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내 침대 발치에 앉은 지 사흘째가 되던 날, 나는 엄마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엄마가 가지않기를 바랐지만, 엄마는 간이침대를 가져다주겠다는 간호사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고, 나는 엄마가 곧 떠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종종 그러듯 나는 미리부터 그 순간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내 기억에 미리부터 두려움을 느낀 첫번째 사건은 어린 시절 치과에 갔던 일과 관련이 있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치과 치료를 거의 받지 못했고, 우리의 치아는 유전적으로
‘충치가 잘 생기는 이‘로 여겨져, 당연하게도 치과에 가는 것은두려움 가득한 일이 되었다. 치과의사는 무료로 치료해주었지만 시간이나 태도 면에서 다 인색했고 우리라는 존재자체를 싫 - P89

어하는 것 같아서, 나는 치과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는 그 순간부터 내내 걱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내가 치과에 자주 간 건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일찌감치 이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을 두배로 겪는 건 시간 낭비라는 것.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오로지, 마음은 원해도 의지로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 P90

나는 애써 울음을 참느라 한동안 간호사실 쪽에 있는 의자에앉아 있어야 했다. 치통이 옆에서 나를 감싸안아주었고, 그렇게해준 그녀를 나는 지금도 사랑한다. 가끔 나는 테네시 윌리엄스가 블랑시 뒤부아의 이런 대사를 썼다는 사실에 슬퍼진다. "나는늘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하며 살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낯선 사람들의 친절을 통해 여러 번 구원을 받지만, 시간이 지나면그것도 범퍼스티커처럼 진부해진다. 나는 그 사실이 슬프다. 아름답고 진실한 표현도 너무 자주 쓰면 범퍼스티커처럼 피상적으로 들린다는 사실이. - P98

나는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은 지치게 마련이라는 것을. 마음, 영혼, 혹은 몸이 아닌 뭔가에 우리가 어떤 다른 이름을 붙이건 그것은 지치게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것이야말로 대체로, 일반적으로ㅡ자연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내생각에 잘은 모르지만 그 또한 지쳐가고 있었다. - P100

뉴욕의 피프스 애비뉴에는 많은 계단과 함께 큼직하게 자리잡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있고, 그 1층에는 조각공원이라고 부르는 공간이 있는데, 나는 이곳에 설치된 이 특별한 조각상을 남편과 함께, 그리고 아이들이 커가면서는 아이들과 함께 숱하게지나쳤을 것이다. 나는 오로지 아이들에게 뭘 먹지만 생각했고, 볼거리가 이렇게 많은 이런 성격의 미술관에서 다른 사람은뭘 하는지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조각상을 본 것은 한창 이런 필요와 걱정에 빠져 지내던 동안이었다. 그러니 내가 걸음을 멈추고 그 조각상을 쳐다보며 오, 하는 소리를 내뱉은 것은 최근-지난 몇 년 동안-그조각상에 찬란한 빛의 조명이 쏟아졌을 때였다. - P102

그 조각상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한 남자 주변에 그의아이들이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절박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이들은 그의 발치에서 그를 붙잡고 애원하는 것 같았고, 그는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양옆으로 잡아당기며 고뇌의 표정을 지은 채 세상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아이들은 그만 쳐다보고있었다. 드디어 이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 순간 나는 오, 하고 속으로 외쳤다.
설명을 읽으니, 그는 감옥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고, 아이들은아버지에게 자기들을 먹어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아버지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뿐이었다. 아이들은 그에게ㅡ오, 행복하게, 행복하게 자기들을 먹으라고 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도 알고 있겠구나, 하고.
그 조각가 말이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조각상이 표현한 것을 글로 쓴 그 시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 P103

불쌍한 인간.
그 말은 나중에야, 안내원이 그 조각상이 위층에 있다고 말해주었을 때 내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보았을 때에야 떠올랐다. 불쌍한 인간.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작게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불쌍한 인간-그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맴돌았다ㅡ우린 모두 불쌍한 인간이다. - P104

