜 나를 놀라게 하는 걸까? 그건그녀가 가지고 있는 집에 대한 느낌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그집에 대한 느낌은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사랑했다고, 로이스는 계속 말했다. 물론 그 어머니란매릴린 스미스, 그녀의 아버지와 결혼한 그 여인을 말한 것이다. - P272
하지만 로이스 부바가 생의 첫해를 방치된 채 보낸 것 같지는 않았다. 캐서린은 분명 그녀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녀를 안고 보듬어주었을 것이고, 처음 열이 났을 때 걱정했을 것이고, 그녀가아기 침대에서 처음으로 몸을 일으켜 일어선 것을 보고 속으로조용히 전율했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 생각이계속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어머니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불한 대가를 알고, 그게 오빠와 언니가 지불한 대가에는거의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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