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집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0
손석춘 지음 / 들녘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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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지는 달

    1945년 5월 21일 월요일

 

  지난 열흘 동안 이현상 동지와 더불어 지리산 남쪽을 다녀왔다. 장돌뱅이로 가장한 이 동지는 해남과 강진에서 조직을 추슬렸다. 언제 이곳까지 지하활동을 조직했을까. 내심 놀라기도 했고, 희망에 가득 차오르기도 했다. 이 동지는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닥쳤다며 마음의 준비는 물론 결정적 순간에 봉기할 채비를 갖추라고 당부했다.

  이 동지의 열정적인 활동을 수행하면서 점점 더 동지가 한없이 존경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이 동지에게 매혹된 것은 단지 그의 빈틈 하나 없는 조직운동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남과 강진을 둘러보는 과정에서도 이 동지는 내게 영원과도 같은 감동의 순간들을 남겨주었다. 

  해남 달마산의 미황사에 들렀을 때다. 이 동지와 이미 면식이 있는 듯, 주지스님은 몹시 반갑게 맞았다. 달마산 정상에 올라 남해와 서해로 펼쳐진 바다를 보면서 이 동지는 아무 말 없이 그렇게 밤이 깊도록 앉아있었다. 엄숙한 자태 때문일까. 한마디도 말을 붙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나도 그 침묵을 즐겼는지 모른다.

  이곳이 백두대간의 마지막 봉우리라는 사실, 그리고 조선의 땅끝으로 이어진 바다의 넉넉한 모습, 그 바다로 해가 지며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이던 저녁노을이 마음을 아늑하게 했다.

  별들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면서 3년 전 낙산사에서 보던 밤하늘의 슬픈 추억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이 동지가 갑자기 나직한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동지, 저쪽을 보시오."

  이 동지가 바다 위에 낮게 걸려있는 달을 가리켰다. 그가 말을 이었다.

  "잘 보면 달이 조금씩 내려앉을 거요. 바다로 지는 달은 고혹적이오."

  그랬다. 미처 몰랐지만 달은 시나브로 바다를 향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바다 수면에 다다르자 저녁노을과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달빛은 햇빛과 달리 그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었다. 노란빛이 점점 주홍빛으로 변하면서 이윽고 빨개졌다. 검은 밤하늘에 붉은 달은 참으로 고혹적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붉은 달은 밤하늘로, 밤바다로 갑자기 사라졌다.

 .......(중략~)

                       

                                        손석춘의 소설 <아름다운 집(들녘 刊)> -부분 발췌

 

 

  달마산에 가고 싶었다.

  2000년 땅 끝에서 처음으로 도보 여행을 시작했을 때, 나를 내내 따라오던 산.

  그리고 시나브로 바다를 향해 뚝뚝 떨어지는 달이라니....... 바다로 지는 달  보고 싶었다.

  그리움 깊어졌다.  

 

  칠월의 지나친 비와 팔월의 지독한 더위를 견딘 들판이 한없이 펼쳐진 풍경속으로 기차는 달려간다.

  겸손하고 부드러운 색깔이다.

  가을이다. 가을들판이다. 둥싯둥싯 정겨운 남도의 들이다.

  잊었다는 듯 배롱나무도 무심히 웃어준다.

  저 꽃 지면 쌀밥먹겠지.

  꽃, 지고있다.

  꽃 지기 전에 떠나와서 다행이라고 기차 지나가는 곳마다 나무도 나도 배시시 웃는다.

 

 

  쉿~!

  블로그에 걸어놓고 왔는데 미황사에서 기다리는 쉿, 한참을 멈춰서서 쉿,

  증축을 하는 공사소리도, 장난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 소리도 쉿, 고요하다.

  너무 많은 말들과 생각속을 떠나온 모양이다.

  가끔은 마음도, 생각도, 관계들도 쉿~!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 있다.

  오래 담아두어도 눅눅해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저 뜰에 서있는 해묵은 사람을 처음인 양 문득 돌아보았다.

  오래 본다.


 

  대웅전 마당에는 무뎌진 햇살만 가득하다.

  즐비한 요사채들, 바로 옆에서 한창 증축공사를 하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 방음벽이라도 서있나,

  말랑말랑한 고요가 각을 세운 시선을 지그시 누른다.

