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름다운 집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0
손석춘 지음 / 들녘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바다로 지는 달
1945년 5월 21일 월요일
지난 열흘 동안 이현상 동지와 더불어 지리산 남쪽을 다녀왔다. 장돌뱅이로 가장한 이 동지는 해남과 강진에서 조직을 추슬렸다. 언제 이곳까지 지하활동을 조직했을까. 내심 놀라기도 했고, 희망에 가득 차오르기도 했다. 이 동지는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닥쳤다며 마음의 준비는 물론 결정적 순간에 봉기할 채비를 갖추라고 당부했다.
이 동지의 열정적인 활동을 수행하면서 점점 더 동지가 한없이 존경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이 동지에게 매혹된 것은 단지 그의 빈틈 하나 없는 조직운동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남과 강진을 둘러보는 과정에서도 이 동지는 내게 영원과도 같은 감동의 순간들을 남겨주었다.
해남 달마산의 미황사에 들렀을 때다. 이 동지와 이미 면식이 있는 듯, 주지스님은 몹시 반갑게 맞았다. 달마산 정상에 올라 남해와 서해로 펼쳐진 바다를 보면서 이 동지는 아무 말 없이 그렇게 밤이 깊도록 앉아있었다. 엄숙한 자태 때문일까. 한마디도 말을 붙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나도 그 침묵을 즐겼는지 모른다.
이곳이 백두대간의 마지막 봉우리라는 사실, 그리고 조선의 땅끝으로 이어진 바다의 넉넉한 모습, 그 바다로 해가 지며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이던 저녁노을이 마음을 아늑하게 했다.
별들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면서 3년 전 낙산사에서 보던 밤하늘의 슬픈 추억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이 동지가 갑자기 나직한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동지, 저쪽을 보시오."
이 동지가 바다 위에 낮게 걸려있는 달을 가리켰다. 그가 말을 이었다.
"잘 보면 달이 조금씩 내려앉을 거요. 바다로 지는 달은 고혹적이오."
그랬다. 미처 몰랐지만 달은 시나브로 바다를 향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바다 수면에 다다르자 저녁노을과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달빛은 햇빛과 달리 그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었다. 노란빛이 점점 주홍빛으로 변하면서 이윽고 빨개졌다. 검은 밤하늘에 붉은 달은 참으로 고혹적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붉은 달은 밤하늘로, 밤바다로 갑자기 사라졌다.
.......(중략~)
손석춘의 소설 <아름다운 집(들녘 刊)> -부분 발췌
달마산에 가고 싶었다.
2000년 땅 끝에서 처음으로 도보 여행을 시작했을 때, 나를 내내 따라오던 산.
그리고 시나브로 바다를 향해 뚝뚝 떨어지는 달이라니....... 바다로 지는 달 보고 싶었다.
그리움 깊어졌다.
칠월의 지나친 비와 팔월의 지독한 더위를 견딘 들판이 한없이 펼쳐진 풍경속으로 기차는 달려간다.
겸손하고 부드러운 색깔이다.
가을이다. 가을들판이다. 둥싯둥싯 정겨운 남도의 들이다.
잊었다는 듯 배롱나무도 무심히 웃어준다.
저 꽃 지면 쌀밥먹겠지.
꽃, 지고있다.
꽃 지기 전에 떠나와서 다행이라고 기차 지나가는 곳마다 나무도 나도 배시시 웃는다.
쉿~!
블로그에 걸어놓고 왔는데 미황사에서 기다리는 쉿, 한참을 멈춰서서 쉿,
증축을 하는 공사소리도, 장난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 소리도 쉿, 고요하다.
너무 많은 말들과 생각속을 떠나온 모양이다.
가끔은 마음도, 생각도, 관계들도 쉿~!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 있다.
오래 담아두어도 눅눅해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저 뜰에 서있는 해묵은 사람을 처음인 양 문득 돌아보았다.
오래 본다.
대웅전 마당에는 무뎌진 햇살만 가득하다.
즐비한 요사채들, 바로 옆에서 한창 증축공사를 하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 방음벽이라도 서있나,
말랑말랑한 고요가 각을 세운 시선을 지그시 누른다.
그런 저녁이 온다.
바다로 지는 해를 본다.
달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은 윤 칠월 스무하루....... 바다로 지는 달은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