앞에서도 한 말이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보다스스로를 더 우월하게 느끼기 위해 어떤방법을 찾아내는지가내게는 흥미롭다. 그런 일은 어디에서나 언제나 일어난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건, 나는 그것이 내리누를 다른 누군가를 찾아야하는 이런 필요성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저속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P111

우리는 언덕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건물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날씨는 따뜻했고 창문은 열려 있었다. 세라 페인은 거의 시작하자마자 바로 지치는 것 같았다. 피로한 기색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그녀의 얼굴은 공기가 충분히 차갑지 않아 모양이 망가진 흰색 점토처럼 허물어져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피로 때문에 이상한 모양으로 일그러졌고, 세 시간이 다 끝나갈 즈음에는 더욱 심해져 하얀 점토 얼굴은 거의 파르르 떨리는 듯 보였다. 그 강의가 그녀의 진을 완전히 빼놓은것 같았다는 게, 내가 하려는 이야기다. 그녀의 얼굴이 피로로유린되었다. 날마다 그녀는 조금 반짝거리는 얼굴로 수업을 시작했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피로가 그녀를 엄습했다. 나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피곤한 기색이 그토록 역력히 드러난 얼굴은본 적이 없는 것 같다. - P121

그리고 그런 순간이 내가 또 한번 그때는 왜 엄마한테 말하지못했지? 하고 생각하게 이걸 기록하면서 되는 순간이다. 엄마. 내가 배워야 할 단어는 우리가 집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거지 같은 차고에서 다 배웠어요. 왜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던 걸까? 그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 그게 내가 평생 해왔던방식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가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한채 스스로 망신거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실수를 덮어주는 것.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 생각에, 많은 순간에 그런 사람이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도 나 스스로 망신거리가되었음이 희미하게 인식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어린 시절의 그느낌이 되살아난다. 다른 것으로는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이 세상에 대한 앎을 구성하는 엄청나게 큰 조각들이 빠져 있는 느낌.
하지만 어쨌거나ㅡ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주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내게 그렇게 해준다고 느낄 때에도 그렇게 한다. 그러니 그날 엄마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일어나 앉아, 엄마, 정말 기억 안 나요? 하고 말하지 않았을까? - P129

고양이 때문에 깜짝 놀란 세라 페인에게 비열한 말을한 그 여자 같은 몰인정한 사람들 말고. 그들의 대답은 사려 깊고, 거의 항상 똑같았다. 당신의 어머니가 어떤 기억을 가지고있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나는 이런 전문가들이 좋다. 그들은예의를 아는 사람들이고, 나도 이제는 진실한 말을 들으면 그렇다는 것을 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엄마가 어떤 기억을 지니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도 엄마가 어떤 기억을 지니고 있었는지 모른다. - P130

세라 페인이 우리에게 평가 없이 빈 종이와 마주하라고 말했던 그날, 그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절대 알 수 없을 것임을 단순한 생각같지만,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녀가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것을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생각한다. 늘 생각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얕보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 자신을 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를. 그날 밤 방금 서술한 내용보다 이 부분이 더 잘 기억난다-어둠속에서 아빠가 오빠 옆에 누워 오빠를 아기 안듯 안아주었다고,
오빠를 무릎에 올리고 가만가만 흔들어주었다고 나는 말하려 한 - P138

다. 나는 어느 눈물이 누구의 것이고 어느 중얼거림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 P139

세라 페인이 말했다. 자신의 글에 약점이 보이면 독자가 알아내기 전에 정면으로 맞서서 결연히 고쳐야 해요. 자신의 권위가서는 게 그 지점이에요. 가르친다는 행위에서 오는 피로가 얼굴에 가득 내려앉았던 그 강의시간 중 하나에서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은 우리 엄마가 사랑한다는 말을 절대 할 수 없을 거라는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 P157

