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읽으려 했던 김훈의 [풍경과 상처]를 구했다. 200쪽 얇은 분량은 단숨에 읽어치울 것 같았지만 미려한 김훈의 문장은 언제나 나를 숨 막히게 한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언어는 마치 쑥과 마늘의 동굴 속에 들어앉은 짐승의 울음처럼 아득히 우원(迂遠) 하여 세계의 계면(界面) 으로 떠오르지 못하고, 이 세계가 그 우원한 언어의 외곽 너머로 펼쳐져 있는 모습이 내 생애의 불우(不遇) 의 풍경이다.
  나는 모든 일출(日出) 과 일몰 (日沒) 앞에서 외로웠고 뼈마디가 쑤셨다. 나는 시간 속에서 내 자신의 존재를 비벼서 확인해 낼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몽롱한 언어들이 세계를 끌어들여 내 속으로 밀어 넣어주기를 바랬다.‘

책의 서문에서 여기까지를 읽고 책을 덮고 말았다. 내게 풍경이 어떤 것인지 준비하지 않고는 책을 계속 읽는다는 것이 무의미했다. 현란한 수사 앞에서 내가 가진 문장의 한계는 여실했고, 거칠 것 없이 뿜어져 나오는 그의 어투에 휘둘려서 나는 탈진하듯 소진해가곤 하기 때문이다.

  책방에 나가니 여러 종류의 신간들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여전히 여행서들 앞에서 오래 시간을 끈다.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여행] 앞에서 망설이고, 전경린의 [그리고 삶은 나의 것이 되었다] 앞에서 책장을 펄럭인다. 신현림의 [굿모닝 레터]를 반쯤 읽고 [길에서 시와 소설을 만나다] 라는 임동헌의 책 속에서 사진들을 오래 들여다본다. 나에게 오랫동안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생각하게 해 주던 박이문의 산문집 [길]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결국 마지막에 내가 선택한 책은 정끝별 시인의 [여운] 이었다. 내 마음에 길게 여운을 남겨줄 것 같은 예감에 젖어서 돌아온 그 걸음에 읽기 시작하여 며칠 동안 틈만 나면 책 속에 코를 박았다. 집에 가서 읽으려던 계획은 컴때문에 번번히 깨지고 말지만 돌아올 땐 어김없이 가방에 챙겨 넣고 다니기만 했다. 일하는 짬짬히 읽는 책은 갈증만 더 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저자의 시선을 따라 여행을 하는 산문집은 그런 조급을 누를 수 가있다. 일하는 동안 앞에 읽은 글속풍경을 상상으로 고스란히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여행을 하면서 쓰는 시‘가 있는가하면 ’여행을 망각하면서 쓰는 시’ 가 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읽는 시’가 있는가 하면 ‘여행을 하게 만드는 시’가 있습니다. 저는 이 두 문장중 후자 쪽에 자리 잡고 있는 시들을 좋아합니다. 시인 스스로가 여행을 망각하면서 쓴 시, 그리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여행을 하게 만드는 시들 말입니다. 여행을 망각하면서 쓰는 시는 내면에 각인된 단 하나의 풍경을 위해 배경으로서의 풍광을 지워버리는 시입니다. 여행을 하게 만드는 시는 단 하나의 풍경에 시인의 전 존재가 내던져지고 녹아드는 시입니다.....바람풍과 햇빛경이 어우러진 ‘풍경’ 그 풍경이 바로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서문이 시작된 책은 소제목 하나로도 전체적인 느낌을 미리 맛보게 했다.
  ’눈물처럼 후두둑 지고말 선운사 동백꽃‘ ’저무는 봄날, 등명에 서다.‘ ’생생한 우포늪의 시간들‘ ’운주사 비전秘傳 속에 비전vision이 있었네‘ ’한 번은 있을 법한 사랑의 남해 금산‘ ’격렬비열도!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사랑과 기다림으로 이어진 부석사 가는 길‘ 들이 치장하지 않은 사진들과 시들 속에 풍경이 살아서 내게로 왔다. 기행으로서의 단순한 풍광이 아니라 시 로서 풍경들이 잠겨오는 느낌은 일몰이 나를 서서히 채워갈 때를 바라보는 그런 경이였다.