 


 

  그런 저녁이 온다.

  바다로 지는 해를 본다.

  달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은 윤 칠월 스무하루....... 바다로 지는 달은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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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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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 -내 자신에 대해서만- 승리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경험했던 비극과 실패는 나를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에게는 환상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있다. 역사의 의지를 알 사람은 누구일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폭력을 뒤엎지 않으면 안 되는 피억압자뿐이다. 패배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사람, 일체의 새로운 세계를 최후의 전투에서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뿐이다. 억압은 고통이요, 고통은 의식이다. 의식은 운동을 의미한다. 인간 그 자체가 다시 태어날 수 있으려면 수백만이란 사람이 죽어야 하고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 객관적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유혈과 죽음의 광경, 그리고 어리석음과 실패의 광경은 더 이상 미래에 대한 나의 통찰력을 가로막지 않는다.

  인류 역사의 전통은 민주주의적이요, 이 전통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천부의 권리이다. 그러나 이 천부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한테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는 자도 있다. 물은 사람을 빠뜨려 죽이기도 하고 구해주기도 한다. 오늘날 인간사회는 고요한 마을 연못이 아니라 성난 홍수이다. 사람은 반드시 헤엄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14살 때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나는 결코 물에서 떠나본 적이 없다. 나는 몇 차례나 스스로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파괴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뿐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민중과의 계급관계를 유지하는 것. 왜냐하면 민중의 의지는 역사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민중은 깊고 어두우며 행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단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소곤거리는 소리와 침묵의 웅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개개인과 집단들은 큰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그리하여 그 때문에 큰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진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지 큰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민중들이 이 목소리를 들을 때, 그들은 손에 총을 잡는다. 마을 노파 한 사람의 긴박한 속삭임만으로도 충분하다. 진정한 지도력은 날카로운 귀와 신중한 입을 필요로 한다. 민중의 의지에 따르는 것만이 승리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중략)

  비극은 인생의 한 부분이다. 억압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한 인간의 영광이요, 굴복하는 것은 한 인간의 수치이다. 내게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제국주의전쟁 속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맹목적으로 포기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비극이다. 그것은 낭비인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억누르는 데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내게는 비극이다. 그것은 어리석음이다.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자기들이 믿고 있는 것을 위하여 싸우다 의식적으로 죽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영광이요 장렬함인 것이다. 죽음은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니다. 또한 죽음은 무익한 것도 아니요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스스로 믿고 있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싸우다 죽는 것은 행복한 죽음인 것이다. 나는 너무나 많은   인명의 낭비를 보아왔으며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마는 쓸데없는 희생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나의 경우에는 이것을 철학적으로 시인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은 늘 기억하고 있다. 혁명가들은 자기의 희생 속에서 행복하게 죽어가는 것이요, 그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슬픔이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어떠한 권리도 요구하지 않는다.

  내 청년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거의 모두가 죽었다. 민족주의자, 기독교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등등 수백 명에 이른다. 그러나 내게는 그들이 지금도 살아 있다. 그들의 무덤을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 따위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다. 전장에서, 사형장에서, 도시와 마을의 거리거리에서, 그들의 뜨거운 혁명적 선혈은 조선, 만주, 시베리아, 일본, 중국의 대지 속으로 자랑스럽게 흘러들어갔다.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짧은 꿈은 그 뼈와 함께 묻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의 마지막 저울 속에서는 그가 이루었거나 실패한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불사성(不死性)이며, 그의 영광 또는 수치인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이 객관적 사실은 바꿀 수가 없다. 그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사람이 역사라고 하는 운동 속에서 점하는 자리를 빼앗을 수가 없다. 그 무엇도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가 없다. 유일한 그의 개인적 결정이라고는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후퇴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아니면 굴복할 것인가,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파괴할 것인가, 강해질 것인가 아니면 나약해질 것인가 하는 것밖에 없다.”