그때 이런 일이 있었다. 내 침대가 세워진 곳에서 복도 건너편 병실이바라보였는데, 조금 열린 문에 그 끔찍한 노란 스티커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칼의 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고, 내 느낌에 그는 내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죽어간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졌고, 그렇게 죽어가는 건 끔찍한 죽음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죽는 게 두려웠지만, 나는 그가 걸린 병에 걸리지 않았고, 그 사실은 그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그 병에 걸린 환자였다면 병원에서 나를 그렇게 오래 복도에 방치해두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남자의 시선에서 내게 뭔가를 간절히 부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시선을 돌려서 그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려했지만 내가 힐끔 쳐다볼 때마다 그는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가끔 침대에 누워 있던 그 얼굴의 검은 눈동자를 생각한다. 내 기억에는 그 눈동자가 절망의 눈빛으로 뭔가 - P162

를 간청하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내게도 임종을 앞둔 사람들의 곁을 지킨 순간들이 있었고-나이가 들면 자연스러운 일이다-나는 육신의 최후의 빛이 꺼져갈 때 눈동자가 불붙듯 타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그 남자가 그날 내게 도움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말했다.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을 거야. 나는 그가 죽음이, 엄마가 나를 떠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절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 P163

그는 우리가 이렇게 같이 있는 게 참 좋아 보인다는 그 비슷한 말을 했고, 이유는 몰랐지만 나는 그 말이 내 머릿속에서팅 소리를 내며 튕겨나가는 느낌이 들었던 게 기억난다. 어느 누구도 시간이 더 지나기 전까지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남편이 그날 말고도 나를 보러 왔었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내가 기억하는 건 그날이라 내가 쓰는 것도 그날에 대해서다. 이건 내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야기는 할 수가 없다.
우리를 지나쳤던 숱한지와풀밭과 신선한 공기와 눅눅한 공기. 나는 그런 순간들을 쥐고 있을 수도 없지만 다른 사람들 보라고 펼쳐 보일 수도 없다. 하지만 이 말은 할 수 있다. 엄마가 옳았다. 내 결혼에 문제가 생겼다. 내 딸들이 각각 열아홉,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아이들의 아버지를 떠났고, 우리는 둘 다 재혼했다. 우리가 결혼해서 같이 살 때보다 내가 그를 더 사랑한다. - P171

어쩌나, 제러미 얘길 들었군요. 그녀는 그것이 남자들에게 일어나는 아주 나쁘고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도요, 하고 덧붙였다. 그녀는 내가 우는 동안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본 그 남자에 대해 자주ㅡ정말로 자주ㅡ생각한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간 그날, 내가 누운 침대가 그 남자의 병실 밖 복도에 세워져 있던 그날, 문에 노란 스티커가 붙은 병실에 누워 있던 그 남자. 그가 애원하듯, 절망의 눈빛으로, 갈망하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던 것을. 내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하면서. 그 남자가 제러미였을 수도 있었다. 나는 여러 번 생각했다. 찾아볼 거라고. 공식 기록 어딘가에 틀림없이 남아 있을거라고, 그가 죽은 날짜와 죽은 장소가. 하지만 정말로 찾아본적은 없었다. - P178

세라 페인이 신의 마음처럼 활짝 열린 마음으로 빈 종이와 마주하는 것에 대해 말한 건 아마 그다음날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내 첫 책이 출판된 뒤에 나는 어느 의사를 찾아갔는데, 그녀는 내가 만나본 의사 중에서 가장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나는 종이에 그때 그 수강생이 뉴햄프셔 출신의 재니 탬플턴이라는 사람에 대해 말했던 것을 썼다.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에서 일어났던 일을 썼다. 내 결혼생활에서 알게 된 것을 썼다. 내가 말로는 할 수 없었던 것을 썼다. 그녀는 그걸 전부 읽은뒤 말했다. 고마워요, 루시. 괜찮을 거예요. - P187