  [여운]을 읽으면서 비로소 [풍경과 상처] 속의 글들을 바로 할 수 있었다. 두 책을 번갈아 가면서 소제목이 주는 이미지의 다름과 소설가와 시인의 다름을 알았고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보는 다른 시선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소 제목의 느낌부터 단호하게 다르면서도 닮아있었다.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 -전군가도’ ‘돌 속의 사랑 -남해 금산’ ‘악기의 숲 무기의 숲 -담양 수북’ ’오줌통 속의 형이상학 -질마재‘ ‘억새 우거진 보살의 나라 -운주사’
미당의 질마재 신화가 시인의 눈에는 눈물처럼 지는 동백으로 담겨 왔다면 소설가의 눈에는 오줌통속에서도 공동체를 꿈꾸는 모두 선인이 되는 세상을 그려냈다는 걸알 수 있었다. 내가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까지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두 사람 다 남해 금산을 얘기하는데 이성복 시인의 남해금산에서, 사랑의 돌 속 여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하! 풍경은 그런 것이다. 먼저 봤든 나중에 봤든 탁월한 시선으로 그 풍경을 노래한 그 언어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여태까지 나는 나만 그런 줄 알고 지독한 열등에 시달려왔다. 두 책 출간 사이에 놓여있는 10년의 시간은 풍경에 중요하지 않다. 책 속의 풍경은 책 속에서만 존재할 뿐, 실제로 내가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여행 산문이 여행안내기와 다른 점은 거기에 있었다. 작가 내면의 풍경이고 그것을 건너오는 상처의 여운일 뿐. 풍경은 내 것이 아니었다.

  ‘여운’을 덮으면서 나의 여행 산문집에 대한 편력은 어느 정도는 마감을 고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책방엘 가면 그 코너 앞에서 오래 서있게 되겠지만 내 안에서 어떤 한 시기가 지나가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은 강력한 것이어서 ‘생생한 우포늪’으로 당장 달려가서 노랑어리연꽃위로 해가 저무는 광경을 보고 싶다. 본적이 없어서 도대체가 가늠도 안 되는 광활한 늪지의 물비린내가 코를 간지럽힌다. 역시 상상으로도 떠올라지지 않는 가시연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문득문득 환각처럼 보인다. 이름도 격렬한 저 ‘격렬비열도’로 달려가 장석남 시인처럼 라라크래카를 먹으며 드뷔시를 들으면서 파도를 바라보고 싶어 내가 파도가 되어 밤이면 부딪쳐 섬에 점점 가까이 간다.
  풍경과 상처를 읽으면서 부터는 ‘가을 섬진강’으로 달려가고 싶은 강열한 유혹 속에 있다. 비가 내리면 비 내리는 들판들이 걱정되고 어쩌다 해 저무는 풍경을 만날 때면 도심의 콘크리트 건물대신 억새가 나붓대는 섬진강에 현란한 산들이 담겨진다.
  하지만 몸살로 뒤척인다고 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글 한 줄로, 사진 한 컷으로, 지도 한 장으로, 나는 그 곳에 자주 더 자주 가고 어느 새 그 속에 담겨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래 되어 빛바랜 사진처럼 퇴색될 때 풍경은 비로소 내 것이 되고 상처는 나만의 것이 될 것이다. 천상병의 풍경을 남겨두고 ‘풍경과 상처' 를 책꽂이에 꽂는다. 미완 (未完)인 채로 남겨 둔 책은 거친 들판에 엎드린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꽃으로 피어나는 날까지 미욱한 내 문장들을 지켜보리라. 나를 비추는 거울이되어. 

 

                                                                 2003. 9. 17.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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