 

  ‘아리랑’의 결말에 해당하는 이 부분 몇 페이지를 몇 번이고 읽으면서 한 혁명가의 웅변에 숙연해진다. 읽을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사람을 향한 신뢰가 저토록 확고하게 읽히는 문장들이 뒤에서 따라오는 어떤 걸음처럼 거칠고도 뚜벅뚜벅 집요하다. 오래토록 따라올 발자국소리다. 고개를 돌리면 확신에 차있는 결연한 그 눈빛에 마음까지 읽힐 것만 같아 허둥지둥 내 걸음은 서툴고 두렵다. 이 피둥피둥한 세월이 미안하다.

  “김산(본명 장지락)”

  왜 그를 이제야 알게 된 것일까? 그에게도, 그와 그의 동지들이 온 몸으로 살아냈던 시절의 역사에게도, 내가 그동안 배워 온 역사에게도 안타깝고 죄스럽다.

  그동안 무엇을 배운 것일까? 그동안 무엇을 읽은 것일까? 우리의 역사는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친 것인가? 먹먹하게 아프다.

  역사는 결국 사람의 역사인 것을.

  실패한 역사도 역사인 것을.

  그들을 승리자로 만들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는 대체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싶어 부끄럽다. 우리의 혁명가 한 사람도 제대로 바로보지 못했으면서 로마인 이야기에 코를 박고 감탄해온 내 얄팍한 앎이 두고두고 부끄러운 것이다.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짧은 꿈은 그 뼈와 함께 묻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의 마지막 저울 속에서는 그가 이루었거나 실패한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불사성(不死性)이며, 그의 영광 또는 수치인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이 객관적 사실은 바꿀 수가 없다. 그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사람이 역사라고 하는 운동 속에서 점하는 자리를 빼앗을 수가 없다. 그 무엇도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가 없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청년이 고뇌와 투쟁을 통해 조선인 혁명가로 거듭나는 삶을 님 웨일즈의 기록으로 만나는 그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혁명가의 모습을 지금 이 시대의 어떤 명망 있는 지도자에게서도 볼 수가 없다는 애석함에 그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인다.

  사람을 향한 뜨거운 신뢰와 애정, 끊임없는 독서와 성찰, 빠른 결단과 행동, 톨스토이를 향한 애정, 잭 런던의 평가, 업튼 싱클레어에 대한 견해, 등등....... 한 마디로 으악! 이다. 생존이 곧 투쟁일 아비규환의 전쟁터에서, 그것도 존재의미도 미미해질 이국의 땅에서, 이 혁명가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한결같은 자세로 생을 꿋꿋이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리라.

  아리랑을 읽는 내내 그 후 시대를 산 위화의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내용들이 마구 떠다녔다. 열 개의 단어로 본 중국인의 초상이, 마오의 사상이, 문화 대혁명 시절의 인민들의 삶이, 또한 루쉰의 글들도. 한편으로는 그 당시의 동아시아의 역사를 한 조선인 혁명가의 시선으로 투쟁의 기록으로 읽어나가는 일은 자부심이었다가 부끄러움이었다가 안타까움이었다가 분노였다가 다시 무기력함까지....... 결국은 우리 내면의 역사를 바라보는 일이 되었다. 그는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생각들을 행동으로 실천했는데, 우리는 거기서 한발도 더 나아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두워진다.