내 책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나는 갑자기 돌아다닐 일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말했다. 얼마나 굉장한 일이에요-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진 거잖아요! 나는 전국방송 아침 뉴스에도 나왔다.
내 홍보 담당자가 말했다.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해요. 당신은 출근하려고 옷을 차려입어야 하는 여자들이 되고 싶어하는 그런사람이니 그 프로그램에 나가면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해요. 나는 그 홍보 담당자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그녀에게는 권위가 있었다. 그 뉴스는 뉴욕에서 촬영했고, 나는 사람들이 내가그럴 거라고 예상했던 것만큼 겁을 먹지 않았다. 두려움이란 건참 재미있는 것이다. 나는 옷깃에 마이크를 달고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노란 택시가 보였고, 그래서 생각했다. 나는지금 뉴욕에 있어, 나는 뉴욕을 사랑해, 여긴 내 집이야. 하지만나는 다른 도시들에도 가야 했는데, 그때는 거의 항상 겁을 먹었다. 호텔방은 외로운 장소다. 오, 제길, 거긴 외로운 장소다. - P195

남편과 헤어지고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나는 72번가를 걸어 이스트 강까지 산책을 하러 다녔다. 그 길을 따라가면 이스트 강이 바로 나오는데, 나는 거기서 그 강을 바라보며 오래전에 우리가 함께 구경하러 간 야구 경기를 떠올렸고, 내 결혼생활의 다른기억들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종류의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그런 행복한 기억들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하지만 양키스 경기에 대한 기억은 그렇지 않았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전남편과 뉴욕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부푼다. 나는 지금도 양키스의 팬이지만, 내가 야구장에 다시 갈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삶이었다. - P203

나는 작가가 되려면 냉혹해야 한다는 제러미의 말에 대해 생각한다. 또한 내가 늘 글을 쓰고 있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며오빠나 언니, 부모님을 만나러 가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하지만 가고 싶지 않아 안 간 것이기도 했다.) 시간은 늘충분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내가 결혼생활에 안주하면 또다른책,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책은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일리노이 주 앰개시에는 가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하지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 - P204

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 라고. 이것이 그 냉혹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엄마는 그날 병원에서 내가 오빠나 언니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지금 네 인생을 봐. 너는 묵묵히 네 길을 가서………… 원하는걸 이뤘잖아." 그 말은 아마 내가 이미 냉혹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 말은 아마 진심이었겠지만, 엄마가 진짜 무슨 뜻으로한 말인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 P205

아무도 너희를 돌봐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내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어!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하지 않는다. 해서도 안 된다. 내가 아이들의 아버지를 떠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당시에는 남편만 떠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아이들을 떠난 것이기도 했고, 집을 떠난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내 것이 되었다. 혹은 남편이 아닌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되었다. 나는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사람이었고, 움직였다. - P211

그 시절에 내 딸들이 느꼈을 분노란! 잊으려고 애쓰는 순간도있지만,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이 결코 잊지 못할그것이 무엇인지가 걱정된다. - P212

그 시절에 마음이 더 여린 딸 베카가 내게 말했다. "엄마, 엄마가 소설을 쓸 때는 그 내용을 다시 쓸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와이십 년을 살았다면, 그리고 그것도 소설이라면, 그 소설은 다른사람과 절대 다시 쓸 수 없어요!"
그애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는? 그토록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애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베카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그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네 말이 맞아." - P213

또 가끔 생각하는 건, 내가 세라 페인을 옷가게에서 만났을 때그녀가 자기 이름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그녀가 아직 뉴욕에 사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뒤로 그녀는 새 책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몹시지쳐가던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야기는 하나뿐이라던 그녀의 말을 생각하지만, 나는 아직 그녀의 이야기가무엇이었는지 혹은 무엇인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가쓴 책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녀가 뭔가를 피해 비켜서 있다는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 P215

나는 요즘 혼자 집에 있을 때,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조용히소리 내어 말해본다. "엄마!" 그게 뭔지 나는 모른다 내가 내엄마를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날 두번째 비행기가 두번째 빌딩을 들이받는 것을 본 베카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인지. 내 생각엔 둘 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내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이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몰라의 이야기이자 내 대학 룸메이트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프리티 나이슬리 걸즈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엄마. 엄마!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이름은 루시 바턴이다. - P216

