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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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 -내 자신에 대해서만- 승리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경험했던 비극과 실패는 나를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에게는 환상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있다. 역사의 의지를 알 사람은 누구일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폭력을 뒤엎지 않으면 안 되는 피억압자뿐이다. 패배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사람, 일체의 새로운 세계를 최후의 전투에서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뿐이다. 억압은 고통이요, 고통은 의식이다. 의식은 운동을 의미한다. 인간 그 자체가 다시 태어날 수 있으려면 수백만이란 사람이 죽어야 하고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 객관적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유혈과 죽음의 광경, 그리고 어리석음과 실패의 광경은 더 이상 미래에 대한 나의 통찰력을 가로막지 않는다.

  인류 역사의 전통은 민주주의적이요, 이 전통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천부의 권리이다. 그러나 이 천부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한테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는 자도 있다. 물은 사람을 빠뜨려 죽이기도 하고 구해주기도 한다. 오늘날 인간사회는 고요한 마을 연못이 아니라 성난 홍수이다. 사람은 반드시 헤엄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14살 때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나는 결코 물에서 떠나본 적이 없다. 나는 몇 차례나 스스로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파괴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뿐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민중과의 계급관계를 유지하는 것. 왜냐하면 민중의 의지는 역사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민중은 깊고 어두우며 행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단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소곤거리는 소리와 침묵의 웅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개개인과 집단들은 큰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그리하여 그 때문에 큰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진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지 큰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민중들이 이 목소리를 들을 때, 그들은 손에 총을 잡는다. 마을 노파 한 사람의 긴박한 속삭임만으로도 충분하다. 진정한 지도력은 날카로운 귀와 신중한 입을 필요로 한다. 민중의 의지에 따르는 것만이 승리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중략)

  비극은 인생의 한 부분이다. 억압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한 인간의 영광이요, 굴복하는 것은 한 인간의 수치이다. 내게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제국주의전쟁 속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맹목적으로 포기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비극이다. 그것은 낭비인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억누르는 데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내게는 비극이다. 그것은 어리석음이다.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자기들이 믿고 있는 것을 위하여 싸우다 의식적으로 죽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영광이요 장렬함인 것이다. 죽음은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니다. 또한 죽음은 무익한 것도 아니요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스스로 믿고 있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싸우다 죽는 것은 행복한 죽음인 것이다. 나는 너무나 많은   인명의 낭비를 보아왔으며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마는 쓸데없는 희생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나의 경우에는 이것을 철학적으로 시인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은 늘 기억하고 있다. 혁명가들은 자기의 희생 속에서 행복하게 죽어가는 것이요, 그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슬픔이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어떠한 권리도 요구하지 않는다.

  내 청년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거의 모두가 죽었다. 민족주의자, 기독교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등등 수백 명에 이른다. 그러나 내게는 그들이 지금도 살아 있다. 그들의 무덤을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 따위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다. 전장에서, 사형장에서, 도시와 마을의 거리거리에서, 그들의 뜨거운 혁명적 선혈은 조선, 만주, 시베리아, 일본, 중국의 대지 속으로 자랑스럽게 흘러들어갔다.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짧은 꿈은 그 뼈와 함께 묻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의 마지막 저울 속에서는 그가 이루었거나 실패한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불사성(不死性)이며, 그의 영광 또는 수치인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이 객관적 사실은 바꿀 수가 없다. 그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사람이 역사라고 하는 운동 속에서 점하는 자리를 빼앗을 수가 없다. 그 무엇도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가 없다. 유일한 그의 개인적 결정이라고는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후퇴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아니면 굴복할 것인가,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파괴할 것인가, 강해질 것인가 아니면 나약해질 것인가 하는 것밖에 없다.”

 

  ‘아리랑’의 결말에 해당하는 이 부분 몇 페이지를 몇 번이고 읽으면서 한 혁명가의 웅변에 숙연해진다. 읽을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사람을 향한 신뢰가 저토록 확고하게 읽히는 문장들이 뒤에서 따라오는 어떤 걸음처럼 거칠고도 뚜벅뚜벅 집요하다. 오래토록 따라올 발자국소리다. 고개를 돌리면 확신에 차있는 결연한 그 눈빛에 마음까지 읽힐 것만 같아 허둥지둥 내 걸음은 서툴고 두렵다. 이 피둥피둥한 세월이 미안하다.

  “김산(본명 장지락)”

  왜 그를 이제야 알게 된 것일까? 그에게도, 그와 그의 동지들이 온 몸으로 살아냈던 시절의 역사에게도, 내가 그동안 배워 온 역사에게도 안타깝고 죄스럽다.

  그동안 무엇을 배운 것일까? 그동안 무엇을 읽은 것일까? 우리의 역사는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친 것인가? 먹먹하게 아프다.

  역사는 결국 사람의 역사인 것을.

  실패한 역사도 역사인 것을.

  그들을 승리자로 만들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는 대체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싶어 부끄럽다. 우리의 혁명가 한 사람도 제대로 바로보지 못했으면서 로마인 이야기에 코를 박고 감탄해온 내 얄팍한 앎이 두고두고 부끄러운 것이다.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짧은 꿈은 그 뼈와 함께 묻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의 마지막 저울 속에서는 그가 이루었거나 실패한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불사성(不死性)이며, 그의 영광 또는 수치인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이 객관적 사실은 바꿀 수가 없다. 그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사람이 역사라고 하는 운동 속에서 점하는 자리를 빼앗을 수가 없다. 그 무엇도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가 없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청년이 고뇌와 투쟁을 통해 조선인 혁명가로 거듭나는 삶을 님 웨일즈의 기록으로 만나는 그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혁명가의 모습을 지금 이 시대의 어떤 명망 있는 지도자에게서도 볼 수가 없다는 애석함에 그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인다.

  사람을 향한 뜨거운 신뢰와 애정, 끊임없는 독서와 성찰, 빠른 결단과 행동, 톨스토이를 향한 애정, 잭 런던의 평가, 업튼 싱클레어에 대한 견해, 등등....... 한 마디로 으악! 이다. 생존이 곧 투쟁일 아비규환의 전쟁터에서, 그것도 존재의미도 미미해질 이국의 땅에서, 이 혁명가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한결같은 자세로 생을 꿋꿋이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리라.

  아리랑을 읽는 내내 그 후 시대를 산 위화의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내용들이 마구 떠다녔다. 열 개의 단어로 본 중국인의 초상이, 마오의 사상이, 문화 대혁명 시절의 인민들의 삶이, 또한 루쉰의 글들도. 한편으로는 그 당시의 동아시아의 역사를 한 조선인 혁명가의 시선으로 투쟁의 기록으로 읽어나가는 일은 자부심이었다가 부끄러움이었다가 안타까움이었다가 분노였다가 다시 무기력함까지....... 결국은 우리 내면의 역사를 바라보는 일이 되었다. 그는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생각들을 행동으로 실천했는데, 우리는 거기서 한발도 더 나아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두워진다.

  그래도, 그래도 그런 혁명가를 가진 우리의 역사를, 우리에게도 이념이나 권력에 굴복하지 않은 멋진 ‘체’가 있음이 자랑스럽다.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 -내 자신에 대해서만- 승리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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