  그래도, 그래도 그런 혁명가를 가진 우리의 역사를, 우리에게도 이념이나 권력에 굴복하지 않은 멋진 ‘체’가 있음이 자랑스럽다.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 -내 자신에 대해서만- 승리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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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브레드 - 집에서 쉽게 만드는 영양만점 우리밀 통밀빵 54가지 natural Life 4
이언화 지음 / 다빈치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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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브레드 (이언화)]는 집에서 쉽게 만드는 우리밀 통밀빵 54가지란 부제가 붙은 책이 있습니다. 빵을 굽지도 못하고 그러려고 생각지도 않지만 배고픈 새벽, 가끔씩 아무 페이지나 열어봅니다. 먹지 못하는 책 속의 빵이 흐뭇합니다. 빵을 만드는 그녀를 알 듯도 모를 듯도 해서 더 평온해지고 촉촉해지는 그런 빵입니다. 이웃인 [월인정원]의 책입니다. 지리산과 섬진강의 햇살과 바람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담긴 그녀의 [힐링 브레드]는 나누고 싶고 먹고 싶은 우리 밀로 만든 빵 같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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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
정지아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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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정지아의 [봄빛]을 읽고서 [빨치산의 딸1,2], [행복]을 연거푸 읽었습니다. [봄빛] 속에서도 그랬지만 단편 [무녜기]를 읽고, 해를 바라보는 시선을 이 작가가 다 써버려서 누구도 영영 쓸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빛에 관한 그녀의 묘사는 투명하게 건너온 빛이 마음까지 투시할 듯 강렬하고 매혹적이었습니다. 스토리를 전개해가는 탄탄함속에 먼 시공을 질러온 한 줄기 빛 같은 삶이 스며있어 좋았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다음 작품들도 책꽂이에 쭈욱 꽂히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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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부터 읽으려 했던 김훈의 [풍경과 상처]를 구했다. 200쪽 얇은 분량은 단숨에 읽어치울 것 같았지만 미려한 김훈의 문장은 언제나 나를 숨 막히게 한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언어는 마치 쑥과 마늘의 동굴 속에 들어앉은 짐승의 울음처럼 아득히 우원(迂遠) 하여 세계의 계면(界面) 으로 떠오르지 못하고, 이 세계가 그 우원한 언어의 외곽 너머로 펼쳐져 있는 모습이 내 생애의 불우(不遇) 의 풍경이다.
  나는 모든 일출(日出) 과 일몰 (日沒) 앞에서 외로웠고 뼈마디가 쑤셨다. 나는 시간 속에서 내 자신의 존재를 비벼서 확인해 낼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몽롱한 언어들이 세계를 끌어들여 내 속으로 밀어 넣어주기를 바랬다.‘

책의 서문에서 여기까지를 읽고 책을 덮고 말았다. 내게 풍경이 어떤 것인지 준비하지 않고는 책을 계속 읽는다는 것이 무의미했다. 현란한 수사 앞에서 내가 가진 문장의 한계는 여실했고, 거칠 것 없이 뿜어져 나오는 그의 어투에 휘둘려서 나는 탈진하듯 소진해가곤 하기 때문이다.

  책방에 나가니 여러 종류의 신간들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여전히 여행서들 앞에서 오래 시간을 끈다.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여행] 앞에서 망설이고, 전경린의 [그리고 삶은 나의 것이 되었다] 앞에서 책장을 펄럭인다. 신현림의 [굿모닝 레터]를 반쯤 읽고 [길에서 시와 소설을 만나다] 라는 임동헌의 책 속에서 사진들을 오래 들여다본다. 나에게 오랫동안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생각하게 해 주던 박이문의 산문집 [길]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결국 마지막에 내가 선택한 책은 정끝별 시인의 [여운] 이었다. 내 마음에 길게 여운을 남겨줄 것 같은 예감에 젖어서 돌아온 그 걸음에 읽기 시작하여 며칠 동안 틈만 나면 책 속에 코를 박았다. 집에 가서 읽으려던 계획은 컴때문에 번번히 깨지고 말지만 돌아올 땐 어김없이 가방에 챙겨 넣고 다니기만 했다. 일하는 짬짬히 읽는 책은 갈증만 더 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저자의 시선을 따라 여행을 하는 산문집은 그런 조급을 누를 수 가있다. 일하는 동안 앞에 읽은 글속풍경을 상상으로 고스란히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여행을 하면서 쓰는 시‘가 있는가하면 ’여행을 망각하면서 쓰는 시’ 가 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읽는 시’가 있는가 하면 ‘여행을 하게 만드는 시’가 있습니다. 저는 이 두 문장중 후자 쪽에 자리 잡고 있는 시들을 좋아합니다. 시인 스스로가 여행을 망각하면서 쓴 시, 그리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여행을 하게 만드는 시들 말입니다. 여행을 망각하면서 쓰는 시는 내면에 각인된 단 하나의 풍경을 위해 배경으로서의 풍광을 지워버리는 시입니다. 여행을 하게 만드는 시는 단 하나의 풍경에 시인의 전 존재가 내던져지고 녹아드는 시입니다.....바람풍과 햇빛경이 어우러진 ‘풍경’ 그 풍경이 바로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서문이 시작된 책은 소제목 하나로도 전체적인 느낌을 미리 맛보게 했다.
  ’눈물처럼 후두둑 지고말 선운사 동백꽃‘ ’저무는 봄날, 등명에 서다.‘ ’생생한 우포늪의 시간들‘ ’운주사 비전秘傳 속에 비전vision이 있었네‘ ’한 번은 있을 법한 사랑의 남해 금산‘ ’격렬비열도!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사랑과 기다림으로 이어진 부석사 가는 길‘ 들이 치장하지 않은 사진들과 시들 속에 풍경이 살아서 내게로 왔다. 기행으로서의 단순한 풍광이 아니라 시 로서 풍경들이 잠겨오는 느낌은 일몰이 나를 서서히 채워갈 때를 바라보는 그런 경이였다.