얼마 전에 크리시가 내 지금의 남편에 대해 말했다. "아저씨가좋아요, 엄마. 하지만 아저씨가 잠을 자다 죽고 새엄마도 죽어서엄마와 아빠가 다시 합치면 좋겠어요." 나는 아이의 정수리에 키스한 뒤 생각했다. 내가 내 아이에게 이런 짓을 했구나.
내가 내 아이들이 느끼는 상처를 아느냐고? 나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우리가 아이였을 때 품게 되는 아픔에 대해, 그 아픔이 우리를평생 따라다니며 너무 커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그런 갈망을남겨놓는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꼭 끌어안는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끌어안는다.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 P217

요즘 나는 가을에 우리의 작은 집을 둘러싼 농장에서 해가 지던 장면을 이따금 떠올린다. 어디를 봐도 지평선이 보여, 내가한 바퀴 빙 돌면 지평선도 한 바퀴 원을 그렸다. 해는 등뒤에서지고, 눈앞에 펼쳐진 하늘은 그 아름다운 변신을 멈출 수 없다는듯 은은한 분홍빛을 자아내다 슬며시 푸른 기운을 띤다. 이윽고지는 해에 가장 가까운 땅이 한 줄 오렌지색 선을 그리는 지평선을 배경으로 어두워지다 거의 컴컴해진다. 하지만 돌아서면 땅은 여전히 부드러운 형체를 희미하게 드러내며 몇 그루 나무와,
흙을 갈아엎고 간작 식물을 심은 고요한 들판을 보여주고, 하늘 - P218

은 머뭇거리다, 머뭇거리다 마침내 완전히 어두워진다. 그런 순간에는 영혼도 조용히 지켜볼 것만 같다.
모든 생은 내게 감동을 준다. - P219

기억의 자리들, 공백의 자리들

옮긴이의 말


기억은 자유의지를 가졌다. 순서를 바꾸고 덧칠을 한다. 가끔견딜 수 없는 것은 망각 속으로 보내버린다. 일부러인 듯 흐릿하게 만들어버려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의 상황을 놓고도 나와 당신의 기억은 다르다. 완성하지 않고 결론 내지 않아 영원히미완의 미결의 상태로 남겨버린다.
기억은 고집스럽다. 사건 자체는 희미해져도, 그 사건들이 남긴 감정은 고집스럽다. 예컨대 어머니가 실제로 내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는지 해주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나를 줄곧 붙들고 있는 감정은 ‘어머니가 한 번도 키스해주지 않은 것‘에서 비롯한그 결핍의 감정이다.
기억은 성장한다. 기억은 시간의 세례를 거친 나의 눈으로 시 - P223

간의 변화를 겪은 당사자들을 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그때 그런 것은 아, 그래서 그랬겠구나. 하지만 그 성장은 거의 혼자 크는 성장이라, ‘그랬겠다는 것은 나의 관점이지 우리의, 혹은 그들의 관점은 아니다.
그래서 기억은 매혹적이면서도 참 이기적이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그러저러한 이유로 ‘기억‘이라는 단어에 천착하는 편이고 ‘기억‘에 바탕을 둔 문학작품이나 영화들에 늘 끌렸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번역을 맡으면서 더 마음이 갔던 것도 이 소설이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꽤 지난 일이 되었지만, 내가 구 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 P224

첫 문장부터 이 이야기는 ‘기억‘의 조각들을 모은 것임을 선언한다. 이어지는 닷새 동안 어머니와 딸의 대화는 그 기억에서도 더 지난 과거의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하긴 우리의 현재는 찰나의 순간에 과거가 되어버리니 우리의삶은 기억 안에 기억, 그 기억 안에 또다른 기억, 그 또다른 기억안에 또다른 기억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기억, 그런불확실한 과거는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짓기 어려운 우리의 시간 안에 도사린 채 우리를 끊임없이 흔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이 다섯번째 소설은 전작들과는 달 - P224

리 일인칭 시점의 글이다. 문학작품들을 읽다보면 어떤 작가들은 삼인칭으로 출발한 뒤에야 일인칭으로 옮겨갈 수 있게 되는것 같고, 어떤 작가들(예컨대 무라카미 하루키)은 일인칭으로 출발한 뒤에야 삼인칭으로 옮겨갈 수 있게 되는 것 같은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삼인칭 시점에서 출발한 작가다.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 작품을 쓸 때 자기 마음을 "너는 지금일인칭으로 쓰고 있어. 그것도 작가로 만들어서"라고 표현했다.
‘기억‘을 가장 섬세하고 유려하게 다루는 방법, 기억에 의한 우리의 흔들림을 가장 잘 담아내는 방법은 어쩌면 일인칭 시점, 그리고 작가가 주인공일 때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 P225

그 기억의 파편들을 모으면 뭐가 될까.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크다‘는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기억의 합이 기억 그자체보다 얼마나 더 큰 것이 될 수 있는지를 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삶이 되고, 한세대, 여러 세대의 삶이 되고, 한 사회의 역사가 된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그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수증기를 모은 듯 마르지 않았으면서 흠뻑 젖지도 않은, 감정이 부각되지 않아 더더욱 아련한 느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 짧은 분량의 소설에서 다루는 이야기 전체는 그 기억들뿐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이 개입되는 공백의 자리들을 포함하여, 그리고그 각각을 잇는 선들을 아울러서 참으로 큰 것이 된다. 덧붙이면 - P225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려내는 선들이 굉장히 섬세해서 언뜻 개인적인 이야기로 읽히기 쉽지만, 그 섬세한 선들에는 역사와 변화하는 사회와 그 사회 속에서의 관계들이 무수히 잇닿아있어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보게 되는 풍경 역시 무한히 넓어진다.
이 작품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려낸 선들 중 그 출발점이자 가장 자세히 들춰지는 관계는 엄마와 딸의 관계인 것같다. 하지만 그야말로 출발점이지 전체는 아니다. 루시 바턴의 선은 아버지에게도, 거의 연락을 끊고 지냈지만 마지막 순간에 오히려 조금은 더 가까워진 오빠와 언니에게도 닿아 있다.  - P226

그렇게 한 가족의 이야기가 된다. 입원한 딸에게 안부를 전했을지조차 알 수 없는, 자신의 불안함을 끊임없이 가족들에게 풀어냈을 것으로 짐작되는 독자들이 그 마지막 임종의 순간까지 지켜보게 되는 아버지의 비중이 지면상으로는 그리 크지 않지만 더없이 무겁다. 어려서나 나이들어서나 결코 가깝다 말할 수 없는언니와 오빠의 무게 또한 마찬가지로 무겁다. 루시 바턴은 그들의 존재, 그들과 함께 보낸 과거의 시간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다섯 식구가 정말로 건강하지 않은 가족으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우리의 뿌리가 서로의 가슴을 얼마나 끈질기게 칭칭 감고 있는지 알 - P226

게 되었다. 남편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가족들을 좋아하지도않았잖아.‘ 그뒤로 나는 더더욱 두려워졌다."
한편 작가로 성공한 루시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뉴욕을 사랑해, 여긴 내 집이야. 하지만 나는 다른 도시들에도 가야 했는데, 그때는 거의 항상 겁을 먹었다. 호텔방은 외로운 장소다. 오,
제길, 거긴 외로운 장소다." 그러니 가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절대적으로 부담스러운 것이다. 절대적으로 떠나고 싶은 것이지만, 절대적으로 그리운 것이다. 루시 바턴은 책과 숙제를통해 이뤄낸 성과들을 통해) 떠날 수 있었기에 떠났지만, 떠남은달아남이 되기도 버려짐이 되기도 한다. - P227