  [여운]을 읽으면서 비로소 [풍경과 상처] 속의 글들을 바로 할 수 있었다. 두 책을 번갈아 가면서 소제목이 주는 이미지의 다름과 소설가와 시인의 다름을 알았고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보는 다른 시선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소 제목의 느낌부터 단호하게 다르면서도 닮아있었다.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 -전군가도’ ‘돌 속의 사랑 -남해 금산’ ‘악기의 숲 무기의 숲 -담양 수북’ ’오줌통 속의 형이상학 -질마재‘ ‘억새 우거진 보살의 나라 -운주사’
미당의 질마재 신화가 시인의 눈에는 눈물처럼 지는 동백으로 담겨 왔다면 소설가의 눈에는 오줌통속에서도 공동체를 꿈꾸는 모두 선인이 되는 세상을 그려냈다는 걸알 수 있었다. 내가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까지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두 사람 다 남해 금산을 얘기하는데 이성복 시인의 남해금산에서, 사랑의 돌 속 여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하! 풍경은 그런 것이다. 먼저 봤든 나중에 봤든 탁월한 시선으로 그 풍경을 노래한 그 언어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여태까지 나는 나만 그런 줄 알고 지독한 열등에 시달려왔다. 두 책 출간 사이에 놓여있는 10년의 시간은 풍경에 중요하지 않다. 책 속의 풍경은 책 속에서만 존재할 뿐, 실제로 내가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여행 산문이 여행안내기와 다른 점은 거기에 있었다. 작가 내면의 풍경이고 그것을 건너오는 상처의 여운일 뿐. 풍경은 내 것이 아니었다.

  ‘여운’을 덮으면서 나의 여행 산문집에 대한 편력은 어느 정도는 마감을 고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책방엘 가면 그 코너 앞에서 오래 서있게 되겠지만 내 안에서 어떤 한 시기가 지나가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은 강력한 것이어서 ‘생생한 우포늪’으로 당장 달려가서 노랑어리연꽃위로 해가 저무는 광경을 보고 싶다. 본적이 없어서 도대체가 가늠도 안 되는 광활한 늪지의 물비린내가 코를 간지럽힌다. 역시 상상으로도 떠올라지지 않는 가시연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문득문득 환각처럼 보인다. 이름도 격렬한 저 ‘격렬비열도’로 달려가 장석남 시인처럼 라라크래카를 먹으며 드뷔시를 들으면서 파도를 바라보고 싶어 내가 파도가 되어 밤이면 부딪쳐 섬에 점점 가까이 간다.
  풍경과 상처를 읽으면서 부터는 ‘가을 섬진강’으로 달려가고 싶은 강열한 유혹 속에 있다. 비가 내리면 비 내리는 들판들이 걱정되고 어쩌다 해 저무는 풍경을 만날 때면 도심의 콘크리트 건물대신 억새가 나붓대는 섬진강에 현란한 산들이 담겨진다.
  하지만 몸살로 뒤척인다고 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글 한 줄로, 사진 한 컷으로, 지도 한 장으로, 나는 그 곳에 자주 더 자주 가고 어느 새 그 속에 담겨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래 되어 빛바랜 사진처럼 퇴색될 때 풍경은 비로소 내 것이 되고 상처는 나만의 것이 될 것이다. 천상병의 풍경을 남겨두고 ‘풍경과 상처' 를 책꽂이에 꽂는다. 미완 (未完)인 채로 남겨 둔 책은 거친 들판에 엎드린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꽃으로 피어나는 날까지 미욱한 내 문장들을 지켜보리라. 나를 비추는 거울이되어. 

 

                                                                 2003. 9. 17.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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