이런 양가적인 상태. 그런 상태가 만들어내는 양가의 감정들.
떠나 있지만 떠나 있지 않은 상태(루시는 가족을 머리 위에 떠있는 구조물로 느꼈다. 속마음을 솔직히 말할 수도 말하지 않을수도 없는 상태("엄마, 내가 단편 두 편을 발표했어요‘에 이어지는 모녀의 대화). 내 욕구를, 내 감정을 드러낼 수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입원한 엄마에게서 이제 그만 돌아가달라는부탁을 받았을 때 보인 루시의 반응). 물어보지 않아 서운해하면서도 물어보지 않은 것을 친절하게 느끼는 상태(이건 때로 나조정말 그렇지 않은가. 개방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밖에 없는상태(모든 자기 노출의 글 이면에는 이런 마음이 있지 않을까). - P227

심지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이런지 저런지 잘 모르는 상태("엄마!"는 나의 외침이었을까 딸의 외침이었을까. 이런 마음의 상태들은 없어지지 않고 우리의 기억이 된다. 그리고 그런 기억의방문을 받을 때 우리는, 이를테면 옷가게에 들어가 옷을 입어보고 낯선 사람에게 말을 붙인다.
한편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보며 그에 대한 어떤 평가 혹은 판단을 내리는 것, 그것도 결국은 미완의 것, 미결의 과제라고 볼수 있다. 영원한 미완, 미결의 기억들. 제러미에 대해 우리는 루시의 세 가지 기억을 바탕으로 추리할 수 있을 뿐이며, 루시와어머니는 그런 잡지를 읽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고,  - P228

세라 페인(아마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은 "다른 사람을 완전히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절대 알 수 없을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우리가누군가를 평가한다면, 더욱이 그것이 누군가를 얕잡아보는 평가라면, 단편적인 것들에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일이 될것인가. 이 소설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그것에 대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저속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외국의 서평들에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작품들을 ‘사회적 계급‘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글이 더러 있다.
기억이 미완의 것이고, 우리가 늘 양가적인 상태에 있고, 우리 - P228

삶이 늘 흔들린다 하더라도 내가 발 디딜 자리는 있다. "하지만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 이름은 루시바턴이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분명한 한가지일 것이다.
작가가 ‘내 이름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다‘라고 선언하는모습을 잠시 상상해본다(내 이름을 넣어 나도 한번 해보았는데,
생각만 했을 때와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은 그 울림의 파급력이 상당히 다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열여섯 살 때부터 문예지에 단편을 써 보내기 시작해 스물여섯 살에 첫 단편이 실렸고,
그 이후로 글쓰기를 중단한 적이 없다. 하지만 1956년생인 그녀가 1998년에야 어렵사리 데뷔 소설 『에이미와 이저벨』을 발표할수 있었으니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고 작품으로 자신을 단단히다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많이 걸린 셈이다.  - P229

그녀도 루시 바턴처럼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특히 소설책이 꽂혀 있는 서가 근처를 서성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여름에는 바깥에 나가 놀았지만 혼자 놀았던 적이 더 많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나도 글을 쓰겠다!" 작가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를 사람들을 돕기 위한 노력으로 생각했어요. (…) 누군가의 시야를 잠시조금이라도 더 열어주려고 애쓰는 것. 물론 ‘그건 어리석은 일이야 하고 생각할 때도 더러 있지만 이 일이 세상을 도우려는 다 - P229

른 노력보다 더 어리석은 것 같지는 않아요." 작가가 만들어내는등장인물들에는 어쨌거나 작가 자신의 조각들이 조금씩 스며들게 마련인 것 같다. 어쩌면 작가가 된 루시 바턴에게도, 루시 바턴에게 ‘냉혹하라‘는 조언을 해주는 작가 세라 페인에게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조각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루시의 이야기가 이러했다면, 루시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기억으로 남았을까? 루시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앰개시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루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실제로 그들은 어떻게그 시간들을 보냈을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다음 책이 그에 관한 것이라고 하니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쉽게 마음에서떠나보내서는 안 될 것 같다. 기억처럼, 삶처럼, 모든 문학작품도 우리 안에 살아 있는 한 영원히 미완인지 모르겠다.

정